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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성 조각전 이태호(미술사, 전남대)
1994, 1995 / 2인전과 개인전 팜플릿
"우리시대 사실주의 조각의 정통성 회복과 민족조각의 재창조가 과제로 던져져 있는 현실에서 그 과제의 해결은 5월조각패와 같은 젊은 조각가들에 의해 이루어 질 것이다. 그 가능성을 점치는 이유는 이들의 젊은 조각이 다름아닌 자신들의 삶과 그 삶을 규정하는 우리 사회의 민중현실과 발맞고 있기 때문이다."
전봉준- "아내의 무덤 앞에서" "이처럼 5월조각패가 짧은 시간에 광미공의 조각분과로 자리잡고 성과를 다져내기까지는 공동작업과 그에 필요한 회원간의 만남이나 학습을 꾸준히 해온 노력이 숨어있다. 그 때문에 회원들은 모두 광미공을 굴러가는 중심축으로서 모범적인 역할을 하고 있고 5월미술전이나 가을 정기전 때마다 다른 분과에 비하여 항상 견실한 작품을 보일 수 있었다. 이들은 우리 시대가 안고 있는 사회모순이 극복되어가는 방향에 초점을 맞추고 5월의 역사와 민중 삶의 현실감정을 굳건하게 사실주의 조각으로 다져내고 있다."
시민군
"한편 2년 동안 회원들은 나름대로 각자 다른 생활로서 현실에 대응하면서 작업해오고 있다. 전회원의 공동작업장으로는 최근 새로이 서민아파트의 반지하 공간을 얻어 김대성, 이기원, 정순남 등이 여기에서 주로 생활하면서 작업에 몰두하였다. ...이들 회원 각자는 어려운 경제여건 속에서 그 해결방식이 다르고 작업량에 편차가 뚜렷하였지만 어느 때고 생활과 작업을 통합시켜 낼 수 있도록 가능한대로 작업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도록 서로를 끌어안으려는 모습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
무거운 어깨
"김대성은 턱을 고이고 있는 시골할머니의 <근심>어린 흉상과 미국쌀 칼로스를 나르는 부두노동자의 <무거운 어깨>를 통해 무거운 우리 현실을 이야기하고 있다."
여인 날지 못하는 새 바람 부는 언덕 샘
"한편 열악하기 그지 없는 우리의 근 현대 조각사에서 전통계승과 조선적 사실주의를 구축하려는 노력이 없었던 것만은 아니다. 김복진, 김만술, 박승구, 권진규 등의 작업에서 희미하게나마 전통의 재해석, 재창조의 노력을 만날 수 있다. 근대 이전이나 이후의 전통은 물론이고 가까운 선배들에 대하여 이을 것과 잘라낼 것을 구분하여 올바르게 계승하는 일 또한 우리 시대 사실주의 조각이 민족적 형식을 구축해 나가는 밑거름일 것이다. 김대성을 비롯해 오월조각패에 그 가능성을 부여하는 이유는 이들의 조각이 바로 현실에서 출발하였다는 데 있다."
전남 해남 생 전남대학교 예술대학
김대성, 문기언 조각 2인전, 젊은 작가 - 그들의 현실과 전망전, '남녘의 산하'전, '희망의 무등을 넘어'전,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기념미술제, 민중미술15년전, 청년조각전, '희망을 위하여'전, '더 넓은 민중의 바다로'전, '우리가 서야할 그곳에서'전, '그 싹은 열매되어'전, '일과 삶'전, 전국 청년미술제, 오월전...
근심
"수묵 3인전을 하면서 조각가 후배 김대성의 작품 <근심 - 할머니>를 내 졸작 수묵화 <수심 - 할아버지>와 맞바꿨다.
아무래도 대성이가 밑진 것 같다."
epilogue
" '대성이'는 내가 개인적으로 참 아꼈던 후배다. 사람을 두고 과거지사로 입술을 떼는 것은 예의가 아니지만 미술운동의 선배로서나 인생선배로서도 무엇 하나 해준 일이 없이 멀어져 소식을 끊은 것을 진행형으로 말할 순 없기 때문이다. 8,90년대를 달리면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날을 광장과 거리에 바쳤던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고민하며 그리며 내다 걸며 통음하였던가!! 말이지, 나는 가끔 누굴 소개하거나 아는 체 할 때에 벙어리처럼 입이 꽝 닫혀버리는 병증으로 아플 때가 있다. 미술운동은 그것대로, 교육운동 또한 무슨 한이 그리도 맺혔는지 그 시절 그 추억으로 한번 빠져들면 도무지 헤어나질 못했고 과한 말과 무슨 죄책으로 술 깬 아침이면 번번이 머리 채를 쥐어뜯었다. 김대성은 숫기가 없어 말 수도 매우 적다. 선배들 떠드는 소리에 묵묵히 듣고만 있지 도무지 묻기 전에는 한마디를 내놓지 않는다. 세상에 저리도 착한 '운동가'도 있을까 싶을 것이다. 그도 내가 저를 사랑하는 것을 아는지 그의 첫 개인전 오픈에서 내게 '축하 말'을 청해주는 것으로 제 심지를 보였다. 우리들은 거의 동시에 미술을 잃었다. 화가 (혹은 조각가)로 살아간다는 것은, 모름지기 '가짜 자기'의 빼어난 '신화 창조'에 익숙해져야 그나마 좀 한다는 이름도 얻을 터인데 우리들은 철저히 그런 재주를 타고나지 못했다. 서울이 혹 아니면 전국 어디라도 안 될 이 꿈을 일찌감치 알아챈 탓일까 뼈 같은 작품 한 점이라도 팔면 빚을 진거로 여겨 몇 달씩 앓아야 했으니! 저마다 뿔뿔이 흩어져 생업을 쫓는 것은 지당한 처신이리라. 요 몇 일 옛 팜플릿들을 꺼내어 이렇게 다시 보니 거참, 후회 스러움 보다 아조 열심히들 살았구나, 작품들이 제법 좋았구나! 함, 그땐 정말 힘든 줄 모르고 내달았지..하는 의외의 기쁨에 가슴이 져려오는 것을 느꼈다. 참 이상한 일이다. 내가 도가 조금 되어 미워하는 사람 둘레에 없다 하면서도 조금은 어딘가에 처박혀 있는 걸 아는데, 그것이 또 눈 녹듯 하는 것이니 이를 어찌 물어 야할지 모르겠다. '건강하고 평등한 민중 삶'에 대한 애착이 물러나지 않는 한, 동안 열심히 산 사람들을 다시 대하는 버릇 을 길러야겠지... 지금처럼 말고 참으로 더 좋은 날이 오도록 말이지! 2008. 2. 25 김 진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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