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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제록 강좌.
무비스님 - 불교는 쉽다. 5강 - 3 (2009. 06. 03)
13-3 無佛無衆生(무불무중생)
問(문), 如何是佛魔(여하시불마)오?
師云(사운), 儞一念心疑處(이일념심의처)가 是箇魔(시개마)니,
儞若達得萬法無生(이약달득만법무생)하면
心如幻化(심여환화)하야 更無一塵一法(갱무일진일법)하야
處處淸淨是佛(처처청청시불)이니라.
然佛與魔(연불여마)는 是染淨二境(시염정이경)이라.
約山僧見處(약산승견처)하면 無佛無衆生(무불무중생)하며,
無古無今(무고무금)하야 得者便得(득자변득)하야
不歷時節(불역시절)이요. 無修無證(무수무증)하며
無得無失(무득무실)하야 一切時中(일체시중)에
更無別法(갱무별법)하니 設有一法過此者(설유일법과차자)라도,
我說如夢如化(아설여몽여화))하노니 山僧所說(산승소설)이
皆是(개시)니라.
그렇지요. 마군이다ㆍ부처다ㆍ성인이다ㆍ범부다.
글쎄요. 그것을 초월한, 우리는 항상 그것을 염두에 둡니다. ‘아이고 뭐 우리는 중생이고’ 또 공부 많이 한 사람들은 도인이고ㆍ성인이고. 그렇게 나눌 일이 결코 아닙니다. 어릴 때 ‘아이고 어른들...’ 이렇게 했었는데 여러분 어른 되어보니 무슨 뾰족한 수 있나요? 그냥 사람일 뿐입니다.
어린 사람이나 나이든 사람이나 그냥 사람일 뿐입니다. 부처다ㆍ중생이다 하는 것도 역시 그렇고요.
問(문), 어떤 이가 묻습니다. 如何是佛魔(여하시불마)오?
“어떤 것이 부처인 마군인가?”
師云(사운), 儞一念心疑處(이일념심의처)가, 그대들의 한마음 속에, 나의 주장에 대해서 그 동안 그 이치에 대해서 의심하는 것이 是箇魔(시개마)니,
그것이 마군이다. 儞若達得萬法無生(이약달득만법무생)하면, 그대들이 만약
萬法無生을 통달한다면 萬法無生. 지금 현상적으로 우리가 분별하고, 헤아리고, 차별하고 하는 것은 정말 만 가지 차별도 더 있습니다.
그러나 만 가지 차별도 더 되지만 그 근원 자리는 아무런 차별이 없어요.
그래서 萬法이라고 할 것이 없어요. 그것이 萬法無生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우리가 지금 이야기 하는 소리를 듣는데 듣는 그 當體(당체). 그 당체는 나이가 젊다ㆍ늙다ㆍ남자다ㆍ여자다ㆍ유식ㆍ무식. 그것 전혀 관계없이 그냥 듣는 사실. 그것뿐이거든요. 그것은 萬法無生입니다.
지금 눈앞에 펼쳐져 있는 이런 차별 현상들. 우리가 지금 눈으로 사람들을 보면서 저 사람은 저렇게 생겼고, 이 사람은 이렇게 생겼고, 그런 만법의 차별들은 그 듣는다고 하는 사실에 있어서는 전부 소멸입니다.
완전 소멸입니다. 그것이 萬法無生입니다. 그것을 통달할 것 같으면,
그 내용을 알 것 같으면 心如幻化(심여환화)하야 마음은 환영과 같아서, 허깨비와 같아가지고서 更無一塵一法(갱무일진일법)하야 더 이상 一塵一法.
하나의 경계도, 하나의 법도 없어서 處處淸淨是佛(처처청청시불)이니라.
그 없는 그 자리를 굳이 말한다면 “그것이 부처의 경지다.” 라고 할 수가 있다. 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사실은 모순이 많지요.
然이나 佛與魔(연불여마)는 是染淨二境(시염정이경)이라.
그러나 부처와 마군이란 물든, 깨끗하지 못한. 그리고 깨끗한. 이 두 가지의 경계를 나눠 놓고 하는 소리다. 그것이 보통 일반 불교에서 하는 소리지만,
約山僧見處(약산승견처)하면, 산승의 견해에 의지해 본다면, 산승의 견해에 입각한다면 無佛無衆生(무불무중생)이여.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어,
無古無今(무고무금)이야, 古今이라고 하는 어떤 시간성도 전혀 없는 거여.
그럼 뭐냐? 得者便得(득자변득)이야, 보고 듣고 느끼고 알고 하는 그 사실. 그것이 그냥 있을 뿐이다. 得者便得. 얻을 得도 “한다.” 하는 뜻입니다.
하게 되면“곧 하는”
듣게 되면 “곧 듣는.”
