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은산의 시무7조를 답하노니, 부디 더 배우고 견문을 넓혀서 건전하고 바른 길에서 성실하게 사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라.
너의 시무칠조(時務七條)는 너의 선조일 것 같은 조덕린(趙德鄰)은 시무십조(時務十條)를 표절 및 흉내를 낸 것같다. 그나마 조덕린(趙德鄰)은 상소문 끝에 다시 한 번 간절히 당쟁의 폐해를 언급했지만, 너는 한쪽 당의 주장을 대변하느라 애를 썼구나. 그리고 아래 자료에서 밝혔듯이 시무(時務)란 왕이 물어볼 때에 관리가 올리는 상소인 것이다. 자격이 없는 일반인 아무나 아무 때나 뜬금없이 자의적으로 쓰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항간에 너의 글을 보고 회자하는 자가 있어서 조목조목 답하노라.
1. 세금을 감하시옵소서/다섯째, 재용을 아껴 낭비를 줄이소서. 답 : 세금은 곧 국가 재정이니 감세할 수 없다.
세금이라는 것이 본디 그 쓰임에 있어 나라의 곳간을 채워 국가 재정을 이어나가고 군대를 키우며 나라의 발전을 도모해 백성들이 삶을 영위해 나가도록 하는 것은 지당한 일이오나 이 나라의 조세 제도는 십시일반의 미덕이 아닌 육참골단의 고통으로 전락한 것이 작금의 현실이오며 부유한 것이 죄는 아니거늘 소득의 절반을 빼앗고 부자의 자식이 부자가 되면 안 되니 다시 빼앗고 기업을 운영하니 재벌이라 가두어 빼앗고 다주택자는 적폐이니 집값 안정을 위해 빼앗고 일주택자는 그냥 두기 아쉬우니 공시가를 올려 빼앗고 임대사업자는 토사구팽하여 법을 소급해 빼앗고 한평생 고을을 지킨 노인은 고가주택에 기거한다하여 빼앗으니 차라리 개와 소,말처럼 주인의 사료로 연명할지언정 어느 누가 이 땅에서 기업을 일궈 나라에 이바지하고 어느 누가 출세를 위해 부단히 노력하겠사옵니까
또한 증세를 통해 나라의 곳간은 채울 수 있을지언정 소비 둔화와 투자 위축 등의 부작용 역시 존재하거늘 이토록 중요한 국가시책을 어찌하여 나라에 널린 학자들의 의견 한번 여쭙지 않고 강행하시옵니까
폐하, 조세는 나라의 권한이고 납세는 백성의 책무이나 세율은 민심의 척도이옵니다 증세로 백성을 핍박한 군왕이 어찌 민심을 얻을 수 있겠사오며 하물며 민심을 잃은 군왕이 어찌 천하를 논하고 대업을 이끌 수 있겠사옵니까 부디 망가진 조세 제도를 재정비하시고 세금으로 혜택을 받는 자가 아닌, 세금을 납부하는 자가 납득할 수 있도록 세율을 재조정하시어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주시옵소서
2. 감성보다 이성을 중히 여기시어 정책을 펼치시옵소서 답 : 재정적자와 관련된 것을 결정하는 기관은 국회다. 경제정책을 이 정부에 맡긴 것이 국민의 선택이다. 지금 와서 딴 소리하는 것은 선거 결과를 수용하지 않는 궤변에 불과하다.
스스로 벌어먹지 않고 노니는 백성이 스스로 벌어 토하듯 세금을 각출한 백성의 피와 땀에 들러붙어 배를 두드리고 나라의 곳간을 갉아 재정적자를 초래하는 것은 감성이오 진정으로 나라의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곳간을 열고 자비를 베풀어 구휼하며 재정을 알뜰히 하여 부국강병의 초석을 닦는 것은 이성이니 감성이 이성을 앞서면 게으른 백성이 고기를 씹고 병약한 백성이 마른 침을 삼키는 것과 같으며 이성이 감성을 앞서면 게으른 백성이 고기를 얻기 위해 화살촉을 갈고 병약한 백성이 죽 한 사발로 기운을 차리어 다시 일터로 나가는 것과 같사옵니다
또한 기업을 옥죄는 규제와 세금을 완화하고 양질의 일자리를 저절로 토해내게끔 하여 지속 가능한 발전을 꾀하는 것은 이성이오 비정규직철폐니 경제민주화니 소득주도성장이니 최저임금인상이니 세상물정 모르는 것들의 뜬구름 잡는 소리로 기업의 손과 발을 묶어 결국 54조의 혈세를 쏟아붓는 것은 감성에 불과하니 감성이 이성을 앞서면 암탉을 때려잡아 그 고기를 잘게 나누어 굶주린 이들에게 흩뿌려 기름진 넓적다리살에 아귀다툼을 벌이게 하는 것과 같고 이성이 감성을 앞서면 암탉에게 좋은 먹이를 내어 살을 찌우고 크고 신선한 달걀을 연신 받아내어 백성 모두가 닭 한마리씩을 먹을 수 있는 것과 같사옵니다
또한 폐하께오서 그리 씹어대고 물어뜯던 22조의 4대강 사업이 그 실체라도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은 이성이 감성을 누른 까닭이옵고 마땅히 기업이 해야할 일을 백성의 혈세로 대신한 바 폐하의 54조는 증발하여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것은 바로 감성이 이성을 누른 까닭이온데 폐하를 비롯한 대신들과 관료들이 모두 백성들의 감성을 자극해 눈물을 쥐어 짜내기 위한 지지율 확보용 감성팔이 정책에만 혈안이 되어있는 바, 이러한 조정 정책의 기조 변화없이 어찌 다가올 160조 신분배 정책을 지지할 수 있으며 어찌 그에 따른 결과를 기대할 수 있겠사옵니까
폐하, 역사는 군왕의 업적을 논할 뿐 당대의 지지율을 논하지 않사옵니다 부디 정책을 펼치심에 있어 감성보다는 이성을 중히 여기시고 챙기시어 작금의 지지율로 평가받는 군왕이 아닌 후대의 평가로 역사에 남는 패왕이 되시옵소서
3. 명분보다 실리를 중히 여기시어 외교에 임하시옵소서/여섯째, 군영을 튼실해지도록 하여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소서. 답 : 지금처럼 외교를 잘 한 적이 없다. 일본과의 외교에서도 실리와 면분을 다 챙기고 있고 압도적 우위를 확보하고 있다.
나라의 지정학적 요소와 주변국들의 정세를 간파하지 못하여 한미일이냐 북중러냐 갈피를 잡지 못하고 좌고우면하니 앉은 자리는 가시방석이오 일어서니 키는 제일 작은 것이 작금의 현실이온데 일본과의 외교 마찰로 무역 분쟁을 초래하였으나 이를 외교로 해결하지 않고 정치로 해결하시려 불매운동을 조장하고 양국관계를 파탄낸 바, 여론은 반전되고 지지율은 얻었으나 결국 동북아 안보의 상징인 지소미아가 흔들리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것은 명분의 외교이옵고 중국의 패권주의와 북국 돈왕(豚王)의 핵도발의 엄중함을 먼저 고려하시어 한미일 3국의 동맹을 강화하시며 안보의 기틀을 마련하시고 절치부심하여 국력을 키워 극일을 이룬 후에야 비로소 아베의 골통을 쥐어박고 고환을 걷어차 진정한 사과와 보상을 취하는 것은 실리의 외교이옵니다
또한 일본의 의류업체가 연이어 폐점하고 일본의 자동차 업체가 한국 철수를 선언하며 일본의 기업 또한 한국 기업과 거래를 끊고 심지어 농산물과 수산물까지 수입금지에 처한다니 의류업체 근로자, 매장 근로자, 유통업자, 자동차 업체 근로자 영업사원, 수리기사, 농민, 어민, 수출입 관련 근로자 항공사, 항공사 근로자, 관광사, 관광사 근로자 등 수많은 백성들의 일자리와 생계가 위태롭게 된 것은 명분이 실리를 앞선 까닭이온데 이는 결국 백성이 다른 백성의 밥그릇을 걷어찬 꼴과 무엇이 다르며 손이 발을 밉다하여 입을 틀어막아 함께 굶어 죽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사옵니까
또한 평화와 화해 따위의 허황된 말로 감성에 목마른 백성들을 현혹시켜 실질적인 핵폐기는 안중에도 없는 북국의 돈왕과 더불어 성대한 냉면잔치를 열고 결국 구밀복검한 무리들로부터 토사구팽 당하여 백성의 혈세로 지은 연락사무소가 폭파되고 삶은 소대가리라는 치욕마저 당하는 것은 명분의 외교이옵고 국제적 합의에 따라 대북제재를 충실히 이행하시고 적극 동참하시어 북국의 돈줄을 막아 서서히 고사시키시며 동시에 한미일 동맹을 굳건히 하여 북국의 돈왕이 스스로 처지를 깨(닳)아 핵개발을 포기하고 시장을 개방토록 하는 것은 실리의 외교일진데 과연 폐하께오서는 외교에 임하시오며 명분과 실리 중 무엇을 택하셨사옵니까
또한 명분과 실리 중 무엇을 얻으신 것이오 북국과 일본과 중국과 미국 중 무엇과 화친하였으며 작금에 이르러 결국 무엇이 남았다는 말이옵니까 미국의 트럼프는 미치광이지만 자국민의 이익을 확실히 보호했고 중국의 시주석은 공산당의 수령이지만 중국의 시장경제를 대외로 이끌었으며 북국의 돈왕은 독재자이지만 최빈국의 지위를 핵보유국으로 끌어올렸고 일본의 아베는 굴욕외교로 이름났으나 그만큼 실리는 챙긴다는 평이 있으며 러시아의 푸틴이 장기집권을 꿈꾸는 건 백중 칠십을 넘나드는 지지율이 있기 때문일진데 폐하께서는 핵도 없고 백성의 삶은 파탄이오 시장경제는 퇴보하였으며 굴욕외교 끝에 실리 또한 챙기지 못하였고 또한 지지율은 절반도 채 되지 않으시면서 어찌 장기집권을 꿈꾸며 독재자의 길을 걷는 미치광이가 되려 하시는 것이옵니까
영명하신 폐하. 저들은 폐하의 정치적 신념과 감성의 논리에 귀기울여 줄 만큼 한가로운 자들이 아니옵니다 시국은 시급하여 촌각을 다투고 늑대와 표범과 호랑이는 굶주려 먹이를 놓고 다투고 있는데 어찌 폐하께오서는 한가로이 초원에 풀이나 야금야금 뜯어 삼키고 계시는 것이옵니까 부디 통촉하시어 안목을 넓게 가지시고 정치와 이념을 외교와 따로 다루시어 실리를 위한 외교에 임하시옵소서 그리하여 북국 돈왕의 핵탄두 아래 백성들을 지켜주시옵고 국토를 보전하시옵소서
4. 인간의 욕구를 인정하시옵소서/넷째, 뭇 백성들을 보호함으로써 근본을 튼튼히 하소서. 답 : 인간의 욕구는 제어되지 않으면 기득권자들만이 유리한 세상이 된다. 정의는 사라지고 불의가 판을 치게 되어 그동안 가꾸어 온 나라가 다시 독재시대로 회귀하게 된다. 그래서 인간의 기본적 욕구도 제한되고 있다.
