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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장 야망 <갓밝> 마고가 궁희와 소희를 낳고, 궁희가 황궁과 청궁을 낳았으며, 소희가 백소와 흑소를 낳으니 나라의 기틀이 잡혀 갔다. 그러나 이즈음 인구가 증가하니 먹을 것이 부족하였다. 그리하여 새로운 세상을 찾아 이동을 하게 되니, 마고의 후손 열두 개파는 황궁, 백소, 청궁, 흑소의 네 개 무리로 나뉘었다. 마고와 궁희의 맏나라를 이은 황궁씨의 무리는 북쪽 천산주(천산산맥)에, 백소씨는 서쪽 월식주(중동 근동)에, 청궁씨는 동쪽 운해주(중국 중원)에, 마지막으로 흑소씨는 남쪽 성생주(인도, 동남아)에 각각 정착하여 나라를 세웠다. 하나 복서의 꿈 1. "하아, 둘! 하아, 둘!" 봉오의 구령 소리에 맞춰 규호의 펀치가 미트 속을 헤집고 들어간다. "퍽! 퍽!" 규호의 펀치 한 방 한 방이 미트에 꽂힐 때마다 엄청난 무게의 파괴력이 손바닥으로부터 어깨 뼈 속까지 전해지고 봉오는 저려 오는 통증으로 미간을 찌푸린다. 계속되는 규호의 강펀치에 휘청대면서도 봉오가 질책의 소리를 질러 댄다. "동작 봐라! 느리다, 느리! 그 주먹에 언 놈이 맞겠노?" 그 때, 봉오의 휘두르는 미트를 더킹하며 규호가 재빨리 오른손 잽을 복부에 꽂아 넣는다. "웁!" 배를 움켜잡으며 봉오가 쓰러진다. 쭈그려 앉아 있는 봉오를 내려다보며 규호가 싱긋 웃으며 놀린다. "자식, 그것도 못 피하냐? 그러면서 느리다고?" 중량급인 미들급에서도 하드 펀처로 소문난 규호의 주먹에 라이트급의 봉오가 견디지 못하고 쓰러지는 것은 당연했다. 비록 잽이었지만 규호의 잽이 봉오 체급에서는 강타자의 클린 히트와 맞먹을 만했기 때문이다. "임마! 트레이너 패는 놈이 어딘노?!" 허리를 굽힌 채 얼굴을 꼿꼿이 쳐든 봉오가 규호를 노려보며 악을 쓴다. "야, 그만 하자. 마음먹고 주먹을 쓸 수가 있어야 실력도 늘지. 매일 샌드백이나 두들겨야 하니, 원!" 규호가 링을 내려오면서 샌드백 쪽으로 다가가자 체육관 내 대부분의 관원들이 하던 훈련을 끝내기라도 한 것처럼 규호의 샌드백 치기를 지켜보기 위해 규호 주위로 몰려든다. 저마다 챔프의 꿈을 안고 도장을 노크한 10대와 20대 초반의 꿈나무들이다. 타고난 강타자로서 스피드와 유연성을 골고루 갖추었기 때문에 허리 힘을 최대한 끌어들여 날리는 규호의 펀치는 헤비급 선수와도 맞먹을 정도라고 유 관장은 평가한다. 그런 규호의 주먹이니 그의 훈련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안목이 넓어지는 것이고 강펀치가 작렬할 때마다 갈대처럼 흔들리는 샌드백을 보면 간접 쾌감으로 속이 후련해진다. 가볍게 더킹과 위빙을 하던 규호가 샌드백의 복부에 레프트를 꽂음과 동시에 다시 왼손을 뽑아 내어 숏 훅을 얼굴 왼쪽으로 찍어 돌린다. 전광석화같은 레프트 더블을 샌드백에 꽂고는 다시 한번의 더킹으로 상대의 주먹을 흘린 규호가 이번에는 상대의 왼쪽 옆구리에 그의 라이트를 박아 넣고 클린치를 하려고 들어오는 상대를 피해 왼쪽으로 살짝 위빙을 하면서 레프트 어퍼 커트를 꽂아 버린다. 실전이라면 한 방으로 게임이 끝나겠지만 천장에 달려 흔들거리기만 할 뿐 떨어지지 않는 샌드백이라 규호는 마음놓고 상대의 상체에 주먹을 퍼부어 댄다. 라이트 잽을 던지며 오른쪽으로 돌던 규호가 순간적 더킹과 함께 레프트 스트레이트를 상대의 턱에 폭발시키고 더킹, 잇달아 라이트, 레프트 스트레이트를 수 회에 걸쳐 반복하며 속사포 같은 해머 펀치를 쭉쭉 뻗어 날린다. 규호의 연속되는 펀치의 작렬로 샌드백은 복부의 충격때문에 앞으로 꺾여 엎어지는 상대의 모습처럼 공중에 떠서 내려오지를 않는다. 