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1 교육개혁안 발표 후 각 대학마다 학부제에 관한 논의가 분분해지면서 학부제가 대학가의 커다란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서울대를 비롯한 전국 20개 대학이 내년부터 전면적 혹은 부분적인 학부제 도입 및 실시에 관한 시행계획을 수립·발표했다. 서강대도 내년부터 학부제를 시행한다고 발표했다. 이밖에 다른 대학들도 학부제 도입을 내부적으로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져 학부제는 더욱 확산될 전망이다. 각 대학당국이 마치 경쟁이라도 벌이듯 앞다투어 학부제 시행방침을 내놓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각 대학에서는 학부제 시행계획을 쉬쉬하고 있다가 급작스럽게 언론에 발표하거나 충분한 논의와 검토, 준비과정도 거치지 않은 채 졸속적으로 도입하고 있다. 그 때문에 학내 구성원들은 갑작스런 학교당국의 학부제 실시 방침에 혼란스러워 하고 있으며, 일부 대학에서는 학생들 뿐아니라 교수들까지 반발하고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 "학부제의 근본 취지에는 찬성하나 학교당국이 일방적으로 발표한 때문에, 혹은 충분한 연구와 검토를 거치지 않은 채 졸속으로 추진하고 있어서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대응하는 데 머무르고 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대응논리를 펴고 있는 사람들은 정부가 왜 학부제를 추진하고 있는지, 다시 말해 숨겨진 의도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심지어 지금 정부가 추진하려는 학부제를 외국에서 시행되고 있는 학부제와 동일한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듯하다. 때문에 왜 지금 학부제를 하려 하는지, 문제점은 무엇인지, 학부제 이외에 다른 대안은 없는지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2. 학부제정책의 문제점
(1) 박정희정권 때 도입했다가 실패했던 학부제정책
우리나라에서 학부제는 처음 도입되는 것이 아니다. 이미 박정희정권이 72년에 발표한 '고등교육에 관한 장기종합계획안(일명 실험대학안)'에 따라 73년부터 80년까지 당시 학생정원 1,000명 이상 대학 중 43개 대학에서 시행한 바 있다. 물론 서강대 역시 시행 첫 해인 73년에 학부제를 시행했다.
그런데 당시 박정희정권이 추진했던 학부제 시행정책은 82년부터 대학별로 폐지하기 시작해 85년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폐지되고, 대신 학과별 학생모집 및 학과별 교육과정 운영이 다시 부활됐다. 서강대 역시 이 기간에 학부제를 폐지하고 학과별로 교육과정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당시 박정희정권은 학부제 실시의 필요성에 대해 '근대화·산업화시대'에 부응하는 대학교육이 학부제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김영삼대통령은 95년 4월 27일에 열린 전국교육자대회에서 박정희정권이 주창했던 근대화·산업화시대의 교육원리는 이제 맞지 않는다면서 21세기의 승리자가 되려면 사고의 혁명적 전환을 통해 "정보화·세계화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교육원리가 나와야 한다"고 선언했다.
그런 김영삼정부가 제시한 것이 다름아닌 근대화·산업화시대의 교육의 틀로 제시됐던 바 있으며, 그나마도 실패로 끝난 학부제라는 점에 대해서는 실소를 금할 수 없다. 23년전으로 역사를 되돌아 거슬러 올라가 박정희정권이 시도했다가 실패한 정책을 다시 부활시킨 것도 김영삼정부가 말하는 세계화이란 말인가!
이에 대해 한국대학교육협의회 고등교육연구소장인 이현청박사는 "당시와 지금은 시대 상황이 다르다. 또 당시에는 이를 통해 학생운동을 말살해 보려는 정치적 의도도 있었지만 문민정부가 들어선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현청박사의 주장은 지금 추진되고 있는 학부제가 잘 되기를 바라는 개인적 희망을 담아 김영삼정부의 정책을 합리화해 보고자 하는 억지일 뿐이다.
물론 72년과 95년의 시대적 상황은 다르다. 따라서 예전에 학부제를 추진했다가 실패했다는 점만으로 이번에도 실패할 것이라고 단정짓기엔 무리다. 하지만 정책의 성패를 좌우하는 것은 시대적 조건이 아니다. 그것도 물론 영향을 미치지만 정책의 성패는 누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어떤 방식으로 추진하느냐에 달려 있다. 다시 말해 주체의 문제가 결정적인 열쇠인 것이다.
