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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맹문재 홈페이지 원문보기 글쓴이: 맹문재
<시에>, 2009년 여름호.
원로 시인을 찾아서(대담)
이기형․맹문재
맹문재 선생님, 안녕하세요. 이렇게 댁에서 건강하신 모습으로 뵈니 감사합니다. 선생님께서는 우리의 현대사를 온몸으로 안고 살아오셨기 때문에 후학들에게 해주실 말씀이 많으실 것입니다. 선생님의 삶과 시세계를 직접 들을 수 있으니 설렙니다. 선생님께서는 1917년 함경남도 함주에서 태어나셨는데, 우선 가족 소개를 들어볼까요?
이기형 아버님께서 제가 두 살 되던 해에 열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님이 외아들인 저를 키우느라고 고생을 많이 하셨어요. 제가 참 불효자이죠. 저의 현재 위치에 있을 수 있는 것은 순전히 어머님 덕입니다. 그런데 아버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사력을 다해 퉁소를 불었답니다. 그것이 저에게는 큰 힘이 되었어요. 아버님이 돌아가실 때 사력을 다해 퉁소를 불었다는 사실은 위대한 예술이고 음악이라고 지금도 생각해요. 그 퉁소 얘기를 듣지 않았다면 저는 그저 평범하게 살았을지도 몰라요. 아버님의 퉁소 소리는 제 통일시의 원동력이에요. 아버님이 돌아가신 뒤 서당에 들어가 공부를 하고 4학년에 들어갔지요. 농사를 2년 정도 짓다가 다시 5학년에 편입해 졸업하고 함흥고보에 들어갔지요. 함흥고보에 들어갈 때 제가 1등을 했어요. 외삼촌이 어머니께 적극적으로 저의 진학을 권유했지요.
맹문재 12살 때부터 야학을 통해 독립운동에 눈을 뜨셨다고 하셨는데 그 상황을 듣고 싶네요.
이기형 야학이 저에게 반일독립 사상을 주었어요. 저를 오라고 해서 간 것이 아니라 제가 직접 찾아갔지요. 다른 사람들은 책이 있었지만 저는 없어 어깨 너머로 들었어요. 환희사(歡喜寺)라는 절에 천렵을 가장해 많은 사람들이 가기도 했는데, 실제는 독립운동을 한 거지요. 그 절에 가서 자면서 연극하고 노래하고 웅변하고 그랬어요. 열세 살 때인데 야학 선생님이 원고를 써주더라구요. 농사를 지어서 알곡을 일본 놈들에게 빼앗기고 우리는 쭉정이만 먹고 산다는 내용이었어요. 제가 그 원고를 외워 웅변을 해서 2등을 했지요. 모두들 어른이었는데 아이는 저밖에 없었어요. 지금도 그 환희사의 밤을 잊을 수가 없어요.
맹문재 소설가 한설야도 만난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이기형 제가 함흥고보 1학년 때 찾아갔지요. 한설야 선생은 소설가로서 많이 알려진 분이었어요. 그래서 친구와 함께 함흥에서 문영각이라는 책방을 하고 있는 설야를 찾아간 것이지요. 그곳에서 3․1운동 등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저의 사상이 싹트는 데 한 원동력이 되었지요.
맹문재 소설가 이기영과도 만나셨지요.
이기형 1940년대 서울에서 만났지요. 임화, 이기영, 오장환, 이원조, 김남천 등도 만났어요. 임화하고 이기영 선생님은 8․15해방 전부터 알았어요. 저는 그 당시 청년 학생들에게 조선 독립운동에 지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을 찾고 있었어요. 함흥고보 1학년 때 일본어로 번역된 러시아의 평론가 벨린스키의 책이며 고리키의 소설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지요. 저의 고민을 들은 친구가 보성고보의 교사로 있는 문석준 선생님을 소개해주었어요. 문석준 선생님은 동경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한 사학자요 독립운동가였습니다. 그분은 그때 우리말로 된 역사를 썼는데 북에서는 교재로 사용했지요. 그래서 문석준 선생님께 찾아갔는데, 여운형 선생님을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대번에 여운형 선생님을 찾아갔지요.
맹문재 그러면 여운형 선생님에 대한 말씀을 들을까요. 선생님께서 만난 인물들 중 아무래도 몽양으로부터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지요. 선생님은 몽양의 서거 이후 33년간 일체의 공적인 사회활동을 하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몽양은 어떤 면에서 특별했나요?
