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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 한국 | 북한 | ||
관계수립 | 修交日 :1990-01-15 | 修交日 :1958-09-25 | ||
공관개설 | 駐 알제리 | 駐 韓 | 駐 알제리 | 駐 북한 |
상주:1990.3.31 | 상주:1992.10 | 겸임:1998.1 | 겸임:1998.6.30 | |
공관장 | 박대원(2002-09-29) | 압델문암 아흐리즈(2004-10) | 이병호(2003-05) | 마지드 부게라(2002-01-31) |
겸임국 | 리비아 | 중국 | ||
주요협정체결 | -경제과학기술 및 문화협력협정(97.4) -투자보장협정(97.8 가서명) -이중과세방지협약(2001.11) -체육협력 약정(2001.11) |
-문화협조협정(64.9) -우편물교환협정(66.7) -문화.과학.방송협정(69.3) -보건협정(72.11) -과학기술협정(74.5) -쌍방항공사간 총판매대리협정과 지상봉사협정 (74.7) -장기무역협정(78.9) -쌍방통신사간 보도교환협조협정(84.3) -문화협력협정(87.4) | ||
對남북한 통상 | 通商 (2003) - 수출: 1억9,166만불(석유제품,가죽) - 수입: 2억2,459만불(전자전기제품,기계류) |
通商 (2002) - 수출: 16만4,000불 - 수입: | ||
남북한의 주요진출 | - LG전자, 삼성전자 등 - 코트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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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민수 | 僑 民 : 0名 滯留者 : 36名 |
僑 民 : 0名 滯留者 : 0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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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개관
북아프리카 지중해에 접하는 공화국. 세계에서 열 번째로 넓은 국토의 5분의 4는 사하라 사막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 8년간에 걸친 치열한 싸움을 거쳐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쟁취했다. 그 뒤 제3세계의 리더쉽을 맡아왔으나 동·서의 이웃 튀니지, 모로코와의 마그레브 지역 경제공동체의 실현, 서쪽 끝으로 국경을 접하고 있는 서사하라와의 분쟁 등 해결해야 할 과제도 많다. 1950년대에 사하라 사막에서 대량의 석유가 발견되어 현재는 OPEC 급진파의 중요한 멤버이기도 하다.
Ⅱ. 약사
로마제국의 지배 후 7세기에 아랍인이 침공했다. 16세기 초에는 그리스도교도인 스페인인의 침략을 받아 오스만투르크제국에 도움을 청했으며 그 이후 속령이 되었다. 1830년에 프랑스군이 상륙하여 결국에는 1834년에 프랑스가 병합했다.
1954년 알제리민족해방전선(FLN)이 결성되어 무장독립투쟁을 시작하여 58년 카이로에 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62년 3월 알제리의 독립과 휴전을 약속하는 에비안협정으로 프랑스와의 전투를 종결했다. 같은 해 7월 3일에 독립했다. 9월의 총선거에서 압바스 대통령, 벤벨라 수상이 취임했다. 이듬해인 63년 9월에 벤벨라가 대통령에 취임했다. 65년 6월, 부메디엔 국방장관이 무혈쿠데타를 일으켜 집권에 성공하고 혁명평의회 의장에 취임했다. 76년 11월에 새헌법을 공포하고 12월의 선거에 의해서 대통령으로 취임하여 알제리식 사회주의 건설을 추진했다. 78년 12월에 사망했다. 두달 후인 79년 2월 샤도리 대령이 국민투표를 거쳐 대통령에 취임했다. 유폐중인 벤벨라 전 대통령 등 정치범을 석방하는 등 정-제계의 구세력을 일소했다. 86년 1월 기존의 교조주의적 사회주의를 탈피하기 위한 헌법개헌을 국민투표에 붙여 승인받았다. 88년 9월에는 경제악화 등으로 인해 국영기업의 노동자들이 중심이 된 파업이 계속해서 발생하여 10월 알제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샤도리 대통령은 폭동을 해결하기 위한 정치개혁을 추진하여 89년 2월에 국민투표로 헌법을 개정하고 7월에는 인민의회가 복수정당을 인정하는 새 선거법을 가결하여 FLN의 1당독재에 종결을 고했다.
