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서) 위키피디아 영문판 (번역) 크메르의 세계 ※ 사진자료는 "크메르의 세계"가 첨가한 것임.
폴 포트 (뽈 뽓) (상편)
Pol Pot
살롯 사(Saloth Sar) 혹은 민 하이(Minh Hai)[생몰연대: 1928.05.19.(주7)(주2)(주3)(주4)(주8)-1998.04.15)란 본명을 갖고 있음. 그러나 폴 포트(Pol Pot, ប៉ុល ពត [뽈 뽓])이란 이름으로 유명한 그는 "크메르루즈"(Khmer Rouge)(주9)란 명칭의 캄보디아 공산당의 지도자였고, 1976-1979년 사이에 이들이 세운 정권인 "민주 캄푸치아"(Democratic Kampuchea)의 총리였다.
폴 포트는 1975년 중반 캄보디아의 실권자가 되었다.(인용각주 필요) 그의 통치 기간 동안, "토지균등주의적 집산주의"(agrarian collectivization)의 한 형태를 시행했다. 이에 따라 도시민들은 시골로 쫒겨나 집단농장에 수용되어, "영년"(零年, Year Zero)의 "문명새출발"(restarting civilization) 목표를 향한 강제노동에 시달려야만 했다. 이 시기에 강제노동, 영양실조, 의료체계의 상실, 처형 등 복합적 원인들로 인해 170-250만명의 사람들이 사망했는데, 이는 캄보디아 인구의 거의 21%에 이르는 규모였다.(주10)
1979년 캄보디아-베트남 전쟁 과정으로 이웃한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침공해 들어왔다. 이에 폴 포트는 캄보디아 남서부 지방의 정글로 피신했고, 크메르루즈 정권은 붕괴했다.(주11) 1979-1997년 사이에 그를 비롯한 이전 지도자들이 지휘한 크메르루즈 반군은, 캄보디아-태국 국경지대를 따라 통제권을 쥐고 있었고, UN(국제연합)도 이들을 캄보디아의 정당한 정부로 인정했다.
폴 포트는 따 목(Ta Mok)이 지휘하는 크메르루즈 분파에 의해 가택연금되었다가, 집에서 사망했다. 그가 사망한 이래로 독살설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주12)
(주1) Brother Number One, David Chandler, Silkworm Book, 1992 p.7.
(주2) Kiernan, Ben. The Pol Pot Regime: Race, Power, and Genocide in Cambodia under the Khmer Rouge, 1975–79. New Haven, CT: Yale University Press, 1996.
(주3) "Biography of Pol Pot". Asiasource.org. http://www.asiasource.org/news/special_reports/polpot.cfm. 2009-02-27 접속.
(주4) John Pilger (July, 1998). "America's long affair with Pol Pot". Harper's Magazine ??: 15-17.
(주5) "Pol Pot Biography". Notablebiographies.com. http://www.notablebiographies.com/Pe-Pu/Pol-Pot.html. 2009-02-27 접속.
(주6) Kiernan, Ben. "Pol Pot - MSN Encarta". Encarta.
(주7) Brother Number One, David Chandler, Silkworm Book, 1992 p.6.
(주8) "Pol Pot Biography". Notablebiographies.com. http://www.notablebiographies.com/Pe-Pu/Pol-Pot.html. 2009-02-27 접속.
(주9) "붉은 크메르인"이란 의미로 프랑스어 "루즈"(rouge)는 오랜 기간 공산주의자를 상징해온 색깔인 "빨강"을 의미하며, "크메르"란 "크메르민족" 혹은 "캄보디아인"을 가리키는 말이다.
(주10) "The Cambodian Genocide Program". Genocide Studies Program. Yale University. 1994-2008. http:// www.yale.edu/cgp/. 2008-05-12 접속.
(주11) "Time necropsy". Time.com. http://www.time.com/time/asia/asia/magazine/1999/990823/ pol_pot1.html. 2009-02-27 접속.
