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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cafe.daum.net/christarwm/8yJz/210
성령론 딜레마: 한국교회 성령세례론 유형 분석
배 본 철
1. 들어가는 말
그동안 한국 신학계에는 성령론에 대한 신학적 논쟁이 많았는데, 그 가장 커다란 논제는 성령세례의 정의와 시기 등 주로 성령세례론에 대한 이견들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1) ‘성령세례’가 한국교회 내에 매우 중요한 신학적, 목회적 논제임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한국 신학계는 교파와 신학 노선에 따라 제각기 다른 성령세례의 개념을 지니고 있음으로 인해 적지 않은 목회적 혼란과 신학적 논쟁이 야기되었다. 사실 현재까지도 신학계에는 성령세례에 대한 매우 난해하고 다양한 해석들이 소개되고 있으며, 이에 대해 주장하는 이들의 신학적 계보도 매우 복잡한 것이다.
이 연구는 한국교회사에 나타난 성령세례에 대한 다양한 견해들을 분석하고 정리하여 복잡한 성령세례론 논쟁의 화합을 이루는 일에 기여할 목적을 지니고 있다. 이를 위해 필자는 그동안 한국교회에 영향을 미친 성령론들을 역사적으로 분석하여 그 성격상 여섯 가지 유형의 성령세례론으로 정리하며, 동시에 이 서로 다른 유형들을 충분히 포괄할 수 있는 ‘성령세례의 양 차원’(Dual Dimension of Spirit Baptism)이라는 개념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리고 현재 성령론의 흐름 속에는 여러 전통들에 대한 이해와 조화의 정신 속에서 이들 사이의 장점을 상호 교류하며 보완하는 통합성을 갖춘 ‘통전적 성령론’(Holistic Pneumatology)이 전개되고 있다는 점을 사료(史料)를 통해 제시할 것이다.
2-1. 봉사의 능력을 위한 성령세례
봉사의 능력(power for service)에 핵심을 둔 성령세례론은 주로 근대 개혁파 성령운동2)의 한 특색이라고 본다. Asa Mahan이 1870년에 발행한 「성령세례」(The Baptism of the Holy Ghost)에서는 성령세례를 받게 되면 봉사와 거룩한 삶에 있어서의 능력을 받게 된다고 하였다.3) Charles G. Finney의 저술인 「능력의 부여」(The Enduement of Power)에서도, 성령세례의 능력을 통해 하나님의 계획인 지상명령(the Great Commission)을 성취하게 된다는 것이었다.4)
초기 한국교회에 파송되었던 영미 선교사들에게 좀더 친숙했던 성령세례론의 영향은 Dwight L. Moody와 그의 동역자인 Reuben Archer Torrey의 Moody Bible Institute 사역을 통해서도 많이 나타났다. 무디는 자신이 1881년에 저술한 「은밀한 능력」(Secret Power)에서 특히 신자는 봉사의 능력을 얻기 위해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야 한다고 강조했다.5) 무디에 의해서 강조되어지던 성령의 능력에 대한 가르침을 신학적으로 체계화한 토레이는 성령세례가 죄로부터 정결케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봉사의 능력을 위해서 주어진다고 강조하였다.6)
1930년대 평양 장로회신학교의 성령론 교재로 사용되던 「聖靈論」의 저자 중국인 가옥명(賈玉銘)은 성령세례 받은 증거가 靈德, 靈能, 靈力, 靈果에 있다고 봄으로서,7) 그 핵심은 성령의 열매와 함께 ‘봉사의 능력’에 두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성령세례가 중생 이후에 성령에 몰입되고 잠기는, 성령에 충만케 되는, 성령의 권능을 받는 체험이라고 했다.8)
1960년대 이전 뿐 아니라 이후에도 한국 개혁파 신학계에서는 성령론에서 있어서 중생과 성령세례를 구분하는 하나의 큰 노선이 있었다. 여기에 ‘봉사의 능력을 위한 성령세례’를 강조하여 한국교회에 큰 영향을 끼친 설교가로는 D. M. Lloyd-Jones를 또한 간과할 수 없다. 그는 성령세례의 주된 목적이 신자들로 하여금 권능과 담대함을 가지고 복음을 증거토록 하는데 있다고 보았다.9) 이인한을 필두로 하고 차영배, 박영선, 안영복, 하용조 등으로 그 계보가 이어지는 중생과 성령세례를 구분하는 노선의 학풍은 일반적으로 ‘봉사의 능력을 위한 성령세례’를 지지하고 있다.10) 그리고 이들의 노선은,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가옥명의 「聖靈論」과 초대 한국교회 부흥시대의 성령세례론, 그리고 더 올라가서는 근대 개혁파 성령운동의 ‘봉사의 능력’으로서의 성령세례론의 전통을 이어 받은 것으로 본다.
2-2. 정결과 능력의 성령세례
John Wesley로부터 출발한 완전 성화의 교리는 순간적인 체험을 통하여 신자는 마음속에 남아 있는 죄성으로부터 정결하게 씻음을 받게 되고, 이 원동력은 그리스도를 위한 사랑과 봉사의 승리하는 삶을 가능케 해준다고 하였다.11) 이같은 전통적 입장에 새로운 근대 웨슬리안 성결운동12)의 선구자인 Phoebe Palmer를 통해 ‘능력’으로서의 성령세례에 대한 강조가 많이 부가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성결은 곧 능력”13)이라고 했으며, “정화와 능력은 동일한 것”13)이라고 했다. 이렇게 하여 근대 웨슬리안 성결운동의 특성은 ‘정결과 능력의 성령세례’를 강조하는 데서 찾게 된다.
