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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조 알평(謁平) 표암공(瓢岩公)
(1) 휘 알평(謁平), 호 표암(瓢岩), 자 천서(天瑞), 시호 문선공(文宣公) 기원전 117년 경주시 동천동 표암(박바위)에 하늘에서 강림하시었고 알천 양산촌장으로 회갑이 되시던 해 4월에 양육해 오던 13세 되는 사위인 박혁거세를 왕으로 받들고 신라를 창건하시어 좌명일등공신(천명을 받아 임금이 될 사람을 도와 그 공이 으뜸이 된 신하)이 되시었다.
(2) 육부 촌장회의때 의장으로써 화백제도를 실시하셨다. 유리왕 9년(서기32년)에 육촌을 육부로 고치고 양산촌을 급량부로 개칭했는데 급량부는 현재 경주 중심지 일원이다. 육촌의 성씨는 이씨, 최씨, 손씨, 정씨, 배씨와 설씨이다.
(3) 유리왕 9년 최초로 (경주)이씨로 사성(임금이 성을 내려 주던 일)을 받았는데, 시조할아버지의 신장은 9척8촌(약3미터), 손은 무릎까지 내려오고 눈은 용의 눈으로 날카롭게 쏘아보는 형상이며, 성품은 인자하고 덕망이 높으셨다. 골품(신분)은 진골이고 수명은 200세이셨다.
(4) 배위(부인)는 마한(기자조선=고조선이 멸망하고 그 유민들이 세운 나라) 태조의 따님이신 태화공주로 기씨(箕氏) 42세손이고 성렬왕후로 봉해지셨다.
(5) 매년 음력 3월 중정일에 경주 동천동 표암제에서 후손과 경주유림의 향사가 있고 매년 음력 8월 17일 경주 월남리 나정(蘿井)에서 육부 촌장 입덕묘 향사가 경주시의 주최로 행사된다.
(6) 서기536년 법흥왕때 문선공이란 시호를 받고, 무렬왕때 은렬왕(恩烈王)으로 추증되셨다.
(7) 경주이씨의 긍지
① 한국 최초로 성씨(姓氏)를 가졌고
② 항렬이 통일되어 있으며
③ 시조이후 훌륭한 인물과 재물이 대를 이었으며
④ 역사상 악인이나 역적이 없었다.
(8). 신라 35대 경덕왕 원년에 시조 재각(齋閣)을 세웠고, 38대 원성왕때 대광보전(大光寶殿)이라는 사액(賜額)을 받았으나 그 뒤 병화로 소실되었다.
*1806년 9월 좌의정 경일종(문충공 이항복의 6대손)께서 시조 유허 표암비 비문을 지었고, 1925년 표암재를 세웠는데 1971년 중수하였다.
*1971년 나라에서 경주시 동천동 산 16번지에 악강묘(嶽降廟)를 세웠고 1985년 시조께서 강림하신 “박바위”(문화재 54호)를 보호하기 위하여 국가에서 광림대(光臨臺)를 세웠다.
*1967년 삼성그룹 호암 병철(相자 항렬)총재의 성금으로 거대한 오석(烏石)으로 경모비(景慕碑)를 세웠다.
(9) 1616년 광해군 8년 초려공 유태(惟泰)선생께서 처음으로 화수계를 조직하고 서문을 작성하였고, 1868년 고종 5년 충북 진천군 초평에 있는 경주이씨 종친회에 흥선대원군의 친필 현판이 사액되었다. 1946년 3월 성재(省齋) 시영(始榮;초대 부통령)선생께서 중앙화수회를 조직하였고 1982년 10월 서울시 종로구 명륜동 1가 33의 9번지(혜화여고 건너편)에 중앙화수회 회관을 마련했다.
2. 1세 거명(居明) 소판공(蘇判公)
시조 36대손으로 그전의 계보가 실전되어 중시조로 추존되셨다. 신라때 진골로 소판은 신라 17관등중 제3위에 해당한다.(자세한 내용은 선조의 내력 14번을 참조하고 사진은 사진앨범에 있음)
3. 2세 금현(金現)
벼슬이 병부령(국방책임자)이셨는데, 법흥왕은 관등이 제1위인 각간부터 5위인 대아찬이라야 병부령이 될 수 있고 재상과 겸직하도록 하였으니 곧 재상이셨다.
4. 3세 금서(金書)
고려조에서는 처음으로 벼슬을 하셨는데, 중원태수호부랑이셨다. 배는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세째 따님이시고, 고려 태조의 외손녀이신 경주 김씨 궁부인이셨다.
5. 4세 윤홍(潤弘)
벼슬이 병정(兵正)이셨는데, 병부령과 병정은 재상의 직위이었다.
6. 5세 승훈(承訓)
벼슬이 정조시랑이셨는데, 아우이신 승겸은 판례부사이셨다.
7. 6세 주복(周復)
벼슬이 좌사간(6품)이셨다. 고려사에 이주좌는 경주이씨인데 목종조에 급제해서 형부상서이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형제간인 듯하다.
8. 7세 칭(稱)
벼슬이 보조공신 문하시중이셨는데, 구보(舊譜)에는 사록이라 기록되어 보조공신은 사후에 증직(贈職)된 것인 듯하다. 사록은 녹봉을 맡아보던 관직이며 문하시중은 문하부의 최고위직으로 모든 정사를 담당하는 종1품 벼슬이다.
