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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댄서란 발 놀리는 방법 즉 풋 워크를 제일 중요시해야 한다는 생각때문에 춤추고 있을 때 동작이나 얼굴의 표정 따위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지그 댄스에서 댄서의 발 놀림은 복잡하며, 속도가 빨라 마치 타악기를 두드리는 것과 같이 리드미컬. 한편 아일랜드의 맞은 편 해안에 있는 영국의 공업 도시 랭카셔에서는 산업 혁명의 초기로 노동자들은 공장의 나쁜 작업 환경에 고생을 했다.
1년 내내 계속되는 얼어 붙을 것만 같은 습기와 열악한 노동조건에 시달리다 못해 자기 방위의 수단으로서 노동자들은 단단한 나무 판자를 오려내 발끝과 뒤꿈치에 댄 구두를 신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이 구두를 크로그(Clog), 즉 나막신이라 불렀다. 발이 추우면 자연히 발을 구르게 되는데 이것이 계기가 되어 작업을 하면서도 또는 공장 밖이나 거리에서도 댄스를 즐겼는데 여기서 인기를 얻게 된 스탭이 랭커셔 크로그 댄스로서 영국 민속 무용의 원류가 되었다.
이 크로그 댄스도 지그 댄스와 마찬가지로 상체의 움직임을 생략한 풋 워크가 주였다. 크로그 댄스는 곧바로 미국 무대에도 등장하여 템포는 보다 빨라지고 스텝도 보다 복잡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무 밑창이 19세기 초기에는 보다 부드러운 가죽 밑창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 가죽 밑창 뒤굽에 영국의 동전을 나사로 부착시켜 새로운 음의 효과를 얻게 되었고, 후에 이 동전이 금속제나 탭 징으로 개량하게 된다.
아프리카의 부족민들은 발뿐만 아니라 몸 전체를 흔들면서 춤을 추었다. 그들은 맨발로 춤을 추기 때문에 발이 바닥에 닿는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으나 전신을 흔들면서 부족의 독특한 리듬을 만드는데 전념햇다. 유럽의 스텝 댄스와는 대조적으로 개성있는 춤으로 온몸을 꼬아가면서 추는 것이 아프리카 특유의 춤이었다. 아프리카의 춤을 처음 본 사람들에게는 때려 부수는 듯한 강렬한 리듬과 미친듯이 날뛰는 그들의 야성적인 춤을 이해하기가 좀 어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각 민족의 고유한 춤은 모두가 나름대로 고도하게 이루어진 것으로 단지 각 민족의 갖가지 격식에 의해 춤추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적도 아프리카 삼림지대에 살고 있는 세계에서 가장 문화 수준이 낮다는 원시적 원주민인 피그미(pygmy)는 그들의 독자적인 풋 워크(발놀림)를 창출했으며, 아프리카 중부의 콩고인은 허리와 히프를 비꼬면서 추는방법이며, 다오메인은 머리와 어깨의 움직임이 특징이다. 이와 같이 아프리카의 춤은 발을 땅에 대고 질질 끄는 움직임으로 춤의 사운드가 없어 유럽의 댄스에서 볼 수있는 발끝이라든가 뒤꿈치의 움직임이 전혀없기 때문에 초기의 탭 댄스에 미치는 영향은 적었다고 보여진다. 아프리카 춤의 스텝은 몸의 긴장을 푼 상태에서 발을 미끄러지듯이 움직이거나 끌며 걷는 춤 동작이 특색이다. 강렬한 리듬을 지닌 아프리카의 댄스와 이미 고도로 발전한 유럽 댄스와의 융합 과정에는 오랜 기간이 필요하다. 즉 유럽 댄스의 즉흥성과 풍부한 싱코페이션 리듬(Syncopation Rhythm)의 융합에는 아직 연구해야 할 것이 많이 있다.
오늘날 우리들이 알고 있는 아메리카 탭 댄스의 기원은 신세계를 건설할 때 미국의 노예무역에 의해 유럽문화와 아프리카 문화의 충돌을 야기시켰던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먼 항해중의 노예선 갑판 위에서 적하 작업을 하는 동안 승무원과 노예들이 서로 어울려 댄스를 즐기면서 전혀 다른 스텝과 리듬의 융합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아프리카인들은 유럽 댄스에 아프리카의 독특한 리듬을 맞추면서 춤을 추었다. 이러한 색다른 춤이 백인들의 파티에 여흥으로 등장하였고, 백인들은 흥을 돋구기 위한 칭찬의 표시로 흑인드에게 케잌을 나누어 주었다.
