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산행 일정 : 2월 16일 19시 18분 출발, 2월 16일 23시 46분 대관령 도착, 2월 17일 0시 16분 산행시작 2월 17일 10시 41분 진고개 도착 (총 산행시간 : 10시간 25분)
3. 종주자 명단 : 최현찬(산행부대장, 경주교도소), 권종훈(산행부대장, 경주월성중학교)
4. 운전자 : 김근석, 이상명
5. 차량 제공 : 이상명
6. 도움 주신 분들 : 김칠원, 김혜실, 지덕래
12월과 1월에는 추위와 눈으로 인해 엄청난 고생을 하였지만 그렇다고 2월달에는 중단을 할 수도 없고 한번을 더 가더라도 중단없는 산행을 위해 다소 무리(최현찬 회원이 지난번 구간에서 다친 다리의 상태가 좋지 못해서)가 되더라도 산행을 강행하기로 하였다.
설 연휴가 끝나고 2월 14일 저녁에는 안동소주와 교동법주, 소주, 맥주 등을 늦게까지 마신 관계로 쉽게 술이 깨지를 않는데다가 2월 15일 졸업식을 마치고 또다시 밤늦게까지 마신 관계로 산행에 다소 무리가 따를지도 모르는 피곤한 상태에서 산행을 출발하게 되었다.
가다가 용강동 기사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지치고 피곤한 몸을 달래기 위해 잠시 눈을 감아보지만 오히려 정신은 더욱 말똥말똥해진다. 삼척과 강릉을 지나 대관령 정상 도착 직전에 집에서 전화가 왔다. 전화에서 흘러나오는 내용은 하늘이 무너지는것 같은 비통한 내용이다. 다름아닌 사촌형님이 갑작스럽게 운명을 달리하셨다는 연락이다.
갈등이 생기는 가운데 차는 대관령 정상에 도착하고 더이상 통화가 되지 않는 불통지역이다. 순간적으로 고민과 번민에 사로잡힌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곰곰히 생각해 보지만 뚜렷한 해결책이 없다.
이 늦은 밤중에 이곳까지 힘들여 어렵게 운전해 온 회원들에게 산행도 하기전에 되돌아가자는 이야기를 차마 꺼낼수도 말할 용기도 없다. 좀 더 일찍 알았더라면 몰라도 지금에 와서... 만약 되돌아간다면 다른 분이 다시 또 한번 이곳 먼데까지 수고를 해야 하는것이 아닌가.
다른 때보다 도착해서 많은 시간을 지체한다. 하지만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어차피 지금 돌아가더라도 아침이 되어야 도착할 것 이왕지 이렇게 된것 내일 일찍 진고개에 도착해서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하고 준비를 해서 차에서 내리니 바람이 세차게 불어온다. 슬픈 마음이 뇌리를 떠나지 않지만 최선이 아니면 차선이라도 선택하라고 하지 않는가.
차에서 내리니 대관령 칼바람이 뼛속까지 파고드는 차가운 날씨에 바람이라는 놈이 싫다는데도 자꾸 얼굴에 애무(?)를 해 얼굴이 얼얼하고 따갑다. 아무리 좋은 애정표현도 상대방이 싫다면 하지 않는것이 동방예의지국의 예의범절이라 생각하는데 이것은 완전히 일방적인 짝사랑인것 같다.
거대한 국사성황당 입구 표지석 옆으로 들어서니 오른쪽으로 지난번 매달아 놓은 표지기가 강풍과 추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따뜻이 맞이하면서 반기고 있는 것 같다. 곧바로 능선 마루금을 따라 오르니 어둠속에서 용도가 불분명한 통나무를 대간길 양옆으로 세워 만든 방책이 성벽처럼 줄지어 서 있다. 그리고 밀레니엄 천연수 주목의 어린 묘목은 보호 그물이 쳐진채 엄청나게 심어져 있는데 아마도 훼손된 자연을 회복시키려는 우리 인간들의 노력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것 같아 다소나마 위안이 된다.
하지만 밤중이라 국사성황당은 들러지 않고 지나치게 되는데 이곳 국사성황당에 대해 잠시 언급을 하고 지나가도록 하자. 그러면 먼저 강릉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온갖 씨앗을 잉태한 대지의 신들에게 바치는 생명의 축제 즉 강릉 단오제를 들 수 있는데 단오제의 주신은 대관령의 국사서낭신(범일국사)과 산신(김유신) 그리고 강릉시내에 있는 국사여서낭신(강릉의 처녀)이다.
