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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 문경(文敬). 서출(庶出)이라 벼슬은 못하였으나 이이(李珥) ·성혼(成渾) 등과 학문을 논하여 성리학(性理學)과 예학(禮學)에 통하였다. 문장에도 뛰어나 이산해(李山海) ·최경창(崔慶昌) ·백광홍(白光弘) ·최립(崔岦) ·이순인(李純仁) ·윤탁연(尹卓然) ·하응림(河應臨) 등과 함께 ‘8문장가’의 한 사람으로 꼽혔으며 시와 글씨에도 일가를 이루었다. 고양(高陽)에서 후진양성에 힘써 문하에서 김장생(金長生) ·김집(金集) ·정엽(鄭曄) ·서성(徐渻 ) ·정홍명(鄭弘溟) ·김반(金槃) 등 많은 학자가 배출되었는데, 그 중 김장생은 예학의 대가가 되었다. 지평(持平)이 추증되었으며, 문집에 《구봉집》이 있다.
구봉집 [龜峰集]이란?
목판본. 11권 5책. 규장각도서. 1622년 문인 심종직(沈宗直)이 편집 ·간행한 시집을 홍산(鴻山)에서 간행한 후, 숙종연간에 송시열(宋時烈)이 저자의 서자 취대(就大)가 수집한 초고를 편집한 것을 바탕으로 1762년 김상성(金相聖)이 의성에서 중간하였다.
11권에 저자의 동생 송한필(宋翰弼)의 《운곡고(雲谷稿)》가 합록되어 있으며, 김상성의 간기(刊記)가 있다. 부(賦) ·시 ·잡저 ·현승편(玄繩篇) ·예문답(禮問答) ·가례주설(家禮註說) ·부록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 책에는 예학의 대가였던 저자의 위상을 보여주는 예학에 관한 기록들이 많다.
〈예문답〉은 이이(李珥) ·성혼(成渾) ·정철(鄭澈) 등 서인 학자들과 의례에 관한 문답을 적은 것이고, 〈가례주설〉은 주자(朱子)의 《가례》에 대해 자세한 주석을 붙인 글이다. 시 중에는 고금의 즐거움은 만족함에 있다는 것을 강조한 〈족부족(足不足〉이 주목되며, 〈현승편〉은 편지와 별지(別紙)를 모은 것으로, 저자와 가장 친밀했던 성혼 ·이이 등과 주로 성리학과 예학에 대해 의견을 교환한 내용이다. 잡저의 태극문(太極問)은 성리학의 근본이 되는 이기(理氣)의 문제를 노장사상과 불교와 대비시켜 문답식으로 정리한 것으로, 주자의 원칙에 충실했던 저자의 사상 경향이 나타나 있다.
이 밖에 잡저에는 이이에 대한 제문과 전기체 글인 〈은아전(銀娥傳)〉 등이 있다. 이 책은 16세기 사상사, 특히 예학의 연구에 도움이 된다. 《한국문집총간》에 영인본이 있다.
학자 송구봉의 野史(야사)
구봉 선생의 명은 익필(翼弼), 자는 운장(雲長), 호는 구봉(龜峯) 또는 현승(玄繩) 본관은 여산(礪山), 사련(祀連)의 아들로 중종 29년(1534)에 현 파주시 교하면 산 남리 심악산하 궁동에서 생장하였으며 선생을 잉태 후 심악산에 나무들이 고갈 되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동생 운곡 송한필(雲谷宋翰弼)도 문학에 이름이 높아 대학자 율곡 이이(栗谷 李珥)가 말하기를 성리학을 알 만한 사람은 오직 익필과 한필 형제뿐이라 말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당시 서출(庶出)로서 벼슬을 하지 못하였으나 이이(李珥), 성혼(成渾)등과 사우교제하면서 성리학에 통달했고 예학 (禮學)과 문장에 뛰어나 이산해, 최경창, 백광홍, 최 입, 이순인, 윤탁연, 하응임 (李山海, 崔慶昌, 白光弘, 崔笠, 李純仁, 尹卓然, 河應臨)등과 함께 8文章의 한 사람 으로 손꼽혔으며 시와 글씨에도 능하였다 합니다. 당시 현 고양시 송포동 구봉산 기슭에서 후진을 양성 문하생 중 김장생, 김 집, 정 엽, 서 성, 정홍명, 김 반 등 많은 학자가 배출되었으며 이중에서 특히 金長生이 그의 예학을 이어받아 대가가 되었습니다. 구봉은 7세 때 ‘산가모옥월참차山家茅屋月參差 - 산 속 초가집에 달빛이 어른거리네’라는 싯구를 지어 주위를 놀라게 하였고, 20대에 이미 ‘8문장가’의 한 사람으로 꼽혔으며, 시와 글씨에도 일가를 이루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당대의 대학자 율곡 이이와는 서로의 학문적 경지를 흠모해 평생에 걸친 우정을 나누었다. 그러나 구봉은 신분차별이 엄격하였던 조선중엽에 태어나 종의 자손이라는 신분상의 문제와 동인들의 방해로 끝내 정계에 진출하지 못하였다. 구봉의 외 증조모는 안씨 집안의 종이었다. 그의 아버지 송사련은 자신의 출세를 위해 외삼촌인 안당의 일가를 몰락시켰고, 신사무옥辛巳誣獄이라 불린 이 사건은 가문과 혈연관계를 중시하는 당시 유생들로부터 심한 비난을 받았다. 송씨 일가의 이러한 약점은 자식인 송구봉의 대에 이르러, 동인들에 의해 불거지게 된다. 선조수정실록에는 ‘사노(私奴:남자 종) 송익필을 체포하라!’는 요지의 기록이 남아있다. 그가 일찍이 관직을 포기하고 교육자로 나선 것도 이러한 출신상의 배경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송구봉은 학문만 대단했던 것이 아니라 번개가 치는 듯 한 안광과 당당한 풍채에서 우러나오는 독특한 기백으로 인해 많은 일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당시 조정에서 판서의 직위에 있던 홍가신은 송구봉을 흠모하여 자주 서신을 보내 학문과 업무에 관한 대소사에 많은 자문을 구했습니다. 이런 홍가신에게 경신이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동생 경신은 판서의 직위에까지 오른 형이 한낱 종의 자손에게 굽실거리는 것을 무척이나 못마땅하게 여겨 노골적으로 불만을 나타내곤 했다. 두고만 보던 형은 어느 날 동생을 불러 편지하나를 건넸다. "너, 이걸 가지고 구봉 선생께 전하여라." 평소 가뜩이나 불만이 많은 동생 경신은 길길이 뛰며 화를 내며 "종놈의 자식한테 제가 왜 갑니까?" 그러나 형은 이런 동생을 잘 달래 기어이 보냈다. "가서 서신만 전하여라." 형의 명을 끝내 어길 수는 없어 동생은 단단히 벼르며 송구봉의 집을 찾아갔다. 집에 당도해 사람을 부르니, 마침 밖에 아무도 없었는지 마중을 나오는 사람이 없었다. 이에 홍경신은 흥분하여 소리를 질렀다. "종의 자식이 이럴 수 있다니, 게 익필이 있느냐!" 방안에서 글을 읽고 있던 송구봉은 낯선 사람이 함부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듣고 이상하게 여겨 직접 마루로 나와 손님을 맞았다. "그 뉘시오?" 그런데 이것이 웬일인가? 송구봉을 욕보이겠다고 기세등등하던 홍경신이 갑자기 깍듯이 절을 하며 예절을 차리는 것이었다. "편지를 가지고 왔습니다." "이리로 가지고 오시오." "아닙니다. 그냥 여기 놓고 가겠습니다." 그리고는 얼굴도 제대로 보지 않고 부리나케 집으로 돌아갔다. 돌아온 동생에게 홍가신이 물었다. "편지는 전했느냐?" "아뇨, 못 전했어요. 정신이 까막까막해서 놓고만 왔습니다." 그러자 형이 웃으며 말했다. "정신이 까막까막한 것만 아니라, 너 오줌 쌌지? 구봉 선생과 마주 앉아 쳐다보는 건 율곡 하나고, 성우계는 나하고 곁에 앉아 얘기하는데 구봉 선생과 마주 앉으면 벼락 치는 것 같아서 나도 마주 앉지는 못하느니라." 훗날 홍경신은 자초지종을 묻는 세인들에게 '절을 하는 게 아니라 갑자기 무릎에 힘이 빠져 넘어진 것'이라며 변명을 하고 다녔다고 한다. 구봉을 알아주는 몇 안 되는 지기였던 율곡은 다가오는 국가의 환란을 짐작하고 선조에게 송구봉을 끊임없이 천거했다고 한다. 당시 율곡은 성우계와 함께 송구봉이 병조판서라도 하면 왜놈은 공격할 마음조차 못 먹는다며 여러모로 선조를 설득하였습니다. 율곡에 대한 신임이 두터웠던 선조는 마침내 그를 만나보기에 이르렀고 우여곡절 끝에 송구봉과 대면하게 된 선조는 그의 학식과 경륜에 찬탄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선조가 보니 송구봉은 눈을 감고서 말을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까닭을 물어보았다. "경은 왜 눈을 뜨지 않소?" "제가 눈을 뜨면 주상께서 놀라실까 염려되어 이리하옵니다." "그럴 리 있겠소? 어서 눈을 뜨시오. 어명이오." 이에 할 수 없이 눈을 뜨니, 선조는 그만 그의 눈빛에 놀라 기절하고 말았다. 결국 눈도 제대로 쳐다볼 수 없는 신하를 조정에 둘 수가 없다 하여 이 일은 무산되었다고 한다. 송구봉에 관하여 전해지는 정사나 야사에는 꼭 율곡 이이가 함께 등장한다. 송구봉을 알 만한 이는 율곡 정도였고, 관직에 등용될 수 없는 신분인 송구봉은 자신의 뜻을 율곡을 통해 펴고자했다. 그가 나중에 동인의 미움을 받아 노비가 된 것도, 율곡과의 친교로 서인의 정책 자문 역할을 많이 하였기 때문이었다. 율곡의 〈서자 허통: 서자들을 등용하는 일〉에 대한 사상 때문에 율곡을 뛰어난 혁명적 정신의 소유자라고 생각한 송 구봉이 어느 날, 율곡에게 자식의 혼인을 청했다.<그러자 율곡은 송 구봉에게,"벗은 옳거니와, 혼인은 어렵네."하고 대답했다. 송 구봉은 율곡에게서 혼인에 대하여 거절을 당하자 담담히 웃으며,"율곡도 역시 속인을 못 면했군!" 하였다. 이에 대하여 율곡으로서도 항상 인륜이 근본을 따져서 적자와 서자의 구별을 철폐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해 왔던 만큼 족히 실행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마는, 국법이 정식으로 고쳐지기 전에는 역시 어떤 혼란을 가져올 것을 생각하고 실행에까지는 옮기지 못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이후 율곡은 십만양병설을 건의하지만 당파싸움에 여념이 없던 당시 중신들의 반대로 무산되고, 그는 임진왜란이 닥치기 전에 죽고 만다. 율곡 이이 선생이 세상을 뜨자, 그의 죽마고우이던 구봉 송익필은 애도의 시를 지어서, "그대와 나는 합해서 하나인데, 반쪽만 남은 나는 사람 구실 못 하겠네" 라는 애절한 슬픔을 토로했다. 구봉은 이순신에게 병법을 가르쳤다고 알려졌는데 병법을 가르칠 때 아래 시를 유념하도록 하였다. 월흑안비고(月黑雁飛高) 달 밝은 밤에 기러기 높이 나니 전우야순도(戰于夜循道) 선우는 밤에 도망치리라 또한 심심 당부하기를 “독룡이 숨어있는 곳의 물은 편벽 되게 맑으리라(毒龍潛處水偏靑)” 하니 이러한 일곱자 글귀를 이순신 장군은 잊지 않고 잘 이용하였다 하는데 그것이 바로 열 두척의 배로 적을 맞이한 명랑해전이다. 전설과 야사가 섞여 있지만 송구봉 이란 사람이 시대의 차별을 뛰어넘는훌륭한 인재였음은 분명하다.
19. 弘慶寺(홍경사) 白光勳
홍경사 절에서 인생의 무상함을 쓴 것이다.
秋草前朝寺 추초전조사
殘碑學士聞 잔비학사문
千年有流水 천년유유수
落日見歸雲 낙일견귀운
가을 풀에 묻혀 있는 낡은 절이네.
비석에 새겨진 어느 선비의 글이네
천년을 두고 물은 흐르는데
저녁놀에 서서 떠가는 구름을 보고 있네.
가을풀 시드는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이 홍경사 절은 많은 세월이 흐른 낡은 절이다. 그 옆에 많은 세월이 흘렀기에 이렇게 변하였단 말인가. 그러나 흐르는 저 물은 천년을 두고 변하지 않고 그대로 흘러만 가니 인생의 허무가 느껴져 해가 지는 저녁놀에 서서 하늘 끝에 떠가는 구름만 쳐다보고 있다.
註
前朝(전조) - 전 세대의 조정, 아득한 옛 나라.
學士文(학사문) - 학사들이 쓴 글.
백광훈 [白光勳, 1537~1582]
조선 중기 시인. 명나라 사신에게 시와 글을 지어주어 감탄케 하여 백광선생(白光先生)의 칭호를 받았으며 팔문장(八文章)의 한 사람으로 인정받았다. 영화체(永和體)에도 빼어났다
본관 해미(海美), 자 창경(彰卿), 호 옥봉(玉峯)· 기봉(岐峰)이다. 박순(朴淳)의 문인으로 13세에 상경하여 양응정(梁應鼎)·노수신(盧守愼) 등에게서 배웠다. 1564년 진사가 되었으나 관직에
뜻이 없었고 1572년(선조 5) 명나라 사신에게 시와 글을 지어주어 감탄케 하여 백광선생(白光先生)의 칭호를 얻었다.
송시(宋詩)의 풍조를 버리고 당시(唐詩)의 풍조를 쓰려고 노력하여 최경창(崔慶昌)·이달(李達)과 함께 삼당파(三唐派) 시인으로 불린다. 팔문장(八文章)의 한 사람으로 인정받았고 영화체(永和體)에도 빼어났다. 1590년 옥봉서원에 제향되었고 문집으로 《옥봉집》이 있다.
八文章이란?
조선 중기에 널리 문명(文名)을 날리던 8대 문장가. 옥봉(玉峰) 백광훈(白光勳:1537∼1582), 구봉(龜峰) 송익필(宋翼弼), 중호(重湖) 윤탁연(尹卓然),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고담(孤潭) 이순인(李純仁:1543∼1592),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 간이(簡易) 최립(崔 :1), 청천(菁川) 하응림(河應臨) 등 8인을 말한다.
삼당파 [三唐派]란?
고려시대 이래 한국의 시인들이 대개 중국 송(宋)나라의 소동파(蘇東坡) ·황산곡(黃山谷) 등을 배워왔는데, 이 세 사람은 당시(唐詩)를 배우는데 힘을 기울여 성공하였다. 그러나 그 수준은 만당(晩唐)에 머물렀으며, 성당(盛唐)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한다. 이들 중에서도 이달이 특히 뛰어난 시인으로 이름을 떨쳤다.
20. 偶吟(우음) 宋翰弼
花開昨夜雨 화개작야우
花落今朝風 화락금조풍
可憐一春事 가린일춘사
往來風雨中 왕래풍우중
꽃이 어제 저녁 비에 피더니
꽃이 아침 바람에 떨어지네.
아 - 한 해의 봄이
바람과 비 가운데 오고가네.
꽃이 어제 저녁 비에 활짝 피더니 하루도 못 가고 그 핀 꽃이 오늘 아침 바람에 떨어져 버리니 꽃이 지면 한해의 봄도 가는 것인데 아름다움이란 그 수명이 짧다더니 이 꽃을 두고 한 말 같다. 참으로 슬프기 짝이 없다. 일 년의 봄이 비바람 속에서 이렇게 왔다가 순식간에 가버리니 허무하기 짝이 없다.
손종섭님의 評說(평설)에는 작자의 生卒年代(생졸연대)는 명확지 않으나 선조 때의 학자이며 송익필(1534-1599)의 아우이며 형과 함께 문학으로 이름이 높았다. 저서에 운곡집이 있다고 적혀 있다. 밤비에 피어나던 꽃이 채 다 피기도 전에 아침 바람에 벼 버린다. 비와 바람이 因果(인과)로 始終(시종)하여, 피고 짐이 반일도 못되는 사이에 끝나고 말았다.
꽃 피자 비바람
인생엔 이별
花發多風雨(화발다풍우)
人生足別離(인생족별리)
태초 이래의 이 숙명적 악연을 어이 끊으리?
이 한 때의 꽃피움을 위하여, 맑은 정기를 모으고 아름다운 정혼을 길러, 그 가장 정미롭고 찬란한 眞髓(진수)로 빚어, 꽃으로 피워 내려던 한 생애의 알뜰한 營爲(영위)가, 하루아침 피어나자마자 꽃샘바람 앞에 허무하게도 끝나 버리고 만 것이다.
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 뿐, 내 한해는 다 가고 말아...
김영랑의 그 심정도 바로 이 심정이었으리라.
삶이란 애달픈 消耗(소모)
영위의 始點(시점)을 찾아
오직 바람에 맡겨
허공에 날려진 실 끝
겨우 그 이룬 거미줄들의
무심히도 걷힘이여! <營爲>
무심히 걷혀 버리는 李鎬雨(이호우)의 거미줄과도 같은 이 어이없는 현상을 바라보고 있는 작자의 망연한 얼굴빛에 스쳐 가는 인생무상의 쓸쓸한 그림자를 어찌 간과할 수 있으랴?
그의 형 익필의 보름달을 음미하라.
俗謠(속요)에 花無十日紅(화무십일홍)이요, 달도 차면 기우나니.....
花. 月을 형제가 하나씩 나누어, 자연의 덧없음에 부친 인사의 허무를 화답한 듯하다.
이 詩는 起. 承句가 對로 되어 있다.
韻字는 風. 中(平聲)
註
偶吟(우음) - 우연히 읊음.
可憐(가린) - 슬픈 것.
一春事(일춘사) - 일 년의 봄 일.
송한필(宋翰弼)
생몰년 미상. 조선시대 중기의 학자·문장가.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계응(季鷹), 호는 운곡(雲谷).
사련(祀連)의 4남1녀 중 막내아들로, 익필(翼弼)의 동생이다. 그의 아버지 사련이 안당(安당25)의 서매(庶妹)인 감정(甘丁)의 아들이었으므로 법의 규정대로 얼손(孼孫)에 해당되어 신분상의 제약을 크게 받다가 아버지 대부터 양민 노릇을 하였다.
그의 형 익필은 이이(李珥)를 시종 옹호하였는데, 소장사류들은 이이가 동서분쟁에 중립적 태도를 취하면서 보다 적극적으로 신진사류를 옹호하지 않은 데 대한 불만으로 익필을 심의겸(沈義謙)의 당(黨)으로 지칭하고, 이이에 대한 함원(含怨)을 동인(東人)들이 익필에게 전가하여 1589년(선조 22)에 일족을 노예로 환천(還賤)시켰다. 그리하여 일족이 유리 분산되는 비극을 당하였다.
지금으로서는 그의 생애에 대해서 알 길이 없지만, 그는 형 익필과 함께 선조 때의 성리학자· 문장가로 이름이 있었다.
이이는 성리(性理)의 학을 토론할만한 사람은 익필 형제뿐이라고 하였다. 박인로(朴仁老)· 김지백(金知白)· 최대겸(崔大謙)· 박신립(朴信立)· 조호인(曺好仁)· 박준민(朴俊民)· 김상문(金尙文) 등과 교유하였다.
시 32수와 잡저가 익필의 《구봉집 龜峯集》에 부록으로 실려 있다.
21. 忠州望京樓韻(충주망경루운) 金麟厚(김인후)
來從何處來 내종하처래
去向何處去 거향하처거
去來無定縱 거래무정종
悠悠百年許 유유백년허
이 몸이 어느 곳을 쫓아서 왔다가 어느 곳을 향하여 가는 것인가. 결국 이 몸이 기약 없이 이 세상에 태어났다가 기약 없이 이 세상을 떠나서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면 이 세상에 왔다가 가는 것이 일정한 정처가 없는 것이 우리 인생이다. 그러니 한 백년을 되는 대로 살다가 죽을 수밖에 없는 이 몸인데 무슨 걱정을 하며 살 필요가 있겠는가.
이 시는 起. 承句가 對로 되었다. 이 詩에 있어서는 來字가 든 셈인데 이것은 작법상 인정하고 있다.
韻字 - 去. 許(上聲)
註
定縱(정종)정하고 움직이는 것.(일정하게 머물러 있지 못하는 것.)
百年許(백년허) - 백 년간. 인생 백 년.
김인후 [金麟厚, 1510~1560]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정자 ·설서 ·부수찬 ·옥과현령 등의 관직에 있다가, 을사사화가 일어난 뒤에는 고향으로 돌아가 성리학 연구에 정진하였다. 성경(誠敬)의 실천을 학문의 목표로 하고, 이항의 이기일물설에 반론하여, 이기는 혼합해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본관 울산. 자 후지(厚之). 호 하서(河西)· 담재(澹齋). 시호 문정(文正). 성균관에 들어가 이황(李滉)과 함께 학문을 닦았다. 1540년(중종 35)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 정자(正字)에 등용되었다가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뒤에 설서(說書)· 부수찬(副修撰)을 거쳐 부모 봉양을 위해 옥과현령(玉果縣令)으로 나갔다. 1545년(인종 1)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난 뒤에는 병을 이유로 고향인 장성에 돌아가 성리학 연구에 정진하였고, 누차 교리(校理)에 임명되나 취임하지 않았다.
성경(誠敬)의 실천을 학문의 목표로 하고, 이항(李恒)의 이기일물설(理氣一物說)에 반론하여, 이기(理氣)는 혼합(混合)해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천문· 지리· 의약· 산수· 율력(律曆)에도 정통하였다. 문묘(文廟)를 비롯하여 장성의 필암서원(筆巖書院), 남원의 노봉서원(露峯書院), 옥과(玉果)의 영귀서원(詠歸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문집에 《하서전집》, 저서에 《주역관상편(周易觀象篇)》 《서명사천도(西銘四天圖)》 《백련초해(百聯抄解)》 등이 있다. 매년 4월에 선생을 기리는 춘향제(春享祭)가, 9월에는 추향제(秋享祭)가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필암리에 있는 필암서원에서 열린다.
22. 山寺(산사) 李 達
寺在白雲中 사재백운중
白雲僧不掃 백운승불소
客來門始開 객래문시개
萬壑松花老 만학송화노
절이 흰 구름 속에 있네.
흰 구름을 중이 쓸지 않네.
닫혀 진 문을 열고 나가니
골짜기에는 송홧가루가 날리네.
