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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가로등회 원문보기 글쓴이: 17기 주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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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별지명유래
남부동(南部洞) <안양1동>
교하동(안양5동) 북쪽에 위치한 마을로, 안양시가지 남쪽에 자리잡은 마을이라 하여 남부동(南部洞) 이라 칭한다.
일제강점기만 해도 찬우물(안양5동) 에서 흘러 내리는 샘물로 농사를 짓던 전형적인 농촌지역으로, 광복 직후에
벽산쇼핑 앞에 민가 수호가 뜨문뜨문 있었다가, 1960년대에 이르러 원예.청과 시장이 개설되고,
이어 숙박업이 번성하면서 급성장한 곳이다.
시대동 (市垈洞, 舊市場) <안양1동>
중앙동 동쪽으로 한국제지와 진흥아파트 사이에 자리잡은 마을이다.
안양의 중심부인데다가 지리적으로 군포, 의왕, 과천, 광명, 수암, 군자등이 인접해 있어 시장으로서는 최적지였다.
이곳에 시장이개시( 開市)되기는 1926 년 1월 28일이었고,
거래되는 품목은 농산물을 위시하여 축산물, 포목, 일용잡화까지 다양했다.
개시(開市)한 1년후(1927)의 년간 매출액을 보면 농산물 이 15만 6천원, 잡화가 21만 2천원, 그밖에 직물, 축산물, 수산물 등 모두 50여 만원에 달했다.
상인들은 개시 1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1927년 6 월 4일 단오절을 기해 대대적으로 기념식을 거행키로 했는데,
<동아일보> 1927년 6월 1일자에 안양시장일주기념(安養市場 一週紀念) 이란 제하에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경기도 시흥군 서이면 안양은 군의 중앙일뿐 아니라,
교통이 편리하고 따라서 산물도 상당함으로 동면에서는 작년중에 안양시장을 설치한 후 유래 성적이 비상히 양호하던 바
더우기 안양번영의 일책으로 오는 6월 4일(단오일)을 기하여 전시장(全市場) 일주년 기념식을 성대히 거행하리라 하며
여흥으로 예기의 가무와 오산청년(烏山靑年)의 소인극(素人劇) 외 안양소년척후대 주최의 축구대회 및 동화동요회 등이 있어서 많은 흥미가 있으리라더라"
1주년 기념식은 예정대로 동년 6월 4일 오후 2시부터 안양시장 내 광장에서 수천의 관객이 참석한 가운대 전대(田代) 발기인 대표의 식사와 조한구 서이면장의 경과보고,
신미(神尾) 시흥군수의 고사, 종문웅(안양금융조합 이사), 조희철(동아일보 시흥지국 기자), 엄기승(안양공보교 기성회장)의 축사에 이어
기녀들의 기무, 소인극등을 공연해 일대 성황을 이루었다. 안양시장측에서는 이후로도 씨름대회.그네대회 등을 개최하여 시장의 번영을 도모하였는데,
일례로 1933년 8월 25일, 8월30일, 9월 4일 등 장날을 기해 안양역 광장에서 안양씨름대회를 개최했고, 같은해 음력 7월 30일 장날부터 추석날까지
매 장날마다 씨름대회를 개최해 1등에 황소1두, 2등에 광목 1필이 상품으로 수여되었다.
그러나 이곳이 저지대로 홍수가 나면 안양천의 범람으로 침수가 되기 일쑤였고,
더우기 1961년 11월 6일 안양4동으로 시장이 이전하자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가,
옛 태평방직 자리에 대단위 아파트(진흥아파트)가 들어서자 번성되기 시작하였다.
1929년에 안양지방에서는 최초로 전기가 송전(送電)된 곳이기도 하다.
시대동(市垈洞) 이란 마을 명칭은 안양시장이 있었다는 연유에 기인한 것이며, 일명 구시장(舊市場) 이라 부르기도 한다.
중앙동(中央洞) <안양1동>
북부동과 시대동(또는 남부동) 사이에 위치한 마을로, 안양시가지 중앙에 있는 마을이므로 중앙동이라 칭하며,
이 마을을 기점으로 남쪽에 있는 마을이 南部洞, 북쪽에 있는 마을이 북부동(北部洞)이다.
중앙동이 오늘날처럼 안양의 중심지로 크게 번창되기는 조선조 제 22 대 임금인 정조가 1795년에 시흥현과 과천현 경계지점에
만안교를 가설한 후 화산능행의 노정(露程)을 과천-인덕원-수원에서 시흥(현 구로구 시흥 동)-안양-수원의 노정으로 바꾸면서
유래정 뒤(안양1동 674-67)에 안양행궁(安養行官)을 짓자 주변에 민가가 생기기 시작했고, 1905년 1월1일 경부선의 개통과 함께 안양역(安養驛)이 건설되자
교통의 요충지로 발달되어 1917년 7월에 호계 2동에 있던 서이면사무소가 안양1동사무소 옆으로(안양1동 674-271) 이전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안양금융조합과 안양연초조합 등이 속속 이 곳에 세워졌고,
광복후에는 시흥군청을 비롯하여 안양경찰서, 안양읍사무소등 공공기관이 들어서자 관가의 거리로 되었다가,
이들 기관이 1970년 대에 다른 곳으로 이전하자 뉴코리아호텔, 안양백화점,
그 밖에 상점과 유흥음식점이 붐벼 안양의 1번가로 자리를 굳혔다.
석수동(石手洞.石水洞) <안양2동>
안양유원지 일대에 위치한 마을로, 조선 시대에는 과천군 하서면 석수동(果川郡 下西面 石手洞)이라 칭했다.
관악산과 삼성산에 둘러 쌓여있어 석공(石工)이 많이 사는 마을이라 하여 석수동(石手洞)이라 했으나,
1930년대 초에 마을 앞 하천(삼성천)에 석수동 수영장이 개설되면서 석공들이 자취를 감추자 석수동으로 불리워지고 있다.
구전에 따르면 효성의 다리로 불리워지고 있는 만안교(萬安橋)와 교비(橋碑)도 이 마을 석공들에 의해 조성되었다고 한다.
양지동(陽地洞) <안양3동>
안양공고 주변에 위치한 마을로, 안양3동 1.2.3.4.6.25.26.27통에 속해 있다.
이 마을은 조선조 제 2대 정종의 7남인 수도군(守道君)의 증손 이공(지제부수) 이 처음으로 살기 시작한 이래 원주 원씨 등이 세거했다.
이 마을 명칭 에 대하여 양지(陽地), (陽智), (陽知), (陽至)등 문헌마다 다르게 기록되어 있는데,
이 마을의 지세가 양지바른 곳에 자리잡은 마을이므로 양지동(陽地洞)이라고 표기함이 옳다.
이곳은 1928년에 지금의 안양3동 부근에 안양산업사(安養産業社)란 안양 최초의 공장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광복직전에는 아사이학교가 설립 되었고, 광복 직후에는 안양중학교(1948), 안양공고(1949)등 많은 학교가 운집되어 있어 안양교육의 요람지로 변모되었다.
양지동은 안양을 대표하는 시인 김대규(金大圭1942- )의 출생지이며, 방송작가 이서구(李瑞求1899-1981), 소설가 채만식(蔡萬植1904-1950),
시인.평론가 정귀영(鄭貴永 1917- ), 시인 성기조(1934- )등 문인들이 오랫동안 이곳에 살며 문학 활동을 한 곳이기도 하다.
특히 채만식은 전북옥구 출신으로 <동아일보>.<조선일보>의 기자로 있으면서 1925년 단편 <<세길로>>로 조선문단지의 추천을 받고 문단에 데뷰했다.
<<태평천하>>, <<허생전>>, <<아름다운 새벽>> 등의 장편소설을 발표했는데,
1938년 <조선일보>에 연재한 <<탁류>>는 그의 대표작으로 현실을 비판하여, 풍류작가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했다는 평가 를 받고 있다.
채만식이 양지동에 이사와 살기 시작한 것은 1940년으로 그는 이해 6월 5일부터 8일까지와 6월 10일부터 11일까지 6일간 <매일신 보>에 안양복거기<安養卜居記>를 발표했다.
그 후 이듬해 3월에 양지동을 떠나 서울 광장리로 이사했다.
장내동(墻內洞.澹安) <안양4동>
조선시대에는 과천군 하서면 장내리라 칭했던 마을로, 진주 강씨, 전주 이씨, 원주 원씨 등이 세거하면서 취락이 이루어졌다.
이곳은 밤나무, 뽕나무 등이 많았던 곳인데, 밤나무 울타리안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장내동 또는 담안 이라 부르고 있다.
1961년 11월 6일 안양1동 소재 시대동에 있던 안양시장이 이전되면서 상권이 형성됨과 동시에 중앙로의 개통으로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였고,
오늘날에는 안양최대의 번화가로 변모되었다.
교하동(校下洞.敎化洞) <안양5동>
남부동과 주접동 사이에 위치한 마을로, 구 한말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지역이 소나무가 무성했던 곳이나,
일제강점 후 왜병의 군사훈련장으로 되었다가, 1927년에 안양초등학교가 설립되자, 학교주변에 민가가 점차 늘기 시작했다.
이 마을의 유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구전되고 있다.
조선조 중엽에 이 마을에 어느 가난한 부부가 외아들과 함께 살았는데, 넉넉하지 못한 살림이라 아들을 공부시킬 수 없게 되자,
그 아들이 서당 선생의 도움으로 무료로 글을 배워 노력 끝에 과거에 합격하였다.
이에 조정에서 그에게 높은 관직을 제수하려 했으나 끝내 사양하고, 오직 이곳 마을에 향교를 짓고 우매한 백성을 가르칠 것을 임금에게 아뢰자,
이에 감탄한 임금이 이곳에 커다란 집을 지어주고 교화당(敎化堂)으로 명명해 주었는데,
그 후부터 이 주변의 마을을 교화동(敎化洞)으로 부르다가, 1927년 안양초등학교가 세워지자 학교 밑에 위치한 마을이므로
교하동(校下洞) 으로 개칭되었다고 한다.
찬우물(冷泉洞) <안양5동>
주접동 북쪽으로 안양 5동 15통에 속한다.
충혼탑 아래 (안양5동 590-5)에 찬 샘물이 있어 그 인근을 찬우물 (冷泉洞)이라 칭하였다.
이 우물은 일제강점기만 해도 식수와 농업용수에 사용되었으며, 현재도 약수(식수)로 이용되고 있다.
이곳에 인구의 유입이 증가하기 시작한 것은 한국전쟁직후 난민들이 찬우물 위쪽에 정착하고,
우물 아래의 농경지가 택지로 변모되면서부터 인데,
현재는 안양5동 사무소를 비롯하여, 장미 아파트, 건흥연립, 원불교, 현충탑, 장안사 등이 있다.
소골안(小谷洞) <안양6동>
안양세무서에서 서쪽으로 수리산 계곡을 따라 형성된 마을로 광복 직 전까지만 해도 주접동 주민 3가구가 이주해 살던 한촌이었는데,
한국전쟁 직후 강원도 철원 등지의 난민들이 안양1동 소재 진흥아파트단지(구 태평 방직)에서 수용소 생활을 하자
당시 시흥군 안양읍장 조한구(趙漢九)의 주선으로 이들을 집단 이주시키면서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였다.
