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분단의 아픔이 서린 ‘뗏목다리’라는 이름의 벌교읍
벌교는 항일투쟁의 역사적인 땅이다.
1919년의 3·1운동이 있기 전부터 벌교지역 청년들이 다른 어느 지방보다도 먼저 항일 운동
을 펴오다가 1919년 4월 9일 벌교 장날을 이용해 아래 장터(옛 좌촌 시장, 지금의 장좌리)에
서 격렬한 만세 운동을 일으켰다.
4월 14일에는 2차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던 항일 민족혼이 살아 있는 곳으로 4·18 보성
옥암 만세운동, 웅치 장터 만세운동으로 이어지는 보성군 항일 운동의 진원지이다.
벌교는 광주, 목포, 순천, 고흥반도를 연결하는 사거리적 교통의 중심지로서 예부터 상업이
발달된 곳이다.
벌교는 순천시와 고흥군의 2개 시·군 6개 면과 접해있고 광주고흥, 목포부산간 국도가 교차
하는 곳으로 남해안을 잇는 교통의 중심지이자 고흥군의 관문이기도 하다.
조선 중엽에 부차군(浮嵯郡)에 속했다가 후에 낙안군(樂安郡)에 이속되었다. 1908년에 고상
면(古上面), 남면(南面)으로 보성군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벌교면(筏
橋面)으로 통합, 개칭하였다.
1929년 순천군 동초면 지역이었던 연산, 봉림, 회정, 장양, 호동리를 벌교면에 흡수하였으
며, 인근 고흥, 화순 등지에서 수탈한 물자를 수송할 목적으로 일제에 의해 1930년에 개통된
철도로 인하여 (사람의 발길이 잦은 지방 대부분이 그렇듯이) 물류유통과 상업이 타 지역에
비해 일찍 발달되었고 신흥도시로 번창하게 되었다.
그에 따라 군청소재지가 아니면서도 주재소 아닌 경찰서가 설치되고 우체국, 세무서와 같은
관공서가 들어서게 되었으며, 이런 여러 조건들을 발판으로 하여 벌교면은 1937년에 읍
(邑)으로 승격되었는데, 이는 군청 소재지인 보성면이 읍이 된 것보다 네 해쯤 앞선 것이었
다.
여자만에 접해 있으면서도 북쪽으로 백이산, 서북쪽에 존제산, 동쪽으로 제석산, 남으로 장
군봉 등 산으로 싸여있는 자연 환경을 갖고있는 벌교는 고읍들, 칠동들, 장양간척지(중도들)
등 기름진 농경지와 차진 갯벌, 21개의 유·무인도가 있어 일찍부터 농업과 수산업이 발달된
곳이기도 하다.
벌교에 가서 돈 자랑하지 말라’,‘주먹자랑 하다가는 큰코다친다’는 말은 전라남도 지방에 널
리 퍼진 말이다. 그 말마따나 벌교는 왜정시대부터 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돈이 흔하고 주
먹깨나 쓰던 왈패들이 더러 있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벌교읍 사람들은 보성읍 사람들과는
기질이 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대체로 보성사람들은 보수성이 강하여 전통을 자랑하고 고집하면서 제국주의 일본이 이 땅
에 들여온 개화의 물결을 거의 받아들이지 않았었다.
제석산에서 생산되는 기암과 수석은 남한강 수석과 쌍벽을 이룬다.
그에 견주어 본래 조선시대까지 낙안군의 변두리 갯마을이었다가 왜정 때에 신흥도시로 급
성장한 벌교읍내의 주민들은 진취성이 강했기 때문에 개화의 새 물결을 쉽게 받아들이는 편
이었다고 한다.
이것은 오늘의 나주시를 이룬 나주읍과 영산포읍의 성격이 서로 달랐던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 까닭은 무엇보다도 보성읍과 벌교읍 두 지역이 겪어왔던 역사의 빛깔이 서로 달
랐던 데에 있는 듯하다.
아무튼 벌교가 교통여건과 지리적인 영향으로 일찍이 개화되었던 때문에 을사5적 암살계획
의 주역이자 일편단심 조국의 광복만을 위해 일생을 살면서 대종교의 창시 등 민족운동에
큰 발자취를 남긴 홍암 나철(羅喆)선생, 바이올리니스트요 작곡가이며 음악사상가로서 일
제에 저항하면서 민족정신을 몸소 실천했던 음악가 채동선(蔡東鮮)선생과 같은 선각자들을
배출하게 된 것이다.
또한, 일제의 식민정책이 우리 나라 농토의 침식과 수탈에 집중되었던 탓에 1931년의 흉년
을 계기로 농민위원회를 결성한 이 지역 농민들이 스스로 일제의 노예적 상태를 벗어나고
사회를 개혁하려는 몸부림으로 농민운동과 소작쟁의를 일으켰던 의로운 터전이기도 하다.
벌교는 지역발전에 있어서도 항상 중심에 서 있었다. 보성읍과 함께 보성군 발전의 핵이 되
어온 때문이다.
보성읍이 동·서와 북으로 통로를 가진 삼거리적 교통의 중심이라면 벌교읍은 동·서와 남·북
으로 연결된 사거리적 중심이고, 보성읍이 행정 중심지적 특성 외에도 군내(郡內) 경제생활
의 중심지라면 벌교읍은 군내보다는 오히려 순천·고흥 등 다른 시·군 일부 지역을 배후로 발
전하고 그들 지역의 중심지로 성장해 왔다.