박정희정권 때 실패했던 근본원인도 불순한 정치적 의도를 가졌던 정권과 권력에 빌붙어 기생하면서 자신의 기득권 유지 및 부의 축적에만 여념이 없었던 부패한 학교경영자들에게 있었다. 학부제 정착을 위한 정권의 행정적 및 재정적 지원 부재와 학교경영자들의 투자부재로 말미암아 강의의 부실화가 초래됐고, 교과목이 다양해지기는 커녕 학과별 교육과정 운영 때보다 도리어 축소됐으며, 강좌당 학생 수도 학과별 교육과정 운영 때보다 더 늘어남으로써 더이상 학부제를 지속시키기 어려울 정도로 대학교육의 질이 떨어졌던 것이다.
박정희정권 때는 학생운동을 말살하려는 불순한 정치적 의도가 있었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한 주장도 마찬가지다. 지금 대학가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부과 학교당국에 의한 학생운동 탄압책동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런 소리를 하지 않을 것이다.
(2) 대학의 자율화·다양화·특성화에 위배되는 학부제정책
학부제가 박정희 때 실패했던 정책이라고 해서 도입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학부제건 학과별 교육과정 운영방식이건 나름대로의 장점을 갖고 있는 만큼 대학마다 지향하는 교육목표에 따라 학부제를 시행할 수도 있고, 학과별 교육과정을 운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의 학부제 추진은 사실상 정부에 의해 강요되고 있다.
지금의 학부제는 94년에 3개 대학이 학과통·폐합을 시행한 데 이어 95년에도 11개 대학이 45개 학과를 21개 학과로 통·폐합하는 등 학과 통·폐합정책이 시행될 때부터 예고된 것이다. 교육부는 94년 7월, "현재 전국 대학에 설치된 학과가 지나치게 세분화돼 있어 교육과정 중복편성 및 학과영역별 폐쇄운영 등 문제가 많다"고 하면서 '유사학과 통·폐합 및 계열별 교육과정 운영(학부 또는 학과군제) 정책'을 발표했다.
교육부는 이를 위해 교수확보율 산출기준을 학과당 교수 수에서 계열별 교수 1인당 학생 수로, 실험·실습설비기준을 학과당에서 전공별로, 학과별 평가인정제를 계열별 평가인정제로 바꾸고, 학과 통·폐합 실적을 재정지원 기준에 반영할 것임을 밝혔다. 이것은 김영삼정부가 행정적·재정적 지원을 내세워 유사학과 통·폐합 및 학부제 시행을 사실상 각 대학에 강요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증거다.
김영삼정부가 강력히 추진하고 있는 대학종합평가인정제도 각 대학으로 하여금 학부제를 시행하게끔 은근히 강요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대학종합평가인정제를 앞둔 각 대학은 자기 대학이 위기에 처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때문에 각 대학은 평가점수를 잘 받기 위해 갖가지 편법을 다 동원하고 있다.
학부제 시행도 그 중의 하나다. 학부제로 전환하면 교수확보율과 실험·실습기자재 확보율 등 여러 면에서 평가 점수를 보다 잘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은 각 대학당국에서도 인정하고 있는 바다.
이처럼 학부제 시행이 사실상 김영삼정부에 의해 강요되고 있음으로 하여 전국의 모든 대학이 학부제를 시행하는 쪽으로 나가고 있다. 아무런 준비절차도 거치지 않고. 또 학내구성원들의 합의과정도 없이. 학부제로의 획일화를 낳고 있는 것이다.
김영삼정부는 '자율화·다양화·특성화'를 신교육체제 수립을 위한 대학교육 개혁정책의 기본방향이라고 스스로 선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영삼정부는 행정적 및 재정적 지원과 대학종합평가인정제라는 채찍과 홍당무로 말길들이기식으로 학부제로의 획일화를 낳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스스로 선언한 대학교육 개혁정책의 기본방향을 정면으로 정면으로 위배한 것이라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3) 선진국형 대학교육과 무관한 우리나라의 학부제정책
김영삼정부는 학부제 시행이 최근 선진국 대학교육의 추세라고 하면서 학부제 시행이 마치 우리나라 교육의 선진국화 혹은 세계화를 위한 것인양 선전하고 있다. 물론 선진국 대학 가운데에는 학부제를 시행하는 곳이 적지 않다.