절이 깊은 산골짜기에 자리 잡고 있어 항시 그름 속에 절이 묻혀 있다. 이 흰 구름이 감돌고 있는 절속에서 중은 먼 선경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곳에 찾아오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문이 항시 닫혀 있어 밖에 나가지 않고 있는데, 때마침 객이 찾아와 문을 열고 비로소 나가보니 골짜기에는 겨울도 지나고 봄도 지나 여름이 되어 송홧가루가 다 떨어져 가고 있지 않은가. 세월 가는 줄도 모르고 도를 닦는 중이 부럽기만 하다.
이 시는 對가 되어 있지 않다. 그런데 딴 詩行(시행)에 白字(백자)가 두 자 들었는데 이것은 作法上(작법상) 한 聯으로 본다면 무방하나 피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門字(문자)나 松字(송자) 가운데 한 곳이 上聲(상성)의 글자가 있어야 하는데 이것도 어긋난 것이다.
韻字 - 掃. 老(上聲)
註
不掃(불소) - 쓸지 않음. 더불어 짝함.
내가(編者) 손곡 선생의 시를 좋아 하는 것 보다 손곡 이달의 한을 목이메일 정도로 어느 서책을 통하여 읽었기에 너무도 기억이 생생하게 살아난다.
일생을 한으로 마감 하였으며 한국의 詩聖이 아니면 詩仙 이다. 당시의 墨客詩人(묵객시인)들이 칭찬이 자자할 정도의 명시를 지은 분이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허경진 님의 손곡 이달의 생애를 인용하여 옮기는 바이다. 이편에서는 손곡 이달의 시를 중점 감상해 보기로 하자.
夜座贈許端甫(야좌허단보) 허균에게 손곡
旅病逢秋甚 여병봉추심
鄕愁到夜深 향수도야심
暗蛩啼近壁 암공제근벽
涼露墮疏林 량로타소림(떨어질 타. 트일 소)
久作洛陽客 구작낙양객
未忘江海心 미망강해심
焚香坐不寐 분향좌불매(잠잘 매)
宮漏更沈沈 궁루갱침침(샐 누)
나그네의 시름은
가을을 맞아 더하고
고향 그리는 마음은
밤이 되면서 더 깊어지네.
어둠 속의 귀뚜라미는
벽 가까이서 울고,
차가운 이슬방울은
성긴 숲속으로 떨어지네.
서울 길에 나그네 된 지도
벌써 오래인데,
산과 바다에 노닐자던 마음만은
아직도 잊을 수 없네.
향을 사르며 앉아
잠도 이루지 못하노라니,
궁궐의 물시계 소리 따라,
맘만 더욱 깊어 간다네.
또
過扶餘有懷(과부여유회) 부여를 지나다가 손곡
喬木城池變 교목성지변(높을 교)
宮墻懸邑居 궁장현읍거
山河百戰後 산하백전후
籬落幾村餘 이락기촌여
古岸碑文毁 고안비문훼
荒田土脈踈 황전토맥소(트일 소)
成忠墓何在 성충묘하재
駐馬獨欷歔 주마독희희(흐느낄 欷. 흐느낄 歔)
성과 연못이 변하여 큰 숲이 되고
궁궐 담장자리엔 고을이 들어섰네.
산과 강이 온갖 전쟁 다 겪은 뒤에
울과 담만 몇 마을에 남아 있구나.
옛 언덕의 비석은 글자가 다 망가졌고
묵은 밭의 흙 줄기는 맥이 풀렸네.
성충의 무덤은 어디 있는지,
말 세워 놓고 나 혼자 흐느끼네.
江陵別禮長之京(친구를 보내며) 손곡
桐花夜烟落 동화야연락
梅樹春雲空 매수춘운공
芳草一杯別 방초일배별
相逢京洛中 상봉경락중
밤 연기인 양
오동 꽃은 지는데,
봄 구름 흩어진
매화 빈 가지...
풀밭에서 나누는
이별의 한 잔,
만남의 한 잔일랑
서울서 함세.
註
桐花(동화) - 오동나무 꽃.
夜烟(야연) - 밤 연기 또는 밤안개.
春雲(춘운) - 봄날에 피어오르는 흰 구름. 봄 구름.
京洛(경락) - 서울
친구를 떠나보내는 허전하고도 아쉬운 석별의 정이다. 그것은 暗紫色(암자색)의 가무스름한 오동 꽃, 그 오동 꽃의 밤 연기인 양 소릿기 없이 어둡게 시름없이 지고 있는 낙화의 이미지요, 또는 한때 탐스러운 봄 구름처럼 화사하던 매화나무의, 그 똧들 이미 다 져버린 빈 가지의 이미지이다. 배웅하여 가는 길섶 풀밭에 차고 가던 술병을 부려 놓고, 잔을 나누며 이별을 아낀다.
드디어 소매를 나누는 순간이다. 침통해진 서로의 심사를 달래려는 듯, 돌연 心機一轉(심기일전)을 시도한다. 會者定離(회자정리)라면 離者可會(이자가회)도 逆(역)의 진리일 수 있는 일, 男兒何處不相逢(남아하처불상봉)가?
다음은 “서울서 만나 또 한 잔 하세나”.
그러나 그 말이 짐짓 부리는 허세처럼 울려옴은 어째서인가? 그것은 1 -3句로 이어져 오는 정서의 흐름에 갑작스레 생긴 第四句의 斷層(단층)으로 말미암은 違和感(위화감)에서일 것이다. 한 잔 한 잔 거듭하는 이별주의, 그 얼근해진 주기에 힘입은 豪氣(호기)라고 이해를 한다 해도, 전후의 落差(낙차)가 너무 큼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效崔國輔體四時. 1(효최국보체사시. 1) 손곡
최국보의 체를 본받아
曉色珊瑚薦 효색산호천
春寒翡翠簾 춘한비취염
歸來百花裏 귀래백화리
香露滿衣霑 향로만의점(젖을 점)
새벽빛은 산호자리에 감돌아들고
봄추위는 비취빛 구슬발에 스며드네.
온갖 꽃들 핀 속으로 돌아오다가
향그런 이슬에 옷자락이 흠뻑 젖었네.
效崔國輔體四時. 2(효최국보체사시. 2)
露濕薔蓉架 노습장용가
香凝荳蔲花 향응두구화
銀床夏日水 은상하일수
金井索浮瓜 금정색부과
장미덩굴 가지마다 이슬이 젖고
육두구 꽃잎마다 향내가 스몄네.
하얀 평상 위에 여름날이 길기만 해서
맑은 우물에 띄운 침외를 찾아오네.
效崔國輔體四時. 3(효최국보체사시. 3)
玉階霜氣寒 옥계상기한
金閣疎螢度 금각소형도
靜夜閑無人 정야한무인
梧桐滿淸露 오동만청로
옥 계단엔 서릿기운 차갑게 내리고
금 누각엔 반딧불이 이따금 날아드네.
고요한 밤 한가로워 아무도 없고
오동잎에 맑은 이슬만 방울져 떨어지네.
效崔國輔體四時. 4(효최국보체사시. 4)
繡幕怯寒威 수막겁한위
金屛護鸚鵡 금병호앵무
窓間覔待兒 창간멱대아
寶篆生香縷 보전생향누(실 누)
비단장막을 치고도 추위가 겁나
금병풍을 둘러쳐 앵무새를 감쌌네.
창 사이로 시녀 아이를 찾노라니
향로에선 향 연기가 피어오르네.
* 최국보는 당나라 때의 시인인데, 吳郡(오군)사람이다. 시를 잘 지어 집현직학사와 예부원외랑에 올랐지만. 그의 시집은 지금 남아 있지 않다.(당시품휘)에는 그의 시가 많이 실려 있는데, 은번은 평하기를 “국보의 시는 아름답고도 청초해서 깊이 읊어볼 만하다. 樂府(악부)의 몇 장은 옛사람들도 따라올 수가 없다”고 하였다. 화려하고도 환상적인 최국보이 시를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여, 오랫동안 많은 시인들이 이를 모방하여 지었다. 이 시에 쓰인 어휘들도 귀족적이고 여성적이다.
손곡 이달은 신분제도가 엄격한 조선조 봉건사회에 서얼로 태어난 것부터가 그의 슬픈 생애를 운명 지었지만, 그는 자유로운 시인으로 조선 천지를 돌아다녔다. 초당 허엽의 집안에선 그의 글재주와 사람됨을 받아들여, 허균의 스승으로 삼았다. 워낙 자유분방한 허봉이었기에, 자기의 아우를 뒷날 영의정에까지 오른 유성룡에게 문장을 배우게 하고, 서얼 이달에게선 시를 배우게 했던 것이다. 허균은 당대 명문 집안의 막내로 태어나 어려움을 모르고 자랐지만, 스승 이달의 비애를 몸으로 느끼고 뒷날 遺才論(유재론)과 홍길동전을 지어 서얼차별 철폐를 부르짖었던 것이다. 밭 사이에서 이삭을 줍는 시골 아이나, 빗속에 나가 보리를 베어다 밥 짓는 아낙네, 세금과 부역에 밀려서 쫓겨 다니는 늙은이의 가련한 모습 등이 그의 시 속에 나온다. 그런가 하면 십 년 넘게 한양을 드나들면서도 벼슬 하나 얻지 못해 뱃사공에게 까지 핀잔 듣는 그의 모습이 풍자적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겹 문이 굳게 닫혀 있는 친구의 집 고대광실 앞에서 그는 멍하니 서서, 먼 데 하늘을 바라보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는 자유스러운 시인이다. 변화무쌍하게 장쾌한 칼춤을 추는 만랑옹의 모습은 바로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그의 모습이기도 한 것이다. 이달의 시는 읽을수록 맛이 난다.
손곡의 출생에 대하여는 예전부터 많은 이야기가 있었다. 그가 태어날 때에 홍주 고을의 鎭(진)이 있는 月山의 초목이 모두 말랐다는 전설이 <송천필담)이나 <홍수읍지>에 전한다. 그의 본관과 조상에 대하여 문제가 생긴 것은 제자인 허균이 기록한 <손곡산인전> 때문이다. 허균은 이 글의 첫머리에서 손곡산인 이달의 자는 익지 이니, 쌍매당 이첨의 후손이다. 라고 밝혔다. 그런데 이첨은 신명 이씨 이고 이달은 홍주 이씨 이다. 그래서 이달이 신평 이씨 라고 잘못 전해지는 경우도 있었으며, 거꾸로 이첨이 홍주 이씨 라고 잘못 전해지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이첨이 떳떳한 양반 사대부요, 대 문장가였던 데 비하여 이달은 서얼로 태어나 벼슬에 오르지 못한 시인이었으므로, 결과적으로는 이달의 가계가 잘못 알려진 셈이 되었다. 신평 현이 고려 말부터 홍주에 속했으므로 이러한 혼란이 일어났을 것이다. 이달이 가계에 대하여는 손곡 이달과 三唐詩(이종호, 성균관대학교 석사논문. 1980)에서 이미 밝힌 적이 있다. 이달의 출생지에 대해서는 숙종 때에 편찬된 結城縣志(결성현지) 고적 조에 자세하게 밝혀져 있는데 大洞村(대동촌) 결성현 동쪽 이십 오리에 있는데 문인 이달이 이곳에서 태어났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홍주의 주산이 백월산 인데 그 동북쪽이 홍주목이고 남서쪽이 결성현 하대동이었다. 상대동. 중대동. 하대동 세 동네를 아울러 황골이라 불렀는데, 1913년 총독부의 토지조사 때에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황곡리로 개칭하였다. 이달의 출생지는 홍성군 구향면 황곡리 하대동이다. 홍주 이씨 가운데 대동파가 있어 이 동네에는 아직도 홍주 이씨가 살고 있다. 현재 손곡의 무덤은 전해 오지 않으며 홍성군청 공원과 원성군 부론면 손곡리 손곡초등학교 마당에 시비가 세워져 있는데, 이것은 그가 태어난 곳과 공부하던 곳을 기념하여 최근에 세운 것이다.
허균에 의하면
손곡산인 이달의 자는 益之(익지)이니, 雙梅堂(쌍매당) 李詹(이첨)의 후손이다. 그의 어머니가 미천한 기생이었으므로, 세상에 쓰이지 못하였다. 원주 손곡에 살면서, 그것으로 호를 삼았다. 이달은 젊었을 때에 벌써 읽지 못한 글이 없었고, 지은 글도 매우 많았다. 한때 漢吏學官(한리학관)이 되었으나, 뜻에 맞지 않는 일이 있어서 벼슬을 버리고 떠났다. 고죽 최경창 옥봉 백광훈과 함께 놀며 몹시 기뻐하여 詩社(시사)를 맺었다. 그 무렵 그는 소동파의 시를 본받아서 그 뼛속까지 터득하였으므로, 한 번 붓을 들면 곧 몇 백 백 편을 지었는데 모두들 아름답고 풍부해서 읊을 만하였다. 하루는 思菴(사암) 상공이 이달에게 이르기를, 詩의 도는 마땅히 당으로써 으뜸을 삼아야 한다네. 소동파가 비록 호방하기는 하지만, 벌써 2류로 떨어진 것일세. 라고 충고하면서, 곧 책시렁 위에 꽂힌 이태백의 樂府(악부). 歌(가). 吟(음)등과 왕유. 맹호연의 近體詩(근체시)를 뽑아 주었다. 이달은 깜짝 놀라서, 시의 바른 법도가 여기에 있음을 그제야 깨달았다. 그는 앞서 배웠던 것들을 모두 내버리고, 옛날에 은거했던 손곡의 집으로 돌아왔다. <문선>. <이태백집>과 성당 十二歌(십이가)의 글 유우석. 위응물 및 양백겸의 唐音(당음)을 가져다가 엎드려서 외웠다. 밤을 낮 삼아, 무릎이 자리에서 떠나지 않기를 다섯 해나 계속했다. 어느 날 갑자기 마음이 밝아져서 마치 무엇을 깨달은 듯싶었다. 그래서 시를 지어 보았더니, 시어가 매우 맑고도 적절해서, 옛날의 모습을 깨끗하게 씻어 버렸다. 곧 여러 시인들의 체를 본받아서 長短篇(장단편)과 율시. 절구 등을 지었다. 그는 시를 지을 때에 말 한 마디까지도 갈았으며, 글자 하나까지도 닦았다. 또한 소리와 율까지도 알맞게 갈고 닦았다. 법도에 알맞지 않은 것이 있으며, 달이 가고 해가 가더라도 고치기를 계속했다. 이렇게 하여서 열댓 편이 지어지면, 그제야 여러 시인들 앞에다 내어놓고 읊어 보였다. 그들은 모두들 기이하다고 감탄하였고, 최고죽과 백옥봉 까지도 그를 따를 수 없다. 라고 말했다. 제봉과 하곡처럼 시를 잘 짓는다고 일세에 이름이 난 대가들도 그를 盛唐(성당)이라고 치켜세웠다. 그의 시는 맑고도 새로웠고, 아담하고도 고왔다. 그 가운데 높이 이른 시는 왕유. 맹호연 고적. 잠삼 등의 경지에 드나들면서 유우석. 錢起(전기)의 풍운을 잃지 않았다. 신라. 고려 때로부터 당나라의 시를 배운 이들이 모두 그를 따르지 못하였다. 이는 참으로 사암 상공이 고무시켜 준 힘 때문이었으니, 마치 진섭이 한고제의 길을 열어준 것과 같았다. 이달의 이름은 이로부터우리나라를 흔들었다. 그래서 그의 시는 귀중하게 여기었지만, 그 사람은 버리고 쓰지 않았다. 끝까지 그를 칭찬한 이들은 오직 문단이 대가들 서넛뿐이었고, 속인들 가운데 그를 미워하고 질투하는 자들은 숲처럼 늘어서 있었다. 여러 차례 그를 더럽히고 모욕하며 刑網(형망)에 얽어매었으나, 끝내 그를 죽여서 그 이름을 빼앗지는 못하였다. 달의 얼굴이 단아하지 못한데다가 성격이 또한 호탕하여 절제하지 않았고, 게다가 세속의 예법을 익히지 않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에게 미움을 입었다. 그는 고금의 모든 일과 자연의 아름다운 경치를 이야기하기 즐겼으며, 술을 사랑하였다. 글씨는 晉體(진체)에 능하였다. 그의 마음은 가운데가 텅 비어서 아무런 한계가 없었으며, 살림살이를 돌보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성품 때문에 그를 사랑하기도 하였다. 그는 평생토록 몸 붙일 곳도 없이 떠돌아다니며 사방에 비렁뱅이 노릇을 했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그를 천하게 여겼다. 그리하여 가난과 곤액 속에서 늙었으니, 이는 참으로 그의 시 때문인 것 같다. 그러나 그의 몸은 곤궁했지만 그의 시는 썩지 않을 것이다. 어찌 한때의 부귀로써 그 이름을 바꿀 수 있으리오, 그가 지은 글들이 거의 다 없어져 버렸기에, 내가 모아서 네 권으로 엮어 뒷세상에 전하려 한다. 外史氏는 이렇게 평했다. 태사 주지번이 앞서 이달의 시를 읽다가 漫浪舞歌(만량무가)에 이르러서 무릎을 치며, 이 작품이야말로 이태백에게다 견준다 하더라도 어찌 뒤떨어지겠는가. 라고 감탄하였다. 석주 권필은 그가 지은 斑竹怨(반죽원)을 보고 이것을 靑蓮集(청련집) 가운데 넣는다면, 아무리 안목이 높은 자라도 쉽게 가려내지는 못하리라. 하였다. 이 두 사람이 어찌 망령된 말을 하였겠는가.
아아, 이달의 시야말로 정말 기이하여라.
이상은 허균<성소부부고> 권 <蓀谷散人傳(손곡산인전)>에서
손곡이 애초부터 唐詩를 배운 것은 아니었다. 당시 조선의 문단에서는 주자학적 문학관의 宋詩를 배우기에 힘썼는데, 그러한 문학 풍조 속에서 손곡도 소동파를 배웠다. 그러다가 후에 호음 정사룡 사암 박순의 가르침과 충고, 그리고 최백과의 교류 등으로 學唐(학당)의 길로 접어들게 된 것이다. 당시는 또한 사화와 당쟁, 그리고 임진란의 참화까지 겹친 어두운 시대였고 그에 비추어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옛것을 회복하고 과거로 돌아가자는 복고주의가 일어나게 되어 논리적이고 주지적인 宋風을 떠나 인간 감정의 자연스런 발로를 주장하는 唐風으로 기울어가는 일대 문예변혁기였다. 이때를 일컬어 문학사가들은 穆陵盛世(목릉성세)라는 칭호로써 당시의 문예부흥을 가늠하고 있으니, 이 목릉성세를 대표하는 사람들이 바로 삼당시인들이었다. 이미 골수에 박힌 宋詩의 뿌리를 들어내고 새로이 唐風을 본받으려고 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밤잠을 자지 않고 무릎을 방바닥에서 떼지 않고 오륙년을 익히다가 문득 깨닫고는 시를 지었더니 시어가 매우 많고 적절해서 옛 모습을 찾을 수 없었으니, 그의 당시를 배우고자 하는 노력은 뼈를 깎는 고통이었다. 그리하여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시적 경지로 나아가서 그의 이름은 온 나라에 자자했다. 그러나 신분적 한계로 인하여 잠시 한리학관의 벼슬을 했으나 오래 머물지 못하였다. 조선시대 신분 구조 속에서 자신의 재능이 만족할 만한 지위를 보장해 주지 않음을 알게 되자, 그는 세속을 벗어나 방랑과 유리를 하면서 오로지 시로T 위안을 삼고 시로써 자신을 표현하게 되었다. 손곡의 삶의 주변에 위치했던 두드러진 인물들은 정사룡, 박순 외에도 이산해, 윤근수, 이이, 이황 등의 중신들, 고경명, 유연, 양사언, 임제, 정지승, 한호, 송상현, 정문부, 양배박 등의 무인. 기사, 그리고 각 고을의 지방관, 스님, 악사, 시생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긴밀한 관계를 지녔다. 특히 최. 백과의 교제와 허씨 가문의 자녀들과의 관계가 두드러지는데, 허균과 허난설헌은 손곡을 스승으로 삼아 시를 배워 뛰어난 재주를 보여준다.
손곡 시의 주된 정조는 恨哀(한애)이다. 이는 주로 전쟁과 가난, 그리고 헤어짐을 겪으며 슬프고 고통스런 현실을 떠돌며 지은 시들에서 보인다. 그의 생애중 역사적으로 가장 커다란 사건이 있다면 1592년의 壬辰亂(임진난)이였을 것이다. 국토는 황폐화되고 백성들은 곤궁하였으며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삶을 누려야 했는데, 손곡도 예외는 아니어서 자신의 流離(유리)의 비애와 백성들의 전쟁과 가난으로 인한 고통을 그는 시로 읊어내고 있다. 그는 가난에 고통 받고 전란으로 쓰라린 백성들의 모습을 침착하게 그려내고 있다.
시골집의 젊은 아낙은 / 저녁거리 없어서,
빗속에 나가 보리를 베어 / 숲속으로 돌아오네,
생나무는 축축해서 / 불길도 일지 않는데,
문에 들어서니 어린애들은/옷자락을 잡으며 우는구나.
밭 사이에서 이삭을 줍는 / 시골 애들의 말이,
한나절 부지런 했지만 / 바구니도 차지 못했다네,
올해엔 벼를 베는 사람들 / 또한 교묘해져서.
이삭 하나 남기지 않고 / 관청에다가 바친다더라.
늙은이는 솥을 지고 / 숲속으로 사라졌는데,
할미는 어린엘 끌고 / 따라가질 못하는구나.
사람들 만날 때마다 / 집 떠난 괴로움을 하소연하는데,
여섯 해 동안 종군하느라고 / 애비 자식마저 헤어졌다네.
그가 부딪친 현실이 이토록 처참하고 고통스러운 것은. 자신이 신분적 한계를 다시금 느끼고 괴로워하면서 뚜렷이 부각되는 모습으로 사회에 용납되지 않는 자신을 현실과이 거리감 속에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洛陽有感>은 <洛花> <渡龍津>과 함께 허균이 그 뜻이 매우 슬프니 참으로 때를 만나지 못한 사람의 글이다. 라고 하였듯이, 현실에서 소외된 쇠락한 자신을 서글퍼하고 있다.
좋은 자리의 높은 벼슬아치들 / 곳곳에서 만나는데
수레는 물같이 흘러가고 /말도 마치 용과 같구나.
장안의 길 위에서 /헛되이 머리를 돌리니
그대의 집이 곁에 있지만 / 아홉 겹이나 닫혀 있더라.
성채는 들쑥날쑥 / 큰 집들이 잇달았는데
권무세가의 풍류 소리가 / 그름과 연기를 흔드는구나.
패릉교 위에서 / 나귀를 탄 나그네가
양양의 맹호연 / 혼자만은 아닐 것일세.