지켜보던 관원들이 모두 혀를 내두른다. 규호의 기량과 펀치력을 익히 알고 있던 관원들이지만 70 킬로그램을 웃도는 중량에서 발산되는 스피드와 테크닉, 경쾌한 푸트 웍은 경량급 선수를 연상시키는 것으로 볼 때마다 관원들을 경탄의 함성으로 몰고 간다. 사실, 규호는 스피드와 테크닉의 향상을 위해 평소에 꼭 몇 라운드씩은 경량급 선수들과의 스파링을 가져왔다. 상대가 6온스, 8온스를 끼고 실전으로 덤비는 반면 규호는 14온스의 글러브를 끼고 수비 위주의 스파링을 한다. 상대의 날쌘 공세에 더킹과 위빙, 패팅으로 주먹을 흘리고 사이드 스텝, 백 스텝을 이용해 상대를 교란하면서 호흡을 가다듬는, 주로 스피디한 상대를 가상한 방어 목적의 이미지 트레이닝이다. 반복된 훈련의 효과로 상대를 읽는 규호의 눈은 날카로움을 더해 가고 스피디한 몸놀림으로 퍼부어 대는 상대의 공격도 예리한 그의 눈에는 허점의 순간이 슬로우비데오로 지나간다. 링 위에서 규호의 모습을 지켜보던 봉오가 중얼거린다. "물거이야, 물건!" 미들급의 중량으로 규호만큼의 유연성과 스피드를 가진 선수는 세계 정상급에 있는 몇몇 깜둥이들 뿐이라고 생각했고 봉오의 판단은 정확한 것이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6개월의 합숙훈련과 깜둥이들과의 실전 경험이 쌓인다면 전성기의 슈거 레이 레너드와 한판 붙어도 가능할 거란 생각을 하면서 봉오는 자만없이 한 방 한 방에 땀을 튀기는 규호를 흐뭇하게 바라본다. 규호가 흐르는 땀을 훔치며 긴 호흡을 하고 있을 때 체육관 문이 열리면서 일단의 사람들이 도장 안으로 들어선다. "수고들 많으십니다." 앞선 사람이 큰 소리로 인사를 하자 뒤를 이어 세 사람이 가벼운 목례의 눈인사를 보낸다. 방송국에서 취재를 나온 듯 사내 둘이 카메라와 소품 가방을 들고 뒤따른다. "관장님 계십니까? 약속을 하고 왔습니다만..." "예~! 어서들 오이소!" 규호의 훈련 연습을 내려다보고 있던 봉오가 큰소리로 대답을 하면서 링을 훌쩍 뛰어 내린다. 앞선 사람에게 넙죽 인사를 하고는 관장실을 가리키며 쫓아가더니 유 관장과 함께 나온다. 관장이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그들을 맞이하여 손님들을 모시고 사무실로 사라진다. 호흡을 가다듬으며 그들을 바라보던 규호가 가볍게 전후 좌우 스텝을 밟다가 고개를 숙이며 샌드백을 향해 주먹을 내뻗는다. "뻥!" 체육관의 정적을 날려 버리는 한 방의 펀치로 잠시 낯선 상황에 빠져 있던 관원들이 이 소리에 깜짝 놀라 규호 쪽을 바라본다. "야~! 모두 제자리 가서 훈련들이나 해!" 규호가 그들을 향해 큰 소리로 꾸짖자 모두들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돌아서더니 제각기 훈련에 돌입한다. 링 위에는 두 명의 선수가 공(gong) 소리와 함께 헤드 기어를 쓰고 링 중앙을 향하고 대형 거울 앞에서는 "타닥, 타닥" 줄넘기로 머리카락이 물결친다. 링 안팎에서 땀을 쏟으며 훈련에 열중인 선수들이 체육관의 열기를 후끈 달구고 있다. 2. 관장실에서 쫓아 나온 봉오가 규호에게 달려와 취재 기자가 규호에게 개인적으로 인터뷰를 할 것이라고 한다. 무슨 말이냐는 듯이 바라보는 규호에게 밀레니엄 시대를 맞아 방송국에서 스포츠 종목별로 유망주들을 취재하는데 복싱 종목에서 규호를 추천 받아 왔다는 것이다. 봉오의 떠벌림을 담담하게 듣고 있는 규호를 향해 유 관장이 문을 열고 부른다. "인사 드려라, KBC 방송국의 스포츠 파트 기자이신 이호건 기자님이다." "안녕하십니까? 배규호입니다." 