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내리던 못골의 성탄전야
30년 전 성탄절 전야의 고요한 밤, 문현동 고개를 바로 넘어 해운대 방향으로 큰길가 못골시장 안쪽에 있는 대연교회는 몇 년 전부터 성탄절 새벽 송을 돌지 않고 조용하게 지내고 있다. 그런데 성가연습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갔던 교회청년들이 무엇을 가지고 다시 교회 뒷집으로 모여들었다.
이번 성탄절에는 특별히 황령산 밑에 있는 산동네 12통 6반을 위해 새벽 송을 돌면서 전할 크리스마스 선물을 가지고 모였다. 청년들은 산 밑에 조용히 묻혀 전깃불도 없이 이방인들처럼 사는 마을을 생각하면서 벌써 산타가 되는 기분으로, 여러 가지 과자 사탕 사과와 치약 칫솔 세탁, 세면 비누 타올과 양말 등에 성탄 축하 카드를 넣어 선물 꾸러미를 정성껏 만들었다.
어느덧 자정이 넘어 사방은 고요한 침묵 속에 깊이 빠져 드는데 교회청년들이 수고 한다고 집사님들이 떡국을 끓여왔다. 성탄전야의 기쁨과 사랑의 열기가 감도는 방안에서 따끈한 떡국을 양껏 먹고 과자부스러기까지 치우고난 청년들은 식곤증에 빠져들어 눈까풀이 무겁게 처지고 있다. 이제는 밖으로 나가야 할 시간인데 성탄절 겨울 맛을 제대로 보이겠다는 듯이 찾아온 동장군이 칼바람을 일으켜 수십 년 만에 내리는 눈발이 사정없이 흩날린다.
나는 애시 당초부터 청년들을 다 데리고 갈 생각은 하지 않은 터이라 잠간 망설이고 있는데, 항상 교회 청년들의 리더가 되어 내게 협조를 잘하는 문영득선생(현 대연교회 시무장로-부산외대교수)이 베드로처럼“최집사님, 제가 따라가겠습니다.”라고 하면서 선물 보따리를 둘러메고 나섰다.
못골 뒤 황령산 자락에 있는 12통 6반은 전기와 상수도가 없는 무허가촌이다. 양지바른 산 밑에 토굴과 움막같이 지은 30여 채가 야전에서 훈련 중인 군대의 위장 막사들처럼 외부에 노출을 꺼리며 숨겨져 있었다. 1974년 이른 봄, 나는 새벽기도를 마치고 황령산에 조깅을 하고 내려오는 길에 산 밑 외딴곳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고 이상히 여겨 찾아갔다가 피난민촌 같은 작은 마을을 발견하였다. 한참을 서 있다가 50년대 부산영도 고갈산 산비탈에서 살면서 명신교회를 다녔던 시절과 60년대 후반 베트남 전선에서 보았던 난민들의 마을이 사진처럼 떠올랐다. 이후, 성가대와 교사로 봉사하는 나는 이곳 어린아이들을 대연교회로 인도하기위해 최선을 하였다.
둘이는 모처럼 내리는 새 찬 눈을 맞으면서 마을 입구에서 먼저 오른쪽 왼 딴 집으로 가려는데 어둠속에서 희미하게 누가 나오고 있어, 가까이 만나고보니 개를 기르는 집 아주머니가 병이 나 열이 펄펄 나는 어린애기를 업고 병원을 찾아 간다면서 울고 있다. 나는 이전부터 전도하러 다니다 페루의 인디오처럼 사는 아주머니를 아는 처지다. 나이가 훨씬 많은 남편은 사나운 도사견을 기르면서 인사도 제대로 받지 않는 고집이 센 사람인데, 아주머니는 대조적으로 젊고 예쁘지만 화장을 하지 않은 채 피난민처럼 살고이었다.
성령의 감동으로 어떻게 돕고 싶은 마음이 불같이 일어나 길에 선채로 아기의 머리에 손을 얻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를 했는데, 잠시 후에 놀랍게도 열이 다 내리고 애기의 병이 즉석에서 나아버렸다. 아주머니는 기뻐하면서 병원에 갈필요도 없이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아 들고 집으로 돌아갔다.
둘이는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기적을 체험하고 산타가 되어 깊이 잠들어 있는 마을로 들어갔다. 한집 한 집 그리고 다음 집으로 발자국 소리도 죽여가면서 아주 작은 소리로 ♬고요한밤 거룩한 밤을 부르면서 문선생이 꺼내주는 선물 주머니를 대문이자 부엌으로 들어가는 허술한 문사이로 넣었다. 그리고 또 곡을 바꾸어 ♫저들밖에 한밤중에 양 틈에 자던 목자들, ♪기쁘다 구주 오셨네 만백성 맞으라.을 부르며 30여 집을 다 돌고 새벽기도회 시간이 될 쯤에 빈 자루를 들고 내려왔다.
신유의 기적을 체험한 나는 전도에 열이 붙어 매 주일은 새벽기도를 마치면 아침 8시 전에 과자와 사탕을 가지고 마을로 올라가 아이들을 불어모아 떼를 지어 교회로 데리고 내려왔다. 이렇게 3년 넘게 매주일 다니면서 거의 30명에서 40명 정도를 대연교회로 인도하여 어린이예배를 드리면서 교회학교는 유치부 유년부 초등부로 나뉘고, 부산노회 교회학교연합회 총무 일 까지 맡은 나는 교회의 사랑과 관심 속에 초등부 부장직분을 맡게 되었다.
어린들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대연교회는 중흥기를 맞이하는 것을 피부로 느끼면서, 주일오후에는 세탁비누를 가지고 올라가 개울가에서 빨래하는 아주머니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무더운 여름 주일 오후에는 소독분무기 통을 울러 매고 올라가 환경이 불결한 마을 변소와 집주변들을 소독해 주고, 경조사 때는 교회학교 책임을 맡으신 정경식(현 대연교회 시무수석장로-광일스텐(株)대표이사)장로님을 모시고 심방을 하기시작 했다.
이때로부터 마을주민들은 마음을 열고 교회에 감사하면서“지금은 하루하루를 날품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아이들만 우선 교회에 보내지만 나중에는 우리가 다 교회 갈 겁니다.”라고 했다. 나는 계속에서 산동네에 푹 빠져 있다시피 하여 교회에서는 12통 6반으로 산동네에서는 산타와 같은 교회선생님으로 통하며 지내다가, 1980년 가을 대연교회를 떠나게 되었다.
세월이 덧없이 흐르고 계절이 수없이 바뀌고 있지만, 지금도 눈 내리는 성탄절이 되면 그 때 생각이 떠오른다. 올해는 유난히 눈이 많이 내리고 있어 내 마음에 그려진 대연동 못골의 그때가 그립고 그 사람들이 보고 싶은 마음이 울컥 나 펜을 들었다. 고요한 거룩한 밤 어두에 묻힌 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그리운 분들이여 주안에서 평강하시기를 축원합니다.
2005년 12월 24일 밤 수원샘내마을에서 (순담) 최 건차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