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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씨전
소설이란 문제적 주인공을 통하여 타락한 세계에서 타락한 방법으로 진정한 가치를 추구하는 이야기다.
프랑스의 사회인류학자인 르네 지라르(Rene Girard)가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에서 한 말이다. ‘문제적 주인공’은 소설 속 주인공이요, ‘타락한 세계’란 소설 속의 배경이요, ‘타락한 방법’은 바로 소설이고, ‘진정한 가치’는 소설 속에서 주인공이 하는 제반 행동을 말한다. 저 말이 소설을 다 정의할 수는 없지만, 소설의 정의항에 어느 정도 접근한 것도 사실이라고 많은 이들은 생각한다. 우리가 소설을 단지 흥미로만 읽어서는 안 될 이유가 저 말 속에 담겨있다. 문자의 표면이야 낭만적 거짓으로 치장되어 있으니, 문자의 이면에 있는 소설적 진실을 보아야한다. ‘문자의 이면에 있는 소설적 진실’은 주인공의 행동 저 쪽에 있을 수도 있다. 작가는 결코 소설의 배경과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를 그대로 그려놓지 않기 때문이다. 작가는 여러 겹으로 자신의 속내를 글자 속에 숨겨 놓았다는 것을 독자는 결코 잊지 말아야한다.
화설, 서두가 길었다.
<박씨전>은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한 작자 미상의 군담 소설로 <명월부인전>․<박씨부인전> 등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박씨전>으로 통일하는 것이 좋다. 특히 <박씨부인전>은 쓰지 말아야 한다. 이유는 필사본 대부분이 <박씨전>이요, <박씨부인전>은 일부 딱지본 고소설에 보이는 바, 개작을 많이 하여 연구용으로서나 일반 보급용으로도 적당치 못하고 더욱이 ‘-씨’ 다음에 ‘부인’이 붙는 경우가 없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영조 때쯤인 18세기에 이 소설이 창작되었을 것으로 본다. 그러니까 이 소설의 배경인 병자호란(1636~1637)으로부터 100여년이 지나서 지은 작품이다. 한 세기가 지났지만 <박씨전>과 같은 소설을 지어져야할 상황이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박씨전>은 여타의 군담소설과는 확연히 다른 점이 있다. 그것은 ‘여성 영웅’, 그것도 주인공이 ‘천하의 박색’이란 점이요, 그녀의 가계만 제외하고 거의 실존인물이란 점이다.
<박씨전>은 이본 수만도 국문 필사본이 153편 활자본이 20편이다. 이본만으로 보면 국문 소설로 8번째 자리를 차지한다. 우리가 잘 아는 <임경업전>이나 <임진록>보다도 소설 작품으로 더욱 성공을 거둔 작품이다.
박씨는 이시백(李時白)의 아내로 설정되어있다. 그녀는 천하의 박색이었으나 영웅적 기상과 뛰어난 재주로 오랑캐왕과 용골대와 호골대를 농락하고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한 애국적인 여주인공으로 설정되어있다. 물론 이 소설이 군담소설 성격을 띠는 한 임진, 정유,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무너질 대로 무너진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하려는 의도로 지어졌음은 물론이다.
대강의 줄거리를 따라잡고 논의를 이어가보자.
조선 인조 때 서울 안국방에서 태어난 이시백은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고 문무를 겸하여 그 이름이 온 나라에 떨쳤다. 아버지 이 상공의 주객으로 지내던 박 처사는 자신의 둘째 딸 배필이 병조 판서 이득춘의 아들 이시백임을 알고 청혼한다. 이시백은 첫날 밤 부인이 천하의 박색임을 알고 대면조차 하지 않는다. 부인 박씨는 시아버지에게 청하여 후원에 피화당을 짓고 시비 계화와 지내며 신이한 기적을 보이지만, 시백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박씨의 신이한 기적으로 남편을 장원급제시킨다.
박씨는 시기가 되어 3년만에 액운을 벗고 천하 절색 절대가인이 되자 거들떠 보지도 않던 시백은 크게 기뻐하여 박씨의 뜻을 그대로 따르고, 부부가 화목하게 지내게 된다. 이 때 중국의 호왕은 용골대 형제에게 수만의 병사를 주어 조선을 침략하게 한다. 천기를 보고 이를 안 박씨는 시백을 통하여 왕에게 호병이 침공하였으니 방비를 하도록 청하였으나 간신 김자점의 반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마침내 호병의 침공으로 사직이 위태로워지자 왕은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지만 결국 항서를 보낸다. 많은 사람들이 잡혀 죽었으나 오직 박씨의 피화당에 모인 부녀자들만은 무사하였다. 이를 안 적장 용골대가 피화당에 침입하자 박씨는 그를 죽이고, 복수하러 온 그의 형 용울대도 크게 혼을 내 준다. 그러나, 박씨는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여 오랑캐의 침략을 막아 내지만 나라의 사정이 여의치 않아 인질을 보낸 것으로 전쟁은 끝난다. 왕은 박씨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하고서는 박씨를 충렬 부인에 봉한다. 박씨와 이시백은 국난을 극복하고 행복한 여생을 보내다 선계로 돌아간다.
이본에 따라 내용은 조금 차이가 있으나 추녀 박씨가 허물을 벗는 전반부와 병자호란 때 활약을 하는 후반부로 크게 나뉜다. 이 때문에 〈이시백전>과〈박씨부인전>이라는 2편의 소설이 결합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실상 <명월부인전> 같은 작품은 병자호란 부분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잠시 여기서 흥미로운 박씨의 ‘허물벗기’에 대해 살피고 넘어가자. 이를 ‘변신 모티프’라하는데, 우리 소설에는 흔하다. 예를 들어 <형산백옥>이란 작품에 보이는 왕공의 딸은 어머니의 교만한 마음으로 추녀로 태어나 19년을 살다가 허물을 벗고 미인이 된다. 이러한 변신 모티프가 있는 소설 몇을 찾으면 이렇다.
<금강공주전>은 추악한 공주가 부처에게 빌어 미녀로, <강태공전>과 <장국진전>에서는 구미호가 젊은 여인으로, <김원전>과 <금령전>에서는 원 또는 방울로 태어났다가 미남자와 아름다운 여인으로, <금우태자전>에서는 금송아지가 멋진 왕자로, <영이록>의 추남인 손기는 비범한 존재로, <삼사원종기>에 나오는 탐욕스런 부자는 뱀으로, <남정팔난기>에서 남성도사는 인간과 동물 사이에 태어났으며 새로 호랑이로도 변하고, <설홍전>에서는 설홍이 약을 잘 못 먹고 곰으로 변하기도 한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화산기봉>과 <현씨양웅쌍린기>인데, 이들 작품에서는 약에 의해 악인이 주인공으로 변모한다. 이 약을 개용단(改容丹), 또는 변용단(變容丹)이라 하니, 풀이하자면 ‘얼굴을 바꾸는 환약’이다.
끝도 없는 이야기니 여기서 끊고 <박씨전>으로 돌아가자.
이 소설은 여러 가지 면에서 자주성이 매우 강한 작품이다.
우선 우리나라가 주 무대요, 사건 또한 병자호란이란 실제 사건에다, 실존인물이 대거 등장한다. 박씨와 그녀의 아버지와 시녀인 계화를 제외하면, 남편인 이시백을 비롯하여 인조 대왕, 김자점, 임경업, 원두표, 호장(胡將), 호왕, 용골대 등이 사건의 중심에 서는데 모두 역사적인 실재 인물들이다. 더욱이 이 작품은 남존 여비 시대에 여성을 주인공으로 설정한 것이어서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여성등장 인물들을 찾아보자.
우선 이 소설의 주인공인 신선의 딸인 박씨, 그리고 그녀의 시비인 계화(桂花), 만 리를 훤히 내다본다는 호왕후(胡王后) 마씨(馬氏)와 오랑캐 여자 자객 기홍대(奇紅大:길홍대) 등이 보인다. 이 여성들은 물론 작품 전체에서 남성들의 우위에 있다.
박씨의 인물을 탓하면 수삼 년을 구박하던 이시백이 추한 탈을 벗는 박씨를 대하는 부분을 보자.
시이 의혹야 급피 방문을 열고 보니 츄비던 박씨은 어 가고 화월갓튼 요죠숙여 안져난 거동은 쳔상션여 강 듯 화용월 람은 안일네라. 마음이 별노 송구야 슈작기는 고고 방의 드러가도 못고 도로 나와 게화다려 문왈
“흉악던 인믈은 어 가고 만고졀이 안져스니 무삼 연고요.”
게화 왈
“젼일 박씨 일이 금야의 되얏나이다.”
그졔야 시이 지감읍스믈 졀졀이 후회야 슈연 박 일을 각니 도리여 슈괴야 외당의 나와 쥬져다가 감게 뵈인 공이 가로
“네의 안 안이 지금은 엇더던요.”
시이 복지 왈
“소 무식흔 죄을 아나이다”
더라.
“소자 무식한 죄를 아나이다.”라고 한다.
저 시절, 오륜의 ‘부부유별’이 남존여비쯤으로 읽힐 때다.
또 다음 부분을 보자.
아래는 박씨와 오랑캐 여자 자객 길홍대가 한바탕 다툼을 벌이는 부분이다.