운동 중이던 터라 벌겋게 달아 오른 얼굴로 인사하는 규호에게 이 기자가 악수를 청하며 친밀감을 표시해 온다. "이렇게 만나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배 선수의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시합도 몇 번 관전했는데 대단하더군요." 중년의 연륜으로 보이는 그는 둥근 얼굴에 배가 불룩 나온 이웃집 아저씨 같은 정감을 풍기는 기자였다. 규호는 과찬에 머쓱한 웃음을 보이며 다시 한번 인사를 한다. 유 관장이 이 기자 옆의 손님들에게도 인사를 권하자 이 기자가 친절하게 소개를 한다. 이 기자가 맞은 편 소파의 동행들을 소개하는데 맞추어 규호가 가벼운 목례로 인사를 나누어 간다. 이윽고 아래로 떨구어져 있던 시선을 소파의 끝으로 가져가며 인사를 위해 동공의 초점을 맞춘다. 그때까지 긴 머리를 떨군 채 무엇인가 메모에 열중이던 여인이 이 기자의 소개와 함께 미소지은 얼굴을 들어 밝은 눈빛을 던진다. “안녕하세요? 안지원입니다." 여인이 인사를 하며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한다. "배 선수, 안지원 씨는 우리 밀레니엄 특집 프로의 메인 MC로서 우리와 함께 현장의 주인공을 찾아 다니면서 직접 취재를 하고 있지요. 새 천년 첫 날의 특집극으로 방송국의 개혁적 차원에서 편성된 프로그램이라 방송국 측에서도 지대한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데, 시청자들에게 한반도 한민족 천 년의 희망을 생동적으로 전달하는 것을 사명으로 하여 편성되어, 관계자 모두 정열을 쏟고 있고 특히 안지원 씨가 그 주축을 담당하고 있지요." 준비된 원고를 읽듯 읊어 내려가는 이 기자의 설명을 흘려 들으며 규호는 자신의 두터운 손을 이성으로 가려진 그녀의 따사로움에 얹는다. 3. 공식 경기를 통해서 매스컴으로 알려진 배규호의 전적은 11전 전승에 전 경기 1라운드 케이오우승이다. 그 중 최근에 한 번, 동양 타이틀전의 메인 게임에 앞서 벌어진 세미 파이널전에서 방송으로 선을 뵈었을 뿐, 아직까지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규호는 그 한 번의 게임에서 팬들에게 인상적인 1R KO승을 보였지만 중량급에서 한 방의 펀치를 가진 선수는 힘들지 않게 찾아볼 수 있기 때문에 일천한 전적의 강 펀처에게 복싱 팬들은 관심의 눈길을 주저하는 것이다. 우리 나라의 경우 특히 미들급(주니어 미들급, 수퍼 미들급 포함)에서 강타자들이 많이 배출되었고 그들 중 챔프만도 여러 명이다. 김기수, 유제두, 박종팔, 백인철 등 진정한 강자로서 한 시대를 풍미한 대표적 강타자들이다. 특히 박종팔과 백인철은 KO 퍼레이드로 연속된 승부사들이었다. 이런 이유로 우리 나라 복싱 팬에게 미들급 등 중량급에서 하드 펀처라는 이유만으로는 주목거리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계 챔프 배출로 손가락 안에 드는 복싱 강국에서 동양 랭커로 걸음마를 하는 규호에게까지 큰 기대의 시선이 가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지금은 유망주로서 복싱 관계자들의 시선이나 끌고 있을 정도인데 그들도 규호의 테크닉과 스피드 등 기량에는 의문을 남기고 있다. 4. 대구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규호는 스포츠가 좋아서 체대를 진학하였고 그때까지 그는 무명의 만능 스포츠맨이었다. 