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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4) - 이근호 목사
[ 요한 계시록 (4) ] - 4,5,6,7장
1998,8, 강의(이근호), 정리(구득영)
◈ 4장부터 보여주는 것 - 촛대를 거니는 주님이 얼마나 대단한 분인가?'
* 요한 계시록 4장부터는, '촛대를 거니는 주님이 얼마나 대단한 분인가?' 라는 것을 구약 선지서의 내용을 가지고서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4장은 에스겔 1장의 모습을 반복해서 보여준다는 것이다. 4장에 나오는 네 마리의 생물이 에스겔 1장을 보면 보좌를 움직인다는 것이다.
* 에스겔은 미래적이었지만, 그러나 에스겔 본인에게만 현재적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에스겔은 마치 다니엘의 세 친구의 경우와 같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마누라가 죽어도 울지 말라고 한 것은, 장차 올 신약의 성도의 모습이 울지 말아야 하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 구약은 중간과정이지만, 그러나 신약은 마무리이기에 구약을 마음대로 헤집고 돌아다닌다는 것이다. 구약의 모든 혜택을 다 받는다는 것이다. 구약에서 의료보험(?)에 들었다면 신약시대 성도들은 모두 그 혜택을 받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얼마나 구원받은 것이 영광스러우냐는 것이다. 그런 완성된 구원의 영광스러움의 모습을 요한 계시록 4장에서 22장까지 펼쳐서 보여준다는 것이다.
* 요한 계시록 22장을 보라. 생명수 강가에 생명나무가 그렇게 많다는 것이다. 그렇게도 들어가기가 힘들었고 결국 못 들어갔던 창세기의 그 생명낙원이 말이다. 그만큼 좋다는 것이다. 그러니 에스겔이 계시를 받아서 하늘의 보좌와 영광을 바라본 것이 문제가 아니라, 에스겔은 오히려 지금 신약시대의 성도들을 부러워하고 있다는 것이다. 에스겔은 맛만 보았지만 우리들은 실제라는 것이다.
* 지금 꼬라지가 이렇다고 하지를 말고, 죽어보라는 것이다. 다니엘의 세 친구들처럼 불 속에 들어가 보라는 것이다. 불 속에 얼마나 따뜻한지(?) 말이다. 그런 불 속이 우리에게는 실제로 죽음으로 다가오는데, 즉, 실제로 죽어보라는 것이다. 얼마나 생명나무가 좋은지 말이다. 이 세상은 꿈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디즈니랜드', '에버랜드', 웃기지 말이다.
* 그래서 이것을 요한 계시록에서는 보석 같다고 하는데, 이것은 창세기 2장에 나오는데, 에덴동산이 '보석 산' 이라는 것이다. 죽음 속에 들어가야 그 보석의 의미를 안다는 것이다. 에덴동산에는 중앙에 선악과와 생명나무가 있고, 네 가지 강이 흐르고, 보석이 가득하다는 것이다.
* 그러니 성도는 에덴동산을 부러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에덴동산에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죽음 속에 확인되고 말이다. 에덴동산이 낙원이고, 이것은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인데, 십자가의 강도를 생각해 보라. 모든 것을 주님께서 다 이루셨기에 그분 때문에 현재가 된다는 것이다.
* 이렇게 요한 계시록에서 선지서를 끄집어내는 것은, 모든 것은 예수님 안에서 완성된다는 것이다. 일차적으로는 요한 계시록 1장 12절에서 18절로 완성이 되고 말이다. 그래서 거기에 나오는 예수님의 모습이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는데, 이것이 바로 제사장 복장이라는 것이다.
(계 1:12) 몸을 돌이켜 나더러 말한 음성을 알아보려고 하여 돌이킬 때에 일곱 금촛대를 보았는데
(계 1:13)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계 1:14)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같고
(계 1:15)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계 1:16)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계 1:17)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계 1:18)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찌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 이러한 예수님의 영광스러움이 우리들 속에 그대로 이루어짐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마치 다니엘의 세 친구들이 인자와 함께 불 속에서 강강술래를 한 것처럼 말이다. 이것을 보여줄 때 '아, 기분 좋다' 라고 하는데, 그런데 이런 기분 좋음으로 말미암아 주위에 그렇게 구더기들이 들끓고 있다는 것이다.
