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자타는 어진 여인이다.
함부로는 하찮다고 하는 개미 한 마리도 죽이지 않으며, 늘 그러한 조심스런 발걸음으로 걸을 때에 만일 누가 본다면 그 우아함에 절로 눈을 떼지 못한다. 아직 초심이어서 어미 닭을 따라 나선 병아리처럼 조잘대기는 하나 마음에는 크고 큰 것이 텅 비어 있어 욕망에 물들지 않고 긴긴 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어느 따뜻한 4월초에 빨간 굽 낮은 구두에 무릎을 덮는 주름진 회색과 흰색이 교차된 원피스 치마 위에 하얀 가디건을 걸치고 마치 움직이는 영상처럼 단절 없이 사뿐하게 시장에 사는 유마라는 장사꾼을 찾았다.
수자타: 안녕하세요! 유마님. 저 또 왔어요.
유 마: 어서 오시게 수자타. 볼수록 더 이뻐지는군. 봄나들이라도 한 겐가?
수자타: (얼굴에 홍조를 띄며) 네. 봄꽃이 활짝 피어 꽃구경 할 겸, 그 동안 안녕하신지 문안 여쭙고자 들렸어요. 그리고 몇 가지 여쭤 볼 것도 있고 해서요. 앓고 계시던 천식은 좀 어떠세요?
유 마: 요즘 황사 현상이 심해서 바깥출입을 삼가고 있다네. 약을 3주째 먹는 중인데 도통 낫지는 않네만, 다행히 기침은 조금 가라앉은 듯 허이. 마침 잘 왔네. 여기 이 배추상자 좀 같이 옮겨 줄련가?
수자타: 네. ^^ (후다닥… 낑낑대며 상자를 나른 후 이마에 땀을 훔치고) 유마님, 제가 지난번에 「이 세상은 시작이 있을까 없을까, 유한할까 무한할까, 시작이 있다면 그것은 창조되었을까 아니면 저절로 되었을까, 몸과 영혼은 같을까 다를까」 등등에 대하여 질문 하였을 때에 유마님은 희론 이라 하여서 제가 잘 알아들었지만, 왜 사람들은 이런 희론에 대하여 끝없이 논하고 싶어할까요?
유 마: ^^
수자타: 또 그 웃음을 지으시는군요! 무슨 까닭에 또 웃으십니까?
유 마: 논함에 있어서는 네 가지가 있느니라.
하나는, 논함으로써 스스로 깨우침에 도움이 될만한 자리에서 논함이니, 즉. 화자나 청자나 다 같이 논하는 그 과정에서 예전에는 스스로 들이 몰랐던 깨우침이 문득문득 번쩍이는 것이니라. 이 어찌 밤새우지 않겠는가!
둘은 청자만을 위한 것으로써 이러한 말을 해주면 이 사람이나 그 곁 사람이나 그 곁 곁 사람 중 하나라도 알아들을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 될 때이니, 수고하여 목이 마르더라도 아낌없이 말하느니라.
셋은 스스로의 利益(이익)이나 다른 이로부터의 칭찬과 명예를 위하여서 하는 논이니, 비록 배운 바가 넓고 깊다 해도 종내는 삿되나니 스스로의 이익을 구하는 까닭이니라.
넷은 나르시즘의 정신적 결핍에서 오는 자기충족심리에서 하는 논이니, 겉으로는 어려운 철학적 용어를 쓴다 하여도 마침내는 스스로를 충족시키고자 함이니, 누구를 이익 되게 하려함이 아니니라.
이중에 앞의 두 경우에 논하는 것이 바른 논법이니 질문도 진지하며 대답도 진지하다.
논법이 바르다 함은 이와 같은 것을 말함이지 앞 문장과 뒷 문장이 가지런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이는 마치 앞문과 뒷문이 매우 가지런한 집에 욕심 많고 성을 잘 내는 어리석은 늙은이가 산다면 그 집을 훌륭한 집이라 할 수 없음과 같다.
나머지 두 경우의 논이 이와 같으니, 질문도 대답도 말꼬리나 잡을 뿐이고, 동문서답이 될 수밖에 없어, 자기 바라는 바 뜻에 맞지 않으면 언제나 성을 내며 분해하므로, 마땅히 피하여야 할 자리이니라.
수자타야, 너는 논할 때에 마땅히 이 중 어느 경우에 해당하여 논하는지를 살펴서 함부로 안다고 하여 끼어들지 말라.
수자타: 네. 명심하겠습니다.
부처님 말씀의 세 가지 정의(定義)가 ,
첫째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이요,
둘째는 제법무아(諸法無我)요,
셋째는 열반적정(涅槃寂靜)이라 한다 들었습니다.