▼ 원리파가 선거에서 압승 … 90년 6월 복수정당제에 의한 첫 통일지방선거를 실시했다. 이슬람원리주의를 표방하는 이슬람구국전선(FIS)이 지방의회의 55%를 점유하는 압승을 거뒀다. 91년 FIS와 치안부대의 충돌이 계속해서 일어났다. 이에 정부는 7월 샤도리 정권에 대한 [성전(지하드)]을 일으킬 것을 부르짖은 FIS의 마다니 의장 등을 내란음모용의자로 체포했다. 같은 해 12월, 복수정당제에 의한 첫 총선거의 제1회 투표가 실시되어 FIS가 8할 이상의 의석을 획득하는 압승을 거뒀다. 여당이었던 FLN은 3위로 밀려났다.
▼ 군부 쿠데타 … 92년 1월 16일의 총선거 제2차 투표를 앞두고 샤도리 대통령이 11일 전격사임하고, 고자리 수상은 선거무효를 선언하며 전국에 군을 배치시켰다. 원리주의파와 타협하려는 움직임을 보인 대통령에 대한 군부의 사실상의 쿠데타였다. 정부는 제2차 투표의 정지를 발표하고, 제1차 투표의 무효를 선언했다. 네자르 국방장관 등이 최고국가평의회(5명)를 창설하고 실권을 장악하고 독립전쟁의 영웅 부디아흐를 의장에 임명했다. 평의회는 사원 등 종교시설에서의 정치활동을 금지하고 하샤니 FIS의장대행을 체포했기 때문에 각지에서 원리주의파와 치안부대가 충돌했다. 평의회는 2월 9일 전국에 비상 계엄령을 발동하고, FIS를 비합법화하여 FIS계 지방 수장들 다수가 체포되었다. 6월 29일 동부 안나파에서 연설중이던 부디아흐 의장이 암살되었다. 새로운 의장에는 카히 전국퇴역군인사무국장이 취임하면서 고자리 수상은 7월 사임했다. 같은 달 FIS의 마다니 의장에게는 징역 12년의 판결이 언도되었다. 테러는 93년에도 계속 일어나 최고국가평의회는 93년 6월 자체 해산과 향후 3년간을 [민주국가로의 이행기간]이라고 하는 개혁안을 발표했다.
▼ 제루알 정권 … 94년 1월 제루알 국방장관을 대통령으로 지명하면서 최고국가평의회는 해산했다. 대통령은 FIS와의 대화를 시작했지만, 정당허가, 무력방기 등의 현안을 놓고 서로 대립하며 결렬되었다. 95년 11월 16일 처음으로 복수정당제에 의한 대통령 선거를 실시하여 제루알 현대통령이 61.3%의 득표율로 당선했다. 96년 11월 2원제, 종교-민족정당의 폐지를 포함한 헌법개정을 국민투표로 채택했다. 97년 6월 6년만의 총선거에서 여당인 민주국민연합이 승리하고 평화를 위해 사회운동, FLN과의 3당 연립내각을 성립했다. 여당은 10월의 지방선거와 12월의 첫 국민평의회(상원) 선거에서도 승리했다.
Ⅲ. 지형·기후
북알제리에는 해안과 나란히 텔아틀라스 산맥과 사하라아틀라스 산맥이 뻗어 있고, 그 사이는 평균고도 1000m 정도의 고원으로 되어 있다. 해안 가까이는 평야와 구릉을 이루어 예부터 개화되어 있었다. 국토의 태반을 차지하는 산맥 남쪽은 에르그라 불리는 대 사구열과 아하가르 산지를 포함한 사하라 사막이다. 이 나라의 북부는 온난한 지중해성 기후를 보이나 내륙으로 들어갈수록 여름과 겨울의 기온차가 크며, 강수량은 지극히 적어진다. 알제의 평균기온은 9~29°C이다.
