箕城君 諱兢 世系表 | ||||||||||||||
시조 |
언(彦) |
고려신무위대장군(종삼품)함풍군(高麗神武衛大將軍(從三品)咸豊君) | ||||||||||||
2 |
화(和) |
고려신호위대장군(종삼품)(高麗神虎衛大將軍(從三品) | ||||||||||||
3 |
상문(尙文) |
고려신호위대장군(종삼품)(高麗神虎衛大將軍(從三品) | ||||||||||||
4 |
순지(順之) |
고려검교흥위대장군(종삼품)(高麗檢校興威大將軍(從三品) | ||||||||||||
5 |
림(琳) |
고려문과상의직장동정(高麗文科尙衣直長同正) | ||||||||||||
6 |
요(堯) |
고려사순위부호군(高麗司巡衛副護軍) | ||||||||||||
7 |
인문(仁問) |
문과밀직제학 조선국초 증영상(文科密直提學 朝鮮國初 贈領相) | ||||||||||||
8 |
번(蕃) |
진사 문과 감사(進士 文科 監司) | ||||||||||||
9 |
삼길(三吉) |
증병조판서(贈兵曹判書) | ||||||||||||
10 |
춘수(春秀) |
문과응교별제전라좌수사 증이조판서(文科應敎別除全羅左水使贈吏曹判書) | ||||||||||||
11 |
긍(兢)파조 |
이조판서 봉 기성군(吏曹判書 封 箕城君)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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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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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원(伯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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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문(叔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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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하(仲河)
무후(無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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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강(季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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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 격 재(奏格齋)
① 所在地=광주광역시 북구 각화동 箕城君 先山 下
② 主祖=긍(兢)(11세)
③ 生卒=1389년(고려창왕원년)〜1433년(世宗15) 44세
④ 配位=貞敬夫人 光山李氏
⑤ 墓所=광주 북구 각화동 기성군 선산 하
⑥ 配享=射山祠
※배향=학덕이 있는 사람의 신주를 문묘나 사당 서원에 모시는 일
⑦ 祭享日=음 10월 15일
⑧ 행장(行狀)= 죽은 사람이 평생 살아온 일을 적은 글.
* 1389년 고려창왕원년 탄생1433년 세종15년 서거(44세)
* 1405년(16세) 태종 5년 文科及第
* 1417년 (태종17년) 승문원 교리 (從五品)
※조선시대에, 외교문서를 맡아보던 관아. 태종 10년(1410)에 설치하여 고종 31년 (1894)폐지
* 1425년 (세종7년)승문원(承文院)제조(提調)
* 1427년(세종9년) 丁未 重試乙科 及第
※조선시대 당하관(堂下官) 이하의 문무관에게 10년마다 한 번씩 보는 과거시험
* 1427년(세종9년) 판사재감사(判司宰監事)
* 1430년(세종12년) 吏曹左右參議 禮曹參議 工曹右參判 工曹參判 直提學 兼 弘文館 藝文館 大提學
知春秋館事 大司成 經筵 義禁府事 五衛都摠府 都摠 管 世子左賓客 崇錄大夫 吏曹判書 封箕城君
* 1433년 (세종15년) 종계변좌사로 연경에 다녀오는 길에 요동의 첨수참(甛水 站)=말을세워둔 역
(驛))에서 병으로 순직(殉職)함* 세종때 중국어와 사문(史文)에 정통하여 외교관으로 활약함과 동시에 학자이며 중신(重臣)이셨
다.
○ 奏格齋記
주격재기(奏格齋記)는 1938년 함평이씨 기성군파 후손들이 협심하여 기성군 李兢선생의 묘소가 자리 잡고 있는 곳에 세운 재실(齋室)=무덤이나 사당 옆에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지은 집) 이름이다. 위치는 현 광주시 북구 각화동 산록(山麓)에 있다.
최초의 건립 년대는 1938년인데 그동안 낡아지게 되어 1987년 봄에 문재로 개축 기공하여 1988년 봄에 새로이 아담하게 오간 東西齋 한옥(韓屋)으로 준공(竣工)하였고 정원(庭園)에는 이긍선생의 시비(詩碑)가 세워져 있다.