하지만 선진국의 모든 대학이 다 그러한 것은 아니다. 신입생 선발을 학부 또는 단과대학 단위로 하는 국가나 대학도 있지만 학과 단위로 신입생을 선발하는 곳도 있다. 교육과정의 운영도 마찬가지다. 또 학부 또는 단과대학 단위로 신입생을 선발하는 대학 가운데서도 교육과정은 학과별로 운영하는 사례가 많다. 영국의 런던대학교, 일본의 게이오대학과 쯔꾸바대학이 학과중심으로 교육과정을 운영하는 대학 중 대표적인 예에 속한다. 또한 미국 대학의 대부분이 학과중심으로 교육과정을 운영하고 있다.
북한의 경우도 학부제를 실시하고 있지만 학부아래 학과가 설치돼 있다. 학생 12,000명에 교수 1,200명이 재직하고 있는 김일성대학만 하더라도 철학부아래 조선철학과, 서양철학과, 논리· 심리학과가 설치돼 있는 것을 비롯해 15개 학부아래 51개 학과가 설치돼 있다. 심지어 김일성대학교는 51개 학과아래 세부 전공분야별로 600개 학급을 두고 있으며, 학급중심의 교육과정을 운영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북한의 대학이 5년제가 대부분임을 고려하면 학급당 학생 수는 평균 4명꼴이다.
선진국 대학 중 학부제를 실시하고 있는 대학 가운데 학과를 별도로 두지 않고 전공과정만 설치하고 있는 곳도 있으나, 대부분은 북한의 김일성대학과 마찬가지로 학부아래 학과를 설치해 두고 있다. 따라서 전통적 의미에서 학부는 종합대학교에서의 단과대학과 비슷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학부제를 실시하려면 대학모델이 특성화대학 혹은 목적대학형이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보면 포항공대·금오공대·한국해양대·부산수산대·한국항공대 등이 학부제 실시에 적합한 대학으로, 이들 대학에서는 학부-학과-전공과정으로 이어지는 교육과정을 실시하는 것이 가능하다.
물론 종합대학교에서도 학부제 실시는 가능하다. 그러나 여기에는 선결적인 전제조건이 뒤따라야 한다. 학사·인사·재정 등 모든 면에서 대학의 운영이 단과대학 중심으로 전환돼야 하는 것이다. 이를 전제로 할 경우 미국식 종합대학교제도를 본딴 우리나라의 대학에서도 단과대학 안에 학부를 설치해 '대학교-단과대학-학부-학과-전공과정'으로 이어지는 교육과정을 실시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김영삼정부가 실시하고자 하는 학부제는 이런 방안과는 거리가 멀다. 그저 유사학과를 통·폐합해 학부로 편성하면 되는 것이 지금 김영삼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학부제다. 여기에는 학문적 연관성 따위는 고려되건 말건 아무런 상관이 없다. 때문에 지금 우리나라에서 추진되고 있는 학부제는 진정한 '학부제'라 할 수 없다. 그 보다는 '계열화' 혹은 '학과군제'라고 하는 것이 차라리 올바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4) 대학원중심의 교육정책과 연계된 학부제정책
김영삼정부가 박정희정권 때 실패했던 정책을 답습하고 있다느니, 또다른 획일화를 초래하고 있다느니 하는 등의 갖가지 비판을 받으면서까지 굳이 학부제를 전국 모든 대학으로 하여금 시행하도록 사실상 강요하고 있는 데에는 또다른 의도가 숨어있기 때문이다. 대학원중심의 교육정책이 바로 그것이다.
대학원중심의 교육정책이란 대학의 학부를 전공기초과정으로 자리매김하고, 전공심화과정은 대학원에서 배우도록 하는 정책을 뜻한다. 그래서 5·31 교육개혁안에서도 "국민공통교육연한을 대학의 학부로 연장하며, 대학의 학부를 생업교육화(生業敎育化)할 것"임을 밝혔다. 학점은행제 도입, 사내대학 및 대형학원의 대학교육 실시 인정, 소규모 대학 설립 허용 등이 이를 위한 방안이다. 최소전공인정학점제와 학부제 역시 김영삼정부가 시행하려는 대학원중심의 교육정책을 위한 사전 포석의 하나인 것이다.
그러나 이 정책이 시행되면 입시병이 고등학교에서 대학의 학부로 옮겨 대학 학부의 입시학원화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또한 대학의 재정을 학부모 납입금에 의존하고 있으며, 공교육비보다 사교육비 부담이 더 큰 우리나라의 교육 현실을 고려하면 학부모의 교육비 부담도 그만큼 더 늘어날 수밖에 없다.