Ⅳ. 정치
92년 1월 16일의 총선거 제2회 투표를 앞에두고 샤도리 대통령은 5일 전인 11일 사임을 발표, 고자리 수상이 전국각지에 있는 군의 긴급배치를 지시했다. 이슬람원리주의파와 공존하는 방향으로 행동해왔던 대통령에 대해 반발한 군부가 사실상의 쿠데타를 일으켰다. 정부는 12일, FIS가 제1정당이 되는 것을 억누르기 위해 제2회 투표의 중지를 발표하고, 제1회 투표도 사실상 무효가 됐다고 선언했다.
【평의회가 실권장악】 1월 14일, 대통령직을 대신하기 위해 네잘 국방장관등을 멤버로 하는 최고국가평의회가 창설되었다. 의장에는 독립전쟁의 영웅으로 모로코에 망명 중인 부디아흐가 임명되었다. FIS는 평의회를 헌법을 무시한 군사정권이라고 비난하고 중지되었던 투표와 대통령선거의 실시를 요구했다. 새 지도부는 모스크에서의 정치활동을 금지하는 등 원리주의파에 대한 강경책을 강화하여 22일 하샤니 FIS의장대행을 체포했다.
【비상사태선언】 알제와 오랑 등 각지에서 원리주의파와 치안부대 간의 충돌이 여러차례 일어나 2월 7일에는 여러도시에서 총 50명이 사망하고, 체포자는 총 200명을 넘어섰다. 평의회는 9일, 전국토에 비상사태선언(기간은 연말까지)을 발령하고 FIS를 비합법화시켜 해산시켰다. 2월 말의 FIS 발표에서는 1월의 정변으로 150명이 사망하고, 부상자는 700명이며, 체포자는 FIS계 지방 수장을 포함해서 3만명이 넘는다고 밝혔다. 부디아흐 의장은 2월 22일, 내각을 개편한다고 발표하고 FIS의 게지를 직업훈련고용장관에 임명하는 등 비주류파 3명을 기용했다.
【부디아흐 의장 암살】 6월 29일, 동부의 안나바에서 부디아흐 의장이 암살되었다. 평의회는 FIS를 철저히 탄압하겠다는 방침을 표시했으나, 검찰당국에 의하면 범인은 국가정보기관원으로써 당시에 의장 경호대의 일원이었던 소위 중 한 명이었다고 밝혔다. 새 의장에는 평의회 멤버인 카휘 전국퇴역군인 사무국장이 취임했다. 고자리 수상은 7월 8일에 취임, 아브데자람 전 공업장관이 뒤를 이었다. FIS의 마다니 의장 등 간부 7명에 대한 판결이 일주일 후인 15일에 나왔으나 마다니 의장은 징역 12년을 선고받음으로써 예상보다는 가벼운 판결이 나왔다. 카휘 새 정권이 FIS를 향한 화해의 제스처를 보냈다. 그러나 그 후에도 치안부대와 원리주의 무장집단의 충돌이 계속되어서 내무부는 12월 2일 수도를 포함한 7지역에 야간외출금지령을 발령, 새롭게 FIS의 영향하에 있던 27개 도시의 행정기관을 해산시켰다.
【새 대통령이 취임】 94년 1월 최고국가평의회에 대신할 지도부 선출을 위해 국민화해회의가 개최되었지만 이슬람구국전선(FIS) 등의 보이콧으로 실패했다. 원리주의에 대결자세를 굳건히 했던 군인출신인 제르알 국방상을 새로운 대통령으로 지명하고 최고국가평의회(5명)은 같은 달 31일에 해산했다.