이 시비(詩碑)는 1987년 10월 25일에 건립되었는데 李兢선생이 明나라에 사은부사로 귀로중, 압록강 첨수참에서 병을 얻어 임종할 때 작시(作詩)하신 칠언절구(七言絶句)의 한시(漢詩)와 번역(飜譯)이 병기(幷記)되어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월전재반섬굴계(月殿再攀蟾窟桂) 상대삼접어로연(霜臺三接御爐煙)
휘음미주용지하(徽音未奏龍墀下) 량몽선심압수변(凉夢先尋鴨水邊)
왕정에서 두 번 월계수 휘어잡고 어사대에서 세 번 옥안을 뵈었도다.
기쁜소식 미쳐 아뢰지 못하고 압록강 가에서 먼저 이 세상을 떠나네!!
아래의 주격재기(奏格齋記)는 1938년 이긍(李兢)선생의 17세손인 승훈랑(承訓郞) 이계익(李啓翼)이 찬(撰)한 것으로 현재 주격재실내(奏格祭室內)에 현판으로 보존(保存)되어있는데 그 내용은 전재(轉載)하면 다음과 같다.
鳴呼 恭惟我先祖 箕城君 晟世蜚英 位躋崇品 事君盡忠 豐功偉蹟 載在惇史 垂耀後世 但私家之文獻不足 僅若杞宋 往玆王考 翠晩公用是爲優 博攷公私書籍而未獲其詳 先人梧山公 又嘗專力於斯 而齎志未遂 不肖啓翼 積年經已久矣 丙子冬10月 歲一祭時 往入漢城 披閱史庫所藏 始潯府君之實績 皎如日星 十世如一日實極言也
與諸族詢謀 竪大碑於神道 丁丑春謁銘于宋直閣奎憲 閔尙書丙承書蒃庶可以徵文悠遠矣 墓在光州角化山 卽禮葬之地此其丙舍也 每値雨露霜雪之際 諸族聚於斯 不但 怵惕之心 念祖聿之志 自然感發 莫非府君之遺澤也 古語曰爲恒人子孫易 爲賢祖子孫難 此謂小善不足 以承先小惡 適足以累先 可不敬歟 惟願諸宗 肯構肯堂 永世勿替 先祖之靈亦 將曰 余有後弗葉基也 勉旃勉旃
戊寅三月下浣 十七世孫 承訓郞 啓翼謹識
명호 공유아선조 기성군 성세비영 위제숭품 사군진충 풍공위적 재재돈사 수요후세 단사가지문헌부족 근약기송 왕자왕고 취만공용시위우 박고공사서적이미획기상 선인오산공 우상전력어사 이재지미수 불초계익 적년경이구의 병자동10月 세일제시 왕입한성 피열사고소장 시심부군지실적 교여일성 십세여일일실극언야
여제족순모 수대비어신도 정축춘알명우송직각규헌 민상서병승서蒃서가이징문유원의 묘재광주각화산 즉예장지지차기병사야 매치우로상설지제 제족취어사 부단 출척지심 염조율지지 자연감발 막비부군지유택야 고어왈위항인자손역 위현조자손난 차위소선부족 이승선소악 적족이누선 가불경여 유원제종 긍구긍당 영세물체 선조지영역 장왈 여유후불엽기야 면전면전
무인삼월하완 17세손 승훈랑 계익근식
○ 역문(譯文)
오! 삼가 생각건대 우리 선조 기성군은 밝은 세상의 훌륭한 분으로 벼슬이 높은 지위에 올라 임금을 섬기되 충성을 다하여 위대한 공적이 국사에 실려 있고 후세에 빛난다. 그러나 다만 사가의 문헌이 부족하여 상세한 것을 알지 못하므로 조부 취만공(翠晩公)이 근심하여 널리 공사의 서적을 상고하였으나 자세한 것을 찾아내지 못하였고 선고 오산공(梧山公)께서도 또 일찍이 이 일에 전력을 기울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불초 계익이 다년간 유념한지가 이미 오래되었는데 병자년(1936년) 시제때에 서울에 올라가 사고의 소장을 열람하고 비로소 부군의 행적을 알게 되었는데 명백하기가 일성과 같고 십세가 하루와 같으니 실로 결정적인 사실이었다.
여러 종족과 함께 상의 하여 묘소로 가는 길에 큰 비를 세우기로 하였다. 정축년(1937) 봄에 송직각 규헌에게 묘갈명을 받고 민상서 병승에게 전서를 받아 조금은 오래된 일을 고증할 수 있게 되었다. 묘소는 굉주시 각화산에 예장한 곳이며 이 건물은 그 재실이다. 매양 비가오나 눈이오나 여러 종족이 여기에 모여 함께 자면서 술척(沭惕)이는 마음이 있을 뿐 아니라 선조를 생각하여 잘 보수하려는 뜻이 자연 감발하게 되니 부군의 끼친 덕이 아니겠는가?