이곳 땅은 본래 서울출신 이해범(李海範)의 소유였는데, 이 토지를 조한구가 관리, 읍장으로 재직 중 소유주의 양해를 받아 이주를 성사시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마을은 수리산의 작은 골짜기 안에 자리잡은 마을이라 하여 소골안 (小谷洞)이라 칭하고 있는데,
일설에는 이곳이 예전에 나무와 숲이 우거져 골짜기안에서 소(牛)을 많이 기르던 곳이라 하여 소골안 (牛谷洞) 이라 했다고 하나,
지형상 소를 기를만한 곳이 못된다는 촌로들의 증언으로 보아 와전으로 생각된다.
1980년대부터 소곡(昭谷)으로 개칭해 사용하기도 한다.
(소곡새마을금고등) 이 마을 출신중에 시인 안진호(1944년생. 안양 상공회의소 근무)가 고향을 생각하며 쓴 소골안이란 시가 있다
주접동(住接洞) <안양6동>
교하동 남쪽에 위치한 마을로, 본래의 주접동은 현재의 안양6동, 안양7 동, 안양8동을 통칭했으나
도시화의 추세로 인구가 증가하자 분가 또는 분동으로 분리되자
현재는 안양상공회의소, 만안구청 주변을 일컫는다.
이 마을은 정조와 인연이 깊은 곳이다. 정조는 양주 배봉산(拜峯山)에 있던 부왕(사도세자)의 묘를 1789년 수원 화산으로 천묘한 후,
처음에는 서울-과 천-인덕원-사근(현의왕시)을 잇는 노정을 택했다가,
1795년에 안양에 만안교를 가설한 후부터 서울-시흥(현 구로구 시흥동)을 잇는 시흥노정(또는 금천노정)으로 변경하고
아울러 안양 1동에 안양행궁을 짓고, 안양경찰서뒤 동아아파트 부근에 정각(亭閣또는 政閣)을 세워 능행과 환궁 때 잠시 쉬어 갔다고 한다.
그후부터 이 마을을 주접동(佳接洞) 이라 불렀다고 한다.
보통 주젭이라 칭하며, 나주 정씨, 삭녕 최씨, 상산 김씨, 함평 이씨, 전주 이씨등이 오래동안 세거한 마을로,
예전에는 안양변전소 부근을 아랫말, 만안구청 부근을 가운데말, 성문중학교 아래(동)를 내곡동, 중앙병원 부근을 명학동, 덕천국교부근을 벌터(坪村)라 각각 칭하였다.
광복 직전만 해도 이상의 5개 마을의 민가라야 불과 100여호에 지나지 않았으나,
1960년대(?) 중앙로가 개설된 후 시흥군청(전 만안구청,현재 만안여성복지회관 ), 안양시청, 안양상공회의소 등이 들어서면서 번창되기 시작하였다.
만안구청 남쪽은 창녕 성씨의 분묘가 많았는데 도시화로 이장 또는 화장되어 현재는 모두 택지로 조성되어 민가가 들어섰다.
이곳에 있던 묘 중 세상에 알려진 인물로 성후영(1571-1626)이 있다.
임진왜란 때 아버지가 해를 당하자 대신 왜병의 칼을 맞아 장(腸)이 튀어나와 거의 사경(死境)에 이르렀을 때 부인 심씨의 구혈로 살아 일생을 폐업하고
두문불출하고 자취를감추어 스스로 서호처사(西虎處士)라 칭했다.
덕천마을(德泉洞) <안양7동>
주접동 동북쪽에 있는 마을로 예전에는 주접동과 한 마을이었다.
이곳에 사람이 처음으로 살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 초에 시흥시 정왕동 출신인 원정상 (안양여고 원종면 선생의 증조부로, 묘가 안양중앙병원 뒤 에 있었다가
1990년 5월에 화성군 매송면으로 이장됨)이 분가를 하면서 지금의 안양7동 213에 정착했고,
이어 전주 이씨, 창령 성씨등이 세거하면서 취락으로 발달되었다. 이곳은 1960년대만 해도 대부분의 지역이 농경지였었다.
예컨대, 명학 역과 주접지하도에 이르는 경부선 철도변은 아카시아 동산이었으며,
안양 냉동사(안양7동 196-15)자리는 농경지(논), 주식회사 삼풍(안양7동 199)자 리는 논과 포도밭,
대영모방주식회사(안양7동 196-12)자리는 잎두밭, 동화 약품공업주식회사(위치, 안양 7동 189)자리는 농장이었다.
이 마을이 오늘날처럼 번창하기 시작한 것은, 토박이 원종만(안양7동 138-32, 1932- . 원정상 증손)의 공로가 큰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원씨는 허허벌판인 이곳에 덕천슈퍼건물을 신축한 후, 7동새마을금고(안양7동 130-27)를 비롯하여 덕천국민학교(안양7동 192-5),
덕천우편 취급소 등의 기관과 유수의 공장을 유치하는데 공헌했다.
이 마을 본래의 이름은 넓은 벌판에 있다고 하여 벌터 (坪村)라 칭했는데,
1977년 7월 대홍수 때 안양천의 범람으로 많은 수재민이 발생하자 수재민촌(水災民村)으로 불리웠고,
이 해 9월에 안양의 시내버스(삼영운수)가 이 곳에 버스노선을 개설하면서 버스 안내판에 수재민촌으로 명기하자,
당 시 이 마을의 새마을지도자였던 최돈세(崔燉世)가 중심이 되어 긴급 주민회의를 개최한 결과 수재민촌 이란 마을명이 좋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장차 2세 교육을 위해서도 바람직스럽지 못하므로 차제에 새로운 마을명을 짓자는 제의가 많아,
큰 하천인 안양천에 위치해 있다고 하여 큰 德 자에 내 川 자를 취해 덕천마을 (德川洞)으로 명명했다가,
안양천의 오염으로 이미 지가 좋지 않다는 여론에 따라 1년만인 이듬 해(1978) 9월에 이곳 어린 이들이 샘솟듯이 씩씩하게 자라서 나라에 큰 일꾼이 되라 는 뜻으로
큰 德 자에 샘 천(泉) 자를 취해 덕천마을 (德泉洞)로 개칭하고 마을입구에 덕천마을 이란 표석을 설치했다.
골안(谷內洞) <안양8동>
주접동 서남쪽에 위치해 있다. 본래 주접동에 속한 마을이었으나 1962 년에 성결교신학교(안양동 산 1417-1),1971에 성문여중(안양동 산 117-1) 등이 설립되면서
급격한 인구의 증가로 주접동에서 분리되어 골안(谷內洞)으로 불리워지고 있다.
골안(谷內洞)이란 관모봉(성문여중 뒷산) 골짜기 안에 형성된 취락이란 뜻이다.
이곳엔 일찌기 전주 이씨와 여흥 민씨가 세거하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명학동(鳴鶴洞) <안양8동>
주접동 남쪽에 위치한 마을로, 평산 신씨, 함평 이씨 등이 배판 했다고 전해진다.
예전에는 명학국교 아래에 사람이 살기 시작하다가 1974년 서울-수원간 전철개통과 동시에 명학역의 건설, 1976년의 명학국교(위치 안 양8동 349-1), 중앙병원(위치 안양8동 산 160) 등이 들어서면서 인구가 급격히 증가했다.
구전에 따르면 조선 인조 때 좌의정을 역임한 심기원(沈器遠1644)이 그의 부친 심간(沈諫)의 묘를 비산1동 수푸루지(林谷洞) 뒷산에 묘를 쓰려고 땅을 팠는데,
돌 밑에 학(鶴)이 두 마리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 중에 한 마리는 양명고등학교 옆에 위치한 오미산(鳥尾山) 뒤로 날아갔고,
다른 한 마리는 안양경찰서와 명학국민학교 사이에 있는 바위에 날아와 앉더니 슬피 울고는 어디론가 날라갔다고 한다.
그 후부터 이 바위를 학이 울었던 바위라 하여 명학바위라 칭했고, 마을 이름도 바위 이름을 취해 명학동(鳴鶴洞) 이라 부른다고 한다.
상록마을(常綠洞) <안양8동>
안양8동 11통 지역으로, 골안 동쪽에 위치해 있다.
예전에는 야산으로 돌이 많았던 곳인데 푸른 숲으로 둘러쌓인 마을이라 하여 상록마을 (常綠洞)이라 칭했다고 한다.
1990년 10월 경부터 성도, 대신, 일진, 한진, 삼성빌라 등이 들어서면서 주택지로 변모되었다.
이곳은 수리산 삼림욕장의 시발지가되며, 지대가 높아 선풍기가 없어도 한여름을 시원하게 보낼 수 있을 만큼 최적의 주택지로 손꼽힌다.
능골(陵谷) <안양9동>
현 안양서여자중학교(안양9동 1055-3) 뒷산이 흡사 陵의 활개같은 형상을 하고 있으므로 능골(陵谷)이라 칭한다.
일설에는 조선조 제21대 영조의 아들로, 속칭 뒤주대왕(사도세자)이 생전에 내가 죽으면 鳶을 띄워 떨어지는 곳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하며 연을 띄웠는데,
그 후 신하들이 연 떨어진 곳을 살피니 그 곳이 바로 능골이었다는 것인데,
그 후부터 능 후보지였다는 연유로 능골 (陵谷)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능골은 원주 변씨가 배판한 이래 채씨, 김씨등이 오랫동안 살아왔는데,
일제 강점기만 해도 불과 15호 남짓한 작은 촌락이었으나,
삼영하드보드 (안양3동774, 1946년 설립, 선창산업주식회사로 개칭), 삼진알미늄, 한국 아트제지 등 유수의 공장이 들어서자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였으며,
이어 안양서여자중학교, 신안국민학교(안양3동 730, 1977년에 설립), 신안중학교(안양3동 728, 1980년에 설립) 등 교육기관이 속속 들어섰다.
1986년에 는 삼진알미늄과 한국아트제지 자리에 프라자아파트가 신축되어 마을이 일신되었다.
보통 병목안을 웃능골이라 부르는데 반하여 이 마을을 일컬어 박능골이라 칭한다.
마을 주민들에 따르면 1979년 안양서여자중학교를 신축할 때 대리석으로 된 대형십자가가 출토된 것을 이 학교 화장실 부근에 묻었다고 한다.
병목안(後頭尾洞) <안양9동>
새마을교에서 안양 채석장에 이르는 지역으로, 마을의 지세가 병목처럼 마을초입(새마을교)은 좁으나 마을에 들어서면 골(谷)이 깊고 넓다고 하여 병목안이라 부르고 있는데,
조선시대에는 수리산 뒤에 자리잡은 마을이라 하여 뒤띠미 (後頭尾洞)라 칭했고,
행정규역 명칭으로는 과천군 하서면 후두미동으로 불리웠다. 그런데 후두미동의 두 자는 豆와 頭를 함께 사용하다가 후대에 내려오면서 頭로 통일된 것으로 보이며,
<<晋州 柳氏世譜>>(1982)에는후둔(後屯)으로 기술되어 있으나 두(頭)의 오기(誤記)로 보인다.
병목안에 사람이 최초로 살기 시작한 것은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촌로들의 증언과 이 곳에 소재한 묘소 등을 살펴보면,
대체로 조선조 숙종 년간에 진주 류씨에의해 세거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즉 인조년간에 오위도총부 부총관을 지낸
류적(1597-1638)의 둘째 아들인 류명재(柳命才) (1623-1703)의 묘를 이곳에 쓴 후 부터인데,
류명재는 자가 유도(有道), 호가 사재(思齋) 로 통정대부에 올라 안산군수와 영천군수 및 첨지중추부사를 지낸 후 81 세를 일기로 세상을 하직한 인물이다.