재령 이씨 족보를 보면 그 아우이신 이우칭 좌사간은 주복의 아들이라 문하시중으로 재령군을 봉하여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9. 8세 치련(侈連)
아들의 벼슬이 문하시중이니 마땅히 증직이 있었을 것이나, 구보에 기록이 없다.
10. 9세 총섬(寵暹)
성종때 문하시중(현재 국무총리)이셨는데, 서기988년에 오인우, 남궁원청, 이윤실 등과 더불어 왕에게 오묘(五廟)와 사직(社稷)을 세우고, 국자감(國子監:국립대학)을 창건하기를 청하셨다.
11. 10세 춘림(春林)
벼슬이 문하시랑(문하시랑평장사의 약칭)이셨는데, 문하시랑은 문하시중의 다음 벼슬로 품계는 정2품이고 이후를 시랑공파라고도 한다.
형이신 춘정은 순흥부사이셨는데 순흥은 현재 김해이다.
12. 11세 녹천(綠千)
벼슬이 공부상서(건설부장관)이셨는데, 고려사의 기록에 의하면, 서기1135년 인종때에 상장군이 되어 수군을 거느리고 평양에 있는 묘청의 남은 무리(묘청의 난)를 토벌하셨다.
13. 12세 준억(俊億)
벼슬이 도위위승이셨는데, 도위는 군무를 맡아 수령을 보좌하던 벼슬이다.
14. 13세 중화(仲和)
병부상서(국방부장관)이셨는데, 상호군으로 활약하여 응양군 칭호를 받으셨다.
15. 14세 정핵(廷羽)
벼슬이 어사대의 어사중승(차관)이셨는데, 어사대는 시정를 논집하고 풍속을 교정하고 백관의 규찰을 맡아 보던 관청이었다. 배는 김씨부인으로 대장군 지형부사 광려의 따님이셨다.
16. 15세 숙진(淑眞)
벼슬은 상서중승이시었는데, 상서성은 백관을 총령하던 관청이다.
서기1270년 원종때 중서사인으로 낭장 윤길보와 삼별초군을 쳐서 공이 있고 또 서기1271년에 안렴사로 방보와 계년 등의 삼별초군을 진도에서 토멸하여 평정하였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있다.
17. 16세 예(芮)
벼슬이 감찰규정이셨는데, 감찰규정은 감찰사의 종육품이고, 석탄방목에는 내시흥위위장사라 써여 있다. 배는 경주설씨 첨의찬성사 치사 경성의 따님이셨다.
18. 17세 손보(孫寶)
벼슬이 봉상대부 감찰사장령이셨는데, 충숙왕때, 관리들을 조사하여 바로 잡는 감찰사(=어사대)의 규정(종6품)으로 명망이 있어셨다.
19. 18세 길상(吉祥)
벼슬은 승봉랑 사제감승이셨는데, 공민왕때 사제시는 사제감이라 고쳐 불려지고 승은 장(우두머리)란 뜻이다. 배는 온양 방씨 판도판서 대제학 서의 따님으로 판전교시사 김천호의 외손녀이시다.
20. 19세 존사(存斯) 교감공(校勘公)
호는 초려(草廬), 고려말 우왕때(서기1376년) 정총방(무인정권의 문인등용기관)의 과거에 급제하셨는데, 벼슬은 교감공이셨다. 교감은 비서성에 두었던 종9품 벼슬인데, 조선조에서는 승문원 종4품에 해당한다.
석탄공(존오)이 동생을 칭찬한 시에 “초려는 평생동안 분수에 따라 삶을 만족하였으며 한 조각 충성심은 옛 충신들보다 배나 더하였도다.” 하셨다. 배는 안동김씨 상락군 앙의 따님으로 정승 영택의 손녀이시고, 찬성문온공 여흥 민사평의 외손녀이시다.
21. 19세 양오(養吾) 직장공(直長公)
교감공의 백씨(큰형)로 벼슬은 사온서직장이셨는데, 공은 아우인 석탄공과 함께 벼슬에 올라서 크게 떨칠 것을 기대되셨다.
그러나, 마침 정권이 요승 신돈의 손에 있어 흉악한 도적이 사방에 일어났고, 공이 도적의 습격을 당하여 해를 당하실 적에 3인의 노비까지 함께 죽었는데 석탄공께서 늦게야 알고 시신을 수습하려 하였으나 백골만 남아 분간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손가락이 여섯인 육손을 증거로 시신을 찾아 장사를 지내고 관부에 청하여 그 도적을 잡아 죽였다. 그때 공의 나이 삼십도 안되었는데, 다행히 아들 봉 한분이 있어 이리저리 떠돌아 다니다가 의성의 지곡에 자리잡고 육백여년 동안 살아 왔는데 마을에다 제단을 만들고 사단비를 세웠다.
① 24세 탁영(擢英)
호 효사제, 1541년생으로 임란때 공을 세워 역사에 기록이 있고 “정만록” 3권의 유집이 있다. 지극한 성품이 있어 일찌기 부친을 여의고 어머니를 섬김에 효도을 다하더니 어머니 연로하셔 서 눈이 어두운지라 주야로 곁에 모시고 음식공양을 몸소 갖추어 더러운 옷과 이불을 손수 빨더니 어머니 병이 위독함에 목욕하고 하늘에 빌며 변을 맛보기까지 하며 간호했으나 별세하시자 3년간 여막(상제가 거처하던 무덤가 초막)을 지키고 한결같이 예절을 따르며 평생을 추모하여 모선당판상실기에 실렸다.
