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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0. 08. 20
■ 이인좌의난(李麟佐의亂)
이인좌(李麟佐, 1695참수~1728)의 난은1728년(영조 4) 3월 정권에서 배제된 소론(所論)과 남인(南人)의 과격파가 연합해 무력으로 정권탈취를 기도한 사건이다. 이인좌가 중심이 되었기 때문에 이인좌의 난(李麟佐의亂)이라고 하며, 무신년((戊申年)에 일어났기 때문에 무신란이라고도 한다.
[배경]
경종(景宗)이 세자 때부터 질환이 심했으므로, 숙종(肅宗)은 세자의 왕위계승을 우려해 이이명(李蓬命)에게 연잉군(延艀君, 훗날 英祖)을 은밀히 부탁하는 정유독대(丁酉獨對, 1717년 숙종과 이이명 두 사람만의 만남)를 하였다.
경종은 숙종 말년에 세자청정을 할 때도 정사에는 별로 관여하지 않았고, 재위 중에도 국사를 제대로 처리하기 어려웠다.
이에 노론(老論) 측은 경종이 아들이 없고 병이 많은 것을 이유로 연잉군의 세제책봉(世弟冊封)과 세제 대리청정을 서둘렀다.
그러자 소론측은 경종의 보호를 명분으로 신임사화(辛壬士禍)를 일으켰다. 그러나 경종이 재위 4년 만에 죽고, 세제인 영조(英祖)가 왕위를 계승하자, 신임사화의 옥사를 문책하게 되면서 노론의 지위가 회복되었다.
경종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자신들의 정치적 지위를 위협받게 된 박필현(朴弼顯)· 이유익(李有翼)· 심유현(沈維賢) 등의 과격 소론측은 갑술환국(甲戌換局) 이후 정권에서 배제된 남인들을 포섭해 영조와 노론의 제거를 계획했다.
그 명분으로 경종의 사인에 대한 의혹과 영조는 숙종의 적자(嫡子)가 아니라는 것을 내세워, 영조를 폐하고 밀풍군 탄(密豊君坦 )을 왕으로 추대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의도는 당인들을 결속시키고 그들의 모반을 정당화하였으며, 또한 민심을 규합시키는 데 이용되었다.
1725년(영조 1)부터 박필현(朴弼顯)· 등은 당론을 토대로 자파 세력으로 간주되는 각 지방의 인물을 선별해갔다. 이에 서울에서는 이하(李河)· 양명하(梁命夏)· 윤덕유(尹德裕) 등이, 지방에서는 정세윤(鄭世胤, 안성인)· 민원보(閔元普, 충주인)·이인좌(청주인)· 신천영(申天永, 청주인) 등이 가담하였다.
또 평안병사 이사성(李思晟), 금군별장 남태징(南泰徵) 등과 내통하였다. 이들은 경종의 사인에 대한 의혹을 심유현(경종의 前妃 沈氏의 동생으로 경종의 임종을 지켜보았다.)의 발설과 결부시켜 흉언을 퍼뜨렸다. 그래서 전국 여러 곳에서 흉서(兇書)와 괘서(掛書)사건이 일어났고, 또한 이들은 가정(家丁)· 노비 등의 가속인을 모군(募軍)하고 명화적(明火賊) 등을 군사로 동원하기로 하였다.
[전개]
난의 계획은 1727년(영조 3) 정미환국(丁未換局)으로 온건 소론이 다시 기용되자, 동조자의 확대가 어려웠고 모의가 노출되어 봉조하(奉朝賀) 최규서(崔奎瑞)의 고변을 비롯해 양성인(陽城人) 김중만(金重萬) 등이 각지의 취군(聚軍) 동태를 속속 고변하였다. 영조는 친국을 설치하고 삼군문에 호위를 명하였다.
난은 3월 15일 이인좌가 청주성을 함락함으로써 시작되었다. 반군은 병영을 급습해 충청병사 이봉상(李鳳祥)등을 살해하고 청주를 장악한 뒤 권서봉(權瑞鳳)을 목사로, 신천영(申天永)을 병사로 삼고 여러 읍에 격문을 보내어 병마를 모집하고 관곡을 풀어 나누어주었다.
또 경종을 위한 복수의 기(旗)를 세우고, 경종의 위패를 설치해 조석으로 곡배하였다. 그리고 이인좌를 대원수로 한 반군은 청주에서 목천· 청안· 진천을 거쳐 안성· 죽산으로 향하였다. 그러나 북상하던 반군은 안성과 죽산에서 관군에게 격파되었고, 청주성의 신천영(申天永은 창의사(倡義使) 박민웅(朴敏雄) 등에 의해 상당성(上黨城)에서 궤멸되었다. 한편, 이인좌의 반란에 영남 지방과 호남 지방에서도 호응하였다.
영남 지방은 정온(鄭倍)의 4대 손인 정희량(鄭希亮)이 조묘의 천장(遷葬)을 구실로 민정(民丁)을 모집해, 이웅보(李熊輔 : 이인좌의 동생)와 더불어 3월 20일 안음의 고현창(古縣倉)에서 일어나 안음현감과 거창현감을 투서로 위협해 쉽게 두 지역을 장악했다. 어서 합천에 거주하는 정희량의 인척인 조성좌(曺聖佐) 일족의 도움으로 합천·함양 등 4개 군현을 석권하였다.
이에 경상감사 황선(黃璿)은 성주목사 이보혁(李普赫)을 우방장으로, 초계군수 정양빈(鄭暘賓)을 좌방장으로 삼아 주변의 관군을 통솔해 토벌하였다. 반군은 거창에서 함양을 거쳐 전라계를 넘어 충청도의 반군과 합류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리고 호남 지방의 반군은 태인현감 박필현이 모주(謀主)로 무장(茂長)에 유배중인 박필몽(朴弼夢) 등과 내통하였다. 그러나 전라감사와의 연결에는 실패해 박필몽은 상주의 촌리에서 체포되어 참형되었고, 박필현은 고부군 흥덕(興德)을 거쳐 죽도에 잠복했으나 체포되어 처단되었다.
[진압]
3월 14일 최규서의 고변을 비롯하여 경기도 각지에서 취군 현황이 속속 보고되자, 영조는 도성문을 폐쇄하고 경외(京外)의 관군을 동원해 서울의 방비에 만전을 기하였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병조판서 오명항(吳命恒)을 사로도순무사(四路都巡撫使)로, 박찬신(朴纘新)을 도순무중군(都巡撫中軍)으로, 박문수(朴文秀)를 종사관(從事官)으로 삼아 난의 토벌에 나섰다.
관군은 3월 24일 안성· 죽산의 반군을 소탕하고, 이인좌· 권서봉· 목함경(睦涵敬) 등을 생포하였다. 안성·죽산에서의 반군의 패보는 삼남 지방의 반군에 큰 타격을 주었다. 오명항이 이끄는 관군이 청주를 거쳐 4월초 추풍령을 넘었을 때에는 영남 지방의 반군도 지방 관군에 의해 이미 소탕되었다.
관군은 거창에서 회군해 4월 19일 개선하였고, 영조는 친히 숭례문루에 나가 영접하였다. 난의 평정에 소론 정권이 앞장섰으나 주모자의 대부분이 소론이었기 때문에, 이후의 정국 추이에 그들의 처지를 약화시켜 열세를 면하지 못하게 되었다. 반면에 영조 즉위초부터 주창되어온 탕평책(蕩平策)의 실시는 명분을 더욱 굳힐 수 있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왕권의 강화와 정국의 안정을 도모할 수 있게 되었다.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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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인좌의난 전모(李麟佐의亂 全貌)
●1623년(인조 원년) 4월 :
소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3월 폐위되고, 영의정인 합천 가야의 내암 정인홍(鄭仁弘 : 1535년~1623년)이 서울로 압송되어 서인들로부터 죽임을 당하는 등 북인 정권이 몰락하자, 진주․ 합천․ 거창․ 함양․ 고령 등 경상우도의 사림(士林)들이 치명적인 타격을 받음.
즉, 현(現) 합천 묘산의 교리 조정립은 중도부처․ 정언 조성생은 파직, 합천 가회의 우참찬 윤선 파직, 고령 우곡 도진리의 이조좌랑 박종윤은 중도부처, 의령의 이조정랑 유활 파직, 합천 가야의 지평 정결․ 합천 율곡의 대사간 문려․ 고령 우곡 도진리의 승지 박종주 등은 처형되는 등 많은 정인홍 문인(門人)들이 화를 당함.
정희량(鄭希亮)의 고조부인 안음 강동(現 거창 위천 강천리)의, 동계 정온(桐 溪 : 鄭 蘊대제학․ 이조참판)과 조성좌(曺聖佐)의 고조부인합천 도곡(現 합천 묘산 도옥리)의, 오계 조정립(梧溪 曺挺立 : 지평․ 성주목사)은 정인홍의 제자로서, 당색은 정인홍과 같은 북인이었으나 정인홍 참형 후 경상우도 대부분의 북인(北人)들과 같이 남인(南人)으로 통합됨.