【테러에 관련되어 1만명 사망】 이슬람원리주의 무장세력은 94년 알제리 전역에서 테러를 계속했다. 같은 해 3월에는 알제 남쪽에 있는 람베세의 형무소를 습격한 400명의 수인이 탈주하는 등, 형무소 습격도 92년 1월 이래 계속되고 있다. 치안당국은 최강경파로 이루어진 무장이슬람집단(GIA) 등의 괴멸에 힘을 기울여 94년 6월 26일에는 GIA의 지도자 구스미를 사살했다. 실업, 빈곤 등이 원리주의 무장세력이 신장할 수 있는 배경이다. 과격한 테러활동을 행하고 있는 GIA 등 무장조직의 멤버는 약 5000명으로 보인다. 군의 선거개입으로 92년에 분쟁화했던 이래, 94년 가을까지 군, 무장세력, 시민 등 사망자는 약 1만명에 달한다.
파리행 에어프랑스기(승무원 약 240명)가 12월 24일 알제공항에서 GIA로 보이는 4인조에 납치되었다. 범딘들은 연료보급과 파리로의 비행을 요구했다. 일부 승객을 풀어준 26일 저녁에 프랑스 마르세이유 공항에 도착했다. 프랑스의 특별부대가 기내에 돌입해 범인전원을 사살해 남은 승객 약 170명을 해방시켜 사건발생에서부터 54시간 만에 해결했다.
【외국인에 대한 테러 연달아 발생】 원리주의 무장세력은 93년 9월 이후 외국인을 표적으로 한 테러를 계속하여 94년말까지 70명정도가 피살되었다. 프랑스 대사관원 5명이 94년 8월 3일에 알제에서 살해되었을 때에는 프랑스 정부가 파리주재 알제리인 원리주의파 21명을 국외추방했다. GIA 등의 무장투쟁선언으로 외국인 비즈니스맨들이 일부 본국으로 되돌아간 외에 네덜란드 등은 알제리 대사관의 일부 폐쇄에 들어갔다.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은 외국인들은 심한 테러를 당해야만 했다. 여기에는 힐튼호텔 부사장으로 수도 알제에서 피살된 강대현씨 등의 한국인 희생자도 있었다. 93년 9월 1일부터 1년간에 약 1만 2000명의 프랑스인이 알제리에서 탈출했다. 약 300명이 있던 재류향인도 94년 여름에는 60명 전후로 감소했다.
【대화노선이 실패】 제르알 정권은 94년 9월 5일에 FLN, 하마스 등 5정당과의 정치대화를 실시하여 폭력의 정지를 호소했다. 같은 달 13일 FI의 마다니 의장, 베르하지 부의장들의 간부 5명을 석방시키고 자택연금에 들어갔다. FIS의 요구는 조직의 합법화, 정치적 자유의 회복, 옥중의 정치범 석방이었다. 그러나 의장들이 테러를 하지 않는 것에 대한 것은 거부했기 때문에 정부의 대화노선은 암초에 걸리게 되었다. 제르알 대통령은 10월, 대통령 선거를 95년 말까지는 실시한다고 표명했다. FIS와 합법야당세력은 로마에서 95년 1월 13일 국민화해를 위해 초당파에 의한 잠정정부 설립을 제안했지만, 정부는 이를 거절했다.
【34년만의 문민 대통령】 제르알 대톨령의 임기종료 전 사임에 따른 대통령선거가 99년 4월 15일에 실시되어 군과 민주국민연합 등 주요 4개 정당의 지지를 얻은 부티프리카 전외무장관이 당선되었다. 알제리에 문민정권이 부활한 것은 65년 이후 34년만의 처음이다. [테러의 종결]과 [국민화해]가 쟁점이 되었던 대통령 선거는 투표일 전날 다른 여섯 경쟁후보가 [선거에 부정이 없다]라고 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하고 입후보를 철회했다. 이 결과로 사실상의 찬반투표였던 선거에서 부티프리카 후보는 유효투표의 73.79%를 취득하면서 대통령에 취임했다. 부티프리카 대통령은 12월 23일 벤비돌 전 재무장관을 수상으로 지명하고 다음날 새로운 내각을 발족시켰다.