진주류씨의 묘는 류명재외에 류명재의 아우 류명웅(柳命雄,1636-1722, 돈지돈령부사 역임. 1973년에 화장)을
비롯 하여 류명재의 큰 아들, 손자 및 조선조 영조 때의 화가인 강세황(姜世晃,1713-1791)의 처(晋州柳氏) 묘(후에 진천으로 이장) 등이 있었다.
진주류씨 이후 병목안에 세거한 성씨는 원주 원씨, 순창 조씨, 달성 서씨 등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병목안을 기점으로 서쪽지역을 새마을, 서남쪽 지역을 창박골, 남쪽지역을 담배촌이라 각각 칭한다.
구전에 따르면 이 마을에 진주 류씨가 부자로 살았는데, 날마다 찾아오는 食客으로 고민하고 있던 차,
하루는 시주하러 온 스님에게 그 방도를 물었다고 한다.
이에 스님이 이르기를 마을초임(새마을교)산밑에 묘를 쓰고 탑을 세우시오 라고 이른 후 어디론가 홀연히 사라져가다고 한다.
그 후 류부자의 하인이나 가족이 죽으면 스님이 일러준대로 묘를 쓰고, 그 옆에 탑(돌탑)을 세웠다는 것인데 이렇게 정성을 들이자
과연 류부자 집에 찾아오던 손님(식객)의 발길이 끊겼을 뿐만 아니라,
진주 류씨가 일거에 패가했다는 것이다.
이는 병목안 동쪽에 있는 뉴골든아파트 뒷산이 풍수로 보아 배형국(舟形局)이므로 산 끝에다 묘와 돌탑 등 무거운 것을 쌓았으니 배가 뒤집혀 패망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새마을교 옆에 있던 돌탑은 손을 대거나 치우면 병목안 주민들이 위해 를 당할지 모른다는 속설 때문에 그래도 있었다가,
한국전쟁 때 미군들에 의해 어디론가 실려갔고,
묘는 1980년대 초에 대부분 화장되었다. 마을 동남쪽에 있던 안양채석장은 1930년대 초에 개장되었다가
1989년에 폐장 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차응설이 이곳에 야학을 세워 문맹퇴치에 헌신 하기도 하였다. 안양3동 15통.17통.18통.24통에 속해있는
병목안에서는, 일제 중엽까지도 창박골 주민들과 함께 해마다 음력 7월 1일이면 창박골 앞산(약수 터 입구)에서 산신제를 지냈다.
새마을 <안양9동>
병목안 주민들이 농사를 지을 농경지로 처음에는 신부골(新富谷)로 불리워 오다가
1969년에 주택단지가 조성되면서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새마을로 개칭되었다.
시흥군 안양읍 당시 이곳에 안양 공설운동장 설치 계획을 세웠다가 협소하다 하여
신안양리 신촌(현 석수동 럭키아파트 자리)에 조성되었다.1988년에 양지초등학교가 설립되었다.
안골(安谷, 內谷) <안양9동>
담배촌 북서쪽으로 안양9동 13통에 속해 있으며, 청주 한씨와 하동 정씨의 세거지로 알려지고 있다.
이곳은 조선시대 도자기를 굽던 곳으로 마을의 지세가 아늑하고 물맛이 좋아 사람살기 좋은 곳이라 하여 안골 이라 칭한다고 한다.
또 수리산 골짜기에 자리잡은 마을이므로 안골 이 라 칭한다는 설도 있다.
1970년대에 이르러 서울대 국문과 장덕순(張德順1922- )교수가 이곳 윤모씨의 주택과토지를 매입해 요지(窯地)를 설치했다.
율목동(栗木洞) <안양9동>
안양 3동 11통.12통에 속해 있는 마을로 노적봉 밑에 위치해 있다.
밤 나무가 많은 곳이라 하여 율목동(栗木洞) 이라 칭하고 있는데,
일제강점기인 1933년과 1934년에는 동아일보사와 그 자매지인 신가정<<新家庭>>(현재의 여성동아 전신)
주최로 전국부인 밤줍기대회가 열릴만큼 밤의 명산지로 유 명했던 마을이다.
당시 <동아일보>에 보도된 밤줍기대회 관련기사 중 그 일부를 전재한다 -풍부한 상품 재미있는 경기- "신동아사 신가정부 주최로
제1회 부인습률대회를 개최하게 되었습니다.
하늘높고 바람맑은 요즈음 가을날 하루를 이용하여 우리 부녀들이 한 곳에 모여 유쾌한 시가을 보낼 수 있는 기회가 왔습니다.
이번에 여는 이 습율대회는 다만 습율 그것을 목적함이 아니라 이렇게 부녀들만 여러 백만 모이는 가운데 서로 교제하고 친목하여
우리 부녀들의 기운을 돋우고 저 함에 더 큰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그 날 하루를 유쾌히 놀게 하기 위하여 재미있는 유희도 있겠고, 또 습율기타 여러가지 쉬운 경기들이 있겠으며
그 위에 상품을 많이 준비하여 둔것만큼 이번 대회처럼 재미있는 모임이 없을 것을 기약하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여러분 가정부인 되신이들은 이 대회에 참가하여 시원한 들판으로 나오셔서 집안에서 받은 오랜 동안의 피로를
이날 딱 하루에다 씻어버리시고 그리하여 다시 새 기운을 얻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아래 대회의 날짜와 장소와 그밖에 여러가지 규정을 발표합니다"
[ 대 회 규 정 ] =
날 짜 : 10월 1일(일요일)
- 곳 : 안양 - 모일때: 용산역
- 모일시간 : 오전 8시 반
- 떠날시간 : 오전 9시 10분(안양에는 동 49분) -------- 이 하 생 략 ----------- 동아일보 1933.9.26 밤나무 숲이었던
이곳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한국전쟁 직후인 1952년 당시 시흥군 안양읍에서 강원도 평강(平康)등 난민들을 집단 이주 시키면서부터 이다.
1977년 7월 8일 오후 6시부터 10시까지 불과 4시간 동안 쏟아진 집중호우로 해발 110m의 노적봉이 산사태로 이 마을 주민 8가구 29명이 몰사(沒死)하였다.
창박골(蒼岩洞) <안양9동>
안양9동 10통에 속한 마을로 병목안 서남쪽에 위치해 있다.
이마을 유래는 첫째, 이곳에 많은 바위색이 유독 푸른 심청색(深靑色)이라 하여 창박골(蒼岩洞)이라 불렀고
골짜기를 창암곡(蒼岩谷)으로 칭했다. 둘째, 안양예비군 교육장 서쪽에 큰바위가 하나 있는데
이 바위에 구멍이 뚫려있어 흡사 창(窓)과 같다하여 “창바위(窓岩)”라 불렀고
이 바위 안쪽을 "창암골" 바깥 골짜기를 "창박골(蒼外谷)" 이라 각각 칭했는데,
이곳에 민가가 생기면서 마을 명칭도 창박골(蒼外谷)로 되었으나
현재와 같이 창박골(蒼岩洞)으로 쓰이기 시작한 연유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산 골짜기에 위치한 이곳은 1970년대 병목안, 담배촌 일대가 시민의 휴양지가 되면서 번창하기 시작했고
이어 1985년 석산연립과 이어 안양서여중이 들어서며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였다.
일제 강점기만 해도 마을에서는 음력 7월 1일이면 참박골 앞산(약수터입구)에서 산신제를 지냈다.
구룡마을(九龍洞) <석수1동>
관악역 동쪽에 자리잡은 마을로 한국전쟁(1950) 직전까지만 해도 동국실업(석수동165, 1968년 설립) 주변에 10여 호의 민가가 있었고,
그 밖의 지역은 밤나무, 참나무 등 잡목이 우거져 있었다.
9.28 수복 후 당시 시흥군 에서 난민들을 정착 이주시킨 후부터 취락이 이루어졌다.
그 후 동국실업 등의 공장과 관악역(冠岳驛. 석수2동 241)이 생기면서 번창되기 시작했다.
구룡마을이란 지명은 석수1동 3통 노인회관 자리가 풍수로 보아 좌청룡(左靑龍)이 완연한 명당지지(明堂之地)라 하여
구룡목이라 칭한데서 연유하고 있다.
구전에 따 르면 이곳이 명당터라 조선시대 어느 왕비의 묘를 쓰려다가 조산이 약하다 하여 동구능에 썼다는 고사가 전해지고 있다.
삼막골(三幕洞) <석수1동>
밀양박씨, 진주하씨, 청송심씨 등의 누대 세거지로, 진주 하씨의 집성촌 이라 하여 보통 하씨촌(河氏村) 으로 불리워오고 있다.
이 마을에 진주 하씨가 처음 살기 시작하기는 진주하씨 문효공파(文孝公派 세종때 영의정을 역임한 河演을 말함)
후손인 하우청(河禑淸1561-1622 호는 낙선재이며 의금부도사를 역임)의 묘를 이곳 뒷산에 쓴 후에 그의 후손들이 묘하에 세거하면서 부터이다.
삼막골 (三幕洞)이란 마을 명칭은 통일신라 시대의 고승인 원효대사(元曉大師 617-686), 의상대사(義湘大師 625-702), 윤필거사(尹弼居士)의
세 성인이 삼성산에서 수도하며 유유산업 부근에 제1막을 짓고, 기아의 집(구 안양관광호텔)뒤 수도사(修道寺석수1동 241-40)부근에 제2막을 짓고,
제 3막은 석수1동 산10-1에 지어 이를 삼막사(三幕寺)라 칭했는데,
그 후 그 아래에 민가가 들어서면서 사찰명을 취한 것이라고 한다.
일설에는 이상의 세 성인이 이 마을에 처음 살아 각자 1막씩을 짓고 살았다 하여 삼막골(三幕洞)로 칭했다는 것이나,
옛 읍지나 지리지 등에 는 고려말엽 불교계를 대표하는 지공(?-1363), 나옹 (1320-1376), 무학 (1327-1405)이
삼성산에서 수도했다는 연유로 붙여진 지명이라고 하나 어느 설이 옳은 지는 알 수가 없다.
안양소년원과 구룡마을 사이에 위치 한 삼막골은 삼막천을 경계로 동쪽지역(안양소년원방향)을 웃말, 서쪽지역을 성재이라 각각 칭하고 있다.
이 마을은 구한말(1898-1904) 지방관리들의 탐학과 한국의 주권이 외세 (일본)에 의해 박탈되어 가자 분연히 일어서 농민운동을 주도한 하영홍이 태어난 곳이며,
1901년에는 하영흥이 선교활동을 할 만큼 일찌기 기독교가 전래되기도 하였다.
또 마을 어귀에는 하우청의 묘가 있다.
마을에서는 해마다 음력 7월 1일과 10월 1일에 성재이에 있는 느티나무(마을에서는 아래 서낭할아버지로 통칭)와
웃말에 있는 향나무(웃말 서낭할머니로 통칭)앞에서 나무제를 지낸다.