때를 만나지 못해 불우했던 맹호연에게 자신을 견주며, 과거조차 볼 수 없는 자신의 신세와는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동병상련으로 가여워하는 서글픔이 드러나고 있다. 슬픈 운명을 보듬고서 허허로운 방랑의 길을 떠나서 속세의 浮沈(부침)을 아랑곳하지 않으려는 그의 마음에 또 하나 괴로운 것이 있다면, 절친하고 그를 이해해 주는 사람들과의 이별로 인하여 느끼는 슬픔이다. <別李禮長>은 봄기운 무르녹는 강릉 땅에서 친구를 서울로 떠나보내며 그 서글픈 정회를 읊어서 허균도 외로운 감정을 뛰어나게 보인다. 고 칭찬한 시로, 여러 사람의 입에 오르내린 손곡의 대표작이다.
오동 꽃잎은 / 밤안개 속으로 떨어지고
바닷가 나무 위엔 / 봄구름만 떠 있구나.
풀밭에서 한 잔 술로 / 헤어지지만
서울 가는 길목에서 / 다시 만나겠지.
너무도 헤어짐에 익숙해진 손곡인지라 이별하는 두 사람의 슬픈 감정을 위로하듯 결구하는 위의 시는 아쉬움과 서글픔을 극한에까지 끌어올린 응집력을 보인다. 신분적인 약점을 괴로워하며 속세를 떠나 방랑하는 손곡에게는 비록 자신이 현실적으로는 그토록 비참하고 고달픈 모습이긴 했으나, 그의 가슴 속에는 시인으로서의 대단한 자부심을 지녔다. 오로지 詩名(시명)을 획득하여 자아를 실현하는 것만이 그가 이 세상에서 자기의 빛을 발휘하는 유일한 길이라 여겼으리라.
좌절감과 소외감, 그리고 남아의 이루지 못한 포부를 보상해 주는 것이 시였으니 <江行> <謝勤上人> 등에서 산하를 헛되이 왕래한다 탓하지 마오. 보잘 것 없으나마 새로운 시 얻어 비단주머니에 가득하다오.
백 가지 계획으로 생을 도모했으나 상책이 없으니 몇 편 詩로 번민을 물리치고 글씨를 쓴다. 라고 말함으로써 그의 삶의 궁극적 목표가 시에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上思菴相公>에서는 자신의 시적 재능에 대한 자부심을 강하게 보여준다.
불우한 자신을 딛고 그는 차츰 신선계로의 초월한 삶을 누리려는 정신세계를 보여준다. 자기 세계와 상충이 불가피한 인간에게는 자기 고뇌의 해결장으로써 초현실적인 별세계를 추구하는 것은 만인 공통의 의식으로, 손곡은 산수전원으로 돌아가 자연 속에 몰입하여 개인적 화평을 구하며 안주하는 단계를 넘어서면서 완전히 현실을 떠난 초탈의 세계를 찾는다. 자신의 숙명적인 모순 속에서 적극적인 의지를 가지고 신선 세계를 찾음으로써, 자신을 신선화 하고 그 속에서 유유히 노님으로써 고뇌를 해결하고 있다. 그림을 보고 쓴 畵鶴(화학)에서는 자신의 모습을 고고한 탈속의 이미지를 지닌 학에다 비기면서 사기자신에 대한 인식을 구체화하고 있다.
외로운 학 한 마리 / 먼 하늘을 바라보며,
밤도 차가운데 / 한 발을 들고 섰네.
서녘 바람이 차갑게 / 대나무 숲에 불어와,
몸에는 가득 / 가을 이슬로 적셨구나.
자신의 자화상이라고 일컬어지는 위의 시에서, 그는 자신이 지향하고자 하는 신선세계를 학이 지향하는 것과 일치 시키고 있다. 한 발마저 땅에서 맨 채 보다 멀리 그리고 높게 날아로르려는 학의 모습에서 손곡은 자신의 모습을 찾고 있는 것이다. 절이나 스님의 세계를 그린 시편들에서도 현실과는 떨어진 별세계의 모습을 드러낸다.
산이 흰 구름 속에 있어
흰 구름을 중은 쓸지 않네,
나그네가 왔기에 비로소 문 열고 보니
골짜기마다 솔 꽃가루만 흩날리네.
풍경 묘사 그 자체만 가지고도 스님의 높은 수도 경지와 세속을 절연한 무애의 지경을 암유하고 있는 이 “불일암증인운석”은 山寺라는 제목으로 많은 이의 입에 오르내린 걸작이라 일컬어진다. 백운으로 상징되는 초월 세계와 송화가 암유하는 현실 세계의 양극 간에서 스님과 손님의 대립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초월 세계에 대한 손님의 동경과 추구, 그리고 현실 세계를 접하고도 아무런 동요조차 보이질 않는 스님의 경지가 동시에 상호 교차되면서 자연스런 융합을 유도해 내고 있다.
손곡이 동경하는 세계가 또 한 번 작품으로 드러난 경우라 할 것인데, 그 이후의 시에서는 동경과 지향이 아닌 신선 세계에서 노닐고 즐김으로써, 현실에서 눈물과 슬픔, 그리고 한으로 나날은 보낸 손곡이, 이제는 그러한 것들을 정신적으로 극복하고 불우했던 자신을 시적으로 승화시킨다. 라고 했다.
(以上은 허경진 엮음 손곡 이달의 詩選에서)
23. 題畵(제화) 金得臣
古木寒烟裏 고목한연리
秋山白雲邊 추산백운변
暮江風浪起 모강풍랑기
漁子急回船 어자급회선
고목에 연기가 피어나고
산자락에 구름이 맴도네
강바람에 풍랑이 일어나니
어부는 급히 뱃머리를 돌리네.
그림 속에 그려져 있는 풍경이 참 아름답다. 천 년 묵은 고목들이 연기 피어나는 산기슭에 뻗어 있고 단풍진 가을 산의 봉우리를 흰 구름이 맴돌고 있다. 이곳에 날이 저물어 가자 강물이 파도를 일으켜 물살이 거칠어지는 기미를 알고 어부는 재빨리 뱃머리를 돌려 돌아가고 있다.
이 詩는 起. 承句가 對로 되었다.
韻字는 邊. 船(평성
註
漁子(어자) - 어부
김득신 [金得臣, 1604~1684]
본관 안동(安東). 자 자공(子公). 호 백곡(栢谷) ·귀석산인(龜石山人). 음보(蔭補)로 참봉(參奉)이 되고, 1662년(현종 3)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안풍군(安豊君)으로 습봉(襲封)되었다. 후에 화적(火賊)에게 살해되었으며, 당시 시명(詩名)이 있었다. 저서에 《백곡집(栢谷集)》 《종남총지(終南叢志)》 등이 있다.
백곡집 -
필사본, 4권 1책이며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대부분이 시(詩)로서 권1에 5언절구(五言絶句) 67수, 권2에 7언절구 136수, 권3에 5언율시(五言律詩) 144수, 권4에 7언율시 21수가 수록되고, 이밖에 조상국만(趙相國輓) 3편, 독수기(讀數記) 4편 및 금강록(金剛錄) ·죽림서원봉안문(竹林書院奉安文) 등이 실려 있다. 책머리에 박세당(朴世堂)이 1687년(숙종 13)에 쓴 서문이 있다
24. 逢別蘇判書世讓(봉별소판서세양) 黃眞伊
月下庭梧盡 월하정오진
霜中野菊黃 상중야국황
樓高天一尺 누고천일척
人醉酒千觴 인취주천상(술잔 상)
流水和琴冷 유수화금냉
梅花入笛香 매화입적향
明朝相別後 명조상별후
情與碧波長 정여벽파장
달빛 아래 오동잎이 지고
서리를 맞고 들국화가 피었네.
다락이 높으니 일척이면 하늘이 닿을 듯하고
사람이 취하니 술을 천 잔이나 마신 듯싶네.
흐르는 물소리는 거문고 가락에 싸늘하고
매화꽃은 피리소리에 젖어 향기롭네.
내일 서로 이별한 뒤에는
우리의 정이야 저 강물처럼 이어져야지
또 다르게 의역하면
달 아래 오동잎 마지막 지고
서리 속 들국화 노랗게 폈다.
다락 높아 하늘은 자 남짓한데
무진무진 기울여 취하는 이 밤
물소린 거문고에 마냥 차갑고
매화락 피리 가락 애련도 하다.
내일 아침 서로 헤어진 후면
그리움! 푸른 물결로 함께 길려니 -
밝은 달밤에 뜰 앞에 있는 오동잎은 다 떨어져 있고 서리가 내린 이 늦가을에 들국화 꽃은 노랗게 피어 있다. 이 가을철에 임과 함께 앉아 있는 이 다락은 높아서 한 척만 더 있으면 하늘에 닿을 듯이 솟아 있고 임과 나는 술에 만취되었는데 아마 서로 마신 술이 천 잔쯤은 되는 성싶다. 다락 아래 흐르는 물은 거문고 타는 소리에 섞이어 차갑게 뼈 속에 스며드는 것 같은데 매화꽃은 피리소리에 젖어 더욱 향기가 나는 듯싶다. 내일 아침이면 우리 님과 서로 이별하게 될 것이니 이제 이별하면 끝이란 말인가. 비록 임과 이별은 하였을지라도 임과 나와의 정은 저 끝없이 흐르는 물처럼 영원토록 이어져야 할 것이다. 그것만은 바랄 뿐이다.
評說
情人(정인)과의 纏綿(전면)한 이별의 前夜曲(전야곡)이다.
1. 2구 전구는, 백방의 만류도 무효로 끝내 막바지에 몰리게 된 이별의 감정을 마지막 잎새마져 져버리는 달밤의 오동잎에 우의한, 처연한 분위기요, 후구는 한갓 야생의 들국화에 지나지 않은 지신이기는 하나, 가정의 愛待(애대)를 받는 귀품의 황국화에 못지않은, 굳은 절개 있음을 자신의 黃氏(황씨)성에 걸어 강조함이다. 그것은 곧, 만물을 肅殺(숙살)하는 서리 속에서 더욱 열기를 뿜는 황국화의 정신이기에. 이 이별 후의 자신의 存心處身(존심처신)이 어떠할 것임을 넌지시 암시함이기도 하다.
3. 4구는 높은 누대에 餞別(전별)의 자리를 마련하고, 무진무진 잔을 거듭하는 이별의 정은 천야만야로 고조되어 있다. 天一尺(천일척)이 어찌 누대의 높음 만이랴? 激昻(격앙)된 離情(이정)이 거의 滿水位(만수위)에 달하여 있음이기도 하니, 강달은 나와 사이 몇 자 거리에 밝아 있고(江月巨人只數尺)와 같은 차분하게 가라앉은 호젓한 분위기에 杜甫(두보)의 달과는 근본이 다르며, 李白 같은 酒豪(주호)도 기껏 하루에 모름지기 삼백 잔을 기울인다.<一日須傾三百杯>가 고작인데, 酒千觴(주천상)은 극한 감정을 어거지로 극복하려는, 일종의 自虐(자학)이요, 自爆(자폭)이 아닐 수 없다. 이는 적어도 百, 千으로 증폭하지 않고는 직성이 풀리지 않는 격한 심정의 표현으로 그 위치에 만일 仄聲字(측성자)가 용납될 수만 있었다면, 萬. 億을 취함도 사양치 않았으리라.
5. 6句는 저 흐르는 강물 소리는, 보내는 자신의 애틋한 거문고 가락에 어울리면서도, 마치 물 따라 가버리는 냉정한 임의 마음인 양 차갑게 울려오고, 피리로 불리는 매화락 이별곡은, 흐느끼는 듯 한숨짓는 듯 애련하기 그지없다.
香은 梅花에 기댄 표현으로, 피리 소리의 후 미각에 공감각된 가련미가 流水和琴(유수화금)에는 또한 佰牙(백아)와 鐘子期(종자기)의 고사, 知音(지음)을 잃은 한숨마저 서려 있음을 본다.
7. 8句는 날이 새면, 님은 뱃길로 떠날 것이나, 그 배 멀리 사라져 가고나면, 이 가슴에 여울지는 그리운 정은, 저 푸른 물결과 함께 잠잘 날이 없으리라.
이 끝구의 아득한 여운은 실로 장강의 물결만큼이나 길고도 길다.
임방의 水村漫筆(수촌만필)에 보면 양곡이 이 시에 감탄하여 차마 떠나지 못하고, 다시 주저앉아 버렸다는 일화도 전한다.
만월대 회고에 보면
오백년 끝난 터에 옛 절은 남아,
저녁별 비낀 고목 시름케 하네,
쇠잔한 중의 꿈에 지는 저녁놀
이지러진 탑머리의 하고 한 세월.
봉황새 돌아가고 나는 멧새들
진달래 지는 언덕 풀 뜯는 미소,
번화턴 그 당시야 뉘 알았으리?
봄이건만 가을 같은 오늘날일 줄....
또 박연폭포에는
두멧골 뿜어내는 한줄기 냇물
천야만야 용추소로 낭떠러진다.
은하수를 거꾸로 쏟아내는가?
흰 무지개 반공에 걸어 놓은 듯,
우박 흩고 우레 달려 골은 자우룩
갠 한ㄹ에 사무치는 욱 빻는 소리.
여산이 명승이라 이르지 마오.
천마는 해동의 으뜸이라오.
이 詩는 起承轉句는 對로 되었다.
韻字는 黃. 觴. 香. 長(平聲)
註
天一尺(천일척) - 한 자만 있으면 하늘에 닿는다는 뜻.
千觴(천상) - 천 잔. 많은 술.
和琴冷(화금냉) - 거문고 소리에 화하여 차가웁다.
入笛香(입적향) - 피리소리에 들어와서 향기롭다.
半月(반월) 황진이
誰斷崑山玉 수단곤산옥
裁成織女梳 재성직녀소(빗 소)
牽牛一去後 견우일거후
愁擲碧空虛 수척벽공허
뉘라서 둥근 구슬을 끊어서
여자의 반달을 만들었나.
칠월칠석에 임이 떠나고
시름처럼 푸른 하늘에 떠 있네.
해석을 한 번 바꿔 보면
그뉘라 곤륜산 옥을 켈가
직녀의 얼레빗을 만들었던고?
견우님 한 번 가버린 후론
시름겨워 허공에 던져 버렸네.
누가 곤륜산에서 캐낸 둥근 구슬을 한 가운데를 뚝 끊어서 두 조각을 내어 여자들이 머리를 빗는 얼레빗을 만들었는가. 이것은 마치 반달 모양이다. 이 반달이 저 하늘에 떠 있는데 이것은 칠월칠석날 견우성과 직녀성이 오작교 다리를 건너 서로 만나고 견우성이 떠나버린 후에 다 풀지 못한 한이 있어 저 텅 빈 푸른 하늘 가운데 떠 있는 것이다.
이 詩는 對가 되어 있지 않다.
韻字는 梳. 虛(평성)
註
崑山玉(곤산옥) - 곤륜산에서 나온 옥.
織女梳(직녀소) - 여자의 머리 빗는 빗.
愁擲(수척) - 근심스럽게 떠 있음.
이 반달은 그녀가 애송하던 작자 미상의 唐人(당인)의 시를 후인이 그녀의 자작인 양 그릇 수록한 것이었음을 李家源(이가원) 박사가 밝힌 바 있다. 원전인<唐詩品彙(당시품휘)>사이에 약간의 字句(자구)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 작품은 또 황진이의 경우와 같은 착오로 玉峰集(옥봉집)에도 이옥봉의 작인 양 수록되어 있음을 부기하여 둔다.
황진이 [黃眞伊, ?~?]
일명 진랑(眞娘). 기명(妓名) 명월(明月). 개성(開城) 출생. 중종 때 진사(進士)의 서녀(庶女)로 태어났으나, 사서삼경(四書三經)을 읽고 시(詩) ·서(書) ·음률(音律)에 뛰어났으며, 출중한 용모로 더욱 유명하였다. 15세 무렵에 동네 총각이 자기를 연모하다가 상사병(相思病)으로 죽자 기계(妓界)에 투신, 문인(文人) ·석유(碩儒)들과 교유하며 탁월한 시재(詩才)와 용모로 그들을 매혹시켰다. 당시 10년 동안 수도(修道)에 정진하여 생불(生佛)이라 불리던 천마산(天馬山) 지족암(知足庵)의 지족선사(知足禪師)를 유혹하여 파계(破戒)시켰고, 당대의 대학자 서경덕(徐敬德)을 유혹하려 하였으나 실패한 뒤, 사제관계(師弟關係)를 맺었다.
당대의 일류 명사들과 정을 나누고 벽계수(碧溪守)와 깊은 애정을 나누며 난숙한 시작(詩作)을 통하여 독특한 애정관(愛情觀)을 표현했다. ‘동지달 기나긴 밤을 한허리를 둘에 내어’는 그의 가장 대표적 시조이다. 서경덕 ·박연폭포(朴淵瀑布)와 함께 송도삼절(松都三絶)로 불렸다. 작품으로 《만월대 회고시(滿月臺懷古詩)》《박연폭포시(朴淵瀑布詩)》《봉별소양곡시(奉別蘇陽谷詩)》《영초월시(咏初月詩)》 등이 있다.
송도삼절 - 개성 명기(名妓) 황진이가 당시 개성의 명사인 고승(高僧) 지족선사(知足禪師)와 명유(名儒) 서경덕을 유혹하였는데, 지족선사는 그녀의 유혹에 빠져 파계를 하였으나, 서경덕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으므로 후대인이 서경덕·황진이와 박연폭포의 절경을 한데 묶어 송도삼절이라 하였다.
25. 봄 시름 李梅窓
東風三月時 동풍삼월시
處處落花飛 처처낙화비
綠綺相思曲 녹기상사곡
江南人未歸 강남인미귀
봄바람 살랑이는 때는 춘삼월
이르는 곳마다 흩나는 꽃잎
거문고 상사곡 애끓는 가락
강남 간 그이는 왜 이리 늦나?
註
綠綺(녹기) - 거문고. 사
司馬相如(사마상여)가 梁王(양왕)에게서 받았다는 거문고의 이름.
相思曲(상사곡) - 연정을 노래한 악곡의 이름.
江南(강남) -중국 양자강 남쪽 지방의 따뜻한 곳을 가리키는 말 이였으나, 차츰 상상의 나라로 관념화하여 봄의 고장, 평화와 행복의 나라. 꿈과 동경의 세계로 轉意(전의)되었다.
사랑하는 이를 그리는 봄의 애상이다. 봄은 강남으로부터 온다. 꽃소식도 제비도 강남에서 북상해 온다. 그렇건만, 이 봄과 함께 오시겠다던, 강남 간 그이는 감감 무소식! 봄도 이미 막판이라, 가는 곳마다 지는 꽃잎 눈보라처럼 흩날려, 기다리는 심사를 애타게 하고 있다. 거문고를 뉘여 상사곡 한 곡조를 뜯어보지만, 마음은 마냥 꽃보라 처럼 愁亂(수란)만 하다. 매창은 村隱(촌은) 유희경과 정이 깊었으나, 그가 歸京(귀경)하자 소식이 끊어졌으므로 오매에 잊지 못하는 정을 시조로 읊었다.
梨花雨(이화우)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임,
추풍낙엽에 저도 나를 생각는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라.
*이 시조는 부안에 세운 그녀의 시비에 새겨져 있다.
李梅窓(이매창)1573-1610
선조 6년 전라도 扶安縣(부안현)에서 중인 신분이었던 아전 이탕종의 서녀로 태어났는데 매창은 號(호)이고 이름은 계유년에 태어났다고 하여 癸生(계생)이라 불리다가 자라면서 계화. 계랑. 향금(香今)이라고도 n하였다. 매창은 얼굴보다는 詩와 글 노래와 거문고 솜씨 그윽한 성품으로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었기에 그 일대에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었으며, 그리하여 많은 시인묵객들이 매창을 만나러 부안을 찾기도 하였다는데. 천민 출신이었다가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집한 공로로 양반이 된 위항시인(委巷詩人) 촌은 유희경 교산 허균 등이 대표적인 경우임.
생애
村隱 劉希慶(촌은 유희경)과의 관계 - 젊은 시절에 촌은이 전북 부안에 놀러갔다가 우연히 매창을 만나게 됐는데, 첫 만남에서 서울에서 온 손님이 이름난 시인이라는 말을 듣고 그녀가 유희경과 백대붕 가운데 어느 분이십니까? 라고 묻자, 기생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던 촌은 은 비로소 파계하였으며, 그녀에게 贈癸娘(증계랑)이란 다음의 시를 지어 주었다고 함
曾聞南國癸娘名 증문남국계낭명
詩韻歌詞動洛城 시운가사동락성
今日相看眞面目 금일상간진면목
却疑神女下三淸 각의신녀하삼청
남국의 계랑 이름 일찍이 알려져서
글재주 노래 솜씨 서울에까지 울렸어라
오늘에사 참모습을 대하고 보니
선녀가 떨쳐입고 내려온 듯 하여라.
그때부터 두 사람은 서로 풍류를 통해서 즐거운 나날을 보냈으며, 촌은은 매창에게 여러 편의 시를 지어주며 사랑을 나누었는데, 다음의 戱曾癸娘(희증계랑)이 가장 대표적이라 할 수 있음. 그 詩를 보면
柳花紅艶暫時春 유화홍염잠시춘
撻隨難醫玉頰嚬 달수난의옥협빈
神女不堪孤枕冷 선녀불감고침냉
巫山雲雨下來頻 무산운우하래빈
푸른 버들 붉은 꽃 피는 봄철은 순간인 것을
고운 얼굴 주름지면 되돌리기 어려워라
선녀인들 홀로 잠드는 쓸쓸함을 어이 견디리.
무산운우의 정을 자주 나누세 그려.
매창 또한 촌은과 길지 않은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애틋한 정을 나누었기에 촌은을 그리는 詩를 수없이 읊었다고 하는데, 다음의 詩들 가운데 自恨(자한)은 임난이 일어나 서울로 돌아가야만 하는 님과의 기약조차 없는 이별에 대한 설움을 “四君詩”는 돌아오지 않는 님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한 작품임.
自恨(자한)
東風一夜雨 동풍일야우
柳興梅爭春 유흥매쟁춘
對此最難堪 대차최난감
樽前惜別人 준전석별인
하룻밤 봄바람에 비가 오더니
버들잎과 매화가 봄을 다투네.
이 좋은 시절에 차마 못할 건
술잔 앞에 님과의 이별이라네.
思君詩(사군시)
璃苑梨花杜宇啼 이원이화두우제
滿庭蠊影更凄凄 만정염정갱처처
相思欲夢還無寐 상사욕몽환무매
起倚梅窓廳五鷄 기의매창청오계
배꽃 핀 동산에선 두견새 우지짖고
달빛은 뜰에 넘쳐 이내 마음 서러웁네.
꿈이라도 꾸려하나 잠마저 오지 않네.