홍 벼을 베고 눕더니 이 들엇스되 두 눈이 화등잔 갓고 블이가 다러 방즁의 궁글며 는 슘결의 방문이 열치락 닷치락 의 졍신을 살난케 난지라. 비록 여나 범갓튼 장여날 엇지 놀납지 안이리요.
박씨 난 쳬다가 일어나 그 여인의 장을 열어보니 칼이 잇스되 쥬홍으로 기기을 비련도라 엿더라. 박씨 그 칼을 만지랴 니 그 칼이 변여 나는 졔비가 되야 쳔장으로 소스며 박씨을 야 코져 거늘 박씨 급피 진언을 외며 슐법을 붓쳐 막은이 그 칼이 감이 범치 못고 변화을 못난지라.
그졔야 그 칼을 들고 소을 병역갓치 지르며 길홍을 니 길홍 야로 을 집픠 들엇다가 병역갓튼 소예 잠을 여 혼미 즁의 일어나 안지니 박씨 비련도을 빗겨 들고 지져 왈
“무지고 갓튼 연아 네가 호국 요믈 길홍 안인야”
는 소 쳔지가 문어지난 듯니 그 여인이 혼블불신고 실혼낙야 아무리 할 쥬을 모로다가 졔우 졍신을 리여 고을 드러보니 박씨 칼을 들고 위염은 팔연풍진 홍문연 잔치예 번쾌가 항장을 야 두발이 상지고 눈이 다 찢어질 정도로 흘겨보고 살긔 츙쳔 듯지라. 길홍 바로보지 못 며 말을 못 고 안졋가 진졍야 엿오
“두 눈이 화등잔 같고 불덩이가 내 다라 방안을 굴러 다니며 자는 숨결에 방문이 열렸다 닫혔다 사람의 정신을 산란케 하는지라.”
길홍대의 잠자는 모습이 여간 아니다. 여기에 뒤질세라 범 같은 여장수인 우리의 박씨는 길홍대의 제비가 비련도와 한바탕 혼전을 벌이고는 술법으로 제압한다. 빼앗은 비련도를 들고 “무지하고 개 같은 년아, 네가 호국 요물 길홍대 아니냐!”라고 길홍대를 꾸짖는 모습 또한 남성 군담 소설과 다름이 없다. 욕도 서슴없다.
가히 여인 천하라 할 만큼 여성들이 남성보다 우위에 있다. 이처럼 여성을 주인공으로 설정하여 눈부신 활약상을 보여 주는 <박씨전>이 필사본으로 전승되면서 독자층에 깊이 파고들어 오랜 세월이 흐른 오늘날까지도 그 빛을 잃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작품의 문학성이 뛰어나서일까?
아니다. 지금이야 박씨의 영웅적인 면을 사겠지만, 저 시절 박씨의 욕설은 당대 여성들 위에서 군림하고, 백성들을 핍박하고 군림만 하였던 기득권 ‘남성’들에게 마땅히 돌아가야 한다. 한 집안의 가장이자 나라의 중심인 남성들은 제 여인은 물론 임금과 나라도 지키지 못하였다. <박씨전>이 군담소설이면서도 애독자의 대부분이 부녀자 층이었다는 데서 이러한 남성의 모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임진․정유왜란(1592~1598), 정묘호란(1627), 병자호란(1636)을 거치며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남성들에게 강간, 납치, 죽음, 공녀라는 패찰을 가슴에 담았는가. 무통분만이 없다지만 저 시절 여인들의 삶은 고통으로 점철된 나날이었다. 전쟁이 나면 여성은 모든 남성이 적군이지 다른 도리가 없었다. 조선은 남성들의 세계였다. 의당 남성들에게 유순하게 훈유된 여성들의 안위는 저 시절, 저 남성들에게 매여 있을 수밖에는 없었다. 그런 남성들이 당파로 나뉘어 투쟁하는 수탉으로서만 존재하였다.
그러니 이시백(李時白, 1581~1660) 또한, 조선 중기를 살다간 실존일물 이시백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조선의 남성을 대표하는 인물로 보아 마땅하다. 실상 이시백은 인조, 효종에 걸쳐 여러 판서, 좌참찬, 영의정 등을 지낸 인물이다. 이괄의 난,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 나라의 위기를 거치며 작고 큰 공을 세웠으며, 특히 병자호란 때는 패전 상황을 수습하고 대동법 실시 등을 건의하여 사회 안정에 공헌한 인물이다. 그의 부인은 기록에 의하면 윤진의 딸 윤씨였다.
첨부하자면 <박씨전>에서 조정의 간신으로 등장하는 김자점(金自點, 1588~1651) 또한 우리의 역사 속에서 그리 흔하지 않은 파란 만장한 삶을 산 사람이다. 그는 역모죄로 효종 2년 사형을 당하였다.
저 시절을 똑같이 다룬 <강도몽유록>이란 한문소설도 있다. 이 소설에서는 15명의 여성들이 못난 남성들을 규탄하는 소리가 곡성을 이룬다.
그래 박씨의 영웅적 활약은 여성들이 가부장적 억압으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욕구를 담고 있는 여성영웅소설의 모태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박씨전>을 모태로 한 여성영웅소설을 들자면, <곽낭자전>․<금방울전>․<뎡각록>․<방한림전>․<설소저전>․<쇼져영춘전>(작품의 전모가 학계에 확실히 알려진 것은 아님)․<여장군전>․<이대봉전>․<이봉빈전>․<운향전>․<위봉월전>․<여자충효록>․<장국진전>․<정현무전>․<하진양문록>․<홍계월전>․<황부인전> 등이 있다. <여장군전>은 <정수정전(鄭秀貞傳)>이라고도 하는데 여장군의 이름이 정수정이기 때문이다. 여성영웅소설은 아니지만 <박씨전>을 언급함에 <임경업전>도 한 마디 짚어 줘야한다. 이유는 이 두 편이 자매편이기 때문이다. 필사본 <박씨전> 말미에 적바림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이를 말해준다.
이 책의 미진한 말은 <임경업전>에 가서 보아라.(일사본 <박씨전>)
이 책의 말이 다 마치니 못함은 일후에 <임경업전>에 기록하여 보게 함이라.(손낙범본 <명월부인전>)
세자 대군과 조선인물을 본국으로 데려간 사적은 <임경업전>에 있기로 이만 그치노라. (가람본 <박부인전>)
이렇듯 소설에 여성영웅이 등장하는 것은 단순한 문제는 아니다. 잠시 이를 짚자면, 첫째로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을 통하여 실제 여성들이 전상자치료나 군량조달 등에서 남자 못지않은 공훈을 세운 것을 들 수 있고, 둘째로 소설의 독자로서 여성이 크게 증가하였다는 반증이며, 셋째로는 임란‧정유왜란(1592년에서 1598년), 정묘호란(1627년), 병자호란(1636년)을 거치며 나타난 남성 중심의 국가 관리체계에 대한 여성들의 심각한 의구심, 넷째로는 국가의 위난을 허구적인 소설을 통하여 극복하려는 내심을 엿 볼 수 있다.
이 글에서 다루는 <박씨전>이나 <임진록> 같은 경우는 병자호란을 겪었던 고통을 소설이라는 허구를 통해서나마 극복하려한 작품이다. 그래 실의에 빠진 조선 중세를 사는 하층민에게 한껏 예의를 갖춘 마음의 세공술로 빚은 것이 <박씨전>은 <임진록>이다. 여기서 간과치 말아야할 점은 이 소설들로 청나라 오랑캐를 이기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첨언하나 해 두자. 오늘날 우리가 이 소설, 아니 고소설을 읽으며 무엇을 생각해야 할까?
독서자 각자 다르니 개개인이 다를 터지만, 나보고 답하라면 이렇게 정리하겠다.
“문학적 감흥에서 끝날 소설이 있고, <박씨전>이나 <임경업전>처럼 그 문맥을 꼼꼼히 짚어야할 소설이 있다.”라고. 한 마디만 더, ‘씨알사상’으로 잘 알려진 함석헌 선생은 우리 민족의 역사를 ‘만신창이가 된 늙은 창부’(『뜻으로 본 한국역사』, 제일출판사, 1993)에 비견하였다. 다소 패배적이고 거친 감이 있지만 딱히 아니라고 강변하기도 어려운 것이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아래는 <박씨부인젼> 필사본에 필사자가 적어 놓은 내용이다.
어화 셰상 더라 의 말 드러보시오. 남라도 못할 일을 여가 엿스니 엇지 아름답지 안이며 엇지 신긔치 안이리요. 무론모인고 남녀노쇼 번 보시거든 부 감심하시오. 이 이 로 젼역 소일할만 기로 되지 못한 글시로 등셔엿오니 그로 눌러 보시오. 융희 이년(1908년) 9월 8일
서한연의
딸의 청으로 <초한연의>를 번역하다
<서한연의(西漢演義)>는 명나라 종성(鍾惺,, 1574 ~ 1625)이 지은 동명의 <서한연의(西漢演義)>의 번역본이다. <초한지>․<서한기>․<장량전>․<장자방실기>․<초패왕실기>․<항우전>․<홍문연>․<초한연의> 등으로도 불리며, 단권으로 일부만 번역된 이본도 있고 전질을 번역한 책도 있다. 단권 번역본(국립중앙도서관본)은 앞에 가사인 <우미인가>․<항우가>․<초한가> 등이 첨부되어 있는데 <서한연의>에 대한 당대의 인기를 반영하는 간접적인 자료가 된다. 이 소설은 국문 필사본으로 56편이, 방각본이 82편, 국문 활자본으로 21편이나 보인다. 지금까지 발견된 편수로는 국문소설 중, 당당 10위권에 들만큼 널리 알려진 소설임에 틀림없다. 중국의 경극 희곡(京劇戱曲)인 <패왕별희覇王別姬>는 이 <서한연의>에 의거한 작품이다.