근대 웨슬리안 성결운동의 성령세례론이 한국교회, 특히 초기 성결교회에 접맥되는 과정에서 크게 영향을 주었던 책은 Thomas Cook의 New Testament Holiness, A. M. Hills의 Holiness and Power, George D. Watson의 A Holiness Manual 등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이 책의 저자들은 한결같이 ‘정결과 능력의 성령세례’를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뿐만 아니라 정결에 대한 해석에서도 근대 웨슬리안 성결운동의 전통인 ‘죄성제거설’(Eradication)14)의 노선을 견지하고 있는 점을 볼 수 있다.
‘정결과 능력의 성령세례’는 성결교회 내에서 김상준, 이명직, 김응조 등의 저술들, 그리고 <활천>, <성결> 등의 정기간행물들을 통하여 그 전통이 계승되었다. 현재 중생 이후의 ‘제 이차적 축복’(the Second Blessing)으로서의 성결 혹은 성령세례, ‘죄성제거설’로서의 성결론, 그리고 ‘정결과 능력의 성령세례’ 관념은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예수교대한성결교회, 구세군, 나사렛성결교회 등, 한국의 웨슬리안-성결 그룹 교단들의 공식적인 교리로서 채택되어 있다.
2-3. 그리스도의 전인적 통치로서의 성령세례
이 노선은 근대 개혁파 성령운동에 근거를 두었지만, Moody나 Torrey와는 달리, 성령세례의 주된 목적을 그리스도에 의한 전인적 통치에 둔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 William E. Boardman은 그리스도께 대한 온전한 헌신을 하고 난 후 신자는 ‘그리스도께서 거하신다는 의식적인 증거’(a conscious witness of Christ's indwelling)를 얻게 되는데, 이를 그는 두 번째 회심으로서의 ‘성령세례’라고 불렀다.15) 또 Adoniram Judson Gordon은 성령의 가장 중요한 사역이 신자들을 그리스도와 연합케 하고, 또 그들에게 그리스도와 연합된 유익을 깨닫도록 하는 일이라고 보았다.16)
이 외에도 F. B. Meyer, Andrew Murray와 같은 Keswick 운동의 지도자들 역시 ‘그리스도의 전인적 통치로서의 성령세례’를 강조하였다. Christian & Missionary Alliance(C&MA)의 창시자인 Albert Benjamin Simpson도 역시 ‘성령세례’라는 용어를 즐겨 사용하였다. 그는 성령의 사역과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십자가의 대속사역 사이의 관계성을 크게 강조하였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신자 안에 이루어주시는 성결은 성령세례를 통해 그리스도께서 신자 안에 오시는 체험이며, 성결의 체험을 통해 신자는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크리스천의 생활에 능력과 승리가 주어진다고 하였다.17)
‘그리스도의 전인적 통치로서의 성령세례’를 강조하는 저자들 중에 특히 머레이와 심프슨은 한국 교계에 널리 알려져 있다. 머레이의 번역된 경건서적들은 1980년대 이후부터 현재까지 폭넓은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다.18) 심프슨의 글들은 1931년과 1932년에 성결교회의 <活川>에 연재된 것을 비롯하여, 특히 1970년대 이후부터는 예수교대한성결교회와 C&MA와의 제휴관계 속에서 여러 권의 책들이 번역되고 있다.
2-4. 중생=성령세례, 이후 성령충만
<神學指南>에 Stanley T. Soltau(蘇逸道), G. Engel(王吉志) 등의 성령론이 처음 연재되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 후반이다. 이들 선교사들의 성령세례론은 중생한 자는 이미 성령세례를 받은 자라는 점을 전제하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듭난 신자가 성신의 권능 또는 성신의 충만을 받아야 할 것을 또한 강조하고 있다. 솔타우는 신자가 새롭게 성령세례를 받으려고 할 일이 아니라, 신자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았다는 말씀의 뜻을 깨닫는 것이 성령세례의 참 의미를 적용하는 일이라고 보았다.19)
박형룡의 성령론이 <神學指南>에 실리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후반부터인데, 그는 중생한 자는 이미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성령의 충만은 중생과 관계된 성령의 최초적 은사인 성령의 세례와는 마땅히 구별되어야 한다고 하였다.20) 그러자 박형룡의 저술을 필두(筆頭)로 중생과 성령세례의 동시성을 강조하는 노선의 저술들이 신성종, 김해연, 박형용 등을 통해 한국 신학계에 잇달아 소개되기 시작하였다.