그렇게 해서 백인의 파티에서 여흥을 돋구기 위한 것이 그 유명한 케잌 워크(cake walk)가 되었다. 케잌 워크란 일종의 스탭 댄스로서 남녀 한쌍이 독특한 걸음으로 추는 춤이다. 즉, 상위 계급인체 거드름 피우는 백인들을 미뉴에트의 행렬에서 노예들이 머리와 턱을 높게 쳐들고 코는 내밀면서 백인의 몸놀림을 흉내내면서 몸을 비트는 걸음걸이로 추는 춤이다. 1828년 토모스 더토머스 라이스는 코르크를 태워 얼굴을 새까맣게 칠하고 마차를 지키는 늙은 노예의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었다. 라이스의 이런 행등이 크게 히트하게 되어 미국의 음유시인들이나 가수들이 쇼에서 얼굴을 까맣게 칠하는 스타일이 생겨나, 순식간에 온세계에 열광적인 호응을 얻었다. 그리하여 1843년 와이트 룩, 페루햄,부로와, 에메트의 4인조가 미국에서 처음으로 모여 Minstrel Group을 결성하여 큰 인기를 얻게 되었다.
1940년대에 접어들면 뉴욕시에서 주최하는 백인과 흑인간의 댄스 경연대회가 개최되는데 이것이 나중에는 하나의 전설로까지 전해지게 된다. 양 인종의 쌍벽을 이룬 유명 댄서인 아일랜드인 존 다이아몬드와 흑인 윌리암 헬리레인(별명은 쥬우바)의 경연도 있었다. 흑인 댄서인 쥬우바는 초기 민스트렐 쇼(Minstrel Sh ow) 시대의 백인팀에 초대된 유일한 흑인으로 런던을 본거지로 하는 이디오피아 세레나데에 참가하여,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댄스의 전통 스타일로써 전유럽에서 좋은 평판을 얻었다.
1847년 독일 전쟁 후 미국에는 독일 이민자가 많이 건너오는 데 이를 계기로 바바리아 크로그 댄스를 비롯한 볼카와 왈츠가 소개되어 인종과 문화의 도가니인 미국에 3/4박자의 독일의 아이리시 왈츠 크로그의 스텝 댄스가 생겨났다. 이것은 멋진 구두소리를 내며 추는 댄서의 길잡이가 되었다. 그 후 민스트렐계의 백인 댄서인 앤 브라이언트와 에디 지란트가 무대를 미끄러지는 듯한 아름다운 춤솜씨를 보여 주었으며, 흑인인 빌리 카잔즈가 옛 버니아풍의 슬로우 템포의 댄스를 보여줘 유명해졌다. 한편 조지 프림로즈는 나무로 밑창을 댄 구두를 가죽창으로 바꿔신고 틀에 박힌 룰에서 벗어나 자유 자재의 경쾌한 구둣소리를 내며 춤을 추어, 그 당시의 민스트렐계의 영향을 주었으며 1900년대까지도 그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남북전쟁이 일어나자 백인 대 흑인의 무대 경연도 정치적 바람으로 인해 대립적으로 바뀌어 전쟁이 끝난 후에는 인종차별 주의자 출현으로 민스트렐계는 빛을 잃기 시작했다. 대중 연예계에 미국사상 처음으로 여성이 등장한 것도 민스트렐이 내리막길로 가는데 박차를 가한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후 키티 오닐이란 댄서는 소리가 더욱 높은 단단한 밑창의 가벼운 구두를 신고 샌드 댄스(Sand Dance)를 추면서 명성을 얻어 조지 프림로즈와 더불어 인기를 다퉜다.
어두운 전쟁 시대를 겪은 관중은 보다 다양하고 풍부하며 성적 매력을 가미한 새로운 주제를요구하는 경향이 높아져 보드빌(Vaudeville:음악이 있는 짧은 희극)에서는 패밀리 엔터테이먼트(Family Entertainment)를 출현시켜 충족시키고자 했다. 그 당시 백인의 보드빌과 흑인의 보드빌은 각기 탭댄스의 핵심을 향해 가는 이중의 나사와 같은 것이어서 좀처럼 하나로 묶을 수가 없었다. 1881년에는 토니 파스타가 뉴욕에 데뷰하게 된다. 그는 코메디와 아크로바트(Acrobat: 줄타기, 곡예)와 노래 댄스르 곁들인 연예물과 시사성을 부드러운 유모어와 화술을 구사해면서 보드빌을 민스트렐을 능가하는 위치까지 끌어 올렸다.