* 다시 말해서, 지금 성도들은 너무나 기분이 좋아서 침을 질질 흘리면서 꿈을 꾸고 있는데, 한쪽에서 '야, 뭐하노? 빨리 빨리 교회를 성장시켜야지' 라고 떠들어대는 작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계 4:10)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 천국에서 상(常)을 주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를 연결해주는 매개체라는 것이다. 주시는 분과 도로 던지는 자들이 같은 레벨이 되는 것을 확인하는 것인데, 거기에 동원되는 것이 상(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행한 데로 상을 주신다' 라는 것은, 주님의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그 자체를 행위라고 한다는 것이다. 요한 계시록에서 말이다.
* 이제 요한 계시록 5장을 살펴보자.
* 5장을 보면, 자기 백성은 어린양이 만든다는 것인데, 그런데 왜 어린양인가? 죽음을 당한 유월절의 어린양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영광스러운 분이 이 지상에서는 너무나 초라한 모습이라는 것이다. 너무 서글픈 운명이라는 것이다. 오죽 했으면 여자들이 십자가 달릴 때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쯧쯧' 했겠는가? 그래서 그 여자들이 시체에 향유라도 뿌려주려고 했는데, 그러나 그것이 믿음인가? 살아나니 전혀 알아보지 못하고 무서워서 '어머, 아저씨는 누구입니까?' 라고 했다는 것이다.
* 이따위 행동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을 믿어야지 말이다. 그런데 무슨 성지순례가 다 있는가?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것, 이런 것을 2장과 3장의 나오는 교회에 요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자기가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것은, 자기처럼 살아난 것을 믿는 모습이 있는가를 확인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곱 교회에 편지한다는 것이다.
* 예를 들어서, '배가 나오고 뚱뚱한 아버지가 편지하기를' 라고 하면, 그 아들은 그 편지한 분이 자기 아버지임을 단번에 안다는 것이다. 척하면 삼척이라는 것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말이다.
* 다시 말해서,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편지하기를' 라고 한다면, 그러한 '부활하신 주님의 위상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자가 누구인가?' 라는 것이다. 이런 자들에게는 만나도 주고 생명나무도 주고 구약의 모든 축복과 영광을 다 먹으라고 준다는 것이다.
(계 5:9) 새 노래를 노래하여 가로되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계 5:10)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 노릇하리로다 하더라
* 여기서 '인봉을 뗀다' 라는 것은, 거기에 기록된 대로 반드시 자기 백성을 구원해내는 작업을 구체적으로 실시한다는 것이다. 자기 백성을 건지고 괴롭히는 놈들은 심판하고 말이다. 즉, 심판과 구원을 어린양이 보좌에서 동시에 실시한다는 것이다.
* 그리고 10절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와서 찬송하는 것을 연상케 한다는 것이다. 너무나 특별하게 어린양 때문에 구원받았으니 모든 영광을 어린양에게 돌려드린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4장에서 24장로들이 면류관을 던지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계 4:10)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 그렇다면, 여기서 '24장로' 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위해서 자기의 목숨을 바친, 순교자들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 10분 휴식! (tape 2 끝)
* 질문 - 5장의 책이 생명 책이라고 할 때, 6장에서는 일곱 인(印)으로 봉인되었다고 하는데,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 대답 - 요한 계시록을 구원을 위한 책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하면 아무런 어려움이 없는데, 그러한 생명 책이 있음은 어떠한 인간들도 행위로 구원받을 수가 없다는 것을 말한다는 것이다. 즉, 구원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도대체 일방적으로 정해놓은 어린양의 원리에 인간들이 어떻게 감히 도전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 모세가 산위에 올라가 보니 책이 있었는데, 그런데 그 책은 자기 백성의 명단이었다는 것이다. 보통 일반적인 책 같으면 모세가 왜 신경을 쓰겠는가? 그런데 그 책에는 지금 산밑에 있는 자기 백성들의 명단이 기록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 다시 말해서, '이미 구원이 확정된 책인데, 이것을 어떻게 벗기는가?' 라는 것의 연관성 문제인데, 그러나 그 생명 책은 구원이 아니라 심판의 책이라는 것이다. 이미 생명 책이 있다는 것은, 생명 책에 자기 이름을 올려놓으려는 인간들의 모든 시도가 헛됨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 하나 벗길 때마다 모든 인간들의 시도가 다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현재 우리들로서는 누가 생명 책에 기록된 자는 모르는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예수님을 전했더니만 그들이 공격을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생명 책에 기록된 구체적인 내용이라는 것이다.