창가에 기대서니 새벽닭이 우는구나.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임진왜란이 터지는 바람에 서울로 돌아간 촌은은 의병을 일으켜 왜군을 무찌른 공적으로 관직을 얻게 되었고, 그리하여 전쟁이 끝난 후 부안으로 내려와 재회의 기쁨을 나누다가 매창과 함께 서울로 올라가 3년 가까이 같이 지내던 중, 매창은 지병을 치료하기 위해 다시 고향으로 내려왔으며, 그때부터 죽음이 한 걸음씩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고는 병중에서도 다음과 같은 詩를 읊었음.
梅窓風雪共蕭蕭 매창풍설공소소
暗恨幽愁倍此宵 암한유수배차소
他生구生明月下 타생구생명월하
風蕭相訪彩韻衢 바람 소리 따라 영롱한 구름 속 님을 뵈올까.
교산 허균과의 관계
1607년 村隱(촌은)을 다시 만나기까지 10여년을 마음의 정을 주는 사람도 없이 촌은만을 그리며 살던 매창이 마음을 준 두 번째 남자는 이웃 고을인 김제군수로 내려왔던 李貴(1577-1633)였으나, 그가 파직되어 떠난 지 서너 달 뒤인 1601년 6월 명문 집안 출신에 글재주까지 뛰어난 교산 허균(1569-1633)이 충청도와 전라도의 세금을 거둬들이는 해운판관이 되어 내려왔다가 우연히 부안에서 그녀를 만나게 됨으로써 세 번째 남자가 되었음.
매창의 굳은 절개와 함께 그녀의 시를 좋아했기에. 잠자리도 같이 하지 않은 채 매창과 정신적인 교감을 가지면서 오래도록 우정을 키워 나간 교산은 1601년12월 형조정랑이 되어 서울로 올라온 후 승승장구하였으나 16018년 공주목사에서 파직되자, 다시 부안의 우반동에 내려와 정사암을 짓고 살았는데, 그때 교산을 다시 만나 함께 노닐던 매창은 교산의 영향으로 참선을 시작 했으며, 교산이 승문원 판교의 교지를 받고 다시 서울로 올라가면서 두 사람은 헤어지게 된 것임
臨終(임종)
가성의 황진이와 함께 조선 名妓(명기)의 쌍벽을 이루던 매창은 결국 가난과 병마에 시달리다가 광해군 2년 서른여덟의 나이로 아무도 돌봐주는 이 없는 외로운 병석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그동안 사랑과 외로움. 헤어진 임에 대한 그리움 등자기 삶에서 스며 나오는 정서를 가느다란 읊조림으로 풀어낸 수백 편의 시를 남겼으며, 다음의 詩는 길지 않으면서도 고단했던 자신의 삶이 압축적이면서도 잘 드러나고 있음
독수공방 외로이 병에 찌든 이 몸.
굶고 떨며 사십 년 세월 길게도 살았네.
묻노니 사람살이가 얼마나 되는가.
어느 날도 울지 않은 적 없네.
한편 선조의 승하로 국상 준비에 바빠 병문안도 가지 못했던 촌은은 매창이 죽은 후 부안으로 내려가 추모시를 읊으며 그녀의 무덤 앞에서 통곡하였다고 하며 교산 또한 매창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슬퍼하며 哀癸娘(애계랑)이란 다음의 시 두 편을 지었다고 함. 그 중 한 편을 보면
哀癸娘1(애계랑1)
妙句堪璃錦 묘구감리금
淸歌解駐雲 청가해주운
偸桃來下界 투도래하계
竊藥去人群 절약거인군
燈暗芙蓉帳 등암부용장
香殘翡翠裙 향잔비취군
明年小桃發 명년소도발
誰過薛濤墳 수과설도분
묘한 싯구는 비단을 자아내고
아름다운 노래는 가던 구름도 멈추게 하네.
仙桃(선도)를 훔치고 下界한 서옥모인가
향약을 훔치고 인간세계에 내려온 항아인가
밝은 촛불은 부용 장막에 어두운데
그윽한 향기는 翡翠군에 남았구나.
명년 봄 다시 복사꽃 만개할 제
어느 누가 설도의 무덤을 지나갈런가.
매창이 남긴 詩 遺品(유품)
매창이 죽은 지 60여 년이 지난 후에 부안의 아전들이 매창의 詩를 모았고, 또 매창이 생전에 자주 찾아 마음을 다스리곤 하던 개암사에서 책으로 엮어주어 지금은 매창의 詩가운데 61수가 전해지고 있음
대표작
이화우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나를 생각는가.
천 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더라.
내 精靈(정령) 술에 섞여 님의 속에 흘러들어
구곡간장을 마디마디 찾아가며
날 잊고 님 향한 마음을 다스리려 하노라.
기러기 산 채로 잡아 정들이고 길들여서
님의 집 가는 길을 歷歷(역역)히 가르쳐주고
한밤중 님 생각날 제면 소식 전케 하리라.
등잔불 그무러갈 제 창 앞 짚고 드는 님과
五更종 나리올 제 다시 안고 눕는 님을
아무리 백골이 진토된들 잊을 질이 있으리.
내 가슴 흐르는 피로 님의 얼굴 그려내어
내 자는 방안에 족자 삼아 걸어두고
살뜰히 님 생각날 제면 족자나 볼까 하노라.
매창은 홍길동전을 쓴 허균이 그토록 사모해도 몸을 허락지 않았던, 황진이와 쌍벽을 이룬 조선의 名妓(명기)이다.
매창이 시재가 워낙 출중하여 당대 천민 출신이면서도 시문에 필적할 자가 없었던 村隱(촌은) 劉希慶(유희경1545-1636)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촌은에 대한 단심의 벽을 허균도 못 뚫은 것이다. 그런데 신임 사또 조일철이 부임하자마자 매창에게 수청을 명한 것이다. 때는 임란의 병화로 산천이 뒤흔들렸고, 매창의 애인 촌음은 의병을 일으켜 목숨 걸고 싸우고 있을 때 매창이 사또 명에 넘어갈 리가 없었다. 한 달을 병가로 미적거리다 결국 불러들여 사또와 앉은 정자에 때마침 개구리 소리가 들렸다. 수청을 거절하는 매창에게 사또는 매우 어려운 숙제를 던졌다. 落韻成詩(낙운성시)하라는 것이다. 옷 의. 날 비. 고사리 미. 세 자를 운으로 내고, 게다가 꼭 개구리를 주제로 읊으라고 명령을 하였다.
서슬 퍼런 긴장의 순간. 매창은 서슴지 않고 한시를 써내려갔다.
春雨池塘歎無衣 춘우지당탄무의
草中逢蛇恨不飛 초중봉사한불비
封口生涯人若得 봉구생애인약득
夷齊不食首陽薇 이제불식수양미
봄비 부슬부슬 연못가에 옷도 입지 못함 서러워
풀섶에서 뱀 만나니 날지 못함 한하노라
사람이 개구리처럼 먹지 않고 살 수 있는 생애 얻을 수만 있다면
백이와 숙제도 수양산의 고사리조차 먹지 않았으리.
옷도 없고 날지도 못하는 개구리의 신세를 자신의 처지에 비하고, 개구리를 잡아먹으려 넘실거리는 뱀을 사또에 비했다. 마지막의 명구절은 수양산 바라보며 夷齊(이제)를 한하노라. 라는 성삼문의 절개를 읊은 명시조를 연상케 한다. 수양산도 이미 주나라 땅이 되었으니 그 땅의 고사리조차 먹지 않았어야 했다는 것이다.
26. 許蘭雪軒(허난설헌) 哭子(자식을 울다)
去年喪愛女 거년상애녀
今年哭愛子 금년곡애자
哀哀廣陵土 애애광릉토
雙墳相對起 쌍분상대기
肅肅白楊風 숙숙백양풍
鬼火明松楸 귀화명송추
紙錢招汝鬼 지전초여귀
玄酒奠汝丘 현주전여구
應知弟兄魂 응지제형혼
夜夜相追遊 야야상추유
縱有腹中孩 종유복중해
安可冀長成 안가기성장(바랄 기)
浪吟黃臺詞 낭음황대사
血泣悲呑聲 혈읍비탄성(삼킬 탄)
사랑하는 딸
지난해 잃고
귀여운 아들
올해 여의어
슬프디 슬픈
광주 땅에는
두 무덤 마주
새로 생겼네.
백양나무 숲
쓸쓸한 바람
도깨비 불빛
흐르는 묘지
지전 흔들며
너희 넋 불러
무술을 친다.
너희 무덤에.
응당히 너희
남매의 혼이
밤마다 서로
좇아 놀려니 -
비록 새 아길 가진다 한들
어찌 바라리 장성하기를 - .
하염없는 맘
황대사 외며
피눈물 울어 소리 삼켜라!
註
廣陵(광능) - 경기도 광주의 옛 이름
雙墳(쌍분) - 두 무덤. 한 쌍의 무덤.
白楊(백양) - 백양나무. 고래로 무덤에 심어왔다.
松楸(송추) - 소나무와 가래나무. 이 두 가지 나무는 무덤에 심는 나무임에서. 轉意(전의)하여, 墓地(묘지)의 뜻.
紙錢(지전) - 무당이 비손할 때에 쓰는 돈 모양으로 잇대어 둥글게 오려 만든 긴 종이 오리.
玄酒(현주) - 제사 때 술 대신으로 쓰는 찬물. 무술.
應知(응지) -응당히 앎. 꼭 그러리라고 여김.
縱有(종유) - 비록 ....이 있다할지라도.
安可(안가) - 어찌 ....할 수 있으랴.
冀(기) - 바람.
娘吟(낭음) - 하염없이 읊음.
黃臺詞(황대사) - 唐의 章懷太子 賢(현)이 지은 노래. 黃臺瓜辭(황대가사)라고도 한다.
呑聲(탄성) - 소리를 삼킴.
지극히 가까운 정분의 지극히 절박한 감정에서는 글이 이루어지지 못한다는 뜻이다.
어린 두 자녀를 작금 양년 사이에 다 잃고 만, 모정의 아픔이야 실로 어떻다 하랴. 그런 극한 상황에서도 통곡을 삼키고 심서를 가다듬어 이런 한 편의 시를 이루었음이 우선 대견스럽다.
고시체인지라 비록 엄격한 율격을 요하는 것은 아니나, 여기서는 몇 차례의 환운에 의한 압운이 되어 있을 뿐, 기타는 거
배려되어 있지 않은 채, 彫琢(조탁)도 推敲(퇴고)도 안 거친 대로, 낙서하듯 그적거려 던져버린 것같이 거칠다. 그것은 위의 “비록 내 아기 가진다 한들 어찌 바라리 장성하기를 -”
이 부분의 뜻은 다음 구의 黃臺辭의 전제로는 약간의 의미를 가진다 할 수 있겠으나, 전체의 내용에는 도저히 용납 조화될 수 없는 작대기감일 뿐이다. 어쩌면 시편을 정리하던 후인의 착종(錯綜)으로 딴 시에서 混入(혼입)된 衍文(연문)이 아닌가고도 여겨질 만큼의 불협화음이다. 그런데도 이 시가 우리의 마음을 이처럼 크게 울리는 것은 어째서일까? 흐트러진 심사에서는 해조보다는 오히려 난조가 제격으로, 독자의 심금을 또한 같은 난조로 뒤흔들어 놓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는 필경, 시란 형식이나 기교보다는 深層(심층)에서 솟구쳐 오르는 그대로의 가식 없는 목소리여야 할 것임을 일깨워 주는 것이기도 하다.
끝구의 黃臺辭(황대사) 운운은 “ 내 황대사의 어미처럼 덕이 없고 사랑이 모자라, 제 자식을 제 스스로 연달아 죽인 것이나 다름없다”는 자책이요 자형이다.
황대사는 다음과 같다.
種瓜黃臺下 종과황대하
瓜熟子難難 과숙자난난
一摘使瓜好 일적사과호
再摘令瓜稀 재적영과희
三摘尙云可 삼적상운가
四摘抱蔓歸 사적포만귀
황대 아래 외 심으니
주렁주렁 외가 익네.
첫 번째는 외 좋으라 외 따내고
두 번째는 아직 배다 솎아내고
세 번째는 맛이 좋다 또 따내고
네 번째는 덩굴채로 걷어 가네.
*唐나라 高宗(고종)의 아들이 여덟인데, 위로 넷은 天后(천후)의 소생이다. 맏인 弘(홍)을 태자로 삼았으나. 繼后(계후)가 시기하여 독살하게 되자 둘째인 賢(현)을 태자로 세웠다. 그러나 현은 수심에 가득 차 말이 없고, 이 노래를 지어 악고에 주어 부르게 하여, 상과 후의 깨달음을 얻으려 했으나, 그도 결국 쫓겨나 죽고 말았다는 내용이다.
(이 시는 1985년 廣州에 세운 작자의 시비에 새겨짐)
오라버니를 떠나 보내며 허난설헌
(送荷谷謫甲山)
遠謫甲山客 원적갑산객
咸原行色忙 함원행색망(바쁠 망)
臣同賈太傅 신동가태부
主豈楚懷王 주기초회왕
河水平秋岸 하수평추안
關雲欲夕陽 관운욕석양
霜風吹雁去 상풍취안거
中斷不成行 중단불성행
멀리 귀양 가는 갑산 나그네,
함원 땅 길 떠나는 창황한 행색 -
신하는 가태부나 다름없건만
임금님야 어찌 초회왕이리...
물은 가을 언덕에 가득 흐르고
함관령 구름 사이 해 지려 할 제,
어인 서릿바람 기러길 채니
안행이 뚝 끊어져 줄 못 이루네.
註
遠謫(원적) - 멀리 귀양감.
甲山客(갑산객) - 함경남도 갑산으로 가는 나그네.
咸原(함원) - 함경도의 옛 이름.
行色(행색) - 길가는 사람의 차림새.
賈太傅(가태부) -前漢(전한) 文帝(문제) 때의 충신. 이름은 誼(의). 나이 20세에 태중대부(太中大夫)가 되어. 선정을 상소하다가 대신들의 시기로 長沙王(장사왕)의 태부로 좌천 되었으나우국 충언을 끊지 않았다.
主豈(주기) - 임금이야 어찌....하랴?
楚懷王(초회왕) - 周代(주대)의 초나라 왕. 어리석어 간신배의 말에 농락되어 충신 屈原(굴원)을 내쫓고, 실정을 거듭하다가 秦(진)에 잡혀 죽었다.
平秋岸(평추안) - 물이 가을 강 언덕에 치면치면 넓게 흐름.
關雲(관운) - 咸關嶺(함관령) 영마루에 떠있는 구름.
霜風(상풍) - 서릿바람.
吹雁去(취안거) - 기러기를 불어 체감.
不成行(불성항) - 항렬을 이루지 못함. 雁行(안항)을 이루지 못함 안항은 형제를 이름.
하곡은 작자의 둘째 오라버니 篈(봉)의 호이다. 그는 문과에 급제 敎理(교리)등 역임, 선조 16년 병판의 직무상 과실을 탄핵하다가 갑산으로 유배당했으니, 首聯(수련)은 , 그때 그 귀양길 떠나는 창황한 景狀(경상)을 직서함이다.
2련은, 하곡의 충성을 가태부에 견주는 한편, 그런 충신을 유배하는 임금이지마는 그렇다고 초회왕 같은 어리석은 임금은 아니라고 대를 맞추었으니, 이는 임금은 賢君(현군)이나 간신배의 소행임을 함축하는 한편, 반대급부로 하곡을 다시 굴원에 비유한 다중적 효과를 나타낸 표현이다. 하나, 그 말투에는 은근히 임금의 부당한 처사에 대한 원망의 일단이 비아냥조로 밑바닥에 깔려 있어, 비록 필화에 저촉되지 않게 교묘한 논리로 우회 표현은 되어 있으나, 그러나 매우 위험스러운 대담한 발언이라 아니할 수 없다.
3련은 邊塞(변새)의 땅 가을 석양의 소조한 경색을 그려, 오라버니의 창랑한 발길과 처량한 심사를 언외에 부치었다.
끝 연 에서는 기러기 행렬같이 다정스럽던 筬(성). 篈(봉). 난설헌. 筠(균) 등의 여러 형제 남매가, 불시에 불어 닥친 家禍(가화)로 蒼黃罔措(창황망조)하게 된 경상을 , 중단된 雁行(안행)에 비겨 길이 탄식하고 있다.
빈녀의 노래(貧女吟) 허난설헌
豈是乏容色 기시핍용색
工鍼復工織 공침부공직
小少長寒門 소소장한문
良媒不相識 양매불상식
不帶寒饑色 부대한기색
盡日當窓織 진일당창직
惟有父母憐 유유보모련
四隣何曾織 사린하증직
夜久織未休 야구직미휴
戛戞鳴寒機 알알명한기
機中一匹練 기중일필연
終作阿誰衣 종작아수의
手把金剪刀 수파금전도
夜寒十指直 야한십지직
爲人作嫁衣 위인작가의
年年還獨宿 년년환독숙
이 얼굴 남들만
못하지 않고,
바느질 길쌈베도
솜씨 있건만,
가난한 집 태어나
자란 탓으로
중매인도 발 끊고
몰라라 하네.
추위도 주려도
내색치 않고,
진종일 창가에서
베를 짜나니,
부모님야 안쓰럽다
여기시지만
이웃이야 그런 사정
어이 아리요.
밤 깊어도 짜는 손
멈추지 않고
짤깍짤깍 바디 소리
차가운 울림,
베틀에 짜여가는
이 한 필 비단,
필경 어느 색시의
옷이 되려나?
가위 잡고 삭독삭독
옷 마를 제면
밤도 차라 열 손끝이
곱아 드는데
시집갈 옷 삸바느질
쉴새 없건만
해마다 독수공방
면할 길 없네.
註
乏容色(핍용색) - 얼굴이 못 생김
工鍼(공침) - 바느질을 잘함.
工織(공직) - 베를 잘짬. 길쌈을 잘함.
小少(소소) - 年少(년소)
寒門(한문) - 가난하고 문벌이 없는 집안.
寒饑色(한기색) - 춥고 배고픈 기색.
戞戞(알알) - 단단한 물건이 맞부딪치는 소리.
阿誰(아수) - 누구.
剪刀(전도) - 가위.
嫁의(가의) - 시집갈 때 입는 옷.
評說(평설)
친정이나 시가나 다 명문대가로, 봉건 사회의 지배 계급에 속해 있으면서도, 피압박 백성에 대한 연민의 정이 남달리 도타운 것은 그녀의 동생 筠(균)과 함께 스승인 蓀谷(손곡) 李達(이달)의 薰陶(훈도)에 힘입음이 컸으리라 짐작된다. 단지 庶類(서류)란 이유 하나 때문에 三唐詩人(삼당시인)의 한 사람으로 시명이 일세에 풍미하였으면서도, 변변한 벼슬 한 자리 해보지 못한 손곡이었으니, 그러한 이의 사상 감정이 어찌 제자들에 미치지 않았다 할 수 있으랴?
이 시는 가난한 집에 태어난 죄 아닌 죄로, 늘 고달프고 슬퍼야하는 이 착하고도 가련한 노처녀에 부치는 애달픈 동정이다. 장차 어느 색시의 옷이 될지 모를 비단을 짜고, 옷말라 옷짓기를 밤낮 없이 하건마는, 자신은 늘 헐벗고 굶주리며, 중매장이 마져 돌보지 않는 소외 지대에서, 독수공방의 새우잠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는 딱한 쳐녀의 깊은 시름을 대변한 작품이다.
그의 이런 유의 작품은 이 밖에도 宮詞(궁사). 送宮人入道(송궁인입도). 靑樓曲(청루곡). 感遇(감우) 등 많다.
다음에 遣興(견흥) 두 수를 옮겨 본다.
我有一端綺 아유일단기
拂拭光凌亂 불식광능난
對織雙鳳凰 대직쌍봉황
文章何燦爛 문장하찬란
幾年箧中藏 기년협중장(상자 협)
今朝持贈郞 금조지증랑
不惜作君袴 불석작군고(바지 고)
莫作他人裳 막작타인상(치마 상)
今日贈君行 금일증군행
願君爲雜佩 원군위잡패
不惜棄道上 불석기도상
莫結新人帶 막결신인대
찬란한 봉황 무늬 아껴오던 비단 한 끝
떠나는 임에게 정표로 드리오니
바지는 지을지언정 치마되겐 마소서
신혼 때 물려주신 瑞氣(서기)어린 순금 패물
치마끈에 풀어내어 가는 임께 드리오니
차라리 내버릴망정 시앗 주진 마소서.
그녀는 반도 좁은 천지에, 여성으로 태어났음과, 성립의 아내로서 금슬이 좋지 않음을 평생의 三恨(삼한)으로 여겨 왔다. 그러면서도 遠遊(원유)에서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는 간절한 마음을 다음과 같이 읊기도 했다.
夜夜曲밤(마다 부르는 노래) 허난설헌
夜夜曲 1
蟪蛄切切風騷騷 혜고절절풍소소(쓰르라미 혜. 바구미 고)
芙蓉香裉氷輪高 부용향간빙륜고(솔기 간)
佳人手把金錯刀 가인수파금착도
挑燈永夜縫征袍 도등영야봉정포(휠 도. 꿰맬 봉. 핫옷 포)
애절한 쓰르라미 소리에 바람마저 스산해라.
연꽃 향내도 스러지고 하얀 달만 높이 떴네.
아낙네는 가위를 손에 쥐고서
긴긴 밤 등불 돋우며 군복을 꿰매네.
夜夜曲 2
玉漏微微燈耿耿 옥루미미등경경
羅幃寒逼秋宵永 나위한핍추소영 (휘장 위. 닥칠 핍. 밤 소)
邊衣裁罷剪刀冷 변의재파전도냉
滿窓風動芭蕉影 만창풍동파초영
물시계 소리 나직하고 등잔불 깜빡이네.
비단 휘장 써늘해 오고 가을밤은 길어라
전선에 보낼 옷 마르고 나니 가위도 차가운데
창에 가득 파초 그림자만 바람 따라 흔들리네.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명종 18)∼1589(선조 22). 조선 중기의 여류시인. 본관은 양천(陽川). 본명은 초희(楚姬). 자는 경번(景樊), 호는 난설헌. 강원도 강릉(江陵) 출생. 엽(曄)의 딸이고, 봉(燈)의 동생이며, 균(筠)의 누이이다. 가문은 현상(賢相) 공(珙)의 혈통을 이은 명문으로 누대의 문한가(文翰家)로 유명한 학자와 인물을 배출하였다. 아버지가 첫 부인 청주한씨(淸州韓氏)에게서 성(筬)과 두 딸을 낳고 사별한 뒤에, 강릉김씨(江陵金氏) 광철(光轍)의 딸을 재취하여 봉· 초희· 균 3남매를 두었다.