이같은 성령론 노선에 절대적인 영향을 준 외국 신학자들로는 우선 Charles Hodge나 B. B. Warfield 등을 들 수 있는데, 그들은 성령 은사의 중단성(中斷性)과 중생과 연관하여 성령세례의 단회성을 강조한 바 있다. 그리고 Abraham Kuiper, Richard B. Gaffin, John R. Stott 등의 영향도 역시 이 노선에 힘을 주었다. 특히 대중적으로 국내에 큰 영향을 끼친 CCC의 Bill Bright이나 부흥사 Billy Graham도 역시 명확한 ‘중생=성령세례, 이후 성령충만’의 노선을 견지하였다.21)
2-5. 방언의 표적을 중시하는 성령세례
Charles F. Parham은 방언을 성령세례 받은 단 하나의 증거라고 최초로 강조하기 시작한 사람이었다. 그의 영향력은 1901년 Topeka와 1906년 W. J. Seymour가 이끈 Azusa 거리의 부흥에서는 물론, 현재까지 방언을 성령세례와 직결시키는 전통 오순절주의(Classical Pentecostalism) 신앙의 전 세계적 확산을 가져오게 하였다. 국내에는 하나님의성회가 ‘방언의 표적을 중시하는 성령세례’를 주장하는 전통 오순절주의의 대표적 교단이다. 이 노선의 가장 영향력 있는 저자로서는 조용기를 들 수 있다. 그는 중생과 성령세례는 명백히 다른 별개의 체험이라고 전제하면서, 성령세례를 받은 가장 명백한 외적 표적은 방언이라고 주장하였다.22)
그런가 하면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1960년대에 일어난 은사갱신운동(Charismatic Renewal)은 ‘방언의 표적을 중시하는 성령세례’를 권장하지만, 그 강도가 전통 오순절주의보다는 선택적이다. 국내에서 은사갱신운동가들의 저서들이 최초로 번역되어 소개되기 시작한 때는 1970년대 후반부터였다. John L. Sherill, Dennis J. Bennett, Francis MacNutt 등의 저서들이 번역되어 일반 독자들 사이에 친숙하게 소개되었는데,23) 이들의 저서에서는 방언을 거의 성령세례와 동일시하는 표현이 많이 발견된다.
2-6. 중생=성령세례, 이후 은사적 성령충만
일반적으로 제 3의 물결(the Third Wave)에서는 '성령세례'(Baptism with the Holy Spirit) 또는 ‘성령 안에서 세례 받아지는 것’(being baptized in the Holy Spirit)이라는 용어 대신, ‘성령충만’(filled with Holy Spirit) 또는 ‘성령에 의한 능력의 덧입힘’(empowered by the Holy Spirit)이라는 말을 즐겨 사용한다. 그 이유는 제 3의 물결 운동가들은 대부분 회심과 성령세례가 동시적 경험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중생하게 될 때 성령께서 내주하신다. 하지만 저절로 그분의 능력과 은사들을 체험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성령충만을 받아야 한다는 입장이다.24)
이 노선은 앞의 ‘중생=성령세례, 이후 성령충만’과 매우 유사하다는 점에서 개혁주의신학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여지가 크다. 그러나 반면에 성령의 초자연적인 은사들을 크게 활용한다는 점에서는 또한 개혁주의신학의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25) 이 점에서 볼 때 앞으로 ‘제 3의 물결’에 대한 개혁주의신학의 평가와 적용이 어떻게 진전될지 기대가 된다. ‘제 3의 물결’은 국내에 잘 알려진 John Wimber, Peter Wagner, Charles H. Craft, Benny Hynn 등의 사역과 저서의 영향으로 현재 많은 독자층과 지지자들을 얻고 있다.26)
3. 성령세례의 양 차원
필자는 앞에서 제시한 여섯 가지 유형의 성령세례론이 영적 사실과 경험의 ‘성령세례의 양 차원’으로 정리될 수 있다고 본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먼저 전제해야 할 것은, 성령세례라는 경험의 내용이 신자들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의 범주를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Clark Pinnock은 ‘세례’라는 용어가 전문적인 술어라기보다는 은유적인 표현으로 보면서, 이 체험을 단지 ‘제 2의 축복’이라는 틀에만 맞추기 보다는, 최초의 은사 체험인 회심을 통해 이미 우리에게 이루어진 일이 구체화되는 과정으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라고 보았다.27) 이한수도 말하기를, “그것들 자체는 신자들이 예수님을 처음 믿을 때 비로소 누리게 되는 권리들의 특별한 측면들이요 경험들이다. 이 점에서 신약성경은 두 개의 축복을 구분하지 않는다”28)고 하였다. 김광식도 역시 성령세례 체험에 대해서 말하기를, “이것은 새로운 것이라기보다 이미 그리스도인들이 받은 바를 활성화하는 것 뿐이다”29)라고 하였다.
