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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의 진짜 제목은 “내 동생 유진이가 뭐하고 살아 왔는지 이제 알겠다. 또 내가 무엇을 찾아 해메였는지도 이제 알겠다.” 서문 세미니 참석 소감문을 쓰려다, 나에게는 에미서리 공동체 방문 그자체가 의미있었기에 그 둘을 합처 에미서리 공동체 방문기 겸, 아트어브리빙 세미나 참석에 대한 소감문을 쓰기로 했다. 이글을 쓰고자 하니, 나에게는 누구를 대상으로 소감을 쓸 것인가라는 문제가 먼저 생각 된다. 동료 세미나 참석자인가, 아직 세미나에 참석하지않은 다른사람들인가, 아니면 세미나 리더들인가. 나는 에미서리에 대해서 잘모르는 해외 이세들인 아들과 조카들에게도 전달하고 싶은 이야기도 있다. 또 세미나가 시작하기 전에 잘 알게된 에미서리 공동체 멤버들도 내가 조이빌에 와서 , 또 세미나를 통해 무었을 느끼고 생각하게 되었는가 궁금해 하리라 생각한다. 또 세미나 리더 유진님도 개인적으로 내가 느낀점을 듣고 싶어할 것이라고도 생각한다. 마지막으로는 나도 나 자신을 위하여 현제 생각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다는 생각도 있다. 누구를 대상으로 소감을 쓰는가 에 따라 글 내용이 달라저야 하지만 다른글을 여러번 쓸수 없기에 모두를 대상으로 중간정도를 향하여 쓰기로 한다. 한국어를 잘 읽을 수 없는 아들, 조카들을 위해서는 이글을 그들에게 맞게 다시 영어로 써야겠다. 또 무엇에 대해서 쓸 것인가 생각해 보건데, 그것 역시 읽는사람 대상에 따라 다르나 가족, 또 공동체멤버들까지 생각하며, 나는 세미나 밖에서 일어난 개인적인 이야기를 포함하여 이야기하려고 한다. 나는 이글에서 나 개인과 가족과 내가 만난 사람들에 대한 솔직한 생각과 느낌을 에미서리의 여러분들과 나누려고 한다. 이것은 여러분들에게 나라는 사람을 이해하고 사랑해 달라고 부탁드리는 것이다. 또 여러분들도 여러분 자신에 대해 나와 나눌수 있도록 부탁드린다 . 나에게 본인의 라이프스토리를 들려 주신 야나님, 선희님께 감사드리며 이글을 시작한다. (한글로 글을 써 오지 않아, 철자법, 띄어쓰기가 자신이 없으나, 수정을 받지않고 그대로 올린다. 세미나에 참석하게된 이유 – 가족이야기 이글의 진짜 제목에 위와같은 이상한 제목을 부친데에는 이유가 있다. 그 이유는 이글을 다 읽고 나면 알게 될것이다. 제목에서 말했더시 나는 한국 에미서리공통체 리더이며 아트어브리빙 세미나강사를 맏고있는 박유진의 형이다. (여기서 부터, 나는 우리가족이야기를 많이 하게 될터인데, 가족멤버를 부를때, 님이라는 호칭은 빼고 말하기로 한다.) 나는 현제 호주에 살고 있으며, 이번 아트어브 리빙세미나에 참석하러 제주도에 온 것은 아니었다. 카나다에 40년 이상 살고 계시던 어머니가 이년전에 제주도로 재 이민을 하셔서 두주일 간의 휴가를 어머니와함께 보내러 제주도에 왔던 것이다. 그런데 어머니(일선)가 “나는 아트어브리빙 세미나에 참석하려는데 너도 참석하지 않겠니” 해서 참석하게 된것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우연하게도 세미나가 나의 제주도 방문기간으로 계획되어, 어머니와 함께 시간을 보내려면 세미나에 참가하지 않으면 않될 사정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세미나 참석동기는 다른 참석자에 비해 조금 불순하다고도 말할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특별히 처음 부터 이 세미나가 내 인생에 필요로 하다거나 도움된다고 생각해서 참석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하여 나도 이런 세미나에 전혀 관심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1994년 이었던가 처와 같이 용타스님이 하시는 동사섭에 참석한 적도 있다. 단지 그때도 필요에 의해 한것은 아니고, 어머니가 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해서 였다. 