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우리 가족만의 사진
 
 
 
카페 게시글
통합 게시판 스크랩 참고자료/개신교 교인의 제사
bohwa 추천 0 조회 33 07.07.31 11:4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해야 하나?
그리스도인들이 제사를 지내도 되는가? 제사문제로 많은 곤욕을 치르는 초신자들을 구제하기 위해 제사를 현실적으로 합리화시켜 보려는 여러 노력들이 있으나 성경적으로 시원한 대답을 할 수 없다. 제사가 민중관습에 속한 하나의 제도인지 아니면 종교적 신앙에 속하는 것인지에 대하여서는 아직 토론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제사를 아무리 부모공경을 위한 단순한 의식이라는 순수론을 가지고 주장한다고 할지라도 일단 그것이 이교나 미신의 배경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 이상 교회에서 그것을 용납할 수는 없다.

일반적으로 볼 때 제사지내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돌아가신 부모를 잘 모시면 자손이 복을 받는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죽은 조상을 가정의 보호자로 모시는 종교심리가 다분히 그 밑바닥에 깔려 있다. 따라서 제사의 진의에는 '예배하는 것', '신을 달랜다'는 것과 '사랑한다','두려워한다'는 감정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렇게 놓고 볼 때 기독교에서 제사라는 용어를 쓴다는 것도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실제적으로 어떻게 죽은 조상에 대한 의례원칙을 지켜 나가야 할지 실천적 지침을 마련함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죽은 조상에 대한 의례원칙
죽은 조상이라고 하면 임종하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문제이다.
별세하면 입관하고 장례식을 치룬다. 그 다음에는 삼,사일만에 삼우제를 지내고 연중에 성묘를 가며 기일을 기억하여 제사를 지내고, 믿는 사람은 추도예배를 드린다. 그런데 지금까지 교회에는 이런 의식들을 공식화시킬 수 있는 절대적인 의례원칙이 없었고 개교회마다 자기 나름대로의 의례절차를 만들어 시행하여 왔을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조금에나마 도움이 될 수 있는 의례원칙을 몇 가지 정리해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성경에는 죽은 사람에 대하여 실제적으로 '이렇게 하라'는 식의 명령을 한 곳이 없다. 기독교의 인격론은 살아 있는 사람에게 한정되어 있다. 따라서 죽은 자에 대하여 인격적인 대우를 하기 위한 어떤 교훈이 성경 안에 있을 리가 없는 것이다.

둘째, 장례식과 거기에 따르는 제반의식은 전통과 편의에 따라 각자 자유로이 만들어 시행할 수 있는 융통성을 가지고 있다. 즉 성경에 죽은 자를 위한 절대적인 어떤 표준이 없다는 말은 다양한 문화와 각자의 상황에 따라 우리가 그 문제를 자유롭게 다룰 수 있음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가족이 세상을 떠나서 가정 예배를 드릴 때 간단히 드리는 사람도 있지만 대단히 거창한 의식을 행하는 사람도 있다. 또 발인할 때 관 앞에서 유가족들과 조객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운구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어떤 사람들은 특별히 마당에 관을 내놓고 모든 사람이 둘러서서 복잡한 의식을 치르면서 관 위에 꽃 한 송이씩을 차례로 얹어 놓는 헌화 같은 것을 매우 중시하는 것 등이다. 이런 일들은 각자가 은혜스럽다고 생각하는데 따라서 결정하는 절차이므로 아무도 '왜 그렇게 하느냐'고 따질 만한 권리가 없는 것이다.

세째, 이교적이거나 무속적, 우상숭배적인 요소를 제거해야 한다. 하관식을 할 때 동남이나 정동을 주장하는 것은 풍수지리설에 의한 것으로 신앙인의 태도가 아니며 죽은 자에 대해 예배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어떤 요소를 남겨 두는 것은 교회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또한 삼우제(三虞祭)나 사십구일재 혹은 칠칠재(七七齋)등은 이교적 바탕에서 나온 것이다. 특히 삼우제를 지키되 기독교적으로 바꾸려는 사람들이 있는데 꼭 그 날짜를 지키려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우제라는 것은 죽은 이의 혼령을 위안하려는 것이며 삼우를 강일(剛日)에 지내게 되어 있는 것은 일진(日辰)의 좋고 나쁨을 따지는 음양오행설에 입각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생각해야 할 일은 세상 떠난 분을 위하여 자녀들이 굴건제복하는 문제이다. 요즘 세상에서는 부모가 세상은 떠나도 우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맨발에 머리를 풀고 굴건제복하고 엎드려서 곡하는 일이 어떻게 보면 미덕으로 비칠 수도 있다. 인정이 메마른 삭막한 세상에서 그렇게 슬픈 태도를 겉으로 보인다는 것은 좋은 인상을 줄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죽은 부모에 대해서 하는 모든 의례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살아 있는 우리에게는 은혜가 되도록 하면서 예우와 추도라는 두 개념 안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자녀로서 부모에게 예의를 지키고 부모의 은혜와 그들의 유업을 기억하면서 추모하는 성격의 것이어야 할 것이다. 세상을 떠난 부모의 장례에 자녀된 자들이 정성을 바치는 이유가 예우가 있는 것이지 다른 것은 아니다.