【벤프리스 내각】 2000년 8월 26일 벤비돌 수상이 대통령에게 사표를 제출했다. 사임은 이슬람원리주의 과격파조직에 의한 테러로 피폐해진 경제를 바로 세우기 위한 목적으로 정책쇄신을 진행시키던 대통령의 의향으로 보이며 대통령의 측근인 알리 벤프리스가 신임 수상에 지명되었다. 벤프리스는 다음날 보수파인 압둘 아지즈 벨하딤을 외무장관으로 하는 새로운 내각을 발표했지만, 각료의 대다수는 유임시켰다.
【對과격파 화해를 승인】 부티프리카 대통령은 99년 6월에 (1) 복역 중인 이슬람과격파조직과 그 지원자 등 약 5000명의 사면, (2) 집단참살 등으로 구속된 자를 제외한 과격파 조직원을 석방, (3) 투항자를 면죄, 감형 등을 골자로 하는 對이슬람과격파 화해책을 제시했다. 이 정책의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가 같은 해 9월 16일에 이루어져 찬성률 88.63%의 압도적인 지지를 얻었다. 투표율은 약 85%였다.
【FIS 해산】 2000년 1월 11일 대통령은 이슬람구국전선(FIS)의 군사부문이던 이슬람구국군(AIS)의 멤버에 대한 사면을 허가하는 대통령령을 발령했다. AIS는 같은 날 해산을 선언하고 FIS도 정부와의 교섭으로 해산에 합의했다.
【테러 빈발】 2000년 1월 13일 까지 투항하면 사면을 허가하겠다는 정부의 발표에 대해서 이슬람원리주의 과격파조직의 80%(정부 발표)가 투항했지만, 최강경파 조직인 [무장이슬람집단(GIA)] 등은 이에 응하지 않고 작전을 소거작전을 전개하는 정부군과의 사이에서 격렬한 전투가 계속되었다. 또 구성원들이 각지에서 테러를 일으켜 5월 3일 알제 남부 약 75km 떨어진 곳에서 버스가 습격당하여 45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11월 27일의 라마단(단식월)이 시작되면서 테러가 활발해져 12월 17일에는 알제 서부의 마을에서 관광버스가 습격당해 15명이 사망했다.
Ⅴ. 정치조직
【원 수】 대통령. 임기는 5년이며 재선의 제한은 없다.
【내 각】 각료는 대통령의 임명을 받는 수상이 임명한다. 헌법상에는 의회에도 책임을 진다. 현 내각은 2000년 8월에 발족했다.
【의 회】 96년의 헌법개정으로 국민평의회(상원) 144의석, 비례대표제인 하원 380으로 이루어진 2원제가 되었다. 상원의 48의석은 대통령의 지명으로, 나머지는 지방의원들에 의해 선출된다.
▼ 국민평의회(상원/97년 12월 25일 선거에 의한 정당별 의석수) … 의장은 바시르 부마자(Bashir BOUMAZA)
민주국민연합 |
80 |
알제리민족해방전선 |
10 |
사회주의세력전선 |
40 |
평화를 위한 사회운동 |
2 |
대통령 지명 |
48 |
▼ 국민평의회(상원/97년 6월 5일 총선거에 의한 정당별 의석수) … 의장은 압둘 까디르 벤살라(Abdel Kader BENSALAH/민주국민연합)
민주국민연합 |
156 |
평화를 위한 사회운동 |
69 |
알제리 민족해방전선 |
62 |
부흥당 |
34 |
사회주의세력전선 |
20 |
민주문화연합 |
19 |
그 외... |
20 |
【정 당】 89년 7월에 제정된 새 선거법에 의하여 복수정당제가 되었다. 주요정당은 다음과 같다.