옛말에 이르기를 보통사람의 자손이 되기는 쉽고, 어진 선조의 자손이 되기는 어렵다고 하였다. 이른바 적은 선이 선조를 계승할 수 없고, 적은 악이 선조를 더럽힐 뿐인 것이니 가히 조심해야 하지 않겠는가? 바라건대 여러 종족은 재실의 손질을 영원히 그치지 않는다면 선조의 영혼 또한 장차 이르기를 나도 자손이 있어 터를 버리지 않는다 할 것이니 힘쓰고 힘쓸지어다.
무인년 삼월 하순 17세손 承訓郞 啓翼 삼가지음
▒ 奏格齋 柱聯詩 (五範作 五福書 大宗會常勤副會長 啓善 註解)
◇ 만당화기 사정춘(滿堂和氣 謝庭春)=만당화기가 봄 뜰에 고하여
◇ 서석저영 백세신(瑞石精靈 百世新)=서석(무등산)의 정령(혼백)은 백세토록 새로워질 것이다.
◇ 승지유명 위씨리(勝地有名 韋氏里)=경치좋고 아름다운 이곳은 덕망 있게 살아가는 함평이씨
(韋氏里 范義庄고사) 고장으로
◇ 필분무체 계승인(苾芬無替 繼承人)=향화가 폐(커짐)함이 없이 후손이 계승되리라
◇ 기성군조 여산앙(箕城君祖 如山仰)=기성군 할아버지를 산과 같이 우러러 섬기니
◇ 수복운잉 돈목친(壽福雲仍 敦睦親)=수복과 후손의 번창으로(雲仍) 돈목과 화친은 이루어 갈 것
이다.
○ 조선왕조실록 기성군 행적고
○ 箕城君 墓所 看山論
2012년 8월 22일(수) 09,00시 대종회총무 신행, 광주종친회장 재우, 기성군 파종회장 두범, 그리고 본인과 함께 기성군 묘소에 도착하였다. 일기예보에서는 많은 비가 내린다 하였는데 비가 내리지 안하여 천만다행(千萬多幸)이다 하고, 분주히 묘소에 이르러 관조(觀照)하면서 풍수법식을 살펴 상석(床石)에서 방향을 체크하는데 아니다 다를까 우수수 빗방울이 쏟아지기 시작하여서 할 수 없이 묘소 하단에 있는 관리인 주택에 머물면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지만, 계속 빗줄기기 더욱 강하게 내려서 순간 빗줄기가 약해질때 황급히 촬영을 하였다.
기성군(箕城君) 휘긍(諱兢)공께서는 본인의 직계조가 아니시니 별반 아는 바가 없으나 이번 행적고(行蹟攷)와 관련하여 묘소 간산론(看山論)을 작성하게 되었으니 본인으로서는 큰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箕城君께서는 1389년=(623년전) 고려 창왕 원년에 전남 함평군 나산면 우치마을에서 출생하셨으며 함평이씨 시조 휘언공의 11세손이시며, 父는 전라좌수사를 지내신 춘수공(春秀公)이요, 弟는 효우공 파조이신 접(慴)이시다.