임진란때 모사(전략가)로 공을 세워 상을 주려하자 “국란을 당하여 목숨을 바침은 신하의 직분인지라, 도적을 벤 공이 없고 글방 선비의 노고로서 가히 은혜를 입는 준례(표준 본보기)에는 논할 바 아니라”고 하고 재삼 사양하고 받지 아니하니 그 사실이 임금께 알려져 곡식을 내리는 특전을 받으셨다. 1610년 향년 70세로 별세하셨다.
② 26세 광철(光喆)
호 지헌, 공의 7대손으로 서기 1636년에 정상국 태화를 따라 심양에 갔는데 그 사실을 기록한 문집이 있고 그뒤 대대로 효성이 지극하여 현종 경술년과 숙종 을미년에 곡물 하사가 있었고 또 복호(충신, 효자, 열녀의 가문에 세금과 부역을 면제하는 왕의 은총)가 내리고 가선대부(종2품,당상관) 가자(加資)를 받는 등 자손이 번창해 왔다.
③ 25세에 이르러 정란, 정훈, 정규, 정향, 정예의 5형제 대가로 번창하였다.
22. 19세 존오(存吾) 석탄공(石灘公)
자는 순경(順卿), 호는 석탄(石灘)으로 교감공의 중씨(둘째형)이셨다. 충혜왕때(서기 1341년)에 태어나 여주 고산에 우거(타향에서 임시로 삶)하셨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학문에 힘썼으며 세상의 그릇됨을 보고 분개하는 강개심과 충절이 있으셨다.
열 살 때에 강물이 창일함(물이 많이 불어서 넘침)을 읊은 시가 있는데 “큰 들이 모두 물에 잠겼으되 고산은 홀로 항복하지 않았다”고 하여 대성할 기질이 있었다. 공민왕 때(서기 1360년) 국자(國子) 진사(進士)로 문과(文科)에 올라 사관(史官)이 되었는데, 정몽주(호 포은, 4세 위로 동 시험에 급제함), 이도은(이름은 숭인), 박상충(호 반남) 등의 현인들과 도의로 맺은 벗이 되었다.
26세 되시던 해, 우정언(右正言)이 되어 요승 신돈을 호령하고 왕께 상소하여 신돈을 배척하다가 순군옥(巡軍獄)에 감금되었는데 찬성사 이춘부가 말하기를 “아직 젖내 나는 동자인데 뒤에 시킨 자가 있을 것이니 숨기지 말라”고 하니 공이 “국가에서 젖내 나는 동자로서 언관 벼슬을 주어 말하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니 어찌 잘못을 보고 말하지 아니하여 국가를 저버릴 수 있으리요” 하였다. 그 뒤 장사 감무로 좌천되자 모두 참된 (우)정언이라 말하였다.
2년 뒤 공주 석탄으로 물러나 살며 호를 석탄이라 하셨다. 그러나 국가를 위한 근심이 심하여 병이 위독하게 되자 부축하여 일으키라고 하고 말씀하시기를 “신돈이 죽어야 내가 죽을 것이다.”하며 운명하니 31세 때이셨다. 석달뒤에 신돈은 사형을 당하고 왕은 공의 충성심을 생각하여 고려 명신록(名臣錄)에 우정언 증대사성 석탄공전이라 기록하고 성균관대사성을 증직하고 조선에 들어와 아들 래(시호는 경절공)에게 자헌대부 계성부원군을 추증하였다.
공의 묘는 장단에 있었으나 실묘하고 경기도 광주군 초월면 신월리에 사단을 모아 향사한다. 서원은 전북 무장면의 충현사, 충남 부여읍의 의렬사, 공주의 공암사, 여주 고산서원 네 곳이 있는데 모두 사액 받은 서원이다.
23. 19세 존중(存仲) 진사공(進士公)
교감공의 숙씨(셋째 형)으로 벼슬은 진사이고, 아들이 없어 석탄공의 둘째 아들인 채를 양자로 대를 이었다. 채는 벼슬이 어사감찰이고 손자 윤생은 광정대부 상호군, 증손 인동은 사헌부 지평, 현손 근은 생원진사, 5대손 장필은 벼슬이 사과(司果)이고 6대손 장은 절위장군백령첨사인데 6대로 독신으로 내려오다가 7대에 자후, 자돈 형제가 되었다.
24. 20세 양(良) 판서공(判書公)
조선 태종 조에 수도를 송도에서 한양(서울)으로 옮기고 국가 사직을 호위한 공로로 위사공신록(衛社公臣錄)에 기록되었고 벼슬이 자헌대부 공조판서이셨다.
묘소는 강원도에 있다고 하나 찾을 길이 없고 후손에게 남긴 유집이 모두 없어졌으니 자세한 행적을 알아 볼 길이 없다.
25. 21세 주(周)
초명은 환이고 개명한 휘가 주이시다. 벼슬은 수의부위사정이셨는데, 수위부위는 조선시대 서반 무관의 종8품이며, 사정은 오위의 정7품 무관인데 군사들의 그릇된 일을 바로잡는 벼슬이다. 오위는 문종 원년에 군제를 고치어 정한 다섯 가지의 위인데 중위, 좌위, 우위, 전위, 후위이다. 한성부참군 벼슬도 하셨는데 참군은 군사를 다스리는 무관의 정7품이었다.
26. 22세 윤흥(允興) 퇴재공(退齋公)
호는 퇴재, 상(相)자 17대조이시다. 벼슬은 훈련원녹사참군(종7품)이셨는데 녹사참군은 군사들을 다스리는 벼슬로 사건을 기록하고 잘 잘못을 조사하는 벼슬이었다. 단종에 대한 의리를 지키기 위하여 벼슬을 버리고 경주 부남 중리 마을로 귀향하셨다고 단종정의록에 기록되어 있다.