허난설헌은 천재적 가문에서 성장하면서 어릴 때에 오빠와 동생의 틈바구니에서 어깨너머로 글을 배웠다. 아름다운 용모와 천품이 뛰어나 8세에 〈광한전백옥루상량문 廣寒殿白玉樓上梁文〉을 지어서 신동이라는 말을 들었다. 허씨 가문과 친교가 있었던 이달(李達)에게 시를 배웠다.
허난설헌은 15세 무렵에 안동김씨(安東金氏) 성립(誠立)과 혼인하였다. 그러나 원만한 부부가 되지 못하였다. 남편은 급제한 뒤에 관직에 나갔다. 그러나 가정의 즐거움보다 노류장화(路柳墻花)의 풍류를 즐겼다. 거기에다가 고부간에 불화하여 시어머니의 학대와 질시 속에 살았다.
사랑하던 남매를 잃은 뒤에 설상가상으로 뱃속의 아이까지 잃는 아픔을 겪었다. 또한, 친정집에서 옥사(獄事)가 있었고, 동생 균마저 귀양 가는 등의 비극이 연속되었다. 삶의 의욕을 잃고 책과 먹(墨 묵)으로 고뇌를 달래며, 생의 울부짖음에 항거하다 27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
조선 봉건사회의 모순과 계속된 가정의 참화 때문에, 허난설헌의 시 213수 가운데에 속세를 떠나고 싶은 신선시가 128수나 될 만큼 신선사상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허균이 허난설헌의 작품 일부를 명나라 시인 주지번(朱之蕃)에게 주어 중국에서 ≪난설헌집≫이 간행되어 격찬을 받았다.
≪난설헌집≫은 1711년에는 일본에서도 분다이 (文台屋次郎)가 간행하여 애송되었다. 유고집에 ≪난설헌집≫이 있다. 국한문가사 〈규원가 閨怨歌〉와 〈봉선화가 鳳仙花歌〉가 있다. 그러나 〈규원가〉는 허균의 첩 무옥(巫玉)이 지었다고도 한다고 하고 〈봉선화가〉는 정일당 김씨(貞一堂金氏)가 지었다고도 한다.
≪참고문헌≫ 蘭雪軒詩集, 역대여류한시문선(김지용 편역, 대양서적, 1975), 許筠全集(成均館大學校大東文化硏究院, 1981), 女流詩人 許蘭雪軒考(朴鍾和, 成均 3, 成均館大學校, 1950), 許楚姬의 遊仙詞에 나타난 仙形象(金錫夏, 國文學論叢 5·6合輯, 檀國大學校, 1972), 허난설헌연구(문경현, 도남조윤제박사고희기념논총, 1976).(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허난설헌(許蘭雪軒)의 「강남락 江南樂」이라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는 최치원의 「강남녀」(*1)에 나타난 요야하고 자유분방한 생활을 즐기는 강남녀의 형상은 보이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강남녀에 대한 형상은 최치원의 「강남락」에 드러난 것처럼 향락적이고 염정적인 분위기를 띄게 된다. 그러나 허난설헌의 경우 서정적 대상으로서의 강남녀가 갖는 전통적인 의미가 매우 대담하고 색다른 방향에서 해석되고 있다는 것이다.
1·2구에서는 이 같은 의미화의 과정을 살필 수 있다. 1구는 문인들에게 인식되어오던 강남녀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을 대변한 말이다. 2구는 이에 대한 반대의 입지에 서있는 허난설헌의 독자적인 해석의 경지이다. 강남이 좋다고들 하지만, 자신은 오히려 강남이 얼마나 근심이 많은 곳인가를 안다고 하여, 현상의 상대성을 날카롭게 지적하였다.
3·4구는 2구의 자신의 판단의 객관성을 뒷받침하여 주는 이별과 기다림의 근심스런 강남의 모습이다. 즉 대상과 대상에 대한 전통적 표현방법에 의거하여 보편적 정서를 펴는 것이 일차적으로 서정의 방식이 될 수 있으나, 이와는 반대의 방향에서 형상화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준 것이다. 경물지향형의 시에서는 대상을 통하여 내면의 소리를 들었으나, 허난설헌의 시와 같은 정감지향형의 시에서는 내면의 소리를 통하여 대상의 새로운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이 같은 서정의 방식은 '이아관물'의 세계인식을 통해서 가능하다.
난설헌의 년보
1563년
강릉 초당리에 있는 집에서 초당 허엽의 삼남 삼녀 가운데 셋째 딸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호조참판. 경상감사를 지낸 김 광철의 딸인데 허엽의 후처이다. 하고 허봉과 교산 허균이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계속 승지. 대사간. 대사성 부제학 등의 벼슬을 했으므로 난설헌은 한양성성 건천동에서 자랐다.
나의 본집은 건천동에 있었다. 청녕 공주 저택 뒤로부터 본방교에 이르기까지 겨우 서른 네 집인데, 나라가 시작된 이래로 이 동네에서 이름난 사람이 많이 나왔다. 김종서. 정인지. 이계동이 같은 때였고, 양성지. 김수온. 이병정이 한 시대였으며, 유순정. 권민수. 유담년이 같은 시대 인물이었다. 그 뒤에도 정승 노수신 및 나의 아버님과 변협이 같은 때에 살았고, 가까이로는 서애 유성룡과 나의 형님. 이순신. 원균이 한 시대였다. 유성룡은 나라를 중흥시킨 공이 있었고 원균과 이순신 두 장군은 나라를 살린 공이 있었으니, 이때에 와서 인물이 더욱 성하였다. (허균<성웅식소록>하)
그의 집안은 고려시대의 조상 때부터 문학에 뛰어난 집안이기도 했지만, 그의 아버지 초당이 특히 글 배우기를 즐겨서 여러 스승들을 찾아다녔다. 아버지는 자기가 글 배울 적 이야기를 자녀들에게 즐겨 얘기해 주곤 했는데, 아우 허균은 자기 집안 학문의 연원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형님과 누님의 문장은 가정에서 배운 것이며, 선친은 젊었을 때 慕齋(모재) 金安國(김안국)에게 배웠다. 모재의 스승은 虛白堂(허백당) 成俔(성현)인데, 그 형 成侃(성간)과 金守溫(김수온)에게 배웠다. 두 분은 모두 泰齋(태재) 유방선의 제자이고, 유공은 문정공 이색의 으뜸가는 제자였다.
그 밖에도 초당의 스승으로는 長吟(장음) 羅湜(나식)과 화담 서경덕이 있다. 난설헌의 시 가운데 仙界詩(선계시)가 많은 것과 신선 세계에 관한 책을 많이 읽은 것도 모두 아버지를 통해 내려온 서경덕의 영향이다.
아버님께서는 화담 선생에게 가장 오래 배우셨다. 일찍이 칠월에 선생의 집으로 찾아가셨는데, 그가 화담으로 간 지 벌써 엿새째라 했다. 곧 화담 농막으로 가셨는데, 가을 장마물이 한 창 넘쳐나서 건널 수가 없었다. 저녁때에 여울물이 조금 줄었으므로 겨우 건너가시니, 선생은 한참 거문고를 타면서 높게 읊조리고 있었다. 아버님께서 저녁밥 짓기를 청하니 선생은 “나도 먹지 않았으니 함께 짓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머슴이 부엌에 들어가 보니, 솥 안에 이끼가 가득 하였다. 아버님께서 이상하게 여기시고, 까닭을 물으셨다.
선생이 이르기를
“물이 막혀서 엿새 동안을 집사람이 능히 오지 못했다. 그래서 나도 오랫동안 식사를 하지 못했으므로 솥에 이끼가 났을 것이다” 하였다
아버님께서 그의 얼굴을 쳐다보셨는데, 굶주린 기색이 조금도 없었다.
(허균 <성옹식소록>중)
1570년, 여덟 살의 어린 나이로<廣寒殿白玉樓上樑文광한전백옥루상량문>을 지어, 신동이라고 이름이 났다.
그 뒤에 작은 오빠 허봉의 친구인 손곡 이달에게서 시를 배웠다고 한다. 아우 허균도 자라서 이달에게 시를 배웠는데, 난설헌이 그의 시를 고쳐 주기도 했다.
허균이 글재주가 남보다 뛰어났는데, 어릴 적에 일찍이 “여인이 그네를 흔들며 밀어 보낸다.”는 시를 써서 그 누님 난설헌에게 보였다. 난설헌이 보고 말했다. “잘 지었다. 다만 한 구절이 잘못되었구나.” 아우 균이 물었다. “어떤 구절이 잘못되었습니까?” 난설헌이 곧 붓을 들어 고쳐 썼다. “문 앞에는 아직도 애간장을 태우는 사람이 있는데, 님은 백마를 타고 황금 채찍을 쥔 채 가버렸네?”
(임상원<고기쇄편>권 2)
1577년 즈음에 김성립에게 시집을 갔다. 허균은 자기 매부 김성립을 실력 없는 사람으로 평가하였다.
세상에 文理(문리)는 모자라도 능히 글을 짓는 자가 있다. 나의 매부 김성립에게 경전이나 역사책을 읽어 보라 하면 제대로 혀도 놀리지 못한다. 그러나 科文(과문)은 아주 요점을 맞추어서 論(논). 策(책)이 여러 번 높은 등수에 들었다.(성옹시고록)하)
김성립은 신혼 초부터 아내 난설헌을 내버리고 한강 서재에서 과거 공부를 하였다.
내가 젊었을 때. 김성립과 다른 친구들과 함께 집을 얻어서, 과거 공부를 같이 했다. 한 친구가 “김성립이 기생집에서 놀고 있다.”고 근거 없는 말을 지어냈다. 계집종이 이를 듣고는 난설헌에게 몰래 일러바쳤다. 난설헌이 맛있는 안주를 마련하고 커다란 흰 병에다가 술을 담아서, 병위에다 시 한 구절을 써서 보냈다.
낭군께선 이렇듯
다른 마음 없으신데,
같이 공부한다는 이는 어찌 된 사람이기에
이간질을 시키는가.
그래서 난설헌은 시에도 능하고 그 기백도 호방함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시화휘성>에 실린 신흠의 얘기)
김성립은 과거 공부에 힘쓰지 않고 기생집만 즐겨 찾았다. 결혼하고도 10년 이상이나 과거에 급제하지를 못했다.
난설헌은 <태평광기>를 즐겨 읽었다. 그 긴 이야기를 다 외었으며, 중국 초나라 樊姬(번희)를 사모했기 때문에 호까지도 경번(景樊)이라고 지었다. 자기 남편 김성립이 서당에 독서하러 가면 편지에다 이렇게 썼다. “옛날의 接(접)은 재주가 있었는데 오늘의 接(접)은 재주가 없다.”고 글자를 헐어서 질투를 하며 꾸짖는 말을 했다. 임상원<교거쇄편>권 1)
1579년 5월. 아버지가 경상감사가 되어 내려갔다.
1580년 2월 4일 아버지가 병에 걸려 서울로 올라오다가 상주 객관에서 죽었다.
1582년 봄, 작은 오빠가 7년 전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구했던<두율> 한 권을 주어 두보의 시를 배우게 했다.
1583년, 경기도 순무어사로 나갔던 작은 오빠가 병조판서 이율곡을 탄핵하다가 창원부사로 좌천되었고, 곧 이어 갑산으로 유배되었다.
1585년 봄. 상을 당해서 외삼촌댁에 머물렀다. 이때 자기의 죽음을 예언하는 시를 지었다.
1588년 9월 17일. 한양성에 들어오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던 작은 오빠가 금강산에서 노닐다가, 황달과 폐병으로 죽었다.
들것에 실려 나오다가, 금화현 생창역에서 눈감았다.
1589년 3월 19일, 어린 아들과 딸을 먼저 보낸 끝에 난설헌도 스물일곱 나이로 죽었다. 많은 작품을 불태워 버리라고 유언 하였다. 경기도 광주군 초월면 경수산 안동 김씨 선영에 무혔다. 그의 무덤 앞에는 그보다 먼저 어려서 죽은 아들과 딸의 애기무덤이 있다.
난설헌이 일찍이 꿈속에서 월황이 운을 부르며 시를 지으라 하기에 “아리따운 연꽃 스물일곱 송이 / 붉은 꽃 떨어지고
서릿발만 싸늘해라“ 고 지었다. 꿈에서 깨어난 뒤에도 그 경치가 낱낱이 생각나므로 <몽유기>를 지었다. 그 뒤에 그녀 나이가 27세 되었다. 아무런 병도 없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몸을 씻고 옷을 갑아 입고서 집안사람들에게 말했다. ”금년이 바로 3, 0의 수(3×9=27)에 해당되니, 오늘 연꽃이 서리에 맞아 붉게 되었다“ 하고는 유연히 눈을 감았다
(구수훈<이순록>하)
1590년 남편 김성립은 왜놈들과 싸우다가 죽었다. 두 번째 부인 홍씨와 함께 선산에 묻혔다.
1598년 봄, 정유재란을 도우러 명나라에서 원정 나온 문인 오명재에게 허균이 난설헌의 시 200여 편을 외어 주었다. 이 시가 <조선시선>. <열조시집>에 실린 뒤에 <난설헌집>이 출판되었다.
1606년 3월 27일, 허균이 중국에서 온 사신 주지번에게 <난설헌집>을 전해 주었다.
1608년 4월 공주목사 허균이 <난설헌집>을 목판본으로 출판하였다.
1711년, 일본에서도 분다이야 지로베이에(文臺屋次郞兵衛>에 의하여 <난설헌집>집이 간행 되었다.
1913년 1월 10일, 난설헌의 시에 화운한 허경란의 소설헌집(小雪軒集)을 부록으로 엮은 <난설헌집>이 신활자로 신해음사에서 출판되었다.
27. 꿈속의 넋(夢魂) 이옥봉(李玉峰)
近來安否問如何(근래안부문여하)
月到紗窓妾恨多(월도사창첩한다)
若使夢魂行有跡(약사몽혼행유적)
門前石路半成沙(문전석로반성사)
요사이 안부를 묻노니 어떠하시나요?
달 비친 사창(紗窓)에 저의 한이 많습니다.
꿈속의 넋에게 자취를 남기게 한다면
문 앞의 돌길이 반쯤은 모래가 되었을 걸.
*요점 정리
*지은이 : 이옥봉(李玉峰), 숙원 이씨
*형식 : 7언 절구의 한시
*표현 : 과장법
*구성 :
1행 : 임의 안부를 물음
2행 : 달 비친 사창에 서린 나의 한
3행 : 꿈속에 만난임의 넋에게 자취를 남기게 함.(가정법을 사용한 내용의 전환)
4행 : 문 앞의 돌길이 닳아서 모래가 됨.(화자의 그리움을 과장하여 표현)
*제재 : 임과의 이별
*주제 : 연모의 정, 임을 기다리는 여심(女心), 이별한 임에 대한 그리움
*출전 : 옥봉집(玉峰集)
내용 연구
*달 비친 사창에 ~ 많습니다. : 임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을 달빛에 이입하여 표현한 구절이다.
*紗窓(사창) : 얇은 비단으로 만든 창. 여자가 기거하는 방을 이르기도 함
* 문 앞의 돌길이 ~ 되었을 걸 : 돌길이 반쯤은 모래가 되었으리라 하여 임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을 표현하고 있다. 임을 그리워하여 얼마나 자주 나갔으면 돌길이 발에 밟혀 모래가 되었겠는가. 다시 말해서 꿈속에서 임을 만나러 자주 드나들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리움은 학수고대보다도 더한 그리움이다.
이해와 감상
사랑하는 임을 그리워하는 연모의 정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장 원초적인 감성인 것이다. 이 시는 이러한 사무치는 연모의 정을 과장된 표현을 통해 임을 만나고 싶은 애타는 심정을 그려내고 있는 작품이다. 승구(承句)에서는 그리움을 달빛에 비추어 하소연하였고, 결구(結句)에서는 꿈속의 발자취가 현실로 옮겨진다면 돌길이 반쯤 모래가 되었으리라 하여 임을 만나고 싶은 애타는 심정을 하소연하였다. 전구(轉句)에서의 시상 변환이 특히 뛰어나다. 그리고 무엇보다 은근한 물음을 통하여 자신의 그리움을 드러낸 표현이 돋보인다.
이옥봉 李玉峰 (?~?)
선조 때 옥천(沃川) 군수를 지낸 봉(逢)의 서녀(庶女)로 조원(趙瑗)의 소실(小室)이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명시종(明詩綜)》 《열조시집(列朝詩集)》 《명원시귀(名媛詩歸)》 등에 작품이 전해졌고 한 권의 시집(詩集)이 있었다고 하나 시 32편이 수록된 《옥봉집(玉峰集)》 1권 만이 《가림세고(嘉林世稿)》의 부록으로 전한다. 작품으로 《영월도중(寧越途中)》 《만흥증랑(캄興贈郞)》 《추사(秋思)》 《자적(自適)》 《증운강(贈雲江)》 《규정(閨情)》 등이 있다.
옥봉집(玉峰集(숙원이씨))
조선 중기의 여류시인 숙원이씨(淑媛李氏)의 시집. 목판본. 옥봉은 그의 호이다. 승지를 지낸 조원(趙瑗)의 부실이다. ≪가림세고 嘉林世稿≫에 부록으로 실려 있다. ≪가림세고≫는 조원· 조희일(趙希逸)· 조석형(趙錫馨)의 3세의 시문을 합하여 상중하 3편으로 만들고, 권말에 옥봉의 시를 부록하여 1704년(숙종 30)에 간행한 시문집이다.
〈옥봉집〉의 서두에는 “시문에 능한 시들이 많으나 흩어져 없어진 것을 애석하게 생각하여 여기 권말에 붙여둔다.”고 부록한 뜻을 밝혔다. 말미에는 조정만(趙正萬)의 발문이 있다. 시집 속에는 오언절구 10편, 칠언절구 14편, 오언배율 4편, 그리고 칠언배율 4편이 수록되어 있다.
〈영월도중 寧越道中〉·〈증운강 贈雲江〉·〈칠석 七夕〉·〈규정 閨情〉·〈고별리 告別離〉 같은 시는 인구에 회자되었다. 〈위인송원 爲人訟寃〉이라는 시는 이웃에 소도둑으로 몰린 사람을 대신하여 지어준 시이다.
“세숫대야로 거울삼고 물 발라 기름 삼아 머리 빗을지라도 내가 직녀가 아닌데 그대가 어찌 견우가 되리.”라고 하여 그녀의 재치를 보여 준다. 이 중에서 11편은 ≪황명열조시집 皇明列朝詩集≫에 수록된 것을 옮겨 놓은 것이다. 11편중에서 〈반죽원 斑竹怨〉과 〈채련곡 採蓮曲〉은 이달(李達)의 시집에도 실려 있는 작품이어서 옥봉의 작이라고 하기에 의심스럽다.
〈옥봉집〉은 ≪조선역대여류문집 朝鮮歷代女流文集≫에는 그 전 작품을 활자로 수록하였다. ≪역대여류한시문선 歷代女流漢詩文選≫에는 전역하여 수록하였다. ≪금잔디≫(金億)에서는 12수, ≪꽃다발≫(金億)에는 11수를 번역하여 수록하였다.
≪참고문헌≫ 增補文獻備考(권250), 嘉林世稿, 竹陰集, 逸士遺事, 금잔디(金億), 꽃다발(金億), 朝鮮歷代女流文集(閔丙燾, 乙酉文化社, 1950), 歷代女流漢詩文選(金智勇, 大洋書籍, 1972), 韓國女性文學史硏究(金智勇, 首都師大論文集 5, 1969).(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랑에 꺾인 애달픈 시심
조선 인조 때의 일이다. 승지 조희일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그곳 원로대신과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조원을 아느냐"는 물음에 조희일이 부친이라 대답하니, 원로대신은 서가에서 <이옥봉 시집>이라 쓰인 책 한 권을 꺼내보였다. 조희일은 깜짝 놀랐다. 이옥봉은 아버지 조원의 소실로 생사를 모른 지 40여년이 되었기 때문이다. 옥봉의 시집이 어떻게 해서 머나먼 명나라 땅에 있게 되었는지 조희일로서는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원로대신이 들려준 이야기는 이러했다.
40년 전쯤 중국 동해안에 괴이한 주검이 떠다닌다는 소문이 돌았다. 너무나 흉측한 몰골이라 아무도 건지려 하지 않아 파도에 밀려 이 포구 저 포구로 떠돈다는 것이었다.
사람을 시켜 건져보니 온몸을 종이로 수백 겹 감고 노끈으로 묶은 여자 시체였다. 노끈을 풀고 겹겹이 두른 종이를 벗겨 냈더니 바깥쪽 종이는 백지였으나 안쪽의 종이에는 빽빽이 시가 적혀 있고 "해동 조선국 승지 조원의 첩 이옥봉"이라 씌어 있었다. 읽어 본즉 하나같이 빼어난 작품들이라 자신이 거둬 책을 만들었다고 했다.
온몸을 시로 감고 죽은 여인 이옥봉. 이옥봉은 조선 명종 때 충청도에서 왕족의 후예 이봉지의 서녀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시문에 뛰어난 재주를 보인 옥봉은 신분의 굴레로 첩살이 밖에 못함을 알게 되자 결혼에 대한 꿈을 버리고 서울로 갔다. 옥봉은 장안의 내로라하는 명사들과 어울리며 단종 복위운동에 뛰어들었고, 곧 詩句(싯귀)나 짓는 선비라면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인사가 되었다.
옥봉은 조원이란 선비를 사랑하여 첩이 되겠다고 자청했다. 첩살이가 싫어 결혼을 거부했던 그였지만 사랑 앞에서는 약해진 모양이다. 한데, 조 원은 옥봉을 받아들이는 대신 앞으로는 절대 시를 짓지 않겠다고 맹세하라 했다. 여염의 여인이 시를 짓는 건 지아비의 얼굴을 깎아내리는 일이 라면서. 옥봉은 맹세했다. 자신의 시는 외로움과 허망함의 발로였으니 지아비를 얻으면 시를 쓰지 않아도 좋으리라고.
세월이 흘렀다. 어느 날 조원 집안의 산지기 아내가 찾아와 하소연했다. 남편이 소도둑 누명을 쓰고 잡혀갔으니 조원과 친분이 두터운 파주목사에게 손을 좀 써 달라 했다.
사정을 들어본즉 아전들의 토색질이 분명했다. 옥봉은 파주목사에게 시 한수를 써 보냈고, 산지기는 무사히 풀려났다. 그러나 이 일로 옥봉은 쫓겨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조원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여자와는 살 수 없다"며 내친 것이다.
뚝섬 근처에 방 한 칸을 얻어 지내며 옥봉은 조원의 마음을 돌려보려 애썼으나 허사였다. 조원과의 약속을 지키느라 10년 가까이 시혼을 억눌러오다가 산지기를 위해 한수 지어준 일로 쫓겨나다니. 옥봉 으로서는 야속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었으리라. 옥봉은 애통한 마음을 담아 시를 읊고 또 읊었다. 더 이상 참을 까닭도 없었으니까.
