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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 진도가 있다
문화관광 진도와 나의 자화상
시련은 짧고 경험은 위대하다.
“죽을 맛이다”
“압따 어쩌란 것이여?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콱 미쳐불랑가”
이게 요즘 진도 사람들, 농민들에 이어 상가상인들에 문화관계자들의 솔직한 심정일 것이다. 이미 서울처자가 다 되어버린 송가인이야 진도군홍보대사로 방송 프로그램에 단골손님으로 초청받지만 진도는 모든 연행이 그쳐버렸다. 장구소리가 없는 진도는 너무 고적하다. 대신 철마공원을 울리는 구호소리. “석탄재 절대 반대!” 진도항 배후지 매립토와 관련 외부 석탄재 도입을 원천적으로 저지하고 이를 허락한 진도군과 군수를 성토하는 메가폰 시위 목소리다.
콜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경기침체는 우리나라와 전세계적인 현상이기도 하다. 진도는 6년 전 세월호 사건으로 이미 3년상을 치른 경험이 있다. 진도 연안 바다에서 여객선이 가라앉았다고 해 상주를 자처해 반벙어리가 되어 가슴앓이를 해야 했던 진도사람들. 봉사활동에 나섰던 한 목사는 운명을 달리하기도 했다.
진도는 신명굿을 빼면 말 그대로 속되게 표현하면 시체나 다름없다. 셋이만 모여도 남도민요가 절로 흘러나오는 동네.
관광은 결코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김준 목포대 교수는 ‘관광만으로는 섬 활성화시킬 수 없다’라고 했다. 진도군이 재삼 되새겨야 할 대목이다.
진도군이 내세우는 관광자원은 사실 특별한 몇 곳을 빼고는 그다지 경쟁력이 뛰어나지 않고 붙들어놓을 메리트도 강한 편이 아니다. 운림산방, 관매도, 신비의 바닷길 중에 관매도는 여름 휴가철에 집중되며 신비의 바닷길 축제는 특정기간으로 제한되어 있다. 물론 국가명승지(제9호)로서 찾는 이들이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 운림산방(국가명승 80호)은 지난 2월부터 출입이 중지된 상태이다.
진도에서 장소와 계절 시간대를 벗어나 즐기고 참여할 수 있는 유일한 분야가 바로 굿이다. 굿은 선사시대부터 신성성과 산자들의 의식적 동화를 이끌어내는 고유한 의례이다. 진도에서는 굿 자체가 하나의 삶이요 문화다.
지금까지 진도민속을 소재로 한 정기공연은 진도읍 향토문화회관 대공연장의 토요민속여행을 들 수 있다. 오후 2시부터 3시 30분까지 공연이 펼쳐진다. 늘 진도아리랑과 강강술래로 휘날래를 장식한다. 금요일 저녁에는 임회면 상만리 여귀산 자락 국립남도국악원 진악당 금요국악공연이 있다. 이 두 곳은 현재까지 무료공연을 해왔다. 진도군은 올 하반기부터 토요민속여행 공연을 유료화 추진 중이라고 밝힌 적이 있다. 이도 당분간 유예될 것으로 보인다. 진도특산품 구입 상품권 등으로 대체하는 방법 등을 강구할 것이다.
어찌되었건 민속여행이 재개되어야 새롭게 선을 내보일 자랑거리와 운영방안이 제대로 평가받을 것으로 본다.
진도의 여러 면소재지에는 민속전수관이 많다. 임회, 지산, 의신, 고군 면소재지에 자리해 이용자들이 자주 찾아 기예를 닦는데 열중한다. 진도에는 국가지정 무형문화재가 강강술래(제8호. 인류무형문화유산), 남도들노래(제51호), 진도씻김굿(제72호), 진도다시래기(제81호) 등 4개나 된다. 여기에 진도북놀이, 진도만가, 남도잡가, 진도소포걸군농악, 조도닻배노래가 전남도지정 문화재로 모두 보존회가 결성되어 있다.
여기에 한민족의 노래라는 진도아리랑은 국가 무형문화재 제129호로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 향전 박병훈 옹이 진도아리랑보존회를 30년 넘게 이끌어오고 있다. 나는 오래 전부터 그분의 공로를 기려 당연히 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로 국가가 지정해주길 주장해왔다. 오늘의 진도아리랑의 학술적 문화적으로 체계화하고 보급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해 온 분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한 수많은 논문을 발표하였으며 향토사료를 발굴하기도 했다.