그러나 못이겨 한것이 아니라, 비용을 들여서 까지, 관심을 가지고 했다. 나에 비해, 오히려 팔십대 노인이신 어머니는 지난 20년 간 이런종류의 세미나에는 무수히 참석하셨고, 아트어브리빙 세미나만 하여도 이미 열번이상 참석하셨다고 한다. 그 대부분은 카나다에 사실때, 미국이나 카나다, 또 일본에서까지 개최되었던 세미나에 나가셨던 것이다. 재작년 제주도 서귀포로 주거지를 옮기신 후에만 해도, 만 86세에 혼자서 또 동사섭 세미나에 참석하러 함안에 다녀 오셨다 한다. 호주에서 살면서 어머니 소식을 듣자하면, 어머니는 70대에서 80대에 걸처 계속 혼자서 국제여행을 하면서 이런 세미나에 다니셨던 것이다. 어머니가 이렇게 되시기 까지에는 어머니나름 대로의 정신세계를 공부하셔온 경유가 있기때문이기도 하고, 또 에미서리 세미나에 관해서는, 동생유진과 누나바나가 에미서리관계의 일에 종사하며 살아왔기 때문에 자연히 많은 에미서리세미나에 참석하게 된것이다. 그러니 우리 가족과 에미서리와의 관계는 뿌리와 역사가 깊으다. 에미서리가족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나와 유진과의 관계 동생 유진은 지난 이십여년간을 에미서리 본부인 콜로라도의 선라이즈 랜치 공동체에서 살아왔다. 한국 에미서리 공동체의 멤버들은 거의 모두가 선라이즈 공동체에서 평균 이년정도 살고 온것 같으다. 그런데 한국 에미서리 공동체 멤버들에게도 놀랍게도, 유진의 형인 나는 한번도 선라이즈 랜치에 가본적도 없었던 것이다. 사실 내가 동생 유진을 만나 본것은 지난 25년에 세번 만인 것 같으다. 우리는 서로 자기 인생의 길을 걷는데 바뻐 만날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서로 자기에게 중요하고 의미있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살아온 것이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서로 잘 살고 있겠지 하고, 어머니와의 전화로 통한 간접적인 소식만 듣고 살아왔다. 우리 형제들중, 특히 내가 다른형제들과 (또 어머니와도) 만날 가회가 적었던 것은 내가 결혼후 일본연구차 일본에 가서 사년을 살고, 또 그후 카나다에서 삼년을 지낸후에는 1992년에는 호주대학에 취직이 되어 호주로 이주를 해서 정착해 버렸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호주에서는 한국에 가기는 쉬어도, 북미에 가는것은 비용도 시간도 많이드는, 참 어려운 여행이었다. 나의 세식구가 어머니가 사시는 카나다 토론토에 가기보다는 어머니가 호주로 오는 편이 경제적이어서 그런 식으로 되었다. 그 결과로 나는 북미로 가지를 않았고 형제들을 만나지 않고 살게 된것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어머니 뿐만아니라 유진부부도 제주도로 이주를 하게 되어, 제주도에서 어머니를 만나면, 동시에 유진도 만나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번 제주도 여행은 어머니와 동생부부를 만나러 온 여행인 샘이다. 동생 유진이 몸을 두고 있는 에미서리 공동체의 철학에 대하여는 간접적으로 이야기를 주서 들어 왔으나 한번도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져 본적은 없었다. 그 이유는 나와 유진과의 물리적 거리만은 아니었다. 당시 사회과학을 전공했던 나에게는 에미서리가 하는 일들은 중산층의 여유생활에서 나오는 일종의 부르죠아-뉴에이지의 “자기 달래기”, 자위적인 문화현상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부정적인 시각이 들어있었다. 이것은 경제적으로 발전된 북미사회를 두고 하는 말이나, 발전도상국에서 라면 더욱 더 부정적이었을 것이다. 나의 사회과학적 관심사는 동아시아의 사회발전과 사회적불평등, 등의 문제들이었다. 80년대의 한국은 고도성장을 거처 상당이 발전되어 있었으나, 아직은 영성교육이나 명상이 세미나라는 형태로 나타나 관심을 끌 만큼은 되어있지 않았다. 