먼저 범일(810-889)은 구산선문의 하나인 사굴산파를 개창한 선승이며, 대관령의 서낭신으로 강릉일대에서는 신격화된 존재이다. 15세에 중이 되어 흥덕왕 6년(831년) 2월에 당나라에 유학해 여러 고승을 만난 범일은 중국 마조선사의 제자인 제안이라는 고승에게서 성불하는 법을 듣는다.
'도는 닦는 것이 아니라 더럽히지 않는 것이니, 부처나 보살에 대한 소견을 내지 않는 평상의 마음이 곧 도'라는 깨우침을 얻은 것이다.
844년에 귀국하여 강원도 명주군 구정면 학산리에서 구산선문의 하나인 굴산사를 창건하고 40여년을 주석하며 후학을 가르쳤다. 대표적인 제자로는 보현사를 세운 낭원대사 개청과 행적이 있다. 그후 열반하여 대관령 성황당에 모셨다고 하는데, 강릉과 영동지방의 수호신이 되어 서낭신으로 모시는데, 이 신이 한번 화를 내면 반드시 영동지방에 홍수, 폭풍, 가뭄, 질병 등 갖가지 재앙이 따랐다고 한다.
그리하여 매년 음력 4월 1일이면 제물과 술을 올리고 4월 15일에 무당과 관청의 노비 수백명이 제사를 올린 뒤에 굿놀이를 하고 신이 들린 생나무 신목을 꺾어 강릉시 홍제동에 있는 여성황당에 잠시 모신다. 그리고 음력 5월 5일 단오 전날 다시 신목을 모시고 강릉 남대천 백사장에서 풍년제를 비롯하여 민속놀이인 관노가면놀이를 하고 단오제가 끝난 뒤 신목을 태워 버리는 풍속이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학산리에 내려오는 그의 탄생설화는 매우 실증적인데 그 설화 속의 우물 석천(石泉)이 마을 삼거리에 있다. 학산마을에 사는 한 처녀가 석천에서 바가지로 물을 뜨니 물 속에 해가 떠 있었다. 물을 버리고 다시 떴는데도 여전히 해가 있었다. 그 물을 마신 뒤로 처녀에게 태기가 있었다.
아이를 낳았으되 아비가 없는 자식이니, 마을 뒷산 학바위 밑에 버렸다. 아이를 낳은 처녀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이튿날 그곳에 다시 가보니 뜻밖에도 학과 산짐승들이 모여 젖을 먹이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보고 아이를 비범히 여겨 데려다 키웠다. '해가 뜬 물을 마시고 태어난' 그 아이가 바로 범일이었다.
또 왜구가 침략할 적마다 대관령에 올라 술법으로 물리치는 등 강릉지방에는 그에 관한 많은 전설이 구전된다고 한다. 그런데 이때 왜구의 침략은 임진왜란을 말하는 것으로, 신라시대 사람이 조선시대에까지 등장하는 것이 괴이하지만 다분히 설화적인 요소임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다음은 이곳 산신인 김유신은 허균의 "성소부부고"에 '그는 어려서 이곳에 와 수련하였는데 산신이 검술을 가르쳤고, 그의 칼은 명주 남쪽 선지사에서 만들었는데 90일만에 완성되어 광채가 달빛을 능가했다. 이에 장군이 그 칼을 차고 고구려를 평정했으며, 죽어 대관령의 산신이 되었다고 한다'는 기록이 있다.
마지막으로 국사여서낭신은 옛날 강릉 남문동의 정씨 집안에 예쁜 딸이 하나 있었다. 하루는 정씨의 꿈에 대관령 성황이 나타나 '내가 이집에 사위가 되겠노라'고 청했다. 그러나 정씨는 사람이 아닌 귀신을 사위로 삼을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얼마 후 정씨의 딸이 노랑저고리에 남치마로 곱게 단장하고 툇마루에 앉아 있다가 갑자기 호랑이에게 물려가고 말았다. 딸을 물어간 호랑이는 산신이 보낸 사자였다.