운동 환경으로는 천연의 혜택을 받은 팔공산에 살면서 매일을 로드 웍과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심폐력과 근력의 기초 체력을 튼튼히 하였고 등산, 수영, 복싱 등으로 정신과 체력을 길러 나갔다. 특히 복싱에는 환상적인 매력을 갖고 있어서 소년기부터 TV를 스승 삼아 복싱을 배웠는데 집 뜰의 아름드리 잣나무 가지에는 매일같이 해 지도록 두드려 대어 낡은 샌드백이 그의 열정을 대변하여 걸려 있다. 체대에 들어 간 규호는 마음껏 스포츠를 접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기뻤고 대학 생활의 대부분을 스포츠 활동에 투자했다. 많은 스포츠의 경험을 쌓으면서도 복싱에 대한 애정은 여전해서 바쁜 일상에도 짧은 시간이나마 샌드백 치기와 새도우 복싱은 걸러지 않았다. 어쩌다가 규호의 펀치에 샌드백이 날리는 것을 보게 되면 어느 누구나 그의 복싱 입문을 권유할 정도였다. 그러나 규호에게 대학 생활의 수많은 경험과 활동들이 그로 하여금 그런 생각을 할 여유를 주지 않았고 그대로 그렇게 행복하고 바쁜 대학 시절의 4년이 지나갔다. 대학 졸업과 함께 입대, 그리고 국방의 의무를 무사히 마치고 제대한다. 그리고 대학원에 진학하여 학업을 계속하던 어느날 불현듯 체육관의 문을 두드린다. 둘 스승과 제자 1. 규호가 샌드백을 둔탁하게 두드리고 카메라맨이 그를 초점으로 해서 필름을 돌려 간다. 샌드백의 흔들림에 이호건 기자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한다. 전적을 보아 강펀치의 소유자라는 것은 알고 왔지만 저 정도의 파워가 실릴 줄은 상상을 못했던 것이다. "박종팔과 백인철의 펀치에도 샌드백은 저렇게 흔들리지 않았어!" 이 기자의 놀라는 모습을 보면서 안지원 아나운서는 배규호 선수를 생각보다 대단한 선수로 파악하고 다시 한번 샌드백을 향하여 힘차게 주먹을 휘두르는 유망주를 한층 더 주시하여 바라본다. 카메라가 잠깐 멈추더니 이 기자가 규호의 새도우 복싱을 주문한다. 규호가 슬쩍 유 관장을 쳐다보고 유 관장이 고개를 끄덕인다. 평소 어떤 취재에도 규호의 훈련 장면만은 절대적으로 거절하던 유 관장이었기 때문에 규호는 관장의 의중(意中)이 궁금했던 것이다. 규호가 70KG의 중량으로 가벼운 스텝을 밟기 시작한다. 서서히 스피드를 올리면서 현란한 푸트 워크를 선보인다. 이어서 재빠른 페인팅 모션으로 앞뒤, 좌우로 더킹과 위빙의 허리 변화를 유연하게 보여준다. "이럴 수가!" 이 기자는 놀라움을 넘어 기가 막힌 듯한 표정을 지으며 규호의 훈련 모습과 유 관장을 번갈아 본다. "미들급의 체중으로 저토록 가볍게, 저토록 빠른 펀치를 낼 수 있다니!" 이 기자는 현기증이 나는 듯 잠시 눈을 감는다. "알리, 포먼, 타이슨, 레너드, 헌즈, 해글러, 아르게요, 듀란, 산체스, 차베스, 호야 등 자신의 현역 기자 생활 중에 당대 최고의 복서로 명성을 떨친 전, 현 복서들이 파노라마로 흘러간다. 2. 이 기자가 권투 위원회를 찾아가 유망주 추천을 의뢰했을 때 전무이사는 배규호를 거론하지 않았다. 요즈음 승승장구를 하고 있는 신인왕 출신의 경량급 선수 몇 명을 추천했을 뿐이다. 이 기자가 언뜻 배규호를 떠올리고 자문을 구하자 그는 한 마디로 배규호의 가능성을 인정치 않았다. "걔는 나이도 있고 가방 끈이 길어서 근성이 없어요. 스피드도 없고 믿는 건 주먹 한 방뿐인데 우리 나라 선수들 동양권에서나 통하는 주먹 갖고 세계 무대에서 힘없이 무너지는 건 이 기자도 익히 알고 있지 않습니까?" 사실이 그랬다. 동양의 왕자로서 주먹 자랑하던 선수들이 복싱의 본 고장이라는 미국을 비롯, 멕시코, 중남미로 원정가서 주먹 한번 제대로 못 써 보고 주저앉는 것을 이 기자는 숱하게 경험해 왔다. 