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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한 혁명가, 그러나 잊을 수 없는. - 주세죽과 박헌영
인류를 커다란 공룡에 비유해 본다면, 그 머리는 20세기의 마지막 부분에서 바야흐로 21세기를 넘보고 있는데, 꼬리 쪽은 아직도 19세기의 마지막 부분에서 진흙탕과 바위산 틈바구니에서 피투성이가 되어 짓이겨지면서 20세기의 분수령을 넘어서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이런 그림이 떠오르고, 어떤 사람들은 이 꼬리 부분의 한 토막이다.-이런 생각이 떠오른다. 불행하게도 이 꼬리는 머리가 어디쯤 가 있는지를 알 수 있는 힘-의식의 힘을 가지고 있다. 이런 이상한 공룡의 그런 이상한 꼬리다. 진짜 공룡하고는 그 점에선 다른 그런 공룡이다. 그러나 의식으로만 자기 위치를 넘어설 수 있을 뿐이지 실지로는 자기 위치-그 꼬리 부분에서 떠날 수 없다. 이 점에서는 진짜 공룡과 다를 바 없다. 꼬리의 한토막 부분을 민족이라는 집단으로 비유한다면 개인은 비늘이라고 할까, 비늘들은 이 거대한 몸의 운동에 따라 시간 속으로 부스러 떨어진다.그 때까지를 개인의 생애라고 불러볼까. 옛날에는 이 비늘들에게는 환상이 주어져 있었다. 비록 부스러져 떨어지면서도 그들은 이러저러한 신비한 약속에 의해서 본체 속에 살아남는 것이며 본체를 떠나지만 결코 떠나는 것이 아니라는, 그러나 오늘의 비늘들에게는 그런 환상이 거두어졌다. 그리고 상황은 마찬가지다. 그러나 살지 않으면 안된다. 비늘들의 신음이 들린다. 결코 어떠한 물리적 계기에도 나타나지 않는,듣지 않으려는 귀에는 들리지 않는, 이런 그림이 보이고 이런 소리가 들린다. 20세기 말의 꼬리의 비늘들에게는 한 조각 비늘에 지나지 않으면서 불행하게도 이런 일을 알 수 있는 의식의 기능이 진화되어 버린 것이다. 이 침묵의 우주공간 속을 기어가는 <인류>라는 이름의 이 공룡의,<역사>라는 이름의 이 운동방식이 나를 전율시킨다.
최인훈,<화두 1>,1994, 머릿말에서 인용.
쓰라는 소설은 안 쓰고 오늘은 뻘 짓 한 번 해 볼 랍니다.
다프네 님이 올려주신 백석과 자야에 관한 글을 읽다가 동시대를 살았던, 그러나 전혀 다른 세상을 꿈꾸었던 인물들을 소개하고픈 마음이 생겨 내 평생 처음, 이런 종류의 글을 다 써보게 되네요.
전 어릴 때부터 위인전 읽는 거 안 좋아했었습니다. 불우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초인적인 인내와 노력으로 민족과 인류를 구원하는 업적을 이룬 분들에 대한 칭송은 결국, 봐라, 근데 넌 뭐냐, 배불리 먹고,입고,자면서 고까짓 것 가지고 울고 불고,사네,죽네...다 핑계고 엄살이다, 뭐 이런 식의 질타를 강요당하는 것 같아서였던 것 같습니다.
머리 굵어지면서 부터는 조금 다른 이유로 자서전이니, 평전이니 하는 역사적 인물을 조명하는 책들 별로 안 읽었습니다. 어떤 거부감 보다는 별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었지요. 역사적 인물은 그 역사적 맥락 속에서 일종의 사물처럼, 그 드러난 행적으로 객관적으로 위치지워지고 판단되면 충분하다는 생각이 컷던 것 같습니다.(제가 좀 드라이~ 합니다.)
저도 나이가 드나봅니다. 역사 속에서 시대와 호흡하고 시대와 맞섰던, 그럼으로써 역사를 이끌려고 노력했던 인간들, 그 들의 지난했던 삶을 조금 더 가까이 들여다 보고 싶단 생각도 들더란 말이지요.