1) 민주국민연합(RND): 97년3월, 6월 실시한 총선거를 위해 제루알 대통령에 의해 결성. 당수 압둘 카디르 벤살레가 98년 4월의 당대회에서 임기가 끝난 후 당수는 공석.
2) 평화를 위한 사회운동(MSP): 온건파 이슬람 정당. 96년의 헌법개정으로 종교정당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하마스를 개편. 당수는 마흐푸드 나흐나(Mahfoud NAHNAH)
3) 알제리민족해방전선(FLN): 89년까지 1당독재를 했다. 서기장은 부알림 벤하무다(Boualem BENHAMOUDA).
4) 부흥당(나흐다): 온건파 이슬람 정당. 당수는 하비브 아다미(Habib ADAMI).
5) 사회주의협력전선(FFS): 90년에 재결성된 중도좌파 정당이다. 당수는 호친 아이트 아흐마드(Hocine Aid AHMAD)이다.
6) 민주문화연합(RCD): 89년 창설. 정교분리주의. 서기장은 사이드 사아디(Said SAADI).
7) 이슬람구국전선(FIS): 89년 창설. 이슬람원리주의를 부르짓는 반체제파. 92년 2월에 비합법화 되어 같은 해 4월 최고재판소가 이 사실을 확인했다. 의장은 압바시 마다니(Abbasi MADANI), 부의장은 알리 벨하지(Ali BELHADJI)이다.
【사 법】 사형제도가 있다. 183개 지역재판소, 31개 고등재판소, 1개 최고재판소를 갖춘 3심제를 취하고 있다. 92년 10월 테러 용의자를 재판하기 위한 특별범죄재판소와 국가치안재판소를 신설했으나, 특별범죄재판소는 95년 폐지되었다.
【지방행정】 전국이 48개 지역과 1539개의 자치체로 이루어져 있으며 자치체마다 각각의 의회를 갖고 있다.
Ⅵ. 외교
독립당시부터 비동맹 중립이 외교의 기본이었다. 반식민지주의, 반제국주의를 내세워 제3세계의 리더 역할을 해왔으나, 91년의 정변이래 최근에는 서구, 일본 등의 원조에 전면적으로 의존하는 경향이 짙어 예전의 아랍 강경파의 이미지를 벗어나 선진제국의 지원획득에 적극적이다. 아랍연맹, 석유수출국기구(OPEC)등에 가입했다.
【對중동관계】 이란 미대사관의 인질석방합의를 마무리 한 81년 경부터 강경파 노선을 변경했다. 82년 9월, 레바논에서 팔레스타인 게릴라 600명을 받아들였다. 이집트와는 이스라엘-이집트 평화조약조인이 있었던 79년에 단교했다가 88년에 복교했다. 무바라크 이집트대통령이 92년 4월 알제리를 방문, 원리주의의 육성에 협조해 대처하는 것에 의견에 일치했다. 시피 수상은 94년 7월 이집트를 방문했다. 9월 1일의 리비아 혁명 25주년 무술축전에는 제르알 대통령이 참석했다. 89년 2월, 북아프리카 5개국으로 결성된 아랍·마그레브연합 창설협정에 조인했다.
91년 1월의 걸프전쟁 돌입후에는 이라크 국민에 대한 연대를 표명하여 데이라크 무력행사용인을 결의한 유엔안보리와 미국을 비판했다.
알제리 정부는 모로코 경유로 인해 무기·탄약류가 원리주의 무장세력에 넘겨지고 있다며 모로코를 자주 비난하고 있다.
