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난 시골집 (2007.5 라디오 여성시대 방송)
글/김덕길
태인을 벗어나 차는 어느덧 호남고속도로 상행선을 질주하고 있었다.
5월의 날씨치고는 너무나 더웠다. 창문을 몇 번 열어보았지만 시끄러운 소음과 황사 앞에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나의 손가락은 어느덧 에어컨단추를 꾹 누르고 있었다. 겨우내 핍박받은 먼지가 삽시간에 차안을 맴돌았다. 다시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킨 다음에야 제법 시원한 바람이 더운 실내를 식혀주었다.
옆 좌석에 타고 계시는 어머니의 힘없는 표정이 눈에 밟혔다. 아팠다. 이제 떠나면 또 언제 돌아올지 모를 고향이 아니던가? 실로 만감이 교차하는 시점이었겠지만 이미 고향을 떠나 이십여 년을 살아버린 나에게 고향집은 그저 추억속의 집일뿐이었다.
깊은 한숨을 들이쉬는 어머니를 그냥 볼 수 없어 말을 건넸다.
“그래 몇 시쯤 불이 난 거예요?”
풀이 죽은 낡은 목소리가 차안을 짙게 억눌렀다. 어머니께서는 불이 날 당시의 상황을 한숨 반 울음 반을 섞어가면서 말씀을 하셨다.
불이 난 시각은 토요일 새벽 5시경이었다.
84세를 바라보는 어머니는 8남매나 되는 아들딸들을 다 출가시키고는 혼자 23년을 정읍 시골 땅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계셨다.
새벽잠이 없으신 어머니는 새벽 다섯 시가 되자 어김없이 눈을 뜨셨다. 화장실이 급하신 어머니는 방문을 열고 안방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화장실로 걸어가셨다.
‘이상하네? 이 새벽에 누가 논두렁을 태우나? 나무 타는 냄새가 나네.’
어머니는 혼자 중얼거리시며 화장실을 보고 나오셨다. 바로 그때였다.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은 옛날 방에서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불 불이야! 아이고 이를 어째?
발악을 해도 들어줄 이 아무도 없는 외딴집, 거기다 꼭두새벽이 아니던가? 불은 벌써 큰방을 삼키고 작은방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번져가고 있었다.
이미 늦었다는 것을 실감하신 어머니는 순간 초상화 사진첩에 넣어두었던 집문서가 생각났다. 어머니는 필사적으로 방문을 연 다음 불이 이글거리는 방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이미 허리가 굽어버린 어머니에게 벽 꼭대기쯤 걸린 사진액자가 손에 닿을 리가 없었다.
불은 삽시간에 방 천정을 삼키듯 달려들었다. 순간 어머니의 머리카락에 불이 붙었다.
“앗 뜨거!”
불은 어머니의 온몸을 휘감듯 사납게 에워싸고 있었다. 이미 정신이 반 쯤 나가버린 어머니는 당신의 몸 어디에 불이 붙어있는지조차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어머니는 방안을 맴돌다가 방문까지 타는 것을 발견한 후에야 몸에 붙은 불을 끄며 간신히 뛰쳐나오셨다.
어머니는 다시 “불이야 여기 불났어요.”를 수없이 외치다가 결국 신작로에 거품을 토해내며 쓰러지고 마셨다. 바로 그 시각, 선선한때에 밭에 나가 비료를 주겠다며 나오신 동네 아주머니께서 이 모습을 발견하고는 어머니와 같이 “불이야!”를 외치셨다.
자전거를 타고 밭에 가시던 아저씨께서 이 모습을 발견했고 그 아저씨는 지체 없이 119를 불렀다. 이윽고 영원과 정읍에서 소방차가 달려왔고 구급차는 어머니를 태우고 정읍 아산병원으로 향했다. 집은 무엇 하나 건질 필요도 없이 초토화되고 말았다. 링거주사와 의사의 진료가 끝나자 어머니는 한숨 돌리셨는지 차츰차츰 안정을 찾아가고 계셨다.
“따르릉”
용인에 사는 나에게 전화가 온 것은 불이 나던 같은 날 아침 9시쯤이었다. 밥을 먹고 현장으로 일을 하러 가기위해 집을 나섰는데 부산에 사시는 누님한테서 전화가 온 것이다.