<서한연의>에 대한 기록부터 보자.
최초의 기록은 이미 1595년 『쇄미록(鎖尾錄)』에 보인다. 『쇄미록』선조 임진왜란 때, 오희문(吳希文,1539∼1613)이 임란을 겪기 1591년에서 1601까지 쓴 일기인데 여기에 “종일 집에만 있자니 무료하더니 딸의 청으로 <초한연의>를 번역하여 둘째 딸을 시켜 쓰게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아래 기록도 보자. 오희문으로부터 79년 뒤다.
대통관(大通官)이 칙사의 분부를 아룁니다. <서한연의> 국문 번역본 한 질을 구해들이라 하므로 들여보내고자 합니다.”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대통관은 번역과 통역을 맡아보던 우두머리이다. 내용으로 미루어 중국에서 온 칙사가 국문 번역본 <서한연의>를 구해달라는 내용이다. 위 기록이 『승정원일기』, 현종13년(1674) 1월 8일조에 보이는 기사인 점으로 미루어, 1674년에 이미 중국에서 들어 와 국문으로 번역되었음을 알 수 있다. 윤덕희(尹德熙,1685∼1776)의 『수발집(溲勃集)』‘소설경람자’에 보이는 것이 1762년이다. 이미 저 당시에도 <서한연의>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다.
이 책은 본래 명나라 종성(鍾惺)이 찬한 소설 <서한연의>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를 번안(飜案)한 것이다. 번역이라 하지 않고 번안이라 함은 ‘원작의 내용이나 줄거리는 그대로 두고 풍속, 인명, 지명 따위를 시대나 풍토에 맞게 바꾸어 고쳤다는 뜻이다. 따라서 원문을 그대로 직역하는 번역과는 달리 번역자의 의중이 작품 속에 들어가 있다.
일찍이 한국 고소설사의 주춧돌을 놓은 김태준(金台俊)은 그의 『조선소설사』에서 “그 중에도 <서한연의>는 가장 인상 깊게 애독되어 일찍 <초한가>를 부르며 초한장기를 놀며 홍문연을 배연(排演)하여 삼척동자도 번쾌, 항우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 일부분씩을 적출해서 <초패왕실기 楚覇王實記>·<장자방전 張子房傳>, 농암노인(聾巖老人)이 발선(拔選)한 <유악귀감(帷幄龜鑑> 등 같은 것이 번역되었다.” 라고 써 놓았다.
이러한 고소설을 ‘연의소설(演義小說)’, 줄여 ‘연의’라 하나다. 연의는 이렇듯 역사상의 사실을 소설적 흥미로 수식, 부연해 놓은 중국소설이나 중국소설을 국문으로 번역한 소설이지만 조선시대에는 ‘넓은 의미의 소설’이라는 말과 통용되기도 하였다.
내용을 살펴보자.
장량(張良)은 진시황을 죽이려다 실패하여 숨어 있다가 제왕의 스승이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진시황이 죽은 후 세상이 혼란한 때에 유방(劉邦)과 항우(項羽)는 각각 군사를 일으킨다. 항우는 범증(范增)을 얻어 강성해지게 된다. 유방은 덕으로 백성을 감화시키며 진격하다가 중간에 장량을 만나게 된다. 장량은 유방을 한눈에 제왕의 덕이 있음을 알아보고 그를 따르고. 유방과 항우는 서로 먼저 함양(咸陽)에 도착하려 한다. 유방이 먼저 도착해서 진왕(秦王) 자영(子拏)으로부터 항복을 받고 악법을 없애 백성의 신임을 얻지만, 유방의 병력은 항우군에 비하여 상대가 안 되었다. 드디어 항우는 유방을 제거할 계획을 세운다. 항우는 범증의 계획에 따라 항장(項莊)으로 하여금 제거하려 했으나 장량이 미리 눈치 채고 유방을 도망치게 한다.
이에 항우는 약속을 어기고 스스로 초패왕(楚覇王)이 되고 유방은 서촉 변방의 파촉(巴蜀)의 한왕(漢王)이 되게 한다. 장량은 항우로 하여금 수도를 옮기게 하고 초나라와 싸워 이길 수 있는 장수를 물색하던 중 한신(韓信)을 만나 그를 설득하여 유방을 찾아가 그의 세력에 합세하도록 한다. 유방은 한신을 파초대장군(破楚大將軍)에 임명한다. 항우의 횡포로 의제(義帝)를 죽이는 등의 일이 반복되어 불만이 누적되고 한신의 연승으로 점차 유방을 따르는 제후가 많아진다. 이에 유방은 항우를 먼저 공격했다가 크게 패하고 후퇴하고 한신의 노력으로 점차 세력을 만회하게 된다.
팽성(彭城)에 있던 항우가 한신의 첩자의 계략에 빠져 팽성에서 나왔는데 이미 유방의 군대는 매복을 준비하고 있었다. 구리산(九里山)으로 진격해오던 항우군은 유방을 발견하고 계속 추격하다가 뒤늦게 함정이 있음을 알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유방군에게 포위되어 크게 패한 항우는 간신히 남은 병사들을 이끌고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항우는 팽성으로 다시 돌아가고자 했으나 팽성도 이미 함락되어 버린 뒤였다. 굶주림과 추위에 떨던 초의 군대는 장량의 계획으로 사방에서 초의 노래를 들려주어 초의 군대가 스스로 붕괴하도록 유도한 결과 장수를 포함한 다수의 군사가 이탈한다. 항우는 강동(江東)으로 탈출을 계획하고 우미인(虞美人)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일단 탈출에 성공하지만 다시 한군에 포위되어 항우는 오강(烏江)에서 목숨을 끊는다. 이렇게 천하는 유방에 의해 통일되고 한신은 초왕(楚王)에 봉해지게 된다. 장량은 공명을 마다하고 청산으로 들어가게 된다.
항우(項羽,BC 232~BC 202)와 유방(劉邦 ; BC 247 ?~BC 195)에 관한 이야기는 익히 알고 있으니, 긴 서술을 피하겠다. 항우가 죽은 것은 그의 나이 31세였다. 유방은 40대 중반이었다.
항우가 마지막으로 우미인(虞美人)과 눈물로 이별할 때, 슬피 울며 부른 해하가(垓下歌)나 소개하는 것으로 끝을 맺겠다. 한때 중원 대륙을 호령했던 항우는 사랑하는 여인 앞에서 한 남성에 지나지 않았다. 이 시를 듣고 우미인은 자결하고 이어 항우도, 항우의 애마 오추마도 주인의 죽음을 알았는지 크게 울음소리를 낸 뒤 오강에 뛰어들었다. 훗날 우미인의 무덤가에서 작은 바람에도 엷게 떠는 비단결 같은 꽃잎의 꽃이 피어났다. 사람들은 이 꽃을 우미인의 영혼이 환생한 것이라 하여 ‘우미인초(虞美人草)’라 부르게 되었다. 우미인초는 우리말로 ‘개양귀비’다. 개양귀비의 접두사로 쓰인 ‘개-’는 ‘변변치 못하다’는 의미이다. 멍첨지와는 관계 짓지 말아야한다.
역발산혜기개세 力拔山兮氣蓋世 힘은 산을 뽑고 기운은 세상을 덮을만하지만
시불리혜추불서 時不利兮騶不逝 형편이 불리하니 오추마도 나아가질 않는구나
추불서혜가내하 騶不逝兮可奈何 오추마가 나아가질 않으니 내 어찌 할 것인가
우혜우혜내약하 虞兮虞兮奈若何 우미인아! 우미인아! 내 너를 어찌할거나
임진록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
전략시뮬레이션으로 변한 고소설 <임진록>이다. <임진록>으로 임진왜란이라는 비극적 경험을 극복하려했던 시절로부터 400년이 지난 지금 화려한 부활을 하였다.
영국의 역사학자인 카(Carr, Edward Hallett)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하였다. 우리의 고소설 또한 현대의 우리들과 이렇게 대화를 나눌 수도 있다. 문제는 현재를 사는 우리가 반드시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한다는 점이다.
(3) 이본으로 본 한문소설 베스트 10
<구운몽>
‘유교라는 날실에 불교라는 씨실의 교직’, 우리의 고소설에서 사상을 추출하자면 아마도 이렇게 정리될 것이다. 물론 이 불교라는 것 속에는 ‘도교’니 ‘선교’니 하는 것도 당연히 얼마간 섞여있음도 사실이다. <심청전>·<장풍운전>·<최척전> 등, 한문소설 국문소설 할 것 없이 대다수의 작품이 그렇다. <구운몽> 또한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구운몽>에는 양소유의 ‘출장입상’에서 유교사상을, 성진의 ‘불교에 귀의’에서는 불교사상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세계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는 <구운몽>은 1910년대까지도 향촌의 여성독자층을 형성 했다.