소인이 여염의 촌락을 하릴없이 거닐다 막연히 들린 주막에서는 고을 무뢰배들이 만취해 젓가락을 두들기며 장단을 맞추었고 주막 한 켠 작은 탁자에서 홀로 산낙지를 씹으며 탁주를 들이키던 한 노인이 그에 맞춰 읇조리니 좌중의 시선이 쏠리며 일순간 적막이 흘렀던 바, 그 이야기가 하도 기가 차고 신명이 나 폐하께 아뢰오니 통촉하여 들어 주시옵소서
“반도의 어느 작은 나라에 돼지가 혁명을 일으켜 돼지의 나라를 세웠으니 이를 숯불 공화국이라 칭하였고 연호를 한돈이라 칭하였으니 한돈 사년 어느 날 돼지의 왕이 몸소 교지를 내려 나라의 모든 돼지들에게 이르길 과인이 듣기로 작금의 돈륜이 무너질 대로 무너져 축사가 쪼개지고 울타리가 넘어지니 돈권 또한 참담하기 이를 데 없도다 구유통의 쌀겨가 귀중하기로소니 너희들의 돈격보다 귀중하랴 하여 과인이 이르노니 이 나라의 모든 돼지들은 그 품종과 육질을 막론하고 앞으로 꿀꿀 거리는 소리를 금하며 또한 먹는 것을 금하여 돈성을 다스릴 것인 바, 이를 어길 시 모두 육절기에 넣고 갈아 소시지와 순대로 만들어 정육점에 효시할 터이니 그리 알고 너희는 마땅히 받들라 라고 명하였으니
이에 나라의 모든 돼지가 꿀꿀 거리며 아우성일진데 족발에 불똥이 튄 건 다름아닌 조정의 관돈들인 바, 비서실 돼지는 제 목소리가 제일 큰 줄도 모르고 도리어 수석 돼지들에게 꿀꿀거리지 말 것을 종용했으나 이내 제 몫의 구유통이 청주와 반포에 걸쳐 두 개인 것이 발각되었고 국토부 돼지는 별안간 궤엑 멱 따는 소리를 내며 꿀꿀 파시라 꿀꿀 파시라 구유통을 파시라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으며 대변돈실 돼지는 흑석동 상가에 몰래 기어들어가 대부업자에게 빌린 돈으로 뻥튀기를 처먹다 발각돼 족발이 안보이도록 줄행랑치니 결국 여섯의 관돈이 한날 한시에 사의를 밝히고 축사 담을 넘어 도주하다 말린 꼬랑지가 밟혀 목살을 잡힌 채 대궐로 끌려와 모진 고문을 당했는데 그 광경이 처참하기 이를 데 없어 대포집이 껍질을 뜯고 족발집이 족을 잘라내며 국밥집이 머릿고기를 삶아내는 고통에 여섯의 관돈들은 이실직고하였으니 이와 같았다더라
돼지는 꿀꿀거려야 제 맛이오 돼지같이 처먹어야 돼지다운 것인데 어찌 폐하께서는 돼지에게 돼지답지 않을 것을 강요하고 돼지의 본능과 욕구를 버리라 하시옵니까 돼지는 처먹어야 그 삶이 의미가 있는 것이오 돼지가 돼지다워야 돼지로써 살 수 있는 터인데 애당초 돼지의 본능을 무시한 교지를 내리시니 저희 대신들이 어찌 이를 백성들에게 강요할 것이오 또한 스스로 이를 따르겠나이까 라며 돈지랄을 하고 이구동성으로 꿀꿀대었는데 설상가상으로 성문 밖에 성난 백성 돼지들이 숯불을 들고 모여 꿀꿀거리기 시작하였고 숯불로 흥한 자 숯불로 망하리라 외치며 결국 성문을 깨어트리고 왕의 침소를 향해 치닫은 바, 금과 은으로 치장하고 비단으로 감싼 침소에는 돼지의 왕 또한 꿀꿀대며 구유통에 머리를 박고 있었고 머리맡에는 '돼지가 먼저다'라는 글귀가 선명했다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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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영끌의 귀재, 희대의 승부사, 대출 한도의 파괴자라 불리우는 흑석 김O겸 선생이 재개발 상가를 튀기려다 결국 발각되어 언론에 튀겨지고 백성에게 씹히다 결국 신기전과 같이 꽁무니에 불이 붙은 듯 내빼고 지역구의 배신자, 절세의 교과서, 50분의 기적, 대변인 사냥꾼이라 불리우는 반포 노O민 선생이 대신과 관료들에게 집을 팔라며 호통치다 본인 또한 다주택자인게 발각되어 결국 지역구인 청주를 버리고 한양의 노른자위 반포를 택해 뭇매를 맞았는데 소인은 큰 엿과 작은 엿을 양 손에 쥔 아이에게 무어라 설득해야 작은 엿 대신 큰 엿을 버리게 할지 몰라 한참을 골똘히 생각하였고 또한 양 손에 멀쩡히 들고있는 제 엿을 무슨 이유를 들어 버리게 해야할지 몰라 더욱 골똘히 생각하였사옵니다
하오면 폐하, 큰 엿을 버리고 작은 엿을 쥔 아이의 검소함과 청렴함을 칭찬하여 본보기로 삼는 것이 마땅하옵니까 두 손에 멀쩡히 들고있던 제 엿을 함부로 버린 것도 모자라 큰 엿을 버리고 작은 엿을 택한 아이의 무지함과 성급함을 나무라는 것이 마땅하옵니까 그저 백성들을 기만하여 지지율을 확보하고 세금을 긁어 모으고자 만천하에 벌인 정치적 놀음에 누가 누구의 발목을 잡는 것이옵니까
폐하, 臣김O겸과 노O민은 죄가 없사옵니다 이는 경제적 이득을 취하고자하는 인간의 기본적이고 상식적인 욕구를 죄악시하여 폐하 본인 스스로도 지키기 힘든 것을 아랫 것들에게 강요한 폐하 스스로의 잘못이며 이 불쌍한 자들의 죄는 그저 지키지 못하여 깨어질 것을 스스로 알면서도 폐하의 엄포와 성화에 못이겨 머리와 손과 입이 각기 따로 놀아나 백성들을 농락한 죄 밖에 없사옵니다
말은 말답게 달려야 제 맛이오 개는 개답게 짖어야 제 맛이고 돼지는 돼지답게 처먹어야 제 맛이며 인간은 인간답게 제 이득을 챙기고 주판알을 튕겨 손익을 따지며 경제적 이익을 추구해야 제 맛인데 애초에 인간의 욕구에 반하는 정책을 내시고 이를 대신과 관료들에게 막연히 따를 것을 명하니 어찌 백성이 따를 것이오 어느 신하가 제 자리를 지킬 수 있겠사옵니까
폐하, 조정이 우왕좌왕하니 백성 또한 다르지 않사옵니다 인간을 인간으로 보아야 인간이 보이는 법이거늘 조정의 모든 정책이 인간의 욕구에 반하는 모순덩어리들 뿐이옵고 인간의 욕구를 죄악시하여 이를 말살하려는 극단책 뿐이온데 어찌 백성들의 동의를 바라고 어찌 그 성과를 바랄 수 있겠사옵니까
부디 통촉하시어 정책을 전개하심에 인간의 욕구를 받아들이시고 인정하시어 더 이상 이러한 참담한 광경이 백성 앞에 펼쳐지지 않도록 해주시옵소서
5. 신하를 가려 쓰시옵소서/셋째, 인재를 정밀하게 선발하여 정사를 바로 세우소서. 답 : 그것은 대통령의 고유 권한이다. 정부 장관 등은 국회청문회 과정을 거치고 있다. 청와대의 비서진도 자주 바꾸고 있다. 정세는 역동하여 요란하고 민심은 역류하여 요동치니 나라는 좌우로 갈라졌으며 간신은 역행하여 요사스럽고 충신은 역린하여 요절하니 국법은 깨어져 흩어졌사옵니다 나라의 위태로움은 풍전등화와 같고 백성의 곤궁함은 이루 말할 수 없어 굽은 목을 겨우 세워 동서남북을 널리 살펴보니 영웅은 깊이 잠들어 몽중이오 현자는 깊이 숨어 은둔하니 보이지 않사옵니다 犬王(개의 왕)은 곰과 범을 부리지 못하고 鳥王(새의 왕)은 수리와 매를 부리지 못하니 들끓는 것은 이리요 까마귀떼 뿐이라 소인은 통탄하며 먹을 갈고 신음하며 붓끝을 가지런히 해 삼가 아뢰올 뿐이니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폐하, 조정의 대신 열 중 셋은 허황된 꿈을 좇아 국사를 말아먹는 이상주의자요 나머지 일곱 중 셋은 허황된 꿈을 팔아 표장사를 하는 장사치나 다름없고 나머지 넷 중 셋은 시뻘건 혓바닥을 낼름거리며 폐하의 귓구멍을 간지럽히는 아첨꾼이며 나머지 하나는 그저 자리만 차지해 세금만 축내는 무능력한 것들이니