(주12) Horn, Robert (25 March 2002). "Putting a Permanent Lid on Pol Pot". Time Magazine. http://www.time.com/time/magazine/article/0,9171,219924,00.html. 2008-09-03 접속. |
1. 생 애
1.1. 초기의 생애 (1928-1961)
살롯 사는 1928년 껌뽕 톰 도의 쁘렉 스바우(Prek Sbauv)에서 비교적 유복한 화교계 크메르인 가정에 태어났다.(주13)(주14) 1935년 그는 고향인 쁘렉 스바우를 떠나 프놈펜에 있는 카톨릭계 학교인 "에꼴 미셰"(École Miche)에 들어갔다. 그의 누나인 로이 웅(Roㅢ ung)이 시소왓모니웡(Sisowath Monivong) 국왕의 후궁이었기에, 그도 종종 왕궁을 방문하곤 했다. 1947년 명문 "리셰 시소왓"(Lycée Sisowath: 시소왓 중고교)에 입학허가를 얻어 들어갔지만, 공부는 그다지 신통치 않았다. 하지만 장차 그의 첫번째 아내가 될 키우 뽄나리(Khieu Ponnary)와 그녀의 여동생인 키우 티릿(Khieu Thirith: 훗날의 이엥 티릿[Ieng Thirith]), 또한 장차 키우 티릿의 남편이 될 이엥 사리(Ieng Sary)도 이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각주 필요)
☜ 폴 포트의 고향마을인 쁘렉 스바우의 풍경. 대형확대사진보기(☜클릭)
하지만 프놈펜 북쪽의 로세이 께오(Russey Keo) 군[현재는 구]에 있는 기술학교로 전학을 간 후, 그는 프랑스로 기술교육을 받으러 갈 수 있는 장학생 자격을 획득하였다. 1949년부터 1953년 사이에 그는 파리의 FER(프랑스 전파전자대학: 현재는 EFREI[École FRançaise d'Électronique et d'Informatique: 프랑스 전자정보과학대학]으로 명칭이 바뀜)서 전파전자학(radio electronics)을 공부했다. 1950년에는 유고슬라비아에서 벌어진 국제적 건설노동 봉사대에도 참여했다.
1950년 소련이 비엣민(Viet Minh)을 베트남의 정부로 인정하자, "프랑스공산당"(PCF)은 베트남 독립 문제를 들고나왔다. PCF의 반-식민주의적 성향은 살롯 사를 비롯한 많은 젊은 캄보디아 학생들을 매료시켰다. 1951년 "맑시스트 서클"(Cercle Marxiste)로 알려진 비밀 공산당 조직에 가담한다. 같은 해 이 조직이 "크메르학생연합"(Khmer Student's Association: KSA)을 장악하게 된다. 또한 불과 몇달 사이에, 살롯 사는 "프랑스공산당"(PCF)에도 입당한다. 역사가 필립 숏(Philip Short)은 실롯 사의 시원찮은 학업성적이 반-지성적 경향을 갖고 있던 PCF 내에서 상당한 이점이 되었을 것이라 보았다. 즉 PCF는 교육받지 못한 농민들이야말로 참다운 프롤레타리아(proletariat: 무산계급)으로 생각하던 입장이어서, 살롯 사로 하여금 "맑시스트 서클" 내 권력을 빠른 속도로 장악하게 도왔다는 것이다.(인용각주 필요)
연거푸 3년 연속으로 시험에 실패하여, 1954년 1월 살롯 사는 캄보디아로 귀국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맑시스트 서클" 멤버 중 가장 먼저 캄보디아로 귀환하였고, 정부에 대항해 활동 중인 다양한 반군 조직들을 평가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는 "크메르 비엣민"의 추천을 받았고, 1954년 8월에 랏 사모은(Rath Samoeun)을 따라 캄보디아 껌뽕 짜암(Kompong Cham) 도와 쁘레이 웨잉(Prey Veng) 도 경계 근처 베트남 국경지역인 끄라바오(Krabao) 부락에 있던 비엣민 동부구역(Eastern Zone) 사령부를 방문했다.
살롯 사 일행은 "캄푸치아 인민혁명당"(KPRP)이 비엣민의 전선조직보다 조금 더 큰 순준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1954년 동구부역 사령부에 있던 캄보디아인들이 두 집단으로 갈라졌다. 1954년에 체결된 제네바협정에 따라 비엣민의 모든 군대 및 반군들이 캄보디아에서 철수해야했는데, 한 그룹은 철수하는 베트남군을 따라 베트남으로 갔다. 베트남의 입장에서는 이들을 장차 캄보디아 해방을 위한 기간당원으로 삼을 요량이었다. 한편 살롯 사를 포함한 다른 그룹은 캄보디아로 귀환하였다.
