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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유기(西遊記)
◇ 기간 : 1703년 8월 7일 ~ 9월 5일(총 30일)
◇ 주요일정
0 8월 7일 한양-파주
0 8월 8일 임진나루 – 풍덕(제능) - (며칠을 머무름) - 연경사 – 경천사 – 정능-화암사 터
◇여행의 개요
나이 26세에 개성의 천마산 등을 유람하고 기록한 「서유기」는 여행 기간이 30일이나 되어, 3편의 산수유기 가운데 가장 긴 기록이다. 한양을 홀로 출발하여 풍덕의 제릉에 있는 당숙의 집을 거점으로 개성지역을 두루 유람하게 된다.
유람의 주요 경로를 크게 분류해보면
첫째는 제릉주변의 연경사. 경덕사. 화암사 터로 공민왕과 고려시대의 유적이다.
둘째는 송도(개성)의 도심지역으로 경덕궁. 만월대. 목청전 등의 조선 건국 초기 국도의 고적을 유람하였다.
셋째는 본격적인 천마산 유람으로 보봉산의 화장사. 영취산의 현화사. 박연폭포. 만경대. 보현봉. 적멸암. 대흥사. 오관산의 영통사. 화담. 서사정을 방문하였다.
넷째는 다시 송도 시내 지역으로 정몽주 유적을 방문하고 제릉으로 돌아왔다.
다섯째는 제릉을 출발하여 구암서원을 거쳐 장릉. 적벽. 내소정. 화석정. 수월정. 청량정등을 유람하였다.
여섯째는 우계서실. 반구정. 자운서원 등을 방문하고 한양으로 돌아오는 여정이었다.
30일이라는 긴 여정이 가능했던 것은 풍덕의 제릉에 당숙이 거주했기 때문이며 동행자는 친척 아우인 도승과 연경사 승려인 지순 그리고 벗 경승 정도로 비교적 단출한 모습이었다.
◇1703년(계미년) 8월 7일
나는 한양에서 천마산을 방문하기 위해 길을 떠나 파주에 도착하여 유숙하였다.
◇ 8월 8일
아침 임진나루를 건너 풍덕의 재릉에 이르니 길가에서 이미 천마산의 여러 봉우리가 보였다.
참봉 이공 지윤은 나의 당숙이신데 예전에 나와 함께 천마산을 유람하자고 약속한 적이 있어, 나를 보시고는 매우 기뻐하셨다.
◇ 8월 9일 ~ 8월 15일
아우 도승과 함께 연경사(衍慶寺)에 가 보았다. 절은 능 동쪽에 있었고 또 능에서 서쪽으로 십 리에 있는 경천사(敬天寺)를 방문했다. 경천사는 그 언덕 쪽에 있었다. 12층 탑이 우뚝 솟아 있는데 만든 솜씨가 참으로 교묘하며, 고려 공민왕 때 건립되었는데 중국에서 그 자체로 바다에 떠서 온 것이라고 한다.
경천사에서 서쪽으로 삼십여리를 가면 공민왕 릉 정릉(正陵)이다. 석물이 굉장하여 다른 능과는 비교도 안된다. 묘 아래 화엄사 터가 있고 비석도 있는데 자획이 회손 되어 읽을 수가 없다.
집으로 돌아왔다.
◇ 8월 16일
천마산을 향하여 드디어 출발한다. 동생과 연경사(衍慶寺) 지순(志淳) 스님과 함께 이십 리를 가 송도로 들어와서 경덕궁(慶德宮)을 본다. 경덕궁은 이태조 의 잠저다. 비각이 있고 금상(今上)의 어필이 전각 되어있다. 후에 권유(權愈)가 제작하고 오시(吳始)가 복서를 한 것이다.
남문루에서 휴식하고 만월대(滿月臺)를 방문했다. 오 백 년 동안 왕이 거주하던 곳이다. 적막한 폐허의 모습, 옛 상심(傷心)에 젖어 들어 여러 잔 술을 따르고 머뭇머뭇 노래를 읊조린다.
한낮과 저녁이 지나간다. 목청전(穆淸殿)으로 갔다. 태조(太祖)가 잠시 머무르시던 곳인데 비석이 있고 금상의 어필이 있다. 비석은 권(權)이 제작하고 오(吳)가 쓴 것이다. 경덕궁과 같다.