보게 되면 “곧 보는.”
느끼게 되면 “곧 느끼는.”
알게 되면 “곧 아는”그 사실을 전체적으로 표현하려면 得者便得. 그래요. 오직 그것뿐이지요. 그것은 뭡니까?
不歷時節(불역시절)이여. 시간ㆍ공간ㆍ남ㆍ여ㆍ노ㆍ소의 차별이 전혀 없는 것이지요. 시절을 지내지 아니하며, 無修無證(무수무증)하며 無得無失(무득무실)하야, 그것은 닦는다ㆍ증득 한다ㆍ깨닫는다ㆍ얻었다ㆍ잃어 버렸다ㆍ수행을 못해서 우리는 얻지 못 했다ㆍ수행을 많이 했으니까 얻었다. 그것이 해당될 자리가 아닙니다. 그래서 無修無證 無得無失입니다.
이, 우리 선불교의 전통은 끊임없이 不歷時節 無修無證(불역시절 무수무증)이라고 말을 하는데도, 닦고 증득하는 일에 대해서 너무 집착을 많이 하고 있어요. 거기다가 어떤 목표를 설정을 딱 해놓고, 오랜 세월동안 아무런 답도 얻어내지 못하는 그런 어떤 문제를 설정을 해놓고, 거기서 답을 구하려고 합니다. 답은 얻은 적은 없어요. 이것이 무슨 無證입니까? 수행도 필요 없고 증득하는 것도 없는 겁니다. 그것이 존재할 까닭이 없습니다.
그러면 뭐 얻었다 얻지 못했다 하는 것이 있을 까닭이 있습니까?
이런 정도는 저~기 아주 수준 낮은 금강경에서도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無得無失分(무득무실분). 무득무실 분 있지요? 거기는 무득무설 분. 說(설)이라고 했지요. 얻은 바도 없고 설한 바도 없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성취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라고 하지만, 얻은 것이 어디에 있어요? 어디 뭐 뿔이 하나 난 것도 아니고, 혹이 하나 더 생긴 것도 아니고요. 아무 것도 없잖아요. 뭐가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본래 갖추고 있는 기존의 것. 그것이 지극한 복이고, 그것은 至福(지복)이지요. 그야말로 그것은 지복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至道(지도). 지극한 도고요. 그것이 완전무결한 도지요. 그것이야말로 완전무결 합니다. 뭘 만들고ㆍ수행하고ㆍ조작하고ㆍ닦고ㆍ쌓아올리고ㆍ장엄하고 하는 것은 전부 엉터리입니다. 엉터리이고 그것은 금방 변하고 무너지는 것입니다.
一切時中(일체시중)에 更無別法(갱무별법)하나니, 모든 시간 속에 더 이상 달리 특별한 법이 없다. 특별한 법이 없다.
設有一法過此者(설유일법과차자)라도, 설사 어떤 한 법이, 보고ㆍ듣고ㆍ느끼고 알고 하는 이 사실을 지나가는 뭐가 하나 있다 손치자.
있다하더라도 그것을 나는 我說如夢ㆍ如化(아설여몽여화). 그것은 꿈같고 환화와 같은 것이라고 말하겠다 나는... 그냥 허깨비야. 설사 보고 듣고 느끼고 알고 하는, 제가 이렇게 말하고 여러분 듣고 하는 이 사실. 이것이 전부인데, 만약에 누가 이것보다 더 지나가는 더 우수한 어떤 이치가 있다 손치더라도 나는 그것을 꿈이요 허깨비라고 나는 자신 있게 말하리라 이런 뜻입니다.
山僧所說(산승소설)은 皆是(개시)니라. 내가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것뿐이야. “이것이 전부야, 내법은 이것이 모두야.” 참 간단하면서도 정말 의미심장하고, 하실 이야기 다 하고, 그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아주 편안하게 해줍니다. 편안하게 해줘요. ‘아~, 그것이 무슨 뜻인가? 무슨 뜻인가? 정말 알듯, 알듯하면서도 모르겠다.’ 이런 사람들은 틀림없이 공부 많이 한 사람들입니다.
‘알듯, 알듯하면서도 모르겠다.’ 정말 그런 것 같은데도 아직도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다는 사람들은 틀림없이 공부 많이 한 사람들입니다. 거기서 한 걸음 더 공부하면 이제 그것이 이해가 될 것이고, 아니면 그 이전에 있는 사람은 이해하기가 더 쉬워요. 공부라고 하는 것이, 공부라고 하는 것이 자꾸 덕지덕지 뭐가 때가 묻어가지고, 때를 묻히는 것 하고 비슷해요.
때가 묻어가지고서 오히려 그 진실을 드러내는데 아주 장애가 됩니다.