딸을 잃은 정씨는 호랑이가 물어간 사실을 알고 대관령 국사성황을 찾아갔다. 그러나 딸은 성황과 함께 서 있는데 벌써 죽어 혼은 없고 육신만 비로소 떨어졌다고 한다. 이에 사람들은 그녀의 모습을 화폭에 담아 대관령 여서낭신으로 모시고 해마다 그녀가 호랑이에게 물려간 4월 15일이면 서낭신을 여서낭사에 모셔가 합위시키고 제사를 올렸다. 이 행사는 지금도 강릉단오제 기간중에 이루어진다고 한다.
이외에도 강릉에서 대관령으로 오르다보면 대관령 길목에 구산휴게소가 있고 휴게소 맞은편에는 일명 '마패 서낭'이란 전설을 품은 구산 서낭당이 있다. 이곳 서낭당에 대한 전설은 옛날 횡계의 삼정평에 이괴산이라는 사람이 반란을 꾀하며 숨어 살았다고 한다.
이에 정부에서는 이괴산의 역모를 평정하기 위하여 암행어사를 내려보냈는데염탐을 위해 삼정평에 들어갔던 어사가 그만 붙잡히는 신세가 되었다. 꼼짝없이 죽을 지경에 처한 어사는 한 아낙네에게 마패를 꺼내주면서 구산역의 찰방에게 군사를 보내달라는 편지를 부탁했다. 아낙네는 밤새 산길을 달려 구산역에 이르자 그만 기진맥진하여 쓰러져 죽고 말았다. 죽은 아낙네의 품에서 마패와 편지를 발견한 역졸들은 삼정평으로 달려가 어사를 구했다고 한다. 이때부터 구산 서낭당을 마패 서낭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대관령을 출발한지 20여분 후인 0시 37분에 한국통신 중계소에 도착한다. 중계소에 도착하기 전 좌측 아래에는 큰 건물이 보이는데 국사성황당인지 아니면 다른 사찰인지 불이 밝게 켜져 있지만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계속해서 진행하는데 우측으로는 강릉시가지 불빛이 보이고 1시에는 산불감시카메라가 설치되어 있는 지점을 통과하니 갈수록 눈이 많이 쌓여있다. 한국항공무선표지소가 나오는데 이 시설물은 세계의 곳곳 주요지점에 떠 있는 비행기의 현재 위치를 확인하기 위한 표지물을 지나 새봉에 이르게 된다. 한국항고우선표지소가 주위를 차지하고 있어서 새봉은 정상까지 올라가지 않고 좌측으로 우회하게 되어 있었다.
새봉을 내려서면서부터 왼쪽으로 대관령목장의 울타리를 끼고 걷는 길이 많아 대간 종주산행이라는 느낌보다는 대지를 산책하는 느낌을 주게 된다. 1시 30분 한일 목장 터에 접어들었으며 여름 같으면 대관령의 바람이 불때마다 물결치듯 술렁이는 목초지를 걸으면서 이국적 분위기를 느낄수 있겠지만 지금은 눈덮인 목장터를 걷다보니 보이는 것은 오직 어둠 속에서 대지가 온통 흰눈으로 하얗게 뒤덮여 있다는 것이다.
목장의 도로를 따라 한동안 걸어오다보니 이정표가 세워져 있지만 방심해서 제대로 보지 않고 통과하여 조금 지나니 갑자기 눈이 많이 쌓여 있으며 다닌 흔적을 찾을 수 없어 좌측으로 가야할지 우측으로 올라가야 할지 한동안을 헤메다가 우측으로 꺾여지는 오르막으로 오르니 도로는 좌측으로 나 있으며 우측으로는 목장지대이다. 이곳 대관령 목장은 거의가 능선 마루금을 중심으로 좌측에 목장이 조성되어 있는데 여기는 능선 좌측으로 한동안 도로가 연이어져 있다.
아무도 다니지 않은 목장의 흰 눈밭을 어릴적 동심으로 돌아가 동무들과 어울려 눈싸움도 하고 강아지처럼 온천지를 뛰어다니면서 재미있게 놀았으면 좋으련만... 불혹의 나이를 넘어선 사람들이 이 밤중에 그런 행동을 한다면 누가 봐도 미친놈이라고 할 것이다.
