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일 토요일
지리한 장마 끝에 비가 개인 맑은 공기 속으로
햇살이 따가운 날씨입니다.
15명의 회원(남6, 여9)이 복주여중 앞에 모여
회원의 차량 4대(정원수, 김명환, 류건진, 이동식)에 분승하여 출발합니다.
회장님께서는
안동문화지킴이 행사 관계로 불참하셨으나,
우리 모임이 나날이 발전하여
뜻을 함께하는 여러 분들이 답사에 참석하였습니다.
처음 찾아간 곳은
임하댐 바로 아래에 있는 호계서원입니다.
조선 선조 6년(1573)에 월곡면 도곡동에 여강서원이라는 이름으로 지은 서원으로
안동댐 건설로 1973년 이곳에 이건하였습니다.
그 유명한 '병호시비'의 주역인 호계서원입니다.
병호시비에 대한 이야기는 3월의 답사기에 간략하게 소개하였고,
자세한 내용은 자료실에 스크랩한 글을 올려놓았습니다.
학봉종택에 갔던 3월에는 하회와 검제의 두 종손이 합의하여
병호시비를 종결지었다고 했는데,
원래 이 시비가 두 집안 만의 문제가 아니고 서애와 학봉 두 분의 학맥을 이어받은
유림의 싸움이었기에 합의는 다시 번복되었다 합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성리학의 이데올로기에 파묻혀 사는 조선시대도 아닐진대
명분을 앞세운 다툼보다는 큰 도량으로 화합하는 것이 좋아 보이는데요.
두 분 살아생전에 친분이 두터웠고, 또한 당시에도 혼맥으로 연을 맺은 가문이라 하던데...
'병호시비'에 관한 이야기는 류시대님과 김정일님께서 자세히 설명해 주셨습니다.
발길을 돌려 임하리로 향했습니다.
먼저 찾아간 곳은 안동 임하동 동삼층석탑입니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05호9안동시 임하면 임하리)
이 탑은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높이는 4.21m이다. 2중 기단위에 세워진 삼층석탑으로,
하층 기단의 중석(中石)면마다 모서리 기둥과 안기둥이 세워져 있고, 거의 경사가 없는 복석(覆石)상면에는
고임돌이 있어 상층기단의 중석을 받치게 했다. 초층 몸돌에는 모서리 기둥이 있을 뿐 안기둥이 생략되었고, 남쪽면 복판에 방형의 문비(門扉)와 자물쇠 모양을 새겼다.
2층과 3층 몸돌에는 각각 모서리 기둥과 하나의 안기둥을 새겼다. 전각은 거의 파손되었으나, 수평처마에 경미한 반전을 보인 흔적이 있다.
도굴로 인하여 기단부가 심히 교란되어 전체가 약 13-15도 기울어졌던 것을 1979년 12월 해체 복원했다.
두번째 찾아간 곳은 안동 임하동 오층석탑입니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80호(안동시 임하면 임하리)
이 탐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2중 기단의 석탑으로 높이는 5.5m이다.
기단부가 완전히 매몰되어 있으며, 탑 전체는 서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다.
1층 몸돌의 남면에는 문 모양이 조각되어 있으며, 네 귀에 모서리 기둥이 있고 안기둥은 없다. 2층에서 5층까지의 몸돌에는 모서리 기둥과 함께 각 면 중앙에 한 개의 안기둥을 배치하였다. 각 층의 지붕돌은 매우 두꺼운 편이고 몸돌에 비해서 지붕돌의 길이도 짧아 전체 높이가 높은데 비하여 둔하게 느껴진다.
탑이 있는 주위에는 많은 기와가 나오며, 고려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주초석이나 연화대좌, 석불등이 산재해 있어 이곳에 매우 큰 사찰이 잇었음을 알 수 있는데, 원림사란 사찰의 이름도 함께 전하여 온다.
탑 옆에 방치된 목없는 불상입니다. 조선시대에 유생들이 이런 짓을 많이 했다는 말을 어느 회원이 했습니다.
