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최이철의 사랑과 평화 원문보기 글쓴이: 봄비
타악기 솔리스트로 "프리음악" 의 대가였던 故 김대환(1933~2004)은 당시 신중현과 함께
퀘스쳔스에서 드러머로 활동하다 퀘스쳔스가 해산되자 새로운 그룹을 구상하고 있었다.
새로운 구상은 지미 핸드릭스 익스프린스(Jimi Hendrix Experience)나 크림(Cream) 같은
슈퍼 트리오 형태 였고 이렇게 해서 결성된 것이 김 트리오 였다.
신중현과 엽전들이 최초의 트리오 라는 통설을 뒤집는 사실이다.
이때 조용필과 함께 김 트리오의 일원이 된 인물이 뒤에 사랑과 평화 라는
한국 최장수그룹을 이끌게 될 최이철이다.
여기서 잠시 그에 대해 대해서도 소개해야 할 것 같다.
최이철에 대해 이야기 하려면 시점을 더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최이철은 중학교 때부터 미8군 무대의 "박활란 쇼" "데니스쇼" 등의 페키지 쇼에서 연주인 생활를 했다.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 모두 재즈 연주인이였던 집안의 "혈통" 이 크게 작용 했을 것이다.
특히 그의 작은 아버지 최상용은 트럼펫 연주자 이자 악단장이었다.
김대환의 조련 아래 조용필과 최이철은 기타와 베이스를 앞뒤로 메고 이를 번갈아 가며 연주하기도 했다.
조용필은 이시절에 대해 "최이철과 나는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고 회고한바 있다.
또한 그때의 일에 대해 두사람 모두 웃으면서 "엄청 무거웠다" 고 증언 했다.
최이철이 이런 저런 사정으로 김 트리오를 탈퇴해 자신의 그룹을 이끈 뒤에는 이남이가 그 역활을 이어받았다.
한편 최이철은 김 트리오에 합류하기 전 아이들(Idol)이라는 이름으로 첫 녹음을 남겼다.
아이들과 이음반을 뒤에서 후원해 준 인물도 김대환이었다.
김 트리오 출신의 인물들 조용필과 최이철의 성공 스토리는 1977년 이후에 찿아온다.
그리고 최이철에 이어 조용필이 떠난뒤 김대환 사단은 서서히 사라지고
김대환은 강태환 등과 함께 프리 재즈라는 새로운 길을 걷는다.
그렇지만 조용필,최이철,이남이 라는 거물급 음악인들을 직접 길러내고
그외에도 많은 후배들을 챙겨 그는 그룹사운드계에 대형(大兄)같은 존재로 남아 있다.
조용필과 최이철의 가요계 진출 1차 시도는 그리 성공적이지는 않았지만
이음반들은 마치 비전(秘典)이나 외경(畏經)을 보는듯한 흥미를 자아낸다.
조용필 음반의 경우 "Lead Me On" 의 번안곡 "님이여"는 영락없느 소울이고
불세출의 가수 조용필 특유의 절창을 들을수 있다.
그렇지만 "하얀 모래의 꿈" 이나 "일하지 않으면 사랑도 않을래" 는 어코스틱 기타의 연주가
중심이 된 넓은 의미의 포크송에 속하고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통기타 두대로 연주하고 있지만
악곡 형식과 멜로디 라인에서 트로트라는 것이 어렵지 않게 느껴진다.
조용필의 음반보다 먼저 나온 [아이들과 함께 춤을/꿈을 꾸리)의 음반도 장르가 모호하기는 마찬가지다.
비지스.닐 다이아몬드.후기 비틀스의 팝.그리고 지미 핸드릭스와 게스 후.의 하드하고 헤비한 록
심지어 한곡 가곡인 보리밭 등 뿌리를 달리하는 음악들이 하나의 음반에 수록 되어 있다.
"그사람 떠나가고" 와 "바람아" 같은 창작곡도 수록 되어 있지만
기타 신동이 재능을 꽃피우기 위해서는 갈길이 아직 멀어 보인다.
당시 조용필과 최이철(아이들)이 남긴 음반의 장르는 무었인가.
아마도 서양의 대중음악계였다면 팝 이라는 용어가 가장 적절할 것이다.