배규호가 펀치는 있다고 하나 전무이사의 말대로 보면 그를 밀레니엄의 유망주로 보기에는 전적에 비해 그의 기량이 너무 떨어진다는 생각도 든다. 그렇지만 그렇게 따져 볼 때 전무이사가 추천한 선수들도 명함을 내밀기엔 약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이 어리고 헝그리 복서라는 것 말고는 규호에게 앞설 게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 기자는 전무 이사가 그들을 추천한 이유를 알 만 했다. 아마도 어린 나이에 모든 것을 복싱에 걸고 젊음을 불사르는 친구들에게 점수를 더 주는 것 같았다. 이호건 기자는 배규호 선수의 기량과 펀치를 지켜보면서 전무 이사와의 대화를 아찔하게 떠올린다. 전무 이사의 추천을 흘려들으며 이 기자는 권투 위원회를 나와 걸으면서 배규호 선수의 전적을 곰곰이 분석하기 시작한다. "11전 11승 전 게임 1R KO라..." 아무리 생각해도 우연이 아닌 듯 했다. "기량이 받쳐 주지 않는데 그렇듯 화려한 전적이 가능한 걸까?" 이 기자는 미간을 좁히며 자신이 관전했던 배 선수의 시합 상황을 떠올려 보았다. 자신이 본 어느 시합이나 배 선수는 서두름이 없었다. 배 선수는 냉정하게 상대의 눈을 보며 상대가 들어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거리를 두고 서서히 오른쪽으로 돌면서 가끔씩 잽을 툭툭 던지며 거리를 재다가 긴장을 못 참고 상대가 들어오면 상체만 오른쪽, 왼쪽으로 가볍게 틀어 주면서 어퍼 컷이나 숏 훅으로 게임을 끝내 버리는 것이다. "무엇인가 있어!" 15년의 베테랑 스포츠 기자로서 이호건 기자는 자신의 직감을 믿기로 했다. 3. 이 기자는 배 선수의 연습 장면을 바라보며 자신의 직감을 믿은 것이 얼마나 엄청난 것이었나를 깊은 안도의 한숨으로 절감한다. 이 기자가 유 관장에게 다가가더니 몇 마디를 하다가 함께 관장실로 들어간다. "관장님,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하하, 뭐가 말입니까?" "배규호 선수 말입니다. 저런 기량을 숨긴 이유가 뭡니까?" "하하, 이 기자님, 제가 숨길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그리고 제가 언제 숨겼단 말입니까?" "배 선수의 기량이 보통이 아니니까 드리는 말씀 아닙니까? 저 실력이면 지금도 세계 챔피언급의 수준이 되지 않습니까?" 이 기자가 유 관장에게 따지듯 대들자 관장이 미소 띤 얼굴로 대답한다. "하하, 그게 어디 제 책임입니까?" 이 기자는 기가 차다는 듯이 관장의 다음 말을 기다린다. “시합마다 제 실력을 숨긴 선수 탓이지요, 하하” 이 기자는 밀레니엄 특집 프로그램의 취재 목적을 잊고 있었다. 머리 속에는 배규호 선수의 화려한 테크닉과 스피드, 엄청난 파괴력만이 레너드, 타이슨의 그것들과 어울려 선명히 그려진다. 고개를 돌려 관장실 창문 너머로 규호의 취재 장면을 바라보며 이 기자는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끼며 유 관장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이럴 수가 있느냐?"는 듯이... 잠시 후, 이 기자는 배 선수의 특집 프로그램을 제작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관장에게 협조를 구한다. 웃음으로 일관하던 유 관장이 정색을 하며 이 기자를 바라본다. "그건 안됩니다. 규호가 동양 챔피언이나 세계 랭커가 될 때까지는 좀 참아주셔야겠습니다." 유 관장의 단호함이 수긍이 안되는 것은 아니다. 