묘는 경주 서야척 재궁동 곤좌 상분인데 묘제일은 음력 10월 초3일이다. 배는 경주 김씨 직장 상용의 따님이시다. 백파의 재일동포 준우종의 성의로 묘비를 세웠다.
27. 23세 석동(碩仝) 동오공(東塢公)
자는 도숙, 호는 동오이고 벼슬은 장사랑 남부참봉(종9품 문관)이셨다. 공은 천성이 효성과 우애가 독실하여 양친의 뜻을 잘 받들어 섬겼으며 상중에 있을 때 읍혈 3년을 마친 뒤에 백씨 철동 첨정공과 계씨 말동 도원공과 함께 책상을 나란히 하고 학문을 강론하며 도학을 닦으니 세상에서 말하기를 일가삼현(一家三賢;한집에 현인 3형제)이라 하였다.
공은 특히 재주가 있어서 책을 읽을 때 한번 본 것은 모두 외울 수 있었고 문장이 뛰어나 “붓이 달리는 곳에 주옥 같은 문장이 이루어진다”고 하였는데 점필재 김종직선생께서 칭찬하기를 “이 사람의 문장은 누구도 따를 수 없구나” 하였다. 도학이 소문이 나서 원근 학자들이 책을 짊어지고 와서 배움을 청했는데 하나하나 그 인재에 따라 성실하게 가르쳐 많은 학자들을 길러 내셨다.
점필재선생께서 공을 나라에 천거하여 장사랑 남부참봉의 벼슬이 내렸는데 연산군 때 정치가 어지러운 것을 보고 벼슬을 버리고 계씨 도원공과 함께 경주 고향에 귀향하였다가 어지러운 세상을 피해 살기 위해 포항시 신광 비학산 밑에 자리잡고 은거하셨다. 그 뒤에 일어난 무오, 갑자 두 사화(士禍)의 화를 면하게 되었는데 주역에 “밝은 식견을 가지고 몸을 보전한다”고 한 것은 공의 형제를 두고 말한 것이라 하였다.
4백 년 뒤인 1944년에 수영 창애공이 쓴 유사(遺史)와 가보(家譜) 및 야사(野史) 그리고 삼강록의 글을 참고하여 13대손 규정할아버지의 주선으로 영가후인 권상규 찬의 묘비가 세워지고 3년 뒤인 1947년에 묘 하에 곡령재사가 중건 되었다.
묘는 신광 곡령산 간좌에 있고, 배는 웅천 주씨 사회의 따님으로 묘는 합장하였다.
① 27세 응수(應壽) 원정공(院正公)
상(相)자 12대조로 자는 일오(一五), 벼슬은 훈련원정(3품)이셨다. 임진란 때 의병을 일으키고 공을 세워 유격장, 복병장을 제수 받고 그 뒤에도 여러 번 벼슬을 받아 훈련원정이 되었고 원종 공훈 3등 공신이 되었는데 여러 의병장들의 일기에 기록이 있다.
묘는 신광 내안지이고, 배는 영천 이씨 신주의 따님으로 묘는 합장했다.
② 28세 영립(榮立) 첨정공(僉正公)
자는 사지(斯之), 벼슬은 통훈대부군자감첨정주부(정3품)이셨다.
묘는 신광 안지 해좌이고 배는 안동 권씨 충립의 따님으로 묘는 같은 등에 있다.
③ 29세 홍발(弘發) 참의공(參議公)
자는 달천(達天), 벼슬은 통훈대부 공조참의(정3품)이셨는데, 묘는 비학산 서쪽 탑동 손좌이고 배는 연일 정씨 응하의 따님으로 묘는 곡령의 자좌에 있다.(사진이 올려져 있음)
④ 30세 정달(廷達) 좌윤공(左尹公)
자는 탁여(卓汝), 벼슬은 가선대부 한성부 좌윤(종2품 당상관)이셨고, 묘는 탑동 손좌이고 배는 수원 백씨 계환의 따님으로 묘는 곡령 해좌에 있다.
⑤ 31세 덕기(德起) 학와공(鶴窩公)
자는 가원(可遠), 초휘(初諱), 만기(萬起), 호는 학와(鶴窩)이시고 숙종 무진년(1698) 출생 정조 계묘년(1783) 별세 향년 86세이셨고 벼슬은 가의대부 동지중추부사(종2품)이셨다.
천성이 순량(순하고 선량함)하고 근후(조심성 있고 인정이 두터움)하며 특히 효성과 우애가 독실하셨고 제가(齊家)에 법도가 있으셨으며 자제 교육을 바른 길로 이끌어셨을 뿐 아니라 남의 선을 보면 치켜서 칭찬해 주고 남의 허물을 보면 덮어주고 하니 섬소한(가냘프고 어슬픈) 사람까지도 모두 좋아 하였다. 학문과 문장이 뛰어났으며 공의 문장을 보면 옛 성현의 도가 있고 인간의 본분에 벗어남이 없어서 그 도학을 모두 본받았다.
영조 갑오년(77세) 학덕이 있는 노인이라 추천되어 절충장군용양위부호군통정대부(정3품 당상관)을 제수 받고 이듬해 가선대부(종2품), 또 그 이듬해 가의대부(가선대부보다 한 계단 위인 종2품) 그리고 동지중추부사를 제수 받았다. 동지중추부사의 벼슬은 일정한 현직은 없으나 덕 있는 노인을 존경하여 내리는 당상관 벼슬이었다.