폐하, 청하옵건데 한날 한시에 조정의 대신들과 관료들을 기립시키시어 폐하의 실정에 대한 의견을 물으시옵소서 실책과 실정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이 백성을 팔아 폐하의 업적을 칭송하며 용비어천가를 목놓아 부르는 자에게는 진하게 우려낸 사약 한 사발을 내리시어 폐하의 눈과 귀를 흐리고 조정을 농락한 죄를 물어 국법의 지엄함을 널리 알리시고 함구하여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며 좌중의 눈치만 살피는 자에게는 차가운 냉수 한 사발을 내리시어 복지부동하여 세금만 축내는 것을 꾸짖으시며 폐하의 실책과 실정에 대하여 조목조목 따지며 신랄하게 비판하는 자에게는 잘 빚은 술을 한 잔 내리시어 격려하시되 비판과 더불어 해법과 계책을 내놓는 자에게는 한 잔의 술과 함께 영의정의 명패를 하사하시고 조정의 중심이자 폐하의 지기로 삼으시어 폐하의 자비로움과 영명함을 천하에 알리시옵소서
또한 새 인재를 등용함에 있어 각지의 서생들을 불러 모아 민주와 인권, 자유를 각각 새긴 세 개의 명판을 나눠주시고 한 손에 하나씩만 들 수 있으니 참고하여 이행하라 명하신 후 민주와 인권의 명판을 양 손에 든 자는 따로 불러 모아 감옥에 모조리 투옥하시고 또한 일가의 재산을 모두 압류하도록 명하시어 자유를 버린 댓가를 치르도록 하시고
자유와 인권의 명판을 양 손에 든 자는 폐하의 어수(御手)를 높이 들어 양 볼따귀를 힘껏 후려치시고 나의 자유가 너의 인권과 상충하니 누가 이기겠는가. 하문하시어 민주적 절차에 의한 입법과 그로 인한 법치의 귀중함을 일깨워 주시옵고
자유와 민주의 명판을 양 손에 든 자는 조정의 하급 관리에 임명하시되 사헌부와 포도청 그리고 고을 관아의 대민업무를 도맡아 처리케 하시어 인권의 진정한 뜻을 스스로 깨우치게 하시며 만에 하나
왼손에 자유와 민주 두 개의 명판을 들고 오른손에 인권의 명판을 든 자가 아뢰길 자유가 없는 민주는 독재와 마찬가지요 민주가 없는 자유는 무법천지와 같은 바, 둘은 양분될 수 없고 필히 양립해야 할 것이니 본디 이 둘은 하나인 것과 다름없어 함께 왼손이오, 오른손에 인권은 이들을 능히 거들 수 있으니 여기 세 개의 명판이 다 있소이다 라고 답한다면 그 자를 즉시 진사의 자리에 올려 국사의 중책을 맡기시옵고 한양의 대궐같은 집과 조선 제일의 명마가 끄는 마차 또한 하사하시어 그로 하여금 나라의 대업을 이끌고 폐하의 업적을 함께 빛내도록 하시옵소서
폐하, 인사는 곧 만사라 하였사옵니다
이 땅에 널린게 학설이거늘 태반이 반쪽짜리 이념에 지나지 않고 또한 널린게 학자이거늘 태반이 한쪽으로 치우친 선동꾼에 불과하온데 하물며 조정의 대신들은 어떻겠사옵니까
부디 민주와 인권을 앞세워 감성과 눈물을 팔고 그럴듯한 감언이설로 백성들의 표와 피를 팔아 제 입신양명의 수단으로 삼는 저 들쥐와 같은 무리들을 긁어모아 스스로를 박멸하라 명하시옵고
자유의 가치를 알고 몸소 행하며 자유와 민주와 인권의 조화를 논하는 총명한 인재를 신하로 쓰시어 나라의 평안을 되찾아 백성의 앞길을 인도해 주시옵소서
6. 헌법의 가치를 지키시옵소서/아홉째, 공도(公道)를 회복하여 사사로움을 멸하소서. 답 : 헌법의 가치를 지키지 않았으면 벌써 탄핵되었을 것이다. 탄핵되지 않은 것을 보면 잘 지키고 있다.
나라의 근본은 백성이오 백성의 근간은 헌법이니 이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으며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고 규정한 헌법 1조와 그 뜻이 같사옵니다
또한 나라의 크고 작은 집회에서는 위 헌법 1조를 가사로 옮긴 노래가 흘러나왔고 폐하께서는 항상 그 자리를 지키셨으니 광우병 파동, 세월호 참사, 박근혜 퇴진운동이 그러했습니다
헌법 제1조를 부르짖으며 백성들을 이끌어 헌법에 의거해 전대통령을 파면하였고 헌법에 의거해 대통령에 선출되었으며 헌법에 의거해 선서를 하셨사오니 헌법에 의거해 직무를 수행하고 헌법에 의거해 백성의 권리를 보장하시오며 헌법에 의거해 국토를 보전해야함이 마땅하오나 헌법에 의거해 그 자리에 오르신 폐하 스스로 헌법의 가치를 훼손하고 적시된 조항을 무시하며 헌법에 내재한 백성의 가치를 짓밟고 헌법이 보장한 인간의 권리에 침을 뱉으사 헌법이 경계한 무소불위의 권력을 무아지경으로 휘두르니 나라와 백성의 근간인 헌법이 조각나 깨어지듯 민심 또한 조각나 깨어져 흉흉하옵고 온 나라가 서로 쪼개져 개싸움을 벌이고 있사온데 그 꼴이 참으로 처참하기 이를 데 없사옵니다
그저 다주택자와 고가주택거주자를 잡아 족치시어 무주택자의 지지율을 얻겠다는 심산으로 건국 이래 최초로 토지거래허가구역을 지정하시고 임대차 3법을 강행하시어 헌법 제14조 거주이전의 자유를 박탈하시고
기회는 공정하며 과정은 평등하고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란 폐하의 선포에 따라 학업이 뛰어난 학생과 그렇지 않은 학생들을 모조리 섞어 한 교실에 집어넣어 하향평준화를 통한 진정한 평등을 이루어 내시어 헌법 제31조 1항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를 박탈하시고
이른바 6.17 대책으로 나라에 득이 된다하여 적극적으로 장려한 임대사업자를 거듭된 부동산 정책 실패의 희생양으로 삼아 법을 소급하여 토사구팽하며 내 집 마련의 꿈에 들떠있던 백성의 중도금을 막아 뒷통수를 후려치는 등 헌법 제13조 2항 소급입법으로부터 재산을 지킬 권리를 박탈하시고 경제적 이득을 취하고자하는 인간의 기본적 욕구마저 말살하여 개돼지의 표본으로 삼으려 헌정 이후 최초로 백성의 재산권 행사에 법적 처벌을 운운하며 겁박하여 헌법 제23조 재산권의 보장을 박탈하시니 백성들은 무주택자 다주택자로 갈리고 강남권과 비강남권으로 갈리고 조정지역과 투기지역으로 다시 갈리고 임대인과 임차인으로 또 갈리어 서로를 물어뜯고 씹어대며 쥐어뜯고 있사온데 도대체 이제는 또 어디의 무엇을 갈라내고 도려내며 찢어내실 심산이옵니까
백성은 각자 다르나 합쳐져 하나인데 이는 대야에 담긴 물을 쪼개어 반은 발을 닦고 나머지 반으로 세수를 하며 다시 쪼개어 세안을 하고 양치를 하며 이내 마셔버리는 꼴과 같으니 폐하께오서는 헌법을 찢어내고 백성을 갈라내고 이제는 폐하 스스로의 옥체도 갈라내고 찢어내어 육시를 할 참이옵니까
폐하,
이 나라가 폐하의 것이 아니듯 헌법은 폐하의 것이 아니옵니다 헌법은 불가변한 가치를 지닌 국법이오 이 나라의 역사와 같은 성문법이며 백성을 위해 백성에 의해 제정된 민정헌법인 바, 헌법을 짓밟는 것은 백성을 짓밟는 것과 같고 헌법을 저버리는 것은 나라의 역사를 부정하며 미래를 저버리는 것과 같사옵니다
바라옵건데 스스로 헌법을 지키시고 보전하시어 깨어진 민의를 추스려 민심을 회복하시고 사멸한 정도를 되살려 정의를 바로 세우사 처참히 조각난 이 나라를 다시 합쳐 주시옵소서
마지막으로 폐하
7. 스스로 먼저 일신(一新)하시옵소서/열째, 명(名)과 실(實)을 바로 하여 기준을 세우소서. 답 : 우리 정치제도상 정단정치는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는 구조이다. 권력을 향한 개인과 집단 그리고 지역, 종교까지 주도권을 쟁취하는 현상이다 여기에 언론이 가세해서 불을 지피고 있을 뿐이다. 이 나라가 국민의 나라임으로 망친 나라로 기록되지 않을 것이다. 주택을 가진 사람이 더 많다. 무주택자들을 위한 정책을 펼치고 있다.
