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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나는 4월, 늙은 山나그네 鳥嶺에 心醉되다
지난 번의 귀로가 젊은 한 쌍의 Volunteer에 의해 행복하게
마감된데 반해 이화령 마루에 접근하는 일은 용이하지 않다.
주말에는 옛 길에 대한 향수 또는 관광을 목적으로 꼬불꼬불
돌고 도는 차들이 제법 있지만 평일에는 쓸쓸하기 그지 없다.
충북 괴산(연풍면)과 경북 문경읍을 잇는 이화령 저 아래에
터널이 관통되었기 때문이다.
충북과 경북을 가르는 이화령 道界碑
환승을 거듭하여 도착한 연풍의 터널 갈림길에서 관광버스를
만난 것은 오늘의 행운이라 하겠다.
부지런한 이 관광객들은 아직 아침 나절인데도 벌써 흥이
고조된 상태여서 인지 인심도 후했다.
연로한 분이 웬 산이냐며 과일들을 내놓았다.
잠시일 망정 덩달아 일어나려는 흥을 깨뜨리려는 건가.
입산금지.
이화령 초소의 산불 감시원은 단호하고 냉담했다.
그러나 그런 그도 나이에는 어쩔 도리가 없나 보다.
카메라 맡기고 pose까지 취하는 늙은 이에게 답하는
그의 묘한 웃음엔 무슨 뜻이 담긴 걸까?
어럽쇼, 한 술 더 뜨시네?
엘리어트(T. S. Eliot)가 자기의 시 황무지에서 말했던가.
4월을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그러나 나의 4월은 가장 신나는 달이다.
신록이 시야를 가리기 전이라 탁 트인 사방인데다 두껍지
않은 햇살과 알맞은 기온은 온 종일의 산행을 흥으로
일관하게 한다.
다만 생명력을 과시하려는 듯 지각을 뚫고 막 고개를 내미는
가녀린 새 순들 때문에 걸음을 조심해야 하는 것만 빼고는...
1.026m 조령산 정상
이 하루가 바로 그러했다.
게다가 조령의 웅장한 멋을 왜 이제야 깨닫게 되는 걸까.
사방으로 펼쳐진 저 현란한 능선과 암릉들을.
잘 난 아들과 어여쁜 딸을 수 없이 많이 거느려 목에 힘깨나
들어 간 아버지의 도도함 같은 느낌의 조령산!
한 순간, 좌우로 질서 정연하게 도열한 예하 부대를 사열하는
사령관이 된 것 같은 착각의 늙은 山나그네는 이 산에 그만
압도되고 말았다.
적당한 오르내림과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게 하는 암봉과
암릉들의 섬세한 배열 등 흠잡을 데 없는 조령의 마력에
나는 그만 푹 빠져버린 것이다.
현란한 조령의 암릉들
조령 삼관문 지기 황병주
"신선 놀음에 도낏 자루 썩는 줄 모른다" 했던가.
조령에 취해 시간 가는 걸 잊고 말았는가.
백두대간 남반부의 한 중간이라는 조령 3관문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뉘엿거리고 있었으니까.
좀 더 진행하여 물을 구할 수 있는 평천재에서 비박하려던
당초의 계획을 포기하고 숙식을 3관문 휴게소에 의탁했다.
조령의 풀이 이름인 새재.
70년대 중반 어느 해 정초에 이미 고인이 된 B씨와 아직 어린
아들과 함께 수안보 온천에서 일박한 적이 있다.
3관문 ~ 1관문 간의 협소한 옛 길을 따라 어렵살이 드라이브
하다가 떠올리기 조차 싫은 끔찍한 참상을 목도했던 곳.
긴긴 세월 뿌려지고 쌓인 온갖 애환의 사연들이 묻히거나
씻겨버려 이제는 예전의 천연스런 멋을 찾을 수 없다.
1970년대의 조령 3관문
그러나 또 다른 맛을 느낄 수 있도록 정연히 다듬고 가꾼
도로와 경관의 제 3관문 길목에는 황병주가 있었다.
<문경새재 도립공원 3관문 휴게소
-백두대간 24구간중 12구간 만남의 휴게소- 소장>
이라는 다소 장황한 명함의 주인공이다.
내가 돋동주로 갈증을 푸는 동안 그가 쏟아내는 말들이 얼핏
너스레로 들렸는데 그는 처음부터 진지했다고.
나그네가 쉴 곳을 찾기 전에 이미 나그네를 하룻 밤 눌러
앉히려는 작전이었다는 황병주.