1954년의 제네바 회의에 이은 캄보디아 독립 직후, 좌우의 각 정파들은 새로운 정부에서의 권력을 놓고 서로 반목하고 있었다. 노로돔 시하누크(Norodom Sihanouk) 국왕은 이들 정파들을 상호 견제케 하면서, 극단적인 정치 집단에 대해서는 경찰과 군대를 동원해 탄압했다. 1955년의 부정선거는 캄보디아 좌파로 하여금 합법적인 수단을 통한 정권쟁취를 포기토록 만들었다. 하지만 공산주의자들이 비록 이념적으로는 무장봉기를 지향했다곤 하지만, 워낙 당세가 얏한 탓에 반군활동을 개시하진 못했다.
한편 프놈펜으로 귀환한 살롯 사는 제도권 야당인 민주당(Democrats) 및 인민당(Pracheachon)과 지하로 숨어든 공산주의 운동 사이에 연락업무를 담당했다. 또한 그는 1956년 7월 14일에 키우 뽄나리(Khieu Ponnary)와 결혼했다. 당시 뽄나리는 교사가 되어 "리셰 시소왓"으로 되돌아왔고, 살롯 사는 새로 생긴 사립 꼴레쥬인 쩜로은 위찌어(Chamraon Vichea)에서 프랑스 문학과 역사를 가르쳤다.(주15)
1973년 4월 망명 중이던 시하누크 국왕이 캄보디아로 잠시 들어와 크메르루즈 지도자들을 만났다.
위의 사진은 사진: Rasmei Kampuchea 지가 공개한 사진이고 아래의 사진은 Time 지의 사진이다.
1.2. 반군에의 길 (1962-1968)
1962년 1월 캄보디아 정부는 6월의 총선을 앞두고 극좌파 인민당(Pracheachon party[쁘러찌어쩐 당]) 지도부 대부분을 구속했다. 또한 이 당에서 발행하던 신문과 간행물들도 모두 폐간되었다. 이 사건은 캄보디아에서 제도권 공산주의 운동의 공식적인 종말이었다. 1962년 7월 캄보디아 공산주의 지하당 서기장이던 또우 사모웃(Tou Samouth)이 체포되어 구금 중 사망했다. 이러한 일련의 탄압과 구속은 살롯 사로 하여금 자연스레 사실상의 지하당 부서기장 지위를 갖게 만들어주었다. 또우 사모웃이 살해되자 살롯 사가 공산당(캄푸치아 노동당: WPK) 서기장 대행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1963년 18명의 당원이 참가한 당대회에서 살롯 사가 당 중앙위원회 서기장으로 선출되었다. 1963년 3월, 노로돔 시하누크의 보안경찰이 구속대상 좌익인사 명단을 발표한 후 살롯 사는 도피를 시작했다. 그리고 당시 남-베트남에 맞서 싸우던 베트남인 부대들과 접촉했다.
1964년 초, 살롯 사는 베트남이 캄보디아 공산당이 기지를 건설하는 것을 도와주리란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 해 말에 당 중앙위원회는 회의를 갖고 무장투쟁에 나선다는 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에는 극단적인 캄보디아 민족주의 개념인 "자존"도 강조되어 있었다. 국경 근처의 캠프들에서 "크메르루즈"의 이념적 기반들이 서서히 형성되고 있었다. 당은 전통적인 맑시즘을 뿌리치고 농촌의 소작농들이야말로 진정한 노동자 계급 플로레타리아이며 혁명의 근본이라고 선언했다. 이는 어떤 점에서는 당 중앙위원회에 "노동자 계급"(working class) 출신이 없었기 때문에도 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은 모두 본건적인 소작농 사회에서 성장했다. 당은 또한 자신들의 비-표준적인 공산주의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상좌부불교"(Theravada Buddhism)가 갖고 있던 요소들도 채택했다.(인용각주 필요)
1965년 시하누크의 새로운 탄압이 가중되는 기간에, 살롯 사가 지도하던 크메르루즈 운동은 급격히 세력을 확장했다. 여러 교사들과 학생들이 도시를 떠나 시골지역으로 이동하여 이 운동에 합류했다. 1965년 4월, 살롯 사는 캄보디아 내 반정부군 출범을 승인받기 위해 북-베트남을 방문했다. 하지만 당시 북-베트남은 캄보디아 정부와 협정을 맺고 있었기 때문에, 반란활동에 대한 지원을 거부했다. 시하누크는 남-베트남과 싸우던 북-베트남이 군사적 활동을 위해 캄보디아 영토와 항구를 이용할 수 있도록 묵인하고 있었다.