정인홍의 門人으로는, 합천의 문경호․ 문홍도․ 강익문․ 박이장․ 조응인․ 조정립․ 조정생․ 하혼․ 박인․ 한대기․ 손창후․ 정덕지, 삼가의 이흘․ 권양․ 박사제․ 윤선, 초계의 전우․ 이대기, 거창의 유중룡․ 형효갑․ 전팔고, 안음의 정온, 산청의 오장․ 유경갑, 함양의 정경운․ 노사상․ 강린, 진주의 성여신․ 정승훈․ 하성, 사천의 이대일, 함안의 이정․ 오여은, 의령의 이종욱․ 곽재기․ 유활, 고령의 박광선․ 박종주․ 박종윤, 합천 율곡의 문려․ 성주의 이지화․ 성변규, 현풍의 박성 등등임.
●1631년(인조 9) 2월 :
합천의 정한(鄭澣) 및 유지수(柳之燧), 고령 도진의 박희집(朴禧集), 창녕의 성지도(成至道) 등이 북인(대북) 잔당을 규합하여 광해군
복위를 계획하다. 정한․ 유지수․ 박희집․ 성지도 등 40여 명이 죽고, 6명이 유배됨.
●1680년(숙종 6) :
『경신환국』으로 허적․ 윤휴․ 허목 등 남인이 6년만에 실각하고 서인이 정권을 잡음.
●1689년(숙종 15) :
『기사환국』으로 송시열․ 김수항․ 이이명 등 서인이 실각하고 남인이 정권을 잡음.
●1694년(숙종 20) :
『갑술환국』으로 민암․이의징․이현일 등 남인이 완전히 축출되고 노론 대부분과 소론 일부분이 정권을 잡음.
●1696년(숙종 22) :
황해도․평안도에서 『장길산란』이 발발함.
●1721년(경종 원년) :
경종이 즉위한 후 소론과 남인이 득세함.
●1721년~1722년(경종 2) :
세제인 연잉군(영조)의 대리청정을 주창한 노론을 처단하라는 김일경․ 박필몽․ 이진유 등 소론의 상소로 「신임사화」가 일어나, 영의정
김창집(金昌集)․ 좌의정 이건명(李健命)․ 영중추부사 이이명(李頤命)․ 판중추부사 조태채(趙泰采) 등 노론 4대신이 사사(賜死) 당하고
소론이 집권함.
●1724년(경종 4) 4월 24일 :
조성좌(曺聖佐, 1696~1728 참수됨)의 8촌인 조정좌(曺鼎佐)가 인척인 조석좌(曺錫佐)․ 광좌(匡佐)․ 형좌(衡佐)․ 경좌(景佐)․ 한좌
(漢佐)․ 경문(景汶) 등은 무신사태 때 처형되고, 합천 대병의 송시징『宋時徵). 조한유(曺漢儒)의 종 증조 부인 曺時遂의 사위』, 함양의
沈壽明․鄭奎瑞. 李益春(3인 무신사태 때 처형), 경상좌도인 금산의 황필(黃沁: 신사태 때 유배) 및 문경의 申維岳․瑞岳․光岳(조성좌
누이 시댁) 등 경상도 유생 3,500여 명과 연명으로 노론을 비판하는 상소를 함.
●1724년 :
영조가 8월 즉위한 후 『신임사화』의 책임을 물어 남인인 동지중추부사 목호룡과 소론인 이조판서 김일경이 처형되고 노론이 득세함.
●1726년(영조 2) :
소론인 이유익․ 박필현, 남인인 한세홍․ 민원보 등 16여 명이 외방(外方)과 연계하여 계략(역모)을 모의한다는 것이 탄로날 위기에 처했
으나 위기를 모면함. 한편, 경종 임금이 집권한 시대를 난세(亂世)라고 노론인 임징하(任徵夏, 1687~1730, 장령 역임, 정미환국으로 소
론에 의해 귀양감)가 상소함에 따라 무신당(戊申黨)의 거사 명분이 강화됨.
●1727년(영조 3) :
정미환국으로 노론과 소론 중 온건 소론인 완소(緩少)가 득세함. 한편, 호남 부안 변산부 노비적 9천 명과 영남 토적(농민군) 2만 명이 창
궐, 무신사태 참여를 모색함.
●1728년(영조 4) 1월~2월 :
서울 서소문․ 종로․기호지방 등에서 괘서사건이 발생 하고, 부안 변산 노비도적이 서울로 쳐들어온다는 소문으로 인심이 흉흉해지면서 피
난가는 사람이 늘어남. 이인좌․ 정희량․ 조성좌․ 박필현․ 남태징․ 심유현․ 김중기․ 이유익․ 이웅좌․ 민원보. 박필몽․ 이사로․ 정세윤․ 신천
영․ 이사성․ 이하․ 임서호․ 조세추․ 이지인․ 나숭곤․ 김영해․ 한세홍․ 민관효․ 안엽․ 조관규 등 남인과 소론(준소)의 주요거사군 인물들이
기병을 준비하고, 특히 이인좌는 자신의 노비 모두를 방역(放役)함.
3월 13일 :
이인좌의 동생인 이웅좌 『본래 이름은 이능좌였으나 조정에서 미련한 놈으로 왜곡하기 위해 능(能)을 곰, 즉 웅(熊)으로 바꿈』는 안동 풍천에서 기병을 모색하였으나, 안동 사림(士林)들의 비협조로 인해 안음의 정희량에게 감.
3월 14일 :
영의정을 사직하고 봉조하 벼슬에 있던 소론인 용인의 최규서가 고변해옴에 따라 무신사태 거사 계획을 조정(朝廷)에서 알게 됨(그 후 최규서는 死後에 영조 임금 묘정에 배향됨)
3월 15일 :
역사책에서 말하는 소위 『이인좌란』․ 『무신란』이 발발함. 이인좌(만33세, 전주李氏, 配의 祖父는 우찬성 윤휴(尹鑴)․신천영(고령申氏) 등이 안성․양성에서 기병(起兵)하여 청주성과 상당산성을 함락하고, 병사 이봉상․영장 남연년․군관 홍림을 처형함.
이인좌는 대원수, 정세윤은 부원수, 신천영은 병사, 권서봉은 청주목사, 이지경은 진천현감, 이배는 우장군으로 칭함. 청주우후(淸州虞侯)에 재직 중이던 박종원은 거사군에 투항하고, 청주목사 박당(朴鏜)은 관인(官印)을 버리고 도망감.
또한, 서울 도성에서도 영의정인 이광좌가 서울을 버리고 피난을 가야 한다고 주장함. 한편, 무신기병(戊申起兵)의 중심세력이었던 부안 변산부 노비도적(奴婢盜賊)인 김단(金壇)․ 정팔용(鄭八龍)의 9천군병(軍兵)과 이인좌군(軍)과의 사이에 주도권 다툼이 일어남(무신사태 때 거사군 제1대장은 정팔용, 제2대장은 박필현, 제6대장은 정세윤이라는 사실에서 하층민을 대표하는 정팔용 등 부안 변산부 노비도적이 핵심적 역할을 수행했음을 알 수 있음)
3월 16일 :
김일경의 아들 김영해와 목호룡의 兄인 목시룡이 역모를 했다고 하여 처형됨.
3월 18일 :
청주목사 박당(朴鏜)이 이인좌의 기병을 급보로 올리자 조정(朝廷)에서 크게 당황함. 무신기병을 진압하기 위해 병조판서인 오명항을 4도 도순무사(四道 都巡撫使)로 임명하고, 박찬신(朴纘新)을 중군, 박문수(朴文秀)를 종사관(從事官), 박사수(朴師洙: 반남朴氏, 박소 8세손, 응남 7세손, 박필현은 박소 7세손임)를 영남안무사, 권업(權業)을 호서무사(湖西撫使), 조덕린(趙德隣)과 이형상(李衡祥)을 경상도소모사(召募使), 유숭(兪崇)을 충청도소모사, 윤헌주(尹憲柱)를 함경도인 북도안무사, 조지빈(趙趾彬, 경상감사 조태억의 子)을 황해도․평안도인 양서안무사로 삼고, 군사2천명을 주고 급히 남하시켜 거사군을 토벌하도록 하는 동시에, 장붕익(張鵬翼)을 진어대장(鎭禦大將)에 임명하고 북한산성 아래에 대기시켜 평안도 관서지방의 거사군에 대비하게 함. 또한, 문경새재 제1관문인 주흘관(主屹關)에도 대규모 군사를 주둔시켜 거사군의 북상에 대비함.
3월 19일 :
남태징․민관효․신광원(愼光遠) 등이 서울에서 효시(梟示)됨. 한편, 이웅좌․나숭곤이 안음현에 도착함. 정희량(鄭希亮, 초계 鄭氏)은 원수(元帥)로, 정희량(초명=정준유(鄭遵儒)의 일족인 정세유(鄭世儒)․ 관유(觀儒)․ 홍유(弘儒) 등은 중군(中軍), 산음(산청)의 정탁(鄭倬, 초명: 鄭宜瑗)은 초유사로 삼음.