보성을 대내적(對內的) 혹은 군내적(郡內的) 중심지라고 한다면 벌교는 대외적(對外的) 성
장지로 대변되는 특징을 갖고있음이 그 이유이다.
소설 태백산맥에서는 김범우라는 등장인물을 통해 심재모에게 이야기하는 형식을 빌어 벌
교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이곳은 일정시대부터 도시화가 이루어 졌습니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다른 곳 사람들과는
많이 다릅니다. 지주는 지주대로 땅만 믿고 있는 재래지주가 아니라 사업을 겸하고 있는 신
식지주가 많고, 농민들은 농민들대로 눈 열리고 귀가 열려 아는 것이 많습니다. 그러니 그
관계에 갈등이 자꾸 심해집니다.
가까운 보성이나 고흥의 보수성에 비하면 벌교는 너무나 진취적이고, 벌교의 진취성에 비하
면 보성이나 고흥이 또 너무나 보수적이고, 그렇지요. 벌교를 순천이나 여수와 나란히 비교
하는 것도 그 도시화 때문일 겁니다.
일정 때부터 여수나 순천의 잘사는 여자들이 입는 신식 옷을 이곳의 잘사는 여자들도 같은
시기에 입었습니다. 여수에서 뱃길로 반나절밖에 안 되는 때문이죠. 그래서 다른 고장 사람
들은 벌교사람들을 영악스럽다거나 약삭빠르다고 나쁘게 말하기도 합니다만, 그건 반대로
말하면 영리하고 똑똑하다는 뜻이기도 할겁니다. 그게 다 도시화의 영향이겠죠.
참 우스운 건, 보성군이나 보성에서 이러저러한 일이 있었다. 하고 공적으로 거론하는 사건
들은 태반이 벌교에서 일어난 일들입니다. 그런데 행정단위 중심으로 사건 정리를 하다보니
벌교는 감춰지고 보성이 드러나게 되는 거지요.
같은 군내에 있으면서도 두 지역 사람들의 감정이 서로 묘하게 뒤틀려 있는 게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닐 겁니다. 이게 바로 벌교의 장점이면서 문제점인지도 모릅니다.」
또한 벌교 토박이인 김범우가 곰곰히 되새겨 생각해 보는 것으로 묘사된 벌교에 대한 작가
의 설명은 너무나 세밀하면서도 사실 그대로여서 벌교를 모르거나 벌교를 처음 찾은 여행객
들에게는 벌교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줄 것으로 믿는다.
「 벌교는 한 마디로 일인(日人)들에 의해서 구성, 개발된 읍이었다. 그 전까지만 해도 벌교
는 낙안 고을을 떠받치고 있는 낙안 벌의 끝에 꼬리처럼 매달려 있는 갯가 빈촌에 불과했다.
그런데 일인들이 전라남도 내륙지방의 수탈을 목적으로 벌교를 집중 개발시킨 것이었다. 벌
교 포구의 끝 선수머리에서 배를 띄우면 순천만을 가로질러 여수까지는 반나절이면 족했고,
목포에서 부산에 이르는 긴 뱃길을 반으로 줄일 수 있었던 것이다. 목포가 나주평야의 쌀을
실어 내는데 최적의 위치에 있는 항구였다면, 벌교는 보성군과 화순군을 포함한 내륙과 직
결되는 포구였던 것이다.
그리고 벌교는 고흥반도와 순천·보성을 잇는 삼거리 역할을 담당한 교통의 요충이기도 했
다. 철교 아래 선착장에는 밀물을 타고 들어온 일인들의 통통배가 득시글거렸고, 상주하는
일인들도 같은 규모의 읍에 비해 훨씬 많았다. 그만큼 왜색이 짙었고, 읍단위에 어울리지 않
게 주재소 아닌 경찰서가 세워져 있었다.
읍내는 자연스럽게 상업이 터를 잡게 되었고, 돈의 활기를 좇아 유입인구가 늘어났다. 모든
교통의 요지가 그러하듯이 벌교에는 제법 짱짱한 주먹패가 생겨났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벌교 가서 돈 자랑, 주먹 자랑하지 말라’는 말이 ‘순천에 가서 인물 자랑하지 말고, 여수에
가서 멋 자랑하지 말라’는 말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이 글은 '조정래 대하소설 태백산맥' 홈페이지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벌교의 역사와 유래에 대해 객관적으로 정리된 글로 보여 약간 수정해 올립니다. )
첫댓글 고향 벌교에 대한 역사와 정보를 입체적으로 감상할 수 있어 더욱 정감이 넘친다.!!^-^ 온고을 님 고맙네!!
벌교! 대~~~~~~~~~단해요! 네!암요!
'일인(日人)들에 의해서 구성, 개발되었다.. 나, 어릴적 할아버지가 들려주시는 우리할아버지 청소년시절 애기로 증명사실~.. 조정래 선생님께서는 역사적 진실이 정말 대단한것 같애~..
당신들 역사를 논할때 난 울 엄마 장보러 나오셨나 찾아보니 아니 나오셨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향이 벌교 하면 주먹자랑하지 말라는 지역이라 하여 전에는 고향이 보성이라는 적도 있었네요,역시 내고향 벌교는 색깔이 진함이 있는건 분명한것 같은데 우리 신랑- 벌교사람은 다 좋더라~~~~
마누라가 이쁘면,처가 기둥도 멋져 보이는거여.한들님은 좋것수,신랑 눈에는 벌교댁이 최고여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