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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용주사 원문보기 글쓴이: 최재효
달빛 소나타(終)
- 여강 최재효
경동물산의 박 사장에게 내 명의 모든 것을 넘겨주고 나는 다시 수도권 있는
찜질방을 전전하는 처량한 시세가 되었다. 가지고 있던 돈도 거의 다 떨어져
겨우 밥 먹기 급급한 동생들에게 10만원, 5만원을 계좌로 받아 한달 두 달 생활
하기도 했지만 그렇게 살아가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서울 어느 찜질방에서 먹고
자면서 때밀이로 두 달을 버티기도 했지만 나의 어설픈 때밀이 실력으로는 더
이상 지낼 수 없었다. 그동안 사회에서 사귄 친구들을 찾아가 내 전후 사정을
이야기 하면 밥 한 끼 사주고 다시 찾아오지 않았으면 하는 눈치였다.
어떤 친구들은 어떻게 나에 대한 소문을 들었는지 내가 전화를 걸 때마다
지방에 있다는 말만 되풀이 하면서 미안하다는 말로 전화를 끊어버리곤 했다.
시골서 어린시절 동문수학했던 친구들 역시 사회 친구들과 마찬가지였다.
한번은 조그만 건설회사를 운영한다는 친구를 찾아가자 무척 반기더니 내가
사업에 실패하여 집을 나와 떠돌이 생활을 한다는 말을 듣더니 안면을 바꾸며
도리어 나에게 사업이 안 된다며 죽는 소리를 했다.
그 친구 사무실을 나올 때 그 친구는 거지에게 동냥을 주듯 돈 만 원든 봉투를
내 주머니에 넣어 주면서 잘 해보란 말을 하며 비웃는 듯한 얼굴 표정을 지었다.
나는 이틀을 굶은 처지라 친구가 준 돈 만원이 오랜 가뭄에 단비 같았다.
어느 날 찜질방에서 낮잠을 자고 있는데 내 휴대폰이 울려 액정판을 보니
서울이 발신지로 되어 있었다. 받을까 말까 망설였으나 혹시 친구나 친인척일
수도 있다는 판단이 들었다.
“안녕하세요? **은행 대출부 **대리입니다.”
“네에? 어디라고요?”
“**은행이라고요. 서해물산 대표이사님 맞으시죠?”
“그런데요?”
“이달이 만기인 대출금 건에 대하여 말씀드리려고요?”
“네에? 대출금이라니요?”
“대표이사님 아니세요?”
“맞는데요?”
“사무실로 아무리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으시기에 대표님 휴대전화로 연락을
직접 드리는 겁니다. 작년에 저희은행에서 대출 해 가신 건 이 달이 만기인데
연장하시려면 이 달치 이자를 납부하시고 10전에는 연장신청을 하셔야
합니다.“
나는 은행대리의 전화를 받고 다시 한번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우리 서해물산에서 얼마를 대출받았지요?”
“아니 대표이사님께서 모르시면 어떻게 해요? 3억원 대출 받으셨잖아요?”
“네에? 삼억 원이요?”
나는 내 휴대전화에서 흘러나오는 은행직원의 목소리가 저승에서 들려오는
염라대왕의 목소리 같다고 생각하고 휴대전화를 껐다. 눈앞이 캄캄해지고 속이
울렁거렸다.
‘아아, 이럴 수가 이놈들이 나를 죽이기 위하여 철저하게 준비를 했구나! 그 동안
나는 무엇을 하였다는 말인가? 나는 눈뜬장님이었단 말이더냐? 세상에 나같이
어리석은 어디 있단 말인가? 하나님 아버지시여! 성모 마리아님이시여, 저를 세상
에서 내치실 작정이십니까?’
누워있었으나 잠이 오지 않았다. 은행에서 채권추심에 들어 갈 경우 신용평가
기관이나 채권추심대행업소의 의뢰를 받은 해결사들이 나를 찾아내기
위하여 혈안이 될 것이 뻔했다. 나는 아내와 아이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의무감
으로 아내와의 합의이혼을 결심했다.