직언하옵건데 이 나라는 폐하와 더불어 백성들이 합쳐 망친 나라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옵니다 이 나라에 상식과 신뢰와 도의는 사멸했고 또한 헌법은 깨어졌으며 국회는 나락이니 오로지 죽고 죽이며 뺏고 빼앗기는 감성과 분노의 정치만 있을 뿐입니다 이는 폐하만의 잘못도 아니고 조정 대신과 관료들만의 잘못도 아니옵니다 그것은 백성 또한 무지한 까닭이며 엄중한 현인들의 경고와 선대 공신들이 남긴 역사적 사실에도 불구하고 일국의 지도자를 저잣거리의 광대 뽑듯이 감성에 젖어 눈물로 내세운 댓가입니다
소인은 평생을 살아오며 무주택자 일주택자 다주택자라는 단어가 이토록 심오하고 엄중하며 잔인한 것인지 폐하의 실정 하에 처음 깨닫사오며 일찍이 폐하의 막역지우였던 故노무현 선황의 통치 하에서도, 폐하의 정적이었던 이명박 선황과 폐하의 제물이었던 박근혜 선황의 통치 하에서도 경험하지 못했던 참담한 헌법유린과 처절한 수탈과 극심한 분열과 외교적 고립을 겪사옵니다
개구리가 찬물에 담궈져 서서히 달궈지는 동안 미동도 하지 않듯 이 땅의 백성은 백성 스스로 선출한 폐하의 실정에 하나둘씩 권리를 내어주다 결국에는 헌법 조문 안에 조차 속하지 못하는 아픔을 겪사오나 아직 절반의 백성은 스스로 벌어먹지 않고도 내어지는 끼니 앞에 굴복하여 제 몸이 익어 껍질이 벗겨지는 것 조차 깨닫지 못하옵고 가진 자에 대한 끝없는 분노에 눈이 멀어 제 자식들이 살아갈 삶이 제 인생보다 나아야 한다는 일말의 책임감 또한 느끼지 못하옵니다
폐하께서 추구했던 인권은 고작 사람을 죽이고 부녀자를 간음한 파렴치한 것들에게만 내려지는 면죄부가 되었고
폐하께서 부르짖던 민주는 절반의 백성에게는 약탈이고 절반의 백성에게는 토벌이며 과반수를 넘는 자가 벌이는 정당한 도륙이자 합법적 착취의 수단으로 전락하였으니
자유는 선대 공신들의 무덤을 파내어 찾으오리까 아니오면 죽어 자빠져 저승길에서 찾으오리까
소인이 감히 묻사옵니다
무릇 정치란 백성과의 싸움이 아닌 백성을 뺀 세상 나머지 것들과의 싸움인 바,
폐하께서는 작금에 이르러 무엇과 싸우고 계신 것이옵니까
국내외에 어지러이 산적하여 당면한 과제는 온데 간데 없고 적폐청산을 기치로 정적 수십을 처단한 것도 부족하여 이제는 백성을 두고 과녁을 삼아 왜곡된 민주와 인권의 활시위를 당기시는 것이옵니까
폐하, 스스로 먼저 일신하시옵소서
폐하의 적은 백성이 아닌, 나라를 해치는 이념의 잔재와 백성을 탐하는 과거의 유령이며 또한 복수에 눈이 멀고 간신에게 혼을 빼앗겨 적군와 아군을 구분 못하는 폐하 그 자신이옵니다
또한 갈등과 분열의 정치를 끝내겠다는 폐하의 취임사를 소인은 우러러 기억하는 바, 그 날의 폐하 그 자신이오며
폐하께서 말씀하신 촛불의 힘은 무궁하고 무결하여 그 끝을 알 수 없는 바, 그 날의 촛불 그 열기이옵니다
성군의 법도는 제 자신마저 품을 수 있으나 폭군의 법도는 제 자신 또한 해치는 법,
부디 일신하시어 갈등과 분열의 정치를 비로소 끝내주시옵고 백성의 일기 안에 상생하시며 역사의 기록 안에 영생하시옵소서
간신의 글은 제 마음 하나 담지 못하나 충신의 글은 삼라만상을 다 담는 법,
소인의 천한 글재주로 일필휘지하지 못해 삼라만상을 담지는 못하였으나 우국충정을 담아 피와 눈물로 대신하오니 다만 깊이 헤아려 주시옵소서
이천이십년 팔월 인천 앞바다에서 塵人 조은산 삼가 올립니다
조은산의 선조처럼 보이는 *조덕린(趙德鄰 1658~1737)이 영조 1년 을사(1725) 10월 20일(갑신)에 조정에서 간관(諫官)의 직책을 제수하고 국가를 위한 충언을 구하는 교지까지 내렸다. 이에 조덕린(趙德鄰)은 시무십조(時務十條)가 담긴 상소문을 올렸다. 그 결과, 영조 1년 을사(1725) 10월 20일(갑신). 1) 조덕린(趙德隣)을 사판(仕版)에서 이름을 삭제(削除)하였다. 영조 1년 을사(1725) 10월 21일(을유) 2) 조덕린(趙德隣)을 함경도 종성(鐘城)으로 귀양 보냈다. 영조 13년 정사(1737) 6월 16일(계유) 3) 조덕린(趙德隣)을 제주도(濟州道)에 안치(安置)하였다. 영조 13년 정사(1737) 7월 26일(임자) 조덕린(趙德隣)이 강진현(康津縣)에 이르러서 죽었다.
-- <참고자료> 및 근거 *최치원은 진성여왕께 시무10조(時務十條) *최승로(崔承老 927~989)가 982년(성종 1) 6월 성종은 경관(京官) 5품 이상자들에게 각각 봉사(封事)를 올려 시정(時政)의 득실을 논하게 하였다. 이때에 임금 성종에게 건의한 시무 28조(時務二十八條) *이인(李韌 ?∼1381)이 1362년(공민왕 11) 전 사관편수관(史館編修官)으로서 글을 올려 시무(時務) 10조를 진술했다. -- 조덕린(趙德鄰 1658~1737)의 시무10조(時務十條)
조정에서 간관(諫官)의 직책을 제수하고 국가를 위한 충언을 구하는 교지까지 내렸다. 이에 공은 다음과 같은 10가지 조목이 담긴 상소문을 올렸다.
첫째, 성인의 학문(聖學)을 밝혀 마음을 바르게 하소서. 배움이란 사람의 도리를 배우는 것이며, 사람의 도리에는 부자(父子)•군신(君臣)•형제(兄弟)와 같은 커다란 인륜이 있습니다. 반드시 그 당연한 법칙을 극진히 하고,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본성을 온전히 해야 합니다. 그것을 추호의 거짓됨 없이 몸소 체득하고 마음에서 진실로 얻은 다음에야, 학문은 밝아질 것이고 마음은 바르게 될 것입니다. 성인들께서 그 처음 시작하는 곳을 지적해 주셨고 또한 공부하는 방법도 일러주셨으니, 『맹자(孟子)』에 나오는 사단(四端)이나 야기(夜氣)에 관한 설명들이 바로 그런 것이옵니다. 심성의 본연한 모습을 가만히 관찰하고 밤낮으로 행위하는 것들을 점검하시게 되면, 잘 따르시고 어기시는 사이에 분명 흐뭇한 희열과 두려운 후회가 있게 될 것입니다.
둘째, 진실한 덕을 닦아 하늘의 뜻에 부응하소서. 무릇 하늘은 저 높은 곳에 있지만 일기(一氣)는 유행하고 있습니다. 하늘의 마음은 인자하지 않은 적이 없는데 요즘 천문 현상이 어긋나고 재앙이 거듭하여 나타나고 있습니다. 혹여 전하께서 평소 닦으시는 것들이 화려한 문장에 있고 진실한 덕에 관해서는 미흡하여서 그런 것은 아닌지요? 무릇 재앙이 나서 거처를 옮기시게 된 것은 모두 화려한 문장에만 관심을 두기 때문입니다. 오직 엄숙하고 공손하며 공경하고 두려운 자세로 자신을 반성하고 덕을 닦으소서. 전하께서 지극히 정성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계시면 마치 메아리와 같이 감응하는 법이옵니다. 그렇다면 진실한 덕을 닦으실 때에도 역시 그러할 것입니다.
셋째, 인재를 정밀하게 선발하여 정사를 바로 세우소서. 요•순(堯•舜)시대나 주(周)와 같은 융성한 나라도 인재를 얻기 어렵다는 탄식이 있었습니다. 하물며 우리나라와 같이 좁고 작은 나라야 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그럼에도 당론(黨論)으로 인해 마치 두 개의 나라처럼 피차를 나누어 화합하지 못하고 공정하지도 못한 상황이 이미 치유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요즘은 당론이 둘에서 셋으로, 셋에서 넷으로 나뉘어, 인재인지 아닌지를 묻기 전에 먼저 물색(物色)을 따집니다. 이래서야 어진 인재를 어떻게 얻을 수 있겠으며, 정사는 무슨 수로 바로 서겠습니까?
넷째, 뭇 백성들을 보호함으로써 근본을 튼튼히 하소서. 대저 임금이 백성들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깨우쳐 줄 수도 없고 한 사람 한 사람을 모두 어루만질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임금의 뜻을 받들어 백성들에게 교화를 베푸는 신하가 있어야 임금의 덕과 의중을 백성들에게 펼치는 것이옵니다. 그러나 백성을 친애해야 할 수령의 지위를 가진 관리가 올바른 인재가 아니라면 백성들이 그 재앙을 감내해야 합니다. 오늘날 수령이란 자들은 대개 나이 어리고 철없는 부호가의 도련님들로서, 사치스럽고 교만할 줄만 알았지 백성들의 가렵고 아픈 곳은 전혀 살피려 들지 않습니다. 세금을 징수함에 백성들을 못살게 다그치고, 간활한 아전들과 죽이 맞아 갖은 간악한 짓을 일삼습니다. 그리하여 나라의 원기(元氣)가 시들고 근본이 뽑히게 되었습니다. 전하께서 그들을 내치도록 방백(方伯)들에게 명하셔도 그것이 제대로 실행되지 않고, 어사(御史)를 보내 감찰하게 하셔도 그 또한 여의치 않습니다. 이는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그 근본을 맑게 하지 않고 말단만을 다스리려 하기 때문입니다.
다섯째, 재용을 아껴 낭비를 줄이소서. 국가는 사방으로부터 수많은 세금이 걷혀 조달됩니다. 그러나 근년에 흉년이 들어 조세가 줄어들자, 탁지부(度支部)가 운영하는 재정은 부끄럽게도 고갈되어 가고, 군영에 비축되어 있는 군량 또한 모두 바닥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함에도 새나가는 재물은 흐르는 물보다 심하고, 낭비되는 돈은 쓸모없는 흙보다도 천합니다. 담당자들에게 책임을 물으려 해도 그럴 수 없으니 이는 제도가 정립되어 있지 않고 재정의 사용을 미리 절제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천승(千乘)의 나라가 가난을 걱정한단 말입니까?
여섯째, 군영을 튼실해지도록 하여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소서. 국가가 지난 백여 년 동안 전쟁 없는 안정기를 지내다보니 변방의 군기가 해이해졌습니다. 그러다보니 장수를 선발하는 것을 경시하고 병사들을 훈련시키는 데 소홀합니다. 군적에 올라 있는 병사는 모두 거짓으로서 태반이 어린 아이들 뿐이고 병기들은 구색만 갖추었을 뿐 거의 나무 몽둥이에 불과합니다. 병무를 담당하는 자들은 군사를 보충하고 병기를 수선하려 들지 않고, 병사들은 상관을 친애하여 그를 위해 죽을 마음이 없습니다. 이런 장수와 병사들과 병기를 가지고는 적군과 맞서기도 전에 이미 승패는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신의 망녕된 생각으로는, 장수를 간택하여 그에게 전권을 맡기시고, 백성들을 보호하여 그 마음을 얻은 후에야 군대에 관한 정무가 바로 될 것입니다.
일곱째, 모든 옥사를 신중히 하여 형벌을 아끼소서. 성인의 마음이 본래 살리는 것을 좋아하고 죽이는 것을 싫어합니다. 다만 죄가 있는 사람을 그냥 놓아줄 수 없기에 순(舜)임금은 사흉(四凶)의 죄를 물으셨고 공자(孔子)는 소정묘(少正卯)를 주살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벌을 쓰는데 있어 공경하고 긍휼하여 달가워하지 않는 마음은 그 속에 담겨 있었으니, 어찌 조금이라도 사사로운 의도가 개입되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즉위 초에 감당할 수 없이 많은 어려움을 겪으셨고 그 와중에 옥사 또한 많았습니다. 그처럼 뒤엉킨 난국을 전하께서 지극히 공명정대하게 해결하셨기에, 효제(孝悌)의 도는 신명에 통하고 호생(好生)하는 덕은 민심에 스며들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란 놓아버리기는 쉽고 다시 잡아두기는 어려우며 요동하기는 쉽고 제어하기는 어려운 법이니, 엎드려 원하건대 더욱 힘써 주소서.