좀더 부언하자면, 죄성의 제거로서의 성령세례를 강조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신자와의 성령의 매개를 통한 십자가의 연합의 진리 속에 이미 포함된 것이다. 또 봉사의 능력으로서의 성령세례라 할지라도, 그것은 그리스도의 영으로서의 성령이 지닌 능력의 범주를 초월하는 것이 아니다. 그 성령은 이미 거듭날 때 내주하시는 것이다. 방언의 표적을 중시하는 성령세례라 할지라도, 그 방언 체험이라는 현상은 이미 거듭난 신자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의 ‘나타남’(manifestation)인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고려할 수밖에 없는 점은, 신자의 영적인 경험에만 호소하는 신앙은 복음적 신앙의 근거를 흐리게 할 때가 많다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 치우치게 될 때의 위험성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지적되고 있는데, 한 예로 이한수는 성령세례를 회심의 체험과 구별하는 것은 하나의 경험론적 이원론으로서 성령운동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문제점들을 야기시킨다고 보았다; (1) 경험론적 이원론은 아직 ‘극적인 경험’을 가지지 못한 자들에게는 성령 체험과 은사의 가능성에 관한 부정적 기대를 심어주게 되는 반면, 그런 경험을 하고 난 자들에게는 과도한 자긍심을 심어주게 된다. (2) 성령 체험을 하나님의 선물로 보지 못하고 그것을 자신의 믿음의 성취로 생각하는 신자들은, 자칫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구분하여 영적 엘리뜨 의식을 갖게 됨으로써, 교회의 화평을 깨뜨리고 분쟁을 일으킬 수 있다. (3) 한층 더 나쁜 것은, 경험론적 이원론이 카리스마적 교단과 기성 교단의 분열에 투영되어 소위 발전된 경험론적 이원론을 끌어내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30) 필자도 역시 이같은 경험론적 이원론이 야기시키는 문제의 심각성을 좌시(坐視)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한편에서의 문제도 역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성령에 대한 조명을 성경 내용의 해석학적 연구만 의존하고 인간의 신앙 경험의 차원을 간과할 경우, 이것 역시 전술한 경험론적 이원론의 폐해에 못지 않는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성경에는 분명한 영적 사실(spiritual truth)이 제시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의 삶 속에서는 이 영적 사실에 대한 다양한 경험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과연 신자의 성령 체험이 성경의 영적 사실에 입각한 획일된 양상으로만 일어난다고 볼 수 있는가? 만일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라고 한다면, 우리는 당연히 성경의 영적 사실의 차원 위에서 다양한 경험적 적용을 일구어내는 작업에 노력해야 할 줄로 안다. 적어도 이러한 노력은 앞으로 복음적 성령운동의 확산과 건전한 성령 연구에 있어서 필수적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성령세례’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영적 사실의 차원과 함께 경험의 차원 역시 심도 있게 다루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영적 사실의 차원’은 일반적으로 성경에 명확하게 그리고 획일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예를 들면 롬 6:1-10이나 고전 12: 13과 같은 구절은 성령세례의 영적 사실의 차원을 획일적으로 다룬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영적 사실로서의 성령세례는 당연히 획일적 표현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성경에서도 반드시 성령세례의 영적 사실의 차원만 제시된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누가복음이나 사도행전의 ‘성령의 권능’, ‘성령 받는 것’, ‘성령이 임함’ 등에 대한 기록들은 성령세례의 경험적 차원에 더욱 호소하고 있는 것으로서, 반드시 획일적이라고는 볼 수 없게 여러 양상들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영적 사실의 차원과는 달리, 경험의 차원에서의 성령세례는 얼마든지 한번 이상 경험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한영태는 성령세례가 구속사적인 면에서는 반복될 수 없는 사건이지만, 그러나 경험적인 차원에서는 신자들의 경험 속에 반복되어지며, 이 체험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31)
그리고 ‘세례’라고 하는 말이 반드시 일회적이어만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 일회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성령세례를 자꾸 물세례와 연관 짓기 때문이 아닐까. John R. Rice는 세례란 담그고, 가라앉히고, 덮고, 압도하고, 적신다는 등의 의미를 지닌 것으로서, 그것은 ‘시초’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한번 성령세례 받은 사람이 전에 받은 것처럼 두 번째 성령세례를 받지 못할 논리적인 이유가 없다고 보았다.32) 그러므로 성령세례나 성령충만이나 실제로는 똑같은 경험을 표현한다고 전제한다면, ‘성령세례는 일회적이요 초기적이며 그 후에는 성령충만의 경험이 반복된다’고 하는 통념적 이론도 결국 ‘세례는 반드시 일회적이어야만 한다’는 관념에서 솟아난 것이므로 재고할 필요가 생길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물세례야 당연히 그리스도인 된 표식으로서 일생에 단 한번 받으면 충분하다. 두 번 이상 재확인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성령세례의 경우를 볼 때, 먼저 영적 사실의 차원에서는 일회적으로 중생과 연관 지어 간결하게 설명을 마칠 수 있다. 그러나 또 한편 경험의 차원에서는 반드시 일회적이어야 한다고 제한할 필요가 없게 된다.33) 세례라는 말의 용법상, ‘성령에 충만히 세례되었다’, 또는 ‘성령세례를 받았다’는 표현을 반복적으로 쓰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더군다나 신자의 경험의 차원을 볼 때,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성령세례의 내용인 ‘그리스도와의 연합’, ‘정결’, ‘봉사의 능력’, ‘그리스도의 전인적 통치’, ‘성령의 나타남’ 등이 일생에 걸쳐 단 한번에 모두 경험되는 것이 전혀 아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웨슬리안 성결운동에서 분파된 ‘제 3의 축복’(the Third Blessing) 그룹이 좋은 한 예이다. 그들은 웨슬리안 성결운동 속에서 성결과 능력 사이의 논제가 그치지 않는 것을 보아왔다. 경험적으로 볼 때, 그들은 ‘온전히 성화’되었다고 고백한 많은 이들에게 ‘봉사의 능력’에 있어서는 힘있게 사역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제 2의 축복은 온전한 성결이고, 그 뒤에 따르는 제 3의 축복이 성령세례”34)라고 하는 입장으로 발전시켰다. 만일 ‘성령세례의 양 차원’에 대한 이해가 이들에게 있었더라면, 미국 웨슬리안-성결 그룹 내에서의 교단 분열을 억제하는 좋은 도구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성령세례의 양 차원’은 신자의 삶속에 실제적으로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가? 이미 중생과 성령세례를 구분하는 교리를 따르고 있는 이들에게는, 이 성령세례의 ‘영적 사실의 차원’이 정말 자기들의 삶속에 적용되고 있는가를 확인해 보아야 한다. 그들이 형식적으로만 ‘제 2의 축복’ 교리를 되뇌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영적 사실에 대한 앎에 근거해서 성령세례의 능력이 그들의 삶에 나타나기를 위해 ‘성령세례의 영적 사실의 차원’에 대한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35)
한편 중생과 성령세례의 동시성을 강조하는 교리적 노선의 사람들도 성경에서 말하는 성령세례의 능력이 그들의 삶속에 ‘경험의 차원’으로 구현되고 있는지를 확인해 보아야 한다. 아무런 능력도 없는 이에게 ‘당신은 이미 성령세례 받았으니 더 이상 구할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것이 때로는 영적 태만을 방치시켜주는 도구가 될 수도 있다. 거듭난 자는 당연히 성령세례의 능력을 경험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런 점에서 권성수가 성령세례의 능력과 연관지어, 개혁주의 체계 위에 서있는 자신의 성령론을 조정해보고 싶다고 자신의 저서에서 고백한36) 용기있는 발언은 높이 평가할 만 하다.