휘긍公은 조선 태종5년=(1405년) 16세의 젊은 나이에 문과급제(文科及第)를 하시여 조정에 출사하신 후, 태종17년=(1417년) 승무원교리(從五品=조선 시대에, 집현전, 홍문관, 교서관, 승문원에 속하여 문한(文翰=문필에 관한일, 글을 잘 짓는 사람)의 일을 맡아보던 문관 벼슬. 정오품 또는 종오품) 세종9년=(1427년 3월 20일) 문과중시(文科重試)에 합격하시어 판사제감사, 세종12년=(1430년 12월 3일) 예조참의(正三品) 세종13년=(1431년 10월 8일) 우부대언 세종14년=(1432년 3월 18일) 이조우참의 동년 10월 12일 이조좌참의 동년 12월 8일 공조우참판 세종15년=(1433년 3월 24일) 공조참판(從二品)에 제수하신 후, 동년 5월 3일 사은부사(謝恩副使)로 중국 연경에 다녀오시다가 요동(遼東=만주) 압록강변 첨수참역(甛水站驛)에서 44세로 순직(殉職)하셨으니 실로 애석(哀惜)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문헌에 의하면 역사 이래 청백리(淸白吏)로 고명하신 방촌(厖村) 황희(黃喜)정승께서 세종왕께 李兢公을 천(薦=추천)하시기를 현 大臣중에서 중국어와 이문어=(여진족어)에 능통하신 신하는 당연 李兢公이라 하셨다는 기록을 보드라도 세종대왕 문치시대의 인재중 독보적인 인물이었음을 짐작함에 부족함이 었을 것이며, 다만 천수(天壽)가 짧아 경륜(經綸)과 덕치(德治)를 펼칠 기회를 거두어 가신 바가 후세에 이르기까지 통절한 슬픔이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날 본인이 확인 한 중요 내용은 광(壙=무덤)속에 기성군께서 요동에서 졸(卒)하셨기에 갑옷으로 장사를 하셨다는 설명을 *직계 자손인 신행, 두범제족으로 부터 듣고 매우 놀랐는데, 세종실록 60권 자료에는 세종15(癸丑年=1433년 5월 3일) 사은부사(謝恩副使)로 중국 연경에 다녀오시다가 요동(遼東) 압록강변 첨수참역(甛水站驛)에서 졸(卒)하셨다. 요동도사가 치제(致祭)하니 세종께서 부음을 들으시고 매우 슬퍼하시고 승지(承旨) 임은(林垠)을 보내시어 관곽(棺槨)과 미두(米豆=쌀과 콩)70석을 하사(下賜)하시고 광주 두방향(북구) 각화산 甲坐에 예장(禮葬)하였다. 그 후 이조판서(吏曹判書) 기성군(箕城君)에 봉(封)하셨으며 예장지는 사패지(賜牌地=임금이 내려주신 논밭)로 받으셨다. 기록으로 전해져 온다.
그러나 이해가 안 되는 것은 그당시는 전시(戰時)도 아니고 태평성대였는데 왜 갑옷으로 장사(葬事)를 하였겠는가? 이 부분이 명백하게 기록된 내용이 없다 보니 의문이 파장되었을 개연성도 무시할 수 없으나, 조선시대 사대부(士大夫)라면 풍수의 중요성을 신봉(信奉)하던 풍습으로 비춰볼 때, 비록 복잡하고 어려울지라도 체백을 모시기 위해서 최선을 다 했지 않겠는가? 이런 추론이 갑옷으로 묘장을 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 본인의 생각이나 그렇지만 또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머나먼 요동 만주에서 시신을 모시고 올 때, 교통수단과 기간을 고려하여 모실 수 없는 불가피한 사정도 전혀 배제(排除)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한다. 실록에는 관곽하고 미두70석을 하사(下賜)하였다는 내용과 예장(禮葬)을 하였다는 사실만을 중시(重視)한다면 기성군께서는 현 묘지에 안면(安眠)해 계신다는 믿음이 직계 자손이신 신행, 두범 제족의 주장과 배치(背馳)된 이론(異論)이라 할 것이다. 그 이유는 묘에서 기맥봉(氣脈棒)으로 측정하여 보면 유체(遺體=유골)가 계신 것으로 반응을 하였으며 지기(地氣)는 전혀 없는 것으로 반응하였기 때문이다.
〇 墓所 基本槪要
① 입수 -----甲入首
② 좌향------甲坐 庚向
③ 좌우선룡--左旋龍
④ 좌우선수--右旋水
⑤ 파구------丁未破
⑥ 득수------乾亥方
(특별사항)
㉠ 파구처를 丁未方으로 본 것은 묘소 앞에 도로를 물(水)로 보기 때문에 불견지처(不見之處)가 丁未方向에 해당된다. 그렇지만 처음 묘장을 할 때는 자연의 형태가 지금과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에 그때 환경을 추정해보면 태향태류(兌向胎流)인 경파(庚破)가 맞지 않겠는가 판단된다. 그 이유인 즉, 본래 경향은 左旋水가 합법이나 여기 현장에서 측정해 보면 지형의 변화는 있을지라도 우측이 높으며 좌측은 저지대이다. 자연(自然)의 본태성(本態性)이란 물은 높은데서 얕은 대로 흐르기 마련이다. 그러나 예장당시의 地官=(國風이참여하셨다 짐작된다)은 좌선수가 합당한 법식을 거두시고 우선수에 맞지 않은 경향(庚向)을 취(取)하신 바는 변국향(變局向)인 태향태류(兌向胎流)가 적법하기 때문에 취택(取擇)하신 바로 유추(類推)해 보았다.