▼ 이란과 단교 … FIS가 승리했던 선거를 알제리가 무효로 했기 때문에 이란이 알제리 정부를 비난했다. 이것에 대해 알제리 정부는 FIS에 대한 이란의 지원이 [한도를 뛰어넘은 것]이라며 비난하고 92년 1월 주이란 대사를 소환했다. 11월에는 재이란 대사관의 인원을 감소시키겠다고 발표하여 이란도 똑같은 조치를 취했다. 93년 3월에는 내정간섭을 이유로 이란과 단교했다. 수단에 대해서도 원리주의자를 지원하고 있다고하여 주수단 대사를 소환했다. 그러나 2000년 10월 이란과 7년만에 국교를 회복했다.
【NPT조인】 덴브리 외상은 94년 9월, 유엔총회에서 연설을 통해 핵확산방지조약(NPT) 조인결정을 분명히 했다.
【對프랑스관계】 옛 종주국이었던 프랑스는 최대의 지원국이다. 83년 11월, 샤도리 대통령이 원수로서는 처음으로 옛 종주국인 프랑스를 공식방문했다. 프랑스는 對알제리정부 개발원조(ODA)에 5569만달러(89년)의 실적을 올려 최대의 지원국이 되었다. 93년 1월 듀마 프랑스외상이 알제리를 방문, 압델살람 수상도 같은 달 파리를 방문해 경제원조를 요청했다.
2000년 6월 14일 부티프리카 대통령잉 프랑스를 방문했다. 알제리의 국가원수가 프랑스를 방문하는 것은 17년만에 처음이었다. 대통령은 시라크 대통령의 답방을 요청했지만,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
【스페인 수상이 방문】 2000년 7월 17, 18일의 이틀간에 걸쳐 스페인의 아스날 수상이 알제리를 공식방문했다. 이슬람과격파의 테러가 빈발했던 92년 이후 유럽국가 수뇌들의 방문은 처음이었다.
【對구소련관계】 91년 6월, 게나지아 육군참모장이 방문했다. 야조흐 국방장관(당시)과 모이세에흐 참모총장(당시)이 군사면의 양국간 협력에 대해 협의했다.
【對美관계】 67년에 단교했으나 74년에 국교를 회복했다. 83년에 부시 부대통령(당시)이 알제리를 방문했다. 85년 4월에는 샤도리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하여 미국은 알제리에 대한 무기매매 금지를 해제시켰다. 중동평화회의의 실현을 위한 중동순방의 일환으로써 베가 국방장관이 91년 8월 5일, 알제를 방문하여 샤도리 대통령과 회담했다. 미국무성은 93년 12월 외국인에 대한 테러가 계속 일어나자 대사관의 축소를 발표했다. 클린턴 정권은 94년 5월 알제리에 대해 반정부세력과 대화를 통해 사태의 평화적인 해결을 역설했다.
Ⅶ. 경제
통제경제에서 시장경제로의 이행을 실시 중에 있으며 국내의 정정 불안에 더하여 물가상승, 실업문제, 거액의 대외채무 외에도 중공업 중심의 사회주의 경제의 실패로 경제는 최악의 상태지만 국제금융의 지원으로 이를 벗어났다. 세계은행에 의하면 93년의 국내총생산(G에) 성장율은 -1.7%라고 한다.
【재 정】 2000년 예산은 세입 1조 290억 알제리 디나르, 세출은 1조 1120억디나르
▼누적채무의 상환 연기 … 92년의 對外누적채무는 국가예산의 1.5배에 가까운 약 260억달러이다. 92년 3월, 국제은행단의 대표와 약 14억 5000만달러의 채무의 상환을 연기하는데에 합의했다. 9월에는 유럽공동체(EC), 국제통화기금(IMF)에서 5억달러의 융자를 받기로 합의했다.
▼긴축재정 … 압데살람 수상은 7월, 경제를 살리기 위해 수입은 식료품·의약품 등 생활필수품으로 한정하고 사치품의 수입은 금지하는 등의 긴축재정계획을 발표했다. 고자리 전 정권이 추진한 외국에서의 투자를 계속 받음으로써 국영기업을 민영화하시키겠다는 방침을 표명했다.