*목청전 : 조선시대 국조인 태조의 초상화(어진)를 봉안하고 제사 지내던 외방진전 중의 하나다. 개성에 있던 태조 옛집에 세워져 태조 진전으로 기능하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1899년 황실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복구되었다가 1907년 칙령으로 폐지되었다.
이십여 리를 가서 보봉산(寶鳳山)에 있는 화장사(華藏寺)에 들어섰다. 몹시 아름답고 먼 데까지 바라보인다. 천마산(天摩山), 성거산(聖居山) 그리고 용과 호랑이 같은 송악산(松岳山)이 앞에 나열해 있고 서쪽에는 또 바다가 보인다.
고적 폐엽경(貝葉經/폐다라 옆에 바늘로 새긴 불경)이 있고, 당항목(栴檀) 강진(降眞)향 등 두 개의 향과 고려 시대에 지은 나한전이 있고, 또 작은 암자도 있는데 공민왕(恭愍王) 화상을 안치해 놓았다.
승(僧) 취한(翠閑)이 한 권의 책을 가지고 오는데 방문객의 이름이 적힌 책이다. 을묘년(1675년)에 아버지(李泓)와 김농암(金農巖/金昌協)이 함께 유람와 머루르신 것이 방명록 중 여명(余名) 아래쪽에 적혀 있었다.
◇ 8월 17일
비에 막혀 숙소에 있었다.
◇ 8월 18일
절 서북쪽 언덕을 넘는다. 연암(緣巖)으로 내려가 영취산(靈鷲山)에 도착하여 현화사(玄化寺)에 이르렀다. 이미 창고로 쓰는 건물은 폐가가 되었고, 비석이 있는데 주저(周佇)의 문장이고 채충순(蔡忠順)의 글씨다.
현화사에서 십여 리를 가서 산성의 남문에 들어섰다. 문(門) 위에 올라 조망하니 산의 중앙에 대흥사(大興寺)가 있고 자못 광활하다.
조금 쉬고 박연폭포를 방문했다. 높이가 40장이고 위아래로 못(淵)이 있는데, 위에 있는 못이 박연(朴淵)이고 아래에 있는 못은 고연(姑淵)이다. 박연폭포 중앙에는 바위가 정 중앙에 놓여 있는데 작은 소나무가 그 정수리에서 자라고 있었다. 고연의 서쪽에는 작은 산 기슭이 굽이굽이 이어 안아 폭폭를 향하고 있다.
유람자를 보호하기 위해 새로 지은 작은 정자를 폭포를 관광하는 장소로 잡았는데, 뗏목이 뜨듯이 납작하다. 유수(留守) 김창집(金昌集)이 건립/한 곳이다.
못 조금 동쪽에 석각이 있는데 낭선군(郞善君) 글씨로 이백(李白)의 여산폭포시(廬山瀑布詩) 14자가 새겨져 있다.
해가 넘어간다. 못(淵) 동쪽에 판판한 바위가 있고, 운흥사(雲興寺)의 뒷 봉우리로 올라가 높은 곳에서 못 위아래를 내려다보니 또 하나의 기이한 것이 보인다. 못이 구름에 들어 흥겹게 잠을 자고 있다.
*주저(周佇) : 고려 목종, 헌종 때의 문신(?~10240. 중국 송나라 사람으로 목종 때에 귀화 하였다. 예부 상서를 지냈다. 행서(行書)를 잘 쓰고 문장에 능하여 교빙과 사명(辭命)의 대부분을 주관하였다.
*최충식(최충식) : 고려 현종 때의 재상
*낭선군 이우(李俁) : 조선의 서화가. 조선 선조의 손자, 인흥군(인흥군)의 아들, 자는 석경(碩卿), 호는 관란경(觀瀾亭) 이름은 우(俁). 소년 시절부터 글씨에 능했다. 2차에 걸쳐 청(淸)에 사신으로 파견되고, 국사에 진력했다. 왕손으로 문인·아객(雅客)들과 친하여 필묵으로 세월을 보냈다.
◇ 8월 19일
다시 박연폭포로 내려와 폭포를 관람하고 달빛을 받으며 돌아와 관음굴(觀音窟)에서 유숙했다.