* 이것이 바로 다니엘의 세 친구들의 모습인데, 그러나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자기들이 불 속에 들어가면 불에 타 죽지 않고' 라는 시나리오가 없다는 것이다. 인자가 자기들을 살릴 줄 몰랐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아니하실지라도'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니엘의 세 친구는 무엇인가? 자기들의 존재 이유가 구원이 아니라, 느부갓네살 왕을 심판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 이와 마찬가지로, 분명히 생명 책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임에 분명하지만, 그러나 그들의 존재이유는 자기 구원을 확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심판하기 위한 도구로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印)을 하나씩 뗄 때마다 새로운 순교자가 등장하면서 새로운 심판의 빌미들이 계속해서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계속 드러나는 이 모든 것들을 모두 끌어 모아 보니까, 죽음을 당한 어린양의 운명 속에 함축되어있다는 것이다.
◈ 인(印)을 떼는 분의 운명에 떼어서 나오는 자들의 운명이 다 포함된다 !!
* 다시 말해서, 죽음을 당한 어린양이 생명 책을 떼는데, 떼시는 분과 떼어서 나오는 자들이 결국은 동일하다는 것이다. 인(印)을 떼는 분의 운명에 떼어서 나오는 자들의 운명이 다 포함되어져 버린다는 것이다. 결국 서로가 같은 운명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6장에 나온다는 것이다.
* 질문 - 인(印)을 떼는 순서를 반복의 의미로 보면 어떻습니까?
* 답변 - 그것이 아니고 '양파껍질 벗기기' 라는 것이다. 일곱 교회가 이미 껍질이 벗겨졌는데, 그것이 그대로 일곱 인(印)이 되고, 그것이 일곱 나팔이 된다는 것이다. 즉, 일곱 교회가 일곱 나팔이 되고, 일곱 대접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일곱 인을 떼는데 일곱 나팔이 나오는 것이다. '1,1,1,1,1,1, 그리고 7' 이라고 하면서 이 7이 일곱 나팔을 다 포함하고, 이 일곱 번째 대접 속에 마지막에 심판이 모두 다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나온다. 그래서 이것이 일곱 교회에 다 있으니 역사는 흐르는 것이 아니고, 이미 심판으로 고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 예를 들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성을 몇 바퀴를 도는가? 모두 합쳐서 총 13 바퀴를 도는데, 그러나 핵심은 마지막 날에 일곱 바퀴를 돌았다는 것이다. 다른 나머지는 일곱에 의미를 주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1,1,1,1,1,1, 그리고 7' 이라는 것이다.
* 뒤의 것이 앞의 것을 다 포함한다는 것이다. 마지막 심판 때에 생명 책과 유황불이 일곱 교회 안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7바퀴를 도니까 무너졌다는 것은,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셨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즉, 여리고 성은 하나님께서 무너뜨렸다는 것이다. 백성들은 언약궤를 들고, 경고의 나팔을 불면서 하나님께서 무너뜨렸다는 것은 증거하는 증거자라는 것이다.
* 그러니 요한 계시록에서, 나팔도 심판이고, 대접도 갖다 붓는 것이니까 모두 다 심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 계시록은 심판의 책인데, 이것을 압축하면 모든 것이 다 '십자가 중심' 이라는 것이다. 주님의 피와 살을 마시지 않는 자는, 즉, 주님의 피와 살을 건드리는 자는 모두 다 죽인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속죄 제물에 관심이 없는 자는 모두 이단이기에 죽인다는 것이다. 그들은 교회성장이나 목회 등의 다른 엉뚱한 것을 생각하니 말이다.
* 이제 요한 계시록 6장을 보도록 하자.
(계 6:1) 내가 보매 어린 양이 일곱 인 중에 하나를 떼시는 그 때에 내가 들으니 네 생물 중에 하나가 우뢰 소리같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 이 내용은 구약 스가랴에 나오는 것인데, 스가랴에서 4 마리의 말을 사방에다 내보내는데, 그런데 거기에 천사는 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요한 계시록에는 등장하고 말이다. 이는 상징이 상징으로서 더욱더 구체화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실제화는 아니고 말이다.
