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우가릿의 쐐기문자 알파벳
선형문자 알파벳이 이런 발전을 이뤄가던 시대에, 레반트의 한쪽 구석 우가릿에서는 쐐기문자 알파벳이 자라나고 있었다. 현대의 시리아의 지중해변 항구도시인 고대 우가릿은 이스라엘에서 멀지도 않고, 바알신화와 구약성경의 수많은 병행구를 볼 때, 예루살렘은 분명 우가릿을 인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우가릿어 쐐기문자로 쓰인 토판 가운데, 이른바 ‘알파벳 토판’(abecedarium)이란 것이 있다. 희한하게도 우가릿어 알파벳의 첫글자에서 마지막 글자까지 딱 한 번씩만 쓴 토판이다. 흥미를 끄는 것은 알파벳의 순서다.
이 순서는 ‘알파-베타’ 순서를 따르며, 현대 유럽어의 ‘ABC...’ 순서와 거의 같다. 이 글자의 순서는 우가릿에서 발명된 것이 아니라 더 오래된 전승에 기반한 것이다. 사실 ‘알파벳’(alphabet)이라는 낱말 자체가 ‘알파-베타’ 순서로 시작되는 문자열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한글’이란 이름이 확립되기 전에, 우리 글을 ‘가가거겨’로 일컬었던 경험을 떠올리면 이 이름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그런데, 아무런 의미도 없이 그저 글자를 순서대로 나열한 토판의 용도는 무엇이었을까? 학자들은 이런 토판이 알파벳 교육용 토판이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학교에서 글자를 익히던 토판이었다는 말이다. 그러고 보면 히브리 백성이 이집트에서 탈출하기 이전에 이미 학생들은 ‘ABC...’ 순서로 알파벳을 외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림 15: 우가릿어 알파벳 © 주원준
[그림15]는 현대의 우가릿어 교재에서 사용하는, 이른바 ‘표준 서체’를 정리한 것이다. 한편 우리말로 우가릿어를 배울 수 있는 교재와 사전이 있다. 히브리어나 셈어에 익숙한 독자라면 한 두달 만에 바알 신화를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우가릿어 문법』(한님성서연구소 2010): J. Tropper, Ugaritisch Kurzgefasste Grammatik mit Ubungstexten und Glossar, ELO 1, Münster, 2002.『우가릿어 사전』(한님성서연구소 2010): J. Tropper, Ugaritic Lexicon
9. 아람 문자를 거쳐 히브리어로
그림 16: 아람 문자 알푸
한편 원셈어의 알푸 문자(그림10, 그림12)는 고대 가나안어나 페니키아어와는 달리, 아람어 계통에서는 [그림16]처럼 모양이 약간 바뀐다. 구약성경 시대에 이스라엘인들은 아람인들과 이웃이었지만, 이 문자를 즐겨 사용하지는 않고, 위에서 본 페니키아어 계열의 문자를 더 널리 사용했다.
그림 17: 쿰란의 알레프
그러나 기원전 539년 페르시아가 고대 근동을 통일하자 아람어가 고대 근동의 국제 통용어(lingua franca)가 되었고, 히브리어는 이제 구어로서 역할을 다했다. 이런 상황에서 문헌으로 전하는 글자의 형태가 아람어의 스타일로 바뀐다. [그림17]은 쿰란 문서에서 사용된 히브리어 문자로서, 이미 상당히 아람어화가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림 18: 히브리어 알레프
이렇게 아람어화된 히브리어 문자는 고대와 중세를 거쳐 현대 현대 히브리어에 이르게 된다. [그림18]은 현대에 널리 사용되는 히브리어 문자다. 아람어 문자 계열에서 진화된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자의 이름은 ‘알레프’이고, 히브리어로 그 뜻은 ‘암소’다.
10. 나가며
알파벳의 탄생은 인류 문화사에 혁신적 사건이었다. 메소포타미아의 쐐기문자와 이집트의 신성문자를 자유자재로 쓰려면 고도의 교육을 받아야만 했다. 하지만 알파벳은 서른개가 안되는 글자만 외우면 되었다. 문자생활이 퍽 쉬워졌고, 더 많은 사람이 문자생활에 참여할 수 있었다. 단순한 글자는 추상적인 생각을 기록하고 널리 전파하는 일을 도왔다.
히브리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할 때, 인류는 이미 알파벳을 사용했다. 가장 쉽고 단순한 글자로 깊은 체험과 고백을 기록하는 고도의 문화를 발전시켜 놓았다. 인문학적 눈으로 보면, 알파벳의 탄생은 구약성경 탄생의 결정적 전제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신학적 눈으로 보면, 하느님은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가난한 백성을 해방시키기 이전에도 이미 인류를 보살피고 계셨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성경 이전에 수천년 이상의 ‘준비기’가 존재한 것이다. 준비기를 모르고 그 결과물을 어찌 잘 알 수 있으랴.
글을 마치며 두 가지 말씀을 덧붙이고 싶다. 우선 그동안 연재가 지지부진해서 죄송하다는 마음을 표현하고 싶다. 둘째, 이 글은 <제11차 한민족국제학술대회>(세계사이버대학과 한민학교 주최. 2012년 5월 5일)에 발표한 필자의 논문 “고대 근동어로서 히브리어 - 알파벳, 특징, 그리고 친족어”의 원고 일부를 대중적으로 쉽게 풀어쓴 것이다. 각주, 참고문헌, 전문적 설명 등을 일부 덜어냈고, 그림과 보충설명을 더했다.
주원준
가톨릭 학생회를 거쳐 평신도 신학자의 길로 접어들었다. 독일에서 구약학과 고대근동학을 공부하고, 현재 그리스도교 원천 문헌 번역에 힘쓰는 <한님성서연구소>의 수석연구원이며 서강대 종교학과와 신학대학원에 출강한다. 히브리 성경과 고대 근동 문헌을 읽으며 살고 있다. <우리 인간의 종교들> 번역에 참여했고, <구약성경과 신들>, <우가릿어 문법>, <우가릿어 사전> 등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