주세죽과 박헌영, 그들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박헌영은 다들 아시지요?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 제 기억으론 언급이 안됐던 인물인 것 같은데, 요즘 국사 교과서는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국사 교과서가 구석기, 신석기 시대에 할애하는 것 만큼 만이라도 해방 전후사의 현대사에 분량을 할애한다면 적어도 세 번 정도는 박헌영이라는 이름이 오르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친일,수구 세력이 정치판에서 사라진 후에나 가능한 일입니다.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조선에 태어난 그는, 평생을 조국의 독립과 조선 민중의 해방을 위해 헌신한 1세대 사회주의자였습니다. 1900년도에 태어났으니 그의 인생의 활로를 크게 한바퀴 돌려놓은 1919년의 3.1운동에 가담한 것은 그의 나이 19세일 때 였겠군요. 당시 경성고등보통학교(지금의 서울 고등학교)3학년에 재학 중이던 그는 조국의 해방을 위해 열성적으로 운동에 가담했고 그 과정에서 처음으로 사회주의 사상을 접했다고 합니다.
전국을 ‘대한독립 만세’의 물결로 뒤덮었던 감격의 순간도 잠시, 다음 해, 일제의 탄압을 피해 그는 약관 20세의 나이로 상해로 정치적 망명길에 오릅니다. 당시 상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자리 잡고 있었을 뿐 만 아니라 제국주의 세력에 의해 수탈당하고 있던 동아시아 식민지 국가들의 젊은 청년들이 은신하며 고국의 해방을 도모하던 도시였습니다. 그 곳에서 그는 활발하게 사회주의 운동을 펼치는 한편, 그의 인생 전반에 있어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두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의 평생의 사상적 동지이자 삶의 조력자였던 김단야가 그 한 명이고, 나머지 한 명이 바로 이 글의 또 한 명의 주인공, 주세죽입니다.
주세죽, 익숙한 이름인가요? 사실 저는 이 번에 처음 그 녀의 이름을 알게 되었습니다. 검색의 생활화, 먼저 위키피아 백과사전으로 검색한 그 녀에 대한 소개부터 볼까요?
주세죽(朱世竹, 1901년 6월 2일 ~ 1953년)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며 해외에서 활동한 사회주의 운동가이기도 하다. 박헌영의 첫번째 부인이며, 1933년 김단야와 재혼하였다. 소련에서 사용했던 러시아식 이름은 한베라이고, 다른 이름은 코레예바(조선 여자라는 뜻)이다.
1901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나 함흥의 영생여학교에 2년 동안 다녔으며, 3·1운동에 참가하다가 체포되어 1개월 수감되었다.
1921년 4월 상하이[上海]에서 음악학교를 다닌 후 이듬해 5월 귀국하였으며, 1924년 5월 허정숙(許貞淑)·박원희(朴元熙)·정종명(鄭鍾鳴) 등과 함께 사회주의 여성사상 단체인 조선여성동우회를 결성하고 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1925년 1월 허정숙·박원희 등과 함께 조선여성해방동맹을 결성하였고, 그해 2월 화요회가 전조선운동의 조직적 통일과 근본 방침을 토의하기 위하여 주도한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 준비위원이 되었으며, 그해 4월 고려공산청년회 중앙후보위원에 선임된 뒤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였다.
같은 해 11월 제1차 조선공산당 검거사건과 1926년 6월 제2차 조선공산당 검거사건 때 체포되었으나 모두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1927년 5월 김활란(金活蘭)·유영준(劉英俊)·최은희(崔恩喜)·박원민(朴元玟)·정종명(鄭鍾鳴) 등과 함께 항일여성운동단체인 근우회(槿友會)를 결성하였으며, 1928년 11월 박헌영과 함께 모스크바로 탈출하였다.
1929년 코민테른(인터내셔널_제3인터내셔널)이 모스크바에 설립한 공산주의 운동 지도자 소양교육기관인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하여 1931년 졸업하였으며, 1932년 상하이에서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벌였다. 1938년 일본 밀정이라는 혐의로 소련 경찰에 체포된 후 모스크바 추방령을 받고 카자흐스탄에서 5년 동안 유배되었다.
1940∼1946년 카르마크치의 협동조합에서 일하였으며, 1946년 스탈린 정권에 조국으로의 귀국을 요청하였으나 거부되었다. 1989년 3월 소련에서 명예가 회복되었다.
체포, 수감, 탈출, 추방, 유배......
좀 무시무시한가요?
그 녀 역시 여고생 시절에 3.1운동 적극 가담자로 경찰 신세를 진 경력이 있군요. 그리고 음악 교육을 받기 위해 (피아노가 전공이었다고 하네요, 그 시절에!) 상해로 건너와 사회주의 운동을 펼치던 중 박헌영을 만납니다.