이기형 여운형 선생님을 찾아가 대화를 나누었는데 대단했어요. 대번에 무서움도 없이 “조선은 독립을 해야지” 하는 것이었어요. 새로운 영웅론을, 다시 말해 신지도자론을 말씀하셨어요. 새 시대의 영웅은 민중의 선도에서 이끌고 나가는 사람이라는 것이었어요. 뒤에서 손가락질로 이리로 가라 저리로 가라 하는 것이 아니고, 대중의 앞에 서서 이끌고 나가는 사람이 진정한 지도자라고 한 것이지요. 곧 반일 독립운동의 전선에 나서는 사람을 지도자라고 본 것이지요. 그 시기의 조선 청년이 나아갈 길은 반일 독립운동이었는데, 몽양 선생님이 제일선에 서 있었지요. 많은 사람들이 몽양을 찾아왔는데 일일이 조선 독립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공산당, 인민당 계통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거의 다 영향을 받았지요. 몽양은 인간 그 자체가 아주 웅대했어요. 아는 것도 굉장히 많았어요. 실천에서 우러나오는 지도자적 이야기를 하셨지요.
맹문재 몽양 선생님이 돌아가시고 나니 따르고 싶은 지도자가 없어서 선생님께서는 33년간 공적인 활동을 하지 않으셨나요?
이기형 그 시간에 대해서는 언제 자세하게 말할 것입니다. 죽기 전에 자서전으로 밝힐 생각이에요. 단지 인간으로서 시를 쓸 자격이 있구나 하고 자신할 수 있는 체험을 했다고 말할 수 있어요.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았고, 친미 민족 반역자들의 죄악상을 알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분단 고통이 어디에서부터 출발되었고 어떻게 나아가고 있으며 또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나는 북쪽에서 신문기자 생활을 4년 했고, 남쪽에서도 기자 생활을 2년이나 했으니 남북의 정황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정도의 경험을 가지고 있으니 시를 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어요.
맹문재 임화도 만나셨다고 했는데요.
이기형 함흥고보를 졸업할 무렵 임화의 책을 많이 읽고 있었어요. 제가 서울로 간다고 한설야 선생께 말했더니 임화와 이기영을 만나라고 대번에 얘기하더라구요. 그래서 서울에 와서 만났지요. 임화는 풍기는 인상이 대단했어요. 지금의 문학인 중에 임화 같은 지성미를 풍기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아요. 키도 후리후리하게 크고 지성인의 냄새가 아주 진하게 풍겼지요. 한 주에 한 번은 꼭 찾아갔어요. 일요일마다 갔지요. 임화의 부인인 지하련 선생과도 친해졌구요. 임화 선생이 저를 데려가 중국 요리도 사주고 했는데, 그 후 제가 돈벌이를 할 때 사드리려고 몇 번이나 했는데 이루지는 못했어요.
맹문재 임화가 들려주신 말씀 중 기억에 남는 것이 있는지요.
이기형 북에서 죽은 저의 아내가 여운형 선생님의 6촌 동생이에요. 결혼식 때 몽양 선생님이 주례를 보고 임화와 이태준 선생님이 축사를 했어요. 정치적 입장에서는 문석준, 여운형 선생님을 찾아갔고, 문학적인 입장에서는 이기영, 임화, 이태준, 한용운 선생님을 찾아간 것이에요. 임화 선생님은 축사에서 “나는 지금 이 결혼식에서 불란서의 어느 평론가가 말한 ‘허위는 복잡하고, 진실은 단순하다’는 말을 생각합니다.”라고 말했어요. 이태준 선생님은 중국의 고사를 인용했는데, 그만 잊어버리고 말았어요. 여운형 선생님이 주례를 보고 임화와 이태준 선생님이 축사를 한 것은 제 일생에서 기록할 만한 일이지요. 임화에 대해서 한마디 더 하지요. 임화가 죽은 것은 참 아까운데, 박헌영과 너무 밀접해서였어요. 한 번은 지하련 선생님이 저에게 임화 선생은 어떤 시를 쓰더라도 박헌영에 보여준다고 말하더라구요. 그만큼 임화는 박헌영과 가깝게 지내었어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휩쓸리고 말았지요.
맹문재 이기영 선생님에 대해서도 말씀해주시지요.
이기형 민촌 선생님은 차분했어요. 소설을 쓰든 시를 쓰든 우리의 환경이 일본제국주의 식민지라는 사실을 연계시켜야 한다고 말했어요. 구체적으로 사건을 만들고 예술적으로 구성을 만드는 것이 훌륭한 소설 쓰기라고 말했어요.