민주화 이전이었던 80년대의 한국사회에서는, 소위 의식이 있다는 사람들에게는 사회운동이나 사회개혁이 중심과제이었다. 한국에서 살아오지 않았으나, 사회과학을 전공으로 하기시작한 후의 나의 관심사 역시 사회발전, 사회운동, 사회개혁이었다. 자기중심적인 자기개발보다는 사회개발에 자기를 투신하여, 그 과정에서, 간접적인 결실로 자기가 개발되는것이 더 좋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바로 이점이 나의 동생유진이나, 누나바나, 또 어머니의 영적세계에 대한 관심의 (비교적) 무관심으로 나타난 것이다. 70년대이후로 정지되어 있는 나의 영적 성장 그러나 나 개인의 정신사에는 또 하나의 "나"가 있었다. 그 "나"는 사회과학전공을 시작하기 전의 "나"였고, 어떴게 보아서는 성장기에 버림받아 제대로 자라지 못한 작은 몸을 가지고 있는 영적편향의 "나"였다. 이 시기는 내가 카나다에서 학부와 대학원에서 물리학을 전공하던 시기였다. 전공은 물리학이었으나, 나의 지적-정신적 관심사는 철학과 종교에 있었다. 브라질 이민, 그리고 카나다에의 재 이민이라는 환경하에, 새나라, 새말에 적응하느라고 바뻐, 본래부터 내성적이었던 나에게는 친구가 없었다. 자연히 책이 친구가 되었다. 카나다에 처음가서 영어 학교를 다니면서, 잘 하지도 못하는 영어로 사서 본 책들은 지금 다시 보아도 어려운 책들이다.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점차 철학으로 관심이 쏠리게 되었다. 이것이 나의 70년대 이었다. 이 시절에 나에게 영향을 준 책으로는 간디의 "The Story of My Experiment with Truth (나의 진리추구를 위한 실험의 이야기 (?))" 이라는 자서전, 토마스 머튼이라는 카톨릭평신부(?)의 Seven Story Mountain이리는 영적 자서전, 또 버트란트 럿셀의 세권짜리 지적(intellectual)자서전, 또 Malcom X의 자기혁명의 “나의 자서전”등이다. 하여간 나는 무엇인가를 찾고 있었다. 그래서 그렇게 이미 찾고 있었던 사람들의 경험담을 통해 영감을 얻으려 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자서전들을 통해, 또 그들에게 영향준 책들을 다시 찾아 모두 읽었다. 이책들은 아직도 내 책꽂이에 꽂혀 있다. 그러나 이책들을 다시 드려다 보지 않은 채 이미 거이 30년이 흘러 버리고 말았다. 80년대와 90년대에 와서는 사회와 역사, 또 일본에 대한 사회과학적 관심이 70년대의 나의 영적성장을 정체화시키고 만것이다. 그 이후로 언제인가 그 70년대의 나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끊임없이 있었으나, 그럴 여유가 없이 살아 오게 되었다. 나는 무엇을 찾고 있었을까??? 왜 아직도 그것을 생각하고 있을까? 어머니 2000년도 크리스마스에는 호주로 온지 8년만에 카나다 토론토집에 계신 어머니를 찾아가 다른 가족들과도 만날 기회가 있었다. 또 아버지가 돌아가신 84년도 이후로 어머니가 혼자사시며 읽어온 책들을 드려다 볼 기회가 되었다. 에미서리의 영문 책자들도 있었다. 드려다보니 어머니가 영문으로 된 책자를 읽으시려고, 한 페지마다 단어를 스므개이상 찾아 한글로 토를 달아놓은 것이 보였다. 내가 19살에 카나나에 처음갔을때 잘하지도 못하는 영어로서 사전을 찾아가며 읽은 철학책들을 연상시켰다. 아들로서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이 노인을 보며 감탄을 하게 되었다. 그동안 어머니는 에미서리에의 관심만이 아니라, 중국무술 TV드라마를 즐겨 보시곤 했다. 또 홍태수의 단의 완성, 데비이드 호킨스의 의식혁명, 이승헌의 단학, 등등, 여러가지의 영적발전에 관한 책들을 읽어 오셨다. 그 뿐아니라 책에서 터득한 것들을 생활에서 실천하고 계신 것을 보았다. 가장 놀라왔던 것은 영적생활만이 아니라 자기 몸과의 실험에서 자신의 독특한 건강요법을 개발하신 것이다. 한때 식물인간이 되시었던 어머니의 건강상태는 주위의 수므살 아래의 50-60대의 사람들 보다 좋았다. 