“여보, 도대체 얼마를 당신 명의로 대출받은 거예요?”
“미안하오. 나도 모르겠소. 그놈들이 나를 팔아서 얼마를 대출받아 가로 챘는
지 나도 정확히 모르오. 미안하오. 이 방법 밖에 해결책이 없는 듯 하오. 얼마나
갈지 모르지만 당신이 아이들의 친권자로 해놓고 나와 합의 이혼한 것으로 해줘
요. 아이들과 당신의 안전을 위하여 어쩔 수 없소. 내 심정을 이해해 주기 바라오.“
아내는 나의 암담한 말에 통곡하였지만 나는 아내를 달랠 기력조차 없었다.
법원에 합의 이혼청구서를 내고 나는 아내와 26년간의 결혼생활을 정리했다. 나의
몰골을 본 아이들은 말없이 울고만 있었다.
“정말로 미안하구나, 아빠가 못난 탓에 너희들이 고통을 하는구나. 정말로 내가
아비로서 너희들에게 할 말이 없다. 앞으로 아빠는 오랫동안 못 보게 될 것 같다.
엄마 말씀 잘 듣고 엄마 속 썩이지 마라.”
나는 아이들을 모아 놓고 마치 유언을 하듯 아비로서 앞으로의 임무를 포기하는
속 쓰린 말을 하였지만 아이들은 그냥 집에서 함께 살자고 했다.
“아빠, 그냥 저희들이랑 함께 지내면 안 돼요?”
큰 딸이 울면서 애원하였지만 나는 쓸쓸히 돌아섰다.
내가 이혼을 하고 난 뒤 며칠 안돼 매일 같이 내 휴대전화에 대출금 납부를
독촉하는 문자 메시지가 찍히거나 나를 찾는 전화가 빗발쳤다. 나는 아예 전화
를 꺼버리고 공중전화를 이용하여 아이들의 소식을 물었다. 분명히 나를
찾기 위해 채권 추심기관에 고용된 해결사들이 내가 갈만한 곳이나 친인척
또는 친구들을 찾아다니고 있을 것이 뻔했다.
나는 수도권에서 벗어나 충청도 지역으로 내려가 일일 잡부로 일하거나 찜질방
에서 먹고 자면서 어설픈 때밀이 생활을 하면서 세상을 비관하기 시작했다. 하루
한 끼라도 찾아 먹는 날이 거의 없었고 담배와 술로 살아갔다. 아이들과 이혼한
처의 소식이 궁금해도 참기로 했지만 한두 달 지나자 궁금해서 견딜 수 없었다.
그렇다고 숨어 지내는 아빠로서 아이들에게 떳떳하게 나서지 못하는 심정이 오죽
하랴. 나는 서서히 죽음의 유혹을 받기 시작했다.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언제까지
안고 살아 갈 수는 없었다.
보름달이 탐스럽게 떠오르는 어느 날 봄밤, 나는 소주 네 병을 사서 산에 올라갔
다. 소주를 다 마시고 약을 먹으려고 각오를 했다. 소주 네 병을 다 마시고 막상
약을 입안에 털어 넣으려고 했지만 고향의 노모와 아이들의 얼굴이 아른 거렸다.
“아아, 죽는 것도 마음대로 안 되는구나. 아버지 어머니, 이 불효자식 어떻게
해야 합니까?
으으으 으흐흐흐.........”
산에서 불어오는 밤바람만이 피폐해진 내 가슴을 달래 주었다.
‘이놈아, 그런 일 가지고 사내놈이 죽으려고 하다니, 말도 안 된다. 네가 그렇게
허무하게 세상을 끝내면 안돼. 넌 장남이고, 너를 바라보는 네 자식들과 동생들을
생각해서라도 절대로 죽어서 안돼. 마음 다부지게 먹고 다시 일어나야 한다. 절대
로 약한 마음먹지 말거라.’
달 속에 아버님의 노한 얼굴이 어려 있었다.
‘그래, 한 번 더 기회를 찾아보자, 이대로 허무하게 죽을 순 없어 한 번 더 용기를
내보는 거야.’