3월 20일 :
정희량(약45세)이 안음 고현(古縣, 현 거창군 마리면 대정리)에서 기병함. 정희량의 격문이 안음현감 오수욱에게 전달됨. 정희량의 병사들은 민폐를 끼치지도 재물을 약탈하지도 않는 등 군율이 엄격함. 한편, 금오진 절도사인 선산부사 박필건이 영조 임금의 전교(傳敎: 왕의 명령)를 받음. 다른 한편, 태인현감인 박필현이 태인(現 정읍지역)에서 기병함.
●정희량의 격문(檄文)
국운이 기울고 비색해서 병민(兵民)이 사방에서 움직이니 종사(宗社)가 장차 위험하기가 마치 불이 처음 타서 그 기세가 반드시 모두 태우고야 말 것과 같다.
이같은 때에 누가 있어 한 꾀를 내고 한 책략을 내어서 나라를 위한 깊고 큰 생각을 가질 것인가? 이웅보는 대대로 나라의 은혜를 입고 있으니 편안함과 근심을 같이 하여야 옳을 것이다.
마땅히 온 힘을 다하고 감정을 발해서 위로는 종사를 평안하게 하고 아래로는 생민을 보호하려 한다. 이에 3월 20일 동지 한 두 사람과 더불어 의로운 군대를 규합하여 사직을 위한 계책으로 삼았다. 혹 충성스러운 마음이 좌우에 알려지지 못해 폭란의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서 진심으로 염려하여 이 마음을 나타내는 것이니, 잘못을 용서하여 이 일(註: 무신거사)을 성공시키는 것이 종사를 위해서도 다행스런 일이다.
●이웅보의 격문(檄文)
국운(國運)이 불행하여 이제 큰 난리가 일어날 것이니, 종사가 망하지 않음을 다행으로 여길 것이 못된다. 내가 선파(璿派 : 왕족인 전주이씨(全州李氏)의 가계(家系)에서 태어났으니 비단 세신(世臣)일 뿐만이 아니므로, 의리상 나라와 함께 죽어야 한다.
망령되이 한 손으로 하늘을 떠받들고자 하여 밤낮으로 동쪽으로 내려와 드디어 동계(桐溪)의 후손 정희량(鄭希亮)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종사(宗社)를 안정시키고 백성을 보전케 할 계책을 삼고자 하니, 마땅히 먼저 합하(閤下)에게 나가 충적(忠赤)을 토론하면 거의 양해하여 좌우(左右)로 공제(共濟)할 것 같기에 감히 전진하지 않고 고현(古縣)에 퇴복(退伏)하여 신사(信使)가 왕복하기를 기다리겠다.
이로써 이 놈의 온 가슴속에 충적(忠赤)이 있을 뿐 맹세코 다른 마음이 없음을 밝힌 연후에 함께 죽을힘을 다해 종사를 붙들기를 원하나,나충심(衷心)을 폭로하지 못하여 두려움이 더욱 깊다. 이는 국가의 일이므로 외읍(外邑)의 수령 역시 범연하게 보거나 대수롭지 않게 듣고 마음을 움직이지 않아서는 안 된다. 귀읍(貴邑)의 병마(兵馬) 및 제반 군기(軍器)를 혹 빌려준다면 며칠 안에 북상(北上)하여 국난(國難)에 달려갈 것이다.
3월 21일 :
정희량이 안음현을 함락하자 안음현감 오수욱은 남원 운봉영장 손명대에게 도망침. 정희량은 그의 기병을 의병(義兵)이라 칭하고, 죄수(罪囚)들을 석방하고 현민(縣民)들에게 양곡을 나누어 줌. 정희량이 안음현감에 신수헌(愼守憲), 함양군수에 최존서(崔存瑞)를 임명함.
또한 정희량의 격문이 금산군(現 김천시) 관아에도 전달됨. 함양진격 때 조세추(曺世樞)도 참여함(그 후 정희량이 체포될 때 曺세추는 도망갔으나, 4월 14일 예천에서 사로잡혀 충주목사 김재로가 서울로 압송한 후 4월 17일에 능지처사됨).
한편, 조성좌(曺聖佐, 약32세)․ 정좌(鼎佐)․ 덕좌(德佐)․ 명좌(命佐)는 합천 묘산에서 4천 군사로 기병(起兵)을 완료한 후, 조정좌가 밤에 합천관청으로 가서 청주의 이인좌․안음의 정희량 기병을 알리자, 합천군수 이정필(李廷弼)이 조정좌를 체포하여 심문한 후, 군사 2백명을 풀어 조성좌도 체포하여 감옥에 가둠.
안음 정희량․합천 조성좌의 기병과 관군의 군사 징발 등으로 민심이 흉흉해지면서 피난 가는 사람들이 길을 메우고 고을이 텅 빔. 한편, 정희량은 합천 군수에게 조성좌․조정좌를 감옥에서 석방시키지 않으면 관계된 사람들은 모두 목을 베어 죽일 것이라고 함.
●참고
1759년에 발간한 여지도서(輿地圖書)에 합천 초계 삼가의 총 가구수가 10,393호임을 볼 때, 합천군민 대부분이 참여한 것임.
3월 22일 :
합천군수 이정필의 구원병 요청이 초계군수 정양빈․ 삼가현감 이정수의 반대와 의령관군의 비협조 등 상황이 여의치 않자 구원병을 핑계로 새벽에 진주 병영으로 도망갔으나, 진주우병사 이시번(李時蕃)이 촉석루 성문앞에서 거절하고 받아주지 않음.
동시에 합천좌수 정상림(鄭商霖)이 조성좌의 가동(家僮) 등 거사군 수백 명을 이끌고 조성좌․정좌를 구출한 후, 조성좌를 대장군으로 추대하고 합천장교와 아전들이 조성좌에게 절을 함. 합천이 함몰됨. 이 때 삼가현의 백세달(白世達)․ 임한성(林漢成, 現 대병의 임진부 후손)․허련(許璉, 現 가회 오도리의 허돈 후손)․ 권만항(權萬恒, 現대병 출생인 권양 후손) 등과 現 묘산 화양리의 윤종영(尹宗英, 윤자선 후손)․ 합천 상상곡(上上谷)의 이성장(李星章), 고령의 배중도(裵仲度)도 조성좌측에 가담함. 한편 정희량의 격문이 거창현감 신정모(申正模)에게 전달됨. 거창현 좌수 이술원이 방(榜)을 붙혔으나 아전․ 군교 등이 떼어 버림.
3월 23일 :
새벽에 거창현감 신정모는 담을 뛰어넘어 現 주상면 거기리 고대마을로 도망치자, 좌수 이술원이 20여리나 쫓아가 말렸으나 신정모는 말을 듣지 않음. 정희량이 거창현을 함락, 연안李氏인 좌수 이술원을 처형함.
한편, 오명항의 관군은 안성군이었던 現 경기도 안성시 서운면 청룡산 전투에서 이인좌軍을 격퇴하고, 청주목사 권서봉․영장 박종원․장군 목함경․진천현감 이지경 등 1백여 명을 처형함. 이인좌는 죽산군이었던 노루목으로 후퇴함. 다른 한편에는 거창의 정희량군(軍)을 평정하기 위해 선산부사 박필건의 금오군은 거창으로 진격하고, 경상감사 황선(黃璿)도 진격 채비 완료함.
다른 한편, 서울에 국청을 열어 무신사태 가담자를 신문함. 영의정 이광좌․좌의정 趙태억․홍문관 수찬 조명교(曺命敎) 등이 참여함. 안추와 이문저가 능지처사되고, 윤덕유(尹德裕)가 참형됨.
3월 24일 :
7만 대군의 정희량군(軍)이 거창 양무장(養武場: 現 거창읍 상림리)에서 승리에 도취․잔치를 벌이는 등 3~4일을 허비함. 한편, 오명항․박찬신의 관군이 죽산군 이었던 現 경기도 안성시 삼죽면 노루목 전투(일명, 죽산 노루목(장항=獐項) 전투)에서 승리, 대원수 이인좌를 체포하여 수레에 실어 서울로 압송하고, 부원수 정세윤 등을 참수함.
곧이어 관군은 안성에서 청주로 진격, 청주성을 탈환한 후 신천영 등이 사수하고 있던 상당산성도 수복하고, 신천영․이기좌(李麒佐, 이인좌 동생) 등 거사군을 처단함. 시체가 산처럼 쌓임.
3월 25일 :
거창의 정희량군사 일부가 합천의 야로창(冶爐倉)을 점령함. 한편, 태인현(現 전북 정읍지역) 현감인 박필현은 기병을 하였으나, 담양부사 심유현과 前도승지로 무장(現 전북 고창 무장면)에 귀양와 있던 박필현의 종형인 박필몽(장희빈 여동생 남편) 등은 상황이 여의치 못하여 기병이 실패함.
또한 당초 참여하기로 한 전라감사 정사효(온양鄭氏, 박필몽 사촌 처남)는 무신거사 참여를 회피함. 이 때 택리지 저자인 이중환 외가집인 現 전북 고창군 아산면의 남인(南人)인 함양吳氏 문중도 연루(連累)되어 큰 화를 입음.
승정원일기 영조4년 4월 5일에, “호남지역 연곡․쌍계 사이에 적병(註: 승려 대유․박필영 등)이 많이 모였는데 진세(陣勢)가 매우 성(盛)하고, 순창․영암지역에도 1,000여 명의 적병(賊兵)이 있으며, 임실 산골에는 이 보다 적병이 많이 기병했다.”라고 기록하고 있음을 볼때, 호남지역에서도 하층민 등의 참여 실태를 알 수 있음.