2002년 4월 12일 금요일 밤에 벌어진 문경 새재의 주연(酒宴)은
결국 그의 의도대로 진행된 셈이었다.
환갑을 막 넘긴 이 사내의 기구한 인생 역정이 안주감으로는
그만이었다.
국내의 좁은 땅으로는 양이 차지 않아서 였다고?
지구 구석구석을 누볐음에도 겨우 성치 않은 몸 하나 남았을 뿐
이라며 찔끔거리는 회한의 눈물이 밤을 몰아내며 마시게 했다.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고?
밤을 잊은 채 술을 마시는 동안 나는 어느 결에 이 파란 만장한
풍운아의 형님이 되어 있으니...
말 없이 가버린 풍운아
대간 종주중일 때 수시로 진행 상황과 안부를 확인하던 그였다.
정맥에 들어가 있을 때도 그랬다.
9정액 종주가 완결되는 지리산 영신봉에서의 재회도 약속했다.
자기의 유랑을 말해 주려는 듯 고향의 억양 보다 팔도 사투리가
더 자주 튀어나온 그의 첫 마디는 언제나 "헹님, 접니다" 였다.
짐짓 시치미를 떼면 온갖 방언으로 전화통이 시끌해지곤 했다.
어느 새 자기 목소리를 잊어버렸느냐는 시비(?)였던 것.
부실한 몸 탓일까.
생기가 없고 늙기도 전에 타는 외로움을 잊으려는 듯 그는 독한
술만 마셨다.
절주(節酒)를 당부하면 이행 여부는 차치하고 고마워 했다.
자기를 걱정하는 이는 형님 뿐이라며 감읍하기도 했다.
그러나 더 이상 관심의 대상도 아니고 고마워할 리도 없다.
보기는 커녕 들을 수도 없게 되었다.
지난 해 여름 어느 날 그는 이 세상을 떠나버렸단다.
단 한 번의 만남에 비해 퍽 많은 마음의 소통을 가진 우리인데
내게 말 한 마디 없이 그는 가버렸다.
영신봉의 재회 약속을 지키지 않아 적잖이 궁금하던 중
조령산에 오르려는 한 산악회가 직면한 애로를 그를 통해
풀어주려는 과정에서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2004년 11월 10일, 평일이며 비바람의 악천후임에도 나는
이 산악회의 선두에서 달리다 시피 하여 3관문에 내려 섰다.
주인 잃은 숲속 노천 식탁들은 제 멋대로 나둥글었다.
일대 panorama가 펼쳐졌던 높다란 그의 집엔 적막 뿐이고
꼭꼭 잠긴 채 기척이 있을 리 없는데도 몇 번이나 문을 두들겨
댔고, 돌아섰다가도 "헹님, 접니다"는 환청에 되돌아 보기를
거듭하며 허탈하지 않을 수 없었다.
풍운아의 어이 없는 末路
山 사람이 산에서 죽는 것이야 말로 지극히 평범한 일상사다.
다만 그가 수(壽)를 다하지 못하고 돌연 추락사한 경위를 뒤
늦게 나마 알고 싶었고 가능하면 그의 무덤에 가서 명복을
빌어 줄 요량이었건만 전화마저 불통이니 막막할 뿐이었다.
정연하게 다듬어진 3관문: 뒷 편 충북 쪽에 매표소가 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들른 3관문 매표소는 나를 침통하게 했다.
연락처를 알 방도가 있을까 해서 였건만 그의 사망 경위만을
소상하게 말해 준 매표원이 오히려 원망스러웠다.
차라리 모른 대로 살아갈 껄.
뒤의 마패봉이나 앞 조령에서 실족 추락했거니 했던 짐작에서
너무도 빗나갔다.
판도라의 상자 같은 이 사내는 참으로 어이 없게도 2관문 아래
조그마한 다리에서 떨어져 풍운의 세월을 마감한 것이란다.
이런 허망한 마감을 위해 그리도 많은 풍상에 저항했단 말인가.
파란 만장한 떠돌이 삶이었음을 말해 주는'열 여덟 번째'부인
가평댁도 이미 이 곳을 떠나버렸고 그의 혈육에 대해선 아는
바 없으니 어이 할꼬.
심성이 무던한 가평댁과 이 곳에 뿌리내리겠다고 다짐했건만
몹쓸 사람.
그렇게 허무하게 갈 거라면 차라리 정주는 짓 만이라도 하지
말았어야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