어머니가 다니고 있던 토론토의 단학선원에 같이 나가 보았더니, 나를 포함한 대부분 사람들이 수므살이상 위의 노인인 어머니 만큼, 단전운동의 동작을 하지 못하는 것을 보았다. 어머니가 동양식으로 몸과 마음의 수련을 함께 해 오신 것을 알게 되었다. 어머니는 80년대말 우리식구가 일본에서 돌아 왔을 때는 토론토집의 뒷 정원을 새로이 꾸미어 일본식 돌정원을 만들어 꽃이 피고 물이 흐르게 만들어 놓았다. 그러자 새들이 모이게 되었다. 어머니는 정원을 향한 뒷방을 개조하여 전면 유리문으로 만들어, 방에서 않아도 정원이 보이게 만들었다 이 방이 어머니의 명상의 방이었던 것이다. 이 정원이 점점 주위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어 옆집 이웃은 아예 울타리를 없에고 자기집 뒷 정원도 비슷한 스타일로 바꾸었다. 이지역은 토론토의 중심가에 있는 주택지역으로, 대부분의 개인주택 건물들은 삼층집이고 뒤의 정원들은 낮는 울타리로만 나뉘어저 있었다. 대부분의 집들의 뒷 정원들은 아무것도 없는 잔디 정원이었다. 그런 곳에서 어머니 집의 일본식 돌정원은 이 블록의 작은 오아시스 같았다. 주변에 사는 모든 이웃들에게도 마음의 휴식처가 되었다고 한다. 이번 세미나를 통해 배운것으로 해석하자면 어머니는 삶의 진동을 살리고 키워 주위에 퍼트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잠시 방문 하고 있었던 내눈에도 보였고, 나도 영향을 받았다. 어머니는 현제 제주도에서도 이 돌정원을 더 큰 규모로 재현시키시려고 모색 중이시다. 언제나 하고 싶은것이 많아 바쁘시다. 나도 그렇게 살려고 한다. 언제인가, 내가 본 어머니의 정신사에 대하여 글을 쓰려고 생각하고 있다. 토론토에서 호주로 돌아오면서 에미서리 영문책자와 어머니가 읽고 난 영성개발에 관한 책들을 몇권 가지고 왔다. 돌아와서 조금은 읽었는데, 책을 워낙 많이 사는 나인지라, 그 책들은 나에게 큰 영향을 주지않고, 내 책장의 많은 책들 사이에 꽃히어 있다. 제주도에서 돌아와서 이 책들을 다시 꺼내보았다. 앞으로 시간을 더 투자하여 공부하려 한다. 또 하나의 제주도 방문 목적, 에미서리 공동체 멤버들과의 대화 나에게 이번 제주도 방문에는 또 하나의 목적이 있었다. 내가 대학에서 오년후에 은퇴를 하면, 제주도로 주거지를 옮겨 어머니와 함께 살수 있을까, 에미서리 공동체에 합처 동생과 같이 살수 있을까, 또 나만이 아닌 누이, 또 다음 세대의 아들, 조카들에게 이민생활 오십년만에 한국과 연결을 시켜줄수 있는 근거지를 만들어 줄수 있을까 하는 조금 막연하고 시험적인 프로젝트를 위한 정보수집이며, 의사타진이었다. 그러므로, 나에게는 세미나보다 에미서리 공동체를 이해하는 것이 첫 과제이였다. 물론 세미나도 또 에미서리공동체를 이해하는 길이 되었다. 에미서리 공동체를 이해하는 방식으로 공동체 멤버들과 이야기를 하는 방식을 택했다. 내가 택한 방법은 에미서리에 관한 책이나 글을 읽기보다는 현제 제주도의 에미서리공동체 멤버들의 개인적 정신사를 이해하기 위해 그들의 life story를 직접 그들의 입으로 듣는 것이었다. 내가 같이 살 가능성이 있는 그들을 이해하는 것이 가장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에미서리 공동체를 이해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야나님, 선희님, 보나님 세분이 "인터뷰"에 동의하여 주셨다. 마침 세미나를 준비하느라 바쁜 시기이기도 했고, 세미나 전에 바쁜 중에도 유진과 재형님이 제주도 구경을 시켜 주어서, 이곳 저곳 다니느라, "인터뷰"시간을 정하기도 조금 힘들었다. 결국 야나님과 선희님, 두분과만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얻었다. 두분 다 기꺼희 자신의 라이프스토리를 들려 주셨다. 어떻게 에미서리 공동체에 들어와서 살게 되었는가 라는 간단한 질문은 사실은 너무 큰 질문이어서, 쉽게 묻지 못하는 질문이다. 그에 대한 답은 최근 몇년간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난 이십년 이상의 라이프스토리인것이다. 사실 혼자서 그 답을 해보자면 몇분 안에 답이 끝나 버리고 만다. 