3월 26일 :
정희량이 거창현 죄수(罪囚)들을 석방하고 현민(縣民)들에게 양곡을 나누어줌. 한편, 합천 조성좌의 거대한 창고에서 정희량의 군량미를 공급함. 다른 한편 태인현에서 거병한 후 전주성 입성(入城)이 실패로 끝나자 박필현․ 박사제 父子는 상주(現 경북 함창)로 도피하였으나, 상주영장 한속에게 사로잡혀 처형됨.
박필현은 지금 사대부는 문관․음직․무관․남인․소북․소론을 막론하고 동시에 거사하여 평안병사 이사성을 추대하여 맹주로 삼아 난적(亂賊)을 섬멸하여 종사(宗社)를 안정시키려 했다라고 말하고 죽음. 서울에서 이사성과 이유익이 능지처사됨.
3월 27일 :
삼가현 좌수 신만중(愼萬重)․권만항(權萬恒)이 삼가현감 이정수를 내쫓고 조성좌군(軍)에 합세하고, 성주목사 이보혁이 조성좌군과 5리 떨어져 있는 금양역(現 합천읍 금양리)에 진을 치고 대적함. 그날 밤 조성좌는 촛불을 켜고 책을 보는 여유를 가짐.
한편 이웅좌군(軍)은 함양으로 향하고 정희량군(軍)은 거창 큰 다리밑 시장에서 진을 침. 거창 향임 신명익(愼溟翊)이 거사군에게 사로잡혀 좌수직을 권유 받음. 서울로 압송된 이인좌는 인정문(仁政門)에서 직접 영조 임금의 국문(鞫問)을 받은 후 능지처사됨. 또한 이배․이순관도 능지처사됨.
다른 한편, 진주의 경상우병사 이시번(李時蕃)은 겁을 먹어 겨우 삼가현(三嘉縣)까지만 진군(進軍)하고, 그 대신 진주영장 이석복을 시켜 곤양군수 우하형 등을 거느리고 진주 사천 곤양 남해 하동 단성 산음 등 7읍 4천군사로 단성현을 거쳐 거창으로 진군토록 함.(그 외 상주영장 한속은 마지못해 군사를 거느리고 지례현에 머물다 거창으로 진격하지 않고 머뭇거렸고, 안동영장 김정상(金鼎相)도 3일만에 의성에 도착하고는 되돌아 가버렸으며, 초계군수 정양빈은 겁을 집어 먹고 허둥대다 이보혁군(軍) 후미에만 따라 다녔음.
또한 안음현감 오수욱과 거창현감 신정모․삼가현감 이정수는 놀라 허둥지둥 달아나 버림. 경상감사 황선 등이 그들 모두에게 곤장 20도를 침. 그 후 도망간 합천군수 이정필은 감옥에 가두고, 경상우병사 이시번과 거창현감 신정모는 귀양 가고, 초계군수 정양빈은 충군(充軍)됨.
다만, 초기에 도망친 함양군수 박사한을 다시 관직까지 제수하는 것에 대해서는 조정에서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고, 합천군수 이정필은 4월 3일에 석방됨)
3월 28일 :
수많은 합천의 거사군이 합천 묘산의 마령재 등을 넘어 조성좌군(軍)에 합세하자 그 기세가 매우 큼. 한편, 정희량군(軍)이 거창에서 함양으로 진군하여 3월 29일에 함양에 도착하자, 함양군수 박사한(朴師漢)은 군사를 일으켜 막으려고, 하였으나 함양군민들이 호응하지 않아 남원 운봉현감 겸 좌영장 손명대(孫命大)에게 도망감.
3월 29일 :
전라감사 정사효(鄭思孝: 온양鄭氏, 박필몽의 사촌 처남)가 박필현의 사촌 형인 前 도승지 박필몽(장희빈의 여동생 남편)을 사로잡아 서울로 보냄. (박필현의 기병에 참여한 태인현이 폐현되지 않은 것은 영조 임금의 생모인 최숙빈의 고향이기 때문임)
3월 30일 :
상주영장 한속과 곤양군수 우하형의 격문이 나 붙음. 정희량․이웅좌가 거창으로 돌아옴. 진주영장(營將) 이석복의 군사가 정희량의 거사군을 두려워하여 거창으로의 진군을 미룸에 따라 이술원의 아들인 이우방이 진군을 재촉함. 함양군수 박사한은 함양으로 돌아옴(박사한은 그 후 4월 24일에 정희량이 임명한 안음현감 신수헌(愼守憲)과 그의 아들 신윤증(愼潤曾), 허격(許格), 심수명(沈壽明), 이만채(李萬采),采이익춘(李益春), 정규서(鄭奎瑞) 등 거사군을 따른 사람들을 참수함)
한편, 합천 조성좌의 4천군사는 강을 사이에 두고 금양역(現 합천읍 금양리)에 주둔한 성주목사 이보혁 등의 관군과 대진함. (현재 조성좌의 4천군사가 주둔한 백사장 근방의 마을이 조성좌군사가 보름 동안 주둔했다고 하여 보름이 보림으로 변하여 現 합천읍 서산리에 보림마을이 됨. 또한 금양리 앞들을 이보혁 등 관군의 말(馬)이 밀려 왔다고 하여 현재 말밀들로 불리어지고 있음)
다른 한편, 조성좌는 창고의 곡식을 합천군민에게 나누어 주고, 조성좌측에 가담했던 합천장교 함만중․아전 이태경 등은 청주의 이인좌군이 토벌되었다는 정보를 입수함. 저녁 무릅에 조성좌․정좌․덕좌, 허택(허찬) 등을 속여(배신하여) 권빈역을 지나 거창으로 가는 길목인 빙고현(氷庫峴: 現 합천읍 서산리 머구재 송태산)으로 주둔지를 옮기게 함.
그날 밤 10시경에 함만중․하세호 등의 배신으로 조성좌 등 4명은 사로 잡혀 폐(斃)한 상태가 되고, 조성좌군사의 일부는 거창으로 가서 정희량군(軍)에 합세함. 서울에서는 이일좌(李日佐)가 참형됨.
4월 1일 :
새벽 닭 울 무렵에 조정좌․조덕좌․조성좌 순으로 빙고현에서 참수(허택(허찬)도 참수)하고, 합천군수와 성주목사를 맞이함. 빙고현은 금양역에서 10리, 합천 객사에서 5리 거리임. 또한, 소위 『협종물문(脅從勿問)』이라는 영조 임금의 어명(御命)에 따라 조성좌 측에서 작성한 도목(都目: 명단) 4책을 앞서 청주의 이인좌측 도목처럼 불살라 버림.
한편, 고령현감 유언철이 야로에서 합천읍으로 진군할 때 조성좌의 고향이며 조응인․조정립의 고택(古宅: 밀양의 유학자 申季誠의 配 흥양李氏가 사망한 곳임)이 있는 現 합천군 묘산면 도옥리를 불질러 버림. 다른 한편, 거창현 좌수 이술원의 일족인 이우태가 격문을 지어 정희량의 거사군측에 가담한 장교들을 회유하고, 거창의 신명익이 거사군에게 곤장 29도를 맞고 초죽음 당함(신명익은 4월 4일에 사망함)
4월 2일 :
거사군은 분군(分軍)하여 정희량은 성초역(現 거창군 고제면 봉계리)에, 이웅좌은 우두령(現 거창과 김천 사이의 큰 재)에 진을 치고 있을 때, 진주영장 이석복군(軍)과 곤양군수 우하형군(軍)은 용문촌(現 함양군 안의면 봉산리)에 주둔하고, 선산부사 박필건이 통솔하는 금오진병(金烏鎭兵)이 우두령을 봉쇄하고, 남원 운봉현감 겸 좌영장 손명대가 팔량치를 차단함에 따라, 정희량․ 이웅좌군의 무주(現 전북 무주) 또는 지례(現 김천시 지례면) 진격이 좌절됨.
정희량이 임명한 함양군수 최존서는 관군에 체포되어 참형됨. 한편, 이인좌의 청주 진입을 막지 못한 충청감사 권첨(權詹)은 국문(鞫問) 한 후 사형(死刑)을 감하여 섬에 충군(充軍)하고, 충청어사 이도겸(李道謙)은 삭탈관직됨.
한편, 영의정이며 慶州李氏인 이광좌(李光佐)는, 정인지․신숙주․황희․조광조․박동열․이운징․민희․이덕형․이시백․정온 등 명현의 후예들
이 무신란에 가담한 사실에 대하여 심각한 우려를 표명함.
(정세윤은 영의정 정인지 후손이며, 신천영은 영의정 신숙주의 11세손이고, 황익재는 영의정 황희 13세손이며, 조문보는 대사헌 조광조 8세손, 박필현은 대사성 박동열 현손, 이인좌는 전라감사 이운징의 손자, 민원보는 좌의정 민희의 증손이며, 이지인은 영의정 이덕형 현손,이하는 영의정 이시백 증손, 정희량은 이조참판 정온의 현손, 조성좌는 정주목사 조정립의 현손임)
4월 3일 :
합천장교인 천총 김계(金洎)가 초기에 조성좌에 가담했다 하여 투옥됐다 풀려나는 등 연루자 선별로 합천관아가 어수선해지고, 서울에서는 이하(李河)의 아들인 이명구(李命龜)가 참형됨.