주세죽, 이 분에 대해 알아가면서 참 여러 번 놀랐습니다. 고백하건데 그 녀에 대한 제 호기심이 촉발된 첫 번 째 이유는, 사진에서 보여지는 이 분의 미모가 가히 요샛말로 여신급이라는 데 있었습니다. 요즘은 말할 것도 없고, 아마 그 시절에도 여자가 일단 얼굴이 예쁘면 인생을 살면서 선택의 여지가 훨씬 많아진다는 건, 뭐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사실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다가 음악 교육을 받고 외국 유학길에 오를 수 있었단 것 만으로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이 분이 대단한 집안의 여식이었을 거란 짐작을 할 수 있겠네요. 그 뿐입니까, 자신의 존재기반을 부정하는 사회주의를 자신의 세계관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은 이 분이 매우 치열하게 지적 자기 연마를 하신 분이라는 걸 증명합니다. 한마디로 고루한 봉건적 인습에서 벗어난 미모의 인텔리 신여성이었단 겁니다. 이 정도면 조선 최고의 엄친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싶네요.
<사진>주세죽입니다. 단아하고 이지적인 미인이시지 않습니까?
하지만 세상의 부귀영화를 약속받고 태어난 듯 보이는 그녀에게, 인생은 그리 순탄하게 흘러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한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모든 수모와 고초는 다 겪었다고 보는 게 맞을 겁니다. 위에 인용한 그 녀의 약력 첫째 줄에서 부터 이미 그 단초가 보이지요. 그렇습니다. 주세죽과 박헌영은 상해에서 만난 그 해, 부부가 됩니다. 운명이었을까요? 각각 충남 예산과 함경북도 함흥에서 1년 차이로 태어나, 인생의 가장 예민한 시절, 3.1 운동이라는 역사적 경험을 통해 동시대 의식을 가지게 된 두 사람이 스스로를 그 때, 그 곳으로 인도한 것이라면 상해에서의 그들의 만남은 어쩌면 필연이었을 수도 있겠다 싶지 않습니까? 그리고 두 사람은 행복했을까요? 아쉽게도 두 사람의 개인적 삶에 대한 언급은 많질 않네요. (<박헌영 평전>이라는 책을 아직 읽지 못했습니다. 그러고도 다 아는 척 글 쓰고 있는 뻔뻔한 미오 같으니라고......) 행복이라는 단어를 이 두 사람에게 대입해 본다는 게 왠지 지나치게 한가한 소리 같긴 합니다. 하지만 지금이나, 그 때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삶의 지향점이 같은, 동지라 부를 수 있는 이를 아내로, 남편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하락되는 것은 아닌, 인생에 있어 크나큰 행운이 아닐 수 없을 겁니다.
그들에게 아마도, 유일하게 부여된 그 행운은 그러나,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박헌영은 생애 동안 네 번에 걸쳐 일제 경찰에 체포 되 감옥살이를 합니다. 그리고 세 번은 주세죽과의 결혼 기간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감옥에 들어가 있는 동안 박헌영은 자신의 동지들과 조직을 보호하기 위해 일제의 모진 고문을 버텨야 했습니다. 특히 1925년, ‘제 1차 조선 공산당 검거 사건’이라 불리는 대규모 사회주의자 탄압사건으로 체포되었을 때에는 차마 말로 옮길 수 없이 잔혹하게 자행된 고문으로 정신 이상 증세와 함께 목숨이 위태로울 지경에 이르게 되어 위기의식을 느낀 일본 경찰이 이례적으로 병 보석 출감을 허용하게 되었습니다.
산송장이 되어 돌아온 남편을 보는 주세죽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주세죽 자신을 포함한 동지들의 안위와, 비밀리에 확장하고 있던 당조직을 지켜내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잔인하기 그지 없는 일본 경찰과 위험한 거래를 했던 남편을 그 녀는 자랑스러워 했을까요,아니면 가슴을 찢으며 원망했을까요.
그 녀는 성심껏 박헌영을 돌봅니다. 그의 피폐해진 심신을 달래기 위해 좋은 곳을 찾아다니며 요양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일제의 감시망이 해이해 진 틈을 이용해 두 사람은 목숨을 건 탈출을 기도합니다. 조각배에 몸을 맞기고 블라디보스토크를 향해 국경을 넘을 때 주세죽은 만삭의 몸이었습니다.
<사진> 블라디보스토크의 한 공원에서 한가로이 앉아있는 두사람.