실제적인 문제
대부분의 교회가 제사에 대한 구체적인 지도를 전혀 하지 않고 있다. 서울에 있는 몇몇 교회를 대상으로 앙케이트 조사한 결과 대부분 제사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면서도 과도기적 상황을 인정해야 한다는 의도에서 단서를 붙인 교회가 한 두 교회 있었다. 즉 가정 전체 분위기가 예수를 믿지 않는 가정에서는 일년이나 이년 정도는 그 전통적인 가정의식대로 따라가다가 점차적으로 그것을 추도예배로 바꾸도록 지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모든 절차를 간소화하고 의미 없는 관습은 생략하여 처음부터 선을 분명히 그어서 지도하는 것이 좋다.
장례식과 기타 의례준칙을 그런대로 갖추고 있어 좋은 지침을 제공해 주는 교회가 있다면 '영락교회'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그 교회에서 교인들을 지도하는 내용을 중심으로 지침을 마련 해감이 좋을 듯하다.
한 인간의 임종이 가까우면 본인과 가족들은 마음 준비를 하고 목회자와 교인들이 함께 모여 임종 예배를 드린다. 혹 병원에 입원한 환자라도 위독한 상태에 빠져 소망이 없다는 진단이 나면 지체 말고 가정으로 옮긴다. 그리고 가족들은 다음 사항을 꼭 지킨다.

첫째, 임종 직전에 가족들은 믿음으로 울음을 삼키며 침착하게 찬송하면서(471, 501, 502, 508장등) 성경말씀을 들려주어야 한다. (예: 요11:17∼27, 요14:1∼6, 딤후4:6∼8) 또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그리스도를 기억하며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도와주어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기억해 두어야 할 중요한 것이다. 우리 육체의 기관 중에서 마지막까지 남는 것은 청각이라고 한다. 의사가 의식이 없다고 진단할 때라도 죽어 가는 자가 말을 듣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상대방이 대답을 못할지라도 계속 찬송을 불러 주고, 성경을 읽어 주어 마지막까지 승리할 수 있도록 권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둘째, 임종 직전에 확인해 두어야 할 것이 있으면 자세히 병자가 대답하기 쉽게 물어 그 내용을 명확하게 보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녹음기가 있으면 녹음하여 마지막 육성을 보존하는 것이 좋다. 병자가 운명하면 지체없이 탈지면으로 코와 귀를 막아야 한다. 보통 운명할 때는 입을 벌리는데 입을 다물게 하고 턱밑에 무엇을 받쳐 주어야 한다. 그리고 베개를 조금 높이고, 몸이 굳어지기 전에 손과 발을 똑바로 하여 자연스런 자세로 펴놓아야 한다. 이렇게 해 놓고 나서 침착하게 교회의 지시를 기다린다. 교회 연락이 끝나면 가족들은 검소한 옷으로 갈아입어야 하고 부인들은 요란한 화장도 지워야 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와서 볼 때 부모가 세상을 떠난 것에 대한 애도와 슬픔을 표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예의다. 이때 신자의 가정에서는 맨발 차림에 머리를 푼다든지 곡을 한다든지 하는 일을 삼가하는 것이 좋다.
그 다음 일은 보통 기독교 상조회에다가 맡기는데 어떤 교회는 교역자들이 직접 수의를 입히고 입관을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요즘은 기독교 상조회가 전문화되어 있기 때문에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에게 맡기는 것이 좋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입관을 준비하는 일이나 장례식은 전적으로 교회에 일임하면 된다. 그런데 이 상례에 대해여 신자는 특히 상복이나 상장(喪杖), 혹은 굴건제복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다만 남자는 검은색 양복과 검은색 넥타이를 하는 것이 점잖고 좋다. 모든 것이 검은색으로 준비되면 좋지만 그렇게 준비가 안되어 있으면 평상복에 검은색 넥타이 정도도 무난하다. 여기서 저 집은 이렇게 하는데 나는 이렇게 하면 욕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안하는 것이 좋다. 돌아가신 분을 진심으로 애도하는 마음으로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하면 된다. 여자 상주도 마찬가지로 백색이나 검은 색 옷을 아래 위로 입거나 또 점잖은 평상복으로 할 때는 머리에 상표(喪表)를 붙이는 것이 좋다.

영구 앞에는 세상 떠난 분의 모습을 담은 사진과 그 분이 사용하던 성경, 찬송과 생화를 준비한다. 향을 피우는 것은 인도의 불교의식이 유교의식에 들어와서 제도화된 것이므로 여러가지 면에서 촛불이나 향보다 깨끗한 생화가 훨씬 좋아 보인다. 그래서 예수 믿는 가정에선 일단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분향 대신에 헌화를 할 수 있도록 하는 편이 훨씬 은혜스럽다.