한편, 진주영장 이석복군(軍)이 무월촌(現 위천면)에서 성초역으로 진군하고, 이웅좌군(軍)도 정희량군(軍)이 진을 치고 있던 성초역으로 집결함. 정희량․이웅좌의 거사군이 박필건 등 관군과의 싸움에서 패함에 따라, 정희량․이웅좌․나숭곤․이세규 등 거사군 주요 인사 21명을 정빈주․여해달․배두필 등이 체포하여 군진(軍陳)으로 인계할려고 가는 길에 우하형․이석복군(軍)을 만나 곤양군수 우하형이 정희량․나숭곤을 처형하고, 진주영장 이석복이 이웅좌․이세규 등 나머지 거사군 주요 인사들을 참수함.
이로써 소위 무신란은 수천명이 희생되고 공주 동학사 등이 소실되는 등 큰 참화(慘禍)를 남기고 17여일만에 평정됨. 영남과 충청도․호남의 남인, 그리고 소론(준소)이 타격을 받음. 특히 경상우도의 남명학파는 처참한 타격을 받아 몰락함.
그 실상에 대해서는 조하주(曺夏疇: 능지처사된 曺世樞 祖父)의 손아래 처남이며 現 경기도 안산시 일동에 칩거하고 있던 ‘성호 이익(星湖 李瀷, 1681~1763, 장인이 신천영과 같은 고령申氏인 정언 申必淸)’이 쓴 성호문집 중 『문족등과기(門族登科記)』에 잘 나타나 있는데,
“무신역란(戊申逆亂) 후에는 대가(大家)․명족(名族)․문인(聞人)․ 현사(顯士)․달관(達官)․비위(卑位)를 물론하고 서로 이어 육몰(戮沒)하였으며 연루자가 나라 안에 편만하였다. 그리하여 수년 동안에 기상이 꺾이고 무너진 것이 겁화(劫火)가 지나가고 상전(桑田)이 벽해(碧海)가 된 뒤와 같다”
라고 증언하고 있음. 또한, 연암 박지원(燕巖 朴趾源, 1737~1805, 박필현 방손)의 『박연암집 권1 이처사묘갈명(朴燕巖集 卷1 李處士墓碣銘)』에,
“(안음현이 폐지된 후 안음현 사람은) 논(畓)의 물도 이웃 고을 사람에게 먼저 빼앗기고 대낮에 무덤 주변에 있는 나무를 모조리 베어가도 말 한 마디하지 못할 뿐 아니라 입만 조금 움직여도 도리어 역적으로 욕을 퍼부었고, 이속․ 군교․ 사령들이 양읍(註: 거창․함양)에 분속사역되는 등 마치 포로나 노예처럼 취급되었고, 유생들에게까지 병정의 충원이 요구되는 형편이어서 그 고통은 호소할 곳이 없다”
라고 한 것에서 그 차별과 핍박이 어떠했는지 잘 알 수 있음.
그리고 박지원의 『허생전(許生傳』에 허생이 변산 노비도적과 무인도를 개간하여 이상국가를 건설하는데, 이는 무신사태 때 참여하여 새로운 세상을 만들려고 했으나 무신사태 실패로 좌절한 소외계층인 부안 변산 노비도적을 소설화한 것임을 직시해야 함.
『허생전』에서 이런 개혁적인 내용들은 박지원의 祖父뻘 되는 박필현․필몽이가 무신사태의 핵심 인물로 처형되는 등 가문의 영향 때문임.
또한, 김종직의 후손인 김득린(金得麟, 선산金氏)이 무신사태 때 밀양에서 합천 가야산으로 피난을 간 후 전국을 방랑하며 살았다는 사실과, 남제주군 성산읍 난산리의 오흥태(吳興太)가 무신사태 때 모병(募兵)하여 육지로 진격하려고 한 것에서도 무신사태가 정국에 끼친 영향이 얼마나 큰지를 가늠할 수 있음.
"무신사태는 그 후 1730년(영조 6) 종모법(從母法)과 1750년(영조 26) 균역법의 시행․ 1764년(영조 40) 장례원 혁파 등의 제도 도입에 영향을 주었으며, 또한 1811년(순조 11) 홍경래의 평안도농민전쟁․ 1862년(철종 13) 단성 진주 함양 거창 상주 청주 회인 부안 순천 등임술농민항쟁․1894년(고종 31) 동학혁명 등 조선후기 민중운동이 비약적으로 촉발하게 되는 단초가 됨"
4월 6일 :
오명항의 관군이 지례를 지나 신창(現 거창군 웅양면)에 도착함. 책임을 다하지 못한 상주영장 한속과 조정의 허락없이 정희량 등의 목을 벤 진주영장 이석복․곤양군수 우하형이 도순무사 오명항에게 각각 곤장 20도 및 5도를 맞음. 참수된 정희량․이웅좌․나숭곤의 머리는 경상감사 황선에 의해 소금에 절여 서울의 훈련도감 화약 창고로 보내짐. 한편, 前 도승지 박필몽이 능지처사됨.
4월 7일 : 도순무사 겸 병조판서 오명항이 함양으로 떠나고, 종사관 박문수는 혼자 남아 민심 수습 등의 임무을 수행토록 함. 거창의 거사군측 인사 70여 명이 투옥됨. 한편, 박필몽의 배(配)가 참형됨.
4월 8일 :
오명항 함양 도착함. 합천군수 이정필이 조성좌․ 조정좌․ 조덕좌․허택의 머리(頭)를 오명항에게 바침. 한편, 합천좌수 정상림이 잡혀 거창에 와 있던 종사관 박문수에 의해 서울로 보내지고, 경상감사 황선이 갑자기 사망함. 오달제(고종 자형이 조성좌 고조부인 曺挺立임) 증손 오명서(33개월 재직)가 합천군수로 부임함.
4월 10일 :
정희량의 큰 아들 정의황이 참형되고, 한세홍(韓世弘)이 능지처사되고, 이인좌의 처(妻)인 윤자정(尹紫貞)이 교형에 처해짐.
4월 11일 :
鄭찬유의 작은 아들 정의련이 참형되고, 조상(趙鏛)과 나만치(羅晩致)가 능지처사되고, 나만치의 아들 나숭엽은 교형에 처해짐.
4월 14일 :
박문수가 합천에 도착하여 민심을 수습하고, 박문수가 경상감사에 임명됨. 한편, 오성대감 이항복의 6세손인 이종성이 영남어사로 임명됨.
다른 한편, 정희량의 母인 권말순(權末順)이 절도로 유배되고, 충청감사 김재로가 조세추(曺世樞)와 민원보를 서울로 압송함. 정희량의 6촌 이종(姨從)인 상주의 김홍수(金弘壽)가 서울에서 물고(物故) 즉, 죽임을 당하고, 박필몽의 아들인 박사관이 능지처사됨. 또한, 조세추의 고모부인 이선택(李善擇)과 조세추의 일족인 조경옥(曺慶(景)沃)이 효시(梟示)되고, 이인좌와 신천영의 아들들 및 처(妻)가 유배됨.
『역옥추안에는, 조세추의 父인 조경강(曺景江)은 참형, 母인 동래鄭氏는 유배, 繼祖母 羅氏는 방면(60세 이상)됨. 또한 조경오(曺景澳)의 숙부가 조하주(曺夏疇)라고 말하고 있으며, 문경의 조경사(曺景泗: 조하주 아들이라고 말하고 있음)는 상주에서 참형되고, 문경에서 曺세추와 함께 거사에 참여한 李萬光은 4월 15일 서울에서 효시됨』
4월 17일 :
조세추(曺世樞)가 능지처사됨. 조세추의 외조부는 동래鄭氏인 정조갑(鄭祖甲)임(그 후 조세추의 처 洪氏는 교형, 아들 조응창(曺應昌)은 유배됨).
4월 19일 :
오명항이 서울로 돌아오자, 영조 임금이 직접 숭례문의 문루(門褸)에 올라가서 영접함. 4월 21일에는 합천좌수 정상림(鄭商霖)이 의금부에 수감됨.
4월 22일 :
조정에서 李麟佐․ 이웅보․ 鄭希亮․ 나만치․ 나숭곤․ 나숭대․ 박종원․ 민관효․ 남태징․ 이사성․ 심유현․ 박필몽․ 박필현․ 이하․ 이배․ 박사관․이유익․ 권서봉․ 권서린․ 신광원․ 윤덕유․ 목함경․ 한세홍․ 曺世樞․ 이지인․ 안엽․ 안정․ 안추․ 趙鏛․ 이순관․ 이익관․ 신윤조․ 이문저․ 유염․한세능 등 35명을 능지처사함.
『남태징․민관효․신광원 등은 3월 19일, 이인좌․ 이사성․ 이배 등은 3월 27일, 목함경․ 권서봉․ 권서린 등은 3월 28일 서울에서, 鄭希亮․이웅보․나숭곤은 4월 3일 거창에서, 문경의 曺世樞는 4월 17일 서울에서 이미 처형됨』.