각각의 뜻은 무엇입니까?
유 마: 수자타야, 만일 네가 바다 한가운데 떨어져 의지할 것을 찾을 때에, 너를 뭍으로 이끌어줄 큰 거북이가 3천년마다 한번씩 물위로 떠오른다고 하자. 네가 만나기 쉽겠느냐?
수자타: 어려운 일입니다 유마님. 제가 바다 한가운데서 그런 거북이를 만나 의지할 수 있으리라고는 가히 생각할 수조차 없이 어려운 일입니다.
유 마: 제행무상의 도리를 만나 그에 의지하여 사유하고 정려(靜慮)하며 모든 있다(有) 없다(無)의 단견(斷見)을 떠나 시간 속에 빠진 행위 하는 모든 것은 항상 함이 없어 영원하다고 할 만한 것이 없구나 하고 깨우치는 것은 그러므로 만나기 힘들다 함이니라.
가령 수자타야, 네게 3천 번의 몸을 갖게 하여 죽었다 태어남을 반복하게 하여도 네가 이 도리를 만나기는 참으로 어려우니라.
諸行無常의 낱말도 듣기가 어렵거든 하물며 몸소 사유하여 만남이랴!
어떤 것을 몸소 사유하여 만남이라 하는가?
수자타야, 여기 한 60살 된 行者가 있어 사유하기를 「내 일생 돌이켜 보니 갓 태어나 부모님의 은혜 가운데 있을 때에는 피부도 보송보송하고 목소리는 낭랑했으며, 숨소리도 고르게 쉬어 꿈조차도 없었고, 청년의 때만 해도 강건하여 사람들의 어깨까지 뛰어 올랐으며 개울을 건널 때에는 발에 물을 닿지 않게 날렵하게 건넜으나, 내 나이 어느 덧 60이 되고 보니 피부는 쭈글쭈글 하고, 목소리는 카랑카랑 하며, 무릎을 교차로 떼어놓기도 힘들고, 개울을 건너자니 아득하구나. 왜 이렇게 변했을꼬! 10년 전 만 해도 그럭저럭 정정했었는데 단 10년 사이에 이리도 변했구나. 어디 10년 사이에만 그리 된 것이겠는가, 사실은 일년 일년이 변하여 그리 된 것이다, 어디 일년이 변하여 그리 된 것이겠는가. 사실은 달 달이 변하여 그리 된 것이다, 어디 달 달이 변하여 그리 된 것이겠는가. 사실은 하루하루 변하여 그리 된 것이다. 어디 하루하루가 변하여 그리 된 것이겠는가. 사실은 시간 시간이 변하여 그리 된 것이다. 어디 시간 시간이 변하여 그리 된 것이겠는가. 사실은 매분 마다 변하여 그리 된 것이다, 어디 매분이 변하여 그리 된 것이겠는가. 사실은 매초마다 변하여 그리 된 것이다. 어디 매초마다 변하여 그리 된 것이겠는가. 사실은 찰나 찰나마다 변하여 그리 된 것이다.」 고 한다면 그는 모든 것이 한 순간도 그냥 있는 법 없이 변하고 있는 중이라고 본다.
이를 일러 제행무상을 몸소 사유하여 만남이라 하느니라.
여기에는 천당도 지옥도 없나니 왜냐하면 그것들은 다 변하는 중이기 때문이다. 변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고정 불변하게 이것은 천당이다 이것은 지옥이다 라고 이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니라.
어찌하여 변하는 중이라 하는가?
수자타야, 사람들이 지옥이나 천당에 드는 것은 삼독(三毒)의 다스림의 여부에 의하나니, 곧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니라.
아침에 일어난 분노는 저녁이면 없어지거나 누그러지며, 저녁까지는 간다 하더라도 다음 날에는 없어지거나 누그러지며, 다음 날까지는 간다 하더라도 한 달 후에는 없어지거나 누그러지며, 한달까지는 간다 하더라고 일년 후에는 없어지거나 누그러지므로 그에 따라 천당이나 지옥이 한시도 쉬지 않고 부지런히 변하는 것이 마치 그림자가 본 모습을 따르는 것과 같이, 거울 속 형상이 바깥 형상을 따름과 같이 있다 없다 오락가락하므로 도깨비와 같고 허깨비와 같으니라.
수자타야, 이르거니와, 결정하여 변하지 않는 것은 몸과 영혼을 다 뒤져보아도 찾을 수가 없느니라.
