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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 생물학자들을 가르치겠다고 나선 한심한 아마추어
『종의 기원, 생명의 다양성과 인간 소멸의 자연학, 리라이팅 클래식 10』,
진화 생물학에 대해 잘 모르는 아마추어가 다윈의 『종의 기원』이 좋아서 열 번이나 읽는 것은 나쁜 일은 아니다. 그리고 자기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해 보는 것도 좋다.
그런데 그런 엉터리 내용 중 상당 부분이
잘난 척이라는 점 때문에 눈살을 찌푸리게 된다.
그런데 그런 엉터리 책을 <그린비>라는 출판사에서 정식으로 출판해 주었다. 이젠 짜증이 더 커진다. 하지만 이 정도라면 <그린비> 편집부의 안목을 비웃어 주는 것으로 끝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엉터리 책과 저자
『강수돌, 진중권,
http://cafe.daum.net/Psychoanalyse/NSiD/370
게다가 여러 신문에서 그의 책을 비중 있게 다루어 주었다.
[Book cafe] '종의 기원, 생명의 다양성…' 저자
"다윈이 주장한 자연선택설 적자생존으로 좁혀져선 안돼"
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1004/h2010043022284684210.htm
인문학으로 다시 본 종의 기원
[자연과학] 종의 기원, 생명의 다양성과 인간 소멸의
자연학/
이새샘 동아일보 기자 iamsam@donga.com
무한진화·인간소멸…‘불온한 다윈’을 복권하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418642.html
“모든 존재는 고유하며 특별한 것”
■ 지은이와 함께 / ‘종의 기원’ 다시
쓴
글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418642.html
[책과 삶]딱딱했던 ‘종의 기원’ 친절해졌네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418642.html
<'종의 기원' 친절하게 다시 쓰기>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0/04/27/0200000000AKR20100427207000005.HTML?did=1179m
다윈과 진화 생물학에 대한 쓰레기 같은 책이 명작으로 둔갑해 버린 것이다. 안 그래도 한국의 진화 생물학은 상당히 취약한데 이제는 막 진화 생물학을 접하는 사람들이 엉터리 정보에 노출되게 생긴 것이다.
내가
저명한 과학도서 번역가 이한음 선생의 아주 재미있는 일화를 소개해 드리겠다. (7쪽)
이한음 선생은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생물학을 전공하고 여러 권의 저서도 낸 바 있으며, 우리 독자들을 위해 수많은 과학도서들을 깔끔한 문체로 번역해 주신 고마운 분이다. (8쪽)
이한음의 번역에 대해 칭찬 일색인데 내 생각은 다르다. 그의 번역은 나의 기준에 비추어 볼 때 수준 이하다. 이한음이 어떤 식으로 번역하는지는 아래의 번역 비판을 참조하라.
『악마의 사도(이한음 옮김)』 번역 비판 - 1장의 머리말
http://cafe.daum.net/Psychoanalyse/82Xi/19
『악마의 사도(이한음 옮김)』 번역 비판 - 1장의 1절
http://cafe.daum.net/Psychoanalyse/82Xi/20
『만들어진 신(이한음 옮김)』 번역 비판 – 6장
http://cafe.daum.net/Psychoanalyse/82Xi/30
창조론에는 이해고 오해고 간에 검토해 볼 수 있는 근거라는 게 없다. 창조론자들은 다만 진화론이 해명하지 못한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지적할 뿐이다. (12쪽)
다만 진화론은 이런저런 의문점도 있지만 얼추 수용할 수 있는 데 반해, 창조론은 도대체가 너무 황당해 보이는 것이다. 다수의 사람들이 창조론을 반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13쪽)
이것은 다윈 이전의 창조론의 역사와도 유사한 측면이다(물론 똑같지는 않지만). 창조론은 오랜 역사와 전통을 거치면서 녹록지 않은 합리적 근거를 보유하고 있었던 반면, 진화론은 한없이 엉성한 논리에 빈약한 근거들밖에 없는 상태였다. 진화론은 종교에 의해 탄압을 받기 이전에 이론적으로나 실제적인 근거에서 창조론에 한참 밀리고 있었다. 천문학의 경우와 다른 점은 다윈의 등장 이후 진화론이 단기간에 전세를 역전시켰다는 사실이다. (15쪽)
현재에는 “다수의 사람들이 창조론을 반대”한다고 했는데 그런 것 같지 않다. 나라마다 다르겠지만 전체적으로 여전히 창조론이 상당한 인기를 끌고 있다. 미국 같은 나라에서는 창조론이 대중 사이에서는 압도적으로 우세하다.