“응 나 누난데 어머니께서 사시는 집이 불이 나서 다 타버렸다고 하네. 그러니 내려가 봐라:
나는 일이 끝나자마자 어머니에게 달려갔다.
노랗게 그을린 머리카락이 그날의 참상을 알게 해주었고 화상을 입은 얼굴은 커다란 붕대를 친친 감고 계셨다.
급하게 달려온 막내 누나와 매형 그리고 내 바로 위의 형님과 작금의 현실을 어찌 돌파해야할지 의견을 나눈 시각은 토요일 새벽 두시쯤이었다.
“어머니는 아무 아들한테도 따라가지 않겠다고 한다. 동네에 빈 방이라도 하나 얻어주면 그냥 여기서 사실 요량인가 봐!”
막내 누나의 말이 힘없이 들렸다.
“그건 안 됩니다. 아들들이 네 명이나 되는데 그럴 순 없어요.
셋째 형님의 말씀이셨다.
“매형들 의견은 차라리 이 꼴 저 꼴 보지 말고 시설에 가셔서 살 수 있게 해 드리자고 그러신다네.” 막내 매형께서 여러 의견들을 청취한 요지가 그렇다고 말씀하셨다.
“안됩니다. 멀쩡한 아들들이 넷이나 되는데 어찌 그런데다가 모실 수 있겠어요? 그건 절대 안돼요.”
나의 말에 이의를 다는 형제들은 안계셨다.
집은 다 타버려 이미 잿더미가 되어버렸기에 여기에 눌러 살고자 해도 살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새로 집을 짓는다는 것은 나이가 이미 85세나 된 어머니께서 얼마나 사신다고 새로 집을 지어서 그것도 홀로 사시게 할 수 있겠느냐는 물음표에는 누구도 그러자고 할 수는 없었다. 여러 상황을 종합한 결과 어머니를 모시기에는 그래도 내가 제일 나아 보였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몇 년 전 어머니께서 우리 집에 오셔서 제가 모셨을 때 그때는 워낙 철이 없어서 우리 부부가 싸우는 모습을 많이 보여주고 말았습니다. 아마 어머니께서 그때 많이 실망하셔서 따라가지 않으려 하시는 것 같아요. 아마 하늘이 다시 한 번 저희 부부에게 기회를 주시는 것 같습니다. 잘 모신다는 말씀을 못 드리겠지만 하늘나라에 가시는 날까지 마음고생은 절대 시켜드리지 않겠습니다. 형님과 매형께서도 어머니를 설득 좀 해 주세요.”
8남매중 제일 막둥이인 내가 어머니를 모신다는 것이 처음엔 나보다도 아내가 더 받아드리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몇 해 전 2년 동안 어머니를 모시면서 충분하게 해 드리지 못했던 그 불효를(부부싸움이 심했음)우리 스스로도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어쩌면 하늘이 다시 한 번 기회를 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산산이 산화해서 깡그리 재가 되어버린 처참한 모습의 시골집을 보며 차라리 잘되었다는 푸념이 형제들 간에 들린다. 형님들이 어머니를 모시기 싫어서 막둥이인 내가 어머니를 모신다는 생각은 틀린 생각이다. 어느 자식인들 어머니가 소중하지 않은 자식이 있겠는가? 다만 조금은 더 여유가 있고 조금은 더 이 막둥이를 애지중지 하신 어머니였기에 그래도 다른 곳보다는 나와 사시는 게 어머니의 마음 밭을 평화롭게 꾸며드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엔 변함이 없다. 그리고 선뜻 어머니를 모시겠다고 말해준 아내에게도 다시금 고맙다는 말을 해주고 싶다.
운전을 하며 용인으로 돌아오는 동안 나는 다짐했다.
‘어머니! 그동안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어머니께서 하늘나라에 가시는 그날까지 편안하게 사실 수 있도록 최대한 편하게 해 드릴게요. 불이 나면 잘 산다잖아요. 그러니 이제 시골집은 추억 속에 묻어두시고 우리랑 알콩달콩 살아봐요. 아셨죠?’
첫댓글 부모님은 축복의 통로라고 하는데 어머님으로 인하여 복을 많이 받으시겠어요 ...겨울이 성큼온것 같아요 오늘 아침엔 손이 시렵네요 건강 하세요
한라산 성판악넘는데 떨었어요 덜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