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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만강 너머 내 형제 글/사진: 이종원
백두산의 땅 연길에 닿았다. 창밖에 아스라이 보이는 백두산의 위용이 이 먼 땅까지 미치고 있었다. 하긴 우리 산하에 백두산의 기가 미치지 않는 곳이 어디 있으랴. 자애로운 어머니가 자식을 보듬고 있는 형상이다.
13년전 심양을 거쳐 연길가는 국내선 비행기로 올라탔다. 70년대 군용으로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소련제 쌍발비행기였는데 에어콘이 없어 부채를 나눠주는 것이 무척이나 신기했다. 청룡열차도 아닌데 동체가 급히 떨어져 '이제 죽는구나.' 마음속으로 유언을 외칠 정도였다. 더욱 가관인 것은 기내에 파리가 날아 다니자 스튜어디스가 승객앞에서 파리채를 휘두르는 것이었다. 눈앞에 파리채가 아른거리는 모습은 중국아니면 절대 볼 수 없는 명장면이다.
무뚝뚝한 세관원의 짐 통관을 마치고 허름한 시외버스 터미널 같은 공항을 벗어나자 묘하고도 쾌쾌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중국특유의 냄새와 반세기를 넘게 떨어져 살아온 이질적인 냄새가 뒤섞였는지 모른다. 공항밖을 나오자 우리를 맞이하는 가이드의 투박한 함경도 사투리에 가슴이 울컥했다. 3대를 이어 간도땅을 지켜온 젊은이가 그저 고마웠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10년 후 중국은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이룩했다. 연길도 그 달리기에 뒤쳐지지 않았다. 그 결과 도무지 이곳이 연길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높은 빌딩이 들어섰고 깔끔한 공항과 생글생글 웃는 세관원을 보고 놀랍기도 하고 얄밉기도 했다. 북경 올림픽이 이렇게 사람을 바꾸고 있구나.
'난 말야... 쾌쾌한 고향냄새와 투박한 연변사투리, 파리채를 휘두르는 스튜디어스가 더 그립단말야.'
연길에서 도문 가는 길. 13년전에는 꼬불꼬불 길로 한시간이 넘게 걸렸다. 지금은 쭉 내뻗은 고속도로로 달리면 30분도 채 걸리지 않는다.
이 길은 연길서 도문까지만 이어진 것이 아니다. 장춘에서 시작하여 길림, 돈화, 안동, 연길, 도문, 훈춘까지 동서를 가로 지르는 길림성의 실크로드다. 앞으로 10년후면 이 길에 양편에 어떤 건물이 올라있을지 두려움이 앞선다.
도문. 석탄가루 휘날리는 그 음습한 도시가 깔끔하게 변모했다. 빌딩도 높이 올라가고 뭇백성이 머리를 숙인다는 제왕천수가 가로수가 도시를 더욱 깨끗하게 해주었다. 일제시대때 훈춘과 목단강을 잇는 철도의 시발점으로 조선인으로 북적거린 것이다.
도문은 중국과 북한이 마주하고 있는 국경도시다. 파리 개선문 모양의 문이 북한을 바라보며 부를 과시하듯 서 있다. 다리 양끝에 양국의 세관이 자리잡고 있다.
주변에는 중국오성기와 북한 인민기가 그려져 있는 '邊境', '界碑' '國境'등의 표식이 서 있어, 한국인이건 중국인이건 늘 이곳에서 사진 찍는다. 1995년 강택민 주석이 도문을 찾아 새긴 글씨도 보인다.
"국문에 올라 이국풍치를 구경하라."
관광객의 호주머니를 노리는 유혹의 문구가 국경문에 내걸려 있다. 이국풍치는커녕 가슴살이 찢어지는 아픔만 전해온다.
돈벌이에 이용되더라도 국경문에 올라섰다. 도문대교 건너로 북한땅이 한 눈에 들어온다. 세월이 흘러 남한도 변했고, 중국도 변했고, 주름살이 더욱 깊어진 내 얼굴까지 변했지만 오로지 변하지 않는 곳은 바로 저 건너 북한땅이다.
그래도 10년전에는 새록새록 밥짓는 연기를 보고 마음 놓였는데 이젠 그마져도 볼 수 없는 회색도시로 변했으니 내 형제가 추위에 떨고 있지 않나, 굶지않나 자꾸만 걱정만 쌓인다.
중국인 관광객, 조선족 가이드, 남한관광객이 이 조그만 전망대에서 제각각 다른 생각을 가지고 북한을 바라보고 있다. 이념과 전쟁이 낳은 아픔을 다시 대물림한다고 생각하니 아찔하다.
10년전 바로 이 자리에서 찍은 대장. 이때 참 날씬하고 젊었는디...
오성기가 펄럭인다. 힘있는 자의 오만함이랄까?
그들을 가까이 만나고 싶었다. 사람이 없다면 그들이 밟고 지나간 발자국이라도 어루만지고 싶다.