고문 후유증으로 여윈 박헌영과 출산을 앞두고 있는 주세죽의 모습입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의 몇 년 간이 아마도 이 두 사람이 유일하게 누려 본 꿈같은 결혼생활 기간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이 기간 동안 박헌영은 국제레닌대학에서,주세죽은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각각 수학하며 사회주의자로서의 이론 습득에 전념합니다. 직업 혁명가로서의 길에서 잠시 벗어나 유학생 부부가 된 것이지요. 이듬 해 부터는 모스크바 등지를 오가며 해외에서나마 조국의 독립을 위한 활동을 서서히 재개합니다.
<사진> 딸 비비안나와 함께 찍은 가족사진.
그리고 1933년, 코민테른의 지시로 이주한 상해에서 다시 한 번 박헌영이 일제에 의해 체포됩니다. 사실 일제는 이 무렵 그들의 혁명 동지인 김단야를 체포 대상으로 노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이 놓은 덫에 우연히 먼저 걸려든 박헌영은 근처에 있던 주세죽과 김단야가 무사히 포위망을 빠져나갈 수 있도록 그들의 표적이 되어 뭇매를 맞으며 시간을 벌어주었습니다. 그 덕에 불과 2,3분 차이로 경찰의 포위망을 벗어날 수 있게 된 두 사람은 박헌영의 비명소리를 가슴에 묻은 체 함께 모스크바로 향합니다.
병 보석 중에 국경을 넘어 탈출한 전력이 있고 그 후로도 조선 노동당 재건을 위한 박헌영의 활약을 알고 있는 일본 경찰이 이 번 만큼은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을 거란 건 불을 보듯 뻔한 노릇이었지요. 그래서 였을까요. 후에 주세죽은 당시의 심경을, 이 번 만큼은 남편이 살아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고 토로했습니다. 일가 친척하나 없는 머나 먼 타국에서, 애 딸린 여자의 몸으로, 좁혀오는 감시망을 피해가며 버틴다는 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노릇이었겠지요. 이런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나름의 자구책이었을까요? 정말로 박헌영이 죽었다고 믿고 포기 끝에 내린 결정이었을까요? 아니면 새로운 사랑에 불타올랐던 걸까요? 남편의 생사확인 조차 못한 체 좁혀오는 감시망을 피해 김단야와 함께 모스크바로 몸을 피한 주세죽은 그 곳에서 김 단야와 재혼합니다.
후에, 6년의 형기를 마치고 출옥한 박헌영은 이 두 사람의 관계를 당차원에서 문제시 하려는 당원들에게 이 문제에 관해 함구해 줄 것을 요청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주세죽을 그의 가슴 속에서 영원히 지워버립니다.
주세죽의 두 번 째 남편이 된 김단야는 박헌영에 비하면 사실 많이 알려진 분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역시 조선 공산주의 운동사에 있어서 빠뜨려서는 안 될 중요인물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김단야는 박헌영과 같은 해에 태어나 상해에서 만난 이래로 줄곧 한 길을 걸으며 생사고락을 함께 한 동지였습니다.
주세죽과 김단야의 결혼 생활이 어떠했는 지에 대한 기록은 찾지 못했습니다.
<사진> 김단야.
하지만 새롭게 꾸린 그들의 인생은 여전히 가시밭길이었습니다. 모스크바 외국노동자출판부에서 근무하며 조국해방과 계급해방을 위한 싸움에 복무하던 김단야는 소비에트 비밀경찰에게 체포됩니다. 1937년 11월 5일의 일이었습니다. 전 조선공산당원 김춘성(이성태)이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비서부 앞으로 보낸 '상신서'가 발단이 되었습니다. 상신서에 의하면 김단야는 '일본 경찰의 밀정'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소련 최고재판소는 그를 일제 첩보기관의 밀정이며 반혁명 폭동과 테러활동을 목적으로 결성된 단체의 지도자로서 제 1급 범죄자에 해당한다고 판결을 내립니다. 그는 판결 직 후 처형되었습니다.
김단야와 함께 체포된 주세죽은 '제1급 범죄자의 아내로서 사회적 위험분자'라는 죄목으로 카자흐스탄 5년 유배형을 선고받습니다. 유배지로 떠나는 그 녀의 품엔 생후 3개월 된 아들이 안겨있었습니다. 김단야와의 사이에서 낳은 김비딸리아라는 이름의 아이는 결국 혹독한 유형 생활을 이기지 못하고 죽습니다. 형기를 마치고, 여전히 유배지에 갇혀 지내는 동안 모스크바에 있던 딸 박비비안나와도 생이별의 고통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김단야의 어이없는 죽음이 주세죽을 삶을 바닥으로까지 끌고 내려갔을 거란 짐작을 해 봅니다. 남편과 핏덩어리를 제 손으로 묻고 자신들의 목숨과도 맞바꾸어 이루려 했던 이념의 종주국으로부터 적국의 스파이라는 치욕스러운 죄명으로 버림받은 이 여인은 결국 머나먼 유배지, 동토의 땅에서 53세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로 쓸쓸해 생을 마칩니다.