꽃챙이(花倉洞.串昌洞) <석수2동>
충훈부 동북쪽에 있다. 이곳은 조선조 말엽까지만 해도 미곡을 저장하는 창고와 철쭉밭이었으나,
일제강점기 초에 광명시 가학동 공석골 출신 성만제(成萬濟)(1890-1959, 시흥시 미산동 구시미에 묘가 있음)씨가
이 마을에 처음으로 정착한 후 벗나무등을 식재하면서 각종 꽃이 재배되기 시작했다. 그 후부터 꽃과 창고가 있는 마을이라하여 꽃챙이 (花倉洞)이라 칭하고 있다.
그런데 <<조선지지자료>> 경기도 시흥군편에 곶창(串昌) 이라고 기재된 것으로 보아
예전엔 이곳 일대가 안양천변에 위치한 곳(串, 바다에 뽀죽하게 내민 땅)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마을 내에는 효종 때 예조(禮曹) 및 병조(兵曹)판서를 역임한 박서 (1602-1653)와 일제 강점기 만석꾼으로 자본가였던 김만식(金潤植)의 묘가 있다.
벌터(坪村) <석수2동>
충훈부 북쪽에 위치했던 마을. 서쪽으로는 광명시 일직동 자경리와, 북쪽으로는 서울시 구로구 시흥동 박미마을과, 동쪽으로는 꽃챙이 마을과 각각 경계를 이루고 있었다.
허허벌판 모래땅 위에 자리잡은 마을이므로 벌터라 불렀는데, 일명 벌말(坪村)이라 칭하기도 하고,
또 일제 때는 밤의 명산지라 하여 밤골로 불리우기도 하였다. 이 마을에 최초로 세거한 성씨는 진주 하씨로 알려지고 있다.
석수1동 삼막골에 살던 진주 하씨 문효공(文孝公)하현(河演) 후손들이 이곳으로 분가를 하면서 부터 취락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15호 남짓했던 이 마을은 임씨가 1호, 이씨가 1호이고 그 외는 모두 진주 하씨였었다.
벌터마을은 풍수로 보아 배형국(舟形局)이므로 우물을 파면 망한다는 속설이 있어 마을 내에는 우물을 파지 않고 식수는 안양천에서 물을 길어다 마셨다고 한다.
그 후 일제강점기 말엽에 죽어도 함께 죽자는 일념으로 마을 중앙에 우물을 파기시작하자 집집마다 우물을 팠다고 한다.
1960년대 초에 럭키아파트 일대에 있던 경기도립종축장이 이곳으로 이전하자 마을이 폐동되었는데,
마을 주민들은 마을 안에 우물을 파지 말아야 하는데 지신(地神)이 노해서 마을이 망했다는 말을 지금까지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경기도립종축장은 이곳에 10여년간 있었다가, 1970년대에 이르러 경기도 광주군 실촌면 삼리 산 26-1로 이전하였고,
그 후 모 재단으로 넘어갔다가 다시 개인에게 불하하여 현재는 황량한 벌판으로 있다.
폐동전만 해도 벌터 주민들은 해마다 음력 10월 1일이면 마을 중앙에 있던 향나무 앞에서 마을의 안정과 무해 및 풍년을 기원하는 당제(堂祭)를 지냈다.
신촌(新村) <석수2동>
관악역(冠岳驛) 서쪽으로, 만안교노변(萬安路 路邊) 옆에 있는 마을. 조선조 말엽까지도 대부분 농경지였으나 일제강점기 이후 새로 주택이 들어서자 신촌(新村) 이라 칭했다.
이곳은 1956년 7월에 수도영화주식회사(首都映畵株式會社)에 의해 대규모 촬영소인 안양촬영소 (대지 2만 2천여평)를 건설하여
한국의 허리우드로 불리워질 만큼 한 때는 한국영화의 메카 (Mecca)였었다. 천연광선이 충분하고 우량(雨量)이 적은 곳이어야 한다는 조건이 이곳을 적지(適地)로 택하게 된 것이다.
신촌마을은 1956년 수도영화주식회사가 설치된 후, 안양예고 등의 교육 기관과1974년 관악전철역이 건설되자
관악아파트, 무림아파트, 산정연립 등이 건립되어 급격한 성장 추세를 보였다.
이곳에는 안양문화의 상징인 만안교가 1980년에 이전, 복원되었다.
연현(鳶峴) <석수2동>
서울시 구로구 시흥동 박미마을과 접경지역으로 석수 전철역(석수동 422-3) 주변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 초입인 안양육교 부근(서리재고개)이 풍수로 보아 솔개가 날개를 편 형세라 하여 연현(鳶峴) 이라 부르고 있다.
이곳은 1950년대만 해도 대부분의 지역이 농경지였으나 태양당인쇄(석수 동 433-1, 1968년 6월 28일 창립), 동아제약(석수동 410, 1972년 설립),
삼흥유지등의 공장과 석수역이 생기면서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였다. 안양 최북단에 위치한 마을이다.
능골(陵谷) <박달2동>
범고개마을 서남쪽으로 시흥시 목감동 더푼물(新村)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5호 남짓한 작은 취락이다.
이곳은 일제강점기 초만 해도 안양에서 안산, 소래 등을 가자면 이곳 앞(범고개)을 거쳐야 했으므로 강도.도둑이 득실거렸다고 한다.
마을의 유래는 이 마을 남쪽 약 200m 지점의 논 가운데에 섬같이 생긴 큰 무덤이 있어 애능(兒陵)이라 칭한데서 기인하고 있는데,
이 무덤은 1988년에 김모씨에 의해 경지 정리되었다. 주민의 대부분은 농업으로 생계를 잇고 있으며,
행정구역상으로는 안양시 박달동에 속하나 생활은 이웃 시흥시 목감동 더푼물 주민들과 함께 한다.
마을 초입에는 일우주철(박달동 753-11, 1989년에 설립)과 세원화학(박달동 753-9, 1972년에 설립) 등의 공장이 있고,
마을에서는 1970년대 까지 만 해도 범고개 주민들과 함께 해마다 음력 10월 2일에 범고개 요골에서 산신제(山神祭)를 지냈다.
동수암(東秀岩) <박달2동>
작대들에 소재한 골짜기 중 가장 큰 골짜기에 있던 마을. 고려 때 창건된 동수암사(東秀岩寺)란 사찰이 있었는데,
사찰 주변에 민가가 생기면서 사찰명을 취해 동수암(東秀岩) 이라 칭한다고 한다.
일설에는 옛 시흥군 수암면 동쪽에 있는 마을이므로 동수암 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 마을은 파주 염씨와 광주 이씨 등 15호 남짓한 취락이었는데, 일제 강점기에 이곳 일대가 군용지에 편입되면서 폐동되자,
이곳에 살던 주민들은 대부분 인근지역인 시흥시 목감동 더푼물(신촌)과 박달동, 능골로 분산 이주했다.
미름물 <박달2동>
샛터말 남쪽에 위치해 있었다. 마을 주민들이 식수로 사용하는 대동우물을 미름물이라 했는데, 마을명도 우물명을 취해 미름물 이라 칭했다.
이 마을에 세거한 성씨는 최씨, 김해 김씨 등으로 알려지고 있다. 5호 남짓한 작은 취락이었으나,
일제 때 평양육군병기창 안양분창이 들어서자 폐동 되었다. 이곳에는 엄성(1575-1628, 응교), 엄황(1580-1653, 영흥부사), 엄정구 (1605-1670, 한성좌윤)등 영월 엄씨 선대의 묘가 많았다.
범고개(虎峴洞) <박달2동>
친목마을 남쪽으로, 박달로변에 위치해 있다. 범고개(虎峴) 아래에 자리잡은 마을이므로 고개이름을 취해 범고개 (虎峴洞)라 칭한다.
예전에는 이곳 남쪽 (현재 군용지에 편입됨)에 웃말(上村)이란 마을이 있었다가 어느 부자가 화재로 가산을 탕진하자 마을을 떠난데
이어, 마을 주민이 범에게 잡혀 죽자 사람 살 곳이 못된다고 하여 모두 지금의 위치로 이주, 정착했다고 한다.
이 마을에 최초로 정착한 성씨는 나주 임씨와 안동 권씨로 알려지고 있으며,
번창하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에 군용지의 건설로 안양-안산간 도로가 개설된 후 1972년 동아유리공업주식회사(박달동 620-5)등을 시 발로 각종 공장이 들어서면서부터 이다.
마을에서는 십수년 전까지만 해도 음력 10월 2일에 요골초입에 있는 소나무 앞에서 산신제를 지냈다.
붓골(筆洞.富谷) <박달2동>
공군아파트 서쪽에 있는 마을로, 능성 구씨가 배판한 이래 안동 권씨, 전주 이씨, 김해 김씨등이 세거해 40여호의 촌락을 이루다가,
일제강점기에 군용지(軍用地)가 건설되면서 폐동되었다.
이 마을은 예로부터 물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농지 또한 비옥해 연연세세(年年歲歲) 풍년이 들자 인근의 사람들이 부자가 많이 사는 고을이라 하여 부골 (富谷)이라 불렀는데,
1930년대 일본인들이 한자로 표기하면서 붓골 (筆洞)로 개칭되었다고 한다.
이 곳에는 임진왜란 때 충신으로 유명한 구만의 묘와 정려각(族閭閣)이 있었으나, 일제때 군용지에 편입되어 다른 곳으로 이전되었다.
구만은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내다가 선조때(1591) 사화(士禍)로 사면되었고, 이듬 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천조랑(天曹郞)에 임명되었다. 이때 왜란을 피하기 위하여 어머니와 할머니를 모시고 평안도 용만(龍灣)으로 향하던 중,왜병 수천명을 만나 적의 목을 무수히 베었으나 힘이 쇠하여져 적에게 잡힌 몸이 되었다.
그러나 적에게 잡혔어도 굴하지 않고 적을 꾸짖으니 왜병은 끝내 그를 죽이고 말았다.
다행히고 어머니와 할머니는 화를 면하게 되었다.
그 후 유시와 남조가 이르기를 구만은 충성과 효성이 지극하니 그 충효는 가히 일월이 서로 빛을 다투는 것과 같도다 라고
상소하여 숙종 34 년(1708)에 정려(族閭)를 내려 이곳(당시의 지명은 금천현 박달리)에 비각을 세웠다.
삼봉마을(三峯洞) <박달2동>
삼봉 기슭에 위치한 마을로, 1950년대 말부터 비닐하우스 재배가 시작되면서부터 취락이 이루어졌다.
예전에는 논 가운데에 큰 산소가 있어 일명 섬마을이라 불렀는데, 마을 주민들은 이 산소를 말무덤이라 칭했다.
1970년에 주식회사 삼애기업(박달동 604-1)과 삼신아파트가 건설되면서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였다.
샛터말(新其村) <박달2동>
조선 중엽에 영월 엄씨가 새로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한 마을로 그 후 달성 서씨, 김해 김씨 등이 세거했다.
일제강점기에 군용지가 건설되자 폐동 되었다. 동수암과 붓골 사이에 있었다.
선녀골(仙女谷) <박달2동>
곤두레미고개 밑에 있던 마을로, 이곳 골짜기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수리산 낙맥인데다가 습한 곳이라 안개가 많이 생겨,
흡사 선녀가 사는 고을 같다하여 선녀골 (仙女谷)이라 칭했다.
선녀골은 조선조 태종(太宗)의 11남인 후령군(厚寧君)의 묘를 이곳에 쓴 후,
그의 후손들이 묘하에 세거 하면서부터 취락이 형성될 만큼 전주이씨령군파가 집성(20여호)을 이루었다.
