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옷을 입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아주길 바란다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원치 않는다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되죠."
디자이너 자신의 '개성'보다는 입는 사람에게 '캐릭터'를 부여하는 재능. 이것이 바로 그녀를 독보적인 존재로 만드는 요인이다.
가장 현대적인 소재로 탈바꿈한 나일론
우아하면서도 지적인 부르주아, 밀라노 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하던 과격한 페미니스트로 정치에 대한 열정과 패션에 대한 관심을 조화시킬 수 없었던 미우치아. 정치 전단을 나눠줄 때도 쿠레주의 옷을 입고 있었던 그녀는 28세가 되던 해에 가업을 물려받았다.
그녀의 할아버지인 마리오 프라다(Mario Parda)는 1931년 최고급 가죽가방을 주문생산하는 사업가로 부유한 밀라노 사람들을 위해 트렁크와 수트케이스를 제작했다.(당시 프라다를 구입하려면 하인들을 고용할 수 있을 정도로 부자여야만 했다. 왜냐하면 당시의 여행가방은 한사람이 들기엔 너무 무거웠기 때문이다). 1975년 마리오가 세상을 떠난후 미우치아의 어머니인 루이자 프라다가 회사를 물려 받았는데 70년대 후반 그녀가 은퇴했을 때 프라다는 단지 고급가방을 만드는 여러 기업 중의 하나에 불과했다.
정치학을 전공한 좌익 경향의 학생으로서 그녀는 스스로의 그런 귀족적인 취향을 인정할 수 없었다. 가업을 잇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너무 부르주아적인 일이고 지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전형적인 여성의 일이었기에 심적 갈등을 겪었던 그녀는 곧 비즈니스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1978년에 선보인 튀지 않으면서도 은근히 돋보이는 세련되고 현대적인 디자인의 나일론 백이 첫 번째 도전. 일상적인 나일론에 대한 생각을 뒤집어놓은 새롭고 독특한 소재로서의 나일론을 생각해낸 그녀의 아이디어는 집요했다.
"오랫동안 머리 속에 있는 나일론을 찾아 헤맸는데 19세기에 설립된 군용물품 공장에서 드디어 발견했지요. 지금 그 공장은 문을 닫았는데, 그 공장에서 쓰던 기계들을 구입해 나일론을 생산했습니다. 방수 포코노(Pocono) 나일론은 조직이 가늘어서 촉감은 실크 같으면서도 아주 질긴 소재예요. 모두들 포코노를 모방하려 하지만 우리 품질을 따라잡을 순 없죠."
그러나 그녀의 첫 번째 모험은 실패로 끝났다. 적어도 처음엔 그렇게 보였다. 나일론 백에 대한 소비자의 반응은 냉담했고 생산을 중단하자는 의견도 많았지만 그녀는 밀고 나갔다. 성공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4,5년을 기다리니까 폭발적인 인기 품목이 되더군요. 그제서야 여성들은 나일론 백이 가진 현대적인 요소를 알아챈 거죠. 가볍고 튼튼하고 밤낮없이 언제나 들고 다닐 수 있는 가방이니까요."
에르메스, 루이비통, 구찌 같은 디자인이 가방의 고전으로 절대적이던 때 지금까지의 여성 모드와는 상관없는 안티모드(Antimode)적인 디자인의 핸드백을 만들어낸 사람은 미우치아였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프라다 백'이 가방의 고전으로 통한다.
진정한 모험이 시작된 80년대 기업인 파트리지오 베르텔리(Patrizio Bertelli)를 만나서부터이다. 프라다 왕국을 건설한 동업자이자 남편인 베르텔리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비꼬는 성격을 가진 이탈리아 태생의 악세사리 제조업자였다. 그들이 무역박람회에 참석했을 때 프라다는 그를 필사적으로 찾아내서 자신이 만든 가방을 모방하지 말라고 강력하게 요구했다. 그러나 결과는 베르텔리가 그 제품을 생산하게 되었다.
미우치아의 뛰어난 패션감각과 생산성, 시장에 대한 탁월한 안목을 가진 베르텔리의 결합은 지금의 프라다를 만드는 데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선천적인 디자인 감각으로 이론적이기보다는 본능적으로 디자인하는 미우치아의 잠재력을 흔들어 깨운 것도 그였고, 현재까지도 최고의 비평가 역할을 하고 있는것도 바로 그다. 바르텔리의 끈질긴 권유로 1985년부터 구두를 만들기 시작한 프라다. 그러나 결정적인 찬스는 여성복을 선보인 1988년에 다가왔다.
디자이너로서 정식교육을 받은 적은 없었지만 어릴 적부터 옷 입기를 즐겼던 그녀가 새롭게 도전한 의상 디자인은 또 다른 세계를 열어 주었다.
"옷에 대한 애착이 없는 날은 지독한 병에 걸려있다고 봐도 좋을 만큼 옷 입는 것을 좋아했어요. 패션사에도 관심이 많았고 나름대로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할 수도 있었구요. 직접적으로는 아니지만 이브 생 로랑에게 많은 걸 배웠습니다. 우리가 옷을 사고 입는 행위는 몸을 적당히 가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변신과 자기 표현의 욕구 때문이잖아요? 나는 컬렉션을 준비할 때마다 항상 패션의 즐거움, 변화의 기쁨에서부터 출발합니다."
