기호일보와 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이 공동기획해 2007년 6월부터 매주 화요일 게재하는 〈인천역사산책〉시리즈는 그동안 집적된 인천 지역사 자료를 중심으로 '인천의 역사와 문화'를 인천시민들이 보다 이해하기 쉽고 알기 편하게 각 시대별, 토픽(Topic)별로 정리한 것이다.
이러한 기획의 의미는 무엇보다 인천사의 대중화에 바탕을 둔 것이다. 또한 역사가 주는 무겁고 딱딱한 이미지를 벗어나 인천시민들이 한층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서술함으로써 내 고장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증폭되어 인천사랑으로 발전될 것을 기대한다.
'개국(開國)과 왕도(王都)의 고장, 인천'에서부터 '인천역사의 쟁점과 과제'에 이르기까지 역사가 흐르는 문화도시 인천의 진면목을 알 수 있는 주제를 설정했다. 여기 집필진은 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 강덕우·강옥엽 역사전공 전문위원을 비롯해 교수, 박물관 학예연구사, 향토연구자 등 총 13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집필진은 매회 게재할 때마다 개별적으로 소개할 예정이다. 〈편집자 주〉 | |
※ 집필진 소개(가나다 순) ▶강덕우(역사자료관 전문위원, 역사전공 문학박사) ▶강옥엽(역사자료관 전문위원, 역사전공 문학박사) ▶견수찬(인하대 박물관 학예사, 역사전공 박사과정) ▶김상렬(송암미술관 학예사, 역사전공 문학석사) ▶남달우(인하대 사학과 강사, 역사전공 문학박사) ▶문상범(인천고 교사, 민속전공 문학석사) ▶배성수(시립박물관 학예사, 역사전공 박사과정) ▶손장원(인천재능대 교수, 건축전공 공학박사) ▶이영태(인하대 국문과 강사, 국문학전공 문학박사) ▶이현주(국가보훈처 연구관, 역사전공 문학박사) ▶이희인(시립박물관 학예사, 고고학전공 박사과정) ▶임학성(고려대 연구교수, 역사전공 문학박사) ▶채영국(국민대 연구교수, 역사전공 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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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강옥엽 (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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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추홀의 탄생
인천은 우리 민족의 역사가 동틀 무렵, 이미 한반도 서해안의 중심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강화도를 비롯한 인천지역 곳곳에서 구석기를 사용하던 사람들이 살기 시작하였고, 이들의 사회?문화적 유산은 신석기?청동기시대를 거치는 동안 날로 새롭게 축적?확장되어 기원 전 1세기 경에는 비류백제의 도읍이었던?미추홀(彌鄒忽)?을 건설케 하는 기반을 이루고 있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강화 고인돌 무리를 비롯하여 인천지역 여러 곳에서 발견되는 고인돌들은 이를 말하고 있다. 단군(檀君)의 유향(遺香)이 강화도 곳곳에 전하고 있는 것도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한강 중류에서 백제(온조계)가 세력을 떨치고, 대동강 유역에 고구려가 자리하게 되자 인천지역은 점차 그 독자적 세력을 잃어 갔다. 이들 두 세력의 신장에 밀려 더 이상 서해안지역의 중심세력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끝내 백제의 평범한 군?현으로, 이어서 고구려의 군?현으로 편입되어 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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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성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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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백제의 지배 하에서 인천은 대외교류의 창구로 기능하는 경험을 처음 갖게 되었다. 고구려와는 달리 해상으로 중국과 교류할 수밖에 없었던 백제가 그 수도를 충청도 웅진(공주)으로 옮길 때까지 100여 년 동안 능허대(凌虛臺 ; 연수구 옥련동)를 항구로 하여 중국과의 교통을 취한 것이었다. 그러나 상호 왕래가 빈번하지 못했던 탓인지, 이러한 기능이 인천지역에 미친 영향은 거의 없었다. 기록으로나 전설로나 그 어떤 변화의 모습을 살필 만한 자료가 전하고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이 시기의 지방행정 편제로 보아도 그에 따른 특별한 배려나 조치가 나타나지 않는다.