◇ 8월 20일
태종대(太宗臺)를 지나 보현봉(普賢峯)에 올랐다. 태종대왕께서 나들이하는 도중 거가(車駕)를 잠시 멈추고 머무르시던 땅이다. 마담(馬潭)에 도착했는데 꽤 좋은 폭포가 있다.
대흥사(大興寺) 앞에 있는 기담(妓潭)에 도착했는데 역시 아름답다.
서쪽으로 10리를 가서 은선암(隱仙庵)에 도착하여 조금 휴식을 취했다. 이날은 바람이 심하고 구름과 안개로 어두컴컴하다. 운무는 산봉우리를 삼켰다 토했다하며, 높은 곳에 올라 먼 곳을 바라보는 것이 불가하다.
운무(雲霧)가 그치자 드디어 만경대(萬景臺)에 도착했다. 대방암(臺傍巖) 틈을 따라 적조암(寂照庵)을 방문했다. 산의 기이한 봉우리 십여 개가 앞뒤로 나열되어 있다. 기이한 형태가 서로 다른 상태로 말로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이산의 기묘한 경치다. 이 절과 더불어 박연폭포를 어찌 산법으로 계산할 수 있겠는가.
◇ 8월 21일
아침에 일어나니 바람이 잔다. 산 위에는 한 점의 구름도 없고 이에 서문(西門)으로 오른다. 만경대를 지나 보현봉(普賢峯)에 오르니, 이 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다. 사방이 산천이고 안 보이는 곳이 없다. 삼각산, 마미산 등 여러 산, 한강, 임진강, 벽란도, 서해 등 손가락으로 가리켜 돌아보는 곳에 있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산속은 청량(淸涼)하다.
무리 진 봉우리에 빛이 머무르고, 좌우가 고리 져 돌아온다. 의기양양하고 두 손을 마주 잡고 읍하는 형상. 멀고 가깝고 높고 낮은 산…‥
붉은 나무들이 비단 수를 놓은 것 같다. 청청한 소나무와 푸른 전나무 종종 잡목이 서 있고 거의 산 초입과 중간의 풍경이다. 이에 구름에 기대어 휘파람을 불며, 바람에 임하여 노래를 부르고, 돌에 의지하여 술을 마신다. 그대가 돌아와 취할 때까지 암자에 적멸(寂滅)이 지나간다.
담장에는 불경 글자(범어)를 새겨놓았다. 배움이 없는 곳은 곧 구름을 쌓는 것과 같다. 암자 앞에 작은 길을 따라 대흥사(大興寺)로 내려간다. 절 앞에 있는 계곡 위를 배회했다. 대흥사까지 말을 타고 내려가 못(潭)에서 내렸다. 날이 저물어 대흥사에서 숙박했다.
◇ 8월 22일
대흥사에서 하산하려고 하는데 밤중에 갑자기 큰 비가 내렸다. 나와서 보니 시냇물이 매우 불어나 있어서 마침내 다시 박연폭포를 가게 됐는데, 앞 전의 수량보다 3, 4배가 크게 불어났다. 곧장 달려가서 연심(淵心)에 이르니 참으로 장관이었다.
성으로 들어가 용천사(龍泉寺) 견장대(見將臺)에 도착했다. 남문을 통과하여 서쪽과 남쪽 골짜기를 따라 오관산(五冠山)을 넘어 영통사(靈通寺)에 도착했다. 화담 상류다. 깊고 두텁고 광활하게 뚫린 골짜기다.
저녁때 화담(花潭)으로 내려갔다. 백석담(白石潭)을 지나는데 빼어나게 아름답다. 절반을 가니 날이 이미 저물어 길이 혼미하고 어둡다. 깊은 샘에서 물이 갈라져 나가는 물소리, 괴이한 새들이 때때로 우는 소리, 밤은 깊어가고 서원에 도착하여 숙박했다.
◇ 8월 23일
아침에 담(못)위로 나갔다. 하나의 바위가 산기슭을 둘러싸고 있는 못 극히 그윽하고 조용하다. 담 북쪽에 바위가 있는데 평평하고 넓어 앉을 수가 있고 못 위에 있는 정자에는 잠시면 갈 수 있다. 이에 물을 따라 또는 물을 거슬러서 오르락 내리락 하며, 생각 따라 적절히 하면 된다.