바미안 대불상을 파괴한 탈레반정권이나, 학교교정에 있는 단군상을 우상이라 하여 밤에 몰래 가서 부셔버리는 세력이나 임청각 회나무를 비오는 밤에 몰래 전기톱으로 자른 사람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게 소중한 것은 남에게도 소중한 것입니다. 내게 싫다고 극단적으로 배척하는 것은 흑백논리에 사로잡힌 유치하고 미숙한 정신세계입니다. 개인이 이럴 때보다 집단이 이런 생각에 빠져 있을 때는 더욱 위험합니다.
탑이 2기가 더 있었으나, 논둑 밭둑길을 가야하므로 다음에 가기로 하고 탑 답사는 여기서 마칩니다.
임하리 이곳의 옛이름은 '한절골'이라 합니다.
큰절이 있던 마을이란 뜻입니다.
탑들이 흩어져 있는 것은 큰절이 있고 주변에 암자 등이 있었을 거고, 암자에도 탑이 있어서 그럴 거라는 추측을 해 봅니다.
이우당(二愚堂)종택에 들렀습니다.
마침 종손분이 노모의 병환으로 집에 게셔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단체사진을 찍었습니다.
사진에 정성을 들이지 않은 관계로 오른쪽 위에 빛이 들어왔네요.ㅠㅠ
앞줄 왼쪽 2번째 분이 종손이십니다.
이우당 종택 :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49호(안동시 임하면 임하리)
이 건물은 안동권씨 부정공파 임하지파 이우당 권환(權환)의 종택으로 조선 인조 18년(1640)에 건립한 것이다. 이 종택은 'ㅁ'자형 안채와 사랑채,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원래는 사랑채 앞에 대문간채와 중문간채가 있었던 집이다.
사랑채는 안채의 동북쪽에 위치하여 책방과 통하게 되어 있다. 'ㅁ'자형 안채는 정면 5칸, 측면 6칸이다. 대청을 중심으로 양쪽에 방이 있는데, 왼쪽이 안방이고 그 앞에 부엌, 아랫방 아랫부엌이 있다. 집터의 모양에 따라 북동향으로 지었으나 대청을 북쪽에 두어 여름을 시원하게, 온돌은 남쪽에 아궁이를 두어 겨울에 따뜻하게 하였다. 사당은 본채의 남쪽에 위치하며 담장과 대문이 있다.
이우당은 안동권씨 부정공파 임하지파의 종택으로 인조 18년(1640)에 당시 임하지파의 종손인 권환 선생이 건립했고 1984년 5월 21일에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49호로 지정되었다. 그는 1580년(선조 13)에 태어나 1651년(효종 2)에 졸하였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택보(宅甫), 호는 이우당(二愚堂)이다. 아버지는 증사헌부집의 대기(大器)이며, 어머니는 흥해배씨(興海裵氏)로 희도(希度)의 딸이다. 정구(鄭逑)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610년(광해군 2)에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시 안동부에서 의병이 결성되자 중의에 의하여 부장(副將)을 맡아 임금의 교지를 받들고 죽령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강화가 성립되어 적이 물러감에 따라 전투에 임하지는 못하였다. 그 당시 의병진에서 작성한 문서들은 거의 그의 손을 거쳐 갔다고 한다. 1635년 장릉참봉에 천거되었으며, 그 뒤 사옹봉사·직장 등을 지냈다. 1639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전적에 제수되었으며, 1640년 예부좌랑, 1641년 유곡도찰방(幽谷道察訪), 1646년 강원도사를 역임하였다. 권환 선생은 전형적인 청백리로서 조정에서는 거침없이 직간을 하고 문란한 당쟁의 와중에도 공평하고 명분이 뚜렷한 정책을 펴려고 노력하였으며, 지방관으로 있을 때는 학문을 권장하고 풍속을 순화시키는 한편, 인정(仁政)을 널리 펴서 많은 칭송을 받았다. 저서로는 ≪이우당문집 二愚堂文集≫ 4권이 있는데 시문집 형태를 띠고 있다.