* 다시 말해서, 3+1은 덮쳐오기는 하지만, 그러나 1이 3은 아니라는 것이다. 계속해서 상징을 더 추가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 상징이 무엇인지는 묻지 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실제는 이미 나왔으니까 말이다. 그 실제는 바로 일곱 교회라는 것이다. 그 이상의 실제는 없다는 것이다.
* 일곱 교회에 나오는 거짓교사, 니골라당 등이 악마이고 나쁜 놈들이라는 것이다. 그 당시 사람들이 왜 교회에 다니면서도 세상적이었는가? 교회가 개판이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부요하다' 라고 하는데, 이런 부요함은 어디에서 배웠는가? 교회 밖의 자본주의로부터 들어왔다는 것이다.
* 요한 계시록에서 이것이 사고 팔 때 도장 찍는 것으로 나오는데, 이것은 상징이고, 이것이 이미 일곱 교회에서 구체적인 모습으로 나왔다는 것이다. 이것이 확대된 것이 일곱 인이고 말이다. 계속해서 요한 계시록은 상징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는 일곱 교회에 이미 모두 이야기를 해놓았다는 것이다. '못 먹어도 참아라', '잘산다고 구원을 받는가? 그것은 벌거벗은 것이다' 라는 식으로 말이다. 이것을 요한 계시록에서는 상징적으로 '666'으로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 이렇게 상징이 계속해서 추가되는 것이지, 상징이 실제적인 용어로서 사용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다에서 짐승이 올라오고, 머리에는 뿔이 달리고 말이다. 어느 목사가 머리에 뿔이 있는가? 일곱 교회의 악한 사도와 거짓 사도 등이 요한 계시록 13장에서는 거짓 선지자로 나타나고 말이다. 그러니 요한 계시록에 이렇게 모두 다 나타난다는 것이다.
(계 6:2) 내가 이에 보니 흰 말이 있는데 그 탄 자가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고 나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
* 이렇게 말을 타고 천사가 가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 스가랴에 보면. 박살을 내기 위해서 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말을 탔는데 연약한 남자의 모습과도 같다는 것이다. 분명히 엄청나게 강하고 무서운 모습이어야 하는데, 실제로는 나그네의 모습으로 다가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히브리서에는 나그네를 대접하라고 하는 것이다.
* 이러한 천사가 돌아다님은 마치 소돔과 고모라 때를 생각나도록 한다는 것이다. 창세기 19장에서, 두 명의 천사들이 어떻게 했는가? 북 치고 장구 치고 왔는가? 소돔과 고모라 성에 너무나도 조용히 와서 그저 롯에게 말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천사들에게도 참지를 못하고 상관(相關)하려고 하는 것이 인간이지만 말이다.
* 큰 소리로 설교한다고 교인들이 잘 듣는가? 잘못하면 교회가 친목단체가 될 수 있는데, 교인들은 그냥 재미로 나오기 때문에 목사는 말을 매끈하게 하려고 노력하지 말라는 것이다. 경상도 사투리를 안 쓰려고 서울방언을 흉내낸다든지 말이다. 매끈함은 서울 강남의 4인방을 찾아가면 된다는 것이다. 더듬거려도 참된 진리는 진리라는 것이다. 진리가 어디 가는가?
* 여기 요한 계시록 6장에 나오는 것이 분명히 천사인데, 그런데 주석가들은 별 희한한 소리들을 다 하지만,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천사는 예수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천사는 주의 형상을 담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형상은 기능과 통하게 되어 있으니 말이다.
* 다시 말해서, 내가 지금 하는 짓은 나를 시키는 분이 따로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형상을 주님의 영광스러운 따로 가지고 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형상은 심판이므로 음침한 색깔의 형상도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것이 스가랴에 여러 가지 다양한 색으로 다 나온다는 것이다.
* 스가랴에는 말을 동서남북으로 모두 보내는데, 이것은 그 어떤 놈도 심판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실은 첫째 인(印) 속에 전체 일곱 인(印)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곱 인' 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한 심판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7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을 의미하는 숫자이기에 말이다.
* 예를 들어서, 군대에서 다음과 같은 우스운 이야기가 있다는 것이다. - 야, 이등병 어디에 사는가? - 예, 대구입니다. - 대구가 다 네 꺼야? - 아닙니다, 대구 대명동입니다. - 여기에서 대구에 산다는 것이 첫째 인(印)이고, 대명동에 산다는 것이 둘째 인(印)이라는 것이다.