아마도 관장은 배 선수의 세계타이틀전이 순조롭게 성사되기를 바라고 하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배규호 선수의 실력을 두 눈으로 확인한 이상 기자 정신으로라도 물러날 수 없는 일이었다. "관장님, 배 선수의 문제는 개인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제가 안 이상 이것은 국가적인 문제로서 관리해 나갈 일이라고 확신합니다. 지금부터라도 대대적인 홍보를 해서 배 선수를 세계 무대에 내 놓아야 합니다." 유 관장이 고개를 저으며 말한다. "챔프가 되고 나서 해도 늦지 않아요. 이 기자도 잘 알지 않습니까? 본 고장이 아닌 동양의 변두리에서 실력있는 선수가 타이틀 도전하기가 얼마나 힘든지..." 아니나다를까 유 관장의 생각이 바로 거기에 있었다. 한때 레너드와 쌍벽을 이루며 세계 복싱계를 주도하던 마빈 해글러도 도전자 시절 그의 탁월한 기량을 두려워한 챔피언들이 도전을 받아주지 않아 얼마나 곤욕을 치르며 벨트를 차지했는지를 이 기자는 잘 알고 있었다. 맞는 말이다. 이 기자는 유 관장의 말에 수긍을 하며 그의 의도를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3년 전, 규호가 처음 체육관에 와서 선수가 되도록 도와 달라고 하더군요. 군살없는 몸에 눈빛이 살아 있고 집에서 샌드백 좀 두드렸다고 하길래 글러브를 주고 한 번 쳐보라고 했죠." 기억을 더듬으며 말을 이어가는 유 관장의 눈이 당시를 회상하듯 서서히 감긴다. 그의 이야기를 간추려 보면 유 관장은 규호의 능력을 알고 규호의 천재성을 최선으로 관리해 왔던 것이다. 챔프가 되기까지 순조로운 순항을 위하여... "거의 기절할 지경이었죠. 녀석의 주먹을 보고...테크닉까지 거의 완벽했지요. 푸트 워크도 경쾌했고... 이 기자가 오늘 느낀 것을 제가 3년 전에 느낀 거죠. 하하" "그럼, 그 때의 기량도 지금과...?" "그랬죠. 녀석은 체육관에 오기 전에 이미 챔프의 실력을 닦아서 들어왔던 거죠." 이 기자가 기가 막힌 표정으로 관장의 말을 기다린다. "규호는 자신에게만 부여된 천부적인 재질을 갖고 있었어요. 거기에다 운동의 성실성, 자기 관리 능력까지 3박자를 다 갖추었으니 녀석에게는 트레이너나 체육관이 필요 없었던 거죠." "그렇다면, 배 선수가 체육관에 찾아온 이유는...?" "그렇죠. 챔프가 되어야겠는데 복싱 풍토를 모르는 녀석이니까 누군가로부터 그 도움이 필요했던 거죠." "3년이면 충분히 가능한 기간이 아닙니까? 아까 이야기들을 참작하더라도 말입니다." 3년 동안 갈고 닦아서 지금의 기량을 갖추었다면 모르지만 이미 그 당시 챔프의 기량을 갖고 있었다면 3년의 기간이 너무나 아깝다는 생각을 이 기자는 했던 것이다. “태국의 복싱 천재인 사엔삭 무앙수린은 프로 전적 3전 만에 세계 왕좌에 오르지 않았던가?” "물론 가능하죠. 제가 생각해도 그 기간이면 규호의 실력으로 타이틀을 두세 개는 딸 수 있는 세월이죠." 관장도 "휴!"하고 긴 한숨을 내쉬더니 말을 이어간다. "규호는 복서로서 자신의 천재성을 스스로 잘 알고 있어요. 그에 반해 천재의 결점도 잘 알고 있다는 겁니다. 어디서나 천재는 자신을 과신해서 노력이 뒤따르지 않죠. 그래서 대부분의 천재들은 그들의 재능을 반짝하고는 사라지는 경우가 많죠. 복싱에도 그런 예가 있지 않습니까? 태국의 무앙수린이나 중미의 어느 나라죠? 월프레도 베니테스라고, 레너드에게 첫 타이틀을 넘겨준 선수 말입니다. 베니테스의 경우는 타이틀전 1, 2주일 전에 운동을 시작해서 링에 올랐다고 그러더군요." 이 기자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다. "베니테스는 그러면서도 두세 체급을 정복했죠, 아마?" 