그 후 일제강점기에 평양육군병기창 안양분창이 건설되면서 폐동되었고, 후령군의 묘는 수원시 장안구 이목동으로 이장되었다.
웃박달리(上博達里) <박달2동>
조선시대 박달동(리)에는 모두 12개의 자연취락이 있었는데, 그중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마을이 웃박달리였다고 한다.
선녀골 동쪽에 있던 웃박달리는 파평윤씨, 김해 김씨 등 15여 호가
일제강점기에 군용지(평양육군병기창 안양분창)가 건설되면서 폐동되었다.
수푸루지(林谷洞, 林川) <비산1동>
비산사거리 동북쪽에 위치한 마을. 이곳은 조선조 인조 때 좌의정을 역임한 심기원(沈器遠 ?∼1644)이 그의 부친인 심간(沈諫. 1560∼1624. 청풍군수 역임)이 죽자
이 마을 뒷산에 예장한 후 그의 후손인 청송 심씨가 묘하에 세거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 뒤 수원 백씨, 고령 박씨, 곡부 박씨, 전주 이씨, 안동 김씨 등이 살기 시작하였다.
이 마을은 깊은 골짜기에 나무와 숲으로 둘러싸인 고을이라 하여 ‘수푸루지(林谷洞)’이라 칭하였다고 한다.
또 마을 앞으로 큰 하천(안양천, 임곡천)이 흐른다 하여 ‘수풀내(林川)’라 부르기도 하였다.
수푸루지는 1978년 대림대학(비산동 526번지의 7호)이 건립되고, 이어 비산동 신시가지가 형성되면서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였다.
예전에는 수푸루지 내에서도 동쪽지역을‘건너말’, 서쪽지역을 ‘아랫말’, 북쪽지역을 ‘웃말’이라 칭했다.
마을에서는 해마다 음력 10월 2일에 평화보육원 동쪽에 위치한 당봉 정상에서 산신제(山神祭)를 지낸다.
샘모루(泉隅) <비산2동>
삼호아파트 및 희성촌과 임곡아파트 사이에 있다.
이곳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초에 시흥시 능곡동 뒤일에 살던 안동 권씨 정승공파 후손 한 사람이 분가해서 살다가 아들 5형제를 두었는데,
이들이 모두 이 마을에 정착했으나 크게 번성하지 못해 5호의 작은 취락을 이루다가 그 중 2호가 외지로 떠났고,
현재는 3호가 남아있다. 샘모루란 마을명은 구름울(雲谷洞) 초입 산 모퉁이에 샘물이 있는데, 그 주변에 있는 마을이란 뜻이다.
안날미(內飛山) <비산3동>
안양종합운동장 북쪽에 위치한 마을로, 조선시대에는 과천군 상서면 내 비산리(果川郡 上西面 內 飛山里)라칭했다가,
1914년에 내비산리와 외비산리를 통합, 비산리로 통칭 되자 자연취락으로 전락되었다.
이곳에 처음 세거한 성씨는 전주 이씨 익안대군파로 알려지고 있으며,
그 후 덕수 장씨, 문화 류씨, 보성 오씨 등이 살아와 현재는 전주 이씨가 집성을 이루고 있다.
비산동 골짜기 안에 위치한 마을이므로 안날미라 칭하고 있는데,
마참고:안양시지 을 중앙을 가로지르는 개천을 따라 동쪽 지역은 웃말(또는 음짓말), 서남 쪽지역은 아랫말(또는 양짓말)이라 각각 부르고 있다.
마을에서는 해마다 음력 10월 초에 길일을 태해 안양종합운동장 북쪽 류덕옥(柳德玉1653 - 1711 안악군수 역임)묘소 위에 있는
노송 앞에서 마을의 안정을 위해 산신제를 지내다가 외지인이 많이 입주하자 1970년대 말부 터 제(祭)를 지내지 않고 있다.
이곳에는 류덕옥의 묘를 비롯하여 유탁 (1686- ?, 문과급제), 장언방(병조참판 역임) 등의 묘가 있다.
박날미(外飛山) <비산3동>
삼호아파트 서북쪽에 있는 매곡동과 수푸루지 등의 제 지역을 통칭해 일컫는 말로,
비산동 골짜기 밖에 위치해 있어 박날미(外飛山)라 칭한다. 조선시대에는 과천군 상서면 외비산리라 불렀다.
마장골(梅谷洞) <비산3동>
구름울과 안날미 사이에 위치해 있으며, 예전에는 구름울에 속해 마장골을 웃말, 구름울을 아랫말이라 각각 칭했다.
이 마을은 샘머루에 살던 안동 권씨 정승공파 후손들이 분가를 하면서 형성되었고,
그 후 청주 한씨 등이 세거하기 시작해 광복직전에는 30호가 있었다.
그 후 관청 자리에 1978년 비산국민학교(비산동 315)가 건립되고, 안양7지구 구획정리 사업으로 화남아파트(1986), 호성빌라(1986), 삼호빌라(1989), 두산빌라(1989) 등의 아파트와 다세대 주택 등이 들어서면서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였다.
마장골 이란 조선시대 관가에서 사용하던 말(馬)을 이곳에서 사육했기 때문인데 후대에 내려 오면서
다음과 같은 전설로 인해 매곡동(梅谷洞)으로도 불리우고 있다.
조선조 중엽, 마장골에 사는 어느 농군의 아낙네가 갓난 아이를 풀밭에 뉘여 놀게 하고 자신은 김을 매고 있는데,
매가 갓난아이를 채어 날아갔다고 한다.
아이를 잃은 아낙네는 그 날로 몸져 눕게 되었는데,
그 후 이 마을 나무꾼이 이곳에서 나무를 하려고 산을 오르려는 순간 커다란 매가 공중을 빙빙 돌기 시작하자 주위를 살핀
이 나무꾼은 갓난 아이가 있는 곳을 확인한 다음 곧 마을로 내려와 마음 사람들에게 사실을 알리자,
이 소문이 널리 퍼져 임금님까지 알게 되어 급기야는 어전회의(御前會議)까지 열리게 되었는데,
대신들이 이는 좋지 않은 징조이므로 퇴치해야 한다고 하여 어명을 받은 원님이 포졸과 함께 현지에 도달했으나
보금자리만 있을 뿐 갓난 아이와 매는 온데간데 자취가 없어졌다.
이상하게 여긴 원님은 갓난 아이가 필경 독수리의 보호를 받으며 자라고 있다고 생각하고 철수를 하였다고 한다.
이 후부터 이 마을에는 매가 자취를 감추었다고 하며, 마을이름도 매곡동(梅谷洞) 이라 부르기 시작했다고 전한다.
마장골에는 흥국사(비산3동 306-12)와 약수암(비산3동 292-1) 등의 사찰이 있고, 마을에서는 구름울, 수푸루지 주민들과 함께
해마다 음력 10 월 2일 평화보육원 동쪽에 있는 당봉(또는 매봉)에서 산신제(山神祭)를 지낸다.
구름울(雲谷洞) <비산3동>
삼호아파트와 안양시 제1정수장(위치 비산동 산 142)사이에 있으며, 마 을의 지세가 흡사 구름에 둘러 쌓인 것 같다 하여
구름울 (雲谷洞)이라 부르고 있는데,
보통 삼호아파트 안동네라 칭하기도 한다. 이 마을은 샘머루에 살던 안동 권씨 정승공파 후손들이 분가를 하면서 취락이 이루어졌다고 하며,
현재도 안동 권씨가 대성을 이루고 있다.
구름울은 광복 직전까지만 해도 33호가 있었다가,
마을 앞에 삼호아파트가 들어선 후 1986년에 영진빌라를 비롯하여 1989년에 현대빌라, 선영빌라, 산정빌라 등의 다세대 주택이 건립되었다.
마을에서는 마장골, 수푸루지 주민들과 함께 평화보육원 동쪽에 위치한 당봉(또는 매봉) 정상에서
해마다 음력 7월 2일과 10월 2일에 산신제(山神祭)를 지내다가, 1980년대부터 음력 10월 2일에만 지내고 있다.
달안이(達安洞) <달안동>
이 마을은 1944년 박흥식(朴興植1903년생)씨가 안양에 있는 조선직물 주식회사 (현 대농단지)를 인수한 후,
조선비행기주식회사의 비행기 활주로 공사를 시작할 만큼(1945년 광복으로 중단) 지역이 넓어,
비가 오면 가릴 것이 없어 삿갓을 쓰고 달아나야 비를 피할 수 있다 하여, 삿갓들 (笠坪) 또는 다라니(達安洞)이라 불렀는데, 일명 섬마을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달안이는 허허벌판이라 겨울이면 추워 사람이 살지 못하는 불모지라 하여, 농경지 외에 민가가 없었다가
1940년대 초에 의지할 곳 없는 외지 사람들이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하면서 취락이 이루어졌다.
취락이 처음 형성될 때에는 문화 유씨, 진주 강씨 등 모두 12호가 있었고,
이 후에도 이곳이 절대농지 지역이라 민가의 신축이 안돼 그대로 유지되었다가, 달안이 일대가 평촌신도시 구역에 편입되자 1989년에 폐동 되었다.
달안이에는 예로부터, 안양은 금소반이요 달안동은 오씨의 천년 도읍지이다.
안양금소반 오달안동천지지(安養金小盤 吳達安洞千年之地)라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가운데말(中村) <관양1동>
조선시대 대궐안의 식사와 왕명(王命)의 전달, 수문(守門) 및 청소를 맡아 보던 곳을 내시부(內侍府)라 칭하고, 이에 종사하는 사람을 내시라 불렀다.
내시는 4품관 이하는 다른 문무관(文武官)과 같이 계급이 올라가고,
3품 이상은 왕의 지시로 올라 갈 만큼 권세가 당당해 사회 신분상 중인에 속했다.
과천 지역의 내시는 인덕원에서 집단을 이루며 살다가 이들이 수(壽)를 다해 죽으면 오늘 날의 공원묘지처럼 내시묘원(內侍墓園)을 조성해 예장을 치뤘다.
가운데말, 즉 중촌(中村)은 내시(中人)가 죽어 묻히는 곳이란 뜻인데,
실제로 최근까지 이 마을 곳곳에 내시 무덤이 있었다가 주변 환경변화로 모두 이장, 또는 화장된 사례가 있다.
즉 효성다세대 주택(관양동 356)에 4기 와, 관양동 산 65-1 속칭 내시땅에도 1기가 있었다가 1970년대 말 내시 후손이 화장하였다.
마을 주민들이 증언한 바에 따르면 어떤 내시 묘 앞에 있는 묘비명에는 「내시 김공 지묘」라 쓰인 비석도 있었다고 한다.
가운데말은 김해 김씨, 나주 나씨, 평양 조씨, 안동 김씨등의 세거지로,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까지만 해도 20여호 남짓한 촌락이었으나,
1978년 안양 7지구 구획정리사업 때 택지로 변모되면서 남광 1차 아파트(농경지), 동산빌라(안동 김씨 소유), 뉴한신빌라(안동 김씨 소유 임야) 등이 들어섰고,
1973년에는 시제가 실시되면서 관양1동사무소가 들어섰다.