우리의 몸과 영혼(정신)은 거울 속에 비취어진 모습 같은 것이니, 거울 속에는 본디 어떤 모습이 따로 독립적으로 존재 하지 않으나, 비추이면 존재하느니라. 그러나 비춤을 주는 그것이 차례로 변하므로 거울 속의 그것도 따라서 차례로 변하는 것이니, 안과 밖이 모두 다 덩달아 변하기만 할뿐 항상 한 것은 없느니라. 저 하늘의 주재자라 칭하는 일 소천세계의 자재천도, 그 자재천 보다 천 배나 뛰어난 중범천도, 그 중범천 보다 천배나 뛰어난 대범천도 다 이 변하는 중에 들어있느니라. 변하는 중에 들어 있는 것은 「모든 것(유위법有爲法)」이니, 그러므로 게송으로 말씀하시되,
「인연 따라 생멸하는 「모든 것」은 다 꿈과 같고, 환술과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으며 또한 이슬과 같고, 번개와 같으니, 마땅히 이와 같이 관찰해야 하리라.」고 하셨구나.
다만 이「모든 것(유위법有爲法)」에서 부처님과 아라한 지위에 오른 그 제자들은 제외되느니라.
수자타: 어찌 하여 부처님과 아라한 지위에 오른 제자들은 제외한다고 하십니까? 「모든 것이 항상 함이 없다」 에서의 「모든 것」에는 부처님과 아라한은 제외한다고 한다면 「모든 것」이 아닐 것입니다.
유 마: 수자타야, 너는 어찌 생각하느냐? 저 바다 한 가운데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빠져 있는 것을 「저 모든 사람들이다 죽게 되었다」 하면 그 「모든 것」 에는 큰 배에 타고 있는 사람들까지 일컬어 하는 말이겠느냐?
수자타: 그것은 아닙니다. 큰 배에 타고 있는 사람들은 제외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유 마: 이미 모든 것이 꿈이요, 환술이요, 물거품이요, 그림자이며 이슬이요 번개와 같다고 보고 관찰하는 이는 제행무상의 괴로움에서 벗어나 있으므로 제행무상의 바다에 빠진 것이 아니니라.
수자타야, 또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큰 부자가 자선을 베풀어 널리 가난한 사람들을 모아 곳간의 곡식을 풀어 나누어주려고 하여 '자,「모두들」이리로 오시오. 나에게는 넉넉한 양식이 있으니 와서 마음껏 쌀을 가져가시오!' 하고 부른다면, 이 「모두들」속에 그 큰 부자의 권속들도 포함되느냐?
수자타: 그건 아닙니다. 큰 부자의 권속들은 제외하여 말씀하는 것입니다.
유 마: 이미 모든 것이 꿈이요, 환술이요, 물거품이요, 그림자이며 이슬이요 번개와 같다고 보고 관찰하는 이는 제행무상의 괴로움에서 벗어나 있으므로 제행무상의 곤궁에 처해 있는 것이 아니니라.
수자타야, 또 어떻게 생각하느냐? 한 마을에 독한 돌림병이 들어 사람들이 다 죽어 갈 때에 어느 유능한 의원이 그것을 보고 '내가 만일 저 마을에 가서 저 「모두를」치료 하지 않으면 다 죽게 될 것이다' 하여 그 길로 마을에 가서 모든 사람들을 고친다 하면 그「모두 다」에는 그 의원까지 포함되겠느냐?
수자타: 아닙니다. 그 유능한 의원은 제외되어 말씀 한 것입니다.
유 마: 이미 모든 것이 꿈이요, 환술이요, 물거품이요, 그림자이며 이슬이요 번개와 같다고 보고 관찰하는 이는 제행무상의 괴로움에서 벗어나 있으므로 제행무상의 돌림병에 걸려 있는 것이 아니니라. 이런 까닭에 부처님과 아라한의 지위에 오른 그 제자들은 마땅히 제외된다고 하느니라.
수자타: 그렇다 하더라도 유마님, 무슨 이익이 있어 이 제행무상의 이치를 만난다 합니까? 아무리 이치가 그러하다 하더라도 그건 마치 봄이 온 다음은 여름이 오고 여름이 온 다음에는 가을이 오며, 가을이 온 다음에는 겨울이 온다고 하는 것과 뭐가 다르겠습니까? 달리 아무런 이익도 없지 않습니까?