12쪽에서는 “창조론에는 이해고 오해고 간에 검토해 볼 수 있는 근거라는 게 없다”라고 말했다가 15쪽에서는 “창조론은 오랜 역사와 전통을 거치면서 녹록지 않은 합리적 근거를 보유하고 있었던 반면”이라고 말한다. 뭐 하자는 건가?
19세기 진화론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다윈의 『종의 기원』이 출간되기 전에 진화론자는 눈과 같이 고도로 복잡하고 정교한 기관에 대해 제대로 된 설명을 전혀 제시할 수 없었다. 다윈의 자연 선택 이론이 멘델의 유전 이론과 제대로 만난 것은 1930년대다. 따라서 다윈은 유전 문제에 시비를 거는 사람들에게 제대로 답할 수 없었다.
하지만 『종의 기원』 출간되기 이전이든
이후든 19세기에 진화론이 창조론에게 과학적 기준으로 밀렸다고 보기 힘들다. 진화론이 매우 엉성하게 진화의 메커니즘을 설명하려고 했다면 창조론은 아예 설명을 하지 않고 “신이 그렇게 만들었다”라는 말을 반복할 뿐이었다. 어떤 사람이 에베레스트 등반을 시도했다가 반도 못 오르고 실패하고 이덕하는
가만히 집에 있었다고 하자. 이 때 에베레스트 등반에
당시 창조론자는 진화의 메커니즘과 관련하여 진화론자들이 헤매는 것을 비웃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진화론의 약점을 보여주는 것이지 창조론의 강점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종의 기원』이 출간되기 이전에도 대진화가 일어났는지 여부에 대해서 진화론자들은 상당한 근거를 쌓았다. 이런 면에서는 진화론자가 창조론자보다 과학적 근거를 더 잘 댈 수 있었다.
지난 150년간 부르주아들(혹은 근대인들)은 다윈의 생각을 근대적 메스로 끊임없이 수술하고 성형하였다. 우선 다윈의 과학 비판은 종교 비판으로 협소화시켰다. 자연선택은 자연도태와 적자생존으로 변형시켰고 생존투쟁과 상호의존은 생존경쟁으로 바꿔쳐 버렸다. 그리하여 다윈은 종교비판가이자 부르주아적 가치의 대변자로 타락했다. 우리가 아는 다윈이 탄생한 것이다. (18쪽)
그럴 때 우리는 그의 생각이 얼마나 불온한 것이었는지, 그리고 왜 그 불온성이 거세되어야 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8쪽)
진화 생물학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는
물론 사회 과학에까지 침투하려는 진화 심리학의 불온성을 거세하려는
사람들이 있었으며 여전히 있다. 하지만 그런 불온한 정신을 이어받은 사람들은
생존경쟁은 진화론의 승리 이후 극히 자명한 사실로 간주되어 왔고, 오늘날까지도 ‘경쟁 지상(至上)주의자들’과 ‘무한경쟁 반대론자들’ 간에 이를 둘러싸고 치열한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169쪽~170쪽)
생존 경쟁 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번식 경쟁은 자연 선택 이론 즉 과학 이론의 문제다. 이것은 과학의 교권에 속한다. 반면 경쟁 지상주의는 경제 체제의
문제로 결국 도덕 철학의 교권에 속한다.