처마에 제비가 집을 지었네요.
옛 임하동부초등학교 자리 부근에서 준비한 참을 먹고 오류헌으로 향합니다.
지례동 오류헌(知禮洞 五柳軒) : 중요민속자료 제184호(안동시 임하면 임하리)
이 집은 조선 숙종 때 대사성을 지낸 지촌(芝村) 김방걸(金邦杰,1623-1695)의 셋째 아들인 목와(木窩) 김원중이 1678년 분가할 때 세운 집이다. 안채는 안마당을 향한 3칸 대청을 중심으로 안방과 부엌이 마당을 향하고 있다.
사랑채 5칸은 모두 툇마루가 있다. 집의 전체 구조는 'ㅁ'자형이다. 사랑마당, 안마당, 뒷마당 등이 내외 생활 영역에 따라 건물과 담장으로 구분되어 있다. 그리고, 사랑채와 대문채의 구조가 섬세하고 우아하다. 안채는 원래의 것으로 추정되나 사랑채는 1920년에 개축되었으며 1989년 임하댐 건설로 수몰을 피해 임동 지례에서 지금의 자리로 이건하였다.
이 집은 우리가 지금까지 다녀본 종가집 중에서 매우 잘 지은 집으로 관리 또한 가장 잘 되고 있었습니다.
정갈한 마루의 모습입니다.
류시대 회원의 자당과 이 댁 종부님과 친분이 있는 관계로 부탁하여 집 내부를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다양한 문살과 붙박이 형태의 장롱과 방 안쪽에 감실을 마련하여 위패를 모셨던 것, 그리고 앙증맞게 낸 조그만 창 등 참 구석구석 정성을 들여 잘 지은 집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 다음 임하리 방문지로 국탄댁(菊灘宅)에 갔으나 잠겨있는 관계로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이 집은 국탄 김시정이 조선 영조 33년(1757)에 분가를 하면서 지은 집으로, 원래 임동면 지례리에 있었으나 임하댄 건설로 인하여 1988년 이 곳으로 옮겨졌다 합니다.
마지막으로 찾아간 곳은 사빈서원입니다.
사빈서원은 서원 건물 주변에 부속건물을 짓고 있는 중이라 부산하였습니다.
사빈서원(泗濱書院) :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39호(안동시 임하면 임하리)
이 서원은 청계 김진(金璡, 1500-1580)과 그의 다섯 아들의 덕을 추모하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하여 숙종 11년(1685)에 사림과 자손들에 의해 지어졌다. 동왕 35년(1709)에 동구 밖 사수(泗水)가로 옮겨 지으며 사빈서원이라 하였다가 서원훼철령에 의해 철폐되고, 고종 19년에 다시 건립되었으나 현재는 강당과 주사만 남아 있다. 임하댐 건설로 인해 임하면 사의리에서 1987년 현 위치로 이건되었다.
모든 답사가 끝나고, 도서관 앞 '촌가'에 가서 칼국수를 먹고 다음 달을 기약하며 헤어졌습니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 새로 오신 분 소개가 있었으면 좋았는데, 깜박했구요.
답사 때마다 해박한 지식으로 해설을 잘 하시는 류시대님과 김정일님께서도 답사기를 올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첫댓글 더운 날씨에 자세히 기록하여 주신 김선생님 감사드립니다. 임하 동부 지역에 너무나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문화 가꾸기에 한층 더 힘써야 함을 느겼습니다.
김명환 선생님, 감사합니다. 더워서 오히려 답사하는 맛이 있었습니다. 살아 있다는 것을 즐겼다고 할까요? 하하
저는 그날 웬지 어수선했습니다. 차도 펑크나고...
약간 그런 점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건 그거대로 또 즐겨야지요, 뭐. 차 때문에 좀 그랬을 것 같긴 합니다. ^^
shrek님 자료 정리하여 주신 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