마을에서는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뺌말, 말무덤이 주민들과 함께 해 마다 음력10월 1일 뺌말 뒷산에서 산신제를 지냈다
골안(谷內) <관양1동>
뺌말(秀村)에 속했던 마을로 뺌말 서북쪽에 있다. 작은 골짜기 안에 위치한 마을이므로 골안(谷內)이라 칭하며,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민가 3호가 있었다.
그 후 1978년 안양7지구 구획정리사업 때 택지로 조성되어 민가와 연립 주택, 다세대주택 등이 들어섰다.
동편(東便) <관양1동>
샌말(間村) 동쪽에 자리잡은 마을로, 이 곳에 최초로 세거한 성씨는 조선중기에 전주 이씨 익양군파인데,
현재(1991) 동편의 57가구 중 30여 가구가 전주 이씨일만큼 전주 이씨가 크게 번성했다.
후손 중에 이면훈(李冕薰,작 고, 전매청장 역임), 이서구(李書九1923 .대림콘크리트 상임고문)가 있다.
관양1동 28통에 속한 동편마을은 서남지역을 아랫말, 동북지역을 웃말이라 각각 칭하고 있다.
대부분의 지역이 개발제한구역인데다가 수도물도 안들어오는 도시속의 농촌이다.
말무덤이(馬賁洞) <관양1동>
뺌막(秀村)과 가운데말(中村) 사이에 자리잡은 마을로, 조선시대 마장골 (현 매곡동)에서 기르던 말이 죽으면
이곳에 매장했다고 하여, 말무덤이 (馬音洞)이라 부른다고 한다.
일설에는 큰 무덤이 있는 곳이라하여 말 무덤이라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1960년대만 해도 현 관양중학교 아래에서 말에게 편자했던 쇠 조각 등이 많이 출토되었다는
마을 촌로들의 증언이 있는 것으로 보아 말의 무덤이 있었던 것은 확실한 것 같다.
김해 김씨, 나주 정씨, 위씨 등이 오래 살아온 말무덤이 마을이
오늘날처럼 크게 번창되기는 1978년에 시작된 안양7지구 구획정리 사업을 실시하면서부터 이다.
이후 1982년 현대식 건물이 간간히 신축되다가, 1985년에 이르러 농경지 (논)이었던 곳에 현대아파트가 들어선데 이어,
야산이었던 곳에 아리랑 아파트와 남광 2차아파트가, 밭과 논이었던 곳에 태광아파트가 각각 신축되면서 인구가 급격히 늘었다.
또 밭과 임야였던 관양동 538 일대는 1948년 관양국민학교가 세워졌는데 이는 동안구청 관내에서는 최초의 현대식 교육기관인 동시에,
이 학교 校名으로 인해 1973년 시제가 실시되면서 이 일대를 관양동(冠陽洞)으로 명명 하기까지 하였다.
참고:안양시지 그 후 1977년에는 포도밭이었던 관양동 산 90-3에는 관양중학교가 세워져, 한낱 말의 매장지에 불과했던 불모지가
오늘날에는 교육의 요람지로 크게 탈바꿈 되었다.
마을에서는 뺌말, 가운데말 주민들과 함께 해마다 음력 10월 1일 뺌말 뒤에 있는 산에서 산신제를 지내는 곳이
뺌말 지역이라는 연유로 1960년대 초부터 제를 지내지 않는다.
망령골(亡靈谷) <관양1동>
망령골 고개주변에 있다. 본래 동편에 속한 마을로 청주 한씨 등의 세거지이며, 민가 7호의 작은 취락이다.
구전에 따르면 신라 말기에 어떤 사람이 서울에서 나무를 팔고 과천을 거쳐 이곳을 지나가는데,
어느 여인이 소복을 하고 나타나 하룻밤을 유숙하며 여인과 관계를 맺었다고 한다.
그 후 그 여인이 다시 나타나 하는말이 관악산 바위 틈에 아이가 있으니 가보시오 라고 한마디 하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여인이 일러준대로 현장에 가보니 과연 바위 틈에서 아이가 울고 있어 데려다 정성껏 기르니,
후에 귀주대첩의 영웅 강감찬 장군이라는 것이다. 망령골이란 망령(亡靈), 즉 죽은 사람의 영혼이 나타났다 해서 붙여진 지명인데,
일설에는 어느 여인이 이곳에서 3년간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관악산을 바라보며 기도했다고 하여 망령골(亡靈谷)이라 했다는 것이다.
부림말 (富林洞) <관양1동>
가운데말 동쪽에 위치한 마을로, 남평 문씨와 밀양 박씨가 배판했다. 이곳은 예로부터 산림이 울창했을 뿐만 아니라,
인근의 다른 마을보다 부 자가 많이 산다고하여 부림말 (富林洞)이라 칭한다.
부림말은 비산동- 인덕원간의 도로확장후 대도, 한미, 골드, 남광, 삼광, 원주 등의 연립 및 아파트가 건립되면서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였다.
마을에서는 해마다 음력 7월 1일에 관양우체국 옆에 있던 박우물과 신 장로우물, 부림우물(윗우물)에서 마을의 안정과 풍년을 기원하는 정제(井祭)를 지내다가,
우물 주변에 민가가 건립되면서 샘물이 끊겨 폐정되자, 1988년 부터 제를 지내지 않는다.
뺌말(秀村) <관양1동>
말무덤이 서편에 있다. 이곳에 사람이 처음으로 살기 시작한 것은 조선 중기로 알려지고 있다.
경상도 김해에서 과거를 보러왔던 김해 김씨 금영군파(金寧君派)의 유생 한분이 과거를 본 뒤 귀향하다 인덕원 쯤에 이르러
관악산을 바라보니 서북쪽 언덕의 지세가 완만하고 남향으로 살기 좋은 곳임을 간파하고 정착하기 시작했다.
그 후 상주 김씨, 연안 차씨가 세거해 이들 세 성씨를 뺌말의 삼대성씨(三大姓氏) 라 일컫는다. 뺌말(秀村)이란 취락명은,
마을 내에 뺑대쑥(준말로 뺑쑥 이라함)이 많이 자생하고 있어 뺑말이라 했다가,
후대에 내려오면서 지금의 지명으로 불리워 오고 있다.
마을에서는 해마다 음력 10월 2일이면 관악산 줄기 나즈막한 봉우리에 있는 당집에서 마을의 안정을 기원하기 위해 관악산산신제(冠岳山 山神祭)를 올린다.
산신제에 있어 가장 중요시되는 것은 산신제를 주관할 당주(堂主)를 선정하는 일이다.
당주는 몸가짐이 바르고 집에 상을 당한는 등 부정타지 않은 사람중에서 선정된다.
당주로 선정된 사람은 제를 지날 때까지 바깥 출입을 삼가하고 부정한 일을 저지르지 않으며, 대문앞에 진흙(또는 황토)을 발라 부정한 사람의 출입을 막는다.
예전에는 말무덤이, 가운데말과 함께 지내다가 부림말 등에 교회가 들어서면서 지금은 뺌말 주민들만 지낸다
샌말(間村) <관양1동>
동편과 부림말 사이에 위치한 마을이므로 샌말 (間村)이라 부른다.
전주 이씨, 보성 오씨, 경주 이씨, 광주 이씨의 세거지로 전주 이씨가 대성을 이룬 샌말은 안양일대에서는 오지에 속하며,
인근의 마을이 하나같이 하루가 다르게 급격한 도시화 추세로 변모되어 가고 있으나,
이 마을은 아직도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는 전형적인 농촌이다.
이곳에는 중종조에 첨지중추부사를 역임한 류계장(柳秀獐1435-1515), 이의준(李義駿 황해도 관찰사),
유영(柳寧1507-1583, 전주판관 역임), 오병선(吳炳善1904-1979, 만안.안양.관양국교장역임)의 묘가 있다
소능골(小陵谷) <관양1동>
본래 샛말에 속했던 마을로, 샛말에 살던 보성 오씨 후손들의 분가로 취락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샛말과 동편 사이에 위치해 있는 소능골은 5 호 남짓한 작은 취락으로 농업을 주업으로 하는 전형적인 농촌이다.
능골 아래 작은 골짜기에 자리잡은 마을이라 하여 소능골 이라 칭하는데,
이곳에 숙종 때 문종가로 이름이 높았던 吳文瑞의 묘가 있었다가 1985년 충남 조치원으로 천묘하였다.
오촌말(吳村洞) <관양1동>
샌말 북쪽에 있다. 이곳에 최초로 산 사람은 조선 숙종때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에 증직된 오익성(吳益瑞자는 龍佰,
호는 三山散人)로 알려지고 있으며,
그 후 그의 후손인 보성 오씨가 세거하면서 취락이 이루어져 오씨의 마을이란 뜻으로 오촌말 이라 칭하고 있다.
마을 뒤에는 그가 생존시에 암각한 삼산동천(三山洞天) 이란 바위가 있다.
신흥마을(新興洞) <관양2동>
인덕원 서쪽에 자리잡은 마을로, 관양2동의 9통.10통.11통.12통에 속해 있다.
이 마을은 1972년 안양읍 관내의 천변(川邊)에 난립되어 있던 주택을 정비하면서, 하천을 매립하여 철거민들에게 집단 이주시켰다.
그 후부터 생긴 마을이라 하여 신흥마을이라 칭하고 있는 데, 마을 내에는 강남빌라, 그린파크빌라, 럭키빌라, 삼우빌라, 삼인주택 등이 다세대 주택이 있다.
인덕원(仁德院) <관양2동>
이 마을은 조선시대 내시(內侍)들이 살던 곳이라고 한다.
이들은 비록 거세(去勢) 된 몸이지만 환관이라 하여 궁중을 출입하여 임금과 가까이 있는 신분으로 높은 관직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남에게 덕화를 베푸는 사람이 사는 곳이란 의미로 인덕(仁德)이라 칭했다가,
공용(公用) 여행자의 숙식을 제공하기 위하여 원(院)을 설치하면서부터 인덕원(仁德院)이라 부르고 있는데,
원은 임진왜란 전에 이미 폐하여 없어졌다.
인덕원은 조선 초기부터 이미 교통의 요충지로 알려졌는데,
이러한 사 실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白衣從軍) 할 때의 일기인 <<난중일기>>의 기록만 보아도 알 수 가있다.
정유(1597) 4월 초 3일 조 (계해) 맑음. 일찍 남으로 길을 떠났다.
금오랑 이사민, 서리 이수영, 나장 한언향은 먼저 수원부에 도착하였다.
나는 인덕원에서 말을 먹이면서 조용히 누워 쉬다가 저물어서 수원에 들어가 경기관찰사 수하에서 심부름하는 이름도 모르는 군사의 집에서 잤다.
신복용이 우연히 왔다가 내 행색을 보고 술을 갖추어 가지고 와서 위로하였다.
부사 유영건이 나와 보았다. 인덕원은 정조의 수원 능행로(陵幸路)로도 유명하다.
즉 정조는 정조 13년 (1789) 10월 5일 양주 배봉산에 있는 묘(영우원)을 수원 화산으로 옮기기 위해 부왕(사도세자)의 영여와 함께
과천행궁에서 경박한 후 이튿날(10월 6일) 인덕원을 지나 수원을 향했다.
그 후 정조 14년(1790) 2월 29일, 정조 15년(1791) 1월 16일등, 정조 16년(1792) 1월 24일, 정조 17년(1793) 1 월 12일,
정조 18년(1794) 1월 14일등 모두 6차에 걸쳐 인덕원을 왕래 하였는데,
특히 제5차 행차 때인 1793년 1월 12일에는 인덕원들을 지날때 인근에 있던 부노(父老)들을 접견하고 그 노고를 위로하기까지 하였다.