맹문재 소개할 만한 분이 또 있는지요?
이기형 김남천이 있지요. 8․15 직후 임화가 만든 문화건설중앙협의회 사무실에 가니까 반바지를 입은 건장한 청년이 앉아 있더라구요. 임화 선생님이 김남천 선생이라고 인사를 시켰어요. 사시는 곳이 가회동이어서 제가 사는 집과 가까운 곳이었어요. 그래서 다음날 찾아갔지요. 가니까 책을 말리고 있었어요. 일제시대에 지하실에 넣어두었다가 곰팡이가 슨 책을 꺼내 말리고 있었는데, 다가가 보니 『자본론』이더라구요.
맹문재 이야기의 방향을 돌려보지요. 선생님께서는 일본대학 예술부 창작과에서 2년간 유학하셨는데,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요?
이기형 임화가 일본에 가서 많이 배웠지요. 그래서 저도 진보적 사상을 더 많이 알려면 일본으로 가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한 것이지요. 또한 한설야가 저에게 현재 세계에서 사회주의 관계 사상을 가장 많이 알 수 있는 곳은 파리나 워싱턴이 아니라 동경이라고 했어요. 사실 일본은 세계의 모든 사상을 받아들여서 일본화하지요. 그래서 일본으로 간 것이지요. 물론 문학도 하고 싶었구요. 일본대학 예술부 창작과에 들어가 신문 배달과 우유 배달을 하면서 공부했어요. 잘 시간도 없었고 피곤했어요. 그런데 연안을 간다고, 연안을 못 가면 중경이라도 간다고 생각하고 조선으로 나왔어요. 몽양 선생님이 “조 동지, 이기형 군을 부탁하오”라고 조소앙 선생한테 명함을 써줬어요. 가방 속에 깊이 넣어가지고 갔는데 일본 경찰이 달라붙었어요. 그래서 여관의 화장실에서 찢어버렸지요. 그리고 연안 가는 길이 막혀 다시 조선으로 나왔다가 해방을 맞았지요.
맹문재 선생님께서는 1943년부터 1945년 해방 전까지 지하협동사건과 합병거부사건과 관계가 있다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상황을 들려주시지요.
이기형 협동사건은 염윤구라는 고향 후배와 관계가 있는데, 그 후배가 포천의 산에 가서 합병과 징병을 피한 사람들을 모아서 무장투쟁 활동을 하면 어떻겠느냐고 해서 그렇게 하라고 했어요. 제가 배후조정자인 셈이지요. 준비하는 과정에 우리 집에서 자고 가고 했는데, 그 일로 저도 붙잡혔어요. 저는 그들이 자고 가기만 했지 그 이상은 모른다고 딱 잡아떼었어요. 증거가 없어 저는 구속되지는 않았는데, 나름대로 닥칠 상황에 대해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맹문재 협동사건과 합병거부사건이 몽양과 관계가 있나요?
이기형 관계가 많지요. 제가 가서 얘기하니까 몽양 선생이 하라고 했어요. 몽양으로 인해 힘이 생겼지요. 협동사건에 관련된 사람들이 굉장히 많아요. 서울의대 학생만도 12명이에요. 책방에서 주로 연락을 주고받았어요. 그만큼 조선 청년들이 독립을 갈망했음을 알 수 있지요. 지금도 만나는 사람이 있어요.
맹문재 그렇게 활동하다가 해방을 맞이하셨군요. 해방 후에는 신문기자 활동을 하셨지요.
이기영 저는 정치가가 될 생각은 없었어요. 왜냐하면 저는 문학가의 체질이 맞지 정치가의 체질은 아니라고 생각했거든요. 문학의 고결성이 정치가에는 없어요. 그래도 문학을 하려면 사회를 많이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신문기자 활동을 했어요. 남한의 문인과 북한의 문인을 거의 다 만났어요. 김구, 박헌영 등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한 분들도 만났어요.
맹문재 언제 기회가 되면 해방 직후 독립운동을 한 분들과의 만남에 대해서도 말씀을 듣고 싶네요. 이야기의 방향을 다시 돌려보지요. 선생님께서는 언제 결혼을 하셨는지요?