평생 이별의 한이 병이 되어(平生離恨成身病)
술로도 못 고치고 약으로도 다스리지 못하네(酒不能療藥不治)
이불 속 눈물이야 얼음장 밑을 흐르는 물과 같아(衾裏泣如氷下水)
밤낮을 흘러도 그 뉘가 알아주나(日夜長流人不知)
조원을 단념한 옥봉은 평소 가보고 싶었던 중국으로 가 마음껏 시심을 펴보려 했나 보다. 그리고 자신의 시로 몸을 감고 낯선 바다에 뛰어들었나 보다. 여성을 가정 내 존재로 규정하고 그 틀을 벗어나는 여성은 천시하거나 사회적 보호밖에 두었던 조선시대의 여성관에 죽음으로 항의한 셈 이다. 사랑을 위해 시를 포기했지만 자신의 삶은 결국 시로 남을 수밖에 없다고 침묵으로 웅변하면서. (출처 : 한겨레 1997. 7. 17 / 박은봉/ 역사연구가 )
저 자 : 白光勳(1537∼1582)
· 연 대 : 1742년(초간 1509, 1933 재간)
· 서 지 : 3권 2책, 목판본, 30.5×20.6cm, 반곽 20.5×17.3cm, 사주단변, 有界, 10행17자, 판심 內向大墨口混葉花紋魚尾
· 소 장 : 안양 白洛洪
생애와 활동
백광훈의 자는 彰卿, 호는 玉奉, 본관은 海美(수원)로 1537년(중종 32) 10월 22일 장흥 안양 기산리에서 백세인의 세 아들 가운데 막내아들로 출생했다. 그의 맏형은 관서별곡을 지은 光弘(1522∼1556)이고, 둘째형은 光顔(1527∼1567)인데 사촌 光城(1527∼1595)과 더불어 4형제가 모두 문장에 뛰어나 『一門四文章』이라 불리울 정도였다. 어려서부터 詩才가 있어 석천 임억령으로부터 칭찬을 받았으며 13세에 상경하여 양응남· 노수신 등에게 사사하였다. 또 17세 때에는 백형 백광홍의 주선으로 松川 梁應鼎에게 수학하기도 하였다. 1554년 귀향하여 있다가 1558년에는 진도에 유배와 있는 蘇齋 盧守愼에게 수학하였으며, 1560년에는 靈岩 玉泉面(현 해남군 옥천면) 元敬山 玉峰의 아래에 晩翠堂과 玉山書室을 짓고 은거하였다. 1564년(명종 19) 진사가 되었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산수를 즐기며 시서에 열중했다. 1572년(선조 5) 명나라의 사신 韓世能·陳三謨가 오자 노수신을 따라 白衣로써 製述官이 되어 사신들을 감탄케 했다. 1577년 처음으로 선릉 참봉에 제수되어 벼슬에 나서고 이어 영전 참봉으로 옮기고 이듬해 청릉 참봉, 1580년 예빈사 참봉 겸 주자도감 감조관, 소격서 참봉 등을 지냈다. 1582년(선조 15) 5월 4일 4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옥봉 선생이 별세하자 선조 임금이 靈輿를 하사하여 한양에서 해남(당시 영암)까지 반장해 왔다고 전하며, 그 당시의 '영여'가 현재도 보관중이다. 1590년 강진 瑞峰서원, 1808년 장흥 기양사에 제향 되었다. 그는 시문에 뛰어났는데 그의 시는 天機로 이루어진 것이라 평해졌으며, 당시의 崔慶昌, 李達과 함께 조선에서는 처음으로 盛唐의 詩風에 들어갔다고 하여 삼당시인으로 불리어졌다. 또한 명필로도 알려졌는데 특히 永和體에 빼어났다.
·문집의 간행
옥봉집은 아들 白振南(1564∼1618)이 1608년에 선친의 유고를 수습하여 정리하고, 당시 전라도관찰사이던 尹安性(1542∼1615)이 月沙 李廷龜의 조언을 얻어 1509년에 간행했다. 재간은 1742년 5세손 白受璥이 간행했으며, 그 뒤 후손 白永圭가 1933년 간행했다. 서문은 1609년에 柳根과 李廷龜가, 1611년에 申欽이 각각 쓰고, 발문후서는 1609년 尹光啓가 썼다. 申欽은 서문에서 옥봉 백광훈을 최경창과 더불어 세상에서 이들을 崔白이라 부른다 하고 이들의 시가 盛唐의 풍취를 갖추어서 氣가 완성되었으면서도 色이 淡古하며 그 뜻이 雅則한 것들인데 병화로 많이 없어져서 수습한 작품이 적다는 데 유감을 표시했고, 柳根은 그가 시 뿐만 아니라 필치에도 뛰어나 筆法이 遵勁하여 鍾王의 법에 逼眞하다고 하여 二絶이라 칭찬했다. 이수광의 『지봉유설』에서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우리 동방의 시인들은 소동파와 황산곡을 숭상함이 많아 이백 년 동안 모두 한 가지 투를 본받았다. 근세에 이르러서 최경창과 백광훈이 처음으로 당시를 배워 맑고도 힘든 시를 짓기에 힘쓰므로 崔·白이라고 부른다. 한때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본받았으므로 내려오던 습관도 거의 변하였다.
"옥봉집에는 모두 504수의 시가 실려 있다. 5언절구 124수, 7언절구 231수, 5언율시 79수, 7언율시 37수, 5언고시 18수 등이다. 해남 옥천면 송산리(당시 영암) 옥산서실에 목판과 유품 등이 전하며, 1991년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81호로 지정되었다. 1992년에 옥봉집편찬위원회(백형모)에서 국역본(박래호 번역)을 간행했다
또 시 한 수를 보면
영월도중(寧越道中)-이옥봉(李玉峰)
영월로 가면서
五月長干三日越(오월장간삼일월) : 오월 긴 산을 삼 일만에 넘어서니
哀歌唱斷魯陵雲(애가창단노릉운) : 노릉의 구름에 애처로운 노래 끊어진다
安身亦是王孫女(안신역시왕손녀) : 내 몸 또한 왕가의 자손이라
此地鵑聲不忍聞(차지견성불인문) : 이 곳 두견새 우는 소리 차마 듣지 못 하겠네.
또
기다림(閨情) 이옥봉
有約來何晩 유약내하만
庭梅欲謝時 정매욕사시
忽聞枝上鵲 홀문지상작
處晝鏡中眉 처주경중미
오마더니 왜 이리 늦나?
매화는 벌써 지려 하는데,
문득 까치 소리 하 반갑더니,
거울 속눈썹만 괜히 그렸네.
다르게 意譯(의역)을 하면 -
오마든 임 안 오시고, 그 매화 벌써 질 제,
문득 까치 소리 인제로다 여겼더니,
부산히 눈썹 그렸던 거울보기 열없다.
註
有約(유약) - 언약을 둠. 약속을 함.
來何晩(내하만) - 오는 것이 어찌 이리 늦으뇨?
庭梅(정매) - 뜰에 핀 매화
欲謝時(욕사시) - 떨어지려 하는 때.
忽聞(홀문) - 문득 들음.
虛畵(허화) - 헛되이 그림. 공연히 화장함.
鏡中眉(경중미) - 거울 속에 비친 눈썹.
뜰 매화 필 무렵에 오마던 언약,
그 매화 지는데도 임 안 오시네,
문득 까치 소리 반가운 예감
임 오신다고 얼른 눈썹 그리고
시침 떼고 하마나 기다렸지만
화장만 열없게 된 맥 풀림이여!
연인을 기다리는 한 여인의 內密(내밀)한 감정이 깜찍하게 살아 있다.
“명년 춘삼월 꽃피면 돌아오마.”
이는 情人(정인)사이의 이별 현장에서 관용되어오는 전래의 상투적 언약이다. 그러나 본시에서의 꽃은 그저 그런 막연한 꽃이 아니라. 매화꽃이요 그것도 그녀의 집 뜰에 서 있는 특정의 매화나무에 건 기약이다. 기약이 이처럼 긴밀했음에야 기다림도 또한 그러할 밖에 ......
매화피자 임이 오는, 그 황홀한 날을 그리며, 초조로이 기다려 온 긴긴 나날이었건만, 그러나 그 매화 이젠 벌써 지고 있음에야 그 조바심 또한 오죽하랴?
바로 이때다. 문득 그 매화나무 가지에서 짖어대는 까치소리! 임 오신다는 예보임에 틀림없다. 갑자기 임 맞을 차비로 활기를 띤다. 부랴부랴 거울 앞으로 달려가, 화장을 고친다, 옷매무새를 바로잡는다. 심호흡을 하며 부산을 떤다.
그러나 끝내 허탕치고 만 기다림은, “눈썹만 공연히 그린” 후회로 이어진다. 부질없이 속내 보인 일이, 비록 누가 보았대서는 아닐망정, 스스로 못내 열없고도 맥 풀림을 어찌할 수 없다. 이러한 감정을 약간의 익살로 처리한 虛(허)의 妙用(묘용)은 볼수록 새뜻하다.
脂粉(지분) 내음 솔솔 풍기는 香奩詩(화장상자 염)이다.
고려말에 政堂文學(정당문학)을 지낸 鄭公權(정공권)의 친구를 그리는 한 구절을 보면 -
有約不來花盡謝 유약불래화진사
相思不見月重圓 상사불견월중원
피면 오마던 꽃
다 지도록 아니 오고,
그리며 못 보는 사이
달만 거듭 둥글었네.
다 알뜰한 고인들의 정겨운 마음씨들이다. 唐(당)시인 施肩吾(시견오)의 不見來詞(불견내사)를 보면,
烏鵲語千回 오작어천회
黃昏不見來 황혼불견래
漫敎脂粉匣 만교지분갑
閉了又重開 폐료우중개
임 오신다. 골백번, 까치는 짖었건만
해 다 져 저물어도 임 그림자 아니 뵈네.
공연히 연지분갑만 닫았다 열었다가...
사상이 서로 비슷하나, 화장을 할까 말까 하는 망설임 정도로는, 이미 화장까지 하고 나선 뒤의 虛脫度(허탈도)에 있어, 본시에는 멀리 미치지 못하는 느낌이다.
28. 차왕유위천전가(次王維渭川田家)-서영수각(徐令壽閣
왕유의 위천전가 시를 차운하여
隴頭村煙起(롱두촌연기) : 밭두렁 고을에 연기 피어오르고
將牛下山歸(장우하산귀) : 소 몰고 산을 내려 돌아오는구나.
歸來日已夕(귀래일이석) : 돌아오니 날은 이미 저녁이 되고
蘿月滿荊扉(나월만형비) : 담쟁이덩굴의 달은 사립문에 가득하다
林茂鳥聲亂(임무조성란) : 무성한 숲속의 새소리 어지럽고
野闊人影稀(야활인영희) : 들은 넓고 사람의 그림자는 드물도다
漁樵共爲伴(어초공위반) : 어부와 나무꾼이 같이 짝이 되고
麋鹿來相依(미록래상의) : 사슴과 고라니는 서로 의지하는구나.
坐看松陰移(좌간송음이) : 가만히 앉아 소나무 그늘 옮기는 것을 보니
暝樹轉霏微(명수전비미) : 어둑한 나무에는 안개가 자욱해지는구나.
*차당방은자불우(次唐訪隱者不遇)-서영수각(徐令壽閣)
당나라 방은자불우시를 차운하여
竹巷松蹊客到稀(죽항송혜객도희) : 대나무 마을 소나무 길에 사람은 드물고
猿啼日暮掩荊扉(원제일모엄형비) : 원숭이 울어대는 저녁 싸리문을 닫는다
浮雲雁跡無尋處(부운안적무심처) : 뜬 구름 속 기러기는 찾을 곳 없어
獨過靑山風滿衣(독과청산풍만의) : 나 홀로 청산을 지나는데 바람이 옷에 가득 찬다.
*입춘차두(立春次杜)-서영수각(徐令壽閣)
입춘날 두보의 시를 차운하다
惆愴戀行客(추창련행객) : 서글피 떠난 사람 그리워하니
蕭條夢未安(소조몽미안) : 쓸쓸히 꿈속에도 편안하지 않도다.
片雲行樹梢(편운행수초) : 조각구름 나무 끝에 떠돌고
孤月掛雲端(고월괘운단) : 외로운 달으니 구름 끝에 걸려있다
忽憶梁園雪(홀억양원설) : 문득 야원의 눈을 생각하니
還愁棣萼寒(환수체악한) : 도리어 아가위 꽃받침 추울까 걱정한다.
佳辰廻子夜(가신회자야) : 좋은 날 밤에라도 돌아온다면
且待會團團(차대회단단) : 단란하게 만나기를 기다립니다.
*청선(聽蟬)-서영수각(徐令壽閣)
매미소리를 듣고
捲簾高閣聽鳴蟬(권렴고각청명선) : 높은 누각에서 매미 우는 소리 들리니
鳴在淸溪綠樹邊(명재청계녹수변) : 소리는 맑은 개울 푸른 숲 근처에서 나는구나.
雨後一聲山色碧(우후일성산색벽) : 비온 뒤 한 울음소리에 산색이 푸르러지고,
西風人倚夕陽天(서풍인의석양천) : 불어오는 가을바람에 해 지는 하늘에 기댄다.
*和杜初月(화두초월)-徐令壽閣(서령수각)
초승달
羈鳥棲未定(기조서미정) : 나그네새 둥지 아직 정하지 못하여
難爲一枝安(난위일지안) : 한 가지의 안식을 얻기도 어려워라
林月初生影(림월초생영) : 숲 속 이제 막 생긴 그림자
纖細掛雲端(섬세괘운단) : 희미하게 먼 구름 끝에 걸려있네
流光入懷袖(유광입회수) : 흐르는 빛 품과 소매에 들고
中宵覺微寒(중소각미한) : 밤 깊어 으스스한 추위가 감도네
遠客愁夕永(원객수석영) : 먼 길 떠난 사람 때문에 긴 밤이 괴로워
坐看松陰團(좌간송음단) : 홀로 앉아 소나무 둥근 그림자만 바라본다.
또 달리 意譯(의역)을 하면
나그네새는 깃든 가지 흔들려
하룻밤 안식을 얻기 어려운데,
숲 위의 달은 막 형체 생겨나
가늘게 구름장 끝에 걸려 있네.
흐르는 빛이 품 소매에 스며들어
한밤중 깨어 서늘함을 느끼게 하네.
먼 길 떠난 사람 밤 길다 시름 하리니
하염없이 솔 그림자 둥긂을 바라보노라.
註
羈鳥(기조) - 갇혀 있는 새, 여기서는 나그네새. 곧 철새.
纖纖(섬섬) - 섬세한 모양.
懷袖(회수) - 품과 소매.
中宵(중소)한밤중. 中夜(중야).
坐看(좌간) - 앉아서 봄. 또는 만연히 보고 있음.
評說
순조 3년 맏아들 속주가 謝恩使(사은사)의 書狀官(서장관)이 되어 청나라로 길 떠난 후, 자식의 평안을 염려하는 자상한 자모의 못 놓이는 마음이 여러 수의 시를 낳게 했는데, 여기에서도 역시 그 나그네 길에 있는 서른 살 크 어린애 걱정이 전편의 밑바닥에 아닌 듯 깔려 있다.
민망 하리 만큼 지나친 예감으로 초조 불안해 한 전 7구를 보상하여, 끝구 坐看松陰團(좌간송음단)의 둥근 솔 그림자가 구원인 양 생광스럽다.
영수각의 작품에는, 이백, 두보, 왕유, 가도, 도연명, 맹호연 등 대가들의 시에 차운한 것이 많은데, 두보가 가장 많고, 다음이 왕유이다. 그 중에는 이 시와 같이, 같은 제목, 같은 주제인 和韻(화운)도 적지 않다.
다음에 그 원운인 두보의 초승달을 차려 보면,
光細弦欲上 광세현욕상
影斜輪未安 영사윤미안
微升古塞外 미승고색외
已隱暮雲端 이은모운단
河漢不改色 하한불개색
關山空自寒 관산공자한
庭前有白露 정전유백로
暗滿菊花團 암만국화단
빛이 가느니 시위를 메움직하고
그림자 비끼니 둘레가 편치 않도다.
가느다랗이 헌 邊城(변성) 저편에서 돋아 오르더니
어느새 저녁 구름장 끝으로 숨는 도다.
흐르는 은하의 맑은 빛 변함이 없는데,
관산은 공연히 스스로 썰렁하여라.
뜰 앞에 흰 이슬이 내리어
그윽히 국화에 가득 둥글었도다.
徐令壽閣(서령수각)은 누구인가?
문인이자 수학자인 서영수각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여류문인을 꼽으라고 하면 단연 서영수각이다. 그녀는 192편의 시와 수필을 남긴 문인이면서 수리학자로 역사에 남아 있다.
서영수각은 강원도 관찰사를 지낸 아버지 서형수와 안동 김씨 김창협의 증손인 어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맑고 자질이 뛰어나고 글 읽기를 좋아했다. 특히, 시를 좋아하여 늘 도연명의 전원으로 돌아가리(歸田園)를 암송하였다.
그녀는 어릴 적부터 병약하여 입은 옷이 무거울 정도로 파리하고 가냘 펐다. 하지만 집안일이나 웃어른을 모시는 것에 빈틈이 없었고 늘 책을 가까이 하는 생활을 하였다. 14세에 홍인모와 결혼하여 3남 2녀의 자녀를 낳았다. 그녀의 집안은 친정과 시가가 모두 명망 있는 양반가였다. 그녀는 유교적 사회가 요구하는 유순하고도 순종적인 여성으로서의 교육을 받았다. 영수각은 결혼해서 처음은 가풍을 배우고 아이를 기르고 남편 뒷바라지에만 전념했다. 그러다가 결혼 10년이 넘어 집안이 안정되어서야 자신의 문학적, 수학적 재능을 화려하게 꽃피웠다. 물론 여기에는 남편 홍인모의 적극적인 외조가 큰 힘이 되었다.
자식에게 정치의 정도 가르친 어머니
남편 홍인모 에게 있어 영수각은 도학자적 정신과 시문생활의 반려자였다. 어느 날, 홍인모는 자신이 우연히 던진 시율을 부인 서영수각이 답하는 것을 보고 그녀의 재질이 놀라움을 표현했고 이때부터 아들들과 함께 그녀의 시와 산문을 모아두기 시작했다. 그 결과 그녀의 시와 글 192편은 남편 홍인모의 시집 “족수당집”. 6권에 “부영수각고”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게 된 것이다. 영수각이란 당호도 남편이 지어준 것을 보면 이들 부부는 가장 이상적인 삶을 구가한 평등부부로 평가가 되고 있다.
그녀의 다양한 학문적 소양은 자식이라는 거목에게 질 좋은 거름이 되었다. 영수각은 밤이면 아들에게 직접 글을 가르쳤다. 잠자리에 들 때는 조용히 경전을 외워 주고 시문과 격언을 들려주었다. 정치에 몸담을 아들에게 백성을 위한 정치의 올바른 도리를 가르쳤다.
“왕에게 곧게 간하다가 화를 입되 두려워하지 않는 신하보다는 어진 정사를 베풀어 사지의 백성을 건져내는 신하가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
活民(활민) 즉, 백성을 살게 하는 정치가 정도라고 믿고 가르친 것이다. 맏아들 홍석주는 좌의정을 지냈는데 성품이 겸허하고 언행이 평민과 같아 주위의 우러름을 받았다. 그의 학문적 기초와 도가적 사상, 그리고 슬기로운 몸가짐 모두 어머니 영수각의 가르침에 말미암은 것이다.
또한 그녀는 자녀들에게 부귀영화는 화의 근원이므로 항상 성실하고 검소한 생활을 지키도록 가르쳤다. 수리학자로서 재능발휘,
한편, 서영수각은 복잡하고 어려운 수학공식을 간편히 푸는 방식을 스스로 고안해냈다. 개평방(開平方)방정식, 삼각형 등 난해한 공식을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풀어낸 것이다.
“어머니는 수학을 상당히 좋아하셔서 언젠가<주학계몽>을 본 일이 있는데 거기에 나온 나눗셈. 분수계산. 가감법 등을 보시고 왜 이렇게 번거롭고도 어리석게 풀었는가 하시고 당신 나름대로 그것을 계산해 내었습니다. 훗날 중국에서 들여온 ”수리정온“이란 책을 가지고 어머니가 해놓은 것과 비교하여 보니 그 이론이 똑 같았다.”
이는 아들 홍석주가 쓴 영수각의 행장의 일부분이다. 이글을 통해 보듯이 영수각은 수학분야에 뛰어난 재질을 보였던 것으로 보인다. 서영수각의 학문에 대한 열정과 노력은 자신의 발전은 물론 자녀를 모두 학자와 정치가로 키워 놓았고 71년의 수를 누렸다.
29. 달밤의 꽃동산에서 김삼의당(金三宜堂)
(逢夫子 夜至東園 月色正好 花影滿地 夫子吟詩一絶 妾次之)
(봉부자 야지동원 월색정호 화영만지 부자음시일절 첩차지)
滿天明月滿園花 만천명월만원화
花影相添月影加 화영상첨월영가
如月如花人對坐 여월여화인대좌
世間榮辱屬誰家 세간영욕속수가
註 夫子(부자) - 덕행이 높은 사람에 대한 경칭. 여기서는 아내가 남편을 공경하여 이름.
榮辱 - 영화로움과 욕됨.
屬誰家(속수가) - 뉘 집에 딸렸는고? 곧 우리에게는 딸려 있지 않다는 뜻 誰家(수가)는 누구, 또는 누구의 집.
評說(평설)
낭군을 받들어 함께 밤 동원에 이르니 달빛은 밝고 꽃그림자는 땅에 가득한데, 낭군이 먼저 한 수를 읊기에 이에 그 운을 좇아 화답 하노라는 小序(소서)를 겸한 긴 시제가 붙어 있다.
하늘에는 달 땅에는 꽃, 달그림자 꽃 그림자 어우러진 은은 한 꽃동산에 달에 취코 꽃에 취코 사람에 취한, 달 같은 남자의 꽃 같은 여자가 신선 선녀로 어엿이 변신하여 있어 속세의 애환. 영욕 따위 인간사야 도무지 내 알 바 아니라 한다. 花. 月을 三反復하여 이리 뒤집고 저리 굴리는 그 어름에, 장구가락 더덩실 거리는 탈춤 춤사위 같은 흥겨움에 이끌리어, 시흥 또한 自乘(사승)하듯 고조되어 가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이 두 사람은 1769년 영조 45년 10월 13일 남원 동춘리 한 마을에서 태어난, 소위 생일 동갑끼리 배필이 된 것이다.