(계 6:3) 둘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둘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 하더니
(계 6:4) 이에 붉은 다른 말이 나오더라 그 탄 자가 허락을 받아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 버리며 서로 죽이게 하고 또 큰 칼을 받았더라
* 이것 자체가 심판인데,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칼로 찔린 이상은 이 세상에는 그 어떤 선한 요소도 없음을 천사가 와서 확인한다는 것이다. 회개하라고 찌르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찔러놓으면 '왜 하나님은 이 세상을 이렇게 고통스럽게 만듭니까?' 라고 오히려 하나님께 반발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봐라, 네가 이렇게 못됐지. 그러니 네가 내 아들을 죽였지' 라고 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 '하나님, 왜 홍수가 납니까?', '왜 갑자기 비가 옵니까? 결혼식도 못하게, 그것도 장자교단의 교회가 많은 곳에서 말입니다' 라고 그들이 하나님께 항변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었을 때, '여러분, 세상은 원래 이런 곳입니다. 빨리빨리 죽어서 천당 갑시다' 라고 하면 괜찮지만, '여러분, 무서운 재앙입니다. 회개합시다' 라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 왜냐하면, 이런 태도는 이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죽인 세상에서 아직도 미련과 애착가지고 있음이 폭로된다는 것이다. 홍수가 내리지 않았다면 미처 몰랐을 터인데, 홍수가 남으로 말미암아 모두 다 드러난다는 것이다.
* 누가복음 13장에서 망대가 무너져 18명이 죽은 일로 인해서 제자들의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하시는가? 죽은 놈들이 죄가 더 많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죄가 다 적다는 의미도 아니고 말이다. '너도 똑같은 사람이다' 라는 것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그 18명이 앞당겨서 죽었다는 것이다.
* 이번에 이 나라에 홍수가 나서 몇 명이나 실종되었는가? 256명이 실종되었는데, 그렇다면 실종된 자들을 보고, '나도 빨리 이 세상을 떠나야 되는 구나' 라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최순영이 죄가 없어서 저렇게 재산을 모았는가? 삼풍백화점은 무너지는 대한생명 빌딩은 저렇게도 멀쩡한가?
* 문제는 쑤시면 도대체 무엇이 나오느냐는 것이다. 그러므로 '왜 쑤십니까?' 라는 것은 신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저는 쑤셔도 괜찮습니다' 라는 자가 성도이고, 이것이 밧모섬의 사도요한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구약의 선지자들이 왜 그렇게 고생을 했는가? 정신나간 사람처럼 돌아다니고 말이다.
* 그러니 환상을 가지지 말라는 것이다. 로마서 8장이 얼마나 잘된 일인가? 환난과 핍박이 오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니 말이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는 것이기에, 환난과 핍박이 온다고 해서 불평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고생하셨기에 제자에게 그 정도 고생은 족한 줄로 알라는 말씀이 있는데, 즉, '제자는 스승보다 낫지 못하다' 라는 것인데, 스승이 당했다면 제자들도 그러한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즉, 이 세상이 너희들을 미워하는 것은 바로 스승인 예수님을 미워해서 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담대하라고 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가 세상을 이겼기에 말이다.
* 그렇다면, 우리 생각에는 이긴 꼴이 도대체 그것이 무엇인가? 십자가에 매달려서 벌거벗고 죽으니 말이다. 그러나 성경이 얼마나 명확한가? 물론 우리가 듣기는 싫어도(?) 말이다.
(계 6:5) 셋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셋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내가 보니 검은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가 손에 저울을 가졌더라
(계 6:6) 내가 네 생물 사이로서 나는 듯하는 음성을 들으니 가로되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로다 또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 말라 하더라
* 이것을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구약에서 이스라엘이 아람군대에게 포위를 당했을 때 문둥이들이 밖으로 나간 상황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신약에서는 이 땅을 떠날 생각을 하지 않는 인간들을 보여주는데, 그런데 그 중에서 문둥이나 세리나 창기들이 여기서 죽으나 나가 죽으나 똑같다고 하면서 나간다는 것이다. 지금 요한 계시록이 바로 그 때를 또다시 상기시킨다는 것이다.