다음 날 나는 용기를 내서 이력서를 가지고 내가 공직에 있을 때 도와 줬던
변호사 들을 찾아갔다. K, S변호사는 나의 취직에 난감을 표하였지만 다행히
L변호사는 나를 형사사건을 담당하는 사무를 맡겼다. “고맙습니다, 변호사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한달 정도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하면서 점점 마음의 안정을 찾아갔다. 낯에는
변호사 사무실 직원으로 일하면서 밤에는 찜질방에서 숙식을 해결하였다.
한달이 지나고 두 달째 접어들자 내가 출장간 사이 동료직원으로 부터 전화가
왔다.
“최형, 사무실에 들어오지 마, 웬 깍두기 세 녀석이 찾아와서 최형이 어디
있느냐고 찾아내라며 행패를 부리고 있어. 변호사님이 난감해 하시는데 큰일
이네. 잠시 들어오지 말고 어디 숨어 있어.“
나는 이 땅에 발을 붙일 수가 없었다. 봉급도 받지 못하고 나는 그 길로 다시
지방으로 내려가 찜질방을 전전해야 했다. 낮에는 잠을 자고 밤에는 술로 원통한
마음을 달랬다.
내가 아내와 이혼하고 객지생활을 한지 6개월 접어들 무렵 속이 더부룩하고
음식을 먹어도 소화가 안 되는 고통이 찾아왔다. 약국에 가서 소화제와 진통
제를 사먹으면 그런대로 괜찮아졌지만 증세는 계속 이어졌다. 생활비가 떨어
질 때마다 동생들과 직장에 다니는 큰 딸에게 마지못해 구걸하다 시피
용돈을 은행계좌로 받아 섰지만 그것도 더 이상 할 수 없었다.
‘아, 이대로 무너져야 하는가? 내 인생이 이렇게 허무하게 마무리 돼야 하나?’
나는 또 다시 죽음의 강한 유혹을 받기 시작했다. 매일일 굶다시피 하면서
오로지 니코틴과 알코올의 힘에 의존했다. 8월 중순이 되면서 아랫배가 점점 불러
왔다. 그러나 개의치 않고 이곳저곳을 방랑하면서 김 삿갓 흉내를 냈고 경치 좋은
곳이 나타나면 술병을 들고 먼 하늘을 쳐다보면서 눈물을 뿌렸다. 어떤 날은 술에
취하여 다리 밑에서 잠을 잔 날도 있었다.
배가 고파 마을에 들어가 밥을 얻어먹기도 하였지만 곧 토해버리고 말았다. 계속
해서 아랫배에 거북하고 앉아 있기도 불편했다. 약국에서 증상을 말하면 엉뚱한
소화제나 이름을 알 수 없는 약을 지어주면서 빨리 큰 병원을 찾아보라고 하였
지만 수중에 돈도 없었고 의료보험카드도 없었다. 허공에 떠 버린 인생에게 세상
은 너무 야박했다.
아랫배의 통증으로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막내 남동생에게 의료보험카드를 빌려
달라고 하여 병원을 들려보려고 하였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할 수 없이 아이
들이 살고 있는 집에 들려 옷가지를 챙겨 노모가 계신 여주로 내려갔더니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린 나를 잡고 통곡을 하셨다.
“네가, 내 아들 맞냐? 어떻게 그 잘생긴 얼굴이 이렇게 망가졌단 말이야?
아이고, 조상님들도 무심하시지 장손을 이렇게 만들어 놓으시다니요. 어이구,
흐흐흐........ 내가 너무
살아 못 볼 것을 보는구나. 어이구, 흐흐흐 흐흐.......“
나 역시 늙으신 어머님을 잡고 통곡을 하였다.
“어머님, 죄송합니다. 이 못난 자식을 용서 하세요. 으흐흐흐.......”
머리가 백발이 다된 어머님을 잡고 나는 그동안 서러웠던 가슴을 비웠다. 실컷
울고 났더니 가슴속이 조금은 후련했다.