그러므로 현재까지도 특히 한국 개혁주의신학 내에서 혼선을 빚고 있는 성령세례론의 양 노선간의 갈등은 충분한 조화의 길을 찾을 수 있다.37) 어느 노선이든지 자기가 지니고 있는 장점은 손상되지 않는다. 중생과 성령세례의 동시성을 강조하는 노선에서는 성령세례의 ‘영적 사실의 차원’을 보전하고 있다. 중생과 성령세례를 구분하는 노선에서는 성령세례의 ‘경험의 차원’을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상대방 노선의 강조점을 자신의 노선에 용인함에 있어서 무리가 일어날 리 없다. 중생과 성령세례를 구분하는 입장에서는 ‘성령세례의 영적 사실의 차원’에서의 능력을 확인해 나가면 된다.38) 한편 중생과 성령세례의 동시성을 강조하는 입장에서도 역시 ‘성령세례의 경험의 차원’을 삶속에서 실증해 나가면 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성령세례의 양 차원’에 대한 이해는 한국교회 내의 성령운동의 혼잡함과 성령론에 있어서의 불협화음을 치유함에 있어서 실제적인 적용성을 지닌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이해에 근거한 성령운동의 확산을 통해, 우리는 성경에 나타난 복음적 성령세례의 능력을 한국교회 내에 풍성히 구현시켜 나갈 수 있다고 본다.
4. 나오는 말
본 논고를 통해 정리한 성령세례의 여섯 가지 유형은 역사 안에서 서로 교류하면서 각자 전통의 장점들은 보유하고 타 전통이 지닌 장점들을 흡수하는 경향으로 발전되어간다. 서로 다른 성령론 사이의 갈등, 신학적 비평과 탐구 작업, 성령론의 자체 정화와 조화, 그리고 바람직한 성령론을 향한 발전 등의 과정을 거쳐가면서, 이러한 진전이 가능한 이유는 복음적 성령운동의 동인(動因)에 성령의 주권적 인도하심이 개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사적 진전의 뚜렷한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1) 주로 근대 웨슬리안 성결운동의 성격으로 대표되는 ‘정결과 능력의 성령세례’ 유형에서는 ‘정결과 능력’ 모티브의 보전과 함께, 점차적으로 성령의 은사에 대한 포용성이 눈에 띠게 나타난다.39) 이는 19세기말과 20세기초에 웨슬리안-성결 그룹 내에서 방언 등 은사 문제로 인해 교단 분열이 잦았던 것과는 대조되는 현상이다.40) 그런가 하면 한영태가 말하기를, “기독론이 무시된 채 성령 체험이 강조되면 광신주의자나 신비주의에 빠질 위험이 크다. 성서적인 기독론 위에 성령론이 강조되어야 한다”41)고 한 바와 같이, 현대의 웨슬리안 성결론은 성령에 대한 이해를 기독론과의 연관속에서 다루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의 연합’ 모티브에 중점을 둔 하나님 형상의 회복 또는 ‘그리스도 닮기’(Christlikeness)로서의 성결론을 강조하는 경향이 짙어지고 있다.42)
(2) ‘봉사의 능력을 위한 성령세례’, ‘그리스도의 전인적 통치로서의 성령세례’, ‘중생=성령세례, 이후 성령충만’ 등의 세 유형은 개혁파 계통의 다양한 성령세례론을 나타낸다. 이 유형들은 개혁파 성령론의 강조점인 ‘그리스도와의 연합’ 모티브의 보전과 함께, 전에는 받아들이지 못하던 방언이나 신유 등의 은사 사용이라든가 기사와 이적을 전도의 현장에 적용하는 일 등을 신학적으로 수용하려는 움직임이 점차 확대되고 있다.43) 그런데 앞으로 이같은 현상이 계속 짙어진다면, 결국 이 세 가지 중에서 정통 개혁주의 성령론을 대표하는 ‘중생=성령세례, 이후 성령충만’ 유형은 ‘중생=성령세례, 이후 은사적 성령충만’이라는 ‘제 3의 물결’과 유형상 다를 바 없다는 흥미로운 분석이 나오게 된다.44)
(3) 그런가 하면 은사적 기독교에서 볼 때, 전통 오순절주의에서는 성령세례 받은 첫 증거가 방언이라고 보았지만, 은사갱신운동을 거쳐 ‘제 3의 물결’에 이르러서는 방언에 대한 강조가 성령의 여러 가지 은사 중의 하나라고 보는 입장으로 변화되어왔다. 그래서 최근에는 전통 오순절주의자들도 이러한 영향을 많이 받아서, 반드시 방언을 성령세례 받은 첫 표적이라고 보기보다는 여러 성령의 은사 중의 하나로 보는 경향이 짙어져 가고 있다.45) 그리고 전에는 상대적으로 미약하던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든가 ‘정결’ 모티브 등의 강조가 많이 보강(補强)되고 있다.46) 또 ‘제 3의 물결’에서는, 실용적 효율성의 차원과 또 개혁주의 신학의 영향을 받아, 성령세례라는 오해의 소지가 많은 용어보다는 성령충만이라는 용어를 더 많이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현재 ‘제 3의 물결’의 지도자들 가운데는 신학적으로 개혁주의적 배경을 지니고 있는 이들이 대다수라고 하는 점이 이 사실을 대변해 주고 있다.47)