◈ 멸망의 길은 오히려 다수의 원칙에 의해서 끌려간다 !!
* 민주주의는 다수결 원칙이지만, 그러나 성경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멸망의 길이 다수의 원칙에 의해서 끌려간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소수만 진리인가?' 물론 그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 그런데 이런 일들이 모두 우연이 아니라는 것이다. 스가랴의 천사들은 다 심판을 보여주는데, 왜냐하면 새 성전을 가지고 옛 성전을 심판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일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이러한 일로 인해서 인간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원망하는가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 인간들은 이렇게 인(印)을 떼는 것으로, 즉, 좋은 말로(?) 할 때는 말을 안 듣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난받는 자가 나팔을 부는데, 그런데 더욱더 원망하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결코 항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배후에 악마가 있기에 말이다.
(계 6:8) 내가 보매 청황색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니 음부가 그 뒤를 따르더라 저희가 땅 사분 일의 권세를 얻어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으로써 죽이더라
* 청황 색 말이 나오는데, 청황 색은 뭔가 기분 나쁜 암시를 준다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런 말을 탄 자의 이름이 사망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흉년과 사망이 발생하는데, 이것을 흔히 주의 뜻이라고들 하는데, 이것은 바로 인간들의 신의 뜻에 대한 반발성 확인작업이라는 것이다.
* 이번에 이렇게 홍수가 나는 것도 이런 신에 인간들의 반발성 확인작업이라는 것이다. 대한민국 온 전역을 빠짐없이 골고루 온 지역을 다 융단폭격을 실시했다는 것이다. 처음에 제주도부터 시작해서 전라도로 해서 서울로 올라갔는데, 그리고 강원도와 충청도를 거쳐 경상남도에 폭격이 시작되었는데, 그때 경상북도에 있는 교회들은 자기들이 기도해서 그렇게 되었다고 얼마나 좋아들 했던가? 그러나 마지막 딥임펙트가 경상북도에 남아있을 줄이야 !
(계 6:9)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 그런데 인간들이 어디에다 화풀이를 하는고 하니, 이 땅의 경건한 자들에게 한다는 것이다. 천사가 심판을 감행하면서 다니엘의 세 친구를 발생시킨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인(印)을 떼는 모습인데, 생명 책에 기록된 자가 누구인가 보니까, 지상에서 순교자는 억압받은 모습으로 생성된다는 것이다.
* 이것이 바로 구약의 '남은 자' 개념인데, 심판 속의 남은 자이고, 베드로 후서 2장에 나오는 것처럼, 롯은 그렇게 타락한 소돔과 고모라를 보고 심령이 상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구약에 일어난 상황들이다 나온다는 것이다.
(계 6:10)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 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
(계 6:11) 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 이렇게 예수 믿는 자만 죽이는데, '보아라, 하나님을 믿는 꼬라지가 그러한가?'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그 수가 차기까지' 라는 것은, 이미 분명하게 확정된 책이 있다는 뜻인 것이다. 새로 기록이 아니라 확정된 수만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 숫자가 144,000명이라는 것이다.
◈ 144,000명 -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이 이렇게 되게 했는가?
* 이는 분명하게 상징인데, 그런데 여호와 증인은 따로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불교에서의 보살과 같은 존재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144,000명' 이라는 숫자의 의미는, 몇 명이 아니라 무엇이 이를 되게 했는가의 차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원동력이 되는 사람은 전부가 다 14,000명이라는 것이다.
(계 6:12) 내가 보니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총담같이 검어지고 온 달이 피같이 되며
(계 6:13)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선과 실이 떨어지는 것같이 땅에 떨어지며
(계 6:14) 하늘은 종이 축이 말리는 것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기우매
(계 6:15)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자가 굴과 산 바위틈에 숨어
(계 6:16)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계 6:17)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 이렇게 그들이 하소연을 하니, 그 하소연에 의해 하늘의 별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요엘에서 나오는데, 마태복음 25장의 종말도 역시 요엘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이것이 소선지서에서 말하는 종말인데, 옛날 이스라엘의 멸망 때의 사건들이라는 것이다.