현대의 생물학자들은 대부분 자연환경의 변화를 중심으로 진화를 이해한다. 생물은 기본적으로 자연환경에 적응하며 살아가는데, 이것이 정태적인 결과 대신 역동적인 진화로 계속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자연환경 자체가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다윈의 접근법은 이런 태도와는 매우 다른 것이다. 우선 첫째로 자연환경의 변화 자체는 진화에 있어서 거의 의미를 생산하지 못한다. 다윈이 여러 차례 강조했듯이, 환경의 직접적 작용은 생물에게 미미한 변화만을 야기할 수 있다. 둘째, 그 외의 자연환경이란 실은 어떤 생물이 다른 생물들과 맺는 관계와 분리될 수 없다. 한 생물의 환경에는 무기적 환경도 있지만 수많은 동식물들이 조성하는 다양한 생태계야말로 매우 중요한 환경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셋째, 진화에서 가장 중요한 측면은 외적인 자연환경보다는 한 생물이 같은 종 내의 개체들이나 다른 종의 개체들과 맺는 관계다. 이런 몇 가지 점에서 다윈은 외적인 환경을 중시하는 기존의 창조론적 과학자들 및 진화론자들과 결정적으로 갈라졌다. 다윈의 이러한 진화관과 현대 생물학의 진화관 중 어느 것이 더 적합한지는 차치하고, 우선은 양자가 기본적인 관점에서 크게 다르다는 점만 기억해 두기로 하자. (176쪽, 주12)
기이하게도 다윈은 평균적으로 보아 가장 부모를 닮지 않은 개체들, 상궤에서 벗어난 개체들, 다시 말해 가장 이상(異常)한 개체들이 성공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단기적으로 보면 부모를 많이 닮을수록 생존과 번식에서 유리할 것이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보면 결국 부모를 가장 덜 닮은 극단적인 개체들이 생존과 번식에서 승리를 거둔다는 것이 다윈의 생각이었다. (178쪽)
우리는 이 논쟁에서 어느 한쪽을 택하기 전에, 과연 개체에서 출발하는 것이 자연스러운가를 따져 봐야 한다. …… 단적으로 말해 식물이 광합성을 하지 않으면 대부분의 생물이 한시라도 살 수 없는 것 아닌가! …… 우리에게는 ‘함께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깊은 성찰이 많이 부족한 게 아닐까! 특히 개체 간의 경쟁, 나아가 유전자들 간의 경쟁을 핵심적 설명원리로 삼고 있는 현대 생물학은 그러하다. (182쪽)
여기서
생명도 중요하지만 지구 자체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도 소중하다. 그리고 이 분야라면 역시나 제임스 러브록이다. 오래전에 나온 그의 책 『가이아: 지구의 체온과 맥박을 체크하라』(김기협 옮김, 김영사, 1995)가 좋은데, 도서관에서나 빌릴 수 있는 상황이다. 현재 시판 중인 책으로는 『가이아의 복수』(이한음 옮김, 세종서적, 2008)가 좋다. (908쪽)
실제로
주류 과학자들만이 아니라 비판자들 또한 ‘변이의 원천은 유전자’라는 전제를 너무 자명하게 받아들였다. 변이는 물론 무작위적으로 발생하며, 이건 현대 생물학이 밝혀낸 매우 중요한 성과다. 문제는 양 진영 모두 변이가 무작위적으로 발생한다는 사실을 곧장 변이에 원인이 없다는 주장과 동일시했다는 점이다. 세상 어떤 일에서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과학에서는 원인이 없다고 결론 내리기 전에 극도로 신중해야 한다. 생각해 보라. 그 자신은 어떤 것의 작용도 받지 않고, 오직 스스로의 변화에 의해 다른 모든 것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를! 눈치 빠른 독자라면 벌써 알아차렸겠지만, 여기에는 기독교에서 믿는 신의 그림자가 짙게 어려 있다. 그럼 유전자는 왜 변화하는가? 물론 알 수 없다. 그건 변화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 알 수 없지만 모든 다양한 현상의 원인이 되는 이 지점 속에 신은 오롯이 깃들어 있다.
나는 무수히 발생하는 변이들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으며, 유전적 변화에도 당연히 다양한 원인이 작용한다고 생각한다. (341쪽)
「강수돌, 진중권,
http://cafe.daum.net/Psychoanalyse/NSiD/370
“양 진영 모두 변이가 무작위적으로 발생한다는 사실을 곧장 변이에 원인이 없다는 주장과
동일시했다”고 이야기했는데 도대체 저명한 진화 생물학자들 중에 누가 그런 바보 같은 말을 했단 말인가?
나는 한 번도 못 봤다. 도대체 누가 돌연변이(mutation,
사실 엄밀히 말하면 돌연변이가 무작위적으로 발생하는 것도 아니다. 진화 생물학자들이 “돌연변이는 무작위적으로 발생한다”라고 이야기할 때 그 말은 특별히 번식에 유리한 돌연변이만 일어나지는 않는다는 것을 뜻할 뿐이다. 즉 생물에게는 번식에 유리하도록 돌연변이의 방향을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이야기일 뿐이다. 돌연변이도 물리 법칙과 화학 법칙에 따라 일어나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무작위적일 수 없다.