1966년 캄보디아로 돌아온 살롯 사는 여러 가지 중요한 결정을 하게 될 당대회를 소집한다. 여기서 당은 공식적으로, 하지만 비밀리에 당명을 "캄푸치아 공산당"(Communist Party of Kampuchea: CPK)이라 변경했다. 이 결정은 하급당원들에게는 전해지지 않았다. 또한 이 당대회는 "명령구역"(command zone)을 설치하고, 각 명령구역 별로 반정부 활동을 준비토록 했다.
1966년 초, 쌀 수매 가격 문제로 인해 시골지역에서 농민들과 정부 사이에 투쟁이 벌어졌다. 살롯 사의 크메르루즈는 이 소요에 대해 당황한 나머지, 실제로는 이 사건을 통해 그다지 큰 이익을 얻지 못했다. 하지만 정부측이 평화적 해결방안을 거부하는 바람에 이 시골지역의 소요사태가 결국 공산주의 운동측의 수중으로 들어오게 된다.
북-베트남이 실질적인 어떠한 도움도 주길 거부했음에도 불구하고, 1967년 초 살롯 사는 전국적인 반정부 활동을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1968년 1월 18일 밧덤벙(Battambang) 남부에 있던 군사기지를 기습하면서 반군의 활동은 개시되었다. 밧덤벙 지역은 이미 2년간 대규모 농민 소요를 겪던 중이었다. 정부군의 반격으로 습격은 격퇴되지만, 이 사건을 통해 크메르루즈는 상당량의 무기들을 노획했고, 이들 무기들로 재무장함으로써 시골 마을들에서 경찰 병력을 철수시킬 수 있는 군사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1968년 여름 무렵에 이르면, 살롯 사가 집단지도체제적 당 지도자에서 크메르루즈 운동의 절대적인 지도자로의 지도체제 이행을 시작한다. 이전에는 당의 조직과 자원을 여러 다른 지도자들과 공유했지만, 이 무렵에 이르면 개인적인 참모들과 경호군까지 개인적으로 보유한다. 더 이상 외부인은 그에게 접근할 수 없었다. 그가 참모를 통해 호출하는 경우에만 그를 만날 수 있었다.
1.3. 권력에의 길 (1969-1975)
(사진: www.historyplace.com)
크메르루즈의 소년병들. 1975년경.
이 당시의 크메르루즈 운동은 정규인원이 1,500명을 넘지 못했지만, 이들은 또 그에 준하는 많은 시골사람들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비록 무기도 충분한 공급이 이뤄지지 못했지만, 반군들은 캄보디아 내 19개 군에서 작전 중이었다. 1969년 중반 살롯 사는 당대회를 소집하여 선전선동전략을 수정했다. 1969년까지 크메르루즈는 상당히 반-시하누크적 태도를 견지했다. 즉 시하누크에 반대하는 것이 곧 선전선동의 중심축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당대회를 기점으로 선전선동의 중점은 캄보디아 내 우파 정당들과 그 정당들이 가진 친미적 태도를 겨냥했다. 당은 공식 발표를 통해 반-시하누크적 태도를 중지했지만, 내부적으로 시하누크에 대한 견해는 전혀 바뀌지 않은 상태였다.
살롯 사와 크메르루즈를 위한 권력에로의 길이 1970년 1월에 발생한 사건으로 열리기 시작했다. 시하누크가 외유 중일 때 반-베트남 소요가 발생했고, 시하누크는 외국에서 이를 진압하도록 정부에 명령했다. 시위는 금새 통제권을 벗어낫고, 폭도들이 남-베트남과 북-베트남 대사관 모두를 약탈했다. 처음에 시하누크는 파리에서 이 시위대에 대한 명령권을 행사했지만, 곧 이 사태에 대해 익명의 개인들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시하누크의 태도는 정부로 하여금 그를 국가주석직에서 하야시켜야 한다는 판단을 하게 만든다. 국회는 시하누크의 실각을 결의했다. 그리고 론 놀(Lon Nol) 정부는 곧장 북-베트남의 군수물자 운송에 사용되던 껌뽕 솜 항구를 봉쇄하고, 베트남인들은 캄보디아를 떠나라고 요구하였다.
