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실의 근원과 상징 종묘사직
지정하
성서초 어린이들과 함께한 4월의 역사문화체험은 종묘와 사직 창경궁으로 조선의 시작이란 주제로 진행되었다. 공교롭게도 세 곳 모두 우리의 국보급 문화유산인데도 공원이었거나 아직도 공원으로 남아있는 곳이다. 답사코스는 사직단에서 창경궁과 종묘를 거쳐 다시 창경궁에서 마무리 되었다. 이번 역사문화체험은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게 된 배경과 종묘와 사직이 조선왕실의 어떠한 의미로 자리 잡고 있는지 알아보았다.
고려 말 신흥무인세력과 신진사대부
고려후기는 몽고족이 세운 원나라의 간섭을 많이 받은 시기였다. 또한 원나라를 등에 업은 '권문세족'의 횡포가 그치지 않았으며, 공민왕은 원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노력했으나 원나라와 권문세족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권문세족들의 횡포에 도전한 사람들이 신진사대부였다. 신진사대부들은 공민왕의 개혁정치로 형성된 참신한 인물로 정도전, 조준, 정몽주 등 가문의 배경 없이 학문과 실력을 바탕으로 과거를 통해 관리가 된 사람들과 이성계와 같이 지방의 홍건적과 왜구를 물리 쳐서 관직에 진출한 사람들이 부패한 고려사회를 개혁하기 위한 사람들이었다.
공민왕이 의문의 죽음을 당하게 되고, 중국의 명나라가 철령 이북의 땅을 차지하겠다고 통보해왔다. 당시의 최고 실권자 최영은 명과 싸워서 요동을 되찾겠다고 선언을 했고, 이성계는 이때 우군도통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성계는 요동정벌을 반대하는 4가지 이유를 들어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최영의 명령을 거역하고, 고려 왕조에 반기를 들었다. 최영은 개경으로 돌아오는 이성계 군대를 진압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이성계의 손에 잡혀 귀양 보내졌다가 두 달 후에 처형되었다.
왕으로 추대된 이성계 조선의 문을 열다.
이성계가 위화도회군에서 실권을 장악한 후 신진사대부는 두 가지 의견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정몽주를 중심으로 한 온건파는 고려 왕조를 그대로 두고, 정치개혁을 하고자 했으며,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혁명파는 고려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겠다는 생각이었다. 온건파와 혁명파 의 대립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격화되었고. 왕이 되려는 이성계의 야심이 서서히 드러나면서 온건파의 위치는 흔들리게 되었다. 이성계는 위화도회군으로 정권을 장악하고, 새로운 토지제도로 권문세족의 재산을 모두 빼앗아 국가재정을 확보하고 정치세력을 교체 했다. 의견이 갈라졌던 온건파와 개혁파의 갈등은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죽임을 당함으로써 개혁파의 승리로 끝나고, 이성계는 1392년 추대의 형식으로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차차 새 왕조의 기틀이 갖추어지자 정도전, 조준 등의 건의를 받아들여 국호를 바꾸기로 결심하고, 이듬해 3월 국호를 '조선'으로 확정지었다. 수도를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긴 후 법제 정비를 서둘러, 1394년에 정도전의 '조선경국전'을 비롯한 각종 법전이 편찬되었다. 또한 유교를 숭배하고 불교를 배척하는 숭유억불 정책을 시행하여 서울에는 성균관, 지방에는 향교를 세워 유학의 진흥을 꾀하는 동시에 전국의 사찰을 폐하는 등 억불 정책을 병행하였다.
이성계는 즉위한 직후에 왕세자 책봉을 서둘러 계비 강씨의 소생인 여덟째 아들 방석을 세자로 결정했다. 물론 이러한 결정에 대해 첫째부인 한씨 소생들의 불만이 높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이성계의 등극에 지대한 공헌을 했던 다섯째 아들 방원은 1398년 방석을 보필하고 있던 정도전, 남은 등을 제거하고 세자 방석과 일곱째 아들 방번을 살해하는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다. 와병 중에 일어난 이 사건으로 이성계는 몹시 상심한 나머지 그해 9월에 둘째아들 방과(정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었다. 그 2년 뒤인 1400년, 방원이 형인 방간의 '제2차 왕자의 난'을 진압하고 왕위에 오르자 태조 이성계는 태상왕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방원에게 옥새를 넘겨주지 않은 채 소요산으로 떠났다가 다시 함흥에 머물렀다. 이 때 방원이 문안을 위해 차사를 보내면 그 때마다 죽여버려 '함흥차사'라는 말이 생기기도 했는데, 이는 방원에 대한 태조 이성계의 증오가 대단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성계는 방원이 보낸 무학의 간청으로 2년 후인 1402년에 한양으로 돌아와 만년에는 불도에 정진하다가 1408년 5월24일 창덕궁 별전에서 향년 74세로 일기를 마쳤다.