간쇼졔본(간동학)이 을묘년 1915년 필사한 <구운몽> 1,2권
간쇼졔본(간동학)은 <구운몽>이 1915년, 이미 20세기에 들어섰고 활자본 시대가 열렸음에도 여전히 필사되었음을 알게 해주는 자료이다. 간쇼저(1899~?)는 경기도 화성군 장안면 사곡3리 흥천동에 거주했다. 책 속지에 보이는 “흥쳔동 간쇼졔”라는 필적이 선연하다.
책 말미에 “이 은 소셜노는 가히 볼만호기로 년 십칠셰의 이권 을 번역오나 번시 은문이 단문와 글시 고약고 오 낙셔 만오. 보시는 이가 눌너 보시쇼셔.”라는 기록이 있어 17세에 필사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비교적 이른 나이의 처녀들이 국문소설을 접했음을 알 수 있다. 또 이 말이 세책본 형식인 것으로 미루어 아마도 세책본을 보고 베낀 것이 아닌가한다.
표지는 일반적으로 닥지를 여러 겹 붙여 두텁게 하였다. 부유층에서는 주로 능화판 무늬를 찍어 화려한 장정으로 꾸몄으며 귀중본의 경우에는 여러 색을 짠 비단을 사용하여 묵었다. 그리고 여기에 황백이나 치자즙으로 노랗게 염색하여 좀이 스는 것을 방지하기도 하였다.
이 필사본은 오침안정법이라 하여 구멍을 5개 뚫어 철을 하였는데 전형적인 우리나라의 책 묶는 방법이다. 끈은 베실이나 비단실, 목실 등을 튼튼하게 꼬아 붉게 염색해서 사용하였다.
<창선감의록(彰善感義錄)>
녹책의 전형 <창선감의록>
져 이 은 츙효겸젼과 □□□□을 겸야 을 비푸러 은희 갑긔을 흼씬 고로 호을 션감의록니라 니 그 질 의논큰 회도 가히 엽푼덧 온니 고담 즁 졔일가 이라
“대저 이 책은 충효를 아울러 갖추고 □□□□을 겸하였다. 착함을 베풀어 은혜 갚기에 힘을 쓴 까닭으로 <창선감의록>이라 한다. 그 뜻을 보자면 큰 바다도 얕은 듯하니, 옛 이야기 중에서는 제일가는 책이다.” 이 글은 유탁일 소장 필사본 <창선감의록> ‘전언’에 보인다.
<창선감의록>을 ‘충효’, ‘선’, ‘보은’ 등으로 읽고 있으며, ‘제일가는 책’에서 이 책에 대한 독자들의 생각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창선감의록>은 전형적인 녹책이다.
조선후기에는 녹책과 전책이 있었다. 전책은 홀대했지만, 사대부들도 녹책은 문체나 내용을 퍽 점잖다고 생각하여 권장할 만하다고 여겼다. 설명한 바, ‘창선(彰善)’은 ‘착한 행실이 드러냄’이란 뜻이요, ‘감의(感義)’는 ‘의로운 행동에 감동받다’는 의미이니, ‘창선감의록’이란 ‘착한 행실을 널리 드러내고 의로운 행동에 감동받는 이야기 책’이란 뜻이다.
<창선감의록>의 대중적 인기를 간명하게 알 수 있는 자료부터 먼저 소개한다.
<창선감의록>은 이본만 무려 100 편이 넘고 이본의 명칭 또한 <창선감의록(彰善感義錄)>․<창선감의록(倡善感義錄)>․<창선감의록(昌善感義錄)>으로 한자가 다른 것으로부터 <감의록>․<원감록>․<창선록>․<충의록>․<충효록>․<화문충의록> 등 이본 명칭만 다른 것이 18편이나 되며 등장인물만 수백이 넘는다. 학계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이 <창선감의록>은 국문소설인 <원감록(寃感錄)>을 토대로 윤색․한역한 작품이다. 17세기 후반에 출현한 이 <창선감의록>이 소설에 대한 배척이 심했는데도 불구하고 어찌 이러한 대중적 인기를 누렸을까?
세 가지로 답할 수 있다.
하나는 소설의 내용이 중세의 이념인 ‘충효사상과 권선징악’이요, 하나는 ‘지은이가 명문 사대부였던 조성기(趙聖期, 1638~1689)의 작품’으로 그 구상과 묘사가 빼어났으며, 셋째는 단 세 글자만으로 누구나 가슴을 적시는 ‘어머니를 위해 소설을 지었기 때문’이다. 이 세 가지 정도의 이유라면 제 아무리 소설이라도 배척받을 이유는 없었다. 더욱이 이 소설은 조선 사대부들이 숭앙해마지않던 명나라를 배경으로 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창선감의록>은 당시 권장할만한 소설로 이해한 녹책의 전형이었다. 또 이 소설이 김만중의 <구운몽>․<사씨남정기>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릴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창선감의록>의 내용은 중국 명(明)나라를 배경으로 한다. 지금도 통속적인 연속극이 그렇지만 이 소설 역시 남녀 간의 애증이 휘감아 도는 처첩간의 갈등과 당대의 대가족제도 아래서 일어나는 가정의 풍파이다. 소설의 중심은 충효사상과 권선징악임은 물론이다.
내용이 길기에 그 줄거리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화욱은 젊은 나이에 공을 세우고 병부상서 도찰원 도어사의 벼슬에 있었다.
그에게는 심씨.요씨. 정씨, 이렇게 세 아내가 이었다. 그는 정씨와 아들 진을 남달리 사랑했다.
간신 엄숭이 권세를 마구 휘두르며 나라의 정사가 어려워진다. 그러자 화욱은 벼슬을 버리고 고향 소흥으로 내려갔다. 그곳에서 병을 얻어 셋째부인 정씨와 함께 세상을 떠난다.
진과 요씨의 딸 화소저가 심보 고약한 심씨와 그의 아들 춘에게 모진 박해와 멸시를 받는다.
화욱의 누이 성부인은 화소저와 류광록의 아들 류성양과 혼례를 치러준다. 또한 진을 삼년 전에 화욱이 혼약해둔 윤혁의 딸 윤소저와 그의 양딸 남소저를 맞아온다.
진은 성준, 류성양과 서울에 올라가 과거를 보고 장원급제하여 한림학사가 된다.
성준이 어머니 성부인을 보시고 복건성으로 떠나가자 진을 구박하는 심씨의 행패는 날로 심해진다.
춘은 불량배들인 범한과 장평을 내세워 조녀를 첩으로 맞아들인다. 조녀는 춘과 사통하고 범한과 내통하여 정실인 임소저를 내쫓는다. 또한 범한에게 뇌물을 주어 엄숭의 연줄을 타고 진을 벼슬에서 내쫓게 하였으며 남부인에게는 독약을 먹여 독살한다. 또한 진에게 살인죄를 씌운다. 이때 춘은 조녀의 부정을 알게 되고 진을 옥에서 내오고 벼슬을 얻기 위해 엄숭의 아들 엄세번에게 윤부인을 바치기 위해 서울로 향한다.
윤부인의 남동생 윤여옥이 여자로 변장하고 누이대신 가마에 오른다. 윤여옥은 윤부인으로 행세하면서 엄세번을 구슬려 진을 귀양가게 하고 엄숭의 외동딸 월화와 남모르게 인연을 맺은 후 도망간다.
진은 귀양길을 떠나고 그 도중에 의로운 장사 류성희를 만나 독살의 위기에서 벗어난다. 정배지에서는 오래전에 죽은 줄 알았던 남부인의 부모들을 만난다. 그 후 은진이라는 한 선인을 스승으로 삼고 그에게 신묘한 방법을 배운다.
도적이 들끓자 류성희의 추천으로 진은 다시 등용된다. 춘에게 죄상이 드러난 범한은 조녀와 함께 도둑질을 한 후 사라져버렸다. 장평 역시 춘을 속여 돈을 뽑아내다가 끝내는 형부에 잡혀 들어간다.
춘의 죄상이 황제에게 보고되어 그도 형부에 잡혀 들어가고 그때서야 후회한다. 이 소식을 들은 진은 형의 옥사를 풀어달라고 간청한다.
진은 전투에서 연속 승전한다. 승전 후 서울로 가던 길에 남자평 부부와 죽은 줄 알았던 아내 남부인을 만난다. 전쟁에 있던 사이 엄숭은 가산을 몰수당하고 유배 갔으며 엄세번 또한 옥에 갇혔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간신무리들이 모두 벼슬자리에서 쫓겨났다는 말도 듣는다.
진은 황제에게 형 대신 자기가 죄를 받게 해달라고 청원한다. 춘이 풀려난다. 심씨와 춘은 진에게 용서를 빈다.
화씨 집안에 다시 화기가 흐르고 행복이 깃들게 되었다. 이에 반해 조녀와 범한은 죽임을 당한다. 엄숭이 거지꼴이 되어 찾아온다.
화진은 그 후에도 황제를 도와 공을 세웠으며 심씨가 세상을 떠나자 춘과 함께 삼년 거상을 극진히 치뤘다. 검소하고 의로운 생활을 하다가 나이 팔십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내려가 살았다.