필자는 서론에서, 앞으로는 성령론의 여러 전통들 사이의 장점들을 상호 교류, 보완한 통합성을 갖춘 ‘통전적 성령론’이 적용될 것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위에서 예로 든 성령론의 역사적 진전에 따른 예상되는 변화를 조사해 볼 때, 이 모든 노선에 가장 보편적인 현상은 ‘그리스도와의 연합’ 모티브와 함께 은사를 동반한 복음 증거의 능력의 강조가 모든 계통의 성령세례 유형에서 더욱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현상에 대한 점진적인 강조가 현재 통전적 성령론이 나아갈 방향이라고 본다.48) 그러므로 통전적 성령론의 내향적인 목표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그리스도 닮기’를 실현시켜나가는 일이다. 이를 위해 역사적으로 점증되고 있는 성령론의 ‘그리스도와의 연합’ 모티브가 있다. 또 통전적 성령론의 외향적인 목표가 있는데, 그것은 주님의 지상명령인 복음 전파의 완수를 위해 능력을 주시는 일이다. 이를 위해 현대의 성령운동은 은사를 동반한 복음 증거의 능력을 활용하는 뚜렷한 역사적 진전의 사실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1) 특히 1970년대와 80년대는 ‘聖靈洗禮’(Baptism with/in the Holy Spirit)의 정의에 관한 각 신학 노선의 차이는 한국교회사에 있어서 뜨거운 ‘성령론 論爭의 시기’를 특징 지워 주었다. 오순절 계통은 성령의 봉사적인 능력, 즉 ‘성령의 나타남’(고전 12장)에 강조점을 둔 은사운동이었고, 반면에 장로교 계통의 성령운동은 전적으로 성령의 내면적인 감화(感化)에 의한 인격적인 변화에 초점을 둔 회개와 성령의 열매(갈 5장)에 관한 것이었다. 그런가 하면 성결파 계통에서는 ‘성령의 주(主)되심’(갈 2:20)을 강조한 성결론(聖潔論)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나타남’에 대한 언급이 거의 나타나지 못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런 이유로 인해 놀랍게도 당시의 한국교회와 신학의 역사는 이 세 가지 서로 상충되는 성령론의 성격 중 그 어느 것에도 충분히 만족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오순절 계통의 성령론은 너무 많은 약점을 지니고 있었고, 장로교와 성결파 계통의 것 역시 약점이 없지 않았다. 그것은 이 세 가지 조류의 성령론이 한때 한국교회를 고무시켰던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당시 신학자들 간에 서로 간의 약점에 대한 비판이 날카롭게 가해졌던 점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배본철, 「선교와 에큐메닉스 중심의 한국교회사」 (서울: 문서선교 성지원, 2002), 개정증보판, 331.
2) 근대 개혁파 성령운동이란 19세기 말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칼빈-개혁주의 노선에서 일어난, 능력 있는 크리스천의 삶을 목표로 성령의 인격과 사역에 강조점을 둔 부흥운동을 일컫는다. 배본철, 「개신교 성령론의 역사」 (안양: 성결대학교출판부, 2003), 112.
3) Asa Mahan, The Baptism of the Holy Ghost (New York: Palmer and Hughes, 1870), 52 ff.
4) Charles G. Finney, "The Enduement of Power", Asa Mahan, The Baptism of the Holy Spirit (New York: Palmer and Hughes, 1870), 231. 5) D. L. Moody, Secret Power (New York: Fleming H. Revell, 1881), 49, 51. 6) R. A. Torrey, The Baptism with the Holy Spirit (New York: Revell, 1897), 18. 7) 賈玉銘, 「聖靈論」, 정재면 역, W. D. Reynolds 감수 (평양: 장로회신학교, 1931), 104. 8) 賈玉銘, 99. 9) D. M. Lloyd-Jones, 「성령론」, 홍정식 역편 (서울: 새순출판사, 1986), 104.10) 중생과 성령세례를 구분하는 근대 개혁파 성령운동의 학풍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을 참조하라; 이인한, 「성령의 불세례」 (서울: 백합출판사, 1980), 60; 차영배, “요한의 세례와 성령의 세례”, <신학지남> (1980, 봄), 100; 차영배, “오순절 성령강림의 구원사적 의의”, <신학지남> (1982, 여름), 6-7; 차영배, “중생의 성신세례”, <신학지남> (1983, 가을), 4-6; 안영복, 「성령론: 무엇이 잘못인가」 (서울: 성광문화사, 1993), 45; 하용조, 「성령받은 사람들」 (서울: 두란노, 1999), II: 160.