1948년 해산공 찬으로 묘비가 세워지고, 묘는 동오공의 묘 청룡등 자좌에 있다.
배는 월성 최씨 득명의 따님으로 남편의 벼슬에 따라 정부인이 되고 99세의 수를 누리어 가작이 내리어 정경부인을 제수받으셨고 묘는 합장하였다.
⑥ 32세 시채(時彩) 동추공(同樞公)
자(字)는 내조(乃助), 벼슬은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종2품)이셨고 묘는 곡령 유좌이고 배는 밀양박씨 경일의 따님으로 묘는 같은 등에 있다.
⑦ 35세 수영(秀榮) 창애공(昌涯公)
자(字)는 맹실(孟實), 초휘는 기운(驥運), 호는 창애(昌涯)이시고, 헌종 을사년(1845년) 출생, 고종 병진년(1916) 별세, 향년 72세이셨다.
공은 용모가 준수하고 단정하였으며 어릴 때부터 선비의 기상이 있어 동려공(東廬公)과 규희씨에게 수학하여 밤낮으로 놀지 안고 학업에 힘썼다. 경서뿐만 아니라 벽서(僻書;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글)까지 모두 찾아 내어 읽었고 특히 주자(朱子)와 퇴계의 글에 전념하여 요점을 초(抄)해서 익혔다.
제자들을 지도할 때 먼저 입지할 것을 강조하고 또 소학을 권하기를 “한훤당선생께서는 마흔이 넘도록 소학을 읽었는데 소학동자라고 불렸고 그로 인하여 명성이 높아져 선비들의 사표가 되었다.”고 하며 소학은 사람을 만드는 근본이라 하여 더욱 힘을 기울여 가르쳤다. 공은 자질이 매우 뛰어났으나 항상 겸손하였고 성품이 강직함에 가까우나 사람을 대할 때의 기질은 항상 따스하고 순수하셨다.
재주와 학식이 관직에 나아가 백성을 다스릴만 했으나 스스로 겸손하여 벼슬길에는 뜻이 없고 칠십 평생을 자기 수양에만 힘 쓰고 많은 제자들을 길러내셨다. 또 많은 책을 손수 베껴서 써셨고 갑진년에 학고정에서 동벽설(冬碧說), 동벽대(冬碧對)의 글을 지어 도학과 인생수양에 힘썼다.
묘는 큰골 일부산 유좌에 있고 배는 함안 조씨 성술의 따님으로 어계 여(旅)의 훈손이고 묘는 합장하였다.
⑧ 38세 영우(泳雨)
1922년 출생하여 1995년 향년 74세로 별세하셨다.
해방 초기에 경찰에 투신하였고, 6.25동란 때 정부에서 산속에 있는 곡령재실을 없애려 할 때 기지를 발휘하여 문짝만 뜯어 내게 하여 재실을 지키셨다.
포항시 초창기에 공직에 몸담아, 포항상공회의소와 포항축산협동조합을 설립하는데 기여하였다.
28. 23세 철동(哲仝) 첨정공(僉正公)
동오공의 백씨(큰형님), 벼슬은 훈련참군에서 첨정에 이르셨다.
묘는 퇴재공 묘 하에 있으며 배는 파평 윤씨 감사 통지의 따님이셨다.
첨정공이 4형제를 두었으나 장남이 무후로서 끝의 아들의 끝의 손자인 관란공이 큰집 양자로 들어갔다.
① 25세 승증(承曾) 관란공(觀瀾公)
호는 관란, 5세 때 글을 배우고 7세 때 소학을 읽고 8세 때 훈장이 돌아가시자 스승복(服)을 입어셨다. 마을에서 효자동으로 불리고 모친이 위독하실 때 대변을 맛보면서 간호를 하였으며 양친의 3년상 때마다 시묘살이를 했는데 아침 저녁 무덤 앞에서 떠나지 않았기 때문에 꿇어 앉은 자리가 한자나 파였다고 하며 호랑이가 돼지와 토끼를 물어다가 제물 차리기를 도왔다고 하며 한번은 팔룡이란 도적떼가 그곳을 지나다가 효자가 있는 곳이라 하며 피해서 다른 길로 갔다고 한다.
생원과 진사의 두 시험에 모두 급제하여 46세 때 건원릉침랑(침랑은 참봉벼슬), 48세 때 사옹원제거, 50세 때 상의원별제, 58세 때 상서원직장, 66세 때 종부시전섬, 71세 때 사도시직장의 여섯 번 벼슬이 내렸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아 육징사(六徵士)이시다. 보문평(普門坪)들을 개간하여 보를 만들어 농토를 만들었으며, 임진란 때는 선달 박응성과 더불어 창의(의병을 일으킴)하여 의병을 거느리고 적진에 돌입하여 적군 백여 개의 머리를 베어 공을 세웠다. 야척동 사람들이 공의 충성심과 효성에 감동하여 마을 이름을 충효동(忠孝洞)이라 고쳤다고 한다.
85세 때 고종명하셨으며 묘는 금학산 임좌에 있다. 효정문(孝旌門)이 세워졌는데 정려각(旌閭閣)은 경주 첨성대 북쪽에 있고 삼강행실록, 여지승람, 동경지에 기록이 있으며 서원은 자인(慈仁) 금학산 밑에 지곡서원과 도연서원이 있고 경주시 사정리에 문호서원이 있으나 서원 철폐 때 헐리었다. 문집은 학남공께서 유사(遺事)를 찬하고 용와공께서 행장을 쓰셨다.
