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이 33년간 빌려 입었던 육신의 옷을 벗고 훨훨 자유의 몸이 되어 영혼의 존재로 돌아갔다.
햇살이란 이름은 고 이경숙이 위암 말기 판정을 받고 난 후 새 삶을 시작할 무렵 명상 중에 얻은 이름이었다. 세속의 시간으로 보자면 비록 6개월의 짧은 세월동안 불리어진 이름이었지만 시간의 수수께끼를 풀어 낸 그녀에게는 60년, 아니 600년 보다 긴 시간동안 불리어진 이름인지도 모른다.
“길어야 3개월 정도 갈 것 같습니다. 워낙 전이가 심해 위는 물론 난소와 자궁까지 모두 절제했습니다. 저희로서는 최선을 다했지만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수술을 마친 집도의가 수술 장갑도 벗지 않은 채 전해준 청천 벽력같은 말이었다. 순간 그녀의 지나온 세월이 한편의 드라마처럼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밝고 경쾌했던 그녀의 꿈 많은 초등학교 시절과 오빠의 대학 공부를 위해 중학교 졸업으로 학업을 포기해야하는 사춘기의 좌절, 등교를 하기위해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는 나보다 언제나 한발 앞서 출근길에 오른 그녀의 뒷모습, 씩씩함 뒤에 감춰진 은밀한 열등감이 얼핏얼핏 눈에 띠던 고향교회 청년부 시절, 어느 날 내 막내 동생과 결혼을 하겠다고 양장을 곱게 차려입은 모습으로 현관문을 들어서던 모습, 시어머니의 임종을 지켜보며 어렴풋이나마 죽음의 은총을 이해하고 상기된 표정으로 시어머니의 세간을 정리하던 모습, 더 이상 교회 다니는 일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오직 예수를 따라 사는 일에만 마음을 두겠다고,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내가 진행하던 영성 모임에 첫발을 들여 놓던 어느 봄날의 기억까지....
그렇다. 그녀는 내 막내 제수씨였다. 하지만 내가 크신 분의 안내를 따라 ‘친척과 고향과 아비 집’을 떠나던 날부터 그녀는 내 소중한 친구였고 신앙의 동반자였고 새로운 가족이었다. 나는 수술실 앞 원형 기둥에 맥없이 기대앉은 막내 동생에게 조심스레 다가갔다.
“이것은 성수 엄마가 선택한 큰 시나리오다. 그 선택이 몸을 벗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삶으로의 전환인지는 좀 더 지켜볼 일이지만 확실한 것은 그 선택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상의 사랑이다.”
그녀가 의식을 회복하고 병실로 올라오면서부터 본격적인 공부가 시작되었다. 깊은 참회를 통해 지나온 삶에서 소화하지 못한 가슴 아픈 상처들이 무엇이었는지를 보게 했고, 호흡을 통한 깊은 기도로 암이라는 이름의 천사가 전해주는 메시지를 듣도록 했다. 그녀는 빠른 속도로 이 과정을 소화해 냈고 마침내 자신이 경험한 모든 상처들이 실상은 사랑이었음을 깊이 자각하기 시작했다.
“목사님, 이제야 알 것 같아요. 사람은 결코 상처를 받을 수도, 줄 수도 없다는 것을.... 우리는 그저 서로의 성장을 위해 필요한 역할들을 나누었고, 그 역할이 좋은 것이었든 나쁜 것이었든 다 사랑이었다는 것이 이해가 돼요. 정말 용서할 일이 없네요. 그저 고마운 일들밖에 없고, 세상엔 온통 사랑스러운 사람들밖에 없네요.”
수술의 상처를 회복하는 동안 그녀의 의식은 놀라울 정도로 고요해졌고, 그녀의 영혼은 햇살처럼 반짝거리며 맑게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날부터 그녀의 이름은 ‘햇살’이 되었다. 사실 이쯤 되고나면 사람들은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배우게 되고, 누가 설명해주지 않아도 깨닫게 된다. 하루는 병실을 들어서는데 ‘햇살’ 혼자서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누구와 그렇게 이야기를 해?” 나는 웃으며 말을 건넸다.
“몸과 화해를 하는 중이예요. 나이 열일곱에 일을 시작하고 나서는 한 번도 맘 편히 쉬어 주지를 못했어요. 일찍 학업을 포기한 보상심리가 몸을 노예처럼 혹사시켰어요. 돈이라도 남부럽지 않게 벌어야 한다는 욕심 때문에 몸이 하는 소리를 도통 듣지 못한 거지요. 생각해보면 빌려 입은 고운 옷인데... 내가 그만 누더기로 만들고 말았어요. 참 미안하고 죄스러워요. 그래서 오전 내내 몸과 이야기를 하는 중이지요.”
햇살의 입가에 웃음이 번져 나왔다.
“그래, 몸이 뭐래?”
“이제라도 알았으니 됐대요. 자기는 그걸 깨우쳐주기 위해 함께 있는 거라네요. 그래서 고맙다고 했더니 자기도 고맙다네요.”