들어주며, 또 다시 물어주는 사람이 있어야, 이야기도 계속 나올수 있다. 그렇게 두, 세시간씩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각각 다른 인생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무엇인가를 추구하는 삶의 길에서 공통점이 있었다. 이런한 추구의 길에서 에미서리 세미나에 참석하게 되었고, 그런 연유로 콜로라도의 선라이즈렌치 공통체에까지 가게 되었다. 선라이즈 공동체에서의 이년간의 생활은 그들이 결정적으로 영원한 에미서리로서 살아가게 되게 만들은 듯 싶다. 한국으로 돌아와서 모두가 반드시 공동체생활을 하게되지는 않겠지만, 공동체와 합세하는것도 역시 자연스러운 선택이였을 것이다. 각자의이야기에서 나온 말이, 그들에게는 미국과 한국에서의 공동체 생활에서 영적멘토로서의 유진의 존재와 역활이 결정적이었다는 것이다. 동생 유진이 미국 에미서리본부에서 하나의 리더로서 중요한 역활을 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는 들었왔으나, 한국 에미서리 멤버 개인들에게서 유진이 얼마나 그들에게 중요한 존제였는가 이야기를 들으니, 동생 유진을 다시 보게된다. 이 이야기를 들은 것은 세미나 이전 이었다. 그래도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세미나를 통해 그 이유를 알게 된 듯 싶다. 또 야나님과 성희님과는 만난지 불과 몇일 만에 그들의 라이프스토리를 나누면서 일생동안 알았던 분들처럼 가깝게 느끼게 되었다. 세미나가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이곳이 내가 살곳이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다. 왜 그렇게 느꼈을까? 나도 잘 모르겠다. 영적공동체, 교회, 처 정순 이부분은 에미서리공동체나, 이번 세미나와는 직접 관계없는 이야기다. 앞에서 이미 말했다 싶히 지난 10월에 만 60세가 되어 은퇴를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60을 인생의 새로운 출발점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70년대에 멈춘 나의 영적성장을 다시 발동시키려는 마음이 더욱 구체화 되어 왔다. 그러나 이제까지 한 식의 책을 읽고 혼자하는 영적성장보다 나에게는 공동체/community가 필요함을 절실히 느껴 왔다. 여기서 나의 처 정순과 그녀가 속한 호주 아델레이드의 한인XX교회의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다. "그녀가 속한"이라는 표현은 나는 속해 있지 않다는 이야기이다. 처 정순은 1992년에 우리가 아델레이드에 오자 얼마 안되어서부터 XX교회에 나가기 시작하여, 지금은 권사이자, 교회의 중요한 멤버이다. 호주고등학교교사로 일하며 토요일은 무보수의 한글학교교장, 일요일은 하루종일 교회일로 일년에 자유로운 날이 거이 없이 바쁘게 살아왔다. 정순도 몇년후에는 고등학교 교사직에서 은퇴를 할것이다. 은퇴후에는 어데서 무엇을 하고 살것인가가 우리가 현제 같이 생각하고 있는 이슈이다. 처 정순에게는 우리가 아델레이드에 살고 있는 한, 교회는 그녀에게는 가장 중요한 사회적, 문회적, 그리고 정신적인 community일 것이다. 이러한 교회에 나는 한번도 나가지 않았다. 옛날에 우리집에 자동차가 한대이었을 때에는 교회까지 운전도 해주었지만 나는 교회에 들어 가지 않았다. 이제는 친목의 목적으로 개인집에서 모이는 구역예배에는 가끔 나가지만, 일요일 서비스에는 아직도 나가지 않는다. 교회사람들은 착하고 좋은 사람들도 많고, 정순을 생각하여 나도 교회 멤버로 생각하지만, 나는 한번도 나를 그 교회의 멤버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교회에 나가지는 않지만 나는 교회일을 비교적 잘 알고 있다. 왜냐 하면 처가 교회에서 돌아오면, 오늘은 교회에서 무슨 일이 있었고, 무슨 이야기가 있었나고 내가 언제나 묻기 때문이다. 