대동강과 원산만을 연결하는 지역까지 그 영토를 넓힌 통일신라는 중국과의 해상교통의 거점을 남양만(南陽灣)으로 하였다. 그리고 인천지역에는 군진[軍鎭 ; 혈구진(穴口鎭)]을 설치하여 외침의 방어와 함께 해상교통의 안전을 기하는 군사기지로 삼았다. 고구려의 지배 하에서 다시 평범한 농?어촌사회로 돌아갔던 인천지역은 이번에는 군사적 요충으로 부상되는 변화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 칠대 어향(七代御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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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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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지역이 경험했던 이런 기능들은 대외관계에서 매우 개방적이었던 고려왕조가 개성에 도읍하면서 더욱 확대?촉진되었다. 일찍이 해로를 통한 대외무역에서 뛰어난 활동을 보였던 고려 왕실은 개성에 이르는 수로(예성강) 입구에 위치한 강화?교동?자연도(영종도) 등을 중심으로 대외교통의 거점을 개발?정비하는 한편, 이를 군사적 경제적으로 지원하면서 수도 개성의 남방지역을 방어할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를 부평[수주(樹州)]에 설치하였다. 안남도호부에는 인천[소성현(邵城縣)]과 시흥?양천?통진?김포 등이 예속되어 있었다. 이제 인천지역사회가?꼬레아?로 서방세계에까지 알려지는 고려의 국제교류의 관문으로 정립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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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능허대옛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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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은 고려왕조에 걸쳐 더욱 번성하여 갔다. 먼저 인주 이씨의 왕실과의 혼인으로 경원군(慶源郡; 숙종 때)이 되고, 이어 다시 인주(仁州 ; 인종 때)로 그 위상을 높여 갔으며, 고려 말에는?칠대 어향(七代御鄕)?이라 하여 경원부(慶源府 ; 1390)로까지 격상되었다. 그리고 부평도 계양도호부(桂陽都護府)에서 길주목(吉州牧; 1308)으로 승격되었다가 부평부(富平府 ; 1310)로 고쳐졌고, 강화는 몽골(蒙古)의 침입 때(1232) 40년 가까이 피난수도[강도(江都)]로 자리하면서 대몽항쟁의 중심을 이루어 그 위상이 극에 달하였다. 고려가 몽골의 지배 아래 놓이면서, 또 조선왕조가 개창되면서(1392) 강화도에 이룩하였던 모든 문물?시설과 경원부의 위용이 흔적조차 찾기 어렵게 되고는 말았지만, 고려시대 인천은 지역적 역할이나 정치적 위상에서 명실공히 수도 개성에 다음가는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 왕실의 보장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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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궁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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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왕조에 이은 조선은 유교지치주의(儒敎至治主義)를 내걸고 대내적으로는 자급자족적인 토지경제와 유교적인 교화에 힘쓰고, 대외적으로는 중국 명나라와 같이 해금책(海禁策), 곧 쇄국정책을 폈다. 따라서 황해의 해상교통이 전면 금지되었음은 물론, 내?외국인의 왕래가 극도로 규제되었고, 귀화하지 않은 외국인들은 모두 추방되었다. 사신의 왕래와 대외무역으로 번성하였던 인천도 자연 그 기능을 상실하면서 평범한 농?어촌으로 변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속에서 고려왕실의 잔재 청산과 중앙집권의 강화에 맞물려 경원부는 인천군(仁川郡 ; 1413)으로 강등?축소되고, 강화?부평 등도 군사적 의미만을 지니는 일개 도호부(都護府)로 하락되고 말았다. 경원부의 지난 날 이름인 인주(仁州)에서의?인(仁)?자와, 지방행정구역의 이름에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는 산(山)이나 천(川)을 붙이도록 한 행정구역 개편 원칙에 따라?천(川)?자가 합해져서?인천(仁川)?이라는 행정구역명이 비로소 나오게는 되었으나, 여전히 한적한 농?어촌사회로 존속하였다. 다만, 세조 때 왕비(貞熹王后)의 외향(外鄕)에 대한 배려와 국방체제를 개편하는 과정에서 강화나 부평처럼 도호부가 되는 변동이 있었다.(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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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지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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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다가 1600년을 전후로 왜란(倭亂)과 호란(胡亂)을 겪으면서 인천지역은 다시 한번 국방상 요충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일본의 침입을 받을 경우에는 남한산성(南漢山城)을 보장처(保障處 ; 왕실과 조정이 잠시 피난하면서 전란을 극복하는 곳)로 하고, 대륙세력의 침입을 받을 경우에는 강화도를 보장처로 한다는 전략이 수립되면서 남한산성의 경영과 함께 강화도를 중심으로 한 인천 해안지역의 방어체제와 시설이 새롭게 보강되어 갔다. 강화도호부가 부윤(府尹)의 부로(1618), 다시 유수(留守)의 부로(1627) 격상하여 갔고, 왕실이 머물 행궁(行宮 ; 강화읍?월미도)과 각종 관아가 건축되었으며, 강화 외성과 내성이 축조되어 갔다. 그리고 때마침 전개된 상?공업 발달에 따른 해상교통로의 확보 요구와도 맞물려 교동도에 삼도수군통어영(三道水軍統禦營)이 설치되고(1629) 각종 해안군사시설들[자연도의 영종진(永宗鎭), 강화도의 12진보(鎭堡)?53돈대(墩臺), 통진의 문수산성(文殊山城) 등]도 하나 하나 추가되어 갔다.
이리하여 17세기 말엽에 이르러서는 인천지역이 강화를 중심으로 하나의 거대한 육?해군의 기지로 변모하면서 왕실의 보장처로 자리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어디까지나 행정?군사편제상의 변동이었을 뿐, 이 지역의 사회구조나 주민 생활에 특별한 변화를 가져오지는 않았다. 다만, 군량의 확보를 위하여 고려 강도(江都)시절부터 추진되었던 강화도의 갯벌 매립사업이 한층 확장되어 오늘날의 강화평야를 이룩하는 지형적 변화가 있었을 뿐이었다. 〈자료제공 : 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