끝간데 없을 정도로 넓은 산자락 전체가 오로지 목장일 뿐이다. 이구간을 제대로 볼려면 풀이 자라고 있는 여름철에 산행을 하든지 아니면 겨울철 눈쌓인 목장을 거닐면 제격일 것 같지만 지금은 밤중이라 광활한 초원위에서 말달리는 선구자를 연상만 하면서 지나갈 수 밖에... 마침 가수 남진이 부른 노래가 생각이 난다
저 푸른 초원위에 그림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우리 님과 한백년 살고 싶어 봄이면 씨앗뿌려 여름이면 꽃이 피네 가을이면 풍년되어 겨울이면 행복하네 멋쟁이 높은 빌딩 으시되지만 반딧불 초가집도 님과 함께면 나는 좋아 나는 좋아 님과 함께면 님과 함께 같이 산다면 저 푸른 초원위에 그림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우리 님과 한백년 살고 싶어.
그리고 좌측에는 도암면 횡계리에 의야지라는 마을이 있다. 한때는 함경도에서 정감록을 믿고 흘러들어온 사람들이 모여 살기도 했으며, 거지왕 김춘삼이 넝마 무리를 이끌고 이곳의 산간을 일구며 살았다는 얘기도 남아 있다.
오늘날 의야지마을은 베링해나 알래스카에서 잡혀온 동태가 주문진에서 내장을 빼어내고 다시 횡계로 와서 하루동안 맑고 시린 개울물에 담겼다가 덕장에 걸린다. 그렇게 겨우내 눈보라 속에서 얼기와 녹기를 몇 번이고 거듭한 뒤라야 비로소 맛좋은 '노랑태'가 된다. 그런데 너무 추우면 희어지고 너무 더우면 검어지니 날씨 또한 많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무렴, 추위와 눈 속에 얼음 박힌 제 육신을 걸었으니 그 맛이 어찌 예사롭지않겠는가 맛좋은 황태여! 이곳 횡계의 특산품인 황태를 말리는 덕장은 전국에서 단연 으뜸으로 꼽힌다.
북쪽으로 연결된 능선은 동급서완의 지형으로 좌측으로 계속되는 목장지대를 지나 지도상의 1157.1m인 선자령에 올라선다. 삼각점과 길다란 안테나가 설치되어 있지만 정상이라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으며 1시 43분이다. 이곳 선자령은 백두대간상의 마루금을 형성하는 산으로서 대관령과 곤신봉 사이에 위치한다.
대관령 길이 지금처럼 넓어지기 전에는 대관령과 더불어 영동과 영서를 잇던 중요한 길목이었다. 차량 통행은 할 수 없지만 산세가 부드러운데다가 동해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시원함과, 겨울철에는 다른 지역에 비해 워낙 눈이 많이 내리기 때문에 겨울산행을 즐기는 등산객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만약 이곳에서 하산을 할려면 오른쪽으로 내려가면 초막골로 해서 영동고속도로의 초막교가 나온다.
이 봉우리 이름이 언제부터 선자령으로 불렸는지는 알길이 없지만 산경표에는 대관산이라 하고 동국여지지도와 사탑고적고에는 그 아래 보현사에 의탁하여 보현산이라 적어 놓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 보현사에 관한 기록을 전하는 태고사법에는 또 만월산으로도 적혀있다. 아마 보현사쪽에서는 둥그스럼하게 떠오르는 달덩이로 보였던 모양이다.
정상에서 내려서니 진달래가 많이 자라고 있으며 도로인지 방화선인지 눈이 쌓여 있어서 잘 모르겠지만 1시 50분에 도착한다. 계속되는 목장을 지나니 보현사 갈림길 안부에 이정표를 설치해 놓았으며 선자령 900m, 보현사 2.1km, 대공산성 2.6km라 적혀 있으며 2시 3분이다.
우측으로 내려가면 보현사골이다. 이 골짜기에는 옛날에 '보현촌'이라는 자기소(磁器所)가 설치되어 있었다고 세종실록지리지에 전하며, 보현사에는 낭원대사오진탑(보물 제191호)이 있는데 높이 6척, 폭 3척으로 세워진 이 탑은 고려 태조 23년(940년) 7월 3일에 세웠다고 한다. 낭원대사는 나이 24세(신라 문성왕 16, 854)에 출가하여 신라 경애왕째 국사의 예우를 받다가 96세에 이곳 보현사에서 입적했다는 것이 임영지의 기록이며 '임영'이란 강릉의 별호이다.