② 30세 의립(義立) 구충당(求忠堂)
관란공의 5대손으로 자(字)는 예겸(禮兼), 호는 구충당, 벼슬은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이셨다.
경주 부남 전읍리에서 출생하셨고 5세에 취학하고 7세에 오포시(烏哺詩)를 지었는데, “봄바람 타고 까마귀가 반포(反哺; 새끼가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 먹이는 것)를 하는데 날아 갔다가 또 날아드는구나. 너에게 경고 하노니 멀리 떠나지 말라. 자모(慈母)께서 외로이 숲 속에서 슬퍼하리라”고 하였다. 22세 때 양친의 복을 모두 마치시고 말씀하시기를 “효도를 하려고 하나 누구에게 할 것인가. 어버이 섬기는 마음을 옮겨서 임금 섬기는 것이 옳겠구나”하고 결심한 뒤 유약 제조에 필요한 유황과 철을 찾기 위하여 전국을 돌아다니셨다. 26세 때 경주 치술령, 27세 때 가야산, 28세 때 금강산, 30세 때 묘향산, 31세 때 구월산, 32세 때 백두산, 33세 때 속리산, 34세 때 지리산, 35세 때 태백산, 36세 때 청량산으로부터 울주 달서천에서 비상을 발견하셨다. 39세 때 비상 고취법(鼓吹法)을 연구, 40세 때 연철과 철환 등을 상납하고 동지중추부사를 제수 받고 49세 때 만호봉에서 처음으로 유황을 발견하셨다. 51세 때 유황 자조법(煮調法)을 알아냈고, 52세 때 유황을 상납, 53세 때 숙천군 도호부사를 제수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고 연이어 가선대부 벼슬이 3대에 증직되고 수철산(水鐵山) 사패(賜牌; 공신에게 주는 토지)를 받았고 74세에 고종명하셨다.
41세 되던 해 10월에 자기가 제조한 솥을 쌀과 바꾸어 관북에서 울주로 수송하여 후일 유황 탐색 자금을 삼을 심산이셨다. 항해도중에 풍랑으로 만난 상인 십 수명을 구해주고, 또 바다에 가라앉은 물건과 공금 천 량을 빌어주면서 “어찌 재물 때문에 죽을 수 있겠는가” 하셨는데, 그 사람들은 모두 함경도 이천 사람들이었다. 상인들은 모두 공을 생명의 은인이라 하고 또 “우리의 부모님이십니다.”고 하였다. 공의 장남 극경에게는 충의교위, 차남 극발은 수의교위, 3남 극룡은 현신교위의 벼슬이 제수되었다.
29. 23세 말동(末仝) 도원공(桃源公)
초명 말동, 자(字) 자원, 호는 도원이셨다. 1443년 세종조에 경주 부남 중리에서 출생하셨는데, 자질과 성품이 총명하고 영리하여 기개와 도량이 넓고 뛰어나셨다. 과거와 녹을 구하는 학문을 좋아하지 않으셨는데 양친의 명으로 과거에 응하여 38세 되시던 해 성종조에 생원진사, 성균진사에 모두 합격하시고, 김한훤당선생 등 어진 선비들과 동년계를 맺고 도의로써 사귀면서 성균관에 계시다가 성종이 승하하고 연산군이 실덕하는 것을 보고 장차 선비의 화가 있을 것을 미리 알고 경주로 귀향하셨다가 은거할 생각으로 54세 되시던 1496년 기계로 솔권하여 이가하셨다.
은거시(隱居詩)를 보면 “저 달에 천고의 시름이 어리고, 이 바위는 늙었네라 백년된 등(藤) 감고 깊숙한 이 골짝엔 하도 그윽해, 무심한 무릉도원 예가 아니랴” 이 시를 짓고 호를 도원이라 하셨다.
도원이란 뜻은 무릉도원의 약칭인데, 별유천지란 뜻으로 중국 진(晋)의 무릉이란 곳에 한 어부가 배를 저어가다가 복숭아꽃이 아름답게 핀 수원지를 따라 올라가 별유천지에 이르러 진시황 난리를 피하여 살고 있는 사람들을 만났는데 바깥 세상일을 모르고 살고 있었다는 고사(故事)가 있다.
기계에 은거하신 뒤 얼마 안 가서 무오사화가 일어났고 6년 뒤에 다시 갑자사화가 일어나서 어진 선비들이 모두 화를 입게 되었는데 환란에 벗어난 도원공을 보고 앞을 내다볼 줄 아는 밝은 식견에 감탄하였다. 공은 효성과 우애와 공경심이 독실하고 선고의 거상 때에는 3일간 음식을 전폐하여 기절하였다가 다시 깨어난 일이 여러 번 있었다. 눈물로서 3년상을 마치고 두 형을 잠자리와 음식을 함께 하면서 부친을 섬기는 도로서 섬기셨다. 1518년 중종 무인년 향년 76세로 고종명하셨다. 묘는 대옥동 경좌에 있다.
공의 경륜과 도학 문장 등이 마땅히 후세에 무한한 혜택을 줄 것이나 여러 번의 병화에 남기신 글이 전하지 못하였는데, 1923년 두메인가에서 우연히 공의 시 93수를 그을음에 낀 옛 종이 뭉치 속에서 찾았는데 3백 년이 넘었는데도 좀먹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1923년 도원문집이 발간되었고 1988년에 국역되었다.
배는 경주 정씨 현감 효본의 따님으로 묘는 합장되었다.