<창선감의록>의 내용은 저러하고. 이 소설을 지은 조성기에 대해서만 살펴보겠다. 조성기는 조선 19대 숙종 때의 유학자이다. 자는 성경이고, 호는 졸수재(拙修齋)이다. 부친은 군수 벼슬을 지냈으니 대단한 가문 출신은 못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평생을 벼슬하지 않고 학문에만 힘을 썼는데, 시문에 능통하고 성리학을 크게 이루었으며 경제학에도 조예가 깊었다한다. 벼슬을 하지 않은 이유는 과거에 떨어져서가 아니었다. 그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과거에 응시하여 사마시에 여러 번 합격하였으나, 몸에 고질이 생겨 학문에만 전심한 것이라고 한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힘써 일찍이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였고, 사람들과 접촉을 끊고 깊은 방에 들어앉아 공부하기를 30년간이나 계속하여 천지만물과 우주의 이치에 통관한 이이다.
연암 박지원(朴趾源,1737~1808)의 <허생>에는 이 조성기가 나온다. 잠시만 <허생>을 엿보자.
변씨가 또 물었답니다.
“지금 사대부들은 병자호란 때에, 우리 임금인 인조가 남한산성에서의 항전을 포기하고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항복을 한 치욕을 설욕하려고 한다고 하네. 이제 뜻있는 선비로서 팔뚝을 걷어붙이고 그 지혜를 펼칠 때가 아닌가. 자네와 같이 재주 있는 사람이 어찌하여 스스로 괴로이 어둠 속에 파묻혀서 세상을 마치려는가?”
그러자 허생이 대답하기를,
“허, 이 사람. 예로부터 어둠 속에 묻혀 지낸 사람이 얼마나 많았나?
아, 졸수재 조성기 같은 분은 적국에 사신으로 보낼 만한 인물이 아닌가. 그렇건만 벼슬 한 번 못 해보고 거친 베옷을 입은 채로 늙어 죽었고, 반계 거사 유형원 같은 분은 족히 군량을 댈 만한 재능이 있었으나, 저 전라북도 부안 해곡에서 이리저리 슬슬 거닐며 돌아다니고 있잖나. 지금 나라 일을 보는 치들을 가히 알 만해.
연암이 허생의 입을 빌려 북벌의 허구성을 꼬집는 대목이다. 허생은 조성기를 적국에 사신으로 보낼 만한 인물인데, 벼슬 한 번 못 해보고 거친 베옷을 입은 채로 죽었다고 애석해하고 있다. 연암과 조성기는 꼭 1세기나 차이가 나는 인물이다. 조성기는 연암보다 백 년 먼저 조선을 살다간 이었는데도, 연암은 이 조성기를 찾고 있다. 그것도 세상에 쓰임 받지 못한 인재로. 그렇다면 뜻을 못 편 이들이 적지 않을 터인데 왜 조성기일까?
앞에서도 말했듯이 조성기는 과거에 응시하였고, 생원과 진사를 뽑던 사마시와 감시 등에 여러 번 합격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벼슬에 나아가지 않은 이유가 정녕 건강이 여의치 않아서였는지는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사람들과 교류를 피하면서 30여 년 동안 홀로 성리학을 연구한 대학자라는 점은 분명하다. 조성기가 20세에 낙마사고로 척추를 크게 다쳐 등이 굽은 척추장애인으로 살았다는 기록도 보이기는 하지만 이 이유때문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건 그렇고, 이러한 조성기이기에 한문소설인 <창선감의록彰善感義錄>의 작가라는 점을 예의주시해야 한다.
조성기는 17세기 후반에 중국 소설을 참조해 중국 명나라를 배경으로 문벌가문의 내부 갈등과 정국의 변화에 따른 화씨 가문의 흥망을 다룬 장편 소설을 내놓았는데 이것이 <창선감의록>이다. 그는 어머니의 시름을 위로하기 위해서라고 하였으나 소설의 이면에는 당대의 현실에 대한 골방 선비의 비판이 숨어 있음이 분명하다.
<창선감의록>은 화욱과 엄숭의 정치적 갈등이 화욱의 아들인 화진과 엄숭의 갈등으로 반복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예론禮論을 두고 벌어진 남인南人과 서인西人의 두 차례에 걸친 학문적 논쟁과 정치적 투쟁으로 조정을 들고나던 행태에 대한 우의寓意로 볼 수 있다. ‘우의’란, 글쓰기의 고수들이 다른 사물에 빗대어 비유적인 뜻을 에둘러 나타내거나 풍자하는 수법이다. 이 책에서 예론 논쟁의 전말을 다룰 수 없기에 간단히 언급하면 이렇다.
당시 효종의 비인 인선대비(仁宣大妃)의 상복문제로 야기된 예송(禮訟)이라는 이름의 정치적 쟁투가 있었다. 예송논쟁이란, 인선대비가 죽자 살아있는 인선대비의 시어머니인 인조의 왕비 조대비(趙大妃)가 어떤 복을 입느냐 하는 문제이다. 이때 서인은 대공설, 즉 9개월 복상을 주장하였고, 남인은 기년설, 즉 1년을 주장하였다. 당시 남인은 왕비의 예이기에 사대부나 백성의 예와 다르다는 논조로 왕권을 강화하여 1년을 주장하고, 반면 서인은 천하의 예는 같다는 주장으로 신권을 강화하여 9개월만 상복을 입으면 된다고 주장하였다. 결과는 서인이 패하였고, 조성기는 서인이었다.(여기서 언급하는 인선대비는 저 앞 ‘여성’에서도 살핀 인선왕후이다.)
그렇다면 화욱은 서인이요, 엄숭은 남인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
결국 이 소설은 화욱의 아들인 화진의 승리를 통해 현실에서 패배했던 서인의 사상을 옹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추론이 설득력이 있다면 조성기는 소설을 통하여 부녀자들이 좋아하는 흥미만이 아니라 역사의 반추로서 소설을 이용하였다고 볼 수 있으니 양수겸장이다.
이 소설이 널리 읽힌 데에는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 또한 배제할 수 없기네, 단순히 그의 문집인 『졸수재집(拙修齋集)』에 의거하여 단지 ‘소설 좋아하는 어머니를 위해 지은 책’ 정도로만 읽을 것은 아니다.
또한 간악한 아버지의 정실부인과 패륜한 이복 형, 그리고 요망한 첩으로 인하여 온갖 학대를 받으면서도 온갖 정성으로 그 적모(嫡母)와 이복형을 위하는 것을 보면, 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간의 우애를 강조하는 윤리소설로도 볼 수 있다. 이 윤리소설들, 즉 ‘충효’를 강조하는 소설들에서 한 가지만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한다. ‘충효’를 강조하는 소설들 속에는 무너져가는 양반 중심의 중세질서를 윤리를 통하여 붙잡아 보려는 안간힘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그 증거로는 여러 문헌에서 찾을 수 있는 유학자들의 독서 애독정황, ‘충효’를 강조하는 소설인 <소씨충효록>‧<서문충효록>‧<쌍성효행록> 등의 작품들 대다수가 한문으로 지어졌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이러한 소설들은 양반들에게서 배척받지 않은 것에 그친 것이 아니라, 양반 사대부가의 도덕교양 자료로서 널리 읽혔다. 따라서 이들 작품에서는 소설의 낭만성이나 사회적 사실성 따위를 찾기 어렵다.
다만 이 장에서 다룬 <창선감의록>의 사건전개와 구체적인 표현은 고소설에서 드물게 보이는 우수한 작품임에 틀림없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께서는 꼭 읽어 보시기 바란다.
<사씨남정기>
“네 죄는 일륜이니 음부는 들으라.”
유상서가 교씨에게 호통치는 소리다.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는 김만중이 지었다는 소설이다. <사씨남정기>를 국문소설이라 하나, 현재 우리가 보는 <사씨남정기>는 김만중의 작품이 아니다. 김만중이 한글로 지었다는 국문본 <사씨남정기>는 현재 전하지 않는다. 우리가 아는 <사씨남정기>는 후손인 김춘택(金春澤, 1670~1717)이 숙종 35년인 1709년에 유배지 제주도에서 김만중이 지은 국문 <사씨남정기>를 한문으로 번역한 것을 원본으로 하여 다시 한글로 번역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에서는 한문소설에 넣었음을 밝힌다.
현재까지 <사씨남정기>는 국문 필사본 이본만 135 편, 한문 필사본이 90편으로 총 편수로서 한문소설에서 <구운몽>의 뒤를 잇는다.
두 편 모두 김만중의 손에서 이루어졌다함은, 김만중의 소설가로서 글쓰기 능력이 대단했음을 실감케 해준다.
그렇다면 <사씨남정기>가 왜 이렇게 인기 있었을까를 살펴보자.
이양오(李養吾, 1737 ~1811)는 1786년에 쓴 「사씨남정기후서謝氏南征記後敍」에서 “이 전傳(『사씨남정기』)은 성현의 문자는 아니다. 그러므로 감히 그 그릇된 곳을 변명하고 고친다면, 곧 그 일을 논단한 것이 세상의 권계로 삼을 수 있으니, 권선징악의 도리에 있어서 또한 조그마한 보탬이 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이른바 ‘권선징악론’을 들어 『사씨남정기』를 적극 비평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양오가 말하는 이른바 ‘권선징악’이 무엇인가.
우선 줄거리부터 보고 이 ‘권선징악’을 풀어나가 보자.