임영지에는 그 옛날 문수보현보살이 돌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와 이절을 한송사와 동시에 세웠다고도 전하며, 한송사는 강릉의 바닷가 남항진에 지금도 남아있지만 본래는 문수사라 불리어졌으며 문수보살이 지었다는 것이다. 이각의 동유기에는 '사람들이 전하기를 문수, 보현보살의 석상 2구가 땅에서 솟았다'고 하며, 또 '그 동쪽에 사선비(四仙碑)가 있는데 지금은 귀부만 남아 있다'고 동국여지승람 권 44에 전한다.
또 보현사에는 매월당 김시습의 흔적도 남아 있다. 매월당집에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는 13세에 어머니를 잃고 강릉의 외조모댁에서 자랐으며, 여기가 바로 그의 고향이었던 것이다. 그가 세조의 왕위찬탈 이후 방랑의 길을 떠나 보현사에 묵으면서 남겨놓은 시가 있다.
'보현사에 오고서부터 마음이 한가하니 지내기도 수월하네. 돌솥에다 새 차를 끓여내니 쇠향로에 푸른 연기 피어오르네. 나같은 도에서 먼 사람으로 속세 떠난 선사를 따라 놀면서 도를 물으니 도라는 것이 더욱 어렵구나 마음을 보려면 그 마음 다시 닦아야겠네.'
다시 오르막을 올라가니 대공산성 등산로 이정표가 설치되어 있으며 곤신봉 1.4km, 선자령 1.1km, 보현사 2.3km, 대공산성 2.4km, 대관령 6.0km라 적혀 있으며 계속하여 목장도로를 따르면, 두번째 대공산성 등산로 이정표가 나오는데 곤신봉 정상 300m, 선자령 2.2km, 보현사 3.4km, 대공산성 1.3km라 적혀 있으며 2시 40분이다.
대공산성은 약 4km의 석축 산성으로 백제 시조 온조왕 또는 발해 왕족인 대씩가 쌓았다는 전설이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기록에는 이곳을 보현산성이라고 적고 있다. 북쪽의 성벽은 험준한 절벽 지형을 이용해 쌓았는데 거의 무너져 있으며, 남쪽에는 다듬지 않은 돌로 쌓은 높이 2m 정도의 성벽이 있으며, 동 서 북쪽에 문터가 조금 남아 있다. 그리고 성 안에는 약 1000년 전에 쌓았다는 우물터가 있다. 고종 32년인 1895년 을미의병 때는 민용호가 이끄는 의병이 이곳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기도 했었다.
목장도로를 따라 계속 진행하여 2시 47분 1127m의 곤신봉에 도착한다. 좌측은 온통 목장지대이고 도로 바로 옆에는 정상만 바위봉으로 이루어진 부분을 그대로 남겨 두었기에 잠깐 올랐다가 내려온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벌써 지나온 선자령이 이곳에도 표시되어 있다. 이곳은 지도상 분명 곤신봉인데... 길가에 시멘트로 만든 통나무를 자른 것처럼 보이도록 산(山)자 모양의 둥글넙적하게 만든 표지판에 선자령이라고 큰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아래에 해발 1200m라 적혀 있다. 아마 삼양목장에서 세운 표지판이 아닌가 생각을 해본다.
목장도로를 따라 계속하여 진행하니 오른쪽으로 꺾이는 삼거리가 나오는데 밤중에 러셀이 되어 있지 않아서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한동안 오르내리면서 길을 찾느라 헤맨다. 오른쪽으로 길을 찾아 가다보면 송신안테나와 낡은 창고가 나오는 지점을 3시 30분에 지나 1140m의 삼양축산초지 동해전망대에 도착하니 3시 35분이다.
전망대 표지판 왼쪽에는 '1등급 우유' 표지판도 서 있으며 표지판 뒤 동쪽 바위 위로 쇠파이프로 난간을 둘러쳐 놓았으며 난간 아래는 절벽이다. 여기서 바라보는 동해쪽 밤조망이 무척 좋아 한동안 휴식을 취하면서 조망을 즐기다가 다시 출발한다.