캄보디아의 정치적 변동에 대한 반응으로, 북-베트남은 총리인 팜 반 동(Phạm Văn Đồng)이 중국을 방문해 시하누크를 만나 그를 크메르루즈의 동맹으로 만들었다. 북-베트남은 또한 살롯 사도 만나서, 정부에 대항한 반군활동을 위해 살롯 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해주기로 약속했다. 살롯 사 역시 당시 베이징에 있었지만, 중국과 북-베트남은 살롯 사의 방문을 시하누크에게 비밀로 해주었고, 두 사람이 만나는 일도 없도록 했다. 그 직후 시하누크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 캄보디아 국민들이 정부에 반대하고 크메르루즈를 지원하길 호소했다. 1970년 5월 살롯 사는 캄보디아로 돌아왔고, 반군의 세력은 급속도로 확대되었다.
그 이전인 1970년 3월 29일 북-베트남이 직접 캄보디아 군대에 대적해 전투에 참가한 일이 있다. 4만명의 베트남군 병력은 재빠르게 캄보디아 동부지방의 대부분 지역을 가로질로 철군 직전에 프놈펜을 24 km 남겨둔 지점까지 진격했다. 이 전투에서 살롯 사와 크메르루즈는 그다지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다.
1970년 10월, 살롯 사는 당 중앙위원회 명의로 한 결의문을 발표했다. 이 결의문은 캄보디아는 장래에 어떠한 타국의 영향으로부터도 독립한다는 독립자존의 원칙을 표명한 것이었다. 또한 이 결의문에는 1950년대 캄보디아 공산주의 운동에서 크메르 출신의 비엣민(Viet Minh) 당원들이 보여준 배신적 행동들도 묘사되어 있었다. 이 성명은 장차 그들이 집권 후 보여줄 반-베트남/독자노선을 최초로 선언한 것이었다.
1971년 내내 베트남인들(북-베트남 및 베트콩)이 캄보디아 정부군과의 대부분의 교전을 치뤘고, 살롯 사와 크메르루즈는 그에 대한 보조적 역할밖에 수행하지 못했다. 어찌되었든 이러한 상황은 살롯 사로 하여금 새로운 지원병들을 모집하여, 그 이전 어느 때보다도 고도의 훈련을 시킬 기회를 주었다는 점에서 상당한 이익이 되었다. 살롯 사는 또한 크메르루즈 조직을 보다 정치적으로 교육시키고 의식화시키는 데도 자원을 투여할 수 있었다. 당시의 크메르루즈 군대는 출신성분에 상관없이 받아들였기 때문에, 살롯 사는 당원의 수도 상당하게 늘릴 수 있었다. 후에는 학생들 및 소위 중농(middle peasants)으로 불리던 이들은 입당이 거부되었다. 당원으로는 순수한 소작농 계급이 선호되었다. 하지만 살롯 사를 비롯한 대부분의 당 지도부가 학생이나 중농계급 출신이었다는 점에서, 이러한 제한은 다소 이율배반적인 것이었다. 게다가 교육받은 구 당원들과 교육을 받지 못한 신 당원 사이의 구분도 생겨났다.
1972년 초, 살롯 사는 반군과 베트남 세력이 통제하던 캄보디아 내 지역들을 순회하였다. 그는 35,000명에 이르는 크메르루즈 정규군과 이를 지원하는 10만명 정도의 비정규 인원들을 만났다. 중국은 한 해 동안 500만 달러에 이르는 무기를 제공했고, 캄보디아 동부지방에서 강제노동을 동반한 고무농장을 운용함으로써 독자적인 자금원도 확보했다. 또한 크메르루즈는 병력을 모집하기 위해 베트남-캄보디아 국경지역에서 행해진 미군의 공중폭격을 선전에 이용했다.
