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제1부 폭풍전야
제3장[12.12쿠데타]
2.한남동의 총소리
전두환, 병력배치후 정총장 연행 지시
허삼수등 행동대원 공관 무장난입
장태완 부대복귀 뒤늦게 사태대응
16전차.9사단등 [경복궁병력]속속집결 ...최대통령 협력안하자 고립 양동작전
역사의 수레바퀴를 아예 진흙탕속으로 밀어넣어 버린 12.12쿠데타.
그 피의 서막은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휘하 합수부 수사요원들을 한남동 육군참모총장 공관으로 보내면서 시작된다.
79년 12월12일 오후4시께 총장공관에서 정승화육참총장을 만나고온 전사령관은 허화평비서실장에게 함수부에 파견중인 육군범죄수사단장(CID대장) 우경윤대령을 부르도록 지시한다.
전사령관은 우대령과 보안사 인사처장 허삼수대령에게 정총장연행을 지시하고 자신은 최규하대통령에게 이를 재가 받기위해 삼청동 총리공관으로 향한다.
한편 비슷한 시간대인 오후 6시30분 암호명 [생일집잔치]에 따라 경복궁내의 수경사소속 제30경비단에는 제1군단장 황영시중장, 국방부군수차관보 유학성중장, 수도군단장 차규헌중장, 제9사단장 노태우소장 등을 위시해 병력동원에 이용할 수도권부대의 지휘관들인 제1공수여단장 박희도준장, 제3공수여단장 최세창준장, 제5공수여단장 장기오준장, 제20사단장 박준병소장, 제30경비단장 장세동대령, 제33경비단장 김진영대령, 그리고 제71방위사단장 백운택준장, 청와대 경호실작전담당관 고명승대령 등이 속속 모여든다.
총장연행을 지시받은 허.우 두 대령은 무력충돌을 예상해 [후보계획]을 세운다.
후보계획이란 체포작전을 펼 때 예비적으로 병력을 뒤다르게 하는 것.
이에따라 이들은 함수부에 배속된 헌병과 보안사요원을 제33현병대장 최석립중령인솔하에 차출하고 육본 헌병감실 기획과장 성환옥대령과 당시 총장공관 경비담당책임자 이종민 육본헌병대장을 포섭동행, 오후6시50분께 총장공관에 도착한다.
이들은 먼저 공관초소 근무 헌병의 무장을 해제시킨후 공관건물을 인솔헌병병력으로 포위, 외부와 차단시킨다.
허.우 두 대령은 계엄사령관에게 권정달정보처장의 중요보고가 있다는 핑계로 총장수행부관 이재천소령의 안내를 받아 공관 1층 응접실로 들어간다.
정총장은 7시15분께 뉴스를 보다가 응접실로 내려와 이들을 만난다.
우대령이 [이번에 진급시켜 주시는줄 알았는데 서운합니다]고 웃으면서 운을 떼자 정총장도 웃으며 [그런가. 진급정원이 제한돼있어 자격있는 사람들을 다 진급시키지 못해 나도 진급발표때마다 서운해]하고 말을 받는다.
허대령이 이어 [총장님께서 김재규로부터 많은 돈을 받았으니 진술을 녹음해야겠습니다]며 녹음준비가 된 곳까지 동행할 것을 요구한다.
정총장은 [내가 계엄사령관인데 대통령외에 누가 그런 지시를 했느냐]고 소리를 지르고 허.두 두 대령이 상부승인이 있었다고 하자 부관 이소령에게 총리공관이나 장관실로 확인전화를 걸라고 한다.
이소령이 부속실에 가서 전화를 걸려는 순간 그곳에 있던 수행병력들이 이를 방해하기위해 이소령에게 총격을 가했고 동시에 경호장교 김인선대위에게도 총을 쏘아 쓰러뜨린다.
이때 우대령 등이 정총장의 양팔을 끼고 끌고 나갔으며 정총장은 [사격중지!]라고 외친다.