이기형 1944년 6월에 했어요. 제가 동경에 있을 때 몽양 선생님의 집에 왔다 갔다 했는데, 그 여자가 오빠를 보러 왔던 것이지요. 한번은 제가 갔는데 밥을 차리더라구요. 그리고 집에 와 있는데 편지가 왔어요. 오빠를 만난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했어요. 그 여자는 신식공부를 하지 않았는데, 시로 편지를 써왔더라구요. 결국 저를 만나지 못하고 북에서 먼저 세상을 떴어요. 남쪽에서는 아들이 한 명 있는데 대학교수에요. 지금 미국에 가 있어요.
맹문재 선생님께서는 시작 활동을 언제부터 하셨나요.
이기형 1947년 평양에서 나온 『민주조선』이었어요. 그런데 작품의 제목을 잊어버렸어요. 선거에 관한 시였는데, 그때 안회남이 문화부 차장으로 있어서 발표했어요. 1946년 11월부터 1947년 2월 사이에 실려 있을 겁니다. 그렇게 보면 신경림이나 고은 시인보다 제가 훨씬 빨리 등단을 한 것이지요.
맹문재 그렇군요. 언제 도서관에 가서 찾아봐야겠네요. 선생님께서는 1980년대에 들어 김규동, 신경림, 백낙청, 이시영 선생님 등을 만나 시를 쓰겠다고 결심하셨지요. 왜 시를 써야겠다고 생각하셨는지요?
이기형 특히 김규동 선생의 지도를 많이 받았어요. 아주 구체적으로 작품의 장점과 단점을 말해줘요. 대단한 분이지요. 우리 문단의 정신적 지주에요. 벨린스키의 평론과 고리키의 소설, 일본에서 나온 『시와 진실』을 읽다보니 문학이란 무엇이냐, 평론이란 무엇이냐, 시는 무엇이냐 등을 생각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문학이라는 것이 인간 정신을 높게 끌어올린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소설은 기력이 필요한데 저의 체력으로는 감당하기 어렵다고 생각되어 시 쪽으로 방향을 정했어요.
맹문재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해 1982년에 『망향』(시인사, 1982)이란 시집을 출간하셨습니다. 첫 시집과 관련된 말씀을 듣고 싶네요.
이기형 저는 분단된 조건에서는 또 친일적인 정권에서는 고결한 시를 쓰지 않겠다고, 통일된 조국에서만 시를 쓰겠다고 결심했었어요. 그런데 친구들이 자꾸 죽어가는 모습을 보니 나도 죽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세상을 뜨기 전에 고향과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남겨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시를 쓴 것이지요.
맹문재 두 번째 시집은『설제』(풀빛, 1985)인데 또 말씀을 들을까요.
이기형 그 무렵 시를 많이 썼어요. 채광석 시인이 많은 용기를 주었어요. 채광석이 어려운 일이 있으면 문단의 어른이라고 저에게 와서 상의하곤 했어요. 채광석이 『설제』를 높이 평가했어요.
맹문재 세 번째 시집은 『지리산』(아침, 1988)인데, 필화사건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요.
이기형 그런 시를 쓰려면 경험이 있어야만 가능하지요. 그런데 그 시집에는 제가 쏙 빠져 있는데, 실제로는 경험이 있지요. 발행인은 정동익인데,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대단한 일꾼이에요. 동아특위 위원장을 지내기도 했는데 아는 게 많고 아주 적극적으로 활동하지요.
맹문재 필화사건 다음으로 나온 시집이 『꽃섬』(눈, 1990)이지요.
이기형 저의 삼촌 부인의 고향이 꽃섬이에요. 어린 시절부터 많은 이야기 들었는데, 아주 재미있더라구요. 시집 전부가 삼촌의 부인에게서 실제로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제가 시인의 상상력을 가미해서 쓴 시집이지요. 지금 청소년들이 읽으면 아주 좋을 거예요.
맹문재 다섯 번째 시집이 분단 극복 의지가 드러난 『삼천리통일공화국』(황토, 1991)이에요.
이기형 그 시집은 이승철 시인이 하던 ‘황토출판사’에서 나왔지요. 이승철 시인이 “선생님 시는 직설적이면서도 힘이 있다”며 용기를 주었어요. 그래서 힘을 얻어 쓰게 된 것이지요.
맹문재 선생님께서는 뒤늦게 창작활동을 하셨는데 아주 활발하게 하셔서 또 여섯 번째 시집인 『별 꿈』(살림터, 1996)을 출간하셨습니다.
이기형 모든 것을 시로 쓰고 싶다는 욕망이 강할 때였어요. 출판사에서 자꾸 시 쓰기를 권유했어요. 그래서 힘을 얻어 쓴 것이지요.