한편, 조정(朝廷)에서 무신거사 10역적을 김일경․ 목호룡․ 이인좌․ 이웅보․ 박필현․ 이사성․ 정희량․ 박필몽․ 남태징․ 민관효로 결정함.
4월 23일 :
합천좌수 정상림이 효시(梟示)되고, 4월 24일에는 이윤행(李允幸)이 능지처사되고, 나만서(羅晩瑞)와 안음좌수(현감) 신수헌(愼守憲)이 참형됨.
4월 26일 :
오명항․박문수․박필건․박찬신․조문명․이삼․이보혁․조현명 등 무신사태를 평정하는데 공이 큰 15명에게 양무(분무)공신(揚武(奮武)功臣)으로 녹훈(錄勳)하고, 이인좌․정희량․조성좌 등 50여 명으로부터 적몰한 논밭 약91만평과 노비 391명을 양무공신 15명에게 나누어줌. 다른 한편, 정희량 아들 정철흥이 유배됨.
4월 28일 :
曺聖佐의 6촌이며 조하현(曺夏賢)의 손자인 조명좌(曺命佐)가 대구감옥에서 참형됨. 정희량의 일족인 정사유(鄭思儒)․흠유(欽儒)가 섬으로 유배됨.
한편, 백사 이항복의 6세손인 영남어사 이종성(李宗城 : 영조 28년 1752년에 영의정이 됨)이 무신사태를 수습․보고하기 위해 28일 現 거창 웅양면으로 내려와 이술원을 조문하고, 5월 12일에는 합천에 도착함.
이종성은 조한유와 함께 5월 15일 안간역(現 진주시 미천면)에서 1박하고, 5월 17일 진주에 도착함. 그 후 조한유는 5월 18일 現 산청 신등의 권구(權久) 집을 거쳐 가회 구평마을의 윤홍명(尹鴻鳴) 집에서 1박하고, 5월 19일 대병 병목 마을의 진사(進士) 송시징(宋時徵 : 조한유의 종증조부인 曺時遂의 사위) 집에서 1박한 후, 5월 20일 합천 묘산에 도착함. 이종성은 9월 11일에 서울에 도착함.
『이종성은 그 후 1729년 3, 4월에도 영남 어사로 다시 내려옴. 이종성의 5대조인 백사 이항복이 북청으로 귀양와서 1618년(광해10) 5월 사망하자, 당시 좌천되어 북청판관에 재직 중이던 조성좌의 고조부인 오계 조정립이 만사와 제문을 짓고 장례를 치러 준 인연으로 조성좌 후손이 무신사태 후 이종성의 도움을 받게 됨. 이로 인해 이종성은 1729년(영조 5) 4월 27일 진실하지 못했다고 하여 추고(推考) 당함』
4월 29일 :
정희량의 처 宋氏(曺氏는 제외)와 며느리 安氏(정의황 妻)가 교형에 처해짐. 한편, 무신사태 때 내통한 유몽서(유성룡의 兄인 유운룡의 6세손)․권덕수(안동 가일마을)․김민행(학봉 김성일의 兄인 약봉 김극일의 후손) 등 안동 사람들을 탕척(蕩滌: 죄를 깨끗이 씻어 줌) 시킨다는 영조 임금의 교지를 경상감사 박문수가 직접 받들고 안동에 가서 사인(士人)들을 향교에 모이게 하여 낭독한 후 전하니, 유몽서 등 3인이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고, 사인(士人) 3백여 명이 글을 올려 영조 임금의 은덕을 칭송함.
5월 2일 :
거창 위천의 정세유(鄭世儒, 정희량 8촌 兄)와 그의 두 아들 의경(宜璟, 일명: 殷瑞)․의장(宜璋, 일명: 命瑞)이 참형됨. (이 세사람의 묘소는 조성좌의 두 아들(曺仁燁․信燁) 묘소와 함께 現 거창 신원면에 있음)
5월 5일 :
후세에 널리 알려 교본으로 참조하기 위해 영조임금의 명을 받아 소론인 송인명․ 박사수(반남朴氏, 박소 8세손) 등「무신감란록(戊申勘亂錄)」6책의 편찬을 시작함. 『무신감란록』에서 영조 임금은 무신기병의 원인에 대해,
“붕당을 일삼아 재주 있는 사람을 등용하지 않고 색목(色目)으로 등용하여, 보잘 것 없는 것들이 좋은 자리를 차지했고, 또한 연달아 흉년이 들어 백성이 죽을 지경인데도 그들을 살릴 생각은 하지 않고 당쟁을 일삼았기에 백성들이 조정을 업신여긴지 오래되었고, 도둑(주: 무신기병 주도자)에게 참여한 것은 그들의 죄가 아니라 조정의 허물이다.”
라고 함.
5월 7일 : 김덕삼(金德三)․조관규(趙觀奎)가 서울에서 능지처사되고, 5월 8일 성주목(星州牧)에 구금되어 있던 조정좌(曺鼎佐)의 처
(配: 密陽孫氏)가 교형에 처해짐. 5월 13일 서울에서 이사로(李師魯)가 능지처사되고, 5월 22일 정암 조광조의 후손인 보은현감 조문보(趙文普)가 장살됨.
6월 13일 :
금산의 황심․ 선산의 이도․ 오붕만이 유배됨. 6월 20일에는 함경도 경흥의 前부사 황부(黃簿)가 처형(물고)됨.
●1728년(영조 4) 7월
영의정 이광좌, 청주의 박민웅, 거창의 좌수 이술원․향임 신명익, 합천의 장교 함만중․아전 이태경, 함안 칠원의 주재성, 하동의 서상
항, 김천의 백시형, 정읍 옹동의 도사 김도언, 남원의 김수태, 충남 제원의 나후명, 김천 지례의 이인상, 보성의 윤동교, 서울의 만호(萬
戶) 김진창(화가 김홍도 증조부) 등 무려 9천여 명에게양무(분무)원종공신(揚武(奮武)原從功臣)으로녹훈함.
●1728년(영조 4) 9월 :
우의정 오명항(오달제 從曾孫)이 사망함.
●1728년(영조 4)12월 20일 :
함경도 순영의 中軍 박창제(朴昌悌)가 물고(物故, 처형)되고, 12월 29일 박필몽을 사로잡는데 공을 세운 무장현감 김몽좌가 장살됨.
(이인좌와 정희량의 아내는 교형, 이인좌의 16세 미만인 네 아들은 제주도 등으로 유배되고, 정희량의 두 아들은 처형되고, 나이 어린 막
내 아들 정철흥은 現 북제주군 추자도로 유배됨. 그러나 1787년 6월에 정철흥의 아들인 정함(鄭醎)이 반란사건에 연루됨)
●1729년(영조 5) 3월 12일 :
특진관 박사수가 영조 임금에게,ꡒ무신란 후 유배(流配)된 자가 팔도를 합산하면 무려 1,000명에 달하고 있어 변방과 도서(島嶼) 주민
들의 피해가 이미 참담할 지경에 이르렀고, 더구나 역족(逆族)의 찬배자(竄配者)가 줄을 이어 남해(南海)와 거제(巨濟) 같은 고을 원주
민은 2,3호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모두 귀양살이하는 무리이다.
이들은 모두 그 땅에서 나는 것을 먹기 때문에 물자가 아주 부족하여 주객(主客)이 아울러 곤란을 겪고 있고 또 온당치 못한 무리들이 한
섬에 많이 몰려있으니 일후의 걱정도 꼭 없으리란 보장이 없으므로, 마땅히 의금부로 하여금 다른 지방으로 나누어 배치하게 하여 흉족
(凶族)들이 머리를 맞대는 길을 끊어야 한다.ꡓ고 보고함.
●1729년(영조 5) 3월 25일 :
영남어사로 임명된 이종성이 경상도의 불법 수령을 처벌할 것을 서계(書啓: 보고서)로 조정에 알림. 3월 26일에는 곤양(하동)의 이명근
(李命根)이 물고(物故) 즉, 죽임을 당함.
●1729년(영조 5) 3월 28일 : 밀풍군 이탄ꡑ이 어명(御命)에 의해 자결함.
●1729년(영조 5) 4월 9일 :
우의정 이태좌가, 정인홍의 증손(曾孫) 중 겹눈동자(重瞳)인 사람이 있어 영남사람들이 마구 몰려드는 등 민심이 현혹되고 있다고
하자, 영조 임금이 그 증손을 장살(杖殺)하라고 명함.
●1729년(영조 5) 4월 25일 :
합천의 조성좌․조덕좌․정상림, 삼가의 권만항(權萬恒 : 역옥추안에는 삼가현 대평(대병) 사람임. 現 삼가 두모리 權氏(?)로 現 충북 영동
상촌면으로 도피함),
안음의 정세유․ 정원유, 함양의 최존서, 안성의 정세윤(鄭世胤), 진위의 소성(蘇晟) 등 48명을 노적(孥籍)하고, 7월에 그들의 아내와 만
14세~16세 자녀들이 대명률 및 경국대전에 의거 강원도․평안도․ 섬 등으로 유배되고, 만13세 이하 자녀들은 방면 또는 유배됨.