한편, 톰 파노리코라는 현악기 우쿨렐레를 치면서 춤을 추었고, 패드 루니는 한쪽 다리를 다른 한쪽 다리 앞에서 회전시키는 춤을 선보였다. 에디 호란은 가느다란 단장을 손에 들고 워킹 왈츠 크로그를 선보인 최초의 보드빌이라 일컬어지는데 이것은 곧바로 노래와 춤을 으례 곁드리는 것으로 되었다. 세대가 바뀌어 하리게이, 존 T. 케네디 등이 매우 빠른 탭 스텝을 선보였고, 콘드스 브라더스는 이것을 다듬어 완성을 보았다. 큰도스 브라더즈는 번개와 같은 속도의 파이브 탭 윙과 다섯개의 각기 다른 음에 리듬을 가미해 울리는 재능으로 평판이 높았다. 세월이 흘러 제임스 바톤, 허란드 딕슨, 그리고 위대한 조지 M 코한 등의 백인 보드빌이 나타났다. 조지 M 코한은 작가이며 각본가, 배우, 가수, 댄서로서 백 엔드 윙 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흑인 스타일의 댄스에 쾌활하며 빠른 템포의 탭 댄스를 풍자하여 추었던 것이다.
흑인들의 보드빌(vaudeville)은 확고한 기반을 갖고 있는 백인들 연예계에 비하면 미미한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제1차 세계대전 직전 셔만 다트리씨는 남부 및 남서부의 국장주들과 T.O.B.A 체인을 결성했다. 1920년대를 통해, T.O.B.A는 대부분의 남부지방과 북부의 많은 도시의 계열에 가입시켰으며, 전성기에는 그 수가 300을 넘었다. 후일, 그 이름을 남긴 흑인 보드빌 배우의 대부분이 이 Toby(T.O.B.A의 별명)에서 배출되었던 것이다. T.O.B.A에서의 경쟁이 격심하게 되자 출연자는 정력과 구상을 쏟아야만 했다. 당시 T.O.B.A 흥행물 중에서 탭 댄스는 많은 호응을 얻었으며 그 기량도 최소의 수준까지 높아졌다. 킹 라스타스 브라운이란 댄서는 백 댄스 인으로 흑인들 중에서도 인기를 얻어 명성을 날렸다.
백 댄스인이란 싱코페이션 리듬(Syncopation Rhythm)에 맞춰 추는 최초의 아메리칸 탭이었다. 이 생코페이션 리듬은 모든 음악의 기본적인 특성을 지닌것으로서 유럽이 기원인 지그 댄스(Jig Dance)와 그밖의 댄스에서 볼 수 있듯이 악센트를 스트레읕 비트(싱코페이션을 사용하지 않고, 악보대로 연주하느 것)에 두지 않고 다운 비트, 즉 오프비트(4박자 곡으로 강세를 넣지 않는 박자에 두었는데 이것은 아프리카 부족 음악의 리듬에서 따온 것이다. T.O.B.A계 스타가 본격적으로 브로드웨이에 진출이 시작되어, 흑인 탭 댄서인 에디 렉터의 스타일을 도입하였으며 흑인계 댄서들에 의한 상류극이 공연되었다. 1920년에 이르기까지 흑인의 공연물이란 것은 헌 포대따위를 걸치고 닭을 훔치는우스꽝스런 이야기에 지나지 않았으나, 브로드웨이의 무대에 진출함에 따라 점차 안경다리 없는 코안경, 실크 모자, 연미복 모습의 흑인 댄서들이 등장하여 유치한 옛 스타일의 체면에서 탈피하게 되었다.