또한 진도읍 동외리 국가무형문화재전수관에서는 연중 수시로 특별 공연 및 발표회를 가진다. 그 앞에는 한국 대금국수로 추앙받은 박종기선생의 조형물이 서 있다. 사람만이 아닌 인간과 천연기념물 반려견이 펼치는 진돗개묘기경연도 관광객들의 인기를 끌어왔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코로나19로 인해 중단되었다. 벌써 두 달이 다 되어가고 있다. 진도는 자체 인구가 3만을 사실상 넘지 못한다. 이 중 노인인구 비율이 엄청나다. 그러다 보니 외지 관광객들이나 향우 방문자들이 아니면 상가 여관 음식점들은 텅텅 비게 마련이다. 더군다나 수년 동안 농산물 가격 폭락으로 농민들은 이중고에 시달리고 있다. 효자품목이라던 물김 생산도 계속 감소중이다. 읍내장에 가는 것도 주저하지만 아픈 몸을 진료받기 위해서는 병의원을 주기적으로 찾아가야만 한다.
진도의 관문인 녹진 입구는 미로처럼 얽혀 여행자들의 첫 인상을 흐리게 해준다는 지적이다. 명량대전의 학익진도 아니고 제갈공명의 팔진도에 빠진 듯 자칫 엉뚱한 곳으로 들어가 멤돌기도 한다. 이곳 망금산 강강술래터가 있는 곳 정상에 서남해 씨랜드마크를 자처하는 진도타워가 들어서고 2년 후에는 해상케이블카가 운용된다. 회전교차로 도입이 절실하다.
용장산성은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어 아무런 개발 시설을 할 수가 없게 되어 있다. 이곳에서 조사 발굴된 귀중한 유물들은 모두 목포대학교 박물관으로 옮겨가 있다. 진도군은 명량해저유물과 이곳 유물을 전시할 박물관 건립 유치를 정부에 건의해왔지만 아무런 응답을 얻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충남 태안군과는 차이가 나는 부분이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예술인들이 가장 많이 배출되었다는 진도군이지만 자치단체장이 향우 문화예술인들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 숙고해야 할 부분이다.
지금이야말로 진도관광 대계를 마련할 절호의 기회
진도군이 의욕적으로 시행해온 일주도로가 완공단계에 와 있다. 그러나 진도경제 활성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해줄 1,000원버스는 수렁에 빠져 아무런 진척이 없다. 이게 진도관광의 민낯이다. 뛰어난 특산물을 자랑하지만 체험장은 전무하다시피 하다. 대파갈아엎기가 구경거리는 아니지 않는가. 울금도 봄동도 그러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디에 있는가.
어떤 우여곡절을 거친다해도 진도항은 확장개항을 통해 진도의 또 다른 해상교통관문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관광은 빛이 나는 여행이다. 진도에서 서울을 만난다면 그 여행은 실패작이다. 진도에서 진도를, 한민족의 원형문화 진도를 만나게 하는 것. 호국항쟁으로, 유배로 이 바다와 산하의 역사를 간직한 진도에서 왜 진도사람들은 북과 장구를 들었으며 또 붓을 들어 그 산하를 품고자 했던가 공감하고 스며드는 그런 빛나는 여행을 선사해주는 길과 이야기를 만들어주어야 한다.
진도에는 송가인이나 조공례가 쎄부렀다고 누가 그랬다던가. 들녘의 명인들도 하나씩 사라져 간다. 여행은 사람을 찾아 떠나는 것이다. 그 사람과 나 사이에 흐르는 강을 기꺼이 건너가는 교감의 과정이다. 자연은 그 사람의 숨결이자 제3의 눈으로 존재한다.
우리는 진도에서 어떻게 충무공 이순신을 만나고 죽음의 바다를 건너온 배중손과 삼별초군과 그들을 껴안았던 진도해양인들의 꿈이 무엇이었는지 만나는 인연설을 증명해주어야 한다. 제주바다를 세 번이나 건너갔던 허 소치의 임 향한 단심, 대금국수 박종기 가계의 효친사상이 어떻게 젓대소리에 담아 흐르는지, 산과 바다는 그림이 되고 그 그림은 이상향의 꿈이 되는 윤희의 땅 진도.