순간 청와대 경호실복장을 한 자가 M16을 쏘면서 응접실 대형유리판을 깨고 실내로 들어와 총개머리판을 정총장면전에 들이대고 이렇게 외친다.
[빨리 따라갈 것이지 무얼 꾸물대는거야.]
후보계획실행에 나선 최석립중령은 곧 마이크로버스를 공관내로 진입시켰고 정총장의 팔을 끼고 나간던 우대령은 자기들끼리 총을 난사하는 와중에 총상을 입고 만다.
최중령이 허대령일행을 엄호하며 현과밖을로 나와 정총장을 차에 태운 뒤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납치해가면서 12.12의 제1막은 종료된다.
한편 전두환사령관으로부터 식사초대를 받고 연희동 비밀요정에서 보안사 참모장 우국일준장, 수경사 헌병단장 조공대령과 저녁을 들던 정병주특전사령관 장태완 수경사령관 및 김진기 육본헌병간 등은 총장공관 총격신고에 따른 비상연락을 받고 급거 부대로 복귀, 뒤늦게 사태대응에 나서면서 12.12의 제2막을 연다.
장사령관이 필동 수경사에 도착한 8시께 윤성민육참차장은 총장이 괴한에게 납치됐다는 소식을 듣고 전군에 비상령을 하달한다.
대통령결재를 받기위해 총리공관에 가있던 전두환사령관은 대통령이 [국방장관의 경유를 받지 않은]요구에 불응하자 대통령 격리작업에 나선다.
제30단에 있던 차규헌중장과 노태우소장은 경호실소속 고명승대령과 정동호준장에게 지시, 경호실소속병력으로 총리공관을 경비지원중인 헌병들을 무장해제시키고 일대를 포위케한다.
전사령관은 두번째로 황영시중장과 동행, 최대통령에게 결재를 요구 거부되자 유학성 차규헌 백운택 박희도등과 다시 최대통령에게 압력을 가하나 끝내 실패한다.
이와함께 황영시 유학성 차규헌 등은 육본지휘부에 절대로 병력을 출동시키지 않겠다고 하면서 최세창 장기오 박희도 세공수여단장에게 각각 임무를 부여, 부대로 돌려보낸다.
부대로 복귀한 최세창 3공수여단장은 직속상관인 정병주 특전사령관의 상황파악을 방해하다 드디어 부하인 박종규중령에게 정사령관체포를 지시, 13일 2시40분께 김오랑비서실장을 사살하며 정사령관을 부상시킨채 체포한다.
이들은 피흘리며 신음하는 정사령관을 차에 싣고 보안사서빙고 분실로 납치했으나 정사령관이 과다출혈로 쇼크현상을 나타내자 그를 국군서울지구병원으 옮긴다.
또 박희도 1공수여단장은 이순길부사령관의 제지를 뿌리치고 휘하병력을 출동, 13일 새벽1시30분 삼각지로 진입한다.
이들은 여기서 병력을 분할, 국방부와 육본을 공격한다.
약2시께부터 국방부를 공격한 이들은 무차별사격 끝에 장병들을 무장해제시키고 공격와중에 피신한 허재현국방장관을 수색, 1시간후에 발견된 그를 보안사를 경유해 총리공관으로 데려간다.
육본은 지휘부가 수경사로 이동한 뒤여서 쉽게 점령되고 만다.
공수부대에 의한 실력행사가 진행되면서 9사단 29연대, 제2기갑여단 16전차대대장소속 전차5대, 제20사단등 경복궁병력이 서울로 출동하거나 서울부근에 배치되기 시작한다.
윤성민육참차장이하 일반 참모부장등 지휘부가 이동해간 수경사도 예하 30,33경비단과 헌병단장이 경복궁측에 가담해 있어 불안정하기는 마찬가지.
장 수경사령관과 육본참모들은 비상사태시 서울에 출동하게 돼있는 수도권외곽 주요지휘관들에게 전화로 서울의 긴급상황을 설명하고 명령시 출동할 수 잇는 준비를 갖추게 한다.