하루는 ‘햇살’과 병실에서 밤을 지내게 되었다. 평상시에는 아내가 주로 병실을 지켰는데 그간 밀린 이야기도 나누고, 아내도 좀 쉬게 해 줄 겸 자청한 일이었다. 그날 밤 나는 침상을 겹겹이 에워싼 신비로운 사랑의 기운을 확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 그것은 사랑이었다. 본디 아버지와 하나였던 우리 존재의 본래 모습이었다. 나는 햇살과 늦은 밤까지 이야기를 나누다 새벽녘이 되어서야 잠시 눈을 붙였는데 꿈결인 듯 아련히 들리는 ‘햇살’의 목소리에 잠을 깼다. 이제 막 병실 창으로 아침햇살이 스며드는 시간, ‘햇살’은 상기 된 표정으로 침상에 앉아 나지막이 나를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왜? 무슨 일이야?”
나는 길게 기지개를 펴며 옆에 있던 보호자용 의자를 끌어 당겼다.
“목사님, 나 꿈 꿨어요. 아니, 꿈인지 생시인지는 잘 분간이 안가지만 어쨌든 생생한 영상이에요.”
“그래? 어디 얘길 좀 해 보시지!”
햇살의 표정은 사랑에 빠진 사춘기 소녀의 뺨에 피어난 설레임과도 같았다.
“내가 갓 태어난 아기더라구요. 얼굴은 알 수 없지만 한없이 넓고 포근한 어머니의 품이었어요. 나는 그 품에서 행복해하고 있었고요. 그때 어디선가 한 음성이 들려왔어요. ‘어머니의 품에 안긴 어린아이가 무엇을 걱정하겠느냐? 너는 내 아이다!’ 그 음성을 듣는 순간 내 주변의 모든 일들이 다 완벽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이젠 아무 것도 걱정이 되지 않아요. 어린 성수도, 성준이도 더 이상 문제 될게 없네요. 나를 안고 계시던 큰 품, 그 어머니께서 다 알아서 하신다는 게 확연히 느껴졌어요. 그러니 나는 그저 내게 주신 행복을 누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족하다는 것이지요.”
그녀는 수술한지 보름 만에 이전의 ‘이경숙’이 아닌 새사람 ‘햇살’로 병원 문을 나섰다. 병원은 그녀에게 거듭남의 현장, 다메섹의 길가였다. 퇴원 후 ‘햇살’은 가족들과 함께 며칠을 지냈고, 병원 진료 날짜를 기해 삼무곡으로 돌아가는 내 차에 몸을 실었다.
‘햇살’이 삼무곡 행을 결심한 것은 단 한 가지 이유였다.
“거기에 가면 좀 더 깨어있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러면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과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좀 더 실감나게 체험할 수 있겠지요?”
나는 ‘햇살’이 함께 머무는 동안 좀 더 깊이 깨어있을 수 있는 방법들을 일러 주었다. 잠들 때와 일어날 때, 먹을 때와 걸을 때, 해변에 서 있을 때와 산 속에 머무를 때, 모든 순간 속에서 하나님과 깊이 호흡하고 그분과 더불어 존재하는 방법들을.
‘햇살’의 일상은 지극히 단순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한 시간 쯤 발코니에 앉아 햇살 담기 명상을 했고, 생식으로 아침 식사를 마친 후 세 시간 남짓 산행을 했다. 오후엔 주로 내가 추천해 주는 책을 읽거나 시골 장터에 나가 사람들의 체취를 느꼈고, 밤이 되면 데크 끝에 촛불을 밝히고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다 밤이 깊어지면 한 시간 남짓 호흡으로 드리는 기도를 올리고 잠자리에 들었다.
‘햇살’은 무엇보다 아침 햇살 담기와 산행을 좋아했다.
“아프기를 정말 잘했어요. 만일 아프지 않았다면 영영 몰랐겠지요. 아침 햇살이 이토록 영롱하고 아름답다는 것, 그리고 그 안에 가득 넘쳐흐르는 생명의 신비를. 산에 오르다보면 너무나 행복해져요. 그 큰 품도 따사롭고 나뭇잎 하나, 풀 한포기, 사랑이 아닌 것이 없어요. 그것들은 언제나 거기 있었는데 난 이제야 그들을 만나네요. 행복도 그런 것이었는데... 난 내가 이렇게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도 신기하고 잘 믿기지를 않아요. 그런데 희한하게도 참으로 큰 행복을 만나고 나니까 살고 죽는 게 문제가 되지 않네요. 목사님이 늘 얘기 하시던 참으로 행복해진 사람만이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 설 수 있다는 말, 그 경계를 넘어 선 사람만이 사는 것처럼 살 수 있다는 말, 그 말이 이해가 되어져요. 참 고마워요. 그리고 너무 행복해요.”
“그래, 나도 참 고맙다. 나도 행복해!”
나는 ‘햇살’의 어깨를 꼬옥 감싸 안았다. 그러자 ‘햇살’은 익살스럽게 말했다.
“어때요, 이정도면 아프기를 정말 잘했죠?”
나는 ‘햇살’의 이마에 꿀밤을 한 대 먹이며 장난으로 맞받아 쳤다.
“그래, 임마! 잘했다. 잘했어. 표창장이라도 주랴?
나는 지금 ‘햇살’에게 줄 표창장을 준비하는 느낌으로 이 글을 쓴다. 유언과 임종에 관한 이야기는 다음에 계속하자.(월간 새가정 2006년 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