교회사람들은 만날때 마다, 나에게 교회에 나오라는 이야기를 한다. 나에게는 교회는 침목단체일수는 있어도 나의 정신적 community는 될수 없는 것이다. 교회에서는 교회는 친목단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보수기독교회는 다른종교와 대화를 거부하고 오히려 정복하려 한다. 기본적으로 교회는 나를 바꾸려고는 하지만, 내가 누구인가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전도는 있어도, 대화도, “들어 주기”도 없다. 나에게는 나대로의 긍정적인 기독교관이 있으나, 이 교회에 나가면 나의 기독교관이 점점 부정적으로 되어간다. 또 나는 성경에서는 배울점이 있다고 생각해도, 나에게 기독교적 신앙이 없는 한, 교회를 통한 나의 영적성장은 기대할 수 없다. 정순이가 보수파가 아니라 교회가 보수파이다. 그러나 진보교회라면 가능할것 같으다. 70년대에는 토론토 연합교회에 김재준 목사가 와 계셔서 제삼일이라는 잡지일을 민주화운동이라고 생각하고 돕기도 했다. 정순은 이 당시, 우리 결혼전에, 이 교회에 다니고 있었다. 영적공동체를 공유하지 못하는것, 이것이 우리 부부가 해결해야할 문제이다. 나에게도 나에게 맞는 영적공동체를 갈구하는 마음이 있다. 모든 사람의 "생명력"을 존중해주고 살리려는, 그런 공동체에서, 그런 사람들과 함께 가까히 어울려 일하며 살고 싶다. 범 종교적인 집단과 철학에서 나의 정신적 공동체를 찾을수 있지않을까 생각하고 있었으나, 이번 세미나에 참석하므로서 에미서리가 그 대상이 될수 있다는 생각이 나에게 떠오른 것이었다. 세미나에서 나온 개념을 쓰자면 정신적 공동체란 멤버들 사이에서 “뉴머플러즘” (분위기)을 계속 생성시키고 있는 곳이다. 어머니처럼 혼자 살면서 뉴머플러즘을 만들어온 사람도 있지만 보통은 혼자서는 힘들다. 어머니도 자기를 충전시키려고 세미나에 다니신 것이다. 그러나 공동체가 있으면 매아리 같은 반사 상호작용으로 “삶의 진동”이 효과적으로 확장되어 나간다. 이것은 같이 사는 공동체일수도 있고, 연락망의 공동체일수도 있다. 그러나 많이 만날수록 좋다. 처 정순은 나도 함께교회의 멤버로서 모든것을 나누고 싶어 한다. 나도 그러고 싶으나 그렇게 되지를 않는다. 나는 보수기독교교회의 교인이 되기에는 너무나 자유로운 사고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다. 교회는 나의 생명력을 살리기 보다, 죽인다. 정순이 나와 함께 제주도로 와 주는것이 서로에게 더 간단한 해결책일것 같으다. 과연 정순은 나와 같이 제주도로 와 줄것인가? 정순은 일월달을 나와는 독립적으로 호주고교교사단의 한국연수 프로그람으로 아직도 서울서 보내고 있다. 아직 자세한 이야기를 할 기회가 없었다. 제주도에 함께 왔었으면 좋았을텐데, 하는 생각을 금할수 없다. 세미나에서 나온 개념들에 대한 이야기 이제는 나 개인이야기보다 세미나이야기를 하겠다. 이부분은 세미나의 요점과 나의 커멘트로 되어있다. 우선 내가 하고 싶은 것은 이번 세미나에서 배운것들을 나자신을 위해 정리하고 소화시켜,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나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세미나동안 공책에 적은것을 다시 추려서 요점으로 간추려 굴림체로 표시하였다. 다른 분들께도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그 요점에 대한 나의 생각은 다른 부분의 글과 같은 바탕체 글자로 표시하였다. 순서는 세미나 순서와는 조금 바꾸었다. a.1) 칭찬하기, 감사하기, 축복하기, 응답하기, “You are beautiful, ” “I am beautiful” · 감사 ->느낌이 없어도 한다. 표현 함으로서 느낌이 강해진다, 구체적일수록 좋다. 감사할 점을 찾아라. · 결과는 자기 정화, 그렇게 함으로서 내가 바뀐다. 생명력을 살린다. 이십년전 부터 미국의 에미서리본부 선라이즈 랜치에 다녀온 사람들에게서 여러번 “마치 천국에 다녀 온것 같으다” 라는 말을 들었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의 행동이나 말이 바깟세계와 다르다는 이야기이다. 