30. 24세 종간(宗幹) 경헌공(敬軒公)
자(字)는 가주(可柱), 호는 경헌(敬軒), 징사(徵士)로 효성이 지극하여 선릉참봉(성종릉) 벼슬을 제수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고 말하기를 “효는 사람으로 마땅히 해야 할 당연한 직책이고, 하물며 나는 효를 하지 못하였는데도 벼슬이 내리니 이것은 나의 뜻이 아니니 어찌 받을 수 있겠는가” 하시며 또 “나는 죽은 뒤에 신주(神主)에 벼슬이름을 쓰지 말고 학생(學生)이라 쓰도록 하라”고 유언하셨다.
망기당(忘機堂) 조한보와 도의로서 교제하였으며 성리학에 연구가 깊었으니 손양민공(孫襄敏公) 소(昭)가 말하기를 “이 사람의 학문은 우리들이 따라가지 못하겠구나” 하였다. 나이가 사십도 못되어 돌아가시니 조망기당(曺忘機堂)이 제문에 말하기를 “내가 의심하는 것은 그대가 풀어주고 그대가 의심 나는 점은 내가 풀어주고 하여 서로 권하며 도를 닦고 학문을 강론하였으나 싫증이 나지 않았도다.”라고 하였다.
유림에서 징사(徵士)로 존경하였는데 징사는 징군(徵君)이라고도 하는데 학문과 덕행이 높아 조정에서 벼슬을 주어도 벼슬에 나아가지 않은 사람의 칭호이다.
묘는 도원공 묘하 경좌 상하분이고 배는 도안 이씨 습독 한방의 따님이시고 합장되었다.
31. 25세 습 두곡공(杜谷公)
자는 용회(用晦), 호는 두곡, 우호(又號) 안락와(安樂窩)이셨고 1508년 중종조에 출생, 1583년 명종조에 향년 76세로 졸하셨다.
공은 성격이 방정하고 총명하여 다섯 살 때 책을 읽었다. 과거에 뜻이 없고 명예와 재리에 담박하여 입지(立志), 경신(敬身), 사천(事天), 궁리(窮理), 양심(養心), 개과(改過)의 여섯 가지의 잠명(箴銘)을 지어 수양에 힘썼다.
48세 때 학행(學行)으로 추천되어 효릉참봉으로 제수 받고 49세 때 영숭전참봉, 연이어 북부참봉, 선공감봉사, 사도시직장을 제수 받았으나 다섯 번 모두 나아가지 않은 오징사(五徵士)이다.
공연(孔燕; 비학산) 밑에 집을 짓고 안자(顔子)의 안빈락도(安貧樂道)의 도를 따라 스스로 즐기며 오직 경전(經典) 공부에 힘써서 제종제 관란공과 함께 강론하며 후진을 육성했다.
자제를 훈계하여 “우리집안은 대대로 유교를 업으로 하였으니 삼가하여 집안의 명예를 떨어뜨리지 말도록 하라. 장기, 바둑, 음주는 맹자(孟子)가 불효라 하였으니 더욱 삼가하도록 하라.”고 하셨다.
또 집안에 유리로 만든 두루미가 있었는데 손님이 오면 행배(行杯)하였는데 하루는 계집종이 잘못하여 공의 손을 다쳤다. 그때 공은 “물건으로 인하여 피부를 상했으니 증자(曾子)의 [온전히 죽어 돌아가야 한다]는 훈계를 범하였구나” 하셨고 자질들이 계집종을 매를 치려고 할 때 공은 “실수로 그렇게 된 것이고 고의가 아니니 무슨 죄가 있겠느냐”고 하셨다.
그리고 마을에 박씨 형제가 재산관계로 관가에 서로 소송한 일이 있었다. 공이 두 형제를 불러 은(銀) 두 덩이를 주면서 “얻기 어려운 것은 형제이고 이루기 쉬운 것은 재물이다”고 타일렀는데 박씨 형제가 감복하여 개과천선하였다.
전산군(全山君) 이창무(李昌茂)공께서 영덕현령으로 있을 때 공의 의로운 일을 듣고 비학산에 공을 찾아와서 “동도처사(同道處士)의 집”이라고 하고 드디어 자기 따님을 아내로 주었다.
동경지에 보면 “이습은 효도와 우애가 하늘에서 타고난 것이며 성리학에 잠심(潛心;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힘)하였다. 먼데서 바라보면 가을 달과 같고 가까이서 보면 깨끗한 옥과 같다”고 기록되어 있다. 묘는 큰 옥골 도원공 묘 북동쪽 등의 유좌이다.
32. 실전세계(失傳世系) 16육세 혁(赫) 백결선생(百結先生)
자 공계(公季), 신라 자비왕(재위 458 - 479)때의 거문고의 명인으로 경주 낭산 기슭에 사셨다.
성품이 강직하시고 학문을 좋아하셨으나 극히 빈곤하셔서 옷을 어찌나 누덕누덕 기워 입었던지 사람들은 “백결선생(百結先生)”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귀하기를 구하지 않았고 또 가난함을 원망하지도 않으며 오직 덕행을 쌓으셔서 사람들이 “도덕군자”라고 불렀다.
어느 해 세모(歲暮)에 집집마다 울려 나오는 떡방아 소리를 듣고 부인이 “우리는 무엇으로 설을 보냅니까?”라고 근심하자 거문고로 방앗공이 소리를 내어 위로하였는데 그 곡조가 후세에 전해져 “대악(방아타령)”이라 일컬어졌다.