그 뿐아니라 남자의 경우 군복무기간까지 고려하면 서른이 돼야 대학원을 마치고 사회로 진출하게 될 것이라는 점에서 산업인력의 고령화로 인한 인력활용의 비생산성도 문제가 된다. 더구나 그렇지 않아도 석·박사학위의 남발로 인한 석·박사 실업자들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는 마당에 석·박사학위를 더욱 남발함으로써 석·박사 실업자 양산이 더욱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대두될 것이다.
(5) 시행과정에서부터 갖가지 폐단이 나타나고 있는 학부제정책
선진외국이 그러하듯 우리나라에서도 학교에 따라 지금처럼 학과중심의 교육과정을 그대로 운영할 수도 있지만, 학부제로 전환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학부제가 전적으로 옳은 것인양 밀어붙이기 식으로 추진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학부제로 전환하고자 하는 학교는 먼저 교과 개편이라든가 행정체제 개편 등과 같은 철저한 준비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래야 학부제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일어날 혼란과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준비과정은 반드시 학내 구성원들과의 공개적인 논의와 합의과정을 거쳐 추진돼야 한다. 또 학부 편성도 행정편의주의적 발상이나 학내 기득권집단의 이해득실 조정에 좌우돼서는 안되며, 학문적 연관성을 확고한 기준잣대로 삼아야 한다. 그러나 지금 각 대학의 학부제 추진과정은 이와는 거리가 멀다.
무엇보다 먼저 지적할 것은 학부제 시행이 학교당국의 밀실행정에 의해 추진되고 있는 점이다. 대부분의 학교가 다 그렇다. 학내 구성원들 대상으로 하는 공청회를 시행하는 학교도 있지만, 이 경우도 대부분은 이미 판을 짜놓고 학내 구성원들에게 일방적으로 따르라고 강요하는 자리나 다름없다. 심지어 아예 학내 구성원들과 논의도 학지 않은 채 신문지상에 먼저 발표해버린 대학도 적지 않다.
통·폐합 대상학과도 학내 기득권집단의 이해득실에 따라 자의적으로 결정되고 있으며, 학부 편성도 학문적 연관성과는 거리가 멀다. 회화과와 산업디자인과를 통·폐합한 세종대, 신문·방송학과와 행정학과를 통·폐합한 한국외대, 수학과와 통계학과를 통·폐합한 덕성여대와 같은 사례가 벌어지고 있는 것은 이를 잘 말해준다.
그 뿐아니라 서울대조차 기존의 인문대학을 인문학부로 이름만 바꾼 채 학과를 완전히 하나로 통·폐합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지금의 학부제 추진과정에서 나타나고 있는 문제점이다. 서강대라고 해서 다를 바 없음은 물론이다. 신문방송학과와 정치외교학과를 같은 학과군으로 편성한 것이 대표적인 경우다. 성균관대, 세종대, 덕성여대 등 일부 대학에서 교수 및 학생들의 반발로 학내분규까지 발생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학부제 시행 이후 더 많은 페단이 나타날 것이라는 데 있다. 무엇보다도 대학교육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강좌당 학생 수를 줄여야 마땅한 데도 도리어 늘어나게 됨으로써 결과적으로 교육의 질이 지금보다 더 떨어지게 될 것이다. 학과별로 교육과정을 운영하고 있는 지금도 강좌당 학생 수가 많아 토론식 수업이 불가능하고, 학생들에 대한 교수들의 개별지도가 불가능하며, 과제물 처리를 비롯한 학생평가도 형식적으로 치루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학생들의 전공선택도 인기학과 위주로 몰리게 됨으로써 비인기학과의 소외를 비롯해 산업인력 수급에서의 불균형 등 적지 않은 문제점들이 일어날 것이다. 이러한 폐단을 방지하기 위한 대책으로 전공과정별 학생 수를 제한해 성적 순위로 결정하는 방식을 채택할 경우 학생들의 전공선택권 보장이라는 학부제 시행취지를 스스로 위배하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이밖에도 상대평가방식에 의한 학생평가제도 도입으로 학생간 경쟁을 부추기게 될 것이며, 전공학문에 대한 학생들의 소속감 결여와 선택능력의 결여 등으로 인한 문제점도 생겨날 수밖에 없다. 학생들 속에 개인주의가 심해지고, 학생회 조직력의 약화로 인해 학생자치활동도 위축될 것이다.
