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그 유명한 포도주 수도꼭지가 있는 이라체Irache 수도원을 지나는 날이다. 수도원에 도착하니 이미 다들 포도주 한 잔씩 걸치시고 난리가 법석이다. 사람들은 뒤늦게 도착한 나를 수도꼭지 옆에 세우고 사진을 찍어주고 신이 났다. 수도원을 향해 고맙다며 연신 뽀뽀를 날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왼쪽에선 포도주Vino, 오른쪽에선 물Agua이 나온다. 당연히! 다들 포도주를 받아간다.
수도원을 향해 뽀뽀를 날려주고 계신 언니들.
못먹는 와인 받아나 보자고 조금 받아 마셔보니 맛있다. 수도원에서 기른 포도로 담근 술을 이렇게 매일 아침 순례자들을 위해 내놓으신다. 물도 아주 맛있다. 과연 빵, 물, 와인의 고장답다. 사람들은 여기서 물병 가득 포도주를 채우고 걸으면서 마시곤 했는데 우리는 이걸 '음주 파워 워킹'이라고 불렀다. (이 수도꼭지를 지나면 곧장 가파른 산길이 시작되었다.)
에잇! 못먹는 와인, 받아나 보자.
몬하르딘 가는 어느 언덕받이. 사진은 왜 이렇게 평지처럼 나오는 걸까!
몬하르딘Monjardin 입구에는 너른 포도밭이 있었는데 이 포도밭을 가로질러 마을로 올라가는 길이 몹시 아름다웠다. 이제 막 잎이 나기 시작하는 포도나무가 지평선까지 늘어서 있었다. 언젠가 키아누 리브스가 출연한 포도주 만드는 영화가 떠올랐다. ('구름 저편에'였던가?)
마을로 올라와 알베르게를 찾으니 성당 앞에 기부제로 운영되는 작은 숙소가 있다. 그리로 들어가 배낭 속에 넣어온 바게뜨와 치즈를 꺼내 점심을 먹었다. 호스피탈레로 안토니오는 순박하고 친절한 사람이었지만 우리는 서로의 영어를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내가 따뜻한 물을 달라고 하면 안토니오는 차가운 수프를 주고, 데워달라고 하면 커피를 가져다주는 식이었다. 결국 안토니오는 자기 말을 못알아듣는 내게 화가 나선 얼굴을 내 코 앞에 갖다대고 소리를 질렀다. 나는 안토니오도 불편했고 뭣보다 창고를 개조한 이 숙소가 너무도 추웠다. 얇은 칸막이 몇 개가 있었지만 샤워, 화장실, 침실이 모두 하나로 연결돼있어 화장실에서 오줌누는 소리가 침실에, 마지막 한 방울까지(!) 아주 선명하게 들려왔다. 춥지만 않으면 지낼 만한 곳이긴 했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이미 한기에 시달려 발목에 통증이 시작되었다. 나는 오늘 좀 따뜻한 잠자리가 필요했다. 안토니오에겐 미안했지만 나는 내 중심을 따르기로 했다.
매캐한 불냄새가 향기로웠다.
이곳은 네덜란드에서 온 기독교인들이 운영하는 사설 알베르게다. 오늘이 정말 춥기는 한지 사람들이 장작을 패서 벽난로를 지피고 있었다. 헝가리, 슬로베니아, 페루, 호주, 캐나다, 독일, 네덜란드, 영국, 한국에서 온 순례자들이 하나 둘 씩 모여들었다. 정말 국제적인 모임이다. 다들 지금까지 걸어온 거리와 앞으로 남은 거리를 가늠하고 있었는데 가이드북마다 남은 거리가 달랐다. "너 우리 영국 사람 깐깐한 거 알지?", "우리 독일 사람 칼 같은 건 몰라?" 사람들은 서로 자기나라 가이드북이 정확하다며 우겨댔지만 결론은 '며느리도 모른다'로 나왔다. 저녁은 치즈, 토마토, 양상추 샐러드에 꾸스꾸스CousCous라는 밀 요리였다.
이 알베르게에선 식전에 각자 자기 나라 말로 기도를 드리고 식후에 각 나라말로 성경을 읽는 전통이 있었다. 생각지도 못하게 한글로 쓰인 요한복음을 받았을 때는 정말 감동이었다. '생명의 샘'이라고 쓰인 그 얇은 책을, 까미노 내내 하루 한 장씩 아껴가며 읽었다. 성경책 뒷장에 '죄짐 맡은 우리 구주'라는 찬송가가 있었는데 호스피탈레로 해롤드가 내 오카리나를 보더니 연주해달라고 했다. 처음 해보는 곡이라 실수도 많았는데 사람들은 모두 '예뻐, 예뻐!Lovely, lovely!' 하고 말해주었다.
잠들기 전에는 명상의 시간이 있었다. 사람들과 둥글게 모여앉아 함께 음악을 들으며 명상에 잠긴 동안 코와 겨드랑이에서 무언가 아주 찬 기운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러면서 온종일 계속되었던 발목의 통증이 가벼워졌다. 치유의 은사가 있다는 호스피탈레로 부부가 내 발목에 손을 얹고 기도해 주셨는데, 당신들이 한 일이 아니라서 자기들도 궁금하니 내일 아침에 상태를 알려달라고 하셨다. 정말이지 놀랍고 행복하고, 은총으로 가득한 시간이었다.
까미노와 친해지면서 이 길의 진가를 알아가고 있는 것 같다. 지금 1층 난롯가에선 슬로베니아 친구들이 이라체에서 담아온 와인을 마시며 기타를 퉁기고 있다. 멋진 밤이다. 추워서 더 좋은 건지도 모르겠다.
해가 그리운 건 나뿐만이 아닌가보다.
첫댓글 에잇! 못먹는 와인, 받아나 보자 ...서로의 영어를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아주 선명하게 들려왔다...사람들은 서로 자기나라 가이드북이 정확하다며 우겨댔지만 결론은 '며느리도 모른다'로 나왔다사람들과 둥글게 모여앉아 함께 음악을 들으며 명상에 잠긴 동안 코와 겨드랑이에서 무언가 아주 찬 기운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러면서 온종일 계속되었던 발목의 통증이 가벼워졌다. 치유의 은사가 있다는 호스피탈레로 부부가 내 발목에 손을 얹고 기도해 주셨는데, 당신들이 한 일이 아니라서 자기들도 궁금하니 내일 아침에 상태를 알려달라고 하셨다...놀라운 체험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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