법흥왕 때 간의대부로 추증되셨다. 형 선장(宣璋)은 눌지왕 때 벼슬이 상등충공좌정사당태위종승(上等忠恭坐政事堂太尉宗丞)이셨다.
33. 실전세계(失傳世系) 18세 인흥(仁興)
자 화행(和行), 문장(文章)과 덕행이 있으셨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산림간에 숨어 살며 현사(賢士)를 찾아 도덕을 닦으셔서 도천선생(道千先生)이라 일컬어지셨다.
지증왕(재위 500 - 514)이 그 현명하심을 알고 등용되기에 이르러 벼슬이 협률도위(協律都尉)가 되셨다. 왕께 아뢰기를 “우리 시조이래 국호가 정해지지 않아 혹 사총(斯摠)이라고도 부르고 혹 신라(新羅)라고도 부르는데, 신(新)은 덕업일신(德業日新; 덕업이 매일 새로움)에서, 라(羅)는 망라사방지의(網羅四方之義; 사방을 다 의롭게 함)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예로부터 나라가 있으면 칭제칭왕(稱帝稱王; 황제나 왕이라 부름)하고 국호를 정하는 것이니 칭왕하고 국호를 신라로 정하소서”라고 하여 비로서 임금을 왕이라 부르고 나라의 이름이 정해졌다.
후에 태사령이 되어 오복(五服; 다섯 가지의 복식)을 정하셨고 법흥왕 때는 백관(百官)의 공복(公服)을 정하여 삼한의 여러 나라로부터 군자의 나라라 불리었다.
30여 년간 어진 재상으로 바른 정치를 하시다가 연로하시어 은퇴하셔서 그 제자에게 효제충신(孝悌忠信)할 것과 삼강오륜(三綱五倫)을 행할 것을 가르치시고 문집(文集) 20권을 남기시고 향년 73세로 고종명하셨다.
34. 실전세계(失傳世系) 22세 태휘(泰暉)
자 잉하(仍夏), 어려서부터 글을 잘하여 중국 당(唐)나라로 유학하셨다. 당의 고조임금이 그 문명(文名)을 듣고 국자감시(國子監試; 과거시험)를 베풀었고 공께서 1등으로 급제하셨는데 그 때 나이 22세이셨다.
당에서 한림학사를 거쳐 예부시랑 벼슬에 계시다가 38세에 신라 선덕왕 때에 귀국하셔서 진덕왕 때 벼슬이 중서령(中書令)이 되셨다.
35. 실전세계(失傳世系) 23세 우영(友榮)
자 호진(浩眞), 어려서부터 책을 읽어 문장이 있으셨고, 진덕왕 2년 왕이 공에게 명하기를 당에 가서 군사를 청하여 백제를 함께 칠 것을 청하라 하였다. 그 때 당태종이 공의 문장(文章)을 알고 국자감시를 있게 하였는데 공께서 급제하여 한림학사가 되었고 후에 당병을 얻을 수 있었다.
무렬왕 때 전공(戰功)이 있었고 또 문무왕 때 모사(전략가)로 당군과 더불어 고구려를 쳤고 벼슬이 대보아찬상주국(大輔阿餐上柱國)이 되셨다.
36. 17세 제현(齊賢) 익재공(益齋公)
고려시대의 문신, 학자로 처음이름은 지공(之公), 자는 중사(仲思), 호는 익재, 역옹, 그리고 실재, 시호는 문충(文忠)이셨다.
1301년 충렬왕때 성균시(成均試)에 장원하고 이어 문과에 급제하였고 원나라에 들어가 조맹부 등과 고전을 연구하였다. 공민왕때 우정승(右政丞)을 거쳐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랐으며, 계림부원군에 봉해졌다.
당대의 명문장가로 정주학(程朱學)의 기초를 확립하였고, 조맹부의 서체를 도입하여 유행시켰다. 경주의 귀강서원과 김천의 도산서원에 제향되셨고 저서로는 “효행록(孝行錄)”, “익재집”, “역옹패설”, “익재난고” 등이 있다.
37. 백사(白沙) 항복(恒福)
조선시대의 문신으로 자는 자상(子常), 호는 백사, 필운, 청화진인, 동강 그리고 소운, 시호는 문충으로 1580년 선조때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하셨고, 임진왜란때 병조판서가 되어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하고 안으로 군사를 모집하셨다.
이조판서에 이어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이 되셨다. 청백리(淸白吏)로 그 이름이 올랐으며 포천의 화산서원과 북천의 노덕서원에 배향되셨다. 저서로는 “백사집”, “북천일록” 등이 있다.
38. 성재(省齋) 시영(始榮)
자는 성흡, 호는 성재로 1885년 조선 고종때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고 또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궁내부 수석참의를 역임하고 또 1908년 한성재판소장, 법무 민사국장, 고등법원 판사를 역임하셨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만주로 망명하여 유하현에서 신흥군관학교를 설립, 독립군 양성에 힘써다가 1919년 4월 상해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법무총장, 재무총장을 역임하고 1929년 한국독립당 창당에 참가하여 초대감찰위원장에 피선되고 1933년 임시정부 직제개정 때 국무위원 겸 법무위원이 되어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1945년 광복으로 귀국하였다.
대한독립촉성회 위원장으로 활약하고, 1948년 정부가 수립되자 초대 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이승만 대통령의 비민주적 통치에 반대하여 1951년 부통령을 사직하고 1952년 제2대 대통령선거에 입후보하여 그와 대결하였다. 국민장으로 정릉 남쪽에 안장되고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에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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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히 배워갑니다,
수고 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