서원에 들어가 화담(花潭)과 사암 박순(思菴 朴公淳)을 뵙는다. 초당에는 허엽(許公曄)이 계시고 습정(習靜) 민순(閔公純)의 위판이 있다. 화담(花潭) 묘에 오르니 신도비(神道碑)가 있다. 박민(朴公民)이 올린 글이며, 석봉(石峯) 한호(韓濩)의 글씨다.
한낮에 말을 타고 송도로 향했다. 귀법사(歸法寺) 터를 지난다. 석조(石槽)가 있고, 신관(新館)으로 들어가니 오산(五山) 차천로(車公天輅)의 기록이 있다.
선죽교(善竹橋)에 도착했다. 말에서 내려 포은 충절비를 읽고, 숭양서원(崧陽 書院)을 방문했다. 포은위판화상(圃隱位版畫像) 및 청음김상헌(淸陰金公尙憲)에 아뢴다. 잠곡 김육(潛谷 金堉) 위판에도.
해가 저물어 돌이켜 제릉(齊陵)에서 유숙했다.
*화담(花潭) 서경덕
*오산 차천로(五山 車天輅) : 조선 선조때의 시인으로 뛰어난 문장력을 지닌 큰 선비다. 일본국 통신사로 가서 며칠 만에 한시 5,000수를 지었다고 함
◇ 8월 30일(8월 23일에서 7일째)
해상에 있는 구암서원(龜巖書院)을 방문하여 율곡제사를 지냈다
*구암서원은 율곡을 배향한 곳으로 아버지 이홍과 스승인 농암이 1675년(숙종 1년)에 율곡의 위패를 모시는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방문했던 곳이다. 당시 농암(農巖)은 이러한 내용을 기록하고「서유기」라고 하였다.
◇ 9월 1일
제능(齊陵)을 출발하여 파주로 향했다. 임진나루에 도착하여 장능(長陵)으로 들어갔다. 참봉(參奉) 이우한(李友漢) 좌경(佐景) 장영여(張迎余)를 만나 참으로 기뻣고, 나는 천마(天摩)의 시를 써서 제출했는데, 시를 읽고 평가가 이루어졌다.
◇ 9월 2일
적벽(赤壁)을 유람하였는데 배를 타고 내소정(來蘇亭)으로 내려갔다. 정자는 자못 그윽하고 빼어났다. 조금 동쪽으로 강에 임하여 속칭 장암(場巖)이라고 하는 넓고 평평한 바위가 있다. 바위에는 박태보(朴公泰輔)의 시가 새겨져 있다.
배가 임진나루를 지나간다. 화석정(花石亭)에 오르니 곧 율곡이 거주하던 곳이다. 지극함을 넘어 승리한 우암이 있고 검은 돌에 그 기록이 있다. 율곡 방계혈족 이관(李綰) 이완주(李綄住)가 그러하다.
몇 리를 가서 또 영의정 조사석(趙師錫)의 수월정(水月亭)에 이르니 적벽(赤壁)이란 대개 이곳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20리를 가서 창량정(滄浪亭)에 도착해서 이곳에서 노닐었다. 흥이 일어 문득 술을 마시고 취한 후에는 소선(蘇仙)의 문장과 읍취헌(翠軒)의 시를 암송하며 종일토록 즐기면서 돌아올 줄 몰랐다. 비록 동산의 달과 피리 부는 객은 없지만 그 득의 함에 있어서는 소선(蘇仙)에게도 사양할 수 없었다」
밤이 깊어 강변에 작은 절에서 숙박했다. 절에는 북쪽으로 긴 포(浦 : 강이나 내에 조수가 드나드는 곳)가 있고 위쪽엔 야청빛(검은 빛을 띤 푸른빛) 바위가 있다.
*읍취헌(挹翠軒) 박은(朴誾) : 조선 연산군 때의 학자(1479~1504). 자는 중열(仲說). 호는 읍취헌(挹翠軒). 문장에 능한 재사(才士)였으며, 조선 시대의 으뜸가는 한시인(漢詩人)으로 꼽히기도 한다. 경연관으로 있으면서 유자광 등을 탄핵하다가 파직되어 갑자사화 때에 처형되었다.