골이 패인 기와, 헤진 회색벽, 깨진 유리창. 연기도 보이지 않는다. 사람 내음이 전혀 나지 않는다. 그나마 온전하고 깨끗한 것이 바로....
"21세기의 태양 김정일 장군 만세!"
불과 100걸음이면 단숨에 넘을 수 있는 두만강. 차가운 이념만큼이나 강은 꽝꽝 얼려 있어 안타깝기만 하다. 반백년 넘게 문을 두드렸건만 돌아오는 것은 공허한 메아리일뿐.
장총을 들고 철책을 어슬렁거리는 군인들만이 동토의 분위기를 전해준다.
함경북도 온성군 남양. 다리를 건너 좌측 굽이길로 10여분쯤 가면 우리나라 최북단 온성이 나온다. 북쪽으로 흐르는 두만강이 동쪽으로 방향을 바꾸면 왕재상, 훈융, 새별이 나온다.
이곳이 바로 세종때 김종서 장군이 여진족을 몰아내고 진지를 구축했던 6진이다. 여진족을 북방으로 이주시키고 삼남의 백성들의 이곳에 이주시켜 우리땅으로 만들어 버렸다.
400년 후 또다시 영토를 넓힐 기회가 있었다.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고, 또는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기 위해 비분을 품고 두만강을 건넜던 선구자들이다. 황무지였던 간도땅을 옥토로 만든 주인공들은 지금 어느 하늘 아래 살고 있을까?
저 S자 길을 넘으면 창평이 나오고 우측 두만강을 따라가면 종성이 나온다. 조선시대 종성은 유배의 단골이다. 한양을 떠나 산수갑산을 지나 천리길을 걸어 이곳까지 왔다고 생각해보라. 왠만한 사람들은 그냥 쓰러졌을 것이다. 복수심을 후진양성에 전념했다. 그래서 이곳 출신들이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성품을 지니고 있다. 윤봉길, 김대건, 김좌진등 대가 센 위인을 배출한 삽교천이 북쪽으로 흐르는데 두만강도 같은 이치가 아닐까?
언덕에 오밀조밀하게 판자촌이 형성되어 있으며 그 위에는 산까지 누더기 옷처럼 밭이 일구어졌다.
찢어진 산의 모습을 보자 그걸 바라보는 내 가슴도 헤어졌다 . 배가 고플수록 인민들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 땅을 일구어야만 했다. 꼭대기까지 올라섰는데 이젠 더 이상 땅이 없는 것이다. 배는 고프고 일굴 땅은 없고....북받친 설움이 통곡의 산이 되었고, 그 눈물이 흘러 두만강이 되어 한반도를 그리고 있다. 단지 배고프다는 이유하나만으로 생명을 담보한 채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넌다. 그러다 총에 맞아 두만강에 처박히고.... 간신히 살아남으면 민가에 들어가 닥치는대로 먹고...
저 건물은 뭐예요? "탈북자 수용소입니다." 강을 건너온 북녘동포 대부분은 중국말을 할 줄 몰라 현장에서 잡힌다고 한다. 그럼 밥을 실컷 먹이고 북한군에게 인계한다고 한다. "괜찮아요. 3일정도 두들려 맞으면 다시 풀려나요." 그렇게 맞고도 또 강을 건넌다. 죄질이 나쁘거나 남측의 종교단체와 연계되었다면 이렇게 중국수용소에 갇혀 조사를 받는다고 한다.
저 멀리 너무나 익숙하고도 얄밉게 보이는 초상화가 어색하게 걸려있다.
다리의 반까지 갈 수 있다. 성큼성큼 걷는데 묘한 기분이 든다.
변계선. 더 이상 건널 수 없다.
중국군인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지켜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선을 넘어 두 발자국이나 넘어가 군인 눈치를 봤더니 씩~ 웃는다. 짜식 귀엽기는~
"나..월경했는데...잡아갈껴?"
한동안 맥 빠진채 북한을 응시한다. 내가 왜 여기에 서 있단 말인가? 천하를 호령했던 광개토대왕과 육진을 개척한 김종서 장군이 나를 본다면
"너 왜 거기 서 있니?"
온전한 것은 저 초상화밖에 없다. 바꾸어 말하면 저 초상화만 떼내면 나머지 것들이 온전할 수 있는데 말이다.
얼어붙은 두만강이 울고 있다. 11년전 가이드가 낭송해주었던 이름모를 북한시인의 시가 자꾸만 떠오른다. 공책에서 고히 적어 놓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흐느끼는 강아
북한 시인
강감찬이 수호한나라 을지문덕이 지켜낸 나라 누가 허리를 잘라 놓았느냐 어이하여 둘이 되었느냐 낙동강도 흐느끼며 울고 있다.
흰 옷처럼 깨끗한 우리 민족 우리 민족은 왜 세계의 비극을 안고 고통스럽게 살아야 하는가
한강도 서울을 안고 운다. 대동강도 평양을 안고 운다.