첫날밤에 신랑 신부가 시로 수작하는데 먼저 신랑의 시
相逢俱是廣寒仙 상봉구시광한선
今夜分明續舊緣 금야분명속구연
配合元來天所定 배합원래천소정
世間媒妁總紛然 세간매작총분연(중매 작)
만나고 보니 우리는
광한전 신선이었던 몸
오늘밤은 분명
그 옛 인연을 이음이로다.
배필이란 원래
하늘의 정한 바이거늘
세간의 중매장이야
공연히 수고로웠음이로다.
이에 화답한 삼의당의 詩
十八仙郞十八仙 십팔선랑십팔선
洞房華燭好因緣 동방화촉호인연
生同年月居同閈 생동년월거동한(동네어귀에 세운문 한)
此夜相逢豈偶然 차야상봉기우연
열여덟 살 신랑에
열여덟 살 신부
신방에 밝힌 화촉
좋은 인연이로다.
같은 연월 출생하여
한 문안에 살게 되니
이 밤의 만남이 어찌
우연이라 하리오?
이에 또 신랑이 또 한 수
夫婦之道人倫始 부부지도인륜시
所以萬福原於此 소이만복원어차
試看桃夭詩一篇 시간도화시일편
宜室宜家在之子 의실의가재지자
부부의 도는 인륜의 시초이니
만복의 근원이 이에 있기 때문이라.
시경 주남의 도요편을 볼지라도
한 집안의 화합함은 새색시에 달렸도다.
이에 또 신부가 응수한다.
配匹之際生民始 배필지제생민시
君子所以造端此 군자소이조단차
必敬必順惟婦道 필경필순유부도
終身不可違夫子 종신불가위부자
부부 짝지음이 생민의 시초이니
군자의 도도 이에서 비롯되네.
공경하고 순종함이 아내의 도리이니
필생토록 낭군의 뜻 어기지 않으리라.
또 김삼의당의 詩를 소개하면
*촌행즉사1(村行卽事1)-김삼의당(金三宜堂)
(고을로 가면서 본대로)
古木黃葉脫(고목황엽탈) : 고목에 단풍잎 지고
孤村白屋疏(고촌백옥소) : 외로운 고을에 오막살이 몇 채
山鷄兩三唱(산계양삼창) : 산속 닭은 두세 번 우는데
寥落是誰居(요락시수거) : 적막쿠나, 이 누구의 집들인가
*고연(古硯)-김삼의당(金三宜堂)
(오래된 벼루)
古硯籠塵色(고연롱진색) : 벼루에 묵은 때빛
呼兒洗石泉(호아세석천) : 아이 불러 맑은 물로 씻어내고
以手磨新墨(이수마신묵) : 손으로 새 먹을 갈아보니
蒼蒼起細烟(창창기세연) : 파릇파릇 가는 안개 일어나네
*농가(農歌)-김삼의당(金三宜堂)
(농부의 노래)
山光經雨好(산광경우호) : 산의 햇빛 비 지나 좋고
溪聲得風多(계성득풍다) : 골짝물은 바람결에 힘차다
門外環阡陌(문외환천맥) : 문 밖에 둘린 언덕들
時時聽野歌(시시청야가) : 때때로 들녘의 노랫소리 들린다
*과능한각음(過凌寒閣吟)-김삼의당(金三宜堂)
(능한각을 지나며 읊다)
帶方城中凌寒閣(대방성중능한각) : 대방성 안 능한각
雪中梅花滿地落(설중매화만지락) : 눈 속 매화가 땅에 가득 진다
宮門不開訟庭閑(궁문불개송정한) : 열지 않은 궁문에 송정이 한가한데
閣中唯有琴三尺(각중유유금삼척) : 관사 안에는 석자 거문고만 보인다.
*화만지(花滿枝)-김삼의당(金三宜堂)
(꽃 만발한 나뭇가지)
帶方城上月如眉(대방성상월여미) : 대방성 위에 눈썹같은 달
帶方城下花滿枝(대방성하화만지) : 대방성 아래는 가지에 가득한 꽃
生憎花開芳易歇(생증화개방이헐) : 꽃 피어서 향기 쉽게 사라지는 것 싫고
每羨月來長有期(매선월래장유기) : 달 떠올라 늘 기약있음을 항상 부러워한다.
*매화곡(梅花曲)-김삼의당(金三宜堂)
(매화의 노래)
碧眼呼兒夜獵還(벽안호아야렵환) : 푸른 눈의 오랑캐 밤사냥에서 돌아오니
五更明月滿天山(오경명월만천산) : 오경의 밤에 밝은 달빛은 천산에 가득하다
獨倚戍樓橫吹笛(독의수루횡취적) : 홀로 수루에 기대어 지긋이 피리 불어도
梅花落盡玉門關(매화락진옥문관) : 정다운 고향집 아닌 매화꽃 다 진 옥문관이어라
*동야(冬夜)-김삼의당(金三宜堂)
(겨울밤)
銀漏丁東夜苦長(은루정동야고장) : 밤은 길어 괴로운데 물시계 치는 소리
玉爐火煖繞殘香(옥로화난요잔향) : 남은 향기 감도는 따뜻한 화로
依依曙色生窓戶(의의서색생창호) : 어렴풋한 새벽빛이 창문에서 밝아오는데
鷄則悲鳴月出光(계칙비명월출광) : 닭 우는 소리 아니고 달 떠오르는 빛이로다.
*추야(秋夜)-김삼의당(金三宜堂)
(가을밤)
水晶簾外漾金波(수정렴외양금파) : 수정발 밖에 금빛 물결 출렁이고
雨歇池塘有破荷(우헐지당유파하) : 비 개인 연못에는 연꽃이 피어있도다
獨坐屛間寒不寐(독좌병간한불매) : 홀로 안은 병풍, 차가워 잠은 오지 않고
滿床蟲語夜深多(만상충어야심다) : 침상에 가득한 풀벌레 소리 밤 깊어 더욱 요란하다
金三宜堂(김삼의당) - (1739-?. 영조 45-?)은 누구인가?
<다음은 동방문화연구회의 자료인용임>
전북 남원 태생으로, 같은 동네에 사는 생년월일이 같은 河煜(하욱)에게 출가 했는데 시재가 막상막하하여 부부가 창수암이 많았다. 삼의당 稿(고)에는 詩99수와 문 19편이 수록되어 있다.
비록 시골 아낙이었으나, 그 남긴 글이 좋아 각 대학교 특히 여자 대학의 국문학. 한문학과에서 교과서처럼 채택되어 배워 올 뿐만이 아니라 그 작품을 연구하여 박사학위가 나오는가 하면 그 박사학위 취득자는 현직 교수로 활동하고 여러 대학교에서 학위논문이 통과되고 있는 조선조 말의 한 시인이 있으니 남원 출신 여류시인 삼의당 김씨이다.
조선조의 왕으로서 영조는 52년이나 되는 가장 오랫동안 왕 노릇한 임금이다. 그 후반기에 접어드는 영조 42년은 서기 1769년으로 기축년이다. 그 해 전라북도 남원에서 여러 대대로 벼슬을 해보지 못한 鄕班(향반)이 있던 김해 김씨 집안에서 한 여자 아기가 출생하였는데, 그가 성장하여 가난한 집안 살림을 꾸려가면서 우리 역사상, 여성으로서 가장 많은 257 편이나 되는 시문을 남긴 삼의당 김씨이다.
전라북도는 고래로 이름난 여성문인이 여럿 배출된 지역으로 백제 시대에는 저 유명한 <증읍사>로 유명하고조선조에서는 부안에서 이매창이 기녀문학을 일으켰으며 조선조 후기에는 남원의 가정주부로서 삼의당 김씨가 있는가 하면 근년에는 <혼불>로 이름 높았던 최명희 소설가가 있다.
*매화 기르던 후손과 결혼
삼의당은 直筆(직필) 史官(사관)으로 이름 높았던 濯纓(탁영) 金馹孫(김일손(1464-1498)의 후손이다. 김일손은 경북 청도 출신인데 그의 나이 34세 때인 연산군 4년에 성종실록이 편찬될 때 이극돈이 역사 편찬의 당상관이 되었는데 김일손은 춘춘관 사관이었다. 이때에 그가 쓴 史草(사초)에 세조의 왕위 찬탈을 풍자한 김종직의 조의제문과 이극돈이 전라도 관찰사로 있을 때에 그가 쓴 사초에 세조의 왕위 찬탈을 풍자한 김종직의 조의제문과 이극돈이 전라도 관찰사로 있을 때의 비행을 그대로 쓴 것이 이극돈 측의 훈구파들에 의하여 연산군에게 고하게 되어 영남학파의 신진 선비들을 내거 숙청한 이른바 무오사화를 촉발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이 사화로 이미 고인이 된 김족직은 무덤을 파헤쳐 시체의 목을 베는 부관참시를 당했고. 탁영ㅇ은 처형되었는데 당시 신진 사류 70여명이 처형되고 혹은 귀양 가는 등 역사상 유례없는 대 참사였다. 당시 그의 나이 34세 였다. 이 직필 사관 탁영의 11대손 金仁赫(김인혁)의 따님이 바로 삼의당 김씨이다.
집안은 어지간히 가난하였다. 전해오는 기록, 즉 남원 문화원에서 간행한 <남원의 문화유산>에 의하면 남원시 향교동 유천 마을 (당시 지명은 棣鳳체봉)에서 출생하여 자라는데, 집안 사정이 어려워 정상적으로 배우지를 못하고 있던 차 마침 그 마을에 교육기관인 향교와 서당이 있었다. 그녀는 서당과 향교의 담 벽에 몰래 붙어 서서학동들의 글 읽는 소리를 듣고, 언문과 한문을 깨우쳤다. 그리고는 소녀시절부터 시문을 창작하였다. 출가하기 전에 창작한 것으로 보이는 시 작품은 <讀書有感>등 서너 편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런데 삼의당은 자기가 탁영 김일손의 후손임을 간접적으로 시사한 바가 있다. 탁영은 일찍이 28세의 나이에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외교사신으로 두 차례나 다녀왔다. 그 때 명나라 황제가 하사한 많은 서예품과 특히 小學集說(소학집설)등도 탁영이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가져와 보급된 것으로 문화발전에 크게 공헌하바가 있다.
삼의당은 죽기 전 작품들을 손수 정리하여 한데 묶고 스스로 서문을 썼는데 “일찍기 언문으로 小學을 읽어 깨우쳤다.”고 썼는데 그의 선대 할아버지 탁영이 소학을 처음으로 조선조에 가져온 것을 대대로 내려오면서 들었깅 특별히 소학을 지칭하여 거론하였으리라.
삼의당이 자기 문집에 써 놓은 서문은 매우 간략하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는 한 어리석은 호남의 부인네로서 깊은 안방에서 나고 자랐다. 비록 경전과 역사서를 널리 배우지는 못했으나 일찍이 언문으로 소학을 읽어 깨우쳤고, 미루어서 한문을 통달하여 여러 학자들의 글을 읽었다. 그렇다고 하여 어찌 짧은 글과 무딘 솜씨를 들어 세상 사람들의 나무람을 받으리요. 다만 戶庭(호정) 안에서 본대로 들은 대로 또 지내는 대로를 혹은 시로 남겨 느낀 정대로 맡겨 써 놓은 것은 스스로 뒤날에 좋은 거울과 법도를 삼고자 함에 있다 할 것이다.
어언 열여덟 꽃다운 나이에 그 마을에 사는 동갑내기 같은 나이에 같은 생일의 진주 하씨와 결혼하였다. 남편의 이름은 하욱이다. 河煜(하욱)의 선대는 오늘날의 경북 산청군의 남사 마을에서 매화를 기르면서 후일을 기약한 河楫(하즙-노 즙)이다. 하즙이 기르던 매화는 우리 역사상 가장 오래 살아온 매화나무로, 지금도 汾陽梅(분양매)라는 이름으로 살아있는 매화나무이다. 오늘도 이 매화나무 아래에는 하즙이 쓴 <매화>시가 詩碑(시비)에 기록되어 매화나무와 함께 서있다.
하즙의 증손 河演(하연)은 세종 년 간에 영의정을 지낸 인물이다. 그 후손이 삼의당의 남편 河煜(하욱)이다. 삼의당 김씨 부부의 선대는 이렇듯 당당한 기개를 지녔고, 고관대작을 지낸 인물이었다. 그러나 수 백 년을 내려오면서 선대의 고향을 떠나 그 부모들은 전라도 남원에서 살면서 김해김씨의 후손 삼의당과, 진주 하씨의 후손 하욱은 부부가 되었다.
*소녀시절이 시작품
어려운 살림에도 유교 사회 체제하의 여자 신분으로서 어려서 언문을 깨우치고 미루어 한문을 통달하여 옛 經(경). 書(서)와 여러 학자들의 子. 集을 섭렵하였다는 것을 그가 남긴 짧은 서문에서 알 수가 있다. 그녀의 작품은 본대로 들은 대로 느낀 대로 쓴 서정시가 많다. 시의 내용으로 보아 소녀시절에 쓴 것으로 추정되는 시 한 편은 다음과 같다.
2. 소녀시절의 시작품.
어려운 살림에도, 유교사회 체제하의 여자 신분으로서 어려서 언문을 깨우치고, 미루어 한문을 통달하여, 옛 경(經), 서(書)와 여러 학자들의 자(子). 집(集)을 섭렵하였다는 것을 그가 남긴 짧은 서문에서 알 수가 있다. 그녀의 작품은 본대로, 들은 대로, 느낀 대로 쓴 서정시 가 많다. 시의 내용으로 보아 소녀시절에 쓴 것으로 추정되는 시 한편은 다음과 같다.
十三顔如花(십삼안여화)- 열세 살 얼굴은 꽃과 같고,
十五語如絲(십오어여사)- 열다섯 살 말솜씨는 실타래 같네.
內則從姆聽(내칙종모청)- 내칙 편은 이모님께 들었고,
新粧學母爲(신장학모의)- 치장하는 법 어머님께 배웠네.
-중략-
早讀聖人書(조독성인서) - 어려서 성인의 책을 읽어 왔기로,
능知聖人禮(능지성인례) - 성인의 가르침을 능히 알겠네.
禮儀三千中(예의삼천중) - 삼천 가지 많고 많은 예의 거동가운데,
最詳男女別(최산남녀별) - 남녀 간의 구별법이 가장 자상하네.
-하략-
위 시 제목의 계년( 年)이란 여자가 15세가 되어 처음으로 비녀를 꽂는 나이를 이르는 어휘이다. 삼의당 김씨가 쓴 소녀시절의 시작품 중에
*<가지에 만발한 꽃 (花滿枝-화만지)>,
<讀書有感(독서유감)>, 언니가 시집갈 때 쓴 것으로 추정되는 <送兄于歸(송형우귀)>등 세 편이 더 있다.
(사진-유천 마을에 새워진 시비)
3. 마음은 선경(仙境)인데 육신이 고달픈 결혼생활
삼의당은 어렸을 때에도 어려운 가정생활에 고달픈 나날을 보냈으나, 결혼생활 역시 평탄하지를 못하였다. 그것은 남편을 출세시키려는 욕망과, 없는 살림에 시부모들의 봉양함에 더욱 그랬다. 남편 河립은 여러 차래 과거 시험을 보았으나, 그 때마다 낙방의 고배를 마시고 말았다. 거기에다가 다섯 형제 중에, 남편이 세 째였으나 사정이 여의치 못한 탓으로, 삼의당은 자진하여 시부모를 모시게 되었다.
거기에다, 없는 농촌 생활에 남편의 출세를 위하여 10년 가까이 남편을 서울로 유학시키면서 낮에는 농사일로, 밤에는 길쌈으로 고달팠으나, 근면과 성실을 다하여 남편의 유학 뒷바라지를 하였다. 남편을 서울에 보내고 여러 편의 격려문장과 시를 남겼는데 그 대표적인 시가
*<서울계신 임에게(寄在京夫子 -기재경부자 )>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女兒柔質易傷心(여아유질이상심) - 여자라서 마음 약해 상심하기 쉬워도,
所以相思每發吟(소이상사매발음) - 그립고 보고프면 매번 시를 읊지요.
大丈夫當身在外(대장부당신재외) - 당신은 대장부라 몸이 밖에 계셔도,
回頭莫念洞房深(회두막념동방심) - 머리 돌려 깊은 규방 생각지 마오.
절망과 좌절 속에 희망으로 자신을 다지면서 서울에 있는 남편을 그리워하는 또한편의 시
<추야월 (秋夜月 가을 달밤에)>는 이렇다.
一月兩地照(일월양지조) - 달은 하나로되 두 곳 땅을 비추는데
二人千里隔(이인천리격) - 두 사람은 천리 먼 곳 떨어져 있네.
願隨此月影(원수차월영) - 원하건대 밝은 달 빛 쫓아 갈 수 있다면,
夜夜熙君側(야야희군측) - 밤마다 낭군 곁을 밝혀주고 싶어라.
고대하던 남편의 벼슬길은 열리지 않고, 마음은 답답한 어느 날 휘황한 달빛을 보고, 할 수만 있다면 이 밝은 달빛을 남편의 공부방에 비춰주고 싶다는 소박한 표현이다. 그러나 삼의당의 여러 시내용을 보면 마음만은 선경에 있다. 시 제목을 <봄날에 읆는 시(춘일즉사)>이다
桃花灼灼滿地開(도화작작만지개)- 복사꽃이 땅에 가득 찬란하게 피었는데,
恰似機頭紅綿裁(흡사기두홍면재)- 배틀 머리 잘려 나온 붉은 비단 흡사하네.
莫遣東風任吹去(막견동풍임취거)- 셋 바람아 마음대로 불어대지 마오,
故敎山鳥好含來(고교산조호함래)- 예스럽게 산새들이 고이 물로 오리라.
한 폭의 산수화를 보는 듯한 내용의 시이다. 그러나 시의 내용이 명쾌하지는 못하다. 그것은 삼의당 시인의 가슴속에 항상 고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기 때문 일 것이다. 다른 한 편의 기
<오월 단오(五月端午)>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黃梅細雨濕輕煙(황매세우습경연)- 보슬비에 노란 매화 가벼운 연기에 젖고
簾外幽禽喚晝眠(염외유금환주면)- 주렴 밖 그윽한 새 울음소리 낮잠 깨우네.
擾亂東 多如盤(요란동린다여반)- 요란한 동역 마을 많은 사람 무리 지어,
綠楊陰裡送 韆(녹양음리송추천)- 푸른 버드나무 그늘 속에 그네 밀치네.
4. 효경(孝敬)과 효순(孝順)의 실천자.
부모와 조상에게 효도하고 잘 공경하기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시인 삼의당은 없는 살림에 시부모 봉양하느라 정성을 다 하였다. 삼의당 시인의 평소 시부모 공경하는 마음을 <무제(無題)>라는 시에서 였 볼 수 있다.
朝夕入廚下(조삭입주하)- 밤낮으로 부엌에 드나들지만,
廚下乏甘旨(조하핍감지)- 부엌에는 맛 갈 좋은 음식 없다네.
剪髮非爲賓(전방비위빈)- 머리를 자른 것은 손님 위함 아니고,
堂上有父母(당상유부모)- 안방에 모셔놓은 시부모님 받들기 위함일세.
모자라는 살림에 부모 공양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긴 머리를 잘라 팔아서 부모를 봉양하였다는 시내용이다. 삼의당(三宜堂)이란 남편 河립이 지어준 당호였다. `삼의당`이란 마땅한 세 가지 일을 수행한다는 의미였다. 첫째로 아내로서 남편을 잘 보살펴 왔고, 두 째로 비록 세 째 며느리이기는 하나 스스로 자원하여 시부모를 섬기며 잘 봉양하고, 세 째로 형제간에 우애하는데 앞장선다 하여 이러한 당호를 지어 주면서 남편인 河립은 그날 집안 주변을 정리 정돈하고 꽃으로 방안을 단장하여 놓고, 이러한 당호를 지어 주었다고 시인 삼의당은 술회하는 글을 남겼다.
5. 삼의당 시의 시어(詩語)에 관한 깊은 글 맛.
삼의당 시인이 소녀시절에 쓴 작품으로 알려저 오고 있닌 시중에는 <가지에 만발한 꽃 (花滿枝-화만지)>가 있다.
帶方城上月如眉(대방성상월여미) - 대방성의 위에 뜬달 눈썹과 같고,
帶方城下花滿枝(대방성하화만지) - 대방성의 아래 핀 꽃, 가지마다 가득하네.
生憎花開芳易歇(생증화개방이헐) - 피어난 꽃 꽃다우나 얄밉게도 쉬이 지니,
每羨月來長有期(매선월래장유기) - 오래도록 기약 있게 뜨는 달이 탐나네.
남원시와 남원문화원에서는 이 시를 삼의당 김씨의 대표적인 시로 정하고 1991년에 교룡산성 경내에 시비를 세우면서 이 시를 새겨 너었다.(맨 앞 사진 참조).
시인이 어떠한 시어(詩語)로 시를 쓰는가에 따라 그 시인의
맛이 깊은가를 알 수가 있다. 위의 시중에 생증(生憎)이란 시어는 "몹시 얄미워서 지극히 한탄스럽다" 는 뜻으로, 여느 경서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오직 당·송 대의 시인이 시어로 쓴 어휘일 뿐이다. 꽃이 피였으나, 쉬이 지고 향기마저 살아져 버리니, 꽃과 달을 비겨서, 그 꽃이 곱기는 해도 얄밉도록 한탄스럽다 는 이 시어로서의 표현이 꽃을 두고 한 표현으로는 이것만으로도 소녀였던 삼의당의 글 맛이 얼마나 뛰어나고, 깊은가를 알 수가 있다.
생증(生憎)이란 시어는 초당사걸(初唐四傑)의 한사람인 노조린(盧照 )이 그의 시<장안고의(長安古意)>에서 처음으로 사용한 시어이다. 초당사걸(初唐四杰)이란 당 태종 년간(627-649)에 출현한 이름난 문장가들로 왕발(王勃:650-676)·양형(楊炯:650-693?)·노조린(盧照 :635?-689?)·낙빈왕(駱賓王:640?-684)을 일컫는 말이다. 이들을 약칭하여 王, 楊, 盧, 駱,이라 불러오고 있다.
당나라 초기에 이 네 사람은 육조시대의 시풍을 수용하면서도 개혁과 창조에 노력하여 초당의 시풍을 변화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이들 모두 특히 시를 잘 지었고, 문장으로 이름을 날렸기 때문에 이러한 호칭이 붙게 되었다. 유약함과 아름다움을 추구한 당나라 초기의 시풍에 반대하여, 궁중의 향락 생활만을 묘사한 협소한 영역을 벗어나 도시·변방·자연에 눈을 돌렸으며 언어의 단련, 풍부한 문체, 청신한 풍격 등을 중시했다. 시대적인 모습을 반영했고 율시(律詩)의 규격화와 가행체(歌行體)의 성숙을 촉진하여, 성당(盛唐)시대의 시가 발전을 위한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사진 - 진안 마이산 아래 탑영지 윗자락의 삼의당 부부 시비)
노조린은 병마에 시달리다 물에 투신하여 불행하게 죽었다. 오래 살아 보려는 욕망에서 선가의 단약(丹藥)을 과량 복용한 것이, 단약에 함유 된 수은 중독으로 손발이 마비되는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질병을 풀어버린다`는 의미의 <석질문(釋疾文)> 3수를 남기고 투신 자살한 인물로, 삼의당이 노조린의 시어를 골라 쓴 것이 고생스러웠든 삼의당의 생애와 무관하지를 않다는 느낌이 든다.