계속 목장길을 따라 진행하니 중간에 잠시 산길로 접어들기도 한다. 이제 목장길을 걷는것도 약간은 지루함을 느끼면서 4시 10분에 지도상의 1163m봉에 도착한 것 같다. 동쪽으로 보이는 봉우리가 1173.4m의 매봉이 아닌가 생각이 된다. 휴식을 취하면서 빵을 꺼내 먹고 10여분을 머무르다가 다시 길을 찾아 잠시 헤매다가 우회전하여 목장도로를 따라간다.
4시 30분 다시 송신 안테나가 있는 곳에 도착하였으나 여기도 러셀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 5시에는 집중호우시 자동 강우량을 측정하는 계측기 있는 곳을 지나니 약간 작은 목장지대가 나오고 곳곳에 철조망을 설치해 두었으며 집인지 축사인지 구분할 수 없는 건물이 목장 가운데에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목장에는 소나무도 띄엄띄엄 서 있다.
오늘 산행은 거의 대부분이 왼쪽에 목장을 두고서 계속 걸어야하므로 잡목숲에 익숙한 종주자들에게 이색적인 느낌을 주는 구간이며, 멀리 보이는 황병산의 군사시설지역의 밝은 불빛을 기준삼아 계속 진행되는 것 같다.
백두대간은 오랜만에 숲속길로 접어든다. 숲으로 시야를 가린 채 한참을 정신없이 올라가는데 나즈막한 사람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이 어둠속에서 웬 사람소리... 올라갈수록 목소리는 더욱 또렷하게 들린다. 눈속을 뚫고 조금 더 올라서니 여러 사람이 음식을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6시 27분 서로 수고한다며 인사를 나누니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자기들은 수원시청 소속이며 8명이 팀을 이루어 대간을 종주하고 있는데 앞으로 3구간을 남겨두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조금전 산신제를 지냈다며 시루떡과 코펠에는 돼지찌게가 펄펄 끓고 있으며, 약주를 한잔 하라면서 권한다. 산꾼이 어찌 술을 싫다 하리요! 연달아 주는 술을 받아 마시고 나니 찌게와 떡을 많이 먹어라 한다.
눈 쌓인 산속에서 추위와 어두움을 뚫고 끓인 찌게와 함께하는 약주맛 생각만해도 군침이 돌지 않을 수 없는 분위기가 아니겠습니까? 거기에다 배고픔을 해소하기 위한 시루떡까지... 출출하든 배를 든든하게 채우고 나니 힘이 절로 솟아난다. 아직도 이곳은 무릎밑에까지 빠질 정도로 눈이 쌓여 있으며 한참을 올라서니 초원의 소황병산이 나온다.
소황병산 일대의 눈은 벌써 녹아 곳곳에 조금씩 남아 있을 뿐이다. 앞으로 엄청 광활한 삼양축산 목장이 펼쳐져 있고 그저 평평한 넓은 초지에는 지난해의 마른 초지로 황금색의 커다란 융단을 깔아놓은 듯하다. 어둠속에서 어렴풋이 소황병산 표지판이 보이는 곳으로 가니 6시 45분이다. 표지판에는 소황병산 1430m라 적혀있고 옆에는 목초는 우유와 고기입니다는 안내표지판이 있다. 그리고 소황병산 정상의 큰 바위에 목초는 단백질 자원이라는 내용의 글이 새겨져 있다.
정상에는 세찬 바람이 불고 있으며 기념촬영을 하고, 아직도 정상에는 엄청 밝은 불을 밝혀 놓은 황병산을 향하여 진행하니 발자욱이 여러 갈래로 흩어져 있어서 임도를 따라 가니 지뢰가 매설되어 있다는 경고문이 곳곳에 보이고 계속해서 올라가니 공군부대 정문이 나온다. 문이 잠겨 있으며 출입금지구역이다.
지도를 꺼내 보았더라면 황병산까지는 갈 필요가 없었을텐데 우리는 실전 백두대간 내용에 보면 '황병산의 군사시설을 바로 왼쪽에 두면서 다시 산길로 접어든다. 길이 양호한데 지도상에는 표기되어 있지 않은 임도가 노인봉까지 뚫려있다'는 말만 기억하고 군부대 입구까지 가게 되었던 것이다.
