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자성 처 이씨 묘지명(李自成妻李氏墓誌銘)
이제현(李齊賢) 찬(撰)
부인(夫人) 이씨(李氏, 1268~1350)는 흥례부(興禮府 : 지금의 울산) 사람이다.
증조부는 순광(淳匡), 조부는 우(祐)이며, 아버지는 춘년(椿年)이다.
한산 이씨(韓山 李氏)인 자성(自成)의 처이다.
묘지명에 따르면 부인 이씨는 남편이 죽은 후 40년 동안 과부의 절개를 지켰다.
성품이 밝고 민첩하며, 인자하면서도 엄한 가르침으로 두 아들을 공부시켜 벼슬하게 하였다.
세 아들과 한 명의 딸을 두었다.
장남은 배(培)이며, 차남은 일찍 죽었다.
막내아들은 곡(穀)이다.
딸은 장씨(張氏)에게 시집갔다.
막내 이곡으로 인해 부인(夫人)은 원나라에서 현군(縣君)으로 봉해졌고, 고려에서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으로 봉해졌다.
묘지명은 이제현(李齊賢)의 문집 『익재난고(益齋亂藁)』 권 7과 『동문선(東文選)』 권124에 실려 있으며, 1350년(충정왕 2)에 이제현이 작성하였다.
대원 제봉 요양현군 고려삼한국 대부인(大元制封遼陽縣君高麗三韓國大夫人) 이씨(李氏)의 묘지명 유서(有序)
대부인(大夫人)의 성(姓)은 이씨(李氏)이니 흥례부(興禮府) 사람이다.
증대부(曾大父)의 휘(諱)는 순광(淳匡)이니 사재주부(司宰注簿)요, 대부(大父)의 휘는 우(祐)요, 아버지의 휘는 춘년(椿年)이니, 모두 벼슬하지 않았다. 15세에 한산 이씨(韓山李氏) 감정읍무(監井邑務) 자성(自成)에게 시집가니, 두 집의 성씨를 얻은 내력을 추구하면 같은 이씨가 아니다.
3남 1녀를 낳았는데, 큰아들은 배(培)요 둘째아들은 요사(夭死)하였고 셋째아들은 곡(穀)이며, 딸 하나는 장씨(張氏)에게 시집갔는데 먼저 죽었다. 정읍부군(井邑府君)이 졸한 뒤 부인은 과부로 40년을 수절하였으며, 명민(明敏)하고 자엄(慈嚴)해서 두 아들에게 과거 공부를 힘쓰게 하여 입신(立身)하게 하였다.
배(培)는 벼슬이 사의서 승(司儀署丞)이고, 곡은 국시 수재과(國試秀才科)에 급제하였고 또 원 나라의 제과(制科)에도 급제하여 지금 봉의대부(奉議大夫)로서 정동행성(征東行省)의 낭중으로 있다가 또 정승이 되었고, 한산군(韓山君)에 봉작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원의 조정에서 정읍부군을 비서감 승(秘書監丞)으로 추증하고 대부인은 현군(縣君)으로 봉하였는데, 나라에서는 삼한국 대부인(三韓國大夫人)으로 봉하였으니, 당세의 영화로 여겼다. 나이 83세인 지정(至正) 10년(1350) 10월 임인일에 졸하였고, 그해 12월 병신일(丙申日)에 한원(韓原)에 장사하였다.
명은 다음과 같다.
몸가짐에는 절개가 있었고 아들 훈계에는 법이 있었도다.
선비로도 어려운 것이거늘 어머니로서 이를 능히 하였도다.
일신이 존영(尊榮)을 누린 것은 아들이 이름을 이루었기 때문이라.
묘소에 비석을 세워 길이 후세에 보이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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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大元制封遼陽縣君高麗三韓國大夫人李氏墓誌銘 有序.
大夫人姓李氏。興禮府人。曾大父諱淳匡。司宰注簿。大父諱祐。父諱椿年。皆不仕。旣笄。歸韓山李氏監井邑務諱自成。原兩家所以得氏。非一李也。生三男一女。長曰培。次夭。次曰穀。女適張氏。先沒。井邑府君卒。守寡四十年。明敏慈嚴。勉二子宦學。俾有立。培官司儀署丞。穀登國試秀才科。又登皇朝制科。今以奉議大夫。爲郞中征東行省。又爲國相。爵韓山君。由是朝命贈井邑府君祕書監丞。大夫人封縣君。而國命封三韓國大夫人。當世榮之。年八十三。至正十年十月壬寅卒。其年十二月丙申。葬韓原。銘曰。
持身有節。訓子有則。士也其難。惟母時克。身享尊榮。由子名遂。刻文幽墟。于永厥眎。<끝>
益齋亂稿卷第七 / 碑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