그중에 칭찬하기 하나만 가지고 이야기 해보자. 내가 제주도 에미서리 공동체에 와서 이미 세미나 이전에 몇일 사이에 느낀것이, 내 일생에 이렇게 단시간안에 칭찬을 많이 들어본 적은 없었다는 것이다. 이거 정말 진담인가 하고 생각하게 된다. 나중에는 미안해서라도 나도 상대방의 좋은 점을 지적하며 칭찬을 하게 되었다. 물론 그들 만큼은 아니지만. 나는 아직 그만큼 칭찬하는 문화에 젖어있지 않은 것이다. 나는 본래 선생이 되기 전까지는 칭찬은 아껴서 하는것이 좋은 것이라 생각 했다. 나는 진심에서 우러러 나오지 않는, 단지 상대방이 좋아 할것이라는것을 알고 하는, 어떤 의미에서는 지극히 계산적인, 예를 들자면, 플에이보이가 여자를 끌기 위해서 하는, 또 부하가 상관의 마음을 끌기 위해서 하는, 그런 칭찬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진심에 없는 말을 하기를 싫어하는 나는 말이 적었다. 여기에는 내가 내성적이고, 부끄럼을 탄다는 요인도 물론 작용한다. 그러니 진심도 제대로 말 못하는 타입이였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내가 하는 칭찬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칭찬이므로 더욱 가치가 있는 칭찬이라고 은근히 자만하고 있었다. 그런데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그런 생각이 점차 바뀌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부끄러워서 강의를 하면서도 얼굴이 벌게 진다든지, 땀을 흘린다든지, 하여간 남앞에 서는것을 싫어하는 나에게는 힘든 과정을 격었다. 그러나 하다보니 요령도 생기고, 또 강의시간에 학생들이 졸지 않게 코메디안이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또 소그룹 튜토리얼의 토론 시간에는 말을 너무 많이 하는 학생을 견제하고, 말하기 부끄러워 하는 학생을 말하게 하는 방법을 생각하게 되었다. 부끄러워 하던 시람이었기에 역으로 부끄러위 하는 사람의 심정도 잘 이해하게 된 편이다. 나는 결국 학생들을 다루면서 소학교 레벨까지는 아니지만 조금은 진심 이상으로 칭찬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사실 찾으면 누구에게서나 칭찬할 점이 찾아지게 마련이다. 그런의미에서 선생이나 상사의 역활을 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학생이나 부하들을 칭찬하는것을 직업상 배우게 될 것이다. 칭찬은 칭찬을 받는 사람의 생명력을 살린다. 그런데 에미서리에서 하는 이야기는 칭찬은 칭찬하는 사람도 바꾼다는 것이다. 이것은 나에게는 새로운 이야기이다. 내가 다른사람에게서 칭찬을 받아서가 아니라, 다른사람을 칭찬을 함으로서도 나의 생명력도 살린다는 것이다. 그것을 목적으로 계산적으로 다른 사람을 칭찬한다기 보다, 다른 사람을 칭찬하다 보면, 그 의도와는 상관없이 결과적으로 나의 생명력도 활성화 된다는 것이다. 나중에 더 다루겠지만, 이것은 “생명력의 진동”이 매아리처럼 왔다, 갔다하면서 서로의 진동이 커진다는 이야기다. 아, 여기서 한가지 배웠다. a.2) 감사받기 (“하기”는 물론이지만, 여기서는 “받기”) “받기”에 대하여는 세미나에서 언급이 없었다. 그러나 관계있는 토픽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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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지난 5일을 걸처 성의껏 쓴글입니다. 여러분들의 소감을 기대합니다. 에미서리식으로 좋다고만 하지는 마시고 구체적으로 이것에 대해서는 이래서 이렇고, 저것은 저래서 저렀고,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느꼈다, 식으로 커멘트해주시면 저만이 아니라 읽는 다른분들께도 도움이 될것같읍니다.