안부로 돌아오는데 서서히 동쪽 하늘에서 동이 틀려고 붉게 물들어 가고 있다. 소황병산과 군부대 사이의 안부에는 아직까지도 많은 눈이 쌓여있다. 지도를 꺼내 보니 대간이 분명 소황병산을 지나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곳 저곳 찾아헤매다 임도를 계속 따라 올라오니 곧 일출이 시작될 것 같다. 멀리 목장구석 부분에 표지기가 매달려 있는 것이 보인다.
주위에는 폐타이어도 보이고 앞에는 전봇대 같은 것이 두개 나란히 서 있다. 여기서 잠시 기다리니 7시 27분에 눈앞의 동해바다에 여명이 펼쳐지며 어둠을 몰아내고 구름사이에 조그만 둥근 빛이 비치기 시작하여 구름사이에 가려 있다가 7시 34분 구름사이에서 완전이 벗어나 밝은 빛을 발하고, 새봉을 지나 1시 30분경 시작된 목장이 소황병산에 와서야 완전히 끝나니 5시간 이상을 목장만 구경하면서 온것 같은 기분이 든다.
대간길은 소황병산 정상을 거치지 않고 숲속에서 나와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가야하는데, 우리는 숲속에서 목장으로 올라와 아무생각 없이 지도에 소황병산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만 믿고 바로 소황병산으로 갔기 때문에 약 40여분을 헤매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도 다행히 밤새도록 불을 밝혀두었던 황병산 중턱까지 가서 공군부대가 있다는 것을 확인했으며 소황병산에서 일출을 맞이할 수 있었다.
일출을 보고는 바로 능선으로 내려서니 눈쌓인 내리막길이라 제법 미끄럽다. 8시 4분 좌측으로는 안개자니로 내려가고 우측으로는 너등으로 하여 소금강으로 내려가는 길을 지난다.
청학동 소금강은 우리나라 대표적인 육산이자 불교적 색체가 흠뻑 담겨 있는 오대산의 노인봉 동쪽기슭에 자리잡은 소금강은 1970년 우리나라 최초로 명승지 1호로 지정될 정도로 빼어난 미를 자랑한다. 청학동 소금강은 금강산과 견줄 수 있을 정도로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다. 외금강에는 비봉폭포와 내, 외용수폭포, 옥소연과 칠자소, 연자대와 옥조대 같은 절경이 즐비하다.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되는 무릉계에서부터도 아름다운 경치에 눈이 황홀해진다. 십자소, 연화담, 식당암, 구룡연, 상팔담, 만물상, 선녀탕, 그리고 삼폭포, 광폭포를 비롯한 수많은 폭포가 계곡을 수 놓고 있다.
일찍이 이곳을 찾은 율곡 이이는 이곳을 찾아 금강산과 너무 닮은 이 계곡의 아름다움에 반해 "청학산기"에 '소금강'이라 했다. 청학동 금강사 입구에 있는 영춘대에는 이이의 필적이라 알려진 '소금강(小金剛)'이란 휘호가 지금도 선명히 남아있다.
노인봉 산장에는 8시 45분 도착하였으며 소황병산에서 노인봉 산장까지 길은 상당히 양호한 편이지만 아직까지도 눈이 많이 쌓여 있다. 산장에는 마침 괴짜 산장지기인 성량수씨가 매점앞에 앉아 있다. 이분을 처음 알게 된 것은 1981년 태백산맥을 단독 종주를 하고 라디오 프로그램에 나왔을 때 처음 이름을 접하게 되었고, 몇년전 겨울방학때 학생들을 데리고 오대산 산행을 마치고 다음날 노인봉을 거쳐 청학동 소금강으로 내려가면서 처음 얼굴을 본 기억이 있다.
그 당시 학생들과 함께 사진 한장만 같이 좀 찍자고 하니 물건도 안 사면서 사진은 무슨 사진을 찍느냐고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오늘은 기분이 좋은지 쉽게 대화가 되는것 같다.
오늘 일정은 도저히 구룡령까지는 무리인데다 집안의 일로 인해 진고개에서 마치기로 함으로써 여기서 남은 음식을 먹기로 하고 닭다리와 가지고 온 간식을 꺼내 먹는다.