* 그런데 누가 심판하는가? 어린양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기존의 이스라엘이 문제가 아니라, 어린양의 이스라엘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즉, 지상에서 죽임을 당한 자기 백성들이라는 것이다. 아직 숫자가 차지 않아서 그렇지, 숫자가 차면 반드시 대 심판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 계속해서 요한 계시록 7장을 보자.
(계 7:4) 내가 인 맞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 맞은 자들이 십 사만 사천이니
(계 7:5) 유다 지파 중에 인 맞은 자가 일만 이천이요 르우벤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갓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계 7:6) 아셀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납달리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므낫세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계 7:7) 시므온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레위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잇사갈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계 7:8) 스블론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요셉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베냐민 지파 중에 인 맞은 자가 일만 이천이라
* 하나님의 백성은 분명히 생명 책에 기록되어 있지만, 그러나 생성되는 현장은 고난 속에서 생성이 된다는 것이다. 고난이라는 심판 과정 속에서 말이다. 그래서 여기에 나오는 12지파는 한결같이 고난받는 자들의 지파라는 것이다.
* 히브리서 11장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아예 처음부터 고난받는 단체로 보는데, 그러나 사실 출애굽기를 보면 그들이 하나님을 원망해서 그런데 말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시고 난 뒤에 히브리서를 기록할 때쯤인 종말론적 관점에서 보면, 그들은 고난받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히 11: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히 11: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히 11: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 마찬가지로, 여기에 나오는 열두 지파는 이 땅에서 형성되고, 이 땅은 심판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심판이 잠시 중단되어야 하는데, 자기 백성을 고르는 작업을 위해서 말이다. 그런데 그런 자기 백성은 너무나도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자들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12 지파' 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12 지파란, 바로 고난 당한 어린양의 백성들이라는 것이다.
◈ 12 지파란, 바로 고난 당한 어린양의 백성들이다 !!
* 창세기를 보면 12지파는 야곱의 12아들인데, 요한계시록의 12지파는 어린양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참으로 놀랍다는 것이다. 야곱의 12아들은 야곱의 속성을 보여주는데, 그래서 유다와 레위만 뜨고 나머지는 작살나는데, 그러나 예수님의 아들들은 몽땅 다 축복을 받는다는 것이다.
* 그러므로 요한 계시록에서 12지파라는 것은 야곱과 12아들의 고리를 그대로 어린양에 그대로 적용시킨 것인데, 그렇다면 야곱의 운명과 동일한 운명이 12아들인 것처럼, 어린양의 아들들도 어린양의 운명과 동일한 운명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 그런데 야곱의 12아들 가운데는 잘린 지파가 많은데, 물론 그 지파 자체가 잘렸다는 것이 아니고, 그 지파의 숫자가 엄청나게 줄었다는 것이다. 그때 광야에서도 지파의 각 사람들이 잘렸다는 것이다. 지파는 남아있지만 지파답지 못한 놈들은 잘린다는 것이다.
◈ '12' 라는 숫자의 의미 - 이미 확정되었다 !!
* 그러나 어린양의 아들들은 12지파는 이미 생명 기록되어 있기에 잘리지를 않고, 이제는 완벽하다는 것이다. 전부 다 하늘나라에서 한결같이 각 지파마다 12,000명이고, 그래서 144,000명이라는 것이다. 야곱의 아들이 12명으로 확정된 것처럼 이 12는 이미 확정된 숫자라는 것이다. 그래서 12라는 것이다. 이미 확정된, 예정된 자들이라는 것이다.
* 물론 지파는 13지파이지만 야곱의 아들은 12명인데, 야곱은 자기가 정력이 좋아서 낳은 아들들이 아니고 하나님의 축복의 결과로 보았는데, 이러한 틀이 요한 계시록에도 그대로 내려온다는 것이다. 즉, 12지파는 어린양의 축복 때문에 생긴 자들이니까, 그들은 예수님의 운명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 요한 계시록의 12지파는 어린양의 축복 때문에 생긴 자들이다 !!
* 그래서 요한 계시록의 12지파가 구약의 12지파를 대체하게 되는데, 그래서 이들이 종려나무를 들고 어린양을 찬양한다는 것이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고 나서 종려나무를 들고 하나님을 찬양한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찬양할 때도 '호산나' 라면서 종려나무를 들었다는 것이다.