현대 진화론은 양친의 생식 후 유전자가 복제되는 과정에서 변이가 발생한다고 본다. 변이 자체가 무작위적으로, 우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이다. 이렇게 무작위적으로 발생한 변이는 자연선택에 의해 특정한 방향성을 갖게 된다. 잘 아시다시피 이것이 바로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우는 진화론이다. 반면 다윈은 짝짓기 이전에 이미 양친의 성 요소가 이러저러한 변화를 겪는다고 주장하였다. 이렇게 되면 변이는 우연이 아니라 어떤 원인, 즉 외적 조건(의 변화)이 작용하여 발생한 것이다. (352쪽)
도대체
이미 수정이 이루어진 다음에 체세포에서 발생하는 돌연변이는 암을 해명하는 데 긴요하다. 또한 일란성 쌍둥이의 경우 수정란의 유전체가 처음 복제될 때 중대한 영향을 끼치는 유전자좌(locus)에 돌연변이가 생기면 두 사람이 어떤 면에서
상당히 달라질 수 있다. 따라서 수정이 된 이후에 발생하는 돌연변이도 무시하면 안 된다. 어쨌든 20세기 진화 생물학자들이 배우자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돌연변이를 무시한다는 이야기는 오직
현대 진화론에서는 유전자가 복제되는 과정에서 저절로 변이가 발생한다. 그리고 이렇게 발생한 변이는 자연조건에 비추어 유리한 형질과 불리한 형질, 혹은 유불리를 따질 수 없는 형질로 갈린다. 따라서 변화의 원천은 유전자에 있고 환경은 사후에 작용할 뿐이다. 자연조건은 변이가 발생한 이후에나 의미를 가질 뿐, 변이가 발생하는 단계까지는 전혀 중요성을 갖지 못한다. 그러나 다윈의 진화론에서는 조건의 변화가 생식계통을 교란시켜 그 결과 변이가 발생한다. (353쪽)
어떤 저명한 진화 생물학자가 자연조건이 “변이가 발생하는 단계까지는 전혀 중요성을 갖지 못한다”고 이야기했나? 한 명이라도 대 보시라. 강한 방사선이 돌연변이를 많이 유발한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자연 방사선이 적은 심해 동물의 경우 지상 동물에 비해 돌연변이가 덜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가설을 제시하기도 했다(Dawkins의 책에서 본 것 같다).
다윈은 야생 동물보다 사육하는 동물이 돌연변이가 더 많이 발생한다고 본 듯하다. 내가 보기에는 야생과 사육의 차이에서 돌연변이가 생기는 정도의 차이를 찾으려는 가설은 방사선의 차이에서 돌연변이가 생기는 정도의 차이를 찾으려는 가설보다 훨씬 가망성이 없다.
한편 현대 진화론에서는 유전자의 변화에서 유래하지 않는 어떤 변이도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모든 변이는 근본적으로 유전자로 환원된다. (353쪽)
발달 체계 이론(developmental systems theory, DST) 주창자들은 비유전자 유전(non-genetic inheritance)에 주목한다. 즉 유전자의 변화에서 유래하지 않는 돌연변이에 주목한다. 주류 진화 생물학자들이 발달 체계 이론을 냉소적으로 대할 때가 많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비유전자 유전을 완전히 부정하면서 “유전자의 변화에서 유래하지 않는 어떤 변이도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이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박성관는 DST나 비유전자 유전이라는 말을 들어보기나 했을까?
하지만 변이성을 유전자 자체의 우연적 변화에서만 찾고, 자연조건과는 무관하다고 해석하는 것은 지나친 유전자 환원주의다. 안타깝게도 현대의 많은 과학자들은 유전자를 모든 변화의 원천이라 믿음으로써, 신을 유전자로 대체하고 있다. 21세기의 생물학이 그런 퇴행적 흐름을 되돌리기 위해서는, 다윈이 고투 끝에 밝혀낸 자연조건(의 변화)의 작용을 깊이 사유하여야 한다. (355쪽)
가장 보편적인 종이 가장 변이성이 크다는 다윈의 주장을 기억하시는가! 현대 생물학자들은 다윈의 이런 주장을 가장 보편적인 종이 가장 안정적인 종이라는 식으로 바꿔 버렸다. (527쪽)
가장 보편적인 종 즉 쪽수가 많은 종은 쪽수가 많기 때문에 돌연변이도 많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는 변이성이 크다. 또한 가장 보편적인 종은 쪽수가 많기 때문에 잘 멸종하지 않는다. 즉 어떤 면에서는 안정적인 종이다. 이 둘은 모순되지 않는다. 뭐가 문제인가?