수백명의 꽃다운 학생들이 숨진 바다는 두려움과 기피의 대상이 디어서는 안된다. 추모관은 반드시 지켜내야 한다. 세월호 아리랑도 한 대목 배우고 그날 전 세계의 봉사자들이 달려와 머물렀던 그 기억을 안고 순례의 길을 걷는 것. 우리 모두의 죄를 가슴에 새기며 산티아고의 언덕을 오르듯 팽목항을 찾는다해서 진도관광이 훼손될 일은 없을 것이다.
대명솔비치리조트가 개장되면서 새로운 명소로 자리잡았다. 남의 불로 밤에 기(蟹) 잡는다고 진도읍 버스킹 공연이 활성화되기도 했다. 운림산방 방문자도 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도 정지상태다.
진도군의 의욕적으로 500만명 관광객 유치 목표를 세웠다. 이 수치를 달성하는데 관광인프라 구축, 특히 군민과 종사자들의 친절 안내, 바가지 안쓰기, 안심하고 편안한 먹거리 잠자리 제공은 필수적이다. 그러나 늘 경제소득의 양적 성장보다는 부의 공정한 분배가 이뤄지고 지속적인 파급효과를 통한 ‘그 섬에 가고싶은’ 진도이미지를 구축하는 것이다. 조금 부족하더라도 서로 사랑하며 함께 사는 공동체 사회를 구현하는 이상향에 가면 나이와 신분을 따지지 않고 평등한 삶이 보장되는 기쁨을 얻게된다는 믿음을 주어야 할 것이다.
작년처럼 멀쩡한 바닷가에 해양쓰레기를 뿌려놓고 퍼포먼스를 펼친 진도군의 전근대적인 군사훈련같은 행동은 더 이상 반복되어서는 안된다. 나무 하나에도 정령이 깃들어 있고 미역과 톳나물이 붙은 갯바위에 영등신이 함께 하고 있음을 알려야 한다. 리비도와 기시감이 넘쳐나는 아리랑타령을 흔들며 신비의 바닷길을 바라보라.
우리가 너무 오래 동안 잊었던 만남과 약속을 기억하게 되리라. 뽕할머니는 바다로 온 마고선녀이시다. 이번 영등살에는 따님과 함께 진도 바닷길에 강림하시길. 거대한 인공유적만이 관광의 자원이 되는 것만은 아니다. 전의이씨 이덕리의 동다기가 실린 책자의 향기가 더 멀리 맥놀이를 친다.
진도사람들은 모두가 인간문화재 전수조교들이다. 장날 소전막걸리집을 가 보면 왜 진도의 저자에는 소리명인들이 그렇게 많은지 대파가 왜 그렇게 매운지, 국물 위에서 둥둥 떠다니는지 확인해 보시라.
보여주는 것이 아닌 어울림이 관광여행의 가장 바람직한 전형이 될 것이다. 앙코르와트의 오지를 탐사하고 잉카의 맞추피추산을 오르고 피라미드 관광을 가는 것도 좋은 여행이지만 9천년의 나를 씻김하는 그런 몽유진도로 떠나는 것 또한 절대 늦출 수 없는 대자유의 수행이 될 것이다.
섬에서 도를 찾는 시대가 온다
모든 이름은 비상명(非常名)이며 이미 걸은 길은 길(道)이 아니다. 21세기 참도(道)는 도(島)에서 찾아야 할지도 모른다. 정부는 작년 처음으로 ‘섬의날’을 제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올 여름철에나 되어야 섬 연락선이 대중교통수단으로 인정받아 도서민 요금혜택이 주어질 것으로 보인다. 진도의 많은 섬들은 수천년을 기다려 이제 조금씩 안개의 장막을 걷어내고 있다. 늘 그곳에 있었지만 언제나 새롭게 다가서는 새섬무리의 섬들이 더욱 푸르게 떠오르고 있다.