조선왕실의 근원 종묘와 사직
국왕이 통치하는 조선은 ‘종묘사직’이라는 말로 대표된다. 종묘사직을 보존한다는 말은 곧 나라를 지켜나간다는 의미이다. 종묘는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는 왕실의 사당이며, 사직은 토지신인 ‘사(社)’와 곡식신인 ‘직(稷)’을 합쳐서 부르는 말이다. 나라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왕실의 조상들과 사직신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기에 나라를 세운 다음 곧바로 궁궐의 동쪽에는 종묘를, 서쪽에는 사직단을 짓고 제사를 드렸다. 종묘는 조선 태조 이성계가 왕위에 오른 지 5년쨰 되던 1394년 9월에 준공하였다. 준공 후 개성으로부터 선대 사조 즉 "목조, 익조, 탁조, 환조"의 신주를 한양으로 옮겨 신묘에 봉안하였는데, 이것이 조선 종묘의 시초이다. 그 후 임진왜란으로 한양의 모든 궁궐이 화재로 불타 없어질 떄도 다행히 종묘만은 화를 면하였다. 이 때 한양으로 쳐들어온 왜장 "부다슈카"가 마침 남아 있던 종묘를 그들의 본부로 삼았다가 그 곳에 주둔한 병사들이 죽는 등 좋지 못한 일이 자주 일어나자 사람들이 종묘에는 신령이 있어 오래 머무를 곳이 못 된다 하니 부다슈카는 두려워 거처를 옮기면서 종묘를 고의로 불태워 버렸다. 왜란을 피해 의주로 피신했던 선조가 재위 26년(1593)에 다시 한양으로 환도하였으나 거처할 곳도 없고 종묘도 없었다. 왕의 거처는 급한 대로 월산대군(성종의 형)의 저택(현 덕수궁)을 사용하기로 했으나 종묘는 어떻게 할 수가 없어 심연원의 집을 빌려 그 곳에 신주를 모시는 것으로 대신했다. 종묘의 중건이 논의 된 것은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선조 37년의 일이었다. 그러나 그떄까지도 전란 후 국력이 약하고 또 불길한 해를 피하자는 예조의 건의를 받아드려 몇 해 공역을 미루었다가 선조 41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그 해에 완성을 보았다. 이렇게 종묘는 다시 제 모습을 찾았으나 병자호란으로 또 다시 훼손되고 말았다. 호란이 끝난 뒤 인조는 전후의 참상을 딛고, 새로 나라의 체통을 세우기 위하여 종묘와 신주를 개수하는 일에 착수하였다. 그에 따라 정전과 영녕전의 신주 29위를 재조 봉안하고 파손된 신주는 종묘 뒤에 매장하였다. 그 뒤 종묘는 영조, 정조, 헌조 시대를 거쳐 증축 개축되면서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나라의 운명을 사직이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의 서울과 각 고을에는 사직단, 성황단 등 여러 제단이 설치되어 있었고, 온 백성들이 제사를 모셨다. 사는 땅의 신, 직은 곡식의 신으로 옛날에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될 때는 반드시 사직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어 그 나라와 존망을 같이 하였다. 땅과 곡식이 없으면 백성이 살 수 없으므로 임금님이 나라를 세우면 모두 사직단을 만들어 백성을 위한 제사를 지냈던 것이다. 그리하여 ‘사직’이라는 말은 나라나 조정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신라 선덕왕 때 처음 사직단을 세웠다. 서울 종로구 사직동에 있는 사직단은 1394년에 태조 이성계가 세운 것이다. 또한, 각 지방에도 관가의 서쪽에 사직단을 세우고 지방을 다스리게 하였으며 나라와 백성들의 편안함과 풍년을 빌었다. 예로부터 땅에 제사를 지내던 사직단은 나라의 융성과 백성들의 편안함을 기원하기 위해 쌓은 제단으로, 서울 종로구 사직동에 있는 사직단은 조선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서울을 정하고 궁궐, 종묘를 지을 때 함께 만든 것이다. 1394년(태조 3)에 고려의 예를 따라 땅의 신을 제사하는 국사단은 동쪽에, 곡식의 신을 제사하는 국직단은 서쪽에 배치하고 신좌를 북쪽에 모시었다. 1897년 고종이 황제에 오르자 이곳을 태사, 태직이라고 고쳐 부르기도 했는데, 이 사직을 종묘와 함께 중하게 여겨 중춘(봄의 가운데 날)과 중추(가을의 가운데 날), 동지가 지난 후 세 번째 되는 ‘개의 날’을 택하여 1년에 세 번 제사를 지냈다.
답사를 마치고
역사드라마를 볼 때 ‘종사’와 ‘종묘사직’이란 말을 자주 듣게 된다. 이것이 '국가' 그 자체와 동일한 의미로 사용한다는 것을 이제는 우리 친구들도 확실히 알았을 것이다. 종묘는 왕실의 근원이며, 사직 즉 땅과 곡식은 나라의 토대가 되는 것이니, 조선의 흥망과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도 알았다. 종묘사직이 대한제국 멸망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예전과 같은 의미로 자리매김 되지 못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지위를 막론하고 모두 말에서 내려 경건한 마음을 갖았던 종묘하마비 앞에서 우리 꼬마친구들은 시끌벅적한 음악과 유흥을 즐기는 어른들을 보면서 자꾸 고개를 젓는다. 신성하고, 경건하게 마음을 가다듬고, 옷깃을 여며야할 공간이 공원이 되어서 아이들과 외국인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또 사직단은 어떤가! 사직단은 종묘에 비하면 한적하지만 사직공원이 들어서 있고, 운동을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사직단이 사적(史蹟)으로 국가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느낌을 전혀 받을 수 없었다.
일제가 창경궁과 종묘사이에 길을 내면서 두 곳을 잇는 다리를 만들었는데, 우리도 그곳을 통해 종묘와 창경궁을 넘나들었다. 아이들과 답사를 다녀온 직후 뉴스를 통해 창경궁의 문정전이 방화로 훼손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작년에 답사한 수원화성의 서장대 또한 취객에 의해 불이 났다는 소식까지 전해 듣고는 가슴이 무척 답답해졌다. 일제가 우리의 민족성을 말살시키기 위하여 역사와 문화를 왜곡하고 훼손한 것도 참을 수 없는 일인데,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세계적으로 보존가치를 인정받은 문화재 조차 방치하는 현실이 우리 아이들에게 부끄러움으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