그러나 육본측 병력동원은 윤육참차장이 경복궁측과 쌍방병력을 출동시키지 말자는 전화통화를 거듭한 후 소극적태도로 바뀐데다 정보를 장악한 보안사의 교란 등으로 기회를 잃어가고 만다.
이에앞서 12일 밤10시50분께.
장 수경사령관은 수경사 전체4백50명 장교중 남아있는 60명장교들을 불러 작전명령을 하달한다.
[이 자리를 이탈한 자들은 김일성도당과 똑같은 반란군이요 괴수다. 30단장.33단장.헌병단장등은 여러분들의 상사가 아니다. 전투시 이들을 보면 체포.사살하라. ..중략.. 전차4대, 토우미사일, 로켓포, 총류탄등 모든 발사무기는 전부 개봉해 즉각 사용할 수 있도록 하라. 공격개시선은 아스토리아호텔앞, 돌격지점은 보안사 정문이다. 발사무기로 30단본부와 보안사지휘부를 완전히 파괴하고 일제히 돌격하라.]
공격대기선으로 내려간 장사령관의 귀에 [장사령관이 보이나. 보이면 즉시 사살하라]는 전차무전소리가 들리고 급기야는 사령관실에 돌아온 그에게 [상황중지]을 명령하는 노국방장관의 전화가 걸려오고만다.
수경사에 합수부측의 장사령관체포조가 들이닥친 시간은 13일 새벽3시25분.
장사령관이 서빙고로 끌려가고 13일 새벽4시30분 최대통령이 정숭화총장 연행에대한 [지각재가]을 내리면서 12.12자체상황은 수많은 유혈속에 막을 내리게 된다.
다음은 13일자 동아일보1면머리기사.
[노재현국방부장관은 13일 정승화계엄사령관을 박정희대통령 시해사건과 관련, 군수사기관이 체포하고 정부는 새 육군참모총장겸 계엄사령관에 이희성육군대장(중앙정보부장서리)을 임명했다고 발표했다. 노장관의 특별단화에 따르면 군수사기관은 12일오후7시께 대통령시해사건의 주범 김재규에 대한 조사과정에서 김이 숨기고 있던 새로운 사실이 발견돼 그 진부를 확인하기 위해 육군참모총장공관으로 출동, 정총장을 연행조사중인데 그 과정에서 공관경비병과 충돌이 있었으나 정총장의 신상에는 이상이 없다고 했다....]
89년 12월31일 국회 5공특위에 증인으로 출석한 전두환당시 보안사령관은 [본인은 명예를 걸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12.12사태는 시해사건의 수사도중에 발생한 우발적인 사건이었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라며 이후 집권과정과의 무관함을 밝힌적이 있다.
그러나 12.12직후 서빙고분실장실에서 전사령관과 대좌한 장태완 당시 수경사령관은 전사령관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날 그 소란만 안피웠어도 나는 장선배를 군단장으로 보내려고 했어요. 정총장도 그렇습니다. 순순히 예편서만 썼어도 내가 장관쯤으로 모시려고 했어요. 정말입니다.]
일개 육군소장이 참모총장의 옷을 벗기고 [장관쯤]을 시킨다는 말에서 12.12의 조감도가 훤하게 그려지더라는게 장사령관의 지적.
지난9월 국회국방위 [12.12군사쿠데타적 사건 국정조사]에서 증인으로 나온 노재현당시 국방장관도 [30경비단 모임자체가 불법니다. 총장연행도 불법이고 지휘계통 문란행휘도 불법이다. 병력동원은 계획쪽에 가깝다고 본다. 병력동원을 우발적이로 할 수는 없다]고 증언한다.
역사상 가장 긴 쿠데타-12.12는 그래서 오늘까지도 시비시비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최웅일기자>
첫댓글 감사합니다
잘 일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