관노로 발배된 조성좌의 나이 어린 두 아들인 조인엽(曺仁燁, 아명 : 曺萬乃)․ 신엽(信燁)과 그들의 후손들은 변명(變名)하여 영남어사
이종성과 무신사태를 반대한 일족인 조한유(일명 : 일엽청)의 도움, 그리고 조하전(曺夏全, 조성좌의 祖父) 10촌 동생인 조하주(曺夏
疇)의 고모부인 경창군(慶昌君, 인조 임금의 동생) 후손 및 합천군수 오명서(오명항 8촌 동생) 등의 도움과 1764년(영조 40) 장례원 혁
파 및 그 후 1801년(순조 1) 공노비 해방 등으로 오지인 現 거창 신원면 구사리 舊 원만마을로 숨어 살게 됨. 조정좌․희좌․순령 등의 후손
들은 현재 확인이 안 되고 있음. 특히 처형(또는 유배)된 조광좌․형좌․경좌․순령(曺匡佐․ 衡佐․ 景佐․ 舜齡) 등은 창녕曺氏 태복경공파보
에도 누락되어 있음.
『이 때 정희량의 8촌 동생인 안음 강동(現 거창 위천 강천리)의 정관유에게 시집간 조성좌의 첫째 누이와 동생인 희좌․순령(舜齡) 및 조
명좌(曺命佐 : 대구감옥에서 참형됨, 묘소: 묘산면)의 아내(配) 姜氏는 발배 즉 유배되었으며(창녕曺氏 태복경공파보에는 그 후 姜氏는
석방되어 묘소가 봉산면 압곡리에 있음), 고성의 박필이(朴必伊)의 아내도 유배되고, 봉산면 권빈리의 손후빈은 참형됨. 다만, 정세유의
두 아들은 1728년 5월 2일에 이미 참형됨.
그 외 조성좌의 아저씨 항열이며 조정립의 증손(曾孫)인 관(灌)․원익(元翼)․용익(龍翼)과, 조정생의 증손인 숙(淑)․징(澄)․옥(沃)․집
(潗)․학(㶅)․담(潭) 등은 처형 또는 화(禍)를 입음. 또한, 조명욱(曺明勗, 영월부사)의 증손인 명신(命新), 조성구(曺聖久)의 아들인 하
신(夏新), 現 상주 사벌의 조시망(曺時望)의 손자인 경문(景汶)도 처형됨. 또한 산청의 남명 후손 조철(曺澈) 등도 처형됨.』
●1729년(영조 5) 4월 27일 :
경기도사(京畿都事)로 임명된 이종성이 영남어사 등 좌막(佐幕)에 보직되어 나가서는 정체가 진실하지 못했다고 추고(推考) 당함.
●1729년(영조 5) 7월 :
정희량이 기병한 안음현이 경상감사 박문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역적을 따른 고을이라 하여 폐현(廢縣)되어 거창군 및 함양군으로 편입
됨. 9월에는 경상감사 박문수가 안음현 혁파가 부당하다는 장계를 조정에 올렸으나, 우의정 이집(李㙫)은, 안음은 역적을 따른 고을이니
『서경(書經)」에 이른바 종자를 남기지 않고 진멸시킨다는 것에 해당되는 곳이기에 안음현 폐현은 당연하다고 말함(태인현은 영조의 생
모 최숙빈의 고향이라 폐현되지 않음.』
"안음현은 1736년 복구되었고, 1767년(영조43) 8월에는「의(義)」로운 고을이 되라는 뜻에서 안의현으로 개명됨. 청주목(淸州牧)도
서원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740년 복구됨"
●1730년(영조 6) 4월 :
최필웅(崔必雄) 궁궐 침입사건으로 관련자들이 처형됨. 5월에는 전라감사 정사효(鄭思孝)가 서울에서 국문을 받은 후 장살(杖殺)됨.
6월 경상감사 박문수가 대사간으로 제수됨.
●1730년(영조 6) 12월 :
무신사태의 영향으로 공사(公私) 노비 중 양처(良妻) 소생은 어머니를 따르게 하는 종모법(從母法)을 시행하는 제도 개선책을 마련함.
그러나 1,000여 승군(僧軍)과 팔월산 도적이 남인(南人)과 연계하여 역모를 꾸민 것이 소위 1728년 3월 무신란과 관련이 있다고 하여
남인들을 색출함.
●1731년(영조 7) 2월 9일 :
청주의 병사(兵使) 이봉상 등을 배향하는 표충사(表忠祠)를 청주읍에 건립함.
●1731년(영조 7) 2월 27일 :
경상도 암행어사 이흡(李潝)이 입궐하여 영조 임금에게 무신사태 후의 경상도 민심 등을 복명(復命)한후, 영조의 질문에 합천. 거창의
조성좌․정희량 두 역적의 잔당이 조정에서 지나치게 베푼 전례로 인해 함부로 날뛰는 잔당들이 매우 많으니 붙잡아 가두고 낱낱이 승복
(承服)을 받아야 하며, 거창현감 신정모는 정희량과 내통했고, 안동의 권징수․유몽서․권구 등도 적과 내통했으나, 김성탁(金聖鐸)만 항거
했다라고 대답함.
●1731년(영조 7) 7월 :
거창좌수 이술원을 죽인(집도한) 백정의 목을 벰.
●1733년(영조 9) 2월 25일 :
정랑 김오응․감찰 장위항 등이 연대 상소하기를, 안음․ 합천은 낙동강 오른쪽의 궁벽한 고을로서 정인홍의 악취를 남긴 곳이기에 정희량․
조성좌 같은 흉역의 무리들이 출생 한다고 하는 등 매도함.
3월에는 現 충북 보은읍 장곡서당(獐谷書堂) 사건을 무신잔당(戊申殘黨)의 소행이라 하여 이제동(李濟東)과 조성좌의 외가집인 김희
능(金喜能)․ 김희공(金喜功) 등 많은 사람들이 처형됨. 7월에는 남원괘서사건을 무신잔당이 일으켰다고 하여 김원팔(金元八) 등이 처형
됨.
●1733년(영조 9) 8월 27일 :
하동의 조영하(曺永河)에 대해 추국(推鞫)을 행하여 신문함. 조영하가 공술(供述)하기를,ꡒ조성좌 형제가 복주(伏誅: 형벌에 복종하여,
죽음을 받음)된 후, 조성좌 형제와 동접(同接)인 곽처웅(郭處雄)은 문장과 재능이 훌륭한데도 과거에 나아 가지 않았고, 또한 무신년(註:
무신란)에 출정(出征: 무신란을 진압하기 위해 나아감)한 사람과는 절대 왕래하며 상종하지 않았다라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볼때, 무
신사태가 진압된 지 5년이 경과한데도 불구하고 무신사태에 대한 진주 합천 하동 등 인근 지역민의 정서가 어떠하였는지 알 수 있음.
●1736년(영조 12) :
現 경북 문경 마성면의 신후명(申厚命, 1638~1701, 형조참판․충청감사)의 증손인 신자악(申自岳)에게 시집간 조성좌의 막내 여동생이
아들 신치룡(申致龍)을 낳음.(그러나 『평산申氏 문희공파보』에는 신자악의 아내가 창녕曺氏가 아닌 창녕成氏로, 처증조부가 曺時亮이
아닌 成時亮으로 왜곡․ 등재되어 있음)
●1737년(영조 13) 7월 1일 :
좌의정인 청사 김재로(淸沙 金在魯, 1682~1759, 영조16년 영의정 됨)는, 이황의 경상좌도는 삼가고 단란한 기풍이 지금까지 남아 있
으나 경상우도는 조식이 살았기 때문에 기절(氣節)을 숭상하는 풍습이 도리어 나쁜 풍습이 되었으며, 그 폐단으로 조식의 제자에 정인홍
이 있었다.라고 하면서, 소위 무신란 발발 원인을 조식(曺植)에게 있는 것처럼 말함. 한편, 정희량군(軍)에 저항하다 죽은 이술원을 배향
하는 포충사(褒忠祠)를 거창읍에 건립함(그 후 정조1년 1777년에 웅양면으로 옮김)
●1738년(영조 14) 11월 14일 :
정희량․조문보(趙文普, 보은현감)의 선조인 정온․조광조(趙光祖)의 봉사손(奉祀孫)에 대한 논의를 임경업의 사례에 따라 조치토록 함.
●1740년(영조 16) 12월 5일 :
노론인 검토관 이천보(영조37년 영의정 됨)는, 조식의 문로(門路)가 불순하며 바르지 못하여 그의 문하에서 정인홍이 나왔고, 조식이 경
상우도에 살았기 때문에 우도 사람들은 기절(氣節)을 숭상했으나, 이황은 좌도에 살았기 때문에 무신란때 범법자가 없었으며 오늘날 까
지 문학(文學)과 행의(行誼)있는 자가 많으니, 마땅히 등용해야 한다.라고 하는 등 집권 세력들은 무신사태의 사상적 연원을 조식에게까
지 돌리면서, 진주 합천 안음 거창 함양 등 경상우도는 가혹하게 차별하였으나, 안동 등 경상좌도는 회유하는 정책을 폄.