11) John Wesley, The Letters of the Rev. John Wesley, A.M., ed. John Telford (London: Epworth Press Letters, 1931), III:192.12) 웨슬리의 성결론과 근대 웨슬리안 성결운동과는 서로 구분되는 개념이다. 웨슬리의 성결론은 무엇보다도 웨슬리 본연의 신학적 전통을 따르는 노선이라는 점에서 19세기 미국 복음주의의 산물인 근대 웨슬리안 성결운동과는 그 성격의 차이를 지닌다. 예를 들어서 ‘성령세례’라는 용어는 웨슬리의 상용어(常用語)가 아니라, 웨슬리와 John Fletcher와의 성령세례론 논의를 거치면서 형성된 후, 마침내 19세기의 복음적 부흥운동의 경향이 성결론에 첨가된 결과로 인해 활용되었다. 그런가 하면 죄성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도 근대 웨슬리안 성결운동은 당시 인간의 본성에 대한 낙관적인 견해에 반대하기 위해 인간의 부패성을 더욱 분명히 강조하게 되었고, 마침내 웨슬리의 표현보다는 훨씬 과격한, 죄성을 인간의 몸 속에 있는 어떤 요소로 이해하고, 성화는 이것을 제거하는 것으로 보게 되었다.
13) Phoebe Palmer, Four Years in the Old World (New York: W. C. Palmer, Jr., 1870), 206.14) 근대 웨슬리안 성결운동의 죄성제거설(Eradication)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는 배본철, “웨슬리안 성결론의 죄성제거설 형성과정”, <성경과 신학> 한국복음주의신학회, 33권, (2003), 112-137를 참조하라.
15) W. E. Boardman, The Higher Christian Life (Boston: Henry Hoyt, 1859), 198, 237. 16) Adoniram Judson Gordon, The Ministry of the Spirit (Philadelphia: American Baptist Publication Society, 1896), 24. 17) A. B. Simpson, The Christ Life (New York: Christian Alliance Pub., 1912), 69.18) 한국교회에 번역되어 소개된 Andrew Murray의 경건서적 중에는 「기도생활의 축복」, 「보다 깊은 삶을」, 「헌신」, 「주님과 동행하는삶」, 「언약」, 「나를 허물고 주님을 세우는 삶」, 「거룩」, 「하나님을 위해 어떻게 일할까」, 「주안에 거하라」, 「오순절 성령충만」, 「순종」, 「그리스도의 영」, 「계약신앙」, 「겸손」 등이 있다.
19) Stanley T. Soltau, “성신의 하시는 일”, <神學指南> (1926.4), 24. 20) 박형룡, 「교의신학: 구원론」 (서울: 은성문화사, 1972), V: 51-4.21) ‘중생=성령세례, 이후 성령충만’ 노선의 성령론을 따르는 이들의 견해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들을 참조하라; B. B. Warfield, Miracles: Yesterday and Today, Real and Counterfeit (Grand Rapids, Mich.: Eerdmans, 1965), 5-6; Richard B. Gaffin, 「성령은사론」, 권성수 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0), 25; Richard Gaffin, Perspectives on Pentecost: New Testament Teaching on the Gift of the Holy Spirit (Grand Rapids, Mich.: Baker Book House, 1979), 144; John R. Stott, The Baptism and Fullness of the Holy Spirit (Chicago: Inter Varsity Press, 1970), 30-31; John R. Stott, 「오늘날의 성령의 사역: 세례, 충만, 열매, 은사」, 조병수 역 (서울: 한국기독교교육연구원, 1983), 55; Bill Bright, 「영적 혁명」, 임성택 역 (서울: 생명의 말씀사, 1980), 81; Bill Bright, 「능력있는 삶과 성령」, 한국대학생선교회 역 (서울: 순출판사, 1992), 85; Billy Graham, 「성령론」, 전민식 역 (서울: 충현출판사, 1979), 80.
22) 조용기, 「5중복음과 삼박자 축복」 (서울: 서울서적, 1994), 117-8.
23) 은사갱신운동가들의 성령세례론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들을 참조하라; John L. Sherrill, 「방언을 말하는 사람들」, 김의자 역 (서울: 보이스사, 1977), 194; Dennis J. Bennett, 「성령세례와 방언」, 김의자 역 (서울: 보이스사, 1990); Dennis and Rita Bennett, 「성령과 나」, 황명희 역 (서울: 두란노, 1993), 34; Francis MacNutt, 「성령의 권능이 임할 때」, 예영수 역 (서울: 예루살렘, 1995), 4.
24) John Wimber, 「능력 포인트」, 김태진 역 (서울: 도서출판 솔로몬, 1997), 195-6.25) 개혁주의신학과 초자연적 성령의 은사의 관련성에 대해서는 필자가 한국교회사속의 방언 문제에 대해 국제신학학술대회에서 발표한 내용에 대한 다음의 기사를 참조하라; 배 교수는 ‘정통 개혁주의 성령론은 신학적으로는 분명히 방언이나 예언 등의 초자연적 은사의 종료를 말하고 있으나, 목회현장에서는 이를 금지시키기 힘든 상황이다’ 라고 지적했다. ”21C 교회를 위한 복음주의 신학의 사명“, <크리스천투데이> (2005.10.12) 9면.