유한림의 청혼을 받아들여 혼인한 사정옥이 현숙한 부녀자의 덕으로 가정을 이끌어 가는데, 불행하게도 두 부부 사이에 자식이 없다. 봉건사회에서 부인이 자식을 두지 않으면 언제든지 쫓겨갈 수 있는 상황에서 사씨 부인은 유한림에게 집안에 첩을 들이기를 청한다. 부인을 너무나 사랑한 유한림은 처음에는 그것을 반대하나 사씨 부인의 간절한 청에 못 이겨 결국 첩을 들인다. 그 첩이 바로 사악한 교씨이고, 그 교씨는 곧 첩으로서 자식을 낳게 된다. 그런데 사씨에게도 태기가 있어 곧 아들을 낳게 된다. 첩으로서 위기의식을 느낀 교씨는 동청과 결탁하여 자기가 낳은 자식을 죽여가면서 사씨에게 누명을 씌워 사씨를 남쪽으로 내쫓게 된다. 그리고 자신은 유한림의 정실부인이 되고, 이로 인해 유한림의 총애를 받으나 곧 교씨는 동청과 계획을 짜고 유한림을 내쫓으려 한다. 결국 그 계획은 동청의 상소로 실행에 옮겨지고, 이 일로 유한림 유배의 길을 떠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사씨 또한 교씨로부터 생명에 위협을 느끼나 하늘의 도움으로 살아난다. 시간이 흘러 임금의 은혜를 입어 유한림이 유배지에서 풀려나나 후환을 두려워하는 동청과 교씨로부터 또 생명의 위협을 당하게 된다. 하늘의 도움으로 살아난 유한림은 사씨와도 재회하게 된다. 이후 모든 것이 교씨의 음해였음을 뒤늦게 깨달은 유한림이 교씨를 잡아 사형시키고, 동청을 처벌하고 나서 사씨와 결합하고 행복하게 살았다는 내용이다.
줄거리만 따라잡아도 악한 동청과 교씨가 축출되고, 선한 사씨가 다시 유한림과 행복하게 산다는 줄거리에서 독자들이 ‘권선징악’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사씨남정기>는 특히 이 점에서 다른 소설들에 비하여 강한 면을 보인다. 그것은 선과 악의 대비가 극명하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집에 있던 금은 주옥을 비롯한 값진 재물을 모두 꾸려가지고 갔으나, 그 눈치를 아는 사람도 감히 막을 수가 없었다. 집을 떠난 교씨가 사흘 동안 주야로 급행하여 약속한 지점에 이르니 동청이 부임 행차의 의의를 갖추고 벌써 거기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 탕아 음부는 서로 만나서 이제는 저희들 세상이 되었다고 기뻐 날뛰었다.
"인아는 원수 사씨의 자식인데 데려다 무엇하겠소? 빨리 죽여서 화근을 없앱시다."
동청의 말을 옳게 여기고 시비 설매에게,
"인아가 장성하면 너와 내가 보복을 당할 테니 빨리 끌어다가 물에 넣어서 자취를 싹 없애 버려."
하고 명하였다.
패악무도한 교씨와 샛서방인 동청은 사씨의 아이인 어린 인아까지도 죽이려 든다. 그러나 선인은 하늘이 돕는 법이다. 교씨는 우리 고소설에 등장하는 악녀 중의 악녀요, 요부중의 요부다. 교씨는 질투, 음란, 사악, 간특한 꾀, 살인 등 악녀로서 갖추어야할 조건을 완벽히 갖추었고 <사씨남정기> 전편에서 이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독자들로서는 당연히 이 교씨를 원망하는 마음이 사무칠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요, <사씨남정기>의 대중성에는 이 교씨가 가장 중요인물임을 언급할 필요조차 없다. 책을 읽어가며, 혹은 전기수에게 이 소설을 들으며, 모든 이들은 교씨의 악랄함이 도를 더할수록 그에 대한 응징을 기다리는 마음 또한 커지기 때문이다.
<사씨남정기>의 결말부분은 아래와 같다.
유상서가 큰 호통을 하며 꾸짖었다.
"네 죄를 아느냐!"
"제 죄를 어찌 모르겠습니까마는 관대히 용서하여 주십시오."
"네 죄는 일륜이니 음부는 들으라. 처음에 부인이 너를 경계하여 음탕한 풍류를 말라 함이 좋은 뜻이어늘 너는 도리어 참소하여 여우의 탈을 썼으니 그 죄 하나요, 요망된 무녀 십랑과 음모하여 해괴한 방법으로 장부를 혹하게 했으니 그 죄 둘이요, 음흉한 종년들과 동청과 간통하여 당을 이루고 악행을 하였으니 그 죄 셋이요, 스스로 저주하고 부인에게 미루었으니 그 죄 넷이요, 동청과 사통하여 가문을 더럽혔으니 그 죄 다섯이요, 옥지환을 도둑질하여 간인(奸人)을 주어 부인을 모해하였으니 그 죄 여섯이요, 제 손으로 자식을 죽이고 그 악을 부인에게 미루었으니 그 죄 일곱이요, 간부와 작하고 부인을 사지에 몰아넣었으니 그 죄 여덟이요, 아들을 강물에 던졌으니 그 죄 아홉이요, 겨우 부지하여 살아가는 나를 죽이려고 하였으니 그 죄 열이다. 너 같은 음부가 천지간의 음악한 대죄를 짓고 아직도 살고자 하느냐?"
교녀가 머리를 땅을 받으면서 울어대고,
"이것이 모두 제 죄이오나 자식을 해친 것은 설매가 한 일이요, 도적을 보낸 것과 엄승상에게 참소한 것은 동청이가 한 일입니다."
하고 사씨 부인을 향하여 울면서 호소하되,
"저는 실로 부인을 저버린 죄인이오나 오직 부인은 대자대비하신 은혜로 저의 잔명을 살려 주시비오."
부인 사씨는 눈물을 머금고 떨리는 음성으로 대답하였다.
"네가 나를 해하려 한 것은 죽을 죄가 아니지만 대감께 죄진 너를 내가 어찌 구하겠느냐?"
유상서는 교녀의 비굴한 행색에 더욱 노하였다. 곧 시동에게 엄명하여 교녀의 가슴을 찢어 헤치고 심장을 꺼내라고 하였다. 이때 사씨 부인이 시동을 만류시키고,
"비록 죄가 중하나 대감을 모신 지 오랜 몸이니 시체는 완전하게 처치하십시오."
유상서는 부인의 권고에 감동하고 동편 언덕으로 끌어내다가 타살한 후에 시체를 그대로 버려서 까막까치의 밥이 되게 하라고 명하니 좌중의 모든 사람이 상쾌하게 여겼다.
교씨는 “까막까치의 밥”이 되었다.
독자들은 이 장면을 기다렸을 것이요, 여기에서 막힌 것이 뚫리는 소설적 카타르시스를 경험하였다. ‘권선징악’을 인정받은 소설들은 비교적 긍정적인 평을 유지한 것은 이러한 의미에서 당연한 귀결이다.
이 권선징악을 고소설 비평으로 좀 더 짚자면 ‘감계론鑑戒論’이라한다. 감계론은, ‘잘못을 교훈 삼아 다시는 그런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하는 경계의 도리’가 소설에 있다는 용어이다. 이 감계론은 우리 고소설의 대표적인 비평어로 소설의 효용성을 강조하는 용어이기도 하다.
특히, ‘선’과 ‘악’의 대비에 의한 이 용어는, 중국의 소설비평어인 ‘홍운탁월법烘雲托月法’이나 ‘츤탁법儭托法’과 유사하다. ‘홍운탁월법’은 화법이기도 한 것으로, ‘달을 그릴 때, 직접 달을 그리지 않고 구름을 그려서 달을 드러내는 방법’이다.
츤탁법 역시 문장 짓는 법인데, ‘츤儭’이란 피부에 닿는 속옷이므로 뜻은 안에 있으면서 그 뜻이 밖에 드러나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즉, 이 두 용어는 객체를 묘사함으로써 주체를 더욱 드러내는 수법이니, 우리의 고소설에서 선과 악을 대비시킴으로써 더욱 선을 부각시키려는 소설이론으로 치환할 수 있다.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킨다.”
<사씨남정기>와 연결하여 감계론을 살짝만 더 보자.
‘감계론’은 이우준의 『몽유야담』 하, 「소설」에서 “거울로 삼아 조심하게 하여 선을 권장하고 악을 징계한다.”는 ‘감계권징鑑戒勸懲’과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킨다.”는 ‘감동인심感動人心’ 또는 ‘감인感人’이라는 용어와도 동일하다. 이 ‘감계론’은 이 외에 여러 문헌에서 확인할 수 있는 바, 「남정기서南征記序」만 인용해 본다.
아래 글은 작자 미상인 「남정기서」에서 <사씨남정기>의 효용성을 감계적 기능을 들어 비평하는 글이다.