조용필의 음반은 특정 장르를 가리지 않고 "크로스오버" 하게 폭넓은 호소력를 갖는
대중적인 보컬리스트의 음반이고 .아이들의 음반은 각종 장르를 소화할 줄 아는 그룹의 음반이다.
그렇지만 이 음반들의 수록곡은 대부분 번안곡 이였고.
이제는 한국에서도 팝송을 번안하는 단계는 지나가고 있었다.
이들이 자신의 재능을 살려줄 적절한 작곡가와 제작자를 만나기 위해서는 몇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사랑과 평화,그리고 이장희 사단
사랑과평화 는 김 트리오와 더불어 이 시기 훵키와 퓨전의 영향이 강한
록 음악을 전개한 그룹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렇지만 김 트리오가 단명한 반면 사랑과평화는 지금도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고
"최장수" 그룹으로 불리고 있다.
간단히 말해서 사랑과 평화는 대마초 규제와 디스코 선풍을 견뎌내고 살아남은
거의 유일한 그룹사운드 1세대에 속한다.
사랑과 평화의 핵심이자 기타와 보컬을 맡은 최이철이 아이들.김 트리오.영 에이스.서울나그네를 거치면서
"불세출의 기타리스트로 인정 받아왔다는 사실은 어느정도 알려져 있다.
게다가 서울나그네 부터 최이철과 의기투합한 키보드와 섹소폰을 연주한
고(故) 김명곤이 1980년대 나미.이문세.신승훈 등의 편곡을 맡아
최고의 편곡자로 군림했다는 사실도 웬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이 시기 최이철과 김명곤은 한국 대중음악 사상 최고의 파트너십을 형성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한편 조용필과 이남이가 최이철과 돈독한 관계를 맺어 왔다는 사실도
그룹사운드의 역사에 조금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대충은 알고 있을것이다.
사랑과 평화가 대중적으로 성공을 거두기 이전 최이철과 그의 동료들에 관한 이야기는 매우 복잡하다.
중학생 때인 1960년대 말부터 미8군 무대에서 박활란 쇼.데니스 쇼 드의 페키지 쇼로 출발해
아이들과 영 에이스에서 "사이키델릭 사운드" ,김 트리오와 서울나그네에서 "고고 사운드" 를 거친 뒤
사랑과 평화 에서 "훵키 록" 이라는 양식을 정립하는 이야기는
이들의 음악을 들으며 꼼꼼히 분석해야 할일이다.
그 사이에 미8군 무대에서 박인수와 함께 핫 록스 라는 페키지 쇼를 했다는 이야기 등등은
전설적인 이야기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여기서는 사랑과 평화의 훵키하고 "뜨거운" 음악이 만들어 지는 요인을 차분히 정리해보기로 하자.
가장 중요한 요인은 그룹 멤버들 사이의 파트너십이였고
그 핵심은 최이철과 김명곤의 음악적인 파트너십이었다.
기타 신동 이자 동물적인 감각을 지닌 최이철과 음악이론에 해박하고 여러악기를 다루는
김명곤의 결합은 신중현과 엽전들 이후 산울림의 위계적인 것과는 다른 수평적인 파트너십이었다.
여기에 흑인처럼 노래 부르는 보컬이자 타악기 주자인 이철호,리듬파트를 탄탄하게 받쳐준 이남이와
드러머 김태흥,김명곤과 함께 키보드와 색소폰을 연주한 이근수의 결합은
한국 그룹사운드의 역사에서 최고의 결합이었다.
뒤에 합류한 송홍섭도 이때의 경험을 밑바탕으로 1980년대 한국 대중음악계에서
중요한 편곡자이자 프로듀서로 부상한다.
또 하나는 사랑과 평화가 나이트 클럽에서 팝송을 연주할 때
베이스 주자가 사르보( 정식이름 Savatore Catone)라는 이탈리아인이 었다는 점이다.
그는 미8군 무대를 거쳐 한국의 일반 무대에도 진출한 이탈리아인과 필리핀인으로 이루어진
프랑코 로마노 그룹의 일원이었다.