흑인 최고의 보드빌(vaudeville) 배우 중 한사람인 존 W 바불즈느 피아니스트인 벡 워싱톤과 노래와 팁의 벡-바불즈 극단을 조직하여 '리듬 탭'이라는 새로운 양식의 춤을 선보였다. 바불즈는 존 거슈인의 '포기와 베스'(1935년)을 연출했고, 할리우드에서 몇 개의 영화를 만들었는데, 그 중에는 쥬디 가란드와 공연한 'A Song is Born'(1947)이 있다. 흑인 탭댄서 중에서 최고의 왕자는 빌 로빈스이었다. 민스트렐로 출발하여 보드빌, 브로드웨이를 거친 그는 헐리우드 황금시대의 흑인 슈퍼 스타중의 한 사람이었다. 브로드웨이에 있을 때 'Brown Buddies(1930)'에서 처음으로 흑인 주역을 맡아 헐리우드에서 소녀역의 명스타인 샬리템플의 코치역 겸 공연자로서, 'The Little Colonel(1935)'에 출연하는 등 무려 14편의 헐리우드 영화에 출연한바 있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그의 브로드웨이 데뷔는 찬란한 인기를 얻게 되어 탭 댄스를 미국의 명물로 확한 자리를 잡게 하였다. 1970년 프로렌스 지그휄드는 폴리스 (folles)를 상연했다. 이 폴리스는 50명의 미녀 합창단이 아슬아슬한 복장을 하고 모두 스텝을 밟아 쇼 중에서 최초로 댄서가 라인을 이루면서 춤추는 연출물이 되었다. 초기의 이들 데뷔는 그 구성이 광범위하고 주요되는 테마가 없이 다만 숙련된 춤의 장면과 스케치 풍의 코메디와 알려진 곡을 중점적으로 다루었다. 그러나 이 폴리스를 통해서 이름을 떨친 가수와 댄서가 많이 배출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네드 웨이번의 'Passing Show(1918)'에서의 젊은 시절의 프렛트 아스테어, 아델 아스테어 남매가 스타로 등장한 것이 특이할 만한 것이다. 또 이 시기에 빌 로빈슨이 처음으로 ㅡ로드웨이에 등장했으며 또한 루우 레슬리의 흑인 출연자로만 구성한 데뷔 'Blackbirds(1928)'도 공연을 해 인기를 얻은 바 있다.
보드빌(vaudeville)계에서 가장 화려하게 명성을 떨쳤던 조이 M.코한은 미국이 예능의 세계에 영향을 미친 분야, 즉 뮤지컬 코메디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코한은 'Little Johnny Jones(1903)'에 의해 뮤지컬의 짜임새 있는 구성과 전개를 보여, 쇼 중에서 진행되는 노래, 춤, 유모어의 하나하나가 그 전개 중에서 개성적인 테마로 잘 어울려 연출 종목 전체가 체계적으로 통일 된 것이 되었다.
또한 코한은 두번째의 뮤지컬 'Forty-five Minutes from Broadway'(1906)가 상연되자, 그 뮤지컬에서 불려진 곡과 함께 순식간에 대단한 인기를 얻었다. 1920년대 브로드웨이에서 뮤지컬 코메디가 유행되어, 흑인과 백인의 출현이 다함께 성공을 보게 되자 백인 보드벌과 T.O.B.A 체인의 두 계통으로 나누어져 따로따로 발전해온 탭계가 차츰 융합되기 시작했다. 이두 계통은 하나로 통합하는 주요한 역할을 한 사람 중에 흑인 안무가인 버티 브라드레이가 있었다. 1928년 브라드레이는 브로드웨이에 스튜디오를 개설하여,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백인 뮤지컬 스타의 견습생들에게 흑인의 탭 테크닉을 가르켜 주었다. 브라드레이 문하생 중에는 메이 웨스트, 에드 우인, 아스테어 남매, 폴 드레이파 등 많은 스타가 배출되었다. 브라드레이의 지도 방침은 백인 댄서에게 일방적으로 흑인 댄스 스타일을 가르키는 것이 아니었다.
브라드레이는 자기 자신 테크닉의 대부분을 드라마틱하고 정확한 백인 뮤티컬 샹송 작가로부터 도입했던 것이다. 20년대~40년대를 통해 탭 스타일이 여러 가지로 변천하게 된 것은,131번가의 유명한 휴파즈 그룹과, 하렘의 7번통이었다. 여기에서는 무명의 탭 댄서에서부터 바불즈나 로빈슨과 같은 거물들이 출입하여 탭 댄서에서부터 바불즈나 로빈슨과 같은 거물들이 출입하여 탭 댄스 발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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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걸 누가 다 읽을까....ㅠ.ㅠ넘 기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