이것은 어떤 사물을 공부하는 일 같으면, 공부를 쌓아가는 것이 덕이 되고 효과가 있겠지만, 이것은 나의 실체를 아는 것이기 때문에, 실체는요?
정말 뭔가 지식이라든지, 경험이라든지 이런 것들이 쌓이면 쌓일수록 그것이 덕지덕지 때가 눌어붙는 것하고 거의 비슷합니다. 그래서 “아는 것이 병이다.” 그런 표현도 쓰는데요. 그렇습니다.
13-4 通貫十方(통관시방)
道流(도류)야,
卽今目前孤明歷歷地聽者(즉금목전고명역역지청자)가
此人處處不滯(차인처처불체)하고 通貫十方(통관시방)하야
三界自在(삼계자재)하야 入一切境差別(입일체경차별)호되,
不能回換(불능회환)하나니 一刹那間(일차나간)에
透入法界(투입법계)하야 逢佛說佛(봉불설불)하며
逢祖說祖(봉조설조)하며 逢羅漢說羅漢(봉나한설나한)하며
逢餓鬼說餓鬼(봉아귀설아귀)하야 向一切處(향일체처)하야
游履國土(유리국토)하야 敎化衆生(교화중생)호되
未曾離一念(미증이일염)하고 隨處淸淨(수처청정)하야
光透十方(광투시방)하야 萬法一如(만법일여)니라.
道流야, 卽今ㆍ目前ㆍ孤明ㆍ歷歷地聽者(즉금목전고명역역지청자)
지금 바로, 卽今 하는 것은 우리 “卽席(즉석)” 하듯이 卽席. 즉석에서 뭐 되는 음식이 있지요? 바로 그 자리에서 앉은 자리에서, 卽今이라고 하는 것은, 지금이라고 하는 말보다도 더 현재, 정말 지금 절대 현재를 표현할 때, 卽今그럽니다. 바로 이 순간. 여기에서, 目前에, 눈앞에서 오직 이것뿐인 孤明. 오직 이것만이 존재하는, 그리고도 그 존재성이 歷歷地, 너무 확실하고 너무 분명 해, 그 분명한 사실, 분명한 능력으로써 듣고 있는 그 당체. 참 아주 표현이 잘 되었어요.
卽今ㆍ目前ㆍ孤明ㆍ歷歷地聽. 역력하게 듣고 있는 그 사람. 此人處處不滯(차인처처불체)하고, 이 사람이 곳곳에서 불체하고, 어느 곳에서든지 막히지 아니하고 通貫十方(통관시방)이야. 시방세계를 완전히 꿰뚫고 있다. 그래서 三界自在(삼계자재)하야, 三界, 욕계ㆍ색계ㆍ무색계에서 자유자재여. 入一切境差別(입일체경차별). 일체 차별된 경계에 들어가도 不能回換(불능회환)하나니, 그 차별된 경계가 능히 바꾸지를 못해. 回換하지를 못해.
바꾸지를 못해. 오로지 그 당체로써, 오직 나는 나로서 존재할 뿐이다 하는 것입니다.
다행히 그러니까 우리가 사실은 자기를 망각하지 않고 제대로 집도 찾아가고, 잠 오면잠도 자고, 또 때가 되면 일어나서 옷도 갈아입고 세수도 하고 밥도 먹고, 바로 그 물건이 있어가지고 그렇게 하는 겁니다.
만약에 어떤 경계. 차별된 경계에 완전히 빼앗겨 버린다면, 완전히 빼앗겨 버린다면 그것 그렇게 못하지요. 대개 어떤 雜技(잡기)에 빼앗긴 사람들은 밤이 가는지 낮이 가는지 모르고 살잖아요. 그런 사람들 많지요.
세상에 그런 일이 많잖아요. 정신 차리지 못하고 정신을 완전히 빼앗기고 사는 사람. 그래서 일체 경계에, 차별에 들어가더라도 그래도 그 주인공이 있어서 능히 그 경계와 바뀌지 아니하고,
一刹那間(일차나간)에 透入法界(투입법계)하야, 법계에 들어가서, 저 깊숙이 법계 속에 들어가서, 逢佛說佛(봉불설불)하고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이야기하고, 逢祖說祖(봉조설조)하며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이야기하며, 逢羅漢說羅漢(봉나한설나한)하며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이야기하며, 逢餓鬼說餓鬼(봉아귀설아귀)하야 아귀를 만나면 아귀를 이야기하고, 그래서 向一切處(향일체처)하야 일체처를 향해서,
游履國土(유리국토)라. 일체처를 향해서 국토에 노닌다. 그러면서
敎化衆生(교화중생)이여. 중생을 교화한다.