프라다의 디자인에서 소재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그녀만의 독특한 디자인 세계를 보여주며 숱한 모방품을 낳았던 우아하면서도 현대적인 색상의 표현에 있어서 소재는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옷감은 나의 정열이에요. 옷감에 대해서는 어렸을 때부터 정확히 알고 있었죠. 어렸을 때부터 멎진 옷감들을 보고 자랐으니까요. 심플한 단색이나 무채색 디자인을 원할 때는 무엇보다도 옷감이 제일 중요해요. 화려한 천 말고 진짜 천. 한번은 나일론을 다른 천들과 혼합해서 사용했는데, 밝으면서도 더욱 현대적인 색채를 얻을 수 있었죠."
부부가 창작과 제조를 맡은 프라다는 제조 전과정에 있어서 엄격한 품질검사를 거친다. 핸드백과 구두, 의류를 디자인하고 생산하는 데 필요한 단일 운영 시스템을 구축했고, 이에 의해 모든 샘플들은 디자인에서 완성단계 이르는 전과정을 플로렌스 근처의 투스카니에서 거치게 되었다. 그녀 스스로 '강박관념'이라고 표현할 만큼 품질에 대한 엄격하고도 까다로운 기준은 프라다의 두 번째 성공 요인이다.
패션계의 화려함을 등진 수줍은 디자이너
미우치아 프라다는 매력적이다. 그러나 지나치게 매력적이거나 너무 빈틈 없어 보이지는 않는다. 또한 자신을 너무 드러내지 않는다.
"인터뷰는 제게 작품의 주제를 생각하도록 강요합니다. 그래서 수줍음을 타게 되고 사람들을 피하게 되나 봅니다."
미우치아는 그러한 모든 것들이 혼란을 가져다 준다고 말한다. 또한 자신을 매우 개인적인 사람이라고 설명하는 그녀는 패션계의 화려함을 좋아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거대한 대중적인 이미지를 갖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저는 다른 디자이너들처럼 유명해지는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제 생활의 현실성을 빼앗아가기 때문이죠. 저는 옷을 디자인하는 가정주부지 슈퍼스타가 아니거든요."
제트기로 날아다니는 다른 디자이너들과는 달리, 프라다와 베르텔리는 그들의 사적인 시간의 거의 대부분을 조용히 보낸다. 결코 사회적인 은둔자들은 아니지만 그들은 패션에 가장 민감하고 빠른 지역에 자주 가지도 않는다. 대신에 예술적이고 문학적인 친구들과 함께 밀라노에 있는 집에서 함께 지내거나, 보트를 타고 바다에 나가기도 하고, 단지 아이들과 시골길을 거닐면서 긴장을 풀기도 한다.
일에 대한 열정 외에도 부부 공감대를 이룰 수 있는 부분이 바로 미술이다. 밀라노에 미술 재단을 설립한 이들은 1년에 두 번, 컬렉션을 여는 장소에서 현대 미술가들의 작품을 전시한다.
또한 그녀는 사생활을 소중히 여기기 때문에 자기자신이나 가정생활이 대중에 공개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이것이 프라다를 완전히 베일을 걷어내지 않은 듯한 신비한 여성으로 남게 하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특별한 경우에 한해서 사진 찍는 것을 허락하기도 하지만 반드시 사전에 양해를 구해야 한다.
"저는 아주 부끄러워하는 편이어서 진지한 표정을 짓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요. 제가 비밀을 좋아하기 때문에 중립을 지키는 것을 더 좋아한다는 것이 문제죠. 사람들은 모든 사람이 자기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기를 원하지는 않아요. 저는 작품을 통해 제 생각을 표현하길 원해요. 작품을 통해 제가 누군지 알 수 있게 말이죠."
프라다는 디자이너의 삶에 커다란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생활과 호기심 어린 시선을 이해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녀는 인생에서 더 중요한 일을 해야한다고 늘 생각한다. 그것이 세상 사람들의 주의를 끄는 프라다의 평등주의적인 본성의 한 측면이다. 가족의 사업에 참여하기 전에 수년 동안 페미니즘부분에서 서열이 급상승하던 이탈리아 좌파의 실제 당원이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패션을 사랑했던 그녀는 "제가 다른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르게 사물을 보기때문에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었죠. 저는 남들과 다르게 생각하는 것을 싫어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어요. 이러한 본성은 저보다 더 강했으니까요."라고 말한다.
어떤 곳에서든 프라다는 패션에 대한 사랑으로 소비자와 디자이너로서 자신의 입장을 둘다 만족시킬 수 있었다.
"사람들이 한 남자, 한 여자, 혹은 친구들이나 사회를 위해 옷을 입는다면 사람들이 옷을 입는 방법에는 다 심오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패션은 그리 바보 같은 짓이 아니죠".
프라다 자신이 디자이너로서 가정의 일원으로서, 그리고 사회의 일원으로서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물론 그 모든 분야에서 최고의 성공을 이루는 것이 목표가 아니다. 그녀는 그것을 너무나 분명하게 자각하고 있다. "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연과 일, 가족, 행복을 조화시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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