(계 7:9)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 이렇게 종려나무가지를 들었다는 것은 그야말로 이스라엘의 표시를 낸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흰옷을 입었다는 것은 피로서 깨끗하게 된 것인데, 1장 5절에 있듯이, 그의 피로 우리 죄를 씻었다는 것이다. 피로서 희게 한다는 것은 변화되었다는 것인데, 이것은 이사야에 나온다는 것이다.
(계7:10)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 이렇게 분명히 구원하심은 오직 어린양에게 있는데, 그러나 한국교회는 이것을 안 믿는다는 것이다. 자기들이 뭔가 해야만 하는 줄로 안다는 것이다. 선교를 안 하면 안 된다고 하는 이러한 사고방식이 오히려 선교를 방해한다는 것이다. 뭔가 선교이고 전도인가? '오직 구원하심은 어린양에게 있습니다' 라는 것이 선교가 아닌가?
* 얼마 전에 기독교 방송에 나가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해서, 소위 어른들이 '이 목사, 손 좀 봐야 되겠다' 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얼마든지 손을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여기 이렇게 손이 하나도 아니고 두 개나 있는데 말이다.
(계 7:11)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섰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 이런 상황에서 천사와 24장로들이 합세하는데, 그러므로 24장로는 12지파가 아니라, 4생물과 노는 자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에스겔과 같은 선지자의 위치라는 것이다. 그러니 교회에다 장로석을 만들어놓는 것도 괜찮다는 것이다. 다만 시체들을 모은 곳이라고 팻말을 붙여서 말이다.
(계 7:13)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계 7:14)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 이렇게 종려나무의 가지를 흔드니까, 너희들은 어디에서 왔느냐고 묻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뭐라고 하는가? 대구에서, 부산에서 왔다고 하지 않고, 환난에서 나왔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운명이 얼마나 험악한가?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난받는 자들인데, 이 환난은 자기가 출세를 하려고 하다가 당하는 환난이 아니라, 예수만 믿다가 환난을 당한다는 것이다.
◈ 흰색 옷 - 오직 그리스도만 드러낸다 !!
* 이러한 환난에서 나왔는데, 어린양의 피에 옷을 씻었더니만 그 옷이 희게 되었다는 것이다. 파랗게 된 것이 아니고 말이다. 그러니 흰색은 오직 그리스도만 드러낸다는 것이다. 즉, 이 세상에서는 순교 당하는 자들이고, 오직 예수만 전하다가 교회 부흥을 안 시킨다고 받은 환난이고, 그래서 눈물 흘리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 속죄제물의 완전성 거부하는 것은 이단이다 !!
* 다시 말해서, 속죄제물의 완전성 거부하는 것은 이단이라는 것이다. 관심이 속죄제물에 있지 않고, 교회성장이나 성공적인 목회 등의 다른 엉뚱한 것에 있다면 항상 이단이라는 것이다.
* 이렇게 흰옷을 입었다는 것은 스가랴 3장에 나오는 여호수아의 용서받은 모습인데, 어디에서인가? '사단 앞에서' 라는 것이다. 그런데 아직 사단이 나올 시점이 아닌데, 그것이 옛 뱀, 마귀 등의 사단의 앞모습이 천사들이 쑤시는 가운데 확실히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세상을 장악하는 '권력' 이라는 것이다. - 첫 째날 강의 끝 !!
* 질문 - 요한 계시록 6장 6절에 나오는 감람나무와 포도주는 무엇입니까?
(계 6:6) 내가 네 생물 사이로서 나는 듯하는 음성을 들으니 가로되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로다 또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 말라 하더라
* 답변 - 보통 주석들을 보면, 인(印)을 뗄 때는 완전히 박살내는 심판이 아니라 아직은 뭔가 여유가 있다고 보는데, 사실 자세한 사정들은 모르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 사건들은 몰라도 되는데, 왜냐하면 그 원칙만 오늘날 적용시키면 되니 말이다. 그래서 이 세상은 살기가 어렵다는 것만 설명해주면 되는 것이다. 그 당시 일곱 교회의 세세한 사정을 물론 알면 좋지만 몰라도 괜찮다는 것이다.
* 그리고 여기에 나오는 감람유와 포도주는 이러한 경제적 어려움에서 주어지는 최소한의 양식으로 보면 된다는 것이다. 즉, 요즘말로 하면 홍수가 나서 수해 당한 자들을 위해서 베풀어지는 '컵 라면' 정도로 보면 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