가사도는 가사를 벗어 고뇌의 바다를 덮고 훌훌 비상을 할 것이다. 지력산 동백사 전설이 산동백처럼 붉게 피어나 고사도 평사도 하의도까지 퍼져나갈 것이다.
도리산 아래 여미 항구에는 200년 만에 영국함대가 상선과 함께 찾아올 것이며 프랑스 여인이 말을 타고 조도대교를 건너올 것이다.
조도는 시인들의 사랑을 선택받은 섬이 많다. 섬은 그 자체가 하나의 서정시다. 언제나 내재율이 흐르는 해안 기미와 꽂이를 드나드는 파도는 섬나리꽃 향기를 키우는 부름소리이다.
보길도에서 태어난 강제윤 시인은 이미 볼매섬(관매도)에 꽂힌지 오래다. 볼뫼는 고어로 해당화를 뜻한다. 방아섬 등 볼뫼팔경은 그 이름만으로도 가슴을 설레이게 한다.
닻배놀래의 고향 라배도소식의 천병태 시인. 성산포의 아침을 노래했던 이생진시인이 시집 제목으로 삼았던 맹골도. 등대와 오래된 종이 걸려있는 섬. 그 옆 곽도(미역섬)는 다섯명의 곽부가 살며 목포MBC 김희준피디가 5부작으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도 했다.
상조도 섬등포는 진도 오성수시인이 연작 중이다. 여미는 벌써 두 권 시집을 낸 좁은도 시인 박인태. 그 뒤쪽에는 꽃게로 유명한 옥도가 있다. 출렁다리가 연결될 때가 언제일까? 장수사진을 찍으로 간 적이 있다.
이제 독거혈도를 노래하고 대마도를 씻어야 한다. 필자도 사자섬 광대도를 써 보았다. 고군면 금호도는 채정은씨 시인의 고향이다. ‘참깨를 털면서’와 ‘오오 광주여! 대한민국의 십자가여’를 외쳤던 5월의 시인 김준태선생의 어머니섬이기도 하다. 사실 그의 ‘참깨를…’은 그분의 할머니가 가을날 직접 보여주었던 농사가실 풍경을 그린 시이다.
6.25 전야 보도연맹 피해자의 한 서린, 구자도 멀리 갈매기섬(석가정시인의 진혼가가 있다). 나는 그곳에서 오래된 초분을 보았다. 김동춘 성공회대교수와 유골을 수습하기도 했던 갈매기섬(갈명도). 박문규 전 진도문화원이 ‘침묵의 전설’이라는 책을 냈으며 필자는 ‘망각의 편에 서겟습니까’ 르뽀를 보도하기도 했다.
<진혼시>
이승의 갈매기섬 반세기 전 떼주검들
깨어나라, 깨어나라 번뜩이는 눈빛들이 한 핏줄
치닫는 연민
울먹이고 있습니다.
절규도 아비규환도 삼켜버린 절망의 섬
삭은 뼈 피리소리 모발위에 술렁이고
허공중
바람처럼 구름처럼…
균열진 인토 위에 고해의 거센 물살
소용돌이 치고 싶은 벌거숭이 가슴들이
온전한 화해를 위한
흔적들을 찾습니다.(석가정)
쉬미항에서 찾아가는 나비섬 잠부도는 이미 개인에게 팔렸다. 새로운 섬 주인은 생태섬으로 꾸민다고 한다. 자연석이 거대한 탑을 이룬 불도는 아직도 탈고되지 않은 전설을 안고 오판주 진도문인협회지부장이 눈여겨 보고 있다. 목포가 낳은 위대한 극작가 차범석선생 부부가 찾아 살풀이굿(박종숙 인간문화재)에 맞춰 춤을 추었던 섬. 진도는 이제 섬관광의 시대로 들어설 것으로 기대된다.
산속의 섬들도 있다. 은자들끼리 서로 나누는 진도십승지. 도장기미. 피오동. 시향골. 운장골.
접포리. 얼음골.