▼누적되는 적자 … 정부는 94년의 재정적자를 수입의 증가로 인해 20억달러 정도로 예측, 93년말의 누적대외채무는 260억달러가 되었다.
【경 제】 국영기업의 조업률은 30∼50%이다. 수출 주요품목으로 있는 원유의 확인 매장량은 약 90억배럴(85년)로써 세계 전체석유의 1.2%를 보유하는 세계 제15위의 석유 보유국이지만 외국기업의 철퇴가 계속되어 구조불황에 큰 타격을 주고 있다. 천연가스의 확인매장량은 약 3조 5000억입방미터(同)로 세계 제5위의 보유량이다. 둘 다 탄화수소공사(SONATRACH)가 독점하고 있다. 실업률은 30%를 초월한다. 94년 4월 통화 디나르를 9% 하락했다. 93년의 수출은 석유와 천연가스 등 약 83억달러, 수입은 기계, 식료품 등 약 94억달러였다. 국제통화기금(IMF)는 94년 5월 정부의 중기경제개혁계획을 지원하기 위해 10억 4000만달러의 신용공여를 승인했다.
정부는 95년 8월 이후 국영기업의 민영화를 추진하고 특히 석유-가스부문 합리화에 의해 97년에 대외채무는 5년만에 감소했다. 99년의 경제성장률은 3.5%. 99년의 수출은 석유, 천연가스 등 123억달러, 수입은 식료품, 기계류 등 89억달러로, 99년의 실업률은 30%, 인플레율은 2.6%로 추정된다. 99년말의 대외채무는 293억달러. 확인된 원유매장량은 85억배럴(98년), 96년의 생산량은 2억 9800만배럴. 세계 4위의 천연가스 수출국이기도 하다.
Ⅷ. 사회·문화
【베르베르인】 북아프리카의 원주민으로 베르베르어를 구사하는 베르베르인이 인구의 약 20를 차지하지만, 소수파로 독자적인 문화를 주장하고 있다.
【교 육】 아랍어의 공용어化를 중심으로 하는 민족교육이 진행되고 있다. 의무교육은 6살부터 15세까지 9년간이다. 90년의 식자율은 60.3%이다(97년). 알제대학 등 13개 대학이 있다.
【매스컴】 일간지는 FLN기관지인 엘무쟈히드(프랑스어), 앗-샤으브(아랍어), 독립계 신문인 엘와탄, 리베르테(프랑스어), 알-하바르(아랍어)가 있다. 국영 알제리통신(APS), 국영 알제리방송(RTA)이 있다.
Ⅸ. 군사
총병력은 12만 4000명(징집병 7만 5000명)이다. 병역기간은 육군의 경우 18개월(기본훈련 6개월, 민생봉사 1년)이다. 예비군은 육군이 약 15만명. 군부독립정책의 일환으로 89년 3월, FLN중앙집행위원회에서 군대표가 이탈했다. 준부대로 내무성 직할의 새로운 국가치안부대(2만명)와 공화국방위여단(1200명)을 창설했다. 그 외에 내무성 현병대 2만 5000명이 있다. 91년 국방비는 6억 6000만달러에서 94년의 국방비는 11억달러, 2000년 국방예산은 18억달러로 국방비의 부담이 커지고 있다.
【육 군】 병력은 10만 6000명. 군관구 6개 구가 있다. 기갑여단 2개, 기계화여단 2개, 기동보병여단 5개, 보병대대 31개로 이루어져 있다. T72, T62 등 전차는 총 1,006대, 장갑차 1,230대, 화포 약 1,100개가 있다.
【해 군】 병력은 7000명. 미사일을 탑재한 프리게이트함 3척, 잠수함 2척, 초계정 등 17척이 있다.
【공 군】 병력은 1만명. 미그 23, 수호이 24 등 전투기 214대, 무장헬리콥터 65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