여덟째, 기강을 바로 세워 풍속을 다잡으소서. 임금이란 하늘을 아버지로 섬기고 땅을 어머니로 섬기며 문무백관을 통솔하여 만백성을 다스리는 분이니, 어찌 하루라도 기강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요즘의 세태를 가만히 관찰해 보면 지극히도 기강이 없사옵니다. 전하께서 국사에 온 정력을 다 바치지만, 백관들은 아래에서 자신의 직무에 태만하옵니다. 당(黨)을 세우고 붕(朋)을 나누어 현명한 인재와 불초한 사람이 뒤섞여 관직에 나오고, 서로 이기고 빼앗으려고만 하다 보니 시비가 혼란스럽습니다. 혹은 임금의 총애를 믿고 임금을 업신여기고, 혹은 임금의 권위를 깎고 경시하기까지 합니다. 전하께서 천위(天位)에 높이 계시니 위엄과 복록이 전하에게로부터 나오고 당기고 놓는 힘이 전하의 손에 있사온데, 어찌 기강을 바로 세울 생각은 하지 않고 그저 슬퍼하고 번뇌하기만 합니까?
아홉째, 공도(公道)를 회복하여 사사로움을 멸하소서. 순(舜)임금과 우(禹)임금께서 천하를 물려받는데 어느 누구도 간여하지 못했던 것은 무엇이라 형용할 수 없는 위대한 덕 때문입니다. 그러나 후세의 어리석고 용렬한 군주들은 사심(私心)을 이기지 못하여 아첨하며 접근하는 간신들을 자기 사람이라고 여깁니다. 그래서 사사로운 은혜를 베풀지만, 결국 그들의 능멸과 협박으로 인해 혼란과 멸망을 당하게 되니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숙종(肅宗)대왕의 친자이시고 선왕이신 경종(景宗)대왕의 아우로서 임금의 자리에는 마음이 없으셨습니다. 선왕께서 즉위하신 첫 해에 즉시 왕명을 내려 인재를 발굴하라 부탁하시는 등 사랑이 지극하셨습니다. 그러나 선왕께서 갑자기 붕어하시자 전하께서는 눈물을 훔치며 왕위에 올랐습니다. 드디어 온갖 국사를 맡아 집행하시되 모든 일이 지극히 공정하여 사사로운 공로에는 상을 주지 않으셨고 사사로운 분노는 개입시키지 않았으니, 순임금과 우임금의 그것과 가까웠습니다. 그러나 당고(黨錮)의 악습이 날로 심해져서 서로 원수가 되어 죽이기를 일삼으니, 전하께서 그들을 하나로 통합하지 않고서는 누군가를 임용한다 하더라도 작은 나라가 한쪽으로 축소되고, 인재 역시 한편의 사람들만 등용하게 될 것입니다. ‘널리 베풀어 많은 사람들을 구제(博施濟衆)한다’는 전하의 정치는 이미 병들고 있는데, 전하의 마음은 도리어 옛 것을 싫어하고 새 것을 좋아하는 데 안주하고 계십니다. 하늘도 다 덮지 못하는 것이 있고 해와 달도 모두 비추지 못하는 골짜기가 있기 마련입니다만 그것이 바로 하늘과 땅에 있어 가장 큰 유감입니다.
열째, 명(名)과 실(實)을 바로 하여 기준을 세우소서. ‘명(名)은 실(實)의 객체’라고 들었습니다. 이 말이 진실이라면 실(實)은 명(名)의 주체일 것입니다. 군주의 인자함과 신하의 충성, 부모의 자애로움과 자식의 효도, 형의 우애와 아우의 공손 등이 모두 실(實)입니다. 천하의 명실이 바르게 되면 만사가 순리대로 되는 법입니다. 만일 명이 실에 부합하지 않고 실이 명에 합당하지 않게 되면 이것이 이른바 ‘진실하지 못하면 아무 것도 없다’(不誠無物)는 것입니다. 이 영향으로 허위와 사기를 조장하는 풍습이 점점 늘어나, 결국 나라는 그 나라일 수 없고 사람은 그 사람일 수 없는 지경에 이를 것입니다. …… 임금으로서 더욱 명실을 바르게 하는 것을 급선무로 삼아야 마땅할 것이니, 어찌 명이 실과 어긋나고 실이 명과 달라서야 되겠습니까? 일국의 국사가 어제는 옳았던 것이 오늘 잘못된 것이 되고, 한 사람이 아침에 간신이었다가 저녁에는 충신이 된다면, 장주(莊周)의 “그 누구도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없다”는 말이 우언(寓言)이 아닐 것입니다.
아! 지난 백세(百歲)와 맞이할 천세(千歲)에 분명 명과 실을 바로잡을 사람이 있을 것이나, 오늘 이 세상에서 실에 의거하여 명을 바로잡을 분은 전하가 아니고 또 누구이겠습니까?
상소문 끝에 다시 한 번 간절히 당쟁의 폐해를 언급하였다. 상소문이 임금께 바쳐지고 며칠 동안 아무런 분부가 없자, 조정의 신하들은 상소문의 말이 무엄하다고 성토하며 문제가 되는 말들을 가려 뽑아 임금께 아뢰었다. 지평(持平) 이의천(李倚天)이 준엄하게 벌 줄 것을 주청하자, 그동안 역임하였던 관직의 사판(仕版)을 모두 삭제하라 명하시더니 이내 종성(鍾城)으로 유배보내라 명하셨다. 그러자 도성과 영남의 사대부는 누구 할 것 없이 저마다 돈과 베를 갹출하여 노자에 보태도록 하였고 그 중에는 공을 가리켜 ‘영원토록 우러러 볼 어른’이라 칭하는 이도 있었다. 종성은 국토의 최북단으로 거리가 3천리나 되었다. 당시 공의 나이가 70이 가까운데다 날씨 또한 혹한이므로 달포나 걸려서야 도착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공은 문을 걸어 잠그고 자신의 허물을 반성하며, 날마다 『주역(周易)』의 괘(卦) 하나씩을 택해 그 의미를 탐구하고 간혹 사람들과 시를 지어 읊는 것으로 세월을 보냈다.
창주정사(滄洲精舍) 조덕린(趙德鄰 1658~1737) 자는 택인(宅仁), 호는 옥천(玉川)이며, 별호는 창주(滄洲)이다. 본관은 한양(漢陽)이다. 군(頵)의 둘째 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재질이 총명하고 출중하여 소년시절에 이미 풍부한 학식을 쌓아 글을 잘 짓고 사리가 통달하여 세인들이 감탄하였다.
1677년(숙종3) 사마시에 합격한 뒤 1691년(숙종17)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설서·교리·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1725년(영조1) 노론·소론의 당론이 거세지자 당쟁의 폐해를 논하는 10여조의 소를 올렸다가, 노론을 비난하는 내용이 있어 당쟁을 격화시킬 염려가 있다 하여 종성에 유배되었다. 70여세의 나이로 3년간의 적거(謫居)끝에 1727년(영조3)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집권하게 되자 유배에서 풀려 홍문관응교에 제수되었으나, 서울에 들어와 숙사(肅謝)한 다음 곧 고향으로 돌아갔다.
1728년(영조4) 3월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영남호소사(嶺南號召使)에 피임, 격문을 돌리고 일로(一路)의 의용병을 규합하여 대구에 내려갔으나 난이 평정되자 파병(罷兵)하였으며, 이 공로로 동부승지에 임용되고 경연(經筵)에 참석하였다. 얼마 뒤 병으로 사직하고 세상에의 뜻을 버린 채 다시 환향하여 학문에 몰두하자, 원근에서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1736년(영조12) 서원의 남설을 반대하는 소를 올리자, 1725년(영조1)의 소와 연관되어 노론의 탄핵을 받고 제주로 유배가던 중 강진에서 죽었다. 그의 상소는 몇 차례에 걸친 소론들의 재집권을 위한 난언(亂言)·벽서사건(壁書事件)의 실마리를 만들기도 하였다.
1678년(숙종 4)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된 뒤 1691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설서·교리·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1725년(영조 1) 노론·소론의 당론이 거세지자 당쟁의 폐해를 논하는 10여조의 소를 올렸다가, 노론을 비난하는 내용이 있어 당쟁을 격화시킬 염려가 있다 하여 종성에 유배되었다. 70여세의 나이로 3년간의 적거(謫居) 끝에 1727년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집권하게 되자 유배에서 풀려 홍문관응교에 제수되었으나, 서울에 들어와 숙사(肅謝)한 다음 곧 고향으로 돌아갔다. 1728년 3월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영남호소사(嶺南號召使)에 피임, 격문을 돌리고 일로(一路)의 의용병을 규합하여 대구사마방목에 내려갔으나 난이 평정되자 파병(罷兵)하였으며, 이 공로로 동부승지에 임용되고 경연(經筵)에 참석하였다. 얼마뒤 병으로 사직하고 세상에의 뜻을 버린 채 다시 환향하여 학문에 몰두하자 원근에서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1736년 서원의 남설을 반대하는 소를 올리자, 1725년의 소와 연관되어 노론의 탄핵을 받고 제주로 유배가던 중 강진에서 죽었다. 그의 상소는 몇 차례에 걸친 소론들의 재집권을 위한 난언(亂言)·벽서사건(壁書事件)의 실마리를 만들기도 하였다.