바로 아래 남동생의 의료보험카드로 읍내에 있는 병원에 갔더니 의사는 나를
이리저리 진찰하더니 고개를 좌우로 갸우뚱거리며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얘, 의사가 뭐라고 하던?”
“형님, 증세가 이상하다고 큰 병원으로 모시고 가래요.”
동생은 얼굴이 굳어있었다. 다시 동생의 차를 타고 경기도 광주의 큰 병원에서
종합진찰을 해보았다.
“의사가 뭐라고 하니?”
“......”
동생은 굳은 표정이 되어 말이 없었다.
나는 나의 병세가 심각하다는 것은 짐작했다.
“형님, 입원하셔야 겠어요. 간이 심각할 정도로 손상을 입었답니다.”
“그으래?”
“이 길로 바로 제 처남이 있는 부천 S종합병원으로 가시자고요.”
10월 말경 나는 S병원에 곧 바로 입원을 하였고 이틀 동안 정밀 종합진단을 받았
지만 누구도 내가 간암말기란 사실을 말해주지 않았다.
“여보, 이 병원에 있으면서 천천히 치료를 받아봐요. 의사선생님이 그러는데 잘
만하면 간 기능이 회복 될 수 있대요.”
그러나 나는 아내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내가 입원한 이후로 딸아이들이 차례
로 와서 밤새 내 병상을 지켰다. 그러나 나는 하루가 다르게 노인이 되어갔다.
머리가 빠지기 시작하고 음식물을 전혀 넘기지 못했다. 거울 속에 있는 나는 예전
의 내 모습이 아닌 모르는 노인의 얼굴이었다. 나는 사업을 시작하기 전부터 집
근처에 있는 성당을 다녔다. 컨디션이 좋아지면 아내의 부축을 받아 간신히 걸어
서 병원 좌측에 있는 성모 마리아상을 찾아 기도를 올렸다.
“성부, 성모, 성자시여, 제가 이렇게 병든 몸이 되어 당신을 찾았습니다. 집
나간 탕자가 된 모습으로 당신을 찾았습니다. 용서 하여 주소서. 이제 저는 얼마
남지 않은 듯 합니다. 그동안의 제 죄를 사하여 주시고 불쌍히 여기시어 제 어린
것들을 보살펴 주소서. 제가 너무 욕심을 부린 것 같습니다. 이제 늦었지만 깊이
반성하며 당신께 진심으로 회계하나이다. 이 어리석은 양을 당신의 아들로 받아
주소서. 아멘.”
내가 흐느끼듯 기도를 하고 있는 곁에 아내는 눈시울을 붉히며 손수건을 꺼내
들고 있었다.
“여보, 미안하오. 당신과 한 세상 잘 살아 보려고 했는데......”
나는 매일같이 하나님께 매달렸다. 하루하루 나의 기력이 쇠해졌고 기억도 가물
가물해갔다. 병원에 누워있는 것이 고통스러워 아내에게 단 하루라도 좋으니 집
으로 가자고 했다. 그러나 내가 들어가 누울 집이 없었다. 손바닥만 한 삭흘세
집에 아이들과 아내 넷이서 간신히 살아가고 있는 처지에 내 한 몸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이 없었다.
“집으로 가요. 당신 말대로 단 하루라도 편히 쉬고 싶다면 집으로 갑시다.”
아내는 두 아이들을 아이 이모네로 보내놓고 나를 집으로 데리고 갔지만 내
마음은 편치 않았다. 집에 온 뒤로 통증이 너무 심해 나는 견딜 수 없어 나흘 만
에 다시 병원에 입원했다.
“최 선생님, 힘내세요. 용기를 가지시고요.”
아침저녁으로 나의 담당 의사는 나에게 용기를 주려고 하였지만 나의 통증은
점점 더 해만 갔다. 내가 병원에 입원 한지 2달 쯤 되었을 때 나는 일어나는 것
조차 타인의 힘을
빌려야 했다.