후세에 첩을 두는 자로 하여금 감계하여 살피는데 조심하고, 부인된 자로 하여금 감계하여 행실을 조심하고, 버림당한 부녀자는 감계하여 몸을 다스리는데 조심하고, 첩이 된 자는 감계하여 사납게 될까 조심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자는 감계하여 사람 부림을 조심하고, 정권을 쥔 자는 감계하여 나아가는데 조심하여서 어려운 일에 이르지 않도록 한다면 곧 유학에 만의 하나라도 도움이 될 것이다(使後世之爲夫畜姬妾者 鑑而操于察 爲婦者 鑑而操于行 爲棄婦者 鑑而操于乂 爲妾者 鑑而操于厲 爲國者 鑑而操于用 用柄權者 鑑而操于進 不至於亂梯 則於斯文萬一云耳). (작자 미상, 「남정기서」 『한국고소설관련자료집』 Ⅰ, 태학사, 2001, 150쪽)
<사씨남정기>의 감계를 첩을 두는 자, 부인된 자, 버림당한 부녀자, 첩이 된 자, 나라를 다스리는 자, 정권을 쥔 자에 대한 감계와 조선의 최고의 국가시책 이념인 유학에도 도움이 된다고 써 놓았다.
신선의 손톱이 등을 긁는 것 같도다.
유진한(柳振漢,1712∼1792)의 <유한림영사부인고사당가(劉翰林迎謝夫人告祠堂歌)>에 보이는 문장이다. <유한림영사부인고사당가>는 ‘유한림이 부인을 맞이하여 사당에 고하는 노래’라는 뜻이다. 유진한이 <사씨남정기>를 보고 마지막에 교씨가 창부가 되었다가 처형당하고 동청은 목 베임을 당한 것을 언급하며, 이 일이 ‘신선의 손톱이 등을 긁는 것 같도다.’라고 소설을 읽은 감흥을 적은 문장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말한 문학적인 감흥인 카타르시스(katharsis)란 이럴 때는 쓰는 용어일 듯하다.
<사씨남정기>를 보고 그 감흥을 읊은 글은 이 외에 <한양오백년가> 등이 더 있다.
그런데 여기 수상쩍은 말이 있다.
그것은 ‘첩’이다.
우선 <사씨남정기>가 인기를 끈 또 다른 이유를 보고, 이 첩의 문제를 조금 뒤에 다시 한 번 설명해 보겠다.
<사씨남정기>가 인기를 끈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사씨남정기>가 당시 현실과 연결해서 해석하면, 매우 흥미로운 결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숙종은 유한림이요, 사씨는 인현왕후, 교씨는 장희빈으로 보면 적확하게 당시의 상황과 맞아 떨어진다. 당시 숙종은 인현왕후를 폐출시키고 장희빈을 왕후로 올렸다. 이를 못 마땅히 여긴 당시 사람들은 장희빈을 장다리에 인현왕후를 미나리에 비유하여, “미나리는 사철이고 장다리는 한 철 이라.”는 노래를 지어 불렀다. 이를 참요(讖謠)라고 한다. 무와 배추에서 돋은 꽃줄기를 ‘장다리’라고 한다. 물론 봄꽃으로 반다. 반면 미나리는 사철 푸른 여러해살이풀이기에, 장희빈에 대한 미움과 인현왕후에 대한 연민을 표현한 것이다.
김만중은 이러한 인현왕후 폐출이 잘못되었음을 상소하다가 유배되었다. 그리고 그 유배지인 경남 남해군 서면 망운산(望雲山) 언저리에서 이 소설을 썼다.
김만중이 이러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김만중은 유복자였다. 따라서 동생은 없고 위로 형 한 명 만이 있었다. 그 형이 광성부원군( (光城府院君) 김만기金萬基, 1633~1687)였다. ‘부원군’이란, 조선시대 임금의 장인이나 정1품 공신에게만 주는 호칭이었다. 김만기는 장녀가 바로 숙종의 첫 부인인 인경왕후(仁敬王后, 1661~1680)였다. 따라서 김만기가 ‘광성 김 씨’이기에, 광성부원군이라 부른 것이다. 김만중은 당연히 임금의 사돈이요, 황후가 조카딸인 조선의 내로라하는 광영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1674년 숙종의 즉위와 함께 왕비에 오른 인경왕후는 두 딸을 낳았으나 일찍 죽었고 그 자신도 이승을 달리한다. 이 비운의 왕후 뒤를 이은 여인이 인현왕후(仁顯王后, 1667~1701)요, 그 인현왕후를 내친 것이 장희빈 희빈장씨(禧嬪 張氏, 1659~1701)이다. 외척으로서 김만중의 왕실에 대한 관심은 당연하였다. 더욱이 자신의 조카딸을 이은 인현왕후가 축출되는 것을 보며, 조카딸과 동일시되는 인현왕후에게 연민을 느꼈음을 저러한 관계로 보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실상 김만중은 인현왕후의 복귀를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하였고 귀향을 가게 된 것도 그 이유이다. 하지만 김만중(金萬重, 1637∼1692)은 1694년의 갑술옥사(甲戌獄事)로 인현왕후가 다시 왕후로 복위하기 2년 전에 세상을 뜨고야 만다. 인현왕후는 예의바르고 정숙했다고 하며, 그를 주인공으로 하여 궁녀가 쓴 소설 <인현왕후전(仁顯王后傳)>도 전해진다.
<사씨남정기>는 이러한 내력과 직간접으로 연결되어 있는 소설이다. <사씨남정기>가 비록 ‘명나라 가정 연간, 금릉 순천부를 배경’으로 한 소설일지라도 독자들은 저러한 내력을 모를 리 없다.
<사씨남정기>는 이렇게 소설 작품 이전에 독자들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하였기에, 저 위에서 언급한 ‘권선징악’과 연결되어 많은 독자층을 형성한 것 또한 당연하였다. ‘권선징악’에 대하여 첨언 한 마디만 하자.
많은 현대 독자들은 우리 고소설의 이 ‘권선징악’을 꽤 진부한 주제로 여기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세계적인 대문호의 작품치고, 그 어느 소설의 주제가 권선징악이 아닌 것이 있나? 영국이 인도와도 바꾸지 않겠다고 한 윌리엄 셰익스피어, 독일의 까뮈, 러시아의 톨스토이는 물론이요, 하드보일드한 냉혹하고 비정한 문체를 즐겨 쓴 어니스트 헤밍웨이도, 심지어는 <해리포터>조차 모든 작품의 내면에는 권선징악이 흐르고 있잖은가? 또 따지자면 우리의 삶도 이 권선징악을 지향한다. 권선징악이 아니기에 사는 것이 힘들지, 권선징악이라면 삶이 뭐 어렵겠는가. 그렇다면 이 권선징악이야말로 우리의 영원한 로망이요, 바람이다.
그러니 고소설의 ‘권선징악’만이 고색이 창연한 구성이라고 따지고 들 일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저 앞에서 말만 걸어 두었던 ‘첩’ 문제를 살펴보겠다.
우리 사회에서 ‘첩’이라는 이름은 사회학적 표지로서의 악’의 은유이다. 그러한 정서에 이바지 한 것이 ‘계모형 가정소설’이다. <사씨남정기>기 이러한 ‘계모형 가정소설’임은 물론이다.
‘첩’이라는 이름은 사회학적 표지로서 악’의 은유
임․병란을 거치면서, 17세기는 조선은 극심한 당쟁과 함께 장기집권층인 벌열이 성립되고 오늘날까지 시퍼런 장도를 휘두르는 성씨로 묶인 종족조직과 직계중심의 종손사상이 형성되었다. 종손사상은 혈연주의, 직계주의, 장자우선주의로 특징되는 족보를 간행하는 한편 문중을 중심으로 조직화되었다. 이것은 임․병란을 거치면서 국가조직은 흔들리고 가정 또한 그만큼 일그러졌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중세의 질서에 철저히 종속된 가정 복원을 전면에 내세운 것이 바로 우리의 가정소설들이다. 이 가정소설은 군담소설 이후에 출현하였고, 특히 계모형 고소설들은 바로 이러한 가정을 그린 것이다. 국가니, 충이니 하는 거대 이념이 가정이라는 작은 곳으로 눈을 돌렸다. 일그러진 가정의 복원이야말로 최고의 삶의 잣대로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우리의 가정소설이 대개 ‘일그러진 가정의 제 모습 찾기’라는 점은 이를 반증한다. 우리나라를 배경으로 한 대표적인 계모형 소설만 들어도 <장화홍련전(薔花紅蓮傳)>․<콩쥐팥쥐전>․<정을선전(鄭乙善傳)>․<조생원전(趙生員傳)>․<김인향전(金仁香傳)>․<황월선전>․<김취경전(金就景傳)> 등이 있으며 중국을 배경으로 한 것도 여러 편이다.
계모형 고소설을 읽는 데는 독자의 안목이 꽤 필요하다.
지금도 그렇지만 사람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참 외로운 일이다. 더욱이 중세의 여인으로, 여기에 계모라는 관형어를 숙명처럼 붙이고 살아가야만 할 ‘특별한 그녀들’에겐 더욱 그러하였다. 이 ‘특별한 그녀들’이 나오는 소설이 바로 계모형 고소설이다. 당연히 계모형 고소설에는 이야기 표면보다 더욱 심각한 문제가 내재해 있다. 그것은 조선인의 사회문화관계에서부터 이야기를 풀어가야 한다.
조선은 일부다처제가 허용되고 ‘관계’를 중시하는 사회였다. 여기서의 ‘관계’란 너와 나, 나와 너의 서로 주고받는 관계가 아니다. 조선의 관계는 ‘나’를 중심으로 한 관계이며, 이것은 절대적으로 변하지 않는다. 물론 ‘나’는 집안의 ‘적자’, 즉 본처 소생이어야만 한다.