㉡ 入首處는 甲龍入首며, 玄武峰은 복종사(伏鐘砂)처럼 秀麗하다.
현무봉에서 곧게 내려온 용진처에 箕城君의 묘소가 자리 잡고 있는데 묘소 뒤에서 나경을 들고 방향을 측정해보면 寅坐 申向으로 볼 수도 있다. 특히 갑룡맥 입수처에서 寅坐 申向으로 묘장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용상팔살(龍上八殺)에 묘장을 하고 가정에 큰 불행을 당한 경우이다. 龍上八殺이란 입수처의 五行을 向의 五行이 克하여 생기는 흉살(凶殺)로서 成才之子=(똑똑한 자손)가 死亡하는 理法이다. 그래서 재혈(裁穴)시 용상팔살 유무를 신중히 살피는 것인데 족보에 甲坐로 기록되어있다 하여 다시 말해서 용상팔살에 해당되지 않는 것이다.
그렇지만 상석을 측정해보면 甲坐로 뚜렷하게 조성되지 않고 甲.寅坐 중간선에 해당되게 상석을 설치하였다. 아마도 지관이 휴대한 나경(羅經=패철(佩鐵)이 원형을 사용하여서 정밀하지 못한 바로 판단되어진다. 다음에 묘소 정비할 기회가 있으면 고치시면 좋겠습니다.
㉢ 광주시의 도시계발로 인하여 묘소 후방 약30 지점에 도로 터널이 관통(貫通)되어 기맥선이 절단 되었으며 청룡과 백호맥이 심하게 파쇄(破碎)되는 등, 묘장지가 매우 凶한 처지가 되었으니 한 문중의 자손이 못나서가 아니라 국책사업을 어찌 감당할 수가 있었을까 중과부적(衆寡不敵)이라 이해가 됩니다.
玄空風水 飛星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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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9 五 |
9 4 一 |
7 2 三 |
6 1 四 |
-4 -8 六 |
2 6 八 |
1 5 九 |
8 3 二 |
3 7 七 |
甲坐 庚向 (下卦) |
❶ 旺山旺向
❷ 山盤合十
❸ 地運40년
箕城君께서 1433년 5월 3일 卒하시니 지금으로 부터 579년 전이다. 세종15(癸丑)년도는 中元 6運에 해당되며, 과거로 회귀(回歸)하면 3,22윤회(輪回)를 거친 샘이다. *1=輪回는 180년이며, 지운(地運)이란 20년마다 변(變)한다.
一般的으로 생각하기를 한번 명당에 묘를 조장하면 마르고 달토록 복록(福祿)을 누리고 사는 것처럼 생각하는데 절대로 그렇지 않다. 인간도 시운(時運)을 다하면 興亡을 거치듯이 地運도 그와 같다. 다만 명당과 흉지의 차이는 지형의 특색에 따라서 다르며 복서(卜筮)로 인간의 앞날을 점을 치듯 묘지의 운세도 玄空風水 學文으로 예단(豫斷)을 하는 것이다.
그때 당시 6운의 甲坐 庚向은 旺山旺向에 山盤合十局으로 보기 드문 奇局으로 裁穴되었다. 특히 人丁(자손)과 財物이 매우 좋은 형편이었을 것이다. 지운은 40년이지만 向 앞에 청정수가 풍부하면 지운은 연장된다. 그러나 지금의 실정은 전혀 다른 시운과 지형의 변화로써 旺山旺向과 山盤合十이라는 영향을 기대할 수가 없게 되었다.
기성군公께서는 각화산 묘소에 영면(永眠)해 계시면서 광활(廣闊)한 도시(都市)의 변화무쌍한 세파(世派)의 형상(形象)을 과거와 현재로 관조(觀照)하실 때, 무슨 말씀을 자손들에게 들려주실지 思念으로 품으면서 빗줄기가 끝이지 않은 묘소를 뒤로 하고 돌아 왔으나 함평이씨 광주종친회 인터넷 카페에 수록할 자료로서 충분치 않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자손제위분들께서는 조상님의 훌륭하신 행적을 정성을 다하여 알리시고 또 열심히 조상님 공부를 하시기 바랍니다. 그동안 졸서에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宜泉 李 帝 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