이후 정조의 인덕원 행차는 없었는데, 그 이유는 안양에 만안교를 가설한 후 행로를 시흥-안양-수원으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김해 김씨가 배판한 이곳은 광복 직후까지만 해도 불과 33호에 지나지 않았으나, 수 차에 걸친 도시계획등으로 북쪽으로는 과천시, 동쪽으로는 의왕시, 남쪽으로는 군포시, 서쪽으로는 안양시 진입에 이르는 사통팔달(四通八達)로 교통이 발달되자 급성장 하였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상서면(현 동안구청) 관내에서는 제일 부촌이었다가 광복직전부터 빈촌으로 전락된 후
1970년대부터 다시 부촌으로 부상해 관양동 관내에서는 땅 값이 제일 비싸다고 한다.
인덕원 사거리에서 수원방향으로 약 200m 지점 도로변에 현감 이태응의 송덕비가 있다.
이 비는 본래 조종내 개울둑에 있었다가 마을내로 수차 옮겨지고, 다시 1984년 도시계획에 따라 현재의 위치로 이전, 보존되고 있다.
이 비석이 인덕원에 소재한 것은 몇 가지로 해석할 수가 있다.
첫째는 현감 이태응이 인덕원지방에 선정을 베풀어 이곳 주민들이 그 은공을 잊지 않기 위해 이곳에 세웠을 경우,
두번째는 조선시대 과천현감이 주재하고 있던 현 과천시 중앙동사무소와 과천국교 사이에 있는 역대 과천현감의 선정비군과 함께 있었다가
후대에 주민에 의해 이곳으로 옮겼을 경우 등을 추론할 수가 있는데, 현재로는 어떤 연유로 이곳에 소재했는지에 대해 확인할 수 없다.
현감 이태응은 조선 고종때 공조좌랑(工曹佐郞)을 지내다가 고종 3년 (1866) 12월 5일 과천 현감에 제수를 받아
그 해 12월 18일에 부임하여 13개월간 재직하다가 고종 5년(1868) 1월 29일 송화현감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 송덕비는 과천현감에서 물러난후 14개월만인 고종 6년(1869) 3월 에 세워졌다.
인덕원 마을에는 신성중(관양동 188-2, 1969설립), 신성고(188-2), 관양여 중(제7지구 34블럭, 1982 설립), 인덕원국교(관양동 210, 1987설립)등의
교육기관이 소재해 있으며, 마을에서는 해마다 음력 7월에 길일을 택해 마을 중앙에 있는 대동우물에서 정제(井祭)를 지내다가
한국전쟁 직후부터 인근에 주택을 지으면서 수원(水源)이 딸리자 제를 지내지 않는다.
민배기(禿朴只, 民伯洞) <평촌동>
삼태기처럼 오목하게 생긴 마을로 벌말과 갈미 사이에 위치해 있다.
예전에 과천.인덕원.갈미 등은 관아와 院이 있어 지체 높은 사람들이 많이 살았던데 반해, 이곳은 좀 외진 곳이다.
서울과 삼남지방을 왕래하는 행려자들이 날이 저물면 민박을 했다고 한다. 그 후부터 이 마을을 민박이(民伯洞)라 했다가,
후대에 내려오면서 민배기(民伯洞)로 불리우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조의 <<원행정례>>는 독박지(禿朴只)로 기술되어 잇는데,
이 는 민배기를 한자화한 표기라고 한다. 즉 독(禿) 은 석독(繹讀)하여 민- 으로 읽어 민배기 로 나타낸 것이다.
괴산 음씨가 처음으로 세거한 민배기마을은 동쪽 지역을 등너머라 칭하고,
그 외 지역은 민배기로 통칭된다.
또 마을 중앙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길이 있어 그 서쪽지역은 평촌신도시 개발구역에 편입되었다
벌말(坪村) <평촌동>
인덕원 남쪽에 위치한 마을로, 산이 없는 허허 벌판에 자리잡고 있어 벌말 (坪村)이라 불렀는데,
그 후 마을이 또 생겨 두 벌말 또는 이평촌(二坪村)이 라 했으며, 이를 줄여 이동리라 칭하였다.
예전에는 한강에서 과천-안양에 이르는 모든 취락 중 가장컸던 벌말은 조선 초기에 괴산 음씨가 최초로 살아 음촌 이라 부르기도 하였으며,
그 후 밀양 박씨, 전주 이씨, 김해 김씨 등이 세거해 왔다. 벌말은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서울-과천-군포-남양간 도로를 개설한 후
1969년에 동일방직(평촌동 1)을 비롯하여, 오뚜기식품(평촌동 160), 1982년에 가나안제과(평촌동 81-4)등의 공장이 건립되면서 인구가 늘기 시작하였다.
이곳은 지역이 넓어 동북쪽 지역(동일방직 주변)은 웃말 또는 상평촌(上坪村), 서남쪽지역(오뚜기식품, 삼화왕관 주변)은
아랫말 또는 하평촌(下坪村)이라 각각 불렀으며,
이 마을이름으로 인해 1973년 시제가 실시되면서 동명칭이 평촌동으로, 이어 신도시 개발지구 명칭도 이 마을명을 취했다.
장차 안양 시가지의 중심지로 각광받을 미래의 땅이다.
귀인(貴仁) <귀인동>
신말(新村)동쪽으로, 온양 정씨가 배판한 마을이다.
조선시대 신분이나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 서울로 과거를 보러갈 때 이 마을에 들려 머물다 갔다고 하여 귀인(貴仁)이란 지명이 붙여졌다고 한다.
조선조 정조 때(1789) 전국의 인구조사를 실시하여 그 내용을 편찬한 호구총수<<戶口總數>>에 의하면
귀인이 안양에서 인구가 가장 많아 귀인1동, 귀인2동으로 분동해 안양에서는 가장 번창했던 마을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일제강점기에는 이곳에 귀인강습소 가 있었다가 광복 직후에 이르러 학 생의 감소와 재정난 등의 이유로 문을 닫았다.
70여호의 대촌인 귀인마을은 평촌 신도시 개발구역내의 몇 안되는 마을 중의 하나로, 1990년 4월에는 명지대박물관에 의해 지석묘가 발굴되었다.
지석묘가 발견된 곳은 마을 뒷산으로(해발60m) 1970년대 까지만 해도 수목이 우거진 곳이었다.
크기는 175*110*20-30cm로 재질은 화강암이며 성혈(性穴)이 7개가 있다.
학술적 자료로 이용하기 위하여 명지대학교에 이전, 복원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 이곳에는 지석묘 뿐만 아니라, 백제시대 주거지 유적이 발굴 조사되기도 하였다.
동 주거지는 지석묘에서 서북쪽으로 약 3m 떨어진 산의 능선이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삼국시대 주거지로 확인 조사된 예는 불과 3-4곳에 불과했는데,
귀인마을에서 발견된 백제초기 주거지는 아궁이, 온돌시설인 三列의 구들골이 잘 보존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부엌곁에 마련된 저장고와 기둥 구멍이 뚜렷하게 남아 있어 원형의 가상복원이 가능하므로 백제의 주거문화를 헤아릴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마을에서는 일제강점기 말엽까지만해도, 해마다 음력 7월에 길일을 택해
마을 내에 있는 대동우물에서 마을의 풍요와 무해를 기원 하는 정제(井祭)를 지냈다.
금성마을 (金星村) <호계1동>
일제강점기만 해도 고구마.콩.감자 등이나 심던 박토로, 한때는 일본인 들이 소나무, 잣나무 등을 가꾸던 묘포가 있었을 만큼 불모지였었는데,
1970년대에 이르러 럭키금성 그룹에서 무주택 사원을 위한 새 주택을 집단으로 신축, 입주하면서부터 취락이 이루어졌다.
덕고개(德峴) <호계1동>
군포 신사거리 동북쪽에 위치해 있으며 조선시대에는 과천군 하서면 도양리라 불리웠던 마을이다.
군포 신사거리에서 과천 방향으로 약 400m 지점에 있는 홍안주유소 일 대가 예전에 큰 고개였었다는 연유로 이 일대를 덕고개 (德峴)라 칭하고 있는데,
이 고개는 당살미, 갈미, 인덕원 등 주민들이 軍浦場을 보러 갈 때 왕래하던 곳으로, 1936년 3월 서울-과천-남양간 도로개설 할 때 현재의 모습대로 고개를 낮추었다.
덕고개는 풍수로 보아 배형국(舟形局)인데, 우물을 여러 개 파면 배가 가라 앉으므로 마을 중앙에 있는 우물 하나로 대동의 식수로 사용했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사람들은 현 호계시장 북쪽 100여미터 지점에 나무로 방풍림을 조성해 배의 풍파를 막았다고 하는데,
지금도 이 지역을 수풀 아래 라 부르고 있다. 나주 오씨와 경주김씨, 남평 문씨, 함흥 노씨 등의 오랜 세거지인
이 곳은 동쪽 지역(흥안주유소 주변)을 웃말, 서북쪽 지역 (농협 호계동 지점, 호계시장 주변)을 아랫 말, 서쪽지역(군포신사거리, 호 계동사무소 주변)을 건너 말이라 각각 불렀다.
<대한그리스도인회 보>(1895)에 의하면 이 마을의 허대진이 세례를 받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안양 최초의 기독교 전래지로 생각된다.
그리고 이곳에 있던 덕고개교회 는 1908년까지 감리교회였다가 1909년 장로교회에서 인수하여 삼성교회 (현 군포시 군포2동)로 되었다.
마을에서는 해마다 음력 7월 2일이면 마을 중앙에 있던 우물(현재 건국 빌라가 들어섬)에서 소 머리를 나호고 온 주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정제를 지냈으나,
인근에 민가와 연립주택 등이 신축되면서 수원(水源)이 끊긴데다가 우물터가 타인에게 매도 되는등 주변환경의 변화로 1988년부터 제(祭)를 지내지 않고 있다.
덕고개는 1973년 시제가 실시된 후 경수산업도로의 관통과 흥안로 등 교통의 발달로 급성장되었다.
방축말 (房築洞) <호계2동>
안말과 샛터말 사이에 있다.
조선시대에는 과천군하서면(果川郡 下西面)의 관아가 있었고,
그 후 1914년 3월부터 1917년 7월까지 시흥군 서이면(始興郡 西二面)의 면사무소가 있었던 유서깊은 고을이다.
이곳은 조선시대에 물을 막기 위하여 둑을 쌓았는데, 그
주변에 있는 취락이므로 방죽말 (房築洞)이라 칭했다.
그런데 이 방죽이 언제 조성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숙종 때 (1699) 발간된 <<異川邑誌>> 제언조(堤壙條)에 호계제언재현서남문18리(虎界堤壙在縣西南門十八里) 라 했는데,
이로 미루어 보아 방죽(제언)의 이름은 호계이고,
그 위치는 과천치소(현 과천시 중앙동사무소)에서 서남쪽으로 18리 지점에 있었다.
축조년대는 숙종조 이전으로 보아야 할 것이므로, 최소한 조선 중기에 이미 방죽이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이 방죽은 후대에 내려 오면서 그 명칭이 바뀌었다.