마침 산장에 신선주가 있어서 청학동 소금강에서 신선(?)이 한번 되어 보고 싶은 마음에서 한잔씩 하기로 한다. 그런데 이곳 청학동 소금강에서 청학이란 본디 지상에는 없을 것이다. 단지 고결함으로 인해서 불로장생의 표본인 학에다가 신비감을 더하기 위해 푸른 빛 그윽한 자태를 덧붙여 신선의 상징으로 표현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따라서 그것은 더러움에 묻혀 사는 인간의 꿈인 것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인간의 때가 묻지 않은 청정한 고장에서만 산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러한 신선이 산다는 곳에서 잠시나마 신선으로 착각을 해서 두잔씩 마시면서 대간에 대해 여러가지 궁금한 점들을 물어보니 대답을 잘 해 준다.
3월 1일부터는 산불방지기간이라 산행을 하는데 있어 어려움이 많을 것이라면서 곳곳에서 지키고 있으니 조심을 하라고 한다. 그러면서 자기도 4월 15일경부터 지리산에서 향로봉까지 15일만에 완주를 목표로 백두대간 단독 마라톤 종주를 한다면서 지금도 연습을 하고 있으며 3월달이 되면 산장도 문을 닫고 서울가서 본격적인 연습을 하겠다고 한다. 과연 15일만에 가능(?)할런지... 우리가 보기에는 너무 무리한 계획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 보지만 꼭 성공하기를 기원합니다.
그러면서 4월 28일경 향로봉을 간다기에 우리도 마지막 구간 진부령 도착이 4월 28일날이라 이곳저곳 알아봐도 우리는 도저히 향로봉에는 갈 수 없으니 같이 좀 따라가자고 부탁을 하니 아마 힘들것 같다고 한다. 꼭 들어가고 싶다면 방송국 사람들을 대동해서 허락을 받아서...그렇지만 그것은 우리로서는 힘든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보니 벌써 40여분이 흘러갔다. 남은 간식은 산장에 남겨두고 노인봉을 향해 출발을 한다. 산장을 뒤로 해서 올라가니 9시 40분 노인봉 정상에 우뚝선다. 정상 표지석에는 노인봉 1338m라 적혀 있으며, 정상에 기묘하게 생긴 화강암 봉우리가 우뚝 솟아있는데 그 모습이 사계절을 두고 멀리서 바라보면 백발노인과 같이 보인다 하여 노인봉이라 불렀다 한다.
정상바위 곳곳에 눈이 쌓여 있으며 바람이 세차게 불어 잠시 청학동 소금강과 주위의 조망을 감상하고 기념촬영을 한 후 다시 진고개를 향해 출발하여 평지 비슷한 길을 오르내리는데 러셀이 되어 있지않다.
9시 59분 노인봉 대피소 1.1km, 노인봉 1.2km 지점에 도착하고 10시 15분에는 진고개 1.5km, 노인봉 2.4km, 동대산 3.2km 지점을 지나니 몇몇의 등산객들이 올라오고 있다. 급경사 내리막을 내려서니 10시 29분 노인봉 3km, 진고개 0.9km지점을 통과하니 한무리의 산악회 회원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올라오고 있다.
고랭지 채소밭이 나오고 이상명, 김근석 회원이 기다리다 우리를 찾아 올라오다 만나서 함께 내려오니 오대산 진고개 매표소가 나오고 곧바로 진고개 휴게소에 도착한다. 10시 41분 970m의 진고개에 도착하니 6번 국도가 지나가고 도로 주위와 앞에 보이는 동대산에는 많은 눈이 쌓여 있다. 다음에 가야할 구간을 확인하고는 서둘러 강릉으로 내려오는데 갑자기 먹구름이 끼면서 눈이 내릴것 같은 날씨로 바뀌고 있는 것을 보면서 무사히 주문진으로 내려왔다.
이번 구간은 산행에 힘든 곳은 없었지만 목장지대에 쌓인 눈에다 러셀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표지기도 제대로 없는데다 어두운 밤길이라 여러차례에 걸쳐 길을 찾느라 헤매다보니 많은 고생을 했으며 또한 거센 바람과 계속되는 목장으로 다소 지루하다보니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걸리게 되었다.
무사히 한구간을 마쳤지만 무거운 마음으로 주문진에서 점심을 먹고 서둘러 경주로 돌아와 내일 장례식 때문에 급하게 영천으로 발걸음을 옮기게 되었다. 어떠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운명을 달리하신 형님의 영전에 꼭 백두대간을 무사히 완주했다는 소식을 전할 것을 다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