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세잔(paul cezanne) 는 프랑스의 남쪽 끝에 있는 액상 프로방스에서 태어났다. 빈센트 반 고호, 폴 고갱과 함께 프랑스 후기 인상주의의 3대 화가로 손꼽히는 그이지만, 살아생전 세잔은 대중으로부터 그리고 부모로 부터 인정 받지 못했던 비운의 화가 였다.
세잔의 아버지는 고지식하고 완고한 사람이었다, 늘 자신의 말이 옳다고 여겼고 아들의 의견은 쉽게 무시했다. 사회적 명성과 돈을 중요하게 여겼던 아버지는 분명하게 눈에 보이는 성공이 있는데 그것을 외면하고 그림을 그린다는 세잔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세잔은 그의 아버지 초상화를 그려서 그의 친구 에밀졸라가 1866년에 미술평론을 썼던 신문에 실었다.
세잔은 아버지의 인정을 받고 싶은 마음을 그렇게 표현했다. 물론 그의 아버지는 그 신문을 구독하지는 않았다.
세잔이 더 절망했던 것은 아버지가 화가라는 작업 그 자체를 무시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 었다. 그의 아버지는 동시대에 활동했던 인상주의화가 마네를 성공한 화가라 칭송했고, 마네의 그림을 구매해 집에 걸어 놓기 까지 했다. 세잔의 아버지는 부유했지만 그림을 계속 그리는 세잔을 후원해 줄 생각은 없었다. 세잔은 그림을 그만두면 보장되는 경제적 지원과 안정적인 직업을 뒤로한 채 미술의 길로 떠났고, 아버지는 더 이상 그에게 돈을 보내 주지 않았다. 이때 세잔을 후원해 준 사람은 친구 에밀졸라(목로주점의 작가) 였다.
세잔은 세상에 고립된 채 세상의 진리를 파악하고자 고군분투했다. 이전까지의 위대한 예술가라 불리는 화가들은 신화 속 인물이나 영웅, 혹은 귀족이나 왕의 초상화를 그렸었다. 그러나 세잔은 정물을 그렸는데 구성과 연출이 자유롭고 예술가의 의도를 마음대로 표현 할 수 있는 최적의 대상이었다.
특히 수많은 사과를 그렸다. 아래에서 올려다본 사과, 앞에서 본 사과, 위에서 내려다본 사과 등 시선을 모두 한 그림에 담아 여러 관점을 담으려 노력했다. 이것을 통해 대상의 질서 자체를 바꾸는 것이 그림의 진정한 힘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인물, 영웅등은 정면에서 카메라로 찍은 사진과 같은 느낌을 주는 반면)
결국은 사과는 '구'라는 입체적인 동그라미이고, 테이블은 사각형과 직사각형이 모인 육면체 그리고 그릇이나 병 들은 원기둥이라는 기본 형태로 압축된다. 세상의 원리를 파악하려면 기하학적인 기본 형태들을 들여다 보아야 한다는 것이 사람들로 부터 멀어진 세잔이 발견한 논리 였다. (실제로 아동들 미술 교육시간을 참관해본적이 있는데 사과를 그리기전에 기본 원을 그려 놓고 확장시켜 나가는 방법으로 가르치고 있다)
그의 기본 형태에 따른 접근은 피카소의 입체주의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고, 1997년 피카소가 발표한 첫 입체주의 진시회의 성공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4번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 그시대가 공유하는 상식적 문화들을 과감히 떨쳐 버린다. 자기 주관성이 뚜렷하다. 밥을 먹기 위해서 살지 않는다. 자신의 감정을 보살피는 일이 더 중요하다. 살기 편한 삶을 선택하지 않고 자신의 감정을 보살피는 삶을 산다. 자신이 살아있는 시대의 보편적 감성과 맞지 않으면 세잔 처럼 열심히 작업해 놓고 성공은 보지 못하고 삶을 마감할 수도 있다. 하고 싶은 일에 영혼을 쏟아 놓고 댓가 없이 죽는다)
동료 화가 르누아르가 '자네의 그림은 살아 있는 것 같네, 물체를 올겨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림 속에 새로운 생명을 만들고 있어:라고 극찬을 했다. 미술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것은 확실하다. 내가 할 수 없는 일은 하는 그들은 일견 멋진 사람들로 보인다. 하지만 에니어그램에서는 이것을 죄성이라고 표현한다.
그의 칭찬이 자신이 그림이 팔리지 않는 것을 위로해 주는 말이라고만 생각했고, 다른 사람의 호의적 태도에 자신에 대한 무시가 깔려 있을 것이라 생각하여 점차 예술가들의 모임에서도 소외되기 시작했다라고, 김 소울은 자신의 책 마음챙김 미술관에서 기술하고 있다.
(세잔에 관한 대부분의 기록은 김 소울의 책에서 옮겨 쓴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