글이 길어서 프린트용으로 파일을 첨수했습니다.
때로는 코끝이 찡해지고 때로는 유머러스한 표현에 혼자서 웃으며 오랜시간을 들여 꼼꼼히 읽어보았습니다. 글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지난 60여년을 살아오면서 이렇게 진지한 태도로 세상과 삶의 경험을 대하신 세진님의 삶이 저에게 큰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돌아가셔서 바로 보내주셨던 사진들도 감사했는데 지난 5일동안 세미나에 대한 소감을 정리하신 시간들이 얼마나 감동적인 시간이었을까 생각이 듭니다. 비록 함께 시간을 보내지 않았지만 세미나와 제주 공동체를 경험해 본 사람으로 세진님의 글들이 저에게 세미나의 감흥을 다시 한번 떠오르게 합니다. 이 감사를 어떻게 전할지..언제가 뵈면 오래도록 허깅하고 손잡기를 희망합니다.
덕분에 복습하는 기쁨을 갖게 되었습니다^^ 양이 많아서 다 읽어질려나 걱정했는데 너무 재미있어 단숨에 다 읽었네요! 조은글 감사합니다...
카페에 가입하려고 다움에 가입했더니, 자동적으로 한국 이메일 주소가 생겼내요. sejin8@hanmail.net 앞으로는 한국분들 하고는 이 주소를 쓰려고 합니다. 연락주세요.
세진님! 목소리들으니 더욱더 정겹네요~ 세진님의 글을 인쇄해서 꼼꼼히 읽으며 얼마나 마음깊이 느꼈는지 모릅니다. 우선 에미서리가 되었다는 말에 동의하며, 우리가 하나의 유니티라는 것을 알겠습니다. 어머니께서 홀로 정원을 만들어 뉴머플러즘을 형성한 사례를 통해서 제 삶을 더 살펴서 제 삶의 공간을 바라보게 하시고, 한국제 지구복의 문제를 꼬집어 주셔서 제 지구복을 다시 보게 하시고, 사명을 다시금 일깨워 주시고, 내 안의 두려움 때문에 선뜻 다가서지 못했던 고백을 통해 저의 방어를 보게하시고, 맞춤법에 관계없이 세진님의 글을 밑줄그어가며 읽었다는 것을 고백하고 가슴깊이 감사합니다.
축복의 영님, 자유님, 또 야나님, 모두 너무 좋은 평들을 써 주셔서 얼굴이 뜨거워저 조금 숨고 싶은 심정이 되었어요.
세진님이 호주에 사는 20대 여학생인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유진님의 형님이실 줄이야~* ^^;; 너무나 진솔하고 재미있는 글이라 저도 끝까지 다 읽게 되었습니다. 몇 문장은 받아적었고요. 나중에 만나게 되면 사랑으로 '빅 허그' 해드릴게요~*^^*
세미나의 내용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2011년 12월 말에 행복마을 동사섭을 받으면서 에미서리를 알게 됬습니다.
세미나 일정을 살피고 참가해 봐야 겠습니다.
덕분에 긍정적인 기운을 듬북받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