남에 한라산, 북에 백두산 반세기동안 묵묵히 마주서서 울고 있는 강을 지켜보면서 한숨만 풀풀 날리고 있다.
누가 대화를 방해하던가 주가 통일을 거부하던가 왜 이다지도 민족화합이 여려운거냐
아- 울어. 울기만 하는 강아....
어느때 가면 어느때 되면
그 울움 딱 그치고 노래하고 춤추겠는가
1912년 부산에서 중국 장춘(당시 봉천)간 열차가 운행되었으며1927년에는 시베리아를 경유해 유럽까지 화물운송이 이루어졌다.
동서를 가로지르는 시베리아 철도는 새로운 노선이 아니라 과거의 영광을 재현해내는 움직임이다. 부산을 시작해서 서울을 거쳐 원산-함흥-길주-청진-남양-도문-몽고-세베리아-모스크바-유럽-런던까지.....1만여 km, 20일간 긴 여정이다. 한반도에서 첫발을 떼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북한과 중국과 맞닿는 철도가 딱 3군데 있는데 신의주와 연결되는 단동, 만포와 연계되는 집안, 바로 이곳 남양과 연결되는 도문이다.
지금이야 작은 철길지만 서유럽까지 내달리는 미래의 역동성을 지켜보자.
도문에서 용정가는 길은 두만강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북한의 산하를 바라보며 착찹한 심정으로 차창 풍경을 어루만진다.
저 멀리 북한땅에 산불이 났다. 당장 달려가 끄고 싶지만 철책이 가로막히고 두만강이 발목을 잡고 있어 먼발치에서 가슴만 졸일 뿐이다. 남한이라면 산림청 헬기가 떴을텐데....
북한군인이 맨 몸으로 달려간다. 저 산까지 오르려면 족히 30분은 걸릴텐데...불을 끄고 내려오면 허기질텐데...만두라도 건냈으면 얼마나 좋을까
도문에서 용정가는 길은 단 한순간 눈을 뗄 수 없었다. 도문에서 종성을 지나 삼봉까지는 두만강을 따라가는 길이다. 이 길이야말로 피붙이와 살을 맞대며 정분을 나누는 길이다.
눈쌀 찌프리는 장면도 더러 보이지만 그래도 내나라 내땅 우리 동포다. 독재자는 미워해도 인민은 미워하지 말자.
두만강 너머는 험준한 산이지만 중국쪽은 너른 들녘이 형성되어 있다. 두만강변의 작은 섬 간도의 유래도 바로 이곳에서 나왔다고 한다. 초가집도 보이고 고구려 창고인 부경도 여태 남아 있다. 고구려부터 이어진 삶의 방식들을 만난 기분이란.
조선족 아주머니가 해주신 담백한 한식이다. 노루무침, 멧돼지찜, 오리통구이, 닭백숙, 단호박....김치 깍두기가 있어 더욱 행복한 점심이었다. 30년 전에 시골서 맛보았던 그 담백한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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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흐르는 음악을 들으며 대장님의 여행기를 읽으니 영화 " 쉬리 "가 생각나 마음과..가슴이 아파오네요.우리 민족의 상처를 언제,무엇으로 치유하면 좋을까 생각해 봅니다.
한동안 맥 빠진채 북한을 응시한다. 내가 왜 여기에 서 있단 말인가? 천하를 호령했던 광개토대왕과 육진을 개척한 김종서 장군이 나를 본다면 "너 왜 그기 서 있니?" ....... 울컥 가슴에 뜨거움이 올라오며 눈에는 눈물이 주르르.... 대장님 글은 가슴 밑마닥을 쓸어 내려요.. 9년전 도문에서 나도 대장님처럼 느꼈던 그날이 생각나네요.. 평화! 평화를 주소서....오 주여!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이 글을 보고나니 마음이 무겁습니다 말로는 들었으나.... 난 어찌 이러고 있느냐 도와주면 되는데 정토회에서 하는 북한 주민 돕기 ARS에 참여 할렵니다
우리 산하를 어찌.. 그토록 상세히 꿰뚫고 계시는지요! 눈으로 애뜻하게 쓰다듬고 있음을 절절하게 느낌니다. 나도 언젠가는 꼭 가 봐야겠다고 다짐하면서... 조금은 비장감 마져 도는군요.
감사 합니다.
대장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세요. 좁은 국토에 살면서, 다시 분단된 국토! 고구려와 발해가 호령하던 만주벌판은 제치더라도, 조그만 한반도도 마음껏 다닐수 없는 현실의 안타까움만이 !!!!!2008년에는 새로운 기대를 해봅니다.
역시 대한민국 산하는 갈곳이 많네요..^^
아픔이....알싸한 마음이 같은 피를나눈 형제이기에...답답한 가슴이 우울해지는군요 언제 활짝 웃어볼까나....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우리나라는 남이나 북이나 역시 우리땅이네요?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