◇ 9월 3일
또 배를 띄워 적벽으로 내려가 육지에 닿자 우계(牛溪)가 파평산 아래 옛날 거주했던 곳을 방문했다. 개천 골짜기는 넓고 평평하며 숲은 나무들이 빼곡이 무성하다. 실로 진실한 은자(隱者)의 거쳐다.
서원으로 들어가서 청송(聽訟) 우계(牛溪) 그리고 휴암(休菴) 백인걸(白公仁傑) 위판에 배알하고, 우계(牛溪)가 거처하던 장소에 서실 수간(數間)이 개천 위에 있는 것을 보고 우계 후손 성지예(成知禮)를 만나러 갔다.
배를 환승하여 내소정(來蘇停)으로 내려가 날이 저물어 집으로 돌아왔다.
◇ 9월 4일
경장(景張)과 함께 사포(沙浦)에 있는 반정(伴停)을 찾았다. 호수가 있는 십여리 앞에 고 황익성(古黃翼成) 희(喜) 정승의 정자 터가 있다. 서쪽으로 천마산(天摩山)이 보이고 동쪽으로 삼각산(三角山) 남쪽으로 문수산(文殊山) 월롱산(月籠山)이 보이며 시계가 대단히 광활하다.
숙박하는 집으로 돌아왔다.
◇ 9월 5일
경장(景張)과 함께 했다. 동쪽으로 이십여리를 가 자운서원(紫雲書院)에 도착하여 곧 율곡 묘로 내려가 율곡 사당에 참배했다.
가까운 곳에 검은 돌과 정자가 나란히 있고 동구(洞口)에 비석이 있다. 백사 이항복(白沙 李公恒福)이 짓고 동회 신익성(東淮 新公翊聖)이 쓴 것이다.
정원에 또 비석이 있다. 우암(尤菴)이 짓고 김수증(金公壽增)이 쓴 것이다.
함께 했던 경장((景張)과 헤어졌다. 경장은 집으로 돌아가고 나는 한양으로 되돌아왔다. 갔다가 되돌아 오는데 약 30일이 걸렸다. 시 약 28수를 얻었다.
*이규봉 견해
이상이 청년 정암이 25세에 쓴 서유기이다. 물론 그 후에 나오는 ‘속리산 유기’나 ‘동유기’에 비해 사물의 관찰이나 사유의 깊이가 다소 덜한 것은 사실이나, 선유(先儒)의 유적답사에 있어 의젓함과 공경심, 산수 자연의 탐방에 있어 마음과 경관이 함께 작용하여 일체를 이루는 성숙한 경지에 이른다. 개성 만경대를 지나 최고봉 보현봉(普賢峯)에 올라 조망하면서 쓴 문장(8월 21일)은 과히 뛰어난 작품이며 한 편의 장엄한 시(詩)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산속은 청량(淸涼)하다
무리 진 봉우리에 빛이 머무르고
좌우가 고리 져 돌아온다
의기양양하고 두 손을 마주 잡고 읍하는 형상
멀고 가깝고 높고 낮은 산
붉은 나무들이 비단 수를 놓고
청청한 소나무와 푸른 전나무
이에 구름에 기대어 휘파람을 불며
바람에 임하여 노래를 부르고
돌에 의지하여 술을 마신다
그대가 돌아와 취할 때까지
암자에 적멸(寂滅)이 지나간다.
흔히 정암은‘문장(文章) 보다는 경술(經術)에 더 명성이 있다.’고 말하지만 문장가로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전날 참봉(參奉) 이우한(李友漢)과 좌경(佐景) 장영여(張迎余)를 만나 배를 타고 적벽의 창량정(滄浪亭)에 도착하여, 흥이 일어 문득 술을 마시고 취한 후에는 소선(蘇仙)의 문장과 읍취헌(翠軒)의 시를 암송하며 종일토록 즐기면서 돌아올 줄 몰랐다. 비록 동산의 달과 피리 부는 객은 없지만 그 득의 함에 있어서는 소선(蘇仙)에게도 사양할 수 없었다」라는 문장도 참 재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