26) 국내에 소개된 대표적인 제 삼의 물결론자들의 성령세례에 대한 견해는 다음의 글들을 참조하라; John Wimber, 「능력전도」, 이재범 역 (서울: 도서출판 나단, 1988), 192; John Wimber, 「능력 포인트」, 김태진 역 (서울: 도서출판 솔로몬, 1997), 195-6; Peter Wagner, 「제 3의 바람」, 정운교 역 (서울: 나눔터, 1994), 27-8; Benny Hinn, 「안녕하세요 성령님」, 안준호 역 (서울: 열린책들, 1993), 78; Benny Hinn, 「어서오세요 성령님」, 오복수 역 (서울: 은혜출판사, 1996), 41; Charles H. Craft, 「능력 그리스도교」, 이재범 역 (서울: 도서출판 나단, 1992), 274.
27) Russell Spittler(ed.), Perspectives on the New Pentecostalism (Grand Rapids, MI: Baker, 1976), 186.
28) 이한수, “한국교회 성령 이해 문제점을 진단한다(1)”, <월간 목회> (1992.3), 124. 29) 김광식, 「조직신학」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0), II: 567. 30) 이한수, “한국교회의 성령 이해의 문제점”, <신학지남> (1991, 가을), 120. 31) 한영태, 「삼위일체와 성결」 (서울: 성광문화사, 1992), 275. 32) John R. Rice, The Power of Pentecost (Murfreesboro, Tennessee: Sword and the Lord Pub., 1949), 155-6.33) 박명수는 성화의 단계가 중생과 성결로 이루어진다고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좋은 구조이지만, 이것을 지나치게 도식화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역사는 사람의 개성을 따라서 다양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모든 종교 체험을 언제나 두 단계로 고정시켜 설명할 수는 없다는 견해이다. 박명수, “한국성결교회 성결론의 배경과 그 의의”, <活川> 473호(1993.3), 99.
34) Richard Gilbertson, The Baptism of the Holy Spirit (Camp Hill, Pennsylvania: Christian Publications, 1993), 149.35) 이런 점에서 볼 때, ‘성결’과 관련된 성령세례론에 있어서 웨슬리안 성결운동과 Keswick 계통은 조화점을 찾게 된다. 웨슬리안 성결운동의 ‘죄성제거설’은 영적 사실의 차원을 강조하는 성결론이다. 왜냐하면, 성결의 근원은 성서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하여 죽었다’고 하는 영적 사실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이 점을 강조할 때 당연히 ‘죄성제거설’이 나올 수 밖에 없다. 한편 Keswick의 노선은 경험의 차원을 강조하는 성결론이다. 이 노선은 구체적인 경험을 통해 어떻게 죄의 유혹을 이겨나가는가에 대한 경험의 차원을 강조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죄가 죽었다’고 외치더라도 죄의 유혹을 받지 않는 사람은 없다. 즉 죄의 유혹은 경험의 차원이다. 그렇다면 ‘이미 죽었으니까’의 영적 사실의 차원을 적용하여 경험적으로 죄의 유혹에서 승리하는 경험을 사는 것이 바로 이 두 노선상의 조화점인 것이다. 그러므로 영적 사실과 경험의 차원은, 결코 상호 논쟁의 대상이 아닌, 성령세례의 충족한 이해를 위해 함께 길을 가는 것이다.
36) 권성수는 말하기를, “필자의 성령론을 조정하는 방향으로 성찰을 해보고 싶은 것도 솔직한 고백이다. 성령세례가 최초의 경험이라는 점에서 필자가 아직 고정되어 있으나, 성령세례가 능력을 수반하는가 하는 질문에는 ‘그렇다’고 대답하고 싶은 충동이 일고 있다...... 만일 성령세례가 중생과 동일할 경우, 중생 때에 이런 능력이 수반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만일 성령론이 위와 같이 조정될 가능성이 있다면, 성령세례는 중생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고 중생과 일치할 수도 있겠지만, 그 후도 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올 수도 있다”라고 하였다. 권성수, 「종말과 영성」 (서울: 도서출판 횃불, 1995), 100-1.
37) 한국 개혁주의신학 내에서 야기되어온 성령론의 갈등과 또 이에 대한 조정에 관해서는 배본철, 「한국교회와 성령세례」 (안양: 성결대학교출판부, 2004), 73-140을 참조하라.
39) 최근의 웨슬리안 성결운동 내에 나타나는 은사주의적 경향성에 대해서는 필자의 다음 글을 참조하라; Bonjour Bay(배본철), "The Current Tendencies of the Wesleyan-Holiness Movement and the Growth of Pentecostal-Charismatic Christianity", Asian Journal of Pentecostal Studies, 7:2 (July 2004), 255-264.
42) R. Larry. Shelton, "A Wesleyan/Holiness Agenda for the Twenty-First Century". Wesleyan Theological Journal (Fall, 1998) 33:2, 70; 그리고 박명수는 그동안 웨슬리안 성결론이 너무 죄론과 관련되어 발전해 왔다고 했다. 그러나 앞으로는 하나님 형상의 회복이라는 적극적인 측면으로 전개되길 바라며, 사실 부패성의 제거는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이라고 하였다. 성결을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으로 보는 것은 웨슬리 자신과 칼빈, 그리고 동방교회 서방교회를 포함하는 폭넓은 전통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박명수, “한국성결교회 성결론의 배경과 그 의의”, <활천> 473호(1993.3), 99; 동방 정교회의 전통에서 볼 때 성령께 대한 가장 큰 모독은 성령을 오늘날 체험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과 제 1세기에 성령께서 하듯이 오늘날도 크리스천들을 신화(deify)할 수 있다는 점을 부인하는 것이다. C. J. de Catanzaro (ed.), Symeon the New Theologian: The Discourses (New York: Paulist Press, 1980), 34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