그 녀의 첫 남편인 박헌영의 운명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 역시 김일성 정부에 의해 적국의 스파이라는 죄목으로 몰려 사형당하지요. 다른 점이 있다면 김단야가 일제의 스파이였다면 박헌영은 미제의 스파이였던 것이겠군요.
박헌영은 8·15해방직후 공산당 재건에 주력하여 장안파와 재건파를 통합하여 조선공산당 중앙기구를 구성, 당 책임비서가 되었고, 여운형이 이끄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와 연합하여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에 참여했습니다. 이후 미국에서 이승만이 귀국하여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구성하자 조선공산당을 이끌고 참여했으나 친일세력의 즉각 척결을 주장한 박헌영과는 달리 일제 친일세력 척결에 미온적이었던 이승만 세력과 끝까지 함께 할 수는 없었습니다. 일제를 몰아내고 한반도를 점령한 미군정은 노골적으로 공산세력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온갖 탄압책을 사용합니다. 미군정에 의한 그의 체포가 임박한 시점에서 그는 장례운구로 가장한 마차의 관에 몸을 숨기고 3.8선을 넘어 북한으로 갑니다. 남,북한 단독정부 수립 후, 북한의 부수상의 자리에 오른 그는, 그러나 김일성과의 파워게임에 밀려 결국 죽음에 이릅니다. 적국에 주요 기밀을 누설해 6.25 전쟁을 패배로 이끈 미제의 앞잡이,스파이였다는 것이 그가 덮어 쓴 죄목이었지요.
<사진>주세죽의 말년 모습.
모진 풍파가 그 녀를 단련시킨 걸까요? 굳게 다문 입술과
매운 눈매가 오히려 서글프게 느껴집니다.
글의 초입에서 인용한 <화두1>의 한 구절을 한 번 더 인용하는 것으로 별 재미도 없고 괜히 길기만 했던 글을 마칩니다. 저자인 최인훈이 교환교수의 자격으로 1973년에 방문한 미국의 아이오와 주의 어느 작은 도시, 그 곳 한 허름한 헌 책방 1층 서가에 꽂혀 있는 칼 맑스의 <자본론>을 빼들고 쓴 부분입니다.
........그렇더라도 이 책은 2차대전 전의 일본에서도 아마 이 세기 들어 얼마되지 않아 번역되었을 테고 20년대나 30년대의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들조차 서울의 책방에서 살 수 있었던 책이었다. 이 책은 이 책이 비판하고 분석했던 나라의 수도에서 집필되어 지금부터 백 년도 전인 1867년에 간행되었다. 그 책을 나는 이 나이까지 서울에서는 보지 못하고 여기서 이렇게 만난 것이다. 이 책이 비판한 나라의 수도에서 그 수도의 도서관의 자료를 이용해서 집필된 이 책은,이 책이 비판한 나라의 상속자인 이 나라에서 이렇게 버젓하게 오래 전에 출간되어 이런 시골 구석의 헌책방에 아무렇게나 꽂혀있다. 이 책과 대단히 관계있는 역사의 운동 때문에 여기까지 찾아온 한 식민지 지식인은 여기서 처음 이 책을 보고 있다. 이 슬픈 지체(lag). 이 지체는 <문화인류학적> 원근법 안에서의 상대적인 지체라기보다, <생물인류학적>차별-말하자면 인종의 벽 같은 것이기나 한 것처럼 육체적으로 아팠다.......
(화두 1의 127쪽)
그들은 실패한 혁명가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실패 역시 우리의 역사 속에 깊이 새겨 넣어야 합니다.
그들은 우리가 자신들의 비극적 삶을 애도하길 바라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자신의 삶을 내던져 이루려 했던 그들의 이상이
백년이 지난 지금도 누군가에 의해 꿈꿔지고 있다면,
비록 진흙탕에 뒹굴던 꼬리였을 지언정 감히 20세기를 의식했던
불행했던 그들의 영혼은 안식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그들을 그렇게 기억하고 싶습니다.
P.S. 주세죽은 2007년 8월 16일 복권되어 대한민국의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훈장의 수혜자로 고 주세죽의 딸 비비안나가 대리하였다.
첫댓글 무단 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