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루에 만원이지만(인터넷에서는 9,000원에 판매하기도 하는데 믿을수가 없어서) 구입하였습니다.
2005년도에 6~7,000원에 구입하였던 그때의 칼에 비하여 몸통이 조금 날씬해졌습니다.
2005년 당시 남원칼을 구입하였던 광한루 옆의 가게.
퍼온글.
'한상궁'도 칭찬한 최고의 부엌칼 남원 옛 대장간 골목서 시작…3代째
강철만 사용… 담금질 기술이 비결
"써본 사람들 격려 전화가 제일 기뻐"
드라마 ‘대장금’에서 한상궁의 손 역할을 했던 요리사 임종연(40)씨는 남원칼을 가장 좋아한다. 대학에서 식품영양학을 전공하고 요리전문가의 길을 걸어온 지 17년이니 외제 칼도 안 써본 것이 거의 없다. 미국산 컷코 시리즈가 구색을 고루 갖추고 있어 자주 쓰지만 제일 마음에 드는 것은 관광길에 딱 한 자루 사온 남원칼이다.
“칼이 손에 딱 잡히고 써는 데 힘이 하나도 안 든다”는 그는 “서양식 스테인리스 칼은 갈려면 공장에 맡겨야 하지만 전통칼은 숫돌은 물론 질그릇에만 갈아도 날이 살아난다”며 남원칼은 세계 최고의 부엌칼이라고 주저없이 말했다.
그가 아끼는 남원칼을 만든 장인이 바로 박판두(58ㆍ은성식도 대표)씨이다. 박씨의 칼은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다. 검은 무쇠 몸통에 날부분이 하얀 것은 다른 전통칼과 다를 바가 없지만 그의 칼은 첫 눈에 버선발이 떠오른다. 그만큼 선이 곱다. 칼 위에는 ‘南原(남원)’ ‘朴(박)’이라는 도장이 찍혀 있다.
“박(朴)자 찍힌 것은 우리 대장간 칼 맞아요. 안심하고 쓰세요.” ‘한상궁’이 추천한 남원칼의 ‘박’자를 단서로 그를 찾아 전화했을 때 그는 인터뷰 요청인지 모르고 이렇게 대답을 했다. 장인다웠다.
남원칼이 유명해진 것은 식민지 시절 일제가 연 ‘조선부업공진대회’라는 산업제품경진대회에서 1922년 남원의 부엌칼이 금상을 받으면서이다. 그 때 부엌칼을 출품했던 장인은 한영진씨로 기록돼 있는데 박씨의 할아버지는 바로 그 한씨네 대장간 바로 옆에서 대장간을 열고 있었다. 남원의 광한루
언저리에는 70년대까지 이어온 ‘성냥간(대장간의 옛말) 골목’이 유명했다. 한씨네가 대장간의 대를 잇지 못했던 반면 박씨네는 3대째로 이어왔다.
박씨가 아버지 박병문(1922~1988)씨에게 대장간 일을 배우기 시작한 것은 64년 열아홉되던 해였다. 박씨는 병문씨의 3남2녀 중 차남이었는데 세 살 터울로 이어진 형제들을 모두 공부시키기 버거워하던 아버지를 보고는 고등학교를 접고 대장간일을 돕는데 나섰다. 박씨의 아내 송은경(53)씨는 “정이 많다보니 아버님을 돕다가 이렇게 됐어요”라고 조금은 안타까워한다. 덕분에 형제들은 모두 고등학교를 마쳤다.
박씨가 가장 먼저 배운 것은 풀무질이었다. 당시만 해도 일일이 풍구를 밟아 석탄불을 일으켜서 철물을 만들었다. 주로 만들던 종류도 부엌칼보다는 괭이 호미 낫 같은 농기구였다. 박씨가 대장간 일을 배우던 시기는 한국이 급속도로 산업화한 시기와 맞먹는다. 3년동안 농기구 만드는 법을 다 익히고 나니 어느덧 경운기와 제초제가 보급되면서 농기구 시장이 위축되기 시작했다.
박씨는 70년 아버지에게 부엌칼만 만들자고 제안을 했다. 그리곤 ‘남원 박씨 대장간’ 칼이 쓸만하다고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일부러 이 대장간 칼만 찾는 이들도 생겨났다. 당시만 해도 전국에 대장간이 있을 때라 박씨는 그 집 칼에 ‘남원’이라는 도장을 찍기 시작했다.
남원칼에 도장이 찍히기 시작한 것은 이 때가 처음이다. 그러자 너도 나도 ‘남원’을 찍었다. 박씨는 “남원이 우리 고장 이름인데 나만 쓴다고 할 수도 없고” 해서 다시 ‘박’자를 더 찍기 시작했다. 75년부터는 몸이 약한 아버지를 대신해서 대장간 일을 아예 맡고 나섰다.
부엌칼은 우선 쇳덩어리를 두드려 칼 모양으로 얼추 납작하게 만드는 걸로 시작한다. 박씨가 처음 일을 배울 때만 해도 쇳덩어리를 두드리는 매질을 일일이 수작업으로 했지만 이제는 햄머기계가 대신 두드려 준다. 부엌칼의 원료로는 강철인 철도 레일을 쓴다.