유 관장이 눈과 고개를 동시에 끄덕이며 대답한다. "그런 선수가 상식적인 방법으로 하드 트레이닝을 했다면 어땠을까요?" 관장의 질문에 이 기자가 고개를 짧게 끄덕이며 얼굴을 들어 천정을 보다가 섬뜩한 전율을 느끼면서 배규호를 떠올린다. "그렇다면...?!" 그렇다! 유명우 관장은 이 기자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배규호를 평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대 최고가 아니라 세계 복싱계를 통틀어 미증유의 스타감으로 예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규호는 스스로 반짝이 천재를 거부하고 있는 겁니다. 지난 3년의 게임 스케줄도 규호의 요구를 거의 전면적으로 수용해서 이루어진 것이죠. 어차피 나는 녀석의 들러리일 뿐이니까요, 하하" 다시 한번 유 관장에게 경외심을 갖고 이 기자는 유 관장의 현역 시절을 회고해 본다. 주니어 플라이급 챔피언으로서 전 체급을 통틀어 역대 우리 나라 최장 기록인 17차 방어의 금자탑을 이룩한 장본인이 아닌가? 일본 선수와의 18차 방어전에서도 그 경기를 링 사이드에서 지켜 본 이 기자는 내용 면에서 분명한 유 관장의 승리라고 확신했었다. 원정 방어에서 실패하고 유일한 1패의 오점을 안은 유 관장이 리턴 매치에서 빼앗긴 타이틀을 되찾고 챔프로서 명예롭게 은퇴한 것을 이 기자는 정말 멋 있는 사건으로 스포츠 뉴스 시간에 보도한 바 있다. "규호는 자신의 천재성을 믿으면서도 철저한 노력파입니다. 직업으로서 복서 인생을 길게 보고 있는 거지요." 유 관장의 이어지는 말을 끊으면서 이 기자가 묻는다. "배 선수의 지금 나이가 설흔인데 가능할까요?" 유 관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다. "규호의 천재성과 체력 조건, 그의 성실성과 집념을 감안하면 마흔 까지는 무난할 겁니다." 대답을 마친 유 관장이 문득 만면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아래로 내리까는 눈동자에서 형용키 어려운 우수의 무게를 온 얼굴로 퍼뜨리더니 이어 말을 덧붙여 나간다. "천재인 만큼 생각이 깊은 게 문제지요. 가끔씩 운동을 전후로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것을 볼 때가 있는데 그럴 때 규호의 얼굴은 운동 선수의 그것으로 느껴지질 않아요." “그게 무슨 뜻입니까?” 이 기자의 재촉에 유 관장이 천천히 입을 뗀다. “아마도 저 녀석의 마음 속에는 복서로서의 삶이 다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단 말입니다.”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짓던 이 기자가 다시 유 관장을 바라본다. 벅찬 제자를 3년 동안 관리하면서 얼마나 힘겨웠을까를 생각하니 한편 고맙고 한편 미안한 마음이 한꺼번에 가슴 속으로 몰려든다. “저 녀석, 내가 아니면 거둘 수 있는 사람이 없을 거라는 교만함도 한 몫했지요, 하하” 이 기자의 기자 정신을 완전히 꺾어버리는 한 마디였다. 유 관장이 당부하듯이 이 기자에게 다짐한다. “이 기자님, 우리 조금만 참읍시다.” 이 기자도 더 이상 기자의 욕심을 낼 수는 없었다. 유 관장과 오늘의 취재로 복싱팬들의 관심이나 받게 하자는 선에서 양해를 구하고 관장실을 나온다. 관장실 밖에서는 안지원 아나운서가 연습 장면 촬영을 끝낸 규호 옆에서 샌드백을 사이에 두고 인터뷰 준비를 하고 있다. "안녕하세요, 배규호 선수?" 