‘계모’는 본처 소생이 보았을 때의 용어이다. 본처 소생에게 ‘계모’는 어머니의 자리를 아버지에게서 빼앗아간 부정적인 용어일 뿐이다. ‘계모’라는 태생부터가 저토록 어둠이다. 계모에 대한 조선인들의 심사는 모질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발행한『한국구비문학대계』8-3에 수록된 <계모심술노래>를 들어보자.
하서럽땅 하선부야/ 더시럽땅 장개와서/ 우리문전 대문전에/ 석류나무 안섰디요/ 만구름 썩은물에/ 비오비상 술을해서/ 은잔이라 받거들랑/ 은젯가치 손에들고/ 외우한분 젓어보고/ 오리한분 젓어보소/ 아니젓고 잡우시면/ 만경장파 떠나리다/ 대청 끝에 저큰아가/ 그노래가 듣기좋소/ 다시한분 더부리소/ 열에두폭 처알/ 행리하던 저선부야/ 은잔이라 받거들랑/ 은젯가치 손에들고/ 외우한분 젓어보고/ 오리한분 젓어보소/ 아니젓고 잡우시면/ 만경장파 떠나리다/ 정지에라 장모님아/ 이술한잔 같이먹고/ 동행을 해가 가자.
이 노래는 계모의 딸이 기둥을 안고 돌면서 부르는 노래이다. 내용은 계모가 전처 사위를 볼 때 샘이 나 초례청에서 예를 올리는 사위에게 독을 탄 술잔을 건네주어 해코지하려는 것이다. 한편 노래를 듣고 사정을 알게 된 사위는 모르는 척하며 ‘정지에 장모님아, 이 술 같이 묵고 동행을 해가 가자’라고 한다.
계모의 잔인함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노래로 볼 수 있다. 계모에 대한 이러한 시각은 이미 뚜렷한 ‘사회병리학적(Social pathological) 현상’이었다. 물론 ‘계모’에 대한 이러한 시각은 조선 517년으로도 모자라 정도의 차이만 있지 현재까지 연면히 이어진다. 집안의 실권자로 군림하는 TV 연속극이 그렇지 않은가. 그러니 이 문제를 처첩간의 갈등이나 선악의 대립정도로 개인차원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차설, 계모가 이렇듯 ‘사회병리학적 현상’이라면, 그 ‘사회병리학적 현상’을 일으키는 원인인 ‘병인(etiology)’은 무엇일까? 독자들께서도 나름 집히는 게 있겠지만, 저자는 현재에도 그대로 남아 있는 조선인 특유의 편집증적 강박관념인 ‘유교적 출세지상주의’와 묘한 연결고리를 형성한다고 생각한다.
그 연결고리를 풀어보자.
이것은 첩들의 ‘전실 소생 죽이기’에서 문제를 풀 수 있다. <사씨남정기>에서도 교씨는 그 어린 인아를 죽이려하고, <홍길동전>의 초란이란 계모도 어김없이 홍길동을 죽이려 자객을 보낸다. 그렇다면 왜 첩들은 끊임없이 전실 소생을 죽이려고 할까? 그 속에 내재한 그녀들의 속내는 무엇이며, 문자 이면에 그 이유가 어떻게 굴절되어 숨어있을까?
소설의 행간을 살펴보면 의외로 간단하다. 그것은 조선인들의 전략적인 거점인 ‘입신출세(立身出世)’라는 유교적 이상이 낳은 필연적인 비극에서 출발한다. 중세 사회로부터 지금까지 조금도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출세’라는 버려야할 흉물스런 두 자가 우리 삶의 황금률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사느냐?’가 아니라, ‘무엇이 되느냐?’가 더욱 가치 있는 삶의 척도이다. ‘어떻게 사느냐?’는 나만의 문제로 그치지만, ‘무엇이 되느냐?’는 반드시 남과의 치열한 경쟁이 따라 붙는다. 끊임없는 상대방과의 비교를 통한 우월을 통해 얻어내야 할 결과이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에게 이 가치관, 즉 ‘출세 숭배증’은 잘 정착되었고, 지금까지도 대한민국 집집마다 잘난 문패로 붙어 위용을 대내외에 과시한다.
‘출세 숭배증’을 통한 심리적 만족을 위해서는 상대방으로부터 우위를 점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사회에서 절대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계모이다. ‘계모’는 정상적인 삶을 누릴 수 없는 지표로서의 존재였다. 유교적 사회는 계모의 진실성을 강탈했고, 사람들은 ‘계모’라는 폭력적 표지만으로 그녀를 보았다. 계모의 진실은 낯설어지고, 그 자리에는 사회학적 표지로서의 ‘계모’만 남았다. 이렇게 ‘계모’의 사회학적 표지는 ‘주홍 글씨’라는 굴레를 씌우는 비극적 메타포가 되었다.
계모라는 사회학적 표지는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계모에 대한 사회의 맹목적인 증오는 관성의 법칙인 양, 그들의 자식에게까지 이어진다. ‘계모’의 등장에 따른 ‘전실 소생’과 ‘첩의 자식’ 또한, ‘전실 소생’과 ‘첩의 자식’이라는 ‘명칭부여효과’를 그대로 경험하고야 만다. ‘계모와 계모의 자식들은 사람답게 살 수 없다.’는 정언명령이다. 정언명령이란, 모든 행위자가 무조건 절대적으로 지켜야 하는 도덕률이다. 반드시 지킬 수밖에 없는.
계모들 또한 이를 잘 알고 있었으니 저 여인들에게 세상은 희망이 난망이었다. 중세시대, 계모는 그렇게 신분적으로도 인간적으로도 상층부로 자신을 올리려는 욕망을 거세당하였고, 자식 또한 자신의 동어반복이다. 계모가 된 순간부터 당사자들로서는 이미 ‘계모’라는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온전한 인간으로서의 존재가 결여된 계모는 자신의 욕망을 거세당한 것에 대해 공격성을 보이고, 이것이 바로 계모의 ‘전실 소생 죽이기’이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자기 방어기제(self defense mechanism)라고 한다. 자기방어기제는 강한 자보다 약한 자에게 나타나는 것이 특성이다.
저 시절은, 재주 많고 총명한 자가 득세하는 사회가 아닌 신분으로 미래가 정해진 세상이었다. 자식을 염려하는 부모로서 적자 소생과 제 자식을 비교할 수밖에는 없고, 그러하니 계모로서 자연 ‘전실 소생 죽이기’라는 무리수를 둔 것이다. 계모라는 이름으로 사는 그녀들은, 그녀와 그녀의 소생에 관한한 잡종열세에 의한 생물학적 예증을 단단히 믿는 조선인의 틈새를 비집기 위해, 아니 살아내기 위해서, 전실 소생 축출이라는 자위적인 행동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자면, <김취경전>이 그렇다. <김취경전>에서 계모 안씨는 천성적으로 패악하였던 것이 아니다. 그녀가 처음에 계모로 들어 와서는 전실 자식 남매를 제 친자식처럼 위하였다. 계모 안씨의 돌변은 자기 소생인 남매를 얻고 부터인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현재까지도 널리 유전하는 수많은 계모형 이야기들 속의 그 파리대가리만한 ‘계모’ 혹 ‘첩’이란 글자는, 그녀들에게는 가슴을 파고드는 비수요, 삶의 사슬임에 분명하다. 독자들이 고소설에서 ‘계모’를 단순히 서사적인 문맥을 이끄는 악의 축으로만 읽어서는 곤란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저 위의 ‘병인’을 하나 더 찾자면 ‘무능한 가장’이다. 처에 더하여 첩을 얻었으면 그만큼 가장으로서 책무를 더하여야한다. 이리저리 휘둘리면서 감당 못할 여인의 운명을 왜 틀어쥔 단 말인가. 한낱 첩을 여인이 아닌 ‘성적 노리개’ 쯤으로 여겼다는 의미이다. ‘딱하기 그지없는 남정네들’이 저 시절에 꽤 많았고, 그 수보다 더 많은 것은 ‘첩들’이었다.
저 위의 「남정기서」에는 이러한 점이 그대로 박혀있다. 현대 독자들이 <사씨남정기>를 읽으며 잠시 눈을 붙여주고 생각해줘야 할 곳이다. 계모들에게 저 시절은 치명적인 결함이었다. 그래 그렇게 밖에는 살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계모들도 저 시절을 살아내야 했기 때문에.
“후세에 첩을 두는 자로 하여금 감계하여 살피는데 조심하고, … 첩이 된 자는 감계하여 사납게 될까 조심하고”가 그러하다.
‘첩’을 마음대로 두던 시대, 첩은 저렇게 없었다.
참고로 양자로 들인 아들과 양모의 갈등을 첨예하게 다룬 <엄씨효문청행록> 같은 장편가문소설도 있다.
<사씨남정기>1,2,3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숙종대(1689~1692). 조선. 김려(金鑢, 1766 ~1821)의 『담정총서潭庭叢書』에 실려 있는 <장원경의 아내 심씨를 위해 지은 고시(古詩爲張遠卿妻沈氏作)>를 보면 백정의 딸인 방주(蚌珠;진주)가 여덟 살에 이 <사씨남정기>를 낭랑하게 읊은 기록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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