3. 새로운 대안
학부제가 긍정적인 면이 있더라도 지금 당장 학부제를 시행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오히려 대학교육의 질을 떨어뜨릴 가능성이 더 높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 김영삼정부가 추진하는 학부제는 진정한 의미의 학부제와 거리가 멀기도 하다. 그렇다고 지금의 대학교육을 그대로 두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학부제를 시행하지 않더라도 학생들의 전공선택권을 넓히고, 복합학문이 가능하도록 보장하는 방안은 얼마든지 있다.
복합학문의 경우 복수전공이 가능하도록 하면 된다. 그러나 기계공학과 학생이 전공과 무관한 법학을 복수전공하는 식으로 돼서는 안된다. 따라서 복수전공을 허용하되 학문적 연관성이 분명한 동일계열 또는 지정학과간으로 제한해야 한다. 이를 위해 전공학점 취득기준을 동일계열 또는 지정학과 공통전공 15∼21학점, 학과전공 36∼42학점으로 하되, 전공 총이수학점을 51∼60학점으로 하면 실질적인 복수전공이 가능하게 된다. 1전공 51∼60학점과 2전공 36∼42학점을 수강하면 복수전공학위를 취득할 수 있는 것이다.
학생들의 전공선택권을 넓히기 위한 대안으로는 전과를 허용하면 된다. 다만 이 때에는 전과하고자 학생의 전공습득 능력이 인정돼야 하고, 전과 시기도 학생들의 학과생활에 대한 적응문제가 고려돼야 한다. 따라서 전과하고자 하는 학과의 전공습득 능력에 대한 평가시험을 치루어 절대평가 점수 60∼70점 이상인 학생에 국한해 전과를 허용해야 하며, 전과 시기는 1학년 1학기말과 2학기말로 제한해야 한다.
전과하지 못한 학생은 1전공학점을 이수한 뒤 위와 같은 방식의 평가시험을 치루어 2전공을 이수할 수 있게 하되, 이 경우 36∼42학점만 취득하면 되는 위의 복수전공자와는 달리 1전공 학점과 마찬가지로 51∼60학점을 모두 이수하도록 해야 한다. 이와 함께 졸업한 뒤에도 시험을 치루어 학내 편·입학 형식으로 복수전공을 할 수 있게 하면 된다. 그리고 이 때에는 교양학점까지 취득해야 하는 다른 대학 출신의 학생들과는 달리 51∼60학점의 전공학점만 취득하면 학위를 인정하도록 해야 한다.
이밖에도 이를 위해 해결해야 할 일이 적지 않다. 무엇보다 계절학기를 여름방학과 겨울방학 기간 모두 개설해야 하고, 현행 6학점을 9학점으로 늘려야 한다. 또한 주·야간 모두 설치된 대학은 전일제 수업을 실시해야 하며, 주간만 설치된 대학은 수업시간을 오후 7시까지로 연장해야 한다. 그리고 성적에 따른 수강신청학점 제한조치를 철회해야 하며, 학기당 수강신청학점을 최대 24학점까지 늘려야 한다.
그 뿐아니다. 교과체계도 완전히 개편돼야 한다. 교양과목은 국어·영어 하는 식의 과목별 필수제를 페지하고, 인성·세계관·외국어·컴퓨터·체육 등 영역별 필수제로 바꾸어야 한다. 교양과목의 이수학점도 현행 45학점에서 30학점으로 낮추어야 한다. 전공과목의 경우 이^공계열 및 예술계열은 물론 인문·사회·경상계열의 학과에도 실습과목을 신설해야 한다. 법대의 경우 모의재판을 정규과목화하는 것이 그 대안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전공과목의 강좌당 학생 수를 연차적으로 줄여 2000년 이후에는 20인 이하로 제한해야 한다.
물론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교원자격을 박사학위 소지자로 제한하고, 학생들의 자주적 참여아래 교수 강의평가제를 실시함으로써 교원의 자질도 높여야 한다. 실험·실습기자재도 보다 더 확충해야 하고, 도서·컴퓨터·어학기자재 등도 보다 더 많이 확충돼야 하며, 첨단화된 교육기자재를 활용한 교육도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 또한 정부와 사학재단 및 기업체의 투자 확대를 통해 교육재정도 더욱 늘려야 하고, 학교경영자들의 도덕성도 회복돼야 하며, 학교도 교수·학생·직원 모두 자주적으로 참여한 가운데 운영돼야 한다.
이러한 것들이야말로 지금 우리나라 대학교육을 정상화하고, 세계적인 수준으로 발돋움하게끔 하는 데 관건적인 과제들이다. 이러한 과제들을 해결되면 학부제가 좋다거나, 학과중심의 교육과정이 좋다는 식의 논쟁은 일어나지도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