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평 영화감독께서 정일교 선생의 삶을 다룬 책을 읽고 뜬금없이 영화 <포레스트 검프>가 떠올랐다며 '그 남자는 아직도 달리고 있다.'는 제목에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삶'이라는 부제까지 달아 서평을 보내왔네요. 완전 공감하여 아래에 올립니다. 재미나고 감동적인 영화 두 편을 보는 느낌입니다!
그 남자는 아직도 달리고 있다.
‘정일교 선생의 삶을 다룬 책을 읽고 …’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삶
- 영화감독 임진평 -
한 남자가 벤치에 앉아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도시 풍경 위로 깃털 하나가 바람에 날리다 그 남자의 낡고 흙 묻은 운동화 위에 소리 없
이 내려앉는다.
남자는 조심스레 깃털을 주워 책갈피에 넣는다.
많은 이들이 인생영화로 꼽는 톰 행크스 주연의 1994년 작 <포레스트 검프>의 오프닝
시퀀스다. 버스를 기다리느라 같은 벤치에 앉게 된 이들은 남자로부터 그가 지금껏 살
아온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 사이 버스가 도착하면 먼저 일어나야 하는 이들은 미처
다 듣지 못한 이야기 때문에 아쉬워하지만 빈자리는 곧 다른 이들로 채워지고 남자의
이야기는 마치 세헤라자드의 천일야화처럼 계속된다.
뜬금없이 영화 <포레스트 검프>가 떠오른 건 정일교 선생의 삶을 다룬 책 <침구 인술
로 아름다운 황혼>을 읽고 나서였다. <포레스트 검프>는 사실 만화 같은 이야기였다.
지능은 모자라지만 순수하고 정의로운 마음을 가진 외톨이 소년 검프가 세상의 따돌림
과 편견을 이겨내고 누구보다 빠르게 달릴 수 있는 두 다리로 미식축구 경기의 스타가
되더니, 곧 베트남 전쟁의 영웅이 되고 그도 모자라 미국 탁구 국가대표 선수가 되어
핑퐁외교의 주역이 되는가 하면 전우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세운 기업이 성공을 거둬
큰돈을 벌기도 한다. 그뿐인가. 사랑했던 이가 떠난 후 상처받은 마음을 달래기 위해 무
작정 달리기 시작한 검프를 보며 수많은 이들이 감동받고 그를 따라 함께 달리며 저마
다 진정한 삶의 의미와 가치, 행복을 되새기게 된다.
책을 통해 정일교 선생의 파란만장한 삶을 따라가다 보니 자연스레 <포레스트 검프>의
인생역정이 겹쳐졌다. 그만큼 당신의 삶이 영화보다 더 영화같이 느껴졌다는 얘기인데,
다만 다른 게 있다면 영화 속 포레스트 검프의 인생史는 재미와 감동을 주기 위해 만들
어진 상상의 이야기였던데 반해, 정일교 선생의 인생은 그 자체로 현재 진행형인, 우리
이웃의 삶이라는 점이었다.
당신의 인생을 응원할 수밖에 없는 이유
정일교 선생은 1941년생, 올해 82세다.
포레스트 검프가 베트남전을 거쳐 냉전시대를 통과하는 미국 현대사의 한복판에 있
었다면, 정일교 선생은 일제강점기 말에 태어나 6.25 전쟁을 겪었고 대한민국에서
선출된 모든 대통령을 다 겪은 세대다.
어려서 그는 구두닦이, 아이스케이크 장사, 제빵기술자, 벌목꾼, 탄광의 막장 광부를
거쳤고, 결혼 후에는 파독 광부로 독일에 가서 용접사로 능력을 발휘했고 귀국해서
는 수산물 유통업자로, 사우디 건설 현장 근로자로, 또 채소 장사에 화물운송업자,
토목회사 사장까지 섭렵했다고 한다. 그리고 마침내 2023년 현재, 남들은 은퇴하고
도 남았을 나이에 그는 쿠데타와 오랜 내전으로 혼란스러운 미얀마에서 침뜸 봉사
로 황혼을 불태우는 중이다. 범인의 시선으로 보자면 한 마디로 뜬금없고 예측 불
가한 인생이 아닐 수 없다.
그가 이처럼 한 사람의 경력이라 믿기 어려운 다양한 직업들을 섭렵할 수 있었던
건 사실 파란만장한 대한민국 현대사와 그 궤를 같이 한다. 그러다보니 역동적인
그의 삶을 숨 가쁘게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우리 자신과 또 우리 부모 세대가 지나
온 역사가 마치 손에 잡힐 듯 다가올 수밖에 없다.
그의 책에는 한 개인의 지나온 삶의 굴곡이 담겨 있지만 책은 단순한 회고록 이상
의 의미를 독자에게 전한다. 그건 그가 걸어온 발걸음보다 오히려 앞으로 걸어갈
미래가 우리의 삶에 더 큰 영향을 주게 될 거란 의미이기도 하다. 그의 인생에 응
원을 보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재야’라는 꼬리표 … 그럼에도 삶은 계속된다.
미얀마 양곤 인근에 따바와 명상센터가 있다. 정일교 선생은 그곳에 속한 중증환자
요양소에서 7년 째 침과 뜸으로 수많은 환자를 치료해 오고 있다. 하지만 그는 국
내에서는 여전히 재야침구사로 불린다. 젊고 건강한 사람도 견디기 어려운 열악한
환경에서 재정적 도움 하나 없이 오로지 헌신하며 인명을 구해낸 그에게 ‘재야’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이러니 하게도 대한민국에서 침구사의 활동
은 불법이기 때문이다.
2010년 헌법재판소는 의료인 외에는 침구시술을 못하게 하는 의료법 제27조 제1항
등에 대해 9명 중 과반수인 5명이 위헌이라는 의견을 밝힘으로써 사실상 헌법불합
치 내지 입법촉구 결정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이후 제도개선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에 국내외 침구인과 침구술 치료를 원하는 이들 2천여 명이 2023년 현재 헌법소
원을 내고 결정을 기다리는 중이다.
침구술에 대한 그릇된 오해와 법과 제도의 고의적 미비로 선생이 여전히 재야침구
사라는 꼬리표를 떼어내지 못한다고 해서, 코로나라는 전대미문의 전 지구적 재앙
이 덮친 그 시기에 해외에서 자신이 가진 침구술로 봉사하고 헌신하며 수많은 인명
을 구해낸 사실과 업적이 가려질 수는 없을 것이다.
“엄마는 신발을 보면 그 사람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고 했어요.”
<포레스트 검프>에 나오는 대사였다. 검프는 큰돈을 벌고 성공했지만 여전히 낡고
잔뜩 흙 묻은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앞만 보고 쉼 없이 달려온 이의 운동화다웠다.
아마도 정일교 선생이 신고 있는 신발 역시 반짝이는 구두는 아닐 거다. 그 역시
여전히 흙 묻은 운동화를 신은 채 자신이 가진 능력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길 바
라며 먼 나라에서 포장도 안 된 거친 길을 멈춤 없이 달리고 있지는 않을까. 그리
고 이제는 우리도 함께 뛰어야 하지 않을까.
아무쪼록 많은 이들이 그의 삶을 이야기함으로써 우리의 과거를 돌아보고 또 새로
운 미래를 함께 꿈꿀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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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 제목 : 침구 인술로 아름다운 황혼 (정일교 선생의 삶과 봉사 이야기)
l 구술 : 정일교
l 정리 : 이국렬
l 펴낸 곳 : 사단법인 허임기념 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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