== 영조 1년 을사(1725) 10월 20일(갑신) 붕당의 타파에 관한 조덕린의 상소문
조덕린(趙德隣)을 사판(仕版)에서 이름을 삭제(削除)하였다. 조덕린은 전(前) 사간(司諫)으로 안동(安東)에 있으면서 상소하였는데, 대략 말하기를,
“전하께서 즉위(即位)하신 처음에 많은 어려움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혼란한 옥사(獄事)는 불어나 여러 사람이 연좌되어 체포되었는데, 전하께서 지극히 공정하고 명백하며 관대하고 인후하여 비록 여러 사람들의 말에 핍박되어 간혹 억지로 따르시는 것이 있기는 했으나, 효제(孝悌)의 도리는 신명(神明)에 통하고 호생(好生)의 덕은 민심(民心)에 흡족했으니, 이런 일을 옛날 선철왕(先哲王)에게서 찾아보더라도 진실로 비교될 이가 적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시험하여 살펴보건대, 오늘날의 시비(是非)는 번갈아 어지러워져서 선조(先朝) 때에 망명(亡命)했던 자가 도리어 임용(任用)되고, 선왕(先王)을 위하여 숨김이 없이 말한 자는 오히려 벼슬에서 떨어져 쫓겨남을 당하였으며, 혹은 지나치게 총애(寵愛)하다가 도리어 업신여김을 받으며, 혹은 존엄(尊嚴)한 자세를 낮추어 경솔한 것만 보여서 나라는 폐허[丘墟]가 되어 웅덩이로 채워지고, 번신(藩臣)의 발탁은 등급(等級)이 무너져서 하민(下民)이 보고 본받는 것은 능멸하고 참람함이 순서가 없는 것으로 날마다 불어나고 달마다 커져서 드디어 짐짓 일상적인 습성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대개 제왕(帝王)은 천지(天地)의 무사(無私)한 것을 본받고 일월(日月)의 대명(大明)한 것을 넓혀서 조림(照臨)하여 나간다면 치우쳐서 모두 혜택을 입지 않는 곳이 없을 것이고 부족하여 불만(不滿)스러운 마음이 없게 될 것이니, 위로는 하늘에 부끄러움이 없고 아래로는 사람에게 부끄러움이 없게 되어야 진실로 백성의 부모(父母)인 원후(元后)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라도 사심(私心)이나 편념(偏念)을 가지거나 혹은 정의(情意)에 끌리는 바가 있어서 구차하게 행하게 된다면, 그 마음에서 일어나 그 정사를 해치게 되어, 편당(偏黨)되고 반측(反側)하게 되면 한가지 일도 그 정당함을 얻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심(私心)을 극복하기 어려운 것은 오래되었습니다. 순제(舜帝)와 우왕(禹王)은 천하(天下)를 보유(保有)하고도 자기는 그 지위를 즐기지 않았으니, 위대한 업적을 형언(形言)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후세에 어둡고 용렬한 군주에 이르러서는 능히 그 사심(私心)을 극복하지 못하여 그 아첨하는 신하가 친절을 바쳐 공명(功名)을 요구하는 자가 있으면 드디어 사인(私人)으로 삼아서 사은(私恩)을 베풀게 됩니다. 혹은 도리어 그 능멸하고 협박하는 것을 당하고도 제어하기 어려워져서 마침내는 어지러워 멸망하기에 이르게 되었으니, 경계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우리 전하(殿下)께서는 숙종(肅宗)의 친자(親子)이고 선왕(先王)의 개제(介弟)로서 황옥(黃屋)에 마음을 두지 않고 구위(求位)하는 데도 뜻이 없었습니다. 선왕의 첫 해에는 곧 대호(大號)를 정하고 적임자(適任者)에게 부탁하며 돌보아서 사랑하기를 더욱 융성하게 하였는데, 그 창졸간에 승하(昇遐)하시던 날을 당하게 되자 우는 얼굴을 가리우고 등극(登極)하여 드디어 독자적으로 정사를 청단(聽斷)하면서 동작과 행위가 지극히 공정하여 사사로운 노고(勞苦)는 상(賞)을 주지 않고 사사로운 분노(忿怒)에는 개의(介意)하지 않아서 지극한 인애(仁愛)로 미루어 나가고 대의(大義)로써 결단하시었으니, 천하(天下)를 보유(保有)하고도 자신은 그 지위를 즐기지 않았으므로 결점을 지적하여 비난할 수가 없는 지경에 가까웠습니다. 그러나 당고(黨錮)의 습관이 날로 더욱 심하여 서로가 적대시하는 원수가 되어 무기[弋戟]로 서로 대립하게 되니, 전하의 정치가 이미 은혜를 널리 베풀어서 많은 사람을 구제하는 것을 근심하게 되었는 데도, 전하의 마음은 오히려 옛것을 싫어하고 새것을 좋아하는 데에 편하게 여기시니, 황천(皇天)도 감싸 주지 못하는 곳이 있고 일월(日月)도 비추어 주지 못하는 골짜기가 있게 되었으므로, 그것이 천지(天地)의 유감이 되는 것이 이보다 큼이 없습니다. 옛날에 당(唐)나라 태종(太宗)이 방상수(龐相壽)를 꾸짖어 말하기를, ‘내가 옛날에 왕(王)이 된 것은 일부(一府)를 위하여 임금이 된 것이고, 지금에 천자(天子)가 된 것은 사해(四海)를 위해서 임금이 된 것이니, 치우치게 일부(一府)에만 은택(恩澤)을 줄 수 없다.’고 하니, 사람들이 모두 태종을 공평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은 오히려 사정(私情)을 면치 못하였다고 여깁니다. 그마음이 진실로 공평했다면 일부(一府)나 천하(天下)에 어찌 차별을 두겠습니까? 대개 당인(黨人)이 당을 세워 서로 공격(攻擊)하여 온 지가 그 시일이 오래 되었습니다. 그래서 번갈아 드나들며 교대하여 모이고 펼쳐대며 군주의 신임은 독차지했는 데도 권세는 나누어지지 않았으니, 이 때문에 이에 군주의 권한을 도둑질하여 그 당을 불러 모으고 군주의 작위(爵位)를 팔아서 그 은혜를 팔았으니, 저 이익을 탐하여 행검(行檢)이 없는 무리들은 맞아들이는 은총과 벼슬길에 이익을 노려보고 있다가 갓의 먼지를 털고 달려 나오니, 이익에 부쫓고 권세에 아부하는 이 많은 무리들이 나날이 새로워지고 다달이 왕성하여져서 국가를 배반하고 사당(私黨)을 위해 죽는다는 의논이 결성되고 직책을 지키며 공무(公務)를 집행하는 의리는 폐지되었습니다. 군주(君主)는 자기의 덕을 높여 밝히고 인극(人極)을 세워서 조금도 협잡(挾雜)하는 일이 없이 하여 자기가 총명(聰明)한 체하지 않고서 공평하게 여러 사람의 말을 듣고 쌍방의 의견을 아울러 보는 마음을 넓히며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표정을 짓지 말고서 정대(正大)하고 탕평(蕩平)한 방도를 확대해 나간다면, 저 붕당을 만든 사람은 스스로 그 권세가 자기에게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므로 감히 이익을 팔아서 당을 세우는 계략을 품지 못할 것이요, 남에게 아부(阿附)하는 자도 또한 그 권세가 저들에게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므로 감히 이익에 쏠려서 권세에 붙좇는 마음을 발생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필이면 시비(是非)가 얽힌 곳에서 부지런히 왕래하고 언색(言色)의 사이에서 괴이쩍어 놀라면서 그 형세를 조성(助成)시켜 마침내 어떻게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야 그만 그치겠습니까?” 하였는데, 상소가 들어가자 임금이 밤에 비망기(備忘記)를 내리기를,
“아! 당고(黨錮)의 폐해는 내가 실로 이를 근심하였기 때문에 사륜(絲綸)의 내용에 여러 번 언급하였다. 그러나 어찌 옳고 그른 것을 분별없이 뒤섞고 검은 것과 흰것을 서로 섞어 놓을 생각이겠는가? 지금 조덕린(趙德隣)의 상소를 살펴보건대, 수미(首尾)에 진계(陳戒)한 정성이 몹시 간절하고 지극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비답(批答)을 내리려고 하였으나, 다시 상세히 보건대, 그가 한 말이 지극히 교밀(巧密)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이른바 ‘내 뜻에 순종하거든 반드시 정도(正道)에 어긋난 점을 찾아보라.’고 한 것이다. 아! 신축년의 일은 그날 조정의 신하들이 어찌 사의가 있어서 그렇게 한 것이며, 지금 내가 처분한 것도 또한 다른 뜻을 둔 것이겠는가? 조정의 신하에 있어서는 나라를 위한 것이고, 나에게 있어서는 선왕(先王)의 뜻을 본받은 것이다. 그런데 ‘황옥(黃屋)에 마음을 두지 않고 구위(求位)하는 데도 뜻이 없었다.’는 등 말은 이미 몹시 차례가 없는 말이며, ‘창졸간에 왕이 승하(昇遐)하던 날에 미처 우는 얼굴을 가리우고 등극(登極)하였다.’는 말이나, ‘군주의 신임은 독차지했는데도 권세는 나누어지지 않았다.’는 등의 말은 또한 해괴하고 패리(悖理)한 말이다. 그리고 지난날에 국문(鞫問)한 일은 특별한 하교로 인하여 설시한 것으로 한편으로는 역호(逆虎)의 사건이고 한편으로는 요검(妖儉)의 사건이니, 그 근본을 구명(究明)한다면 역신(逆臣)들이다. 비록 그러하나 나는 지난날의 참혹한 해독(害毒)을 징계(懲戒)하여 한(漢)나라 명제(明帝)의 방황(彷徨)하던 일을 본받아 가뭄으로 인하여 녹수(錄囚)한 것이니, 대개 옥사(獄事)의 함부로 결정한 것이 많음을 염려한 것에 연유한 것인데, 지금 조덕린(趙德隣)은 곧 감히 말하기를, ‘혼란한 옥사(獄事)’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오늘에 신자(臣子)가 마음먹을 바이겠는가?