광무 3년(1899)에 발간된<<異川邑誌>> 제언조(堤壙條)에 호게리경자제언일고재현서남간18리(虎溪里競子堤堰一庫在縣西南間十八里)라 하여
방죽은 호계에서 호계리경자로 되었고, 이어 일제때부터 범계방죽으로 불리우다가
1974년 부터 실시된 안양6지구 구획정리사업 때 주택지로 변모되었다.
마을에서는 해마다 음력 10월초에 길일을 택해 방죽 앞에 있던 수령 300년 되는 향나무 앞에서
마을의 안정을 기원하는 군웅제(群雄祭)를 지내다가 1970년대에 나무가 죽자 제를 지내지 않는다.
샛터말(新其洞) <호계2동>
범계(방죽말, 안말, 샛터말)에 있는 마을 중 가장 늦게 생긴 마을로, 조선조 말엽에 한양 조씨가 새로 터를 잡고 산 마을이라 하여 샛터말이라 칭한다.
방죽말 동남쪽에 위치한 샛터말은 서쪽지역을 웃말, 동쪽지역을 아랫말이라 각각 칭하고 있는데,
안양6지구 구획정리 사업으로 택지로 조성되자 미주아파트, 강남3차 아파트등이 들어섰다.
안말(內村) <호계2동>
방죽말 북쪽에 있다. 숲 안에 자리잡은 마을이므로 안말 이라 칭하는 데,
일설에는 골짜기 안에 위치해 있어 안말로 불리우고 있다는 것이다.
이 마을은 전주이씨 영응대군(永廣大君1434-1467, 세종대왕의 8남, 시호는 경호(敬孝)후손들이 배판한 이래 함평이씨. 경주 최씨 등이 세거해 왔다.
안양 6 지구 구획정리사업(1974-1979)으로 마을의 면모가 일신되었다. 마을 내에 현대아파트.경남아파트 등이 있다.
구군포(舊軍浦) <호계3동>
안양시 최남단에 위치한 마을로, 동쪽은 덕고개, 북쪽은 샛터말, 서쪽은 군포시 당정동 벌세전리 및 금정동 점말, 남쪽은 의왕시 오전동과 각각 경계를 이루고 있다.
이곳은 조선 말엽에 구군포사거리와 맑은내(淸川) 사이에 장(군포장)이 설치되면서, 시장 주변에 민가가 생기기 시작했다고 한다.
5.10일에 섰던 군포장은 담배를 비롯하여 소금, 광목 등과 쌀, 콩, 조, 보리쌀등 농산물이 주로 거래되었으며,
인근에서는 안양, 군포, 의왕, 과천등과 멀리는 용인, 남양, 판교등지의 상인이 붐벼 성시를 이루었었다.
군포장의 명물은 씨름과 정월 대보름에 개최되는 줄다리기로, 이 때는 시 장의 열기가 고조를 이룬다고 한다.
번창하던 군포장이 자취를 감추기는 1925년 소위 을축년 대홍수로 맑은 내가 범람하자 안양지역은 안양1동 소재 구시장(진흥아파트 앞)으로 옮기면서
그 명칭이 안양시장으로 개칭되었고, 서남부 지역은 남면 군포역 앞(현 군포시 당동)으로 이전하면서 시장명칭을 그대로 승계하였다.
이 후부터 이곳 일대를 구군포(舊軍浦) 또는 구 장터라 부르고 있다. 군포(軍浦)의 유래에 대하여는 아직까지도 자세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군포란 지명이 문헌상에 나타나기는 200년 내외로 알려지고 있다.
정조가 부왕의 묘를 양주 배봉산에서 수원 화산으로 천묘할 때,
능행에 관한 사실을 편찬하도록 하여 편찬된원행정례<<國幸定例>>(1789) 도로교량조道路橋梁條에 군포<軍浦>라
기재되어 있는데, 군포(軍浦)는 양역(良役)이라 하여 양인(평민)이 부역하던 국역을 말하기도 하고,
정병을 돕는 조정에게 역(役)을 면해주는 댓가로 받는 삼베나 무명을 말하는데,
군포가 군포(軍布)에서 유래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일설에는 청.일전쟁 때(1894), 청나라 군인들이 군함을 타고 한강을 경유 하여 이곳에 머물렀다 하여 군포라 하였다고 하나,
오늘날 관개수로가 잘 된 지금에도 어려운 상황인데 어떻게 군함이 왕래할 수 있었는지 의문이 간다.
현재까지 알려지기로는 조선 선조 때(1592)임진왜란이 일어 나자 관군이 왜군에게 패하여 후퇴하다
지금의 군포에 이르러 승려의병과 만나 관군을 재정비하였는데,
이 지역에 머물때 동리 주민들이 굶주린 관군에게 식사를 제공하여 사기를 진작 시켜 주었다 한다.
그 후 관군이 승려의병과 합세하여 왜군을 무찔러 공을 세웠다고 전하며, 그 후부터 이곳을 굶주린 관군이 배불리 먹은 지역이라 하여 군포라 하였으나
시대변천으로 군포로 되었으며, 군포(軍飽)가 군포(軍浦)로 바뀌어진 시기와 사유는 알 수 없다.
구 군포는 김해 김씨가 배판한 이래 수성 최씨, 전주 이씨 등이 대대로 살아온 마을로 광복 직전까지만 해도 10여호의 한촌이었다.
이 마을은 만안로와 맑은내 사이의 서쪽지역은 아랫말, 만안로와 경수산업도로 사이의 동쪽 지역은 웃말이라 각각 불렀으며,
오늘날처럼 번창되기는 1963년 호계3동 458에 안양교도소가 들어서고, 이어 금성전선, 금성통신 등의 공장과 경수산업도로가 개설되면서 부터이다.
이곳에는 안양교도소, 안양시민방위교육장, 호계3동사무소, 호계파출소, 한성병원등이 있으며, 마을에서는 해마다 음력 10월 2일이면
호계파출소 북쪽 약 100m 지점에 있는 군웅산(軍雄山)에서 군웅제(軍雄祭)를 지냈으며,
1960년대 말에 이곳에 민가가 신축되자 파출소 북쪽 50m 지점으로 옮겨 제를 지내다가,
이곳 역시 박모씨로 소유주가 바뀌자 1980년대 초부터 제를 지내지 않고 있다.
신말(新村) <신촌동>
평촌등의 자연취락 중 가장 늦게 생긴 마을로, 풍양 조씨가 처음으로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 마을 서북쪽인 호계동과 경계지점에는 안양남국교의 전신인 흥안국교가 한국전쟁 직전에 있었다가 1958년 경에 갈미로 이전했다.
귀인 남쪽에 위치한 신말은 1990년 명지대박물관에 의해 4기의 지석묘가 발굴조사 되었다.
평촌신도시 개발구역에 편입되어 1990년에 폐동되었고 호수는 30여호였다.
갈미(葛山) <갈산동>
당살미 동쪽에 위치한 마을.의왕시 내손동 갈미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이 마을은 본래 의왕시 갈미와 함께 광주군 의곡면 손리(廣州郡 儀谷面 蓀里)에 속한 마을이었데,
1936년 3월 서울-과천-남양을 연계하는 도로를 개설하면서, 동쪽 지역은 의왕 내손리(현 의왕시 내손동) 갈미가 되었고,
서쪽 지역은 서이면 이동리(현 안양시 평촌동)갈미로 되었다.
이곳은 정조가 부왕의 묘가 있는 수원 화산능을 참배할 때 다니던 능행로(陵幸路)로,
조선시대에는 한양에서 과천-인덕원을 경우, 수원을 가자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교통의 요충지이자 분기점(分岐點)이었다.
철종 12년(1861) 김정호(金正浩) 가 제작한 대동여지전도<<大東興地全圖>>에보면
당시 안양지방은 인덕원, 관악산, 갈미 등 불과 수 개의 지명만이 표기된것만 보아도, 조선시대에는 오고 가는 사람들로 상당히 북적댔던 것으로 보인다.
광무 3년(1899)에 발간된 광주읍지<<廣州邑誌>>에 이 곳에 원(院)과 주막(酒幕)이 있었다 는 기록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이와 같이 갈미란 길(道)이「갈라지다」 (分岐)라는 동사의 첫음절 갈∼의 음차(音借)로 갈마(葛山)가 된 것이다.
이 마을에 최초로 정착한 성씨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대체로유씨 (劉氏)를 비롯하 여 전주 이씨(임영대군파) 등으로 알려지고 있다.
갈미는 20여호의 작은 취락이나 예로부터, "갈미봉에 비들어 온다.
멍석 뚤뚤마러 세워라." 라는 말이 구전되고 있는데
이는 모락산(募洛山) 연봉인 갈미봉에 구름이 끼면 틀림없이 비가 내린다는 속설 때문에 퍼진 얘기로 보인다.
주막과 원 등이 있어 북적대던 갈미 마을도 1990년 평촌신시가지 개발지구에 편입되어 폐동되었다.
마을에서는 1960년대까지만 해도 당살미, 뒷말 주민들과 함께 음력 10월 초에 길일을 택해, 의왕시 내손동 소재 모락산 중턱에서 산신제(山神祭)를 지냈다.
당살미(堂山尾) <갈산동>
죽산 안씨의 세거지로, 갈미 서쪽에 있었던 마을이다.
일제 강점기 이전만 해도 의왕시 내손동 갈미마을과 평촌동 갈미마을은 본래 한 마을로, 오손도손 함께 살아오면서 모락산 중턱에 당집(堂宇)을 짓고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산신제를 해마다 음력 10월 초에 지냈는데,
당살미 (堂山尾)라는 마을명은 이 堂을 모신 모락산의 산세가 이곳 마을에까지 이르렀다 하여 붙여졌다.
민가라고는 7호밖에 안되는 취락이나 대안중학교(1984년에 개교 평촌동 784), 대안여자중학교(1985년에 개교, 평촌동 824-3)등의 교육기관이 있고,
1990년에는 명지대에서 지석묘를 발굴했다.
이 지석묘는 대안여중에 서 남쪽으로 약 20m 떨어진 산기슭의 밭에 자리잡고 있는데,
이곳은 신 시가지 건설지구에 자유공원 조성된 산의 끝자락이다.
평촌 신도시 개발구역에 편입되어 1990년에 폐동된 당살미 마을은 1960년대 까지 뒷말,
갈미 주민들과 함께 해마다 음력 10월 초 길일을 택해 의왕시 내손동 소재 모락산 중턱에서 산신제(山神祭)를 지냈다.
뒷말(後村) <갈산동>
안양남초등학교 동북쪽에 있었다. 본래 갈미에 속했던 마을로, 죽산 안씨의 세거지였다.
갈미주막(葛山店) 뒤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뒷말 (後村)이라 했는데, 평촌 신도시 개발구역에 편입되어 1990년에 폐동되어 5호가 있었다.
마을에서는 1960년대 이전만 해도 당살미(堂山尾), 갈미(葛山) 주민들과 함께
해마다 음력 10월 초에 길일을 택해 의왕시 내손동 소재 모락산 중턱에서 산신제(山神祭)를 지냈다.
이상은 안양자지에서 발췌한 안양의 동이름 유래에서 퍼온글입니다~
괞히 시작해서 힘들어 죽겠네 ㅜㅜ;;
첫댓글 서이면 하나알고...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시대동 그립습니다.내고향 안양은 3등 완행열차가 쉬는 곳이라는 안양출신 시인의 시가 생각나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