유 마: 수자타야, 그런 소리 말아라. 세상 일반 사람들은 봄 다음에 여름을 기다리고 여름 다음에 가을을 기다리며 가을 다음에 겨울을 기다려서 즉, 때를 보아서야 각각의 때에 맞는 일을 하지만, 이 제행무상의 법에 머물러서 고요한 행자는 몸이 병들어 아플 때에 가만히 관찰하여 참아내느니,
「이 세상에 항상 한 것은 없다. 제행이 무상하니 이 몸이 지금은 이렇게 병들어 아픈 것이 죽을 듯하지만, 항상 하지 않으므로 변하여 도로 건강해질 것이다」라고 사유한다.
이러한 사유함으로 그는 아무 원망함이 없이 무던히도 아파 오는 몸을 견디며 감내 하느니라. 또 이 제행무상의 법에 머물러 행자는 또 사유하기를,
「내가 비록 지금은 몸은 강건하고 재물은 풍족하여 아쉬운 것이 없을 듯 보이지만, 모든 것은 변하여 항상 하지 않으므로, 건강하다지만 병들 것은 시간문제요, 끝없이 숨 쉴 수 있을 듯하지만 곧 멈추게 될 것이다. 아침과 저녁으로 하는 수고들에 비하면 얻어질 것은 조금이구나.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자」 라고 하여, 마침내 모든 즐거움조차 업신여기거든 하물며 괴로움이겠는가! 」라고 사유 한다.
또 이 제행무상의 법에 머물러 고요한 행자는 분노가 일어날 때 가만히 사유하기를,
「이 분노는 조건 지워져 일어난 거울 속의 그림자이다. 눈(眼)의 거울에 거슬리는 형체가 비추이므로 분노의 그림자가 생기는 것 일뿐, 그림자에 속는 바보가 어디 있겠는가. 제행(諸行)이 무상하니 이 분노는 항상 한 것이 아니므로 곧 변하여 없어질 것이다」라고 알아차림으로 마침내 터져 오르는 분노를 참아 낸다면 그에게는 이익이 작지 않을 것이다.
제행무상, 그것은 거울 속에 비추인 그림자에 속지 않게 하는 거룩한 왕의 법과 같은 것이니, 이로 인하여 내가 얻는 모든 즐거움과 희락이 그것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것이든 땅으로부터 솟아나는 것이든 땅 아래 물 속에서 나는 것이든 종내는 변하여 없어질 뿐이라는 것을 알고 도리어 괴로움의 다른 이름이라 여기고 따르지 않느니라.
이렇게 관찰 하는 이를 일러 제일법인(第一法印)을 얻었다 하고 이 法印을 얻는 까닭에 제행무상의 법에 머물러 이익을 얻는다 함이니라.
이것이 어찌 굳이 봄·여름·가을·겨울의 때를 기다려 하는 것이겠는가!
그러나 모처럼의 이러한 거룩한 법인을 만나기도 힘이 드는데 어쩌다 만나고서도 하나님 혹은 天主를 빙자하여 외면하거나, 가당치 않게 비방하려 든다면 저 바다 한가운데에 빠진 사람이 모처럼 만난 큰 거북이를 눈앞에 두고도 '너는 왜 여기 나타났느냐? 나는 너에게 절도 하지 않을 것이요, 의지 하지도 않을 것이니, 사탄아 물러가라!'고 외치는 자와 같으니, 실로 가련하다 아니 할 수 없으리라.
수자타야, 부처님을 天人師(천인사)라고도 부르나니, 사람들에게 뿐만 아니라,모든 하늘들에게까지 부족함이 없는 스승이시기 때문인데, 이는 이러한 제행무상의 법을 사람들과 하늘들에게 몸소 가르치셨기 때문이니라.
수자타야, 이로 본다면, 너는 망망대해에서 그 3천년에 한번 떠오르는 큰 거북이를 만난 것이니, 어쩌다 만났거나 찾아서 만났던지 간에 부디 '모든 것은 항상함이 없다' 라는 이 명제에 깊이 감동하여 일어나고 사라지고, 오고 가고, 깨끗하고 더럽고, 있고 없고 하는 것에 끄달리지 말아야 하느니라.
수자타: 그러합니다. 유마님, 사람들이 저를 볼 때에 항상 '저기 수자타가 온다, 참으로 어여쁘구나!' 라고 감탄하며 반기우지만, 사실은 찰나 찰나마다 변하고 있는 나를 보고 '수자타야!' 함이니, 이는 마치 흐르는 물위에 붓으로 점을 찍으며 이름을 지어 부르는 것과 같고, 저 또한 매일 아침마다 화장을 하지만, 이것은 흐르는 물위에 밀가루를 부으면서 반죽함과 같아 가히 얻어 질 수 없는 것을 얻으려 하는 것입니다. 이를 즐거움이라 여기면, 두고두고 괴로움이 클 것이라 생각하니 감히 소홀히 하지 않으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