1972년 5월에 개최된 당 중앙위원회 회의 이후, 살롯 사가 지도하던 당은 자신들이 장악한 지역들을 보다 엄격한 획일성과 규율로 통제하기 시작했다. 짬 족(Chams)과 같은 소수민족들은 크메르식 복식과 외양을 갖추도록 강요받았다. 짬 족에게 강요된 장신구 착용 금지와 같은 정책들이 곧 전체 인구를 대상으로 확대 시행되었다. 살롯 사는 거친 형태의 토지개혁도 단행했다. 이는 모든 토지를 획일적인 규모로 분할하는 데 근간을 두고 있었다. 또한 당은 당시의 모든 사유 교통수단을 몰수했다. 1972년에 시행된 이러한 정책들은 해방구 내의 인민들에게 봉건 소작농적 평등주의를 부여하려 한 것이었다. 이러한 정책은 가난한 소작농 출신들로부터는 환영을 받았고, 도시에서 시골로 내려온 난민들에게는 그다지 환영받지 못했다.
1972년 북-베트남 군대가 캄보디아 정부에 대항해 싸우던 전투에서 철군하기 시작했다. 1973년 5월 살롯 사는 새로운 훈령을 발표하여, 사적 소유를 금지하고 모든 것이 오직 공동으로만 소유되는 집단생활로 촌락들을 개편하기 시작했다.
(사진) 1975년 총리로 선출된 무렵의 폴 포트(좌)
1973년 크메르루즈는 약진한다. 프놈펜 외곽까지 진군한 상태에서 살롯 사는 우기가 한창인 동안 프놈펜을 점령해야 한다는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이 명령은 무의미한 공격과 희생자만 늘렸다. 1973년 중반에 살롯 사 휘하의 크메르루즈는 캄보디아 전국의 3분의 2 정도의 영토와 인민들을 장악하고 있었다. 베트남은 이제 더 이상 이 상황을 통제할 수 없으며, 살롯 사 역시 예전의 종속적인 동반자가 아닌 대등한 지도자로서 대우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1973년 말, 살롯 사는 향후의 전쟁에 관한 2가지 전략적 결정을 내린다. 첫번째 결정은 프놈펜을 외부로부터의 지원에서 차단시켜 포위상태로 만든다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의 결정은 시민들에게 크메르루즈 포위선을 통해 시내를 벗어나라고 종용하는 것이었다. 크메르루즈는 도시인들을 마치 감염을 시키는 점염병인냥 취급하였다. 또한 살롯 사는 일련의 무차별 숙청들을 지시했다. 교육받은 이들과 함께 전직 공무원들은 이 숙청에서 다시 제외되었다. 그리고 크메르루즈 장악 지역 내에 새롭게 지어진 감옥들로 보내졌다.
짬 족들은 자신들의 전통 문화가 말살될 위기에 처하자 이 시기에 소요를 일으켰다. 소요는 금새 진압도었고, 살롯 사는 여기에 가담한 대부분의 이들을 혹독하게 고문하도록 명령했다. 살롯 사는 급격하고도 새로운 정책을 도입하여 전 지역으로 보급하기 전에, 짬 족 공동체를 통해 실험을 하곤 했다.
크메르루즈는 또한 도시인들을 시골로 소개시키는 정책도 펼쳤다. 1971년 크메르루즈가 끄라쩨(Kratie)의 읍내를 장악했을 때, 살롯 사와 여타 지도부는 해방된 도시지역이 얼마나 빠른 속도로 사회주의를 잊어버리며, 과거의 방법으로 회귀하는지를 확인하고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당이 상상하는 이상을 구현하기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읍내를 재조직해보았지만, 어떤 것도 제대로 작동하질 않았다. 1973년 완전한 좌절감을 안은 채, 살롯 사는 이 문제를 해결할 유일한 방법은 전 시민을 교외로 내모는 수밖에 없다고 결정했다. 당시 살롯 사는 "그 수많은 희생의 결과로 쟁취한 것이 고작 자본주의자들을 우리의 통제권 안에 존재케 하는 것이라면, 도대체 혁명의 의미란 무엇이란 말인가?"라고 적었다. 그 직후 살롯 사는 껌뽕 짜암(Kompong Cham)에서도 15,000명의 인구를 동일한 이유로 소개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후 1974년에 크메르루즈는 보다 큰 도시인 우덩(Oudong)에서도 시민들을 소개시켰다.