철도 레일을 잘라 칼 비슷한 형태로 두드린 것을 다시 정교하게 칼모양으로 오리고 그걸 석탄불에 구운 뒤 망치로 두드려 잡성분을 빼면서 칼도 반듯하게 편다. 이것은 방망이로 천을 두드려 펴는 것과 같다고 해서 다디미질이라고 부른다.
빨갛게 달아오른 쇠를 계속 좌우를 뒤집어가며 다디미질하다 보면 불똥이 튀는 것은 다반사다. 그래서 장인의 팔에는 불똥 자리가 하얀 반점으로 숱하게 나있다. 다디미질을 시작하기에 앞서 빨갛게 단 칼에 망치를 꽝꽝 두번씩 내리쳐 도장을 찍는다. 다디미질은 칼이 얼마만큼에 칼이 반듯하게 펴지느냐에 달려있지만 한번에 서른번 이상은 두드린다.
부엌칼처럼 쇠가 얇은 것은 다디미질을 하기 전에 오리지만 생선을 토막치는 대자 식당용 칼처럼 두꺼운 것은 불에 달궈서 부드러워졌을 때 오린다. 이때 오리는 시간은 그야말로 금방이므로 장인의 머리속에, 손끝에 입력된 칼 모양이 순식간에 나올 수 밖에 없다. 현재의 칼 모양은 바로 박씨가 디자인한 것. 직각이던 칼 뒤끝을 부드럽게 하고 살집도 좀 뺐다. 별로 말 수가 없는 그는 칼을 오리고는 “예쁘죠?”하고 씩 웃었다.
다디미질한 칼은 쇠로 만든 연마석에 한번, 다이아몬드가루가 들어간 연마석(‘광석가루’라고 부른다)에 한번 더 간다.
연마질이 끝나면 다시 석탄불에 굽는다. 2~3분이면 빨갛게 달아오르는데 일단 빼서 자주색 정도로 약간 식힌 후 물에 담가 열처리를 한다. 이 부분이 바로 칼 만드는 과정에서 가장 어렵다는 담금질. 박씨도 가장 나중에야 담금질을 배웠다.
달아오른 쇠는 찬물에 식으면서 열차이로 단련이 되는데 이때 잘못하면 쇠가 부러진다. 강철 소재가 아닌 ‘연탄삥’(구공탄 구멍뚫는 쇠막대)으로 만든 칼은 구부러지기도 한다. 이 때문에 편법으로 날에다 납물을 씌워 구부러지는 것을 막는 업체도 있다.
원칙을 지키는 박씨에겐 부엌칼에 납을 쓴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강철만을 소재로 했기에 담금질을 하며 칼이 구부러지는 것 역시 겪어본 적도 없다. 다만 초기에는 칼이 부러지는 것은 제법 겪었다고 한다. 박씨는 “박씨 대장간 칼이 유명했던 것은 바로 아버님의 담금질 기술이 대단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가 이어온 박씨네 대장간의 담금질 기술은 칼이 약간 식기를 기다려 빗방울이 튀기듯이 물에 칼날 부분만 살짝 살짝 담그는 것이다. 오른 편을 담그고 왼 편을 담그기를 여러 차례 한 후 칼을 화덕가에 잠시 올려놓아서 열이 더 식자 전체를 물에 담갔다. 이때까지도 칼이 반듯하지 않다 싶으면 다시 두드려 잡아준다. 납처리에 비하면 시간이 훨씬 많이 걸린다.
담금질을 마친 칼은 다시 광석가루 연마기에 간 후 칼자루를 달아 완성한다.
그는 오전 6시면 일어나 공방으로 나온다. 아침일을 한 시간 너머 하고서야 부인이 싸준 도시락으로 아침을 먹는다. 그리고는 다시 일하고 점심 먹고 일하고 저녁 다섯시 반이면 어김없이 퇴근을 한다. 일요일은 꼭 쉬며 교회에 간다. 그렇게 해서 하루에 만드는 칼이 100여 자루 정도. 좋은 재료를 쓰다 보니 이문은 박하다.
칼 만드는 내내 칼을 쥔 집게가 그의 손에서 거의 떠나지 않다 보니 그의 손에는 검지 첫째 마디에 굳은 살이 툭 불거져 나와있다. 손가락도 약간 안쪽으로 휜 상태. 하지만 그는 “놀고 잡으면(싶으면) 놀고 일하고 잡으면 일하고, 힘든 줄 몰라요”라고 말한다.
그가 칼을 만들면서 그렇게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칼을 써보니 좋더라고 전국에서 전화하는 사람들 덕분이다. “얼굴도 본 적 없는 사람이 전화해서는 당신 칼 잘 쓰고 있다, 잘 만들어줘서 고맙다고 하니까 정말 고맙지요.”
그의 칼이 좋다고 소문나자 엉뚱한 제안도 들어온다. 날이 긴, 일명 조폭용 칼을 만들어달라는 주문이 가끔은 전화로 온다. 그는 “어디에 쓰실 거냐”고 물어서 상대방이 “무조건 길게만 만들어달라”고 하면 아무리 거금을 준다고 해도 절대로 만들어주지 않는다. 그가 만든 칼이 여염집에서 식당에서 한 끼의 따뜻한 밥상을 차리는데 쓰이는 기쁨을 그는 그 무엇과도 바꾸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