삼의당의 시를 살펴보자면 감동적인 내용이 많다. 특히 시란 읽는 사람에게 감동을 주어야 시다운 맛이 있다. 소녀시절에 썻다고 전해오는 <독서유감(讀書遺憾)>중의 한 시 구절은 다음과 같다.
鄭衛音何載在詩(정위음하재재시)- 鄭.衛나라의 음탕한 노래 어이 시경에 실려 있을까.
人心懲創莫如斯(인심징창막여사)-사람 마음 경계함이 이만 한 것 더 없다네.
世人不識宣尼意(세인불식선니의)-세상사람들아 공자 님 베푼 뜻을 알지 못하면서,
惹出淫情反效爲(야출음정반효위)-음란스런 꼬투리 끌어 내어, 본 받는 일 뒤집는가.
위의 시에서 징창(懲創)이란 시어는 삼의당 시인 보다 천년 가까이 먼저 살다 간 당나라의 이름난 문장가 한유(韓愈 768-824)의 악양루(岳陽樓) 시에서 처음으로 사용한 시어이다. `예전의 잘못을 교훈으로 삼아 스스로 경계함`의 의미를 압축하여 사용한 시어로 이 시에 써야할 딱 맞는 시어이다. 야출(惹出)이란 어휘 또한 `어떤 일을 사건의 꼬투리로 이끌어 낸다`는 뜻으로 함축성 있는 시를 쓰려고 이러한 시어를 골라 사용하였을 것이다.
6. 처절한 슬픔 속에 절망과 좌절을 초연한 여인상.
몰락한 양반 집의 아녀자로서 남편의 한양공부 뒷바라지, 시부모 봉양하기, 세 명의 딸 키우기, 농사일로 가정 꾸려나가기란 참으로 벅찬 일이었다. 많지도 않던 농토는 이미 가정 살림 꾸리기에 모자라 딴 사람에게 넘어가고 말았다. 그 뿐이 아니었다. 많은 빚에 쪼들리는 처지였다. 남편이 벼슬욕심에 한양에 올라 간지 오랜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매번 낙방한 남편도 더 이상을 버티지 못하고 10년 만에 낙향하고 말았다. 남편이 시골집에 돌아 왔으나, 살 길이 더욱 막막하였다.
어느 날 남편으로부터 고향을 떠나 살 것을 제의 받는다. 진주 하씨의 선대 묘소가 있는 진안 땅 내동(來東) 산자락에 가면 선대 묘소 아래 야산을 일구어 밭농사를 충분하게 지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삼의당 시인의 나이 32세 되던 1801년, 남원 땅을 떠나 진안군 마령면 방화리로 이거 하였다. 그러나 남편의 뜻에 따라 삶의 보금자리를 옮긴 이후 나아지는 것은 조금도 없었다. 마침 부모상을 당하였는데 장례 치를 비용이 없어 빚내어 치렀다.
빚에 쪼들리는 남편은, 돈을 마련하여 오겠다며 울면서 집을 나섰다. 지성이면 감천이란 말이 있듯이, 남편 河립은 가야산 깊은 계곡에서 산삼 몇 뿌리를 캐게 되어 빚을 갚음으로서 가난을 극복하는 듯하였다. 그러나 가정의 평온함은 잠시이고, 모진 액운이 몰아닥치는 것이었다. 애지중지 키우든 큰딸이 나이 열여덟에 몹쓸 병에 비명횡사 하였다. 그 후 일
년도 채 안되어, 세 째 딸마저 몹쓸 병고에 시달리다가 약도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러한 내용들은 삼의당 시인이 남겨 놓은 시문 속에 모두다 쓰여 있다. 큰딸의 죽음에 남겨놓은 <제장녀문(祭長女文)>은 눈물 없이 못 읽는 글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시인 삼의당은 처절한 허탈감과 크나큰 슬픔은 초연(超然)하였다. 항상 몸을 단정히 하고, 얼굴을 정색으로 하며 엄연한 자세로 살아갔다. 다음의 시작품
*<시골 마을에 살며 읊다(村居卽事)>속에 그러한 모습이 나타난다.
棲鳳村中生長(서봉촌중생장)- 서봉 마을에서 출생하고 성장하여,
來東山下寓居(내동산하우거)- 내동산 아래에서 타향살이 살고 있네.
蕭灑數間茅屋(소쇄수간모옥)- 몇칸의 초라한 띠 집을 깨끗이 쓸고 앉아,
好讀一床詩書(호독일상시서)- 詩書 읽는 즐거움으로 날을 보내오.
시인 삼의당의 나이 중년 넘도록 아들이 없어 후사를 염려하던 중에, 참으로 다행스럽게 나이 40이 넘어 아들하나를 두게 되었다. 그로부터 10여년 후인 1823년, 시인의 나이 54세에 세상을 마치었다.. 그 아들이 후사를 이여 내려오면서, 오늘날까지 진안 인근에 약 30여 가구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고 전주시에 거주하고 있는 河在敬 (063-278-3855) 후손 대표의 설명이다. 시인 삼의당의 유택은 남편과 합폄으로 전북 진안군 백운면 오정리 마을 뒤에 있다.
7. 삼의당 시인의 자료와 시비들.
삼의당 시인의 생애와 문학을 엿 볼 수 있는 자료는 삼의당김부인유고(三宜堂金夫人遺稿)이다. 이 책은 삼의당 자신에 의하여 글들을 모아 필사본으로 남긴 것을 시인이 세상을 떠난 지 100년 가까이 되던 1930년에 전남 광주 삼기당(三奇堂)에서 석판으로 출간되면서 비로소 세상에 널리 유포되었다. 이 책은 순 한문으로 2권 1책 30 쪽의 분량이다. 제 1권에는 111편 235수의 한시, 제 2권에는 남편에게 보내는 편지 6편을 비롯하여 제문, 서문, 잡문 등 도합 22편이 들어 있어 다양한 문장의 내용과 형식을 였볼 수 있는 자료이다.
삼의당의 시는 그 소재(素材)나 주제(主題)가 자연과의 교감적 서정, 농촌생활의 사실적 표현, 세시풍속의 이해와, 전통문화의 고취 등등이며, 시문 속에 윤리 실천을 부르짖었고, 고뇌를 승화시키는 표현을 하였으며, 절제와 극기의 내용을 미학적으로 표현하여, 광복 이후에 여러 여자대학교의 국어국문학과에서 교양 과목으로 채택되어 배워오고 있다.
이 시인의 글을 연구하여 1990년 2월에 김덕수(金德洙)박사의 논문이 <김삼의당의 시문학 연구>로 전북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학위 논문이 통과된 이래에 여러 대학교에서 계속하여 학위 논문으로 연구되어 오고 있다.
1982년에 전북 진안군 문화원에서 주관이 되어 여러 군민의 추렴으로 삼의당 부부의 시비를 마이산 아래 탑영지 윗자락에 세웠으며, 1994년에 진안군청에서 주관이 되어, 부부의 시비 위 편으로 명려각(明麗閣)을 지어 삼의당 부부의 영정을 봉안하였다. 명(明)은 낮과 밤의 음양 즉 부부를 의미하고, 려(麗)는 삼의당 시인의 시문이 하도미려(美麗)하여 명려각이라고 명명 하였다는 후손의 설명이다.
(사진-마이산 아래 탑영지 윗자락에 명려각과 삼의당 부부 시비 전경)
1991년에는 남원 문화원에서 주관이 되어, 교룡산성 경내에 삼의당 시인의 시비를 새웠으며, 남원시 향교동 유천 마을이 삼의당 시인의 출생마을로 고증이 되자 고증에 앞장섰던 노상준 남원 전 문화원장과 임기준 마을개발위원장, 지홍수 통장(010-6633-5965)등이 주관이 되어 마을 출연금으로 이 마을 회관 앞에도 1999년 5월 28일에 삼의당의 시비가 건립되었다.
(이상은 사단법인 동방문화진흥회 명예이사이신 德田 장봉혁님의 자료임.)
다음 작품은 입 특선하신 묵천 최양두, 곡월 박영동선생의 서예 몇 점을 실어 학우인 서숙회원들과 같이 감상 하고져 한다.
春水滿四澤 춘수만사택
봄물은 사방 못 마다 가득 찼고
夏雲多奇峰 하운다기봉
여름 구름은 기이한 봉우리도 많을
씨고
秋月場明輝 추월장명휘
가을달은 유난히도 밝게 비추며
冬嶺秀孤松 동령수고송
겨울 산 마루엔 외로운 소나무가 빼어 났노라.
풀이: 참된 하늘의 도(道)는 삼라만상의 모든 것과 친함이 없다네. 단지 늘 한결 같이 선한 이들에게
자비를 베푼다네
불일암 인운 스님에게(佛日庵贈因雲釋)
寺在白雲中 사재백운중 절집이라 구름에 묻혀 살기로
白雲僧不掃 백운승불소 그름이라 스님은 쓸지를 않아.
客來門始開 객래문시개 바깥 손 와서야 문 열어 보니,
萬壑松花老 만학송화로 온 산의 송화꽃 하마 쇠였네
손곡 이달의 詩
桐千年老恒藏曲 동천년로항장곡
梅一生寒不賣香 매일생한불매향
오동나무 천 년 늙었으나, 노래 항상 숨어 있고,
매화 늘 추위 속에 서 있지만 향기를 팔지 않는다. 중에서...
조선중기의
문신, 신흠(申欽/1566~1628)의 야언(野言)이라는 수필집에 나옴.
溪水深更綠 계수심갱록
倚杖望層巓 의장망층전(산꼭대기 巓)
飛簷駕雲木 비첨가운목(치마 簷)
찬바람이 바위틈에서 불어오고
시냇물은 깊어서 파랗네,
지팡이를 짚고 절벽을 바라보니
처마가 그름 속에 떠 있네.
음산한 바람이 보덕굴의 바위틈에서 불어오는데 그 밑을 보니 파란 물이 깊기도 하다. 이 곳 보덕굴에서 지팡이를 짚고 서서 고개를 들어 우뚝 솟은 층암절벽을 바라보니 보덕굴의 바위 난간에 지어 놓은 집의 처마가 구름이 덮인 나무 위에 매달려 있는 것 같다.
이 시는 起. 承句가 對로 된 듯싶으나 對로 쓰인 것이 아니다. 대개 起句에서는 말을 이끄는 곳이라 무엇이 “어떠하니, 무엇이 어떠하다.” 로 承句에서 받아서 발전시키는 것이 많다. 그리고 끝부분의 轉句도 承句에서와 마찬가지로 結句가 이어받아 맺는 것이 보통이다.
의미 있는 내용이라서 심도 있게 詳察(상찰)하여 학우 여러분도 암기하기를 바랍니다.
天時不如地利 地利不如人和
천지불여지리 지리불여인화
孟子)가 그의 왕도론(王道論)을 전개할 때 한 말로, 《맹자》 〈공손추(公孫丑)〉 하(下)의 첫 문장이다. 맹자가 말씀하셨다[孟子曰]. “하늘의 때는 땅의 이득만 못하고, 땅의 이득은 사람의 화합만 못하다[天時不如地利 地利不如人和].” 거의 설명이 필요 없는 명쾌한 논리이다. 그러나 맹자는 이어서 약간의 설명을 부연하고 있다. “3리의 내성(內城)과 7리의 외곽(外廓)을 에워싸고 공격하지만 이기지 못한다. 에워싸고 공격을 하는 데는 반드시 하늘의 때를 얻겠지만, 이기지 못하는 것은 하늘의 때가 땅의 이로움만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이 높지 않은 것도 아니고, 못이 깊지 않은 것도 아니며, 병기와 갑옷이 굳고 이롭지 않은 것도 아니고, 군량이 많지 않은 것도 아닌데 성을 버리고 간다. 이는 땅의 이로움이 사람의 화합만 못하기 때문이다.”
맹자는 승패의 기본적인 요건을 첫째 하늘의 때, 둘째 땅의 이득, 셋째 인화의 세 가지로 보았다.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아무리 기상과 방위, 시일의 길흉 같은 것을 견주어 보아도 지키는 쪽의 견고함을 능가하지 못한다. 그러나 아무리 요새가 지리적 여건이 충족된 땅의 이득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것을 지키는 이들의 정신적 교감, 즉 정신적 단결이 없으면 지키지 못한다. 이것을 맹자는 다음과 같이 결론짓고 있다.
“고(故)로 말하기를, 백성들을 국경 안에 머물게 하는 데는 영토의 경계로써 하지 않고, 방위를 튼튼히 하는 데는 산과 골짜기의 험함으로써 하지 않고, 위엄을 천하에 떨치는 데는 무력으로써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도(道)를 얻는 사람은 돕는 사람이 많고 도를 잃은 사람은 돕는 사람이 적다. 돕는 사람이 적은 것이 극단에 이르면 친척까지 배반하고, 돕는 사람이 많은 것이 극단에 이르면 천하(天下)가 나에게 순종한다. 천하가 순종함으로써 친척이 배반하는 것을 치는 것이기 때문에 군자(君子)는 싸우지 않지만, 싸우면 반드시 이긴다.” 즉, 민심(民心)을 얻는 자가 천하를 얻는다는 뜻이다.
人事有憂樂 山光无古今
인사유우락 산광무고금:
사람이 사는데는 즐겁고,걱정스럽고 여러가지 일이 있으나 산,경치,자연은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다.
夫婦和樂其家興’(부부화락기가흥),
부부가 화락하면, 그 가정도 흥하니라.
(부현자효선공덕사불삼사종유회)
어진아내와 효자는 우선 공덕이 있어야 하며, 일을 함에 있어서는 세 번 생각하지 않으면 뉘우침이 있다.
이상 11점 묵천 최양두 선생의 작품임.
천자문
스님의 출가시다.
하늘에 가득한 큰일도 이글대는 화로 속 눈송이요
바다를 가르는 웅장한 기틀도 따가운 햇볕속 이슬이로다
누가 덧없는 꿈꾸며 살다가 죽기를 달게 여기리요
떨쳐 일어나 영원한 진리를 홀로 밟으며 나가리라.
彌天大業紅爐雪(미천대업홍로설)
跨海雄基赫日露(과해웅기혁일로)
誰人甘死片時夢(수인감사편시몽)
超然獨步萬古眞(초연독보만고진)
영원한 자유를 찾아 헤매던 성철스님은 한 탁발승이 되어 1936년 25세의 나이로 해인사 퇴설당에서 동산 혜일(東山 慧日1890-1965)스님을 은사로 출가하면서 自性(자성)을 확철하게때우쳐 부처를 이루라는 의미로 성철이란 법명을 얻었는데, 이 시는 당시의 심경을 노래한 성철의 출가송으로 득도의 길로 나서는 丈夫의 호연한 기품이 느껴짐. 이때부터 성철은 범어사 원효암 통도사 백련암. 은해사 운부암. 금강산 마하연사등의 제방 선원으로 옮겨 다니면서 安居(안거)하던 중, 1940년 29세 때 동화사 금당선원에서 하안거 도중에 悟道頌(오도송)을 읊기에 이르렀는데, 그 때의 오도송은 다음과 같음
황하수 서쪽으로 거슬러 흘러
곤륜산 정상에 치솟아 올랐으니,
해와 달은 빛을 잃고 땅은 꺼져 내리도다.
문득 한 번 웃고 머리를 돌려 서니
청산은 예대로 흰 구름 속에 섰네.
그 후 한국 근대불교사에 전설처럼 전해지는 봉암사 결사를 1947년부터 3년간 이끌었던 성철은 1967년 총림 지정과 함께 초대 방장으로 취임하여 가야산 호랑이, 호랑이 노장으로 불리면서도 서릿발 같은 해인사 선풍의 기틀을 다잡으며 3. 4. 5대 방장을 역임했으며, 조계종 6. 7대 종정을 역임하면서 한국 근대불교의 기반을 확고히 하기도 하였음.
성철은 거듭되는 고사에도 불구하고 주변의 요청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7대 종정직을 수락하면서 그 유명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는 법문을 내리기도 했는데, 다음은 그 전문임.
원각이 보조하니
적과 멸이 둘이 아니라
보이는 만물은 관음이요
들리는 소리는 묘음이라
보고 듣는 이밖에 진리가 따로 없으니
아아, 시회대중은 알겠는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가 유명하다.
이 작품은 행서와 초서를 섞어서 썼다.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위진남북조시대는 삼국시대의 영웅인물들이 모두 사라진 후 역사상 일찍이 웅장하고 비장한 일화들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점점 사라져 갔다. 이렇게 후(後)영웅시대라고 불리는 이 시기에 후세에 아름다운 명성을 남긴 ‘죽림7현’이 나타났으며 그들은 중국 문화사에 거대한 영향을 남겼다. 당시에는 정권 교체가 매우 빈번했기 때문에 많은 독서인들이 재앙을 피해 산속으로 들어갔다. 당시에 나는 그래도 학문이 높다고 할 수 있었으며 나이는 23~24세 정도되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재앙을 피하기 위해 삼협(三峽) 부근에서 주유하며 있었으며 손에는 늘 짧은 피리[短笛]를 가지고 다녔다.
삼협의 험준하고 우뚝 솟은 모양은 나로 하여금 돌아가는 것도 잊게 했다. 한번은 배에 앉아 백제성(白帝城)을 지나게 되었는데 발아래에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감개가 무량했다. 나중에 당대(唐代)의 이태백은 여기에서 천고의 명 구절을 남겼다.
早發白帝城(조발백제성) 아침일찍 백제성을 떠나며 이백(李白)
朝辭白帝彩雲間(조사백제채운간)
千里江陵一日還(천리강릉일일환)
兩岸猿聲啼不住(양안원성제불주)
輕舟已過萬重山(경주이과만중산)
이른 아침 동트기 전 백제성을 출발하여
천리 길 강릉을 하루 만에 돌아왔다.
강 양옆 원숭이 울음소리 그칠 줄 모르고
가볍고 재빠른 배 만 겹산을 지나도다!
감개하여 연상하다가 갑자기 또 유비가 ‘백제성에서 자식을 부탁한’ 일(역주: 삼국시대 촉나라의 유비가 아우인 관우의 원수를 갚으려다 전쟁에서 크게 패한 후 이곳에서 제갈공명에게 자신의 아들 유선을 부탁한 것을 말한다)이 생각났다. 역사와 현실이 부딪치면서 나의 머릿속에는 이미 아무것도 용납할 수 없었고 자신의 지금 처지를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君子之道는 費而隱이니라.
(군자지도비이은)
군자의 도는 광대하면서도 은미하다. (군
자가 행하는 중용의 도는 남의 눈에 안
띄지만 한없이
넓고 커서 미치지 않는 곳이 없으며 그
내용은 은밀하고 미세하여 눈으로 볼 수
가 없는 것이다.)
봄에 꽃피고 가을에 열매를 맺는다.
편집을 끝내고....
세월이 좋아서 지금은 앉아서 도서관에도 갈 수 있고, 그 보기 어렵든 귀중한 자료인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하여 고전을 앉아서 읽을 수가 있으니 좋은 세상에 살고 있음을 실감한다.
인간의 두뇌는 끝없이 저장 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 말없는 스승을 많이 비치를 해 놓고 있다는 것이 쉬운 일 만은 아니다. 좀 많다고 자랑깨나 하는 어느 학자도 자기가 필요하고 없는 자료가 있으리라.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별 수가 없는 것이다. 그 자료가 없으면 어떻게 하랴. 그만이지 않은가. 발로 뛰어야 한다. 그것도 경비가 들고 줄깨나 있어야 얻어 볼 수가 있지 않는가. 그렇잖으면 도서관에서 도시락 사가지고 몇 박 며칠을 묵어도 없으면 또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서울로 가면 좀 낫다. 우리 같은 조무래기들은 서울 어느 대학 사료보관실에서 쉽게 묵어가면서 도와줄 이가 없다.
한마디로 불쌍하고 꿈이 있어도 울 수밖에 없다. 지금처럼 웹에서 홍수같이 쏟아지는 시대에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지식들을 어떻게 어느 한 사람이 독유할 수 있으며, 독식 할 수가 있단 말인가. 그러나 지금은 시대가 틀린다. 정보수집함이 물론 열려 있다는 것이다. 하도 자료가 다양하기에 취합을 하고 여러 자료를 종합 하다 보면 거의 완벽하리만치 자료를 정리 할 수 있으니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은 행복할 수 있다는 말이 과히 심한 말은 아닌 것이다.
선인들이 정리를 아무리 잘 했다고 해도 오류는 나오는 법. 시대가 흐르면서 안목과 잣대가 변하기 때문이다. 그 예로 대원군을 예로 들어보면 앞에는 바보천치. 다음은 독재, 지금은 개혁가로 회자되고 있으니 보는 잣대에 따라 틀린다는 것이다. 시대가 보는 잣대를 달리 하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는 흘러야 되니 흐르면 거짓이 없다는 말이다. 반상의 계급사회에서 독재는 정당화 될 수 있어도 지금은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면 詩를 보는 안목도 그 사람의 사상을 성장 과정에서부터 보면, 해석하는 법이 틀린다. 직역은 누가 해도 같지만 그 시를 지을 때의 시인의 감정은 짐작하기가 쉽지 않다. 의역이 생명이기에 더더욱 그렇다. 그러면 근접하는 법이 그 사람이 누구인가? 를 알고 하면 오류가 조금은 줄일 것 같아 시도해 보았으나 어찌 한 사람의 생애를 붓으로 다 표현 하랴?
손곡 이달의 불우한 환경에서, 그리고 김병연의 풍자시는 어떤가? 비운의 시대를 살아온 그들이기에 퇴계 이황과 이율곡 등 비교적 乘勝長驅(승승장구)한 이들의 감정이 틀리기 때문에 인물에 무게를 좀 두고 편집을 하였으나 마음에 썩 들지 않는다.
이십 구 명의 시 밖에 정리가 안 된다. 그러나 1인 평균 4편이 조금 넘으니 120수가 조금 넘을 것이다. 이 정도만 암송을 해도 적은 량은 아니다. 주위에 漢詩 100수 외는 사람이 흔치는 않으니 학우들은 열심히 공부를 하기 바랍니다.
다음은 좀 더 심도 있는 편집을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정해년(2007년) 7월 남운
2007년 7월 일 印刷
2007년 7월 일 發行
編輯人 南雲
編輯處 南雲書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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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7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