한편 국제적으로 살롯 사와 크메르루즈는 63개국으로부터 캄보디아의 진정한 정부라고 승인받았다. UN에서도 UN 의석을 크메르루즈에 주자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하지만 정부측이 2표 차이로 승리했다.
1974년 9월 살롯 사는 당 중앙위원회 전체를 소집했다. 군사작전이 거의 종결될 상황에 이르고 있었기 때문에, 살롯 사는 일련의 결정을 통해 당을 사회주희 새혁을 실행하는 방향으로 개편하기로 하였다. 첫번째 결정은 그들이 승리한 직후의 일로, 국가의 수도에서 모든 주민들을 시골로 내려보내 소개를 시키는 일이었다. 두번째 결정은 화폐기능을 정지시켜 신속히 없애는 일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결정은 살롯 사의 첫번째 주요한 숙청을 당이 승인한 것이다. 1974년 살롯 사는 고위 당직자였던 쁘라싯(Prasith)을 숙청했다. 쁘라싯은 숲으로 끌려갔고 자신을 방어할 틈도 없이 사살되었다. 민족적으로 태국인이었던 그의 죽음 이후, 마찬가지의 핵심당원들이 숙청되었다. 살롯 사는 이 사건에 대해 계급투쟁이 격렬하게 시작되었고, 당의 적들이 강력하게 저항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1975년 1월 크메르루즈는 정부군에 대항한 최후의 공격을 준비했다. 같은 시기에 시하누크는 베이징에서 자랑스럽게 승리 후 처단할 인물 명단이 적힌 "살생부"를 언론에 발표했다. 원래 7명의 명단이 적혀 있었던 이 리스트는 모든 고위 관료와 군 장성, 그리고 경찰 간부를 포함하면서 23명까지 늘어났다. 또한 베트남과 캄보디아 사이에 내재되었던 갈등관계도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인도차이나 내의 라이벌 사회주의 국가로서 북-베트남은 크메르루즈가 프놈펜을 함락시키기 전에 사이공을 차지하기로 결정했다. 한편 중국에서 오는 무기 선적이 늦어지면서 크메르루즈 측은 베트남에 대해 이 무기들이 원래 중국의 것이므로 빨리 선적을 부탁한다는 다소 굴욕적인 감사문을 보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이르기도 했다.
1975년 4월, 정부측은 새로운 인물들로 최고국가위원회를 구성하여 크메르루즈에 항복협상을 하기 위한 창구를 열었다. 이 위원회는 프랑스에서 살롯 사와 함께 공부했으며 크메르루즈 부서기장인 누온 찌어(Nuon Chea)의 사촌이었던 삭 숫사칸(Sak Sutsakhan) 장군이 의장을 맡고 있었다. 이러한 움직임에 대한 살롯 사의 반응은 모든 위원들을 승리 후 처단할 살생부에 올린 것이었다. 1975년 4월 17일 프놈펜은 함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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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단편적으로 알던 한 인물을 성장과정부터 정권 장악까지 새롭게 배우고, 단순히 캄보디아 비극이 캄보디아만의 문제가 아니고 이렇게 복잡하게 주변국과 얽히고 설켜있군요.75년에 풀 포트의 역사 끝났다면 어떻게 평가 되었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예, 계속 생각하게 되는 것이 역시 캄보디아 식민체제 청산 문제인데, 이는 식민지를 겪은 민족이나 국가들이 독립 후에 거의 예외없이 빠져드는 과정입니다. 캄보디아의 경우 아주 오래 걸렸고, 더욱 처절한 면이 있네요. 결국 현재 친-베트남 세력(훈센 정권)의 승리로 귀착이 되었는데, 이것이 또 장래에 어떤 문제를 가져올지 현재로서는 예측불가하군요.
어제 읽다가 만 것을 마져 읽는데 갑자기 머리에 쥐가 나는 듯 하네요. 어저께 중국어공부 시간에 크메르어의 `뜨읍`과 `뜨읍따에`에 해당하는 중국어를 이해 하지 못했을 때의 그 현상이 또,,,,에고 이제는 복잡하게 머리 쓰는 건 안되나 봐요....씁쓸..
오늘은 인터넷이 넘 느려서 연구진도가 안 나가네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