민요기행을 왔던 신경림시인과 고은 시인, 곽재구시인이 걸었던 민요의 길. 인지리 조공례 명인, 돌에 짖이겨진 입술에서 매화꽃이 피었다던가. 전원일기 여배우와 살았던 진도출신 승려시인. 중앙대학교 동화작가 교수 박상률. 시인들이 사랑했던 진도의 섬들. 이제 띠섬(모도)과 보물섬 죽도. 은멸치의 장도. 수품항이 있는 접도. 대명리조트 앞 삼섬. 닭섬. 발가락섬. 손가락섬. 슬도. 동서거차도. 말관리 관청이 있었던 관사도, 화가의 섬 소마도, 진목도 갈목도 외병도 성남도가 또 다른 시인의 감성과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섬 속에 있는 오악을 든다면 금골산과 첨찰산 여귀산 지력산 철마산을 손꼽을 것이다. 물론 이 밖에도 봉수 돈대가 설치되었던 오봉산, 금갑연대봉, 조도 돈대봉과 도리산, 접도 남망산, 독굴산 노적봉, 석적막산인 동석산 등도 진도의 명산들이다.
정보홍수의 시대에 섬에 그저 살아가다보면 자칫 사람 또한 섬 무인도가 되기 십상이다. 자기 정체성을 잃게되는 순간 원주민들은 자연공원에 서식하는 잔나비가 되고 만다는 것을 끊임없이 경계해야 할 필요가 있다. 즐거워도 음란하지 않고 아무리 슬퍼도 몸을 상하며 자해하지 말 것. 공자도 귀신을 경하되 추원지 그것을 멀리 하라 했다.
그대가 외롭고 쓸쓸할 때 벽파나루를 가 보라. 그곳에서 멀리 동남쪽 대마도 방향으로 우뚝 서 있는 벽파진이충무공전첩비 앞에 숙연히 머리 숙이고 한 자 한 자 비문을 소리내 읽어보시라. 노산 이은상 선생이 글을 짓고 이곳 출신 서예대가 소전 손재형선생이 국한문으로 글씨를 쓴, 조국이 가장 위난할 때 겨우 열 두척의 배로 왜군 3백3십척을 이곳 명량 바다에서 물리치니 통쾌할사.
굿은 궁극적으로 사람을 ‘GOOD’하게 이끌어야 한다. 20여 년전 자운 곽의진 작가는 진도에서 굿(Good)이라는 잡지를 발간하기도 했다. 박주언(현 진도문화원장)씨는 오랑문화사에서 ‘신비의 땅 진도’를 펴냈다. 놀라운 일이었다.
문화관광여행은 참 나를 찾아서 익숙한, 온전한 나를 버리고 떠나는 아름다운 구도의 여정이다. 더 생소하면서도 더 이끌리는 그 무엇과 만나지 못한다면 발은 무겁고 눈은 더욱 침침해 질 것이다.
달콤한 신혼여행의 대상지로서 진도는 적극 추천받을 지역은 아닌 듯하다. 그러나 연인끼리 그것도 그 영혼에 대한 탐색의 여정에 들어선 사이라면 한 번 찾아가 볼 곳이라고 본다. 나는 늦깎이 결혼 첫 여행을 강진 다산초당에서 백련사 칠량 마량 보림사 운주사 등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아내의 치마는 질질 땅에 끌려 하피첩은 커녕 방걸레도 되지 못했다. 관자편에서 따왔다는 목민(牧民)에 길들이지도 못했다. 그래도 ‘당신의 바다’를 뒤늦게 첫시집으로 바쳤다.
여행은 화첩을 펴거나 한 편의 시를 읽는 것과 다름없다.
산촌 농부들과 후미진 작은 어촌 해초를 뜯고 고둥과 바지락을 줍는 아짐네들과 체온과 눈높이를 맞추는 일이다.
주말마다 어느 초가집에서 홍주를 내리는 고조리 부삭에 장작을 때는 현장에서 홍매화 향을 킁킁거리며 허 소치와 초의선사의 인연을 맡아보시기를 권한다. 대동여지도를 만들던 고산자도 슬그머니 시 한 수 들고와 앉을지도 모른다.
희귀한 풍경을 고급카메라에 담고 권세가의 기와집 주련을 애써 해석하며 안산이 어떻고 양택길지를 논하는 것만이 고상한, 의미있는 여행이 되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흔한 들꽃도 눈으로 즐길 수 있고 이 땅을, 이 섬을 오래 지켜온 이름없는 사람들에게 경배를 하듯 그 고마움으로 섬으로 갈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