아내와 아이들은 나에게 듣기 좋은 말만 하지만 나는 나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
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밤이면 불면증에 시달렸다. 병원에 입원한 뒤로 단 하루도
편안하게 잠을 자지 못했다. 낮이면 소문으로 내가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소식을
들은, 평소 나와 인연이 있는 지인들과 친인척들이 한두 명씩 찾아왔다. 그들은 내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나에게는 쾌차하라는 말을 하였다.
그때마다 나는 ‘곧 일어나야지 하는 말로 응수를 하곤 했지만 뱃속에서는 계속
해서 통증이 전해 졌다. 늘 이름을 알 수 없는 약들이 혈관을 통해 내 몸속으로 들어
갔지만 그 약들이 떨어지면 곧 통증이 엄습했다. 나는 이제 나의 긴 여정(旅程)을
정리 할 때가 왔음을 감지하고 가까이 사는 막내 남동생을 불렀다.
“얘야, 잘 들어라. 이게 신체기증서약서란다.”
“형님, 무슨 말씀이세요?”
“내가 죽으면 나를 이 병원소속 의과대학에 기증하려고 한다.”
“형님......”
“여보…….”
내가 병상에서 간신히 일어나 병원에 비치 된 신체기증서약서에 나의 정보들을
또박 또박 써 나갔다. 아내와 동생은 눈물을 훔치며 아무 말 없이 바라보고 있었
다.
“만약이야, 만약을 위해서 작성한 것이니까 당신은 이것을 병원 측에 전달해 줘
요. 그리고 막내야, 너 하루 정도 시간 좀 내 줄 수 있겠니?“
“언제요?”
“내일 도 좋고 모레도 좋은 데 가급적 빠르면 좋겠구나.”
“어디 가시게요?”
“어젯밤 꿈에 아버지가 보이더구나. 돌아가실 때 보다 더 여위신 것 같더라.
아버님이 나에게 손을 흔들며 웃으시더구나. 뭐라고 말씀을 하시는데 무슨 말씀
인지 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어. 아버님을 만나야 겠다.“
“형님, 내일 제가 시간을 내 볼게요.”
“그래, 고맙구나.“
다음 날 오후 나는 병원측에 알리지 않고 팔에 링거 주사바늘을 꽂은 채 차를
타고 아내와 동생부부를 데리고 고향 여주로 내려갔다. 영동고속도로를 달리는
차창 밖으로 잎사귀가 모두 떨어진 앙상한 나무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
앙상한 나뭇가지들은 살이 모두 빠져 버린 나의 팔과 다리 같았다.
“얘야, 어머니에게는 알리지 마라. 괜히 내가 아버지 산소에 간다는 소식을 들
으시면 노인네가 산소에 오실지 모르니, 고향사람들 모르게 다녀오고 싶구나.”
아내는 뒷좌석에 비스듬하게 누워있는 나를 위하여 차가 여주에 도착 할 때
까지 쉬지 않고 기도를 올렸다. 아내의 기도소리가 내 가슴을 어루만져 주었고
나는 마음이 안정되는 기분이었다.
“여보, 저기, 주막거리에서 아버님께 올릴 약주술하고 안주 좀 사와요.”
나를 태운 차가 50년 넘게 다니 던 선산, 청마루에 도착 했다. 청마루에는 고조
할아버지와 할머니 내외분을 합장 한 산소와 할머님 그리고 10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 산소가 있었다.
“애야, 나 좀 부축해줘라.”
나와 일행은 눈이 소복이 쌓인 할아버지와 할머니 묘소에 절을 한 뒤 아버지
산소에 엎드렸다.
“아버지, 이 못 난 자식 왔습니다. 어이 으흐흐 흐흐흐....... 이 어리석은 놈이
죽을 때가 다 되서 아버지를 찾아 왔습니다. 아버지, 사람답게 살아보려고 했는
데 제가 생전에 지은 죄가 많아 이렇게 되었나 봅니다. 으 흐흐흐흐흐.......“
나는 아버지 묘소에 엎드려 폭포처럼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여보오……”
“형님……”
아내와 동생이 너무 울면 안 좋으니 그만 울라고 했지만 나는 복 받쳐 오는 서러
움을 참을 수 없었다.