규호가 밴디지를 감은 손으로 이마의 땀을 훔치며 대답한다. "예, 안녕하십니까?" 규호가 훈련 후의 개운한 마음을 싱그럽게 토해낸다. "훈련에 아주 열심이신데요, 항상 이렇게 연습하시나요?" "예, 그렇습니다. 일상적인 훈련 스케쥴이죠." "네~! 대단하시군요! 그래서 전적이 그렇게 화려하신가 보죠?" "예, 성실한 훈련의 결과라고 봐야겠죠." 카메라 초점을 의식한 지원이 넌지시 규호의 팔을 잡아당기자 규호가 지원이 이끄는대로 카메라 앞에 자연스런 자세를 취한다. 지원이 그에게 화사한 미소를 띄우며 대담을 이어간다. "주무기는 뭐죠?" 지원의 질문에 규호가 주먹 쥔 왼손을 들어 보이며 자신있는 대답을 한다. "주무기는 레프트(왼손)로 사용 가능한 스트레이트(앞으로 쭉 뻗어 치기), 훅(옆에서 앞으로 감아 치기), 어퍼 컷(올려 치기) 등 모든 기술이라고 할 수 있죠. 또한 필요한 순간에 어떤 펀치도 날릴 수 있는 유연함과 순발력도 빠트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오른손도 왼손 못지 않죠. 단지 왼손잡이인지라 왼손을 사용하는 자세가 보다 자연스러워 즐겨 왼손잡이 자세를 취하기 때문에... 그리고 펀치력 만큼 중요한 것이 타이밍이죠." 장황한 설명을 의식한 듯 규호가 어색한 미소를 띠면서 말끈을 흐리다가 이내 명쾌하게 대답을 맺는다. "네~! 타이밍이 좋다는 말은 눈이 날카롭다는 말과 일맥 상통한다고 볼 수 있나요?" 지원이 취재를 위하여 공부라도 한 듯이 자신 있게 묻는다. "물론이죠." 전문성을 갖춘 여자 아나운서의 질문에 규호가 반가운 미소로 대답한다. "마지막으로 이번 밀레니엄 특집극 ´2000년의 유망주´에 선정되셨는데 소감과 각오를 한 말씀씩 해 주시죠?" "예, 부족한 저를 새 천년의 유망주로 뽑아 주신데 감사드립니다. 더욱 열심히 해서 기대에 부응하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지원이 규호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면서 카메라를 향하고 규호도 고개를 숙이며 카메라의 초점을 벗어난다. 지원이 간략한 리포트의 마무리 멘트를 하면서 촬영은 끝나고 이 기자가 뒤에서 박수를 친다. "자, 수고들 했어요. 배 선수 고맙소." 규호도 감사의 표시로 웃음을 보내며 고개를 가볍게 숙인다. 이 기자가 규호에게 명함을 건네면서 방송국에 들를 기회가 있으면 꼭 연락하라는 말을 당부하고 열심히 하라는 고무의 손길을 어깨 너머로 툭툭 친다. 지원이 뒤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며 맑은 웃음을 지어 보인다. 운동을 끝낸 규호가 샤워실로 향하고 취재진은 유 관장과 봉오에게 감사를 표하고 출입문을 향한다. 언제 나왔는지 유 관장이 관장실 입구에서 이 기자의 목덜미에 따가운 시선을 보내며 서 있다. 4. 방송국을 향하는 취재 차량 안에서 지원이 옆 좌석의 이 기자에게 말을 건넨다. "배규호 선수, 챔피언 될 가능성은 있어 보이던가요?" 지원의 우문(愚問)을 흘려 들으며 이 기자는 유 관장의 말을 떠올리며 생각에 잠긴다. "3년간의 공백이 관장의 말대로 배규호의 의도였다면...이건 정말 사건이야!" 이 기자는 내심 경탄과 두려움으로 천재 복서 배규호를 떠올린다. "불확실한 10년, 아니 영원한 챔프의 길을 위하여 보장된 3년의 세월을 적응기로 삼아 인고(忍苦)의 날들로 보내다니..." 이 기자는 엄청난 도박의 현장과 주인공들을 떠올리며 천천히 눈을 감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