조덕린이 함부로 군주의 마음을 헤아리고 어떤 일로 인하여 제뜻대로 하면서 동인(東人)도 아니고 서인(西人)도 아닌 척하며 의란(疑亂)스러운 계획을 행하여 보려고 하였으니, 진실로 통탄하고 해괴한 일이다. 아! 선조(先朝)의 처분은 지극히 밝고 지극히 훌륭하여 밝기가 해나 별과 같아서 천지(天地)가 끝나도록 의혹됨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때의 상황에 따라 기회를 타서 현혹시키려고 하는데, 자기와 의사가 다른 자가 스스로 변론하는 것이 당습(黨習)에 오염(汚染)되었으니, 내가 본래 심각하게 다스리려고 하지 않았으나, 이것은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그 뜻이 매우 교묘하니 만약 몹시 징계하지 않으면 앞으로 진신(搢紳)을 경알(傾軋)시키고 조정(朝廷)을 괴란(壞亂)시키는 폐해는 이루 말할 수 없게 됨이 있을 것이니, 마땅히 투비(投畀)의 형벌(刑罰)을 시행하여야 할 것이지마는, 이미 진언(進言)한다고 하기 때문에 십분(十分) 말감(末減)하여 사판(仕版)에서 이름을 삭제하는 형률로써 시행한다.”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조덕린(趙德隣)은 곧 기사년의 여얼(餘孼)인데도 명의(名義)에는 죄(罪)를 얻은 일이 없었기 때문에 앞뒤로 논사(論思)ㆍ언책(言責)의 직임에 처한 것이 여러 번일 뿐만이 아니었다. 이때에 아첨하는 사람은 물리쳐 내치고 착한 사람들이 몰려 나왔으나, 크게 시비(是非)를 가려야 될 곳에 이르러서는 삼사(三司)에서 오랫동안 간쟁하여도 마침내 한결같이 윤허를 아꼈으므로 대악인(大惡人)과 대간인(大奸人)이 누워서 쉬며 버젓이 있게 하고, 또 붕당을 타파하여 탕평(蕩平)해야 한다는 뜻을 누차 비지(批旨)에 나타내었으니, 조덕린(趙德隣)이 임금의 뜻을 엿보고서 이에 기회를 노려 감정을 풀면서 임금의 총명을 현란(眩亂)시키고 군자(君子)를 해치려고 하였는데, 그 말의 아주 패리(悖理)하고 음흉(陰凶)함이 ‘천하(天下)를 보유(保有)하고도 즐기지 않았다.’ 느니 ‘구위(求位)하는데 뜻이 없었다.’ 느니 하는 등의 말에까지 이르러 극도에 달하였다. 또 ‘혼미하고 용렬한 임금은 사인(私人)에게 사은(私恩)을 베풀다가 도리어 능멸과 협박을 받는다.’는 등 말로 은연중 이를 성상(聖上)에게 비교하면서 마치 지존(至尊)의 자리를 구할 수 있는 자리인데도 성상께서 구하는 데에 뜻이 없었는데 대신(大臣)에게 핍박을 당한 것처럼 하였으니, 아! 통탄스러운 일이다. 이것이 어찌 신하된 자가 마음에 먹고서 입에서 낼 수가 있는 것이겠는가? 신축년에 대신(大臣)이 자전(慈殿)의 전교(傳敎)를 받들어 우리 전하를 명하여 왕세자(王世子)로 삼은 것은 일편 단충(一片丹忠)이 진실로 나라를 위하는 정성에서 나온 것인데, 이에 친절을 바쳐 공(功)을 요구한 것에 비하였으니, 말의 흉참(凶慘)함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른단 말인가? 다행하게도 귀역(鬼蜮)의 정상(情狀)이 성감(聖鑑)에서 도피할 수 없이 되어 십행(十行)의 사륜(絲綸)이 명백하고 통쾌하여 역당(逆黨)으로 하여금 두려워하는 바가 있게 하여 감히 다시 현혹(眩惑)시킬 계략을 싹트지 못하게 하였다. 주극(誅極)의 형률에 처치(處置)해야만 거의 그 죄를 징계할 수가 있을 것인데도 벌(罰)이 사판(仕版)에서 이름을 삭제시키는 것에 그치고 말았으니, 이것이 한탄스러운 일이다.”
영조 1년 을사(1725) 10월 21일(을유) 조덕린과 목시룡을 처단하도록 사헌부에서 아뢰다
삼사(三司)에서 전일의 계사(啓辭)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允許)하지 않았으며,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 박규문(朴奎文)이다.】에서 전일의 계사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조덕린(趙德隣)의 상소가 겉으로는 진계(陳戒)를 핑계대면서 마음쓰는 것이 교밀(巧密)합니다. 그가 말한 ‘지나치게 총애(寵愛)하다가 도리어 업신여김을 받고 존엄한 자세를 낮추어 경솔한 것만 보였다.’는 등의 말은 그에게는 오히려 이 하찮은 일이나 사소한 일로 여겨질 뿐입니다. ‘황옥(黃屋)에 마음을 두지 않고 구위(求位)하는 데에 뜻이 없었다.’는 것이나, ‘창졸간에 선왕이 승하(昇遐)하던 날 우는 얼굴을 가리우고 등극(登極)하였다.’는 한 단락(段落)의 말에 이르러서는 아주 음흉(陰凶)한 짓이므로 신자(臣子)로는 감히 입에서 꺼낼 수 없는 것입니다. 더구나 역적 목호룡(睦虎龍)이나 요망한 박상검(朴常儉)의 옥사(獄事)와 같은 것은 어떠한 흉역(凶逆)입니까? 그런데도, 곧 감히 말하기를, ‘난옥(亂獄)이 불어나 여러 사람들이 연좌되어 체포되었다.’는 것은 지나친 형벌이 함부로 무고(無辜)한 자에게 미친 것처럼 여긴 것이니, 그가 만약 일분이라도 군부(君父)를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어찌 감히 그렇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성상의 마음을 억탁(臆度)하여 은밀히 딴 일을 빌어 속마음을 떠보려고 한 형상은 천감(天鑑)에서 도피(逃避)할 수 없는데 형률이 삭판(削版)에 그쳤으니, 그 죄의 만분의 일도 징계할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조덕린을 아주 먼 변방으로 귀양 보내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종성(鐘城)으로 귀양보냈다.】
- 영조 3년 정미(1727) 7월 5일(기미) 안치되었던 조덕린(趙德隣)을 석방시키다 -- 영조 3년 정미(1727) 7월 8일(임술) 조덕린(趙德隣)을 집의(執義)로 삼았다. -- 영조 12년 병진(1736) 8월 27일(무자) 조강에서 지나간 조덕린의 계사를 다시 읽고, 내용이 음흉하니 처벌하게 하다
임금이 조강(朝講)을 행하였다. 조덕린(趙德隣)의 계사(啓辭)에 이르러 임금이 송인명에게 하문하기를, “대신은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조덕린의 소장을 신이 상세히 살펴보지 못했습니다만, 고(故) 상신(相臣) 조문명(趙文命)이 항상 이 소장 때문에 걱정하고 있었으니, 이는 그 소장의 내용이 매우 음흉하지만, 또한 성죄(聲罪)하기가 어렵기 때문이었습니다. 조문명이 말을 전해 보내어 그로 하여금 대죄(待罪)하게 했었으나, 끝내 듣지 않았으므로, 조문명과 신이 전조(銓曹)에 들어가 있을 적에 조덕린을 승지의 의망에서 빼어서 저지하여 기용하지 못하게 했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인품은 글을 읽어 편안하게 분수를 지키므로, 도내(道內)에서의 명망이 무겁습니다. 대저 영남 사람들 가운데 인망이 두드러진 사람들은 모두 잘못 빠져들고 있고, 이들을 공척(功斥)하는 무리는 인망이 도리어 그만 못합니다.” 하였다. 김한철이 또 기필코 처벌해야 한다고 극력 아뢰니, 임금이 을사년의 《일기(日記)》를 들여오게 하여 승지 남태온(南泰溫)으로 하여금 그때의 하교를 독주(讀奏)하게 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조덕린의 일에 대해서는 미처 상세히 알지 못했었다. 이제 대신의 말을 듣건대, 풍릉(豐陵)이 말을 전하여 보낸 것은 고심(苦心)한 끝에 나온 조처였는데도 이에 도리어 듣지 않았으니, 그의 마음이 의심스럽다.” 하고, 드디어 사간원의 계청을 따랐다. -- 영조 12년 병진(1736) 9월 3일(갑오) 조현명이 조덕린의 상소에서 ‘정명실’의 내용에 대해 국문하기를 청하니 따르다
예조 판서 조현명(趙顯命)이 상소(上疏)하기를, “조덕린(趙德隣)이 을사년에 올린 소장 내용 가운데 ‘명실을 바룬다.[正名實]’라고 한 조항은 그 어의(語意)가 비상한 것이었으니, 무신년 역란(逆亂)의 효시(嚆矢)였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더구나 조덕린은 영남의 선비들 가운데 조금 성망(聲望)이 있으니, 뒷날 흉역의 여얼(餘孼)들이 이를 구실로 삼지 않는다는 것을 보장하기 어려우니, 이것이 어찌 작은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그때를 당하여 그가 인죄(引罪)하고 궐하(闕下)에 엎드려 스스로 심사(心事)를 밝혔다면, 조정에서 그에 따라 사유(赦宥)하는 것도 관대한 은전을 시행함에 있어 해롭지 않았을 것입니다. 신이 영남에 있었을 적에 이런 내용으로 말을 전하여 보내었더니, 조덕린이 스스로 말하기를, ‘만일 나에게 직명(職名)이 있다면 그런 내용으로 진소하려고 한다.’고 했었습니다. 그러나 그 뒤 제수의 명이 내리지 않은 채 세월이 흘러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이미 세월이 오래 된 지난 일이어서 버려두고 논하지 않는 것도 혹 가하겠지만, 다시 도배(島配)의 벌을 시행하는 것은 하나의 죄를 가지고 거듭 처벌하는 것이 됩니다. 신의 생각에는 속히 왕부(王府)로 하여금 법에 의거하여 국문(鞫問)하되, 그가 과연 사실대로 인복(引伏)하여 그의 본심이 아니었다는 것을 밝힌다면, 혹 공평하게 언의(讞議)하여 작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혹시 망령되게 저뢰(抵賴)한다면 엄중하게 형신하여 자복받은 다음 전형(典刑)을 분명히 바루는 것 또한 그만둘 수 없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내용이 옳다. 해부(該府)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승지 홍성보(洪聖輔)가 금오(金吾)의 품지를 인하여 상소하여 국청을 설치할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 영조 12년 병진(1736) 9월 11일(임인)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조덕린(造德隣)을 나문하자는 의논이 발의(發議)된 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마는, 신은 난처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만일 조덕린이 좋은 말로 공초(供招)를 바쳐 자신의 본심을 밝힌다면, 일세(一世)의 의혹을 풀어줄 수 있을 것이므로, 즉시 대계(臺啓)를 윤허했던 것이다.” 하였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성의(聖意)가 그러하시다면 선처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조덕린의 소장 내용을 당론(黨論)으로 돌렸는데 눈물을 흘렸다는 말은 매우 괴이하다. 이른바 사인(私人)이란 누구를 가리킨 말인가?” 하자, 김재로가 말하기를, “을사년의 여러 신하들을 가리킨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좌상ㆍ우상에게 명하여 조용히 공초(供招)를 받도록 명하였다. -- 영조 12년 병진(1736) 9월 11일(임인) 죄인 조덕린을 잡아 추국하였는데 그의 공초에서 명백히 흉언의 근거가 없어 석방시키다