프랑코 로마노는 나미와 머슴아들이라고 불리던 머슴아들의 리더였고,국일관(종로3가)을 비롯한
나이트클럽 무대에서는 "프랑코 로마노 그룹" 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이탈리아인 네명과 필리핀인 한 명으로 구성된 이들은 비자가 만료되는 1980년초까지 한국에 머물면서
연주활동을 했는데 그 과정에서 "선진"음악을 국내음악인들에게 전수해주었다.
사랑과평화가 국내가요를 연주할 때는이남이와 송홍섭이 베이스를 연주했지만 팝송을 연주할 때는
사르보가 베이스를 맡아 슬랩"(Slap,이른바 초퍼 Chopper)주법을 시범해 주었다.
이들의 초기 힛트곡들인 "한동안 뜸 했었지" ,"어머님의 자장가" ,"뭐라고 딱 꼬집어 얘기할수 없어요"
"장미" 등이 모두 이장희의 곡이라는 사실 또한 주목해야 한다.
당시 발표된 음반에 적혀 있는 "이경애" 나 "이원호" 등의 이름은 당시 활동규제에 묶혀있던 이장희가
부인과 아들의 이름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이장희와 최이철의 만남은 최이철이 로열호텔 나이트클럽에서 영 에이스 라는 이름으로 연주할 무렵인
1974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후 최이철의 그룹은 이장희가 진행하던 DBS 라디오의 팝송 프로그램인
0시의 다이얼 에 고정 호스트 밴드로 출연 했고 이장희가 나현구사장으로 부터 독립한
1975년에는 북극성 이라는 이름으로 이장희의 새로운 백 밴드를 해주기도 했다.
사랑과 평화는 이장희가 대마초 파동의 시련를 겪은 뒤 구상한
새로운 비지니스가 만들어낸 걸작이였던 셈이다.
대마초 파동 이후 이장희에 대해서는 "반도패션" 매장을 운영한 것이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는 호구지책의 성격이 강했고 그가 더 많은 공을 기울인 공간은 따로 있었다.
그 하나는 락컴퍼니라는 프로덕션(기획사) 이였고 다른 하나는 광화문의 랩 스튜디오 였다.
락컴퍼니를 통해 그가 육성하려던 아티스트들이 이성희.최성원,이영재.김현식 같은
포크송 계열의 직계 들 뿐만 아니라 사랑과 평화.김태화.김양일 등..
그룹 사운드 계열의 방계 까지 포함하고 있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이장희 자신이 작곡하고 노래한 음악 스타일이 포크록 이였을 뿐만 아니라
그가 제작 하려한 음악 또한 포크와 록 양자 모두였다.
정리하면 락컴퍼니,반도패션,광화문 스튜디오가 이장희의 비지니스 모델이었다.
사랑과 평화의 두종의 음반 ,이승희의 솔로 데뷔 앨범,이영재,이승희,최성원의 3인 옴니버스 앨범
김현식의 데뷔 앨범,김태화의 솔로 데뷔 앨범 등이 1978년부터 80년 사이 이장희의 손을 거쳐 제작 되었다.
사랑과 평화는 대박이였고 나머지 음반들도 주목할 만한 작품들이었다.
물론 이 음반들은 랩 스튜디오가 아니라 서울 스튜디오 같은 제대로 된 장비를 갗춘 곳에서 녹음 되었지만
랩 스튜디오 에서의 사전작업이 없었다면 이 정도의 퀄리티는 갖추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장희의 사업은 1980년 8월의 이른바 제2차 대마초 파동으로 와해 되었다.
사랑과 평화의 모든 멤버들을 비롯해 이장희 사단의 구성원들이 다시한번 구속 되었다.
이장희는 "사업이 부도났다" 는 공식 입장을 남기고 미국으로 대피 했다.
이장희의 공식 입장 에 대한 사실관계가 무었이든 간에 두 차례의 대마초 파동이
이장희의 꿈을 산산조각 냈다는 것은 확실하다.
이장희는 그 뒤 로스엔젤레스에서 라디오 코리아 라는 방송국을 운영하면서 인생의 전기를 맞았다.
그가 음악인 으로 적어도 음악 비지니스맨으로 남아 있었더라면 한국의 음악문화가 더 풍요로워졌겠지만.....
위에서 언급한 사르보는 사랑과평화에 가담하기 전 송창식이 월급을 주고 데리고 있던 사람이다.