다음으로 신자의 가정에서 사진이나 죽은 시체를 향하여 절하는 것은 삼가해야 한다. 그것은 우상의 요소를 갖고 있기 때문에 비인격적인 시체를 보고 절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다른 조객들도 들어가서 조용히 서서 혹은 무릎을 끓고 묵념을 하는 것으로도 충분한 애도의 표현이 될 수 있다. 간혹 일부는 예수를 믿고 일부는 예수를 안 믿는 경우에 유교식도 아니고 기독교식도 아닌 이상한 분위기?【? 당황하게 될 때도 있다. 이런 경우 앞 사람이 관 앞에서 절을 한다고 하여 따라 하지 말고 신자가 취해야 할 본분을 지키는 것이 옳다.
상가에서는 주류 사용을 일체 금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장례를 할 때 삼일장이냐 오일장이냐 하는 문제도 준비기간 때문에 삼일장을 많이 쓰는데 이것도 지나치게 날짜에 사로잡히면 유교적인 사고방식을 벗어나지 못하는 나약성을 드러내기 쉽다. 그러므로 상을 당한 가정의 경우에 따라서 하는 것이 좋다. 하관 예배를 드리는 것은 교역자에게 맡기면 된다.

이제부터 추도예배에 대해 살펴보자. 추도예배를 드릴 때 식구가 먹기 위한 상은 좋지만 죽은 자를 위한 상은 허용할 수 없다. 그리고 몇 년 동안 추도예배를 드려야 하는가는 어떤 규정이 없기 때문에 가정의 여러 가지 사정에 따라 하면 된다. 일반적으로 추도예배를 3년 정도만 드리고 더 계속하는 여부는 가족들이 의논해서 해야 할 것이다. 추도예배를 맡은 인도자는 교역자가 좋으나 교역자들이 일일이 추도예배 인도를 맡으려면 대단히 힘들기 때문에 예수를 오래 믿고 신앙이 제대로 잡힌 가정에서는 가장이 간단하게 자녀들과 친지들을 불러 놓고 예배드리는 것이 좋다. 예배를 드린 후 세상 떠나신 분을 추모하면서 녹음기의 육성을 듣든지 사진첩이나 비디오에 담은 모습을 다시 내어 본다든지 하여 고인이 남기고 간 여러 가지 좋고 은혜스러운 이야기들을 나누어서 자녀들에게 가정의 뿌리를 다시 한 번 분명하게 인식시켜 주는 좋은 기회로 만드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추도시에 지방(紙榜)만 붙이지 않으면 상 차려 놓고 절을 해도 된다고 가르치는 교회가 있으나 그런 식으로 가르치면 제사문제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는 좋게 들릴지 모르지만 신앙양심으로는 바람직하지 못하다. 죽은 자의 혼을 예배하였다는 가책을 어떻게 피할 수 있겠는가?

이런 문제는 처음부터 바로 해 두는 것이 좋다.


전통적인 기독교 가정은 독자적으로 추도식을 하고, 새로 예수 믿고 돌아온 가정에서는 추도일이 돌아오면 교역자가 도와주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들은 아무 것도 모르기 때문에 조상숭배하다가 갑자기 중단하면 조상이 저주를 내려 가정에 우환이 생길지 모른다는 공포심을 안고 있기 쉽다. 그러므로 일주기 추도식은 교역자가 그 가족들과 함께 진지하게 예배드리고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으로 하는 것이 좋다.

또 혼성가족, 즉 반은 예수 믿고 반은 안 믿는 가정에서 한쪽은 제사 지내려고 하고 한쪽은 안된다고 하는 경우가 있다. 이럴 때 항상 강한 쪽이 이긴다는 것은 만고불변의 원리이다. 그러나 강하다는 것이 꼭 극단적인 대립만이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기도하면서 깊이 생각해야 될 문제이다. 참으로 인내와 용기와 슬기가 필요하다. 과거에 우리의 선조들은 이런 문제 때문에 순교를 당한 일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방이 내 신앙을 시험하려고 고의적으로 이 문제를 들고나올 때는 한 치도 양보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나 불신 가족들이 그런 악의에서가 아니고 순수하게 제사를 지내야 되겠다고 고집하면 인내를 갖고 일단은 내버려두기를 권한다. 그러나 그들과 함께 제사행위에 동조하는 것은 삼가해야 할 것이다. 음식을 만들 때는 성심껏 가족으로서 함께 돕고 연중에는 형제들의 생일이라든가 상세한 부분까지 배려를 하여 사랑을 깊이 표현하면서 가족을 구원할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도와줄 수 있는 일은 열심히 도와주는 것이 더 은혜스럽다고 생각한다. 열심히 도와주고, 할 일을 다해 놓고 정식 제사지내는 자리는 피하는 것이 좋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타협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진리와 양심은 끝까지 굽혀서는 안될 것이다. 처음에는 많은 장애가 있겠지만 결국은 승리한다는 신념으로 제사문제에도 임해야 할 것이다.

 

 

 

출처/http://kr.blog.yahoo.com/yydeokk196/5803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