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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뜨거웠다. 술 한 잔 들어가면 선배도, 공권력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엄혹하던 군사정권 시절, 툭하면 경찰을 때려눕히는 배우는 결단코 박노식 한 명뿐이었다. 수시로 감옥을 드나들다 그 체험을 바탕 삼아 영화 ‘집행유예’를 연출한 괴짜. 그가 모든 열정을 쏟아 부은 대상은 영화였다. 땀 냄새 풍기는 뒷모습만으로도 1960년대 가난한 사내들의 절망을 표현할 줄 알았던 배우. 수준 높은 B급영화를 연출했던 천재 감독. 폼 나게 살고 싶었으나 비극적으로 몰락한 ‘용팔이’ 박노식을 추억한다. |
1968년 4월22일 오전 1시. 대구의 금호관광호텔 나이트클럽에서 폭행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신문기사에 따르면 영화배우 박노식이 김진규·장동휘와 술을 마시고 춤을 추다가 넘어져 호텔 깡패가 자신을 때렸다고 생트집을 잡고, 호텔 기물을 파괴했다. 또 박노식의 폭행 사건이 터졌다. 박노식은 이전에도 크고 작은 여러 폭행 사건의 주인공이었던 것. 사건 발생 후 시간이 지나 사건의 전모가 좀 더 자세하고 정확하게 드러났다. 박노식과 호텔 깡패, 두 사람 사이에 시비가 붙어 싸움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술을 마시던 일행, 즉 장동휘와 박노식 간의 싸움이었던 것이다. 이 일로 박노식은 형사 입건됐는데, 폭행 사건으로 입건되기로 따지자면 영화계에서 그를 따를 자가 없었다. 박노식이 쓴 자서전을 인용해 그날 그 사건의 전모를 재구성해보자. 유현목 감독이 영화 ‘카인의 후예’(1968) 촬영 장소로 선택한 대구의 어느 곳. 촬영을 마치고 의기투합한 김진규와 장동휘 그리고 박노식은 나이트클럽에서 술을 마시며 회포를 푼다. 오랜만에 자신의 에너지를 마음껏 발산할 수 있는 배역을 맡은 박노식은 의욕이 넘쳐흘러 술자리를 싸늘하게 식혀버릴 말을 내뱉고 만다. “두 형님들 날 싸가지 없는 놈이라 욕하지 말고 내 말 좀 들어보시오 잉” 하고는 그 부리부리한 눈을 들어 김진규와 장동휘를 노려본다. “이번 대종상은 나가 꼭 타야 쓰것는디, 형님들이 양보하쇼. 그리고 형님들이 암만 몸부림쳐도 말입니다잉. 이 영화에서 역할로 보나 비중으로 보나, 나의 연기를 따를 수 있겠습니까잉. 아예 단념하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천하에 이런 당돌한 말이 어디 있는가? 점잔 빼는 선배 김진규는 태연하게 ‘알았다’며 받아넘겼지만, 천하의 장동휘가 어떤 사람인가? 이 따위로 막가는 후배를 그냥 보고 있을 사람이 아니다. 박노식의 성격이 불같다면 장동휘는 활화산이다. 장동휘 왈. “그래 너 혼자 다 해먹어라, 이 싸가지 없는 새끼야!!!” “타라면 누가 못 탈까봐 그러십니까? 그런데 이렇게 큰 놈의 새끼 보셨습니까?” 박노식 이왕 저지른 것 끝까지 간다며 대드는 순간. 장동휘는 자기 앞에 놓여 있던 술병을 들어 박노식의 머리에 내리친다. 선혈이 흐르고, 술집은 아수라장이 된다. 이상은 박노식 자서전 ‘뻥까오리 백작’에서 인용한 것이다.
“박노식, 절대적으로!” 사실 박노식은 상복이 별로 없었다. 항상 김진규, 최무룡, 신성일 같은 미남 배우들이 등장하는 영화에서 악역 조연만을 맡거나, (그런 미남 배우들이 출연하지 않은 영화라서) 자신이 단독 주연을 한 작품은 각종 영화제의 외면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출연작 ‘카인의 후예’는 황순원 원작·유현목 감독의 야심작으로 박노식이 보기에 매우 훌륭한 작품이었고, 게다가 자신이 맡은 역이 비록 조연이긴 하지만 대단히 에너지가 넘쳐서 배우로서 혼신을 바쳐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박노식의 연기에 대한 욕심과 자부심이 드러나는 사건이자, 그의 성공과 몰락을 예상할 수 있는 사건이다. 내가 초등학생이던 1970년대 초, 그가 감독 주연한 ‘박노식 표’ 영화가 극장가를 휩쓸었다. 불행하게도 나는 당시 왕우와 이소룡, 스티브 매퀸, 알랭 들롱에 빠져 박노식 영화를 좀 유치하게 생각하는 건방진 꼬마였기에 그의 영화와 극장에서 만나는 행운을 누리지 못했다. 삼촌을 따라가서 한국 최초의 입체영화 ‘천하장사 임꺽정’을 보긴 했지만 박노식은 전혀 기억에 없고, 오직 나를 향해 날아오는 화살과 창날에 깜짝 놀랐던 일과 종이 선글라스 안경이 몹시 거추장스러웠던 것만 기억날 뿐이다. 그가 콧수염을 기르고 찰스 브론슨을 흉내 내며 아들과 함께 우유 광고에 나와 “개구쟁이라도 좋다. 튼튼하게만 자라다오” 하던 화면 속 모습이 지금 내 기억에 유일하게 남아 있다. 내 유년기 박노식은 학교와 집을 오가는 골목길에 붙어 있던, 1970년대 당시에는 유별났던 영화 선전 포스터 속 모습으로 남아 있다. 분노에 찬 그의 얼굴과 일본 해적들이 무시무시한 귀면(鬼面)을 쓰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던 ‘일본해적’ 포스터. 검은 가죽 옷 지퍼를 반쯤 내려 가슴골과 하얀 속살이 드러난 여자의 상반신이 강렬했던 ‘쟉크를 채워라’, 쇠사슬에 묶여 있는 박노식의 처절한 모습이 담긴 포스터를 보고 집에 돌아와 엄마에게 집행유예가 뭐냐고 물어보게 만들었던 ‘집행유예’, 박노식의 부릅뜬 황소 눈이 사나웠던 ‘나’라는 외자 제목 영화 등등.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