“아버지이……. 이놈이 죽일 놈입니다. 이 놈이 너무 어리석어 아버지가 물려
주신 모든 재산을 그만 이름도 모르는 자들 손에 넘겨주고 말았습니다. 죄송합
니다. 아버지, 으 흐흐흐......”
“형님, 그만 일어나세요. 병원으로 돌아가셔야지요.”
“여보, 이제 어서 일어나요. 나중에 당신 상태가 좋은 면 다시 와서 인사드리면
되잖아요.”
‘나중에? 지금 돌아가면 나는 영영 아버지를 뵐 수 없는데 나중에 언제?’
“나, 이대로 내버려 두어. 여기서 죽더라도 이대로 그냥 놔둬. 으흐흐흐......”
“여보오......”
대낮에 아버지 산소 앞은 나로 인하여 울음바다가 되고 말았다. 멀리 기러기
한 쌍이 슬픈 울음소리를 내며 여강쪽으로 날아가고 초승달이 동녘에 살며시 얼굴
을 내밀었다. 언젠가 밤에 아버님 산소에 왔을 때 둥근 달이 떠오르면서 햇살보다
더 눈부신 은색의 달빛이 아버지 선산을 비추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버지의
산소는 소복하게 쌓인 은빛으로 하얗게 물들어 나는 그 신기한 모습에 한참을
앉아서 일어날 줄 몰랐었다.
‘그때의 둥근달은 어디로 갔는지? 지금은 한 많은 청상(靑孀)의 눈썹보다 가느
다란 초승달이 나를 맞이하고 있구나. 달님도 내 심정을 알고 있는 것일까?’
해가 대포산으로 넘어가자 한기(寒氣)로 몸이 으슬으슬 떨려 왔다. 나는 다시
한번 아버지에게 큰 절을 올렸다.
“아버지, 이 불효자식 저승에서 다시 인사 올리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흐흐흐흐흐.......”
“형님, 어서 가세요 상태가 더 악화 되면 안돼요.”
막내 동생은 내가 걱정이 되는지 차에 탈 것을 재촉했다.
“할아버지, 할머니 이 못난 손자를 꾸짖어 주세요.”
나는 병원으로 돌아오면서 심한 통증으로 잠시 정신을 잃었다. 내가 눈을 떴을
때 큰 딸이 내 손을 꼭 쥐고 있었다.
“애야, 지금이 몇 시니?”
“아빠, 깨셨어요?”
“그래, 집에 들어가 자지 않고?”
“새벽 5시에요.”
“오늘이 며칠이니?”
“2월 10일이에요.”
“애야, 내일 네 작은 아빠 좀 불러줄래?”
팔에 꽂힌 링거바늘을 타고 노란액체가 한방 한 방울 떨어졌다. 약이 거의 바닥
을 보이고 있었다. 약이 다하면 나의 생명도 다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정신은
맑았으나 통증은 약간 일정한 간격을 두고 전해 졌다.
‘아, 이렇게 내 53년의 인생이 마감하는 구나. 너무 억울하고 원통해서 어떻게
저승으로 떠난단 말이냐? 어떻게?‘
이제는 눈물도 메말랐는지 나오지 않았다. 오늘의 이 현실이 꿈이었으면 얼마나
좋으련만 그러나 현실은 이렇게 죽음을 앞 둔 내 병든 영혼을 빨리 저승으로
데리고 가려고 할 뿐, 세상 모든 사람과 신들은 나에게 등을 돌렸다. 다음 날 오후
막내 동생이 병실을 찾아왔다.
“형님, 저녁에 찾아오려고 했는데.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예요?”
“나 좀 휠체어에 태우고 이 건물 뒷동에 좀 가자.”
“뒷동이요?”
“그래. 어서 일으켜다오.”
동생이 미는 휠체어에 앉아 병원 뒤편에 있는 장례예식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그곳 관계자와 장례절차에 다하여 이것저것 꼼꼼하게 물어보고 장례예식장
을 두루 살펴보았다. 조만간 나의 영정사진이 안치 될 장소를 가리키며 동생에게
꽃이 너무 많아도 문상객들에게 욕을 먹는다며 장례식을 검소하게 해야 한다고
주의를 주었다. 나의 말을 듣고 동생은 놀란 얼굴을 하고 연신 손수건을 꺼내
눈가를 훔쳤다.