맹문재 일곱 번째 시집이 『산하단심』(삶이 보이는 창, 2001)입니다.
이기형 반일운동과 분단을 끝장내고 통일을 이루어야겠다는 생각을 아름다운 산하에서 살아가는 젊은이들이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쓴 것입니다. 송경동 시인이 용기를 많이 주었어요.
맹문재 여덟 번째 시집은 『봄은 왜 오지 않는가』(삶이 보이는 창, 2003)입니다.
이기형 분단을 끝장내고 통일을 하루바삐 쟁취해야 되는데, 그것이 안 되고 있으니 울분이 부글부글 끓어올라 터진 시집이에요.
맹문재 아홉 번째 시집이 『해연이 날아온다』(실천문학사, 2007)입니다.
이기형 고리키가 1901년에 ‘해연’을 썼지요. 소련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기 16년 전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도 혁명이 빨리 와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썼어요.
맹문재 열 번째 시집이 『절정의 노래』(들꽃, 2008)입니다. 이번 시집에서 추구한 점이 있는지요.
이기형 이전의 시집들보다 완성도가 있다고 생각해요.
맹문재 선생님의 시세계는 한마디로 조국 통일을 지향하는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조국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여쭙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려운 질문일 수 있는데, 과연 어떻게 해야 될까요?
이기형 분단된 상황에서 어떤 작품을 써야 할까를 지금까지 고민하고 있어요. 분단을 끝장내야 한다, 통일을 하루바삐 이뤄야 한다, 는 고민이 필요합니다. 젊은 독자들이 소설을 읽고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는 결심을 하게끔 작품을 써야 하는 것이지요. 시, 소설을 생각하는 문학자들이여, 어떻게 하면 빨리 분단을 끝장내고 통일을 쟁취해 감격의 날을 맞이하겠는가. 여기에 대한 의욕을 가지고 통일의 노래를 불러야 합니다.
맹문재 앞으로의 활동 계획을 말씀해주시지요.
이기형 계획이 참 많아요. 그런데 제 나이가 지금 아흔셋이므로 내일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요. 지금 손녀 둘이 미국에 가 있는데 그동안 죽게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죽지 않고 아이들을 기다리겠다, 손녀 오는 것을 보겠다고 결심을 하고 있어요. 통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에요. 저는 통일되기 전에는 죽지 않겠다고 강한 의욕을 가지고 있어요. 사천만 민족 모두가 저와 같이 통일을 원하고 있다면 더욱 빨리 이루어지겠지요. 그런데 지금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통일을 해도 좋고, 안 해도 좋고, 늦게 되어도 좋고 등 통일에 대한 대명제가 사람들의 마음에서 점점 사라져 가고 있어요. 언론도 그렇고 작가들도 그런 것 같아요. 그러므로 통일에 대한 시를 쓰되 어떻게 하면 독자들에게 감격을 주고 통일을 결심하도록 쓸까 하는 것이 저의 중심 과제입니다. 젊은이들이 통일을 위해 활동하는 데 힘을 줄 수 있는 뛰어난 시를 써야겠지요. 일상생활이 통일과 연관되어야 합니다. 이 인터뷰 내용도 통일에 대한 절규가 전달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일제시대에 이광수나 김용제나 김문집이나 서정주 등이 친일 활동을 해서 오늘날 고통 받고 있는 면을 잘 봐야 합니다. 오늘날 친미 작가들도 50년 뒤에 그와 같은 고통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하지 않겠어요.
맹문재 선생님께서 통일을 염원하고 있는 면을 여실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 해방 후 선생님께서 만난 인물들, 시집에 나온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또 들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선생님께서 이렇게 건강하시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내내 건강하세요.
■ 이기형
1917년 함남 함주에서 태어났다. 함흥고보를 졸업하고 일본대학 예술부 창작과에서 수학했다. 1947년 『민주조선』에 시를 발표했다. 몽양 여운형 서거 이후 오랫동안 칩거생활을 하다가 1980년에 들어 창작활동을 다시 시작했다. 1989년 『지리산』 필화사건으로 구속되었다. 시집으로 『망향』『설제』『지리산』『꽃섬』『삼천리통일공화국』『별 꿈』『산하단심』『봄은 왜 오지 않는가』『해연이 날아온다』『절정의 노래』가 있다.
■ 맹문재
1963년 충북 단양에서 출생했다. 1991년 『문학정신』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먼 길을 움직인다』『물고기에게 배우다』『책이 무거운 이유』, 대담집 『행복한 시인 읽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