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정 자연에 숨은 역사, 삼척을 찾아서 1
(오십천 나린 믈이)
글/ 강기옥
물 맑고 산 좋은 곳인데도 사람의 발길이 뜸한 곳이 있다. 주변의 유명 관광지에 치여 여행의 목적지가 되지 못하고 여행객들이 그냥 스쳐 지나가는 곳, 삼척동자(三尺童子)를 로고(logo)로 삼아 관광객을 부르는 삼척(三陟)이 그 곳이다. 삼척동자(三尺童子)와 삼척(三陟) 사이에는 한자를 읽는 발음이 같아 의미의 연상을 일으킬 뿐 아무런 상관성이 없다. 그러나 「삼척이 아름다운 것은 어린 꼬마 [三尺童子]도 알고 있는 사실」이라든지 「삼척은 어린 꼬마라도 찾아올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고 보면 삼척동자를 시(市)의 로고로 삼은 것은 지혜로운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아이들이 자라서 어른이 된 이후에도 다시 찾아 올 것이라는 희망도 보이고, 오십천에서 그들은 분명히 오십세가 지나도 다시 찾아 올 것이라는 암시를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오십천은 삼척이 자랑하는 물길이다. 삼척 주민을 아우르는 삶의 현장이다. 삼척 주민들의 애환을 담고 유장한 세월을 흘러내린 역사의 증인이다. 삼척은 그렇게 삼척동자를 앞세워 오십천변으로 사람을 불러모으는 데 온 힘을 기울이고 있다. 춘하추동 할 것 없이 온통 속초, 강릉, 정동진으로 몰려가는 관광객의 발걸음을 붙들기 위해 애쓰는 삼척에 숨어 있는 역사를 찾아본다.
* 고려와 조선의 역사가 한 자리에
1). 조선 건국의 실마리 - 준경묘. 영경묘
속초는 휴식을 위한 관광으로도 충분하지만 역사 탐방을 곁들이면 더 맛이 난다. 고려의 멸망과 조선의 건국을 통해서 한 나라의 흥망성쇠를 동시에 찾아 볼 수 있는 것은 삼척이 주는 또 하나의 맛이다.
고등학교 시절 조선초기의 어휘로 씌어진 용비어천가는 어휘와 문법의 생경함 때문에 한국말인지 중국말인지 구분하기도 어려워 차라리 영어 공부하는 편이 낫겠다며 장난치던 일들이 생각난다. 서부 영화의 주인 같은 육룡(六龍)의 행적도 이상하여 무작정 외우는 것이 상책이었던 용비어천가는 고등학생들의 시험기간을 힘들게 했었는데 삼척에서 하루만 지내면 그 어려웠던 용비어천가는 저절로 머리 속에 쏙 들어온다. 늘씬하게 자란 소나무 숲에 고즈넉하게 자리잡은 준경묘와 영경묘를 찾아가노라면 바람은 솔솔 역사의 향기를 담아낸다. 굳이 외우려 애쓰지 않아도 하늘 영경묘역. 묘는 왼쪽으로 훨씬 뒤에 있음 높이 머리를 든 육송들이 전주 이씨의 내력을 이야기해 준다.
목익도환태태. 기억이 새로운 용어다. 목조 이안사는 태조의 4대조다. 목조가 전주에서 살 때 관기(官妓) 문제로 산성별감(山城別監)과 불편한 관계에 있었다. 그런데 전주의 지주(知州:주장관)가 산성별감과 한 편이 되어 죽이려 하므로 목조는 외가가 있는 이 곳 삼척의 활기리로 이주했다. 이때 이안사를 따르던 170여호도 함께 이주했다. 이 곳에 사는 동안 이안사는 부친(이양무) 상을 당했다. 장지를 정하지 못하고 산 속을 헤메는 중에 한 도인이 나타나 목조가 앉아있는 곳을 가리키며 그 곳에 소 백마리를 잡아 개토제(開土祭)를 지내고 관을 금으로 싸서 장사지내면 5대손이 새나라의 창업주가 되리라 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쫓기듯 옮겨 사는 이안사이기에 도인이 지시한대로 실천할 재산이 없었다. 그래서 편법을 동원했다. 소 백 마리면 백우(百牛)인데 이를 달리 백우(白牛)로 표현하여 처가의 흰 소를 잡아 올리고 관은 금색이 돋는 귀리짚으로 감싸 장사를 지냈다.
소위 "백우금관(白牛金冠)의 전설"을 실천한 것이다. 가난 속에서 만난 시련을 지혜로 헤쳐 나간 목조 이안사는 재치있는 기지를 발휘하여 훗날 이성계가 임금이 될 수 있는 길을 터놓은 것이다.
그 때 장사지낸 묘가 바로 미로면 상정리에 있는 준경묘이고 그 후 돌아가신 어머니의 묘는 동산리에 있는 영경묘이다.
조선의 역사를 이성계의 4대조인 목조에서부터 시작하는 것도 그 이유에서다. 또 제사를 지낼 때 4대조를 봉사(奉祀)하는 관례에 따른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고려를 멸망시키고 새 왕조를 연 역성혁명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하여 이성계의 4대조부터 이미 조선 개국의 업적에 많은 공을 남겼다는 것을 주지시켜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용비어천가에는 목조 익조 도조 환조의 삶이 고대의 성인들이 중국을 개국하던 업적과 똑 같다는 것을 천우신조(天佑神助)의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해동(海東)육룡(六龍)이 샤 일마다 천복(天福)이시니
고성(古聖)이 동부(同符)시니 - 제 1장
우리나라의 여섯 임금님이 나시어(飛) 개국(開國)의 일을 하시는데 하는 일마다 하늘이 내리신 복이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중국의 성인이 한 일과 부절을 합친 것처럼 꼭 맞기 때문이란다.
그 육룡은 목조를 포함해 익조(翼祖 李行里) 도조(度祖 李椿) 환조(桓祖 李子春) 태조(太祖 李成桂) 태종(太宗 李芳遠)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2대 임금 정종은 용의 반열에 들지 못했다. 이는 정종이 2년 2개월 동안 왕위에 있었지만 태종 이방원과 형제지간이기 때문에 한 대를 넘는 조(祖)의 개념인 용에 넣을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미로면 활기리의 목조가 살았던 집터에는 구거지비각(舊居地碑閣)이 세워져 있어 조선 건국의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