장례예식장앞에 나목(裸木)이 된 은행나무는 겨울의 하늘을 배경으로 을씨년
스럽게 서있고 찬 바람아 휘감고 가도 잎사귀가 없는 은행나무는 멀뚱히 하늘만
쳐다 볼 뿐이었다. 나는 서서히 한 그릇 나목이 되어가고 있었다. 비록 나무처럼
가을까지 화려하고 원숙한 삶을 살다가지 못하지만 피우다만 나뭇잎을 떼어버리
고 스스로 겨울나무가 되어가고 있었다. 마음을 비우고 나의 장례식 때는 너무
요란스럽지 않게 하라고 주문까지 하고 있으니 가슴이 미어졌다.
나는 1남3녀를 두었다. 그 어린 것들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그 애들
의 미래를 생각하다가 울컥 욕지기가 나왔다.
‘저 어린 것들을 어떻게 해야 하나.’
한 배에서 나온 형제는 은행나무 앞에서 이승과 저승의 서로 다른 갈 길을
눈앞에 두고 착잡한 마음을 가다듬고 있었다. 나처럼 자신의 장례준비 챙기고
이승을 떠나가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동생아, 내가 죽거든 이 곳에 빈소를 마련해야 한다. 다른 곳으로 옮기지 말고
꼭 이곳에 빈소를 차리거라. 그리고 나는 네가 알다시피 의학발전을 위하여 내
신체를 기증하기로 했다. 절대로 매장하려하거나 하지 말고 내 소원대로 해 주렴.
내가 세상에 나와 마지막으로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내 신체를 의학
발전을 위해 기증하는 것이란다. 내 결심을 존중해 다오. 이제는 모든 것을 비웠
다. 나를 이 지경으로 만든 사람은 다름 아닌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을 나는 이제
야 깨달았단다.“
“형님, 어떻게 그놈들을 용서할 수 있어요? 어떻게요?”
“아니야, 모든 것이 나의 욕심에서 비롯되었어. 이제 마음을 비우고 나니까 한결
기분이 좋구나. 행여, 나 죽은 뒤에 절대로 그 사람들을 찾아 복수하려 하거나
무모한 행동은 하지 말거라.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을 뿐이야. 내 말, 명심
하거라. 아이들이 아직 어리니 네가 잘 돌봐 주고. 나는 이제 나목(裸木)이 되었구나.“
오전부터 저녁 때 까지 형님은 어렵게 말을 이어가면서 그간의 사정을 나에게
이야기했다. 그러나 나는 형님이 진짜 가슴속에 담아 둔 이야기를 알고 싶었으나
형님은 끝내 입을 열지 않았고 결자해지(結者解之)를 강조하며 조카들과 친척들
에게 혹시 해가 미치지 않을까 걱정하는 눈치였다. 중환자 실로 옮겨진 형님은
다음 날 저녁인 2005년 2월 22일 오후 9시20분 53세의 일기로 한 많은 세상을
뒤로 하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형님의 시신은 형님의 유언대로 부천소재 S병원에 기증을 하였고 평소 다니던
성당의 주임신부님의 집전으로 가족과 친지들 그리고 성도(聖徒)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장례미사를 올렸다.
2006. 8. 14.
- 拙稿를 큰형님의 靈前에 바칩니다. 부디 극락왕생하소서.
여강 최재효 拜
긴 글을 읽어 주신 님께 진심으로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무더운 여름 건강하시고 하시는 일마다 형통 하소서
첫댓글 ....()()()
_()_ 메기님, 고맙습니다. 건강하소서
님의 구구절절한 사연 정말 가슴에 메어 오는군요. 하지만 님께서라도 형님이 못다한 생의 한 자락을 더 사시며 실현하겠다는 마음으로 용기 잃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무 관세음보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