그러니까 이종 간의 생식적 격리는 절대적인 게 아니며 따라서 생물학적 종 개념은 성립될 수 없다. (553쪽)
현대 생물학자들 중에 종 개념이 애매하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그렇다고
종 개념이 성립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다윈의 주장인즉슨 불임성은 어떤 이유나 목적 때문에 특별히 부여된 게 아니며, 자연선택에 의해서 생겨난 일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마이어 같은 ‘다윈주의자’들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다윈 자신은 마이어(를 비롯한 현대 생물학자들)와 근본적으로 견해가 다르다. 현대 생물학은 종들 상호 간에 엄격히 분리되어 있는 질서에 어떤 이유나 목적이 있다고 주장하고, 불임성이 종별로(특별하게) 부여되었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종에 관해 창조론적 입장에 선다. 독자 여러분은 하도 질 낮은 창조론에 익숙한 나머지 이렇게 ‘과학적인’ 창조론을 접하면 그 정체를 착각하실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것이야말로 근본적인 종별(특수) 창조론(special creation)이며, 종에 본질이나 의미(목적)가 있다고 믿는 본질주의이자 목적론이다. (526쪽)
핵심적인 논점을 따지기 전에 현대 생물학자들 중에 “종들 상호 간에 엄격히 분리되어 있는 질서”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이 없다는 점을 지적해야겠다. 어떤 저명한 진화 생물학자가 번식 격리라는 기준이 애매하다는 것을 부정했단 말인가?
또 창조론 타령이다. 현대 생물학이 창조론이 되었다는 것이다. 왜
이제 종의 의미는 상당히 분명해진다. 종의 격리 메커니즘은 균형 잡힌 조화로운 유전자형을 그 상태 그대로 보전하기 위한 장치라고 할 수 있다. …… 격리 메커니즘은 열등하거나 생식력 없는 잡종이 생겨나는 것을 막는다. 따라서 종의 보전을 자연선택이 유지시킨다고 볼 수 있다. (525쪽, 에른스트 마이어의 『진화란 무엇인가』에서 인용)
우리는 앞에서 마이어의 주장에 반하는 『종의 기원』의 문장 두 개를 들었었다.
종이 자연계에서 교잡하고 뒤섞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불임성이 특별히(=종별로) 부여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 아무런 이유도 없다. (p.276)
자연선택이 종들로 하여금 상호불임성이 되도록 작용할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을 고찰함에 있어서 …… 깊이 고찰한 결과 내게는 이러한 일이 자연선택을 통해 생겼을 리가 없다고 생각되었다. (4판 pp.311~312) (550쪽)
다윈은 이종 간 교배의 불임성이 자연선택의 결과일 리가 없다고
주장했다. 마이어는 종의 격리 메커니즘이 자연선택의 결과라고
주장했다.
차근차근 살펴보자. 다윈 이전의 창조론자들은 신이 세상의 수 많은 종들을 따로 창조했다고 믿었다. 그리고 각 종들이 보존되게 하기 위해 즉 자연의 질서가 유지되도록 하기 위해 서로 다른 종이 교미를 하면 불임이 되도록 즉 잡종이 아예 태어나지 않거나 설사 잡종이 태어나더라도 잡종의 경우에는 불임이 되도록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다윈은 이런 생각에 도전했다.
다윈은 그런 불임이 자연선택에 의한 적응일 리가 없다고 주장했다. 현대 생물학자들은 그런 생각에 반대하나? 아니다. 마이어도 불임 자체가 자연선택에 의해 설계되었다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마이어가 말하고자 한 것은 생물이 다른 종의 생물과 교미하지 않도록 자연선택에 의해 설계되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다른 종의 생물과 교미하면 자식을 낳지 못할 가능성이 크며 설사 자식을 낳는다 하더라도 그 자식이 잘 자라지 못하거나 나중에 잘 번식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첫댓글 아래 글도 참조하십시오.
저자와의 만남 : 『종의 기원 : 생명의 다양성과 인간 소멸의 자연학』
http://science.binote.com/105513
요즘 이 책을 읽고 있는데, 읽다 보니 어디서 읽은 거 같아서 ^^ 보니까 여기서 비판글을 읽었던 거로군요. 카페가 한산한 거 같아서 안부 차 답글 씁니다. 좀 생뚱맞지만.....^^;;;;;
읽으면 안되는책이네요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