●1740년(영조 16) 12월 5일 :
안성에 이인좌․신천영군(軍)을 물리친 도순무사 오명항을 찬양하는「토적송공비(討賊頌功碑」를건립함. 한편, 이인좌․정희량․이사의(어
린) 아들을 엄중히 가두라고 명함.
●1750년(영조 26) :
1728년 3월 무신사태의 영향으로 양인(良人)들의 부담을 경감하는 균역법(均役法)을 도입하게 됨.
●1755년(영조 31) :
1월 나주벽서사건(羅州壁書事件)과 5월 토역경과투서사건(討逆慶科投書事件)으로 경종 임금의 독시설이 다시 쟁점화되자, 1728년
무신사태와 연계되었다 하여 소론인 조태억․이광좌․박문수 등이 삭탈관직, 박찬신․ 박사집․ 윤지․ 유수원․ 신치운․ 조동정(趙東鼎)․ 김윤․
심정연(무신사태 때 처형된 심성연 동생)과 춘천의 강몽협(姜夢協)․ 유봉성(柳鳳星) 등이 처형되고, 이광사(李匡師, 李眞儒 조카, 연려
실: 이긍익 父) 등이 귀양가 죽음.
●1756년(영조 32) : 영성군(靈城君) 박문수가 사망함.
●1759년(영조 35) : 영중추부사 이종성이 사망함.
●1764년(영조 40) 9월 21일 : 정희량의 고조부인ꡐ동계 정온ꡑ의 봉사손(奉祀孫)을 조정에서 공식 등용하는 조치를 함.
●1764년(영조 40) 11월 : 무신사태의 영향으로 노비 문서를 관리하던 기관인 장례원(掌隷院)이 혁파됨.
●1768년(영조 44) : 곽재우․서경덕의 사상과 계보가 닿아 있는 인물들이 소위 무신란과 관련이 있는 남란(南亂)을 모의한다 하여 처형
됨.
●1776년 3월 : 영조 임금이 사망함. (재위 52년)
●1780년(정조 4) :
무신기병을 계획하고 참여한 경상도(영남)에 대해 적국(敵國)을 평정한 것처럼 폄하하고, 또한 무신사태 때 경상감사였던 황선을 찬양한
『평영남비(平嶺南碑)』를 대구에 건립함.
● 『평영남비』에는 거창의 정희량군사(軍士)만 7만 명이라고 쓰여 있음.
●1784년(정조 8) : 무신사태 때 성주목사였던 이보혁을 찬양한 『성산기공비(星山紀功碑)』를 성주읍에 건립함.
●1787년(정조 11) 6월 14일 :
제천의 김동익(金東翼) 등이 정희량의 손자 정함(鄭醎, 일명 鄭應周)과 이인좌의 아들을 받들어 반란을 모의하다 김동익이 처형됨.
●1788년(정조12) :
정조 임금의 왕권이 노론으로부터 위협 받고 있던 시기인 무신사태 일주갑(60년)을 맞아 합천의 무신사태 진압을 찬양한 『무신평란사적 비(戊申平亂事蹟碑)』를 합천읍에 건립하고, 무신사태 때 공을 세운 거창의 아전인 신극종․석현․덕현․치근․광세 등 신씨(愼氏) 5인을 배
향하는 창충사(彰忠祠)를 거창읍에 건립함. 또한, 남인인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을 우의정에 임명함.
한편, 이진동(李鎭東) 등 안동 사림(士林)의 주도로 무신사태 때 경상좌도를 중심으로 13개읍에서 창의한 것을 기록한 무신창의록(戊申
倡義錄)을 정조 임금에게 바침. 이것으로 인해 1792년(정조 16) 3월에는 안동의 도산서원에서 경상좌도 사림을 배려하기 위해 별시를
치르자 과장(科場)에 입장한 유생만 7,000여명이 넘는 등 경상좌도는 경상우도와 달리 정조 임금 때는 차별을 적게 받음.
●1800년 6월 : 정조 임금이 사망함(재위 24년).
●1811년(순조 11) 12월~1812년 4월 : 무신사태의 영향 등으로 홍경래에 의한 평안도 농민전쟁이 발발함. (약2,000명이 처형됨)
●1862년(철종 13) 2월~12월 :
무신사태의 영향 등으로 단성․진주․함양․거창․청주․부안․상주 등지에서 임술농민항쟁이, 1868년 3월에 광양․구례․남원․강진에서 민회
행․김학원 등에 의한 반봉건 투쟁이 일어남.
●1873년(고종 10)~1876년 :
한말 척사론자인 노론의 최익현(崔益鉉, 포천 출생, 이항로 문인, 1833~1906)과 김평묵(金平黙, 포천 출생, 이항로 문인, 1819~
1888) 등은 상소 등을 통해, 이현일․한효순․목내선 등의 신원을 요구한 사람들을 추율(追律, 반역죄로 처벌)해야 하며, 南人인 윤휴(尹
鑴) 이후로 우리 서인(노론)과 남인은 원수가 됐다.
만약 서양과의 조약이 성립된 후에 민암․목내선․이인좌․정희량의 남은 후손들이 백성의 불인(不忍)한 마음을 이용하여 창을 들고 도성과
대궐을 침범한다면 서인은 일망타진될 것이다.라고 주창함. 척양(斥洋) 즉, 서양세력의 일망타진보다
또 하나의 양적(洋賊)인 무신사태의 후손 등 남인세력의 일망타진에 척사의 비중을 더 두었음을 알 수 있으며, 집권 노론세력들은 조선이
망하는 그 시점까지 무신당(戊申黨)과 남명학파(南冥學派) 후손 및 남인들 모두를 원수처럼 철저히 배척했음.
●1890년(고종 27) :
무신사태 때 공을 세운 오세창(吳世昌, 해주吳氏)을 배향하기 위해 금오재(現 거창 가조면 소재)를, 1891년에는 배두필․두원(裵斗弼․
斗元)을 배향하기 위해 충의사(忠義祠)를 現 거창 남하면에 건립함.
●1894년(고종 31 : 무신사태의 영향 등으로 갑오동학농민전쟁(동학혁명)이 발발함.
●1908년(순종 2) 4월 30일 :
1728년 3월 무신사태로 인해 처형된 대사헌 제학 김일경(1724년 처형)․현감 박필현․대사헌 박필몽․부사 심유현․이조참판 이사로․병조
참판 총융사 김중기․밀풍군 이탄․전라감사 정사효와 숙청되어 충군(充軍)된 충청감사 권첨 등이 신원, 즉 사면 복권됨.
"이 때 소위 인조반정으로 1623년(인조 1) 처형된 영의정 정인홍과 1680년(숙종 6) 경신환국 때 사사(賜死)된 우찬성 윤휴, 1694년
(숙종 20) 갑술환국 때 삭탈관직 된 이조판서 이현일 및 사사된 우의정 민암, 1755년(영조 31) 경종 임금의 독시설이 쟁점화 된 나주벽
서 사건 때, 무신잔당(戊申殘黨)이라 하여 관직이 추탈된 영의정 이광좌 및 처형된 어영대장 박찬신 등도 함께 신원됨."
●1914년 :
자체부패 무능 등으로 1910년 조선왕조가 망한 후, 조성좌의 7세(6대) 宗孫이 합천 삼가(三嘉)에서 출생하자, 종손의 祖父인 조석규
(曺錫圭, 1854~1917)가 1728년 3월 무신사태 이전의 번성했던 가문의 영광을 재건(再建)하려는 염원에서 종손의 이름을 조재건(曺
再建)으로 지음.
그 후 1930년 양력 10월에는 조성좌․정좌․ 덕좌 등 소위 무신란 때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묘소가 있는 합천군 봉산면 권빈리 석가산을 소
유권 보존 등기함. (무신사태 후 조성좌의 가족들은 現 합천 묘산 도옥리에서 강원도 발배 후, 거창 신원 舊 원만마을로 숨어살게 됨.
그 후 후손들은 합천 가회 도탄리로 이주하여 잠시 살다가, 합천 쌍백 안구마을로 이주하고, 그 후 합천 삼가 강성마을 및 이부마을로 이
주․ 정착함)
●1994년 :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발간한 영조무신역옥추안 및 영조무신별등록 해제에… 1728년 무신란은 정치체계와 권력구조의 모순에
의해 일어난 의리명분 논쟁의 한 양상이면서 동시에 대규모적인 권력투쟁의 표출이기도 했다. 아무튼 무신란은 소외계층의 변혁운동이
다라고 평가함.
●1999년 양력 5월 23일 : 『석가산의 쇠갓』이라는 조성좌의 전설이 서려 있는 합천군 봉산면 권빈리 석가산 소재 조성좌 묘소에 무신의
거비(戊申義擧碑)를 세움.
●대진대학교 철학과 교수이며 남명학연구원 상임연구위원인 권인호(權仁浩) 박사가 비문(碑銘)을 지었음.
<孤竹堂>
첫댓글 이인좌의 조부가 되는 이준경(李浚慶)이 동 시대에 동명2인으로 광주이씨와 전주이씨에 각 한분씩 계셔서 후세 사람들이 혼동하고 있지만 족보를 찾아보면 전주이씨가 맞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