포크송 가수가 훵키베이스 주자를 고용했다는 사실은 당시 언더그라운드의 상황을
자세히 모른다면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이장희가 광화문 스튜디오를 운영한 것처럼 송창식도 원효로 스튜디오를 운영하면서
국내최고의 그룹 "석기시대" 라는 자신의 백 밴드를 결성했다.
"석기시대" 는 이호준.조원익.배수연 등 오리엔트 프로덕션의 역촌동 시절 부터 활동한 인물들뿐만 아니라
1975년부터 라스트챤스에서 기타리스트로 활동하며 이름을 날린 김석규가 연주를 맡고 있다.
당시 송창식이 마이하우스 라는 나이트클럽에서 밤일 까지 불사 했다는 점은
새로운 그룹의 구상을 고려한다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상의 사실을 종합해보면 이 시기 음악인들(가수,작곡가,연주인) 사이에 장르를 불문하는
복잡한 이합집산이 발생했음을 다시 한번 확인 할수 있다.
지금 논하고 있는 두 사례 ... 이장희와 최이철의 만남.송창식과 김석규의 만남은 포크송과
그룹 사운드에 속하는 일급의 싱어송 라이트와 일급의 연주인들 사이의 만남이었기 때문이다.
대마초 파동으로 커다란 시련을 맞은 상황에서도 소리 소문 없이 암중모색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복잡함을 덜고 싶다면 이런 이합집산의 거점을 서라벌 레코드와 서울 스튜디오로 좁히면 조금 단순해진다.
서라벌 레코드는 자체 제작을 하기도 했지만 이홍주(대성음반).박성배(킹 레코드).박영걸(노만기획)
그리고 뒤에는 김영(동아기획) 등의 제작자들의 음반을 대명제작 했고
이장희와 락컴퍼니 역시 서라벌 레코드의 상호를 빌려서 사용했다.
한편 동부이촌동의 서울 스튜디오는 본격적인 멀티트랙 레코딩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였다.
그 결과 서울 스튜디오는 1970년대 말부터 90년대 초까지 한국의 음반 레코딩의 메카로 자리잡았다.
그래서 추구하는 음악과 연주하는 공간은 달라도 이곳에 오면
녹음하러 온 뮤지션들끼리 자연스럽게 교류할수 있었다.
물론 다양한 만남과 이별에는 녹음 스케줄에 따른 우연도 많이 작용했겠지만...
아무튼 서울 스튜디오에서 녹음되고 서라벌에서 발매된 음반은 이전 시기의 음반에 비해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그 가운데 하나인 사랑과평화의 음반이 획기적이라면 그룹 사운드의 음반으로서는
처음으로 멀티트랙 레코딩을 제대로 구사햇다는 점이 포함되어야 마땅하다.
여러 겹의 오버더빙을 통한 무성하고 다채로운 사운드를 만들어 내면서도 각 악기에 뭍히지 않게
잘 혼합된 사운드가 창조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사랑과 평화는 1970년대 그룹 사운드의 프로페셔널리즘을 통해
디스코 열풍(즉 유행의 변화)를 견뎌냄과 더불어 기술의 발전에도 적응한 존재였다.
비슷한 시기에 같은 장소에서 녹음된 산울림의 음반 사운드가 파격이지만 미완성이였다면
사랑과 평화의 음반 사운드는 하나의 전범이자 완성이었다.
사랑과 평화가 직업적인 그룹사운드, 즉 밤무대 그룹 사운드로서 음반가와 방송가에서 파란을 일으킨
마지막 경우라고 할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때 이후 사랑과 평화만큼 영향을 미친 직업 그룹 사운드는 찿아 보기 힘들다.
이들이 전성기 때 후배 음악인들에게 준 영향은 넓고도 깊다.
김광민.한상원.정원영.박성식.장기호 등 한국 대중음악의 연주계를 주름잡는
"재즈" 혹은 "퓨전" 음악인들이 이들로부터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퓨전이나 재즈가 어느 날 갑자기 나온 것이 아니라 밤무대를 전전하던 사람들이 "춤 추기 좋은 음악" 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주:본 글은 "한국 팝의 고고학 1970년" (신현준) 에서 인용 및 발체한 것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