죄인 조덕린(趙德隣)을 나래(拿來)하여 추국하였다. 신문하기를, “을사년의 소장에서 이른바 ‘부자(父子)ㆍ군신(君臣)ㆍ형제(兄弟)는 사람의 대륜(大倫)이니, 반드시 각각 당연한 법칙을 극진히 하여 타고난 천성을 보전해야 된다.’는 말로 서두(書頭)를 일으켰는데, 이는 진실로 한없이 음특(陰慝)한 뜻을 함축하고 있는 말이다. 그리고, ‘황옥(黃屋)에 마음에 두지 않았고 지위를 구하려는 뜻이 없었으나, 창졸간에 눈물을 감추고 즉위(即位)하게 되었다.’는 등의 말은 그 사의(辭意)가 망측한 것이었다. ‘정명(正名)’이라는 두 글자에 이르러서는 그 출처가 어떤 것인데 감히 장주(章奏)에 쓸 수 있었단 말인가? 그 내용에 임금은 임금답지 못하고 신하는 신하답지 못하며, 아비는 아비답지 못하고 아들은 아들답지 못하며, 형은 형답지 못하고 아우는 아우답지 못하니, 백세 전과 천세 뒤에 반드시 정명(正名)으로 실상을 구하는 일이 있을 것이라는 등의 이 말은 더욱 음참(陰慘)한 것으로서 역적의 격서(檄書)의 효시가 되었고 흉서(凶書)의 근저(根柢)가 되었다. 그때를 당하여 흉역(凶逆)의 무리가 영외(嶺外)에 출몰하면서 흉언을 조작하여 전파하고 있었는데, 너는 멀리 있었으므로 핑계되어 말하기를, ‘갑자기 들은 말에 의거하여 망령된 말이 거기에 언급하게 되었다.’고 하였으나, 역절(逆節)이 이미 드러났고 언근(言根)이 모두 드러났으니, 즉시 이수(泥首)하고 궐하(闕下)에 나아가 스스로 자신의 심사(心事)를 밝혔어야 했다. 그리고 경술년ㆍ신해년에 어떤 도신이 너에게 말을 전하여 스스로 해명하게 하였으나, 제수(除授)하는 명이 있기를 기다려서 하겠다고 하면서 끝내 소장을 올려 진달하지 않음으로써 인심이 지금까지 의혹하게 여기고 있으니, 이것이 무슨 마음인가?” 하니, 조덕린이 공초(供招)하기를, “성상(聖上)께서는 뛰어난 효성을 타고나셨으며, 본심에서 우러난 우애는 요순(堯舜)에 견줄 만합니다마는, 요순의 성덕(盛德)에 있어서도 경계가 없지 않았기 때문에 윤화정(尹和靖)의 말을 인용하여 고했던 것입니다. …중략… 그런데 이제 효시(嚆矢)라는 유시(諭示)를 받고 보니 더욱 남의 말을 듣지 않았다가 이제 그것이 큰 죄가 되었으므로, 이문정(李文靖)이 성인(聖人)이라고 한 탄식을 깨닫게 되었습니다만, 후회 막급입니다.” 하였다. 국청에서 다시 추국하기를 청하니, 비답하기를, “다시 추국한 뒤에 등대(登對)하여 품처하도록 하라.” 하였다. 다음날 조덕린을 다시 추문하기를, “네가 전에 올린 소장은 무신년 이후 크게 사람들의 비평을 초래하여 도하(都下)에서 떠들썩하게 전했던 상황을 너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대신과 도신이 말을 전한 것도 이미 들었을 것이다. 진실로 그것이 본심이 아니었다면 이것이 얼마나 놀랍고 통분하고 망극한 말인데, 묵묵히 자정(自靖)하였다고 일컬으면서 끝내 한 통의 소장을 올려 스스로 해명하지 않은채 비방에 대한 처신을 등한하게 여기는 사람인 것처럼 하는 것인가? 실로 상정(常情)으로 헤아릴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네가 영남에 살면서 나이와 지위가 제일 높으니, 출언(出言)과 행사(行事)를 경미한 데에 견줄 수 없다. 처음에는 이미 뉘우치는 말이 언뜻 보였으므로 끝내 암담한 처지에 있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으나, 인심이 현혹되고 여얼들이 구실 삼는 것을 일찍이 우려하지 않았으니, 이는 또한 무슨 마음이란 말인가?” 하니, 조덕린이 공초하기를, “을사년의 소장은 일에 따라 일을 논한 것이므로 별로 의심할 만한 것이 없었으니, 어찌 조금이나마 주장(譸張)한 것이 있었겠습니까? 사람들이 말을 하는 것은 이것이 시기하는 무리들에게서 나온 것이므로, 본래 믿을 것이 못 되고 또한 문자에 기재된 것도 아니었습니다. …중략… 그 이후 10여 년 간 조용히 일이 없어서 실로 전일에 말한 것과 부합되었으니, 인심이 의혹하고 여얼들이 구실 삼는 것은 우려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대신 이하를 인견하고 조덕린의 죄의 경중에 대해 하문하니, 좌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원사(爰辭)가 끝내 명백하지 못하니, 만약 그 가운데에서 구적(鉤摘)한다면 어긋나는 단서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국가의 대체(大體)에 입각해서 논한다면 이렇게 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하고,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은 말하기를, “이는 언어와 문자의 잘못인 것인데, 이것을 가지고 80세가 된 사람을 신문한다는 것은 형벌을 신중하게 살핀다는 뜻에 흠결이 있게 될 듯합니다.” 하고, 판의금 김동필(金東弼)은 말하기를, “그의 소장 내용이 고의로 한 것인지 아무 생각 없이 한 것인지 진실로 알 수가 없지만, 그의 초사를 살펴보면 또한 분명하게 흉역(凶逆)으로 단정할 수 있는 증거가 없습니다. 지금 곧바로 무죄로 돌려버린다면 물정(物情)이 반드시 불평(不平)하게 여기는 이가 많을 것입니다.” 하고, 지의금 이유(李瑜)는 말하기를, “죄인의 기색에 끝내 감동하는 뜻이 없으므로 헤아리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옥사를 다스리는 것은 적중(適中)하게 하는 것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하고, 동의금 홍중주(洪重疇)는 말하기를, “소장의 내용이 흉악하고 음험하며, 원사(爰辭)가 분명하지 못하니, 용서할 수 없을 듯합니다.” 하고, 김재로는 말하기를, “형은 형답지 못하고 아우는 아우답지 못하다고 한 것은 그 문자가 끝내 괴이한 것에 관계됩니다.” 하고, 승지 김상성(金尙星)은 말하기를, “이것은 문자 사이에서 발생된 일인데, 세월이 오래 된 뒤에 가형(加刑)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을 듯합니다.” 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지위를 요구할 뜻이 없었다는 등의 말에 대해 그는 이것을 주자(朱子)의 말을 인용한 것에 돌리고 있습니다만, 끝내 의심스러운 데에 관계되는 것입니다. 송(宋)나라 영종(寧宗) 때는 비상한 변절(變節)이었기 때문에 주자의 차자(箚子)에, ‘많은 백성들이 혹시 역순(逆順)의 명실(名實)에 대해 의심이 없을 수 없다.’고 하기에 이르렀습니다만, 을사년에는 본디 털끝만큼도 영종의 시대와 비슷한 점은 없었는데, 처음부터 어떻게 감히 의의(擬議)할 수 있겠습니까? 이 점에 대해서는 그가 또한 망발했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곧바로 사죄(死罪)로 결단할 수는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조덕린의 소장은 당론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말이 위를 범하기에 이르렀다. 그의 공초가 끝내 명쾌하지 못했으나, 무신년의 근저(根柢)라고 결단하는 것은 결코 그렇지 않은 점이 있다.” 하였다. 김동필이 말하기를, “그가 한 말에 이문정(李文靖)의 선견(先見)이라고 한 말은 풍릉(豐陵)의 말을 돌이켜 생각한 것입니다. 따라서 본정(本情)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고, 김상성은 말하기를, “묵묵히 자정(自靖)하고 있었는데, 지금에야 그가 참으로 성인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고 한 것은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가 나중에는 곧 탄복한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어떻게 감죄(勘罪)해야 마땅하겠는가?” 하니, 김재로는 말하기를, “처음에는 소장의 내용이 어긋나서 틀린다는 것으로 죄안(罪案)을 삼았었으니, 지금은 흉역(凶逆)들을 핑계댄다는 것으로 죄를 준다면, 무슨 겹쳐 처벌한다는 혐의가 있겠습니까?” 하고, 송인명은 말하기를, “국체(鞫體)는 매우 중대한 것이므로 혹시 완전히 석방시킨다면 물정이 격렬해져서 난처한 지경에 이르게 될까 두렵습니다. 그리고 혹시 옥중(獄中)에서 죽게 된다면 죄가 명백하지 않아서 선비를 살해했다는 평판이 있게 될까 두렵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풍원(豐原)의 뜻은 그를 암담(黯黮)한 죄과(罪科)에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인데, 그렇게 걱정해 주는 말을 그가 잘못 듣고 잘못 진달할 수도 있다. 또 풍릉(豐陵)의 권고를 듣고 비록 스스로 해명하지는 않았으나, 내가 그에 대해 조금도 걸리는 것 없이 이미 석연(釋然)한 마음이다. 위에 있는 사람이 이미 그의 마음에 다른 뜻이 없다는 것을 알았으면 정배(定配)시키는 것은 결국 어떠한 데에 관계가 되겠는가?” 하고, 이어 전교(傳敎)를 쓰라고 명하면서 이르기를, “문자 때문에 사람을 죄주는 것은 왕자(王者)로서 할 일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일을 가지고 두 번 귀양 보내는 것 또한 형정(刑政)이 전도되는 것이나, 지금 조덕린의 일은 그와 다른 점이 있다. …중략… 그렇기는 하지만 처분은 오직 충신ㆍ역적의 여부만을 볼 뿐이다. 그의 두 번째 공초를 보건대, 을사년의 소장은 사의(私意)를 끼고 있었으나 지난해의 하교를 벗어나지는 않고 있다. 따라서 적격(賊檄)의 효시와 흉언(凶言)의 근저(根柢)가 아니었음을 헤아려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람을 애매한 지경에 두고서 중첩되게 형률을 가할 수 있겠는가? 조덕린은 특별히 방송(放送)시키도록 하라. 아! 이를 전도된 처사라고 하지 말라. 왕자의 처분은 명백하지 않아서는 안 되는 것이고 조정의 법률은 본디 엄중해야 되는 것이다.” 하였다. 동의금 1인에게 명하여 전교를 가지고 나가도록 명하고 나서 전지(傳旨)를 받들지 말고 곧바로 이 전교를 죄인에게 읽어서 들려주고 즉시 방송시키게 하였다. *이수(泥首) : 죄를 지은 사람이 사죄하는 뜻으로 머리에 진흙을 칠함. -- 영조 13년 정사(1737) 6월 16일(계유) 조덕린(趙德隣)을 제주도(濟州道)에 안치(安置)하였다. -- 영조 13년 정사(1737) 7월 26일(임자) 조덕린(趙德隣)이 강진현(康津縣)에 이르러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