이것은 무슨 “교화” 하니까 설법을 해가지고 사람을 어떻게 선량하게 바꾸어 놓고 하는 그런 것이 아니고, 공부하는데 오면 공부하고, 또 뭐 집으로 돌아가는 일이 있으면 돌아가게 되고, 또 뭐 사업상의 일을 만나면 또 일을 하고, 그것이 敎化衆生입니다. 상황 따라서 자유자재하게 막히지 아니하고 걸리지 아니하고, 그 상황을 다 잘 맞이해서 나아가는 것.
敎化衆生(교화중생)하되 未曾離一念(미증이일염)하고, 일찍이 한 생각도 떠나지 아니하고, 隨處淸淨(수처청정)해서 어디 있든지 툭~ 터져 시원 해.
隨處淸淨이여, 어느 곳에서든지 청정해서 光透十方(광투시방)하야 시방세계를 그 빛이 꿰뚫고 있어, 그래서 萬法一如(만법일여)라. 따지고 보면 이 한마음 이것뿐이지요 뭐. 이것이 꽉 차 있는 겁니다. 그래서 孤明이라고 그래요.
외로울 孤자 밝을 明자. 이것만이 존재한다. 이것만이 밝다 이 말입니다.
세상 아무리 복잡하고, 서울거리가 아무리 복잡하고, 사람이 많고 건물이 많고 차가 많다 하더라도 그것은 내 의식에 의한 하나의 반영입니다. 내 마음의 한 반영이지, 그림자지 그것이 별거 아니라고요.
오직 있는 것은 나만 있어요. 孤明이라고요. 정말 이 우주의 크기만치 각자의 나는 그렇게 있습니다. 그래서 光透十方(광투시방)해서 빛이 시방을 꿰뚫어서 만법이 한결같다.
13-5 本來無事(본래무사)
道流(도류)야 大丈夫兒(대장부아)가
今日方知本來無事(금일방지본래무사)로다.
祇爲儞信不及(지위이신불급)일새 念念馳求(염념치구)하야
捨頭覓頭(사두멱두)하야 自不能歇(자불능헐)하나니라.
如圓頓菩薩(여원돈보살)이 入法界現身(입법계현신)하야
向淨土中(향정토중)하야 厭凡忻聖(염범흔성)이라.
如此之流(여차지류)는 取捨未忘(취사미망)하고
染淨心在(염정심재)니 如禪宗見解(여선종견해)는,
又且不然(우차불연)하야 直是現今(직시현금)이요
更無時節(갱무시절)이니라.
山僧說處(산승설처)는 皆是一期藥病相治(개시일기약병상치)요
總無實法(총무실법)이니, 若如是見得(약여시견득)하면
是眞出家(시진출가)라 日消萬兩黃金(일소만양황금)하나니라.
道流야 大丈夫兒(대장부아)가, 도류야 대장부는
今日方知本來無事(금일방지본래무사)로다. 大丈夫兒가 今日에 바야흐로 本來無事한, 본래 아무 일이 없는 것을 비로소 알겠다. 뭐 수행을 해서 어떻게 한다. 잔뜩 한다, 한다. 해야 된다, 해야 된다라고 하는 것. 그것 아무 쓸데없는 일이라고 하는 사실을 오늘에야 비로소 알게 됐다. 이제 임제록 공부하면 천근 만 근의 짐을 다 내려놓는 겁니다. 더 이상 갈등할 필요 없어요.
무슨 어디 가서 복 못 지어서 ‘아이구 복을 지어야 되는데, 어디 가서 참선도 해야 되는데, 아~ 이번에 빠져가지고 어쩔꼬?’하는 그런 갈등할 필요 없어요. 본래 일이 없는 겁니다. 그것 해봤자예요. 해봤자 그 자리라고요. 천년 만 년 해봤자 역시 그 자리입니다.
行行本處(행행본처)요 至至發處(지지발처)라는 그런 말이 있지요.
우리가 수행을 하고 온갖 천신만고를 겪어가면서, 무슨 고행을 하고ㆍ난행을 하고ㆍ6바라밀을 닦고ㆍ참선을 하고ㆍ용맹정진을 하고ㆍ잠이 오면잠을 쫓으려고 목에다 줄을 매달아 가지고 잠을 쫓아가면서 칼을 앞에다 세워놓고, 칼로써 무릎을 찔러가면서 그렇게 수행을 모질게 해봐야 行行本處입니다. 본래 그런 것을 아무 것도 하지 않던 그 자리입니다.
行行本處. 행하고 행해봐야 본래의 그 자리더라. 하지 않던 본래의 자리. 至至發處입니다. 그렇게 온갖 수행을 다 동원해서 이르고 이르러가 봐야 출발하던 그 자리다. 한 걸음도 떼기 이전 출발하던 그 자리다.
至至發處. 이르고 이르러 봐야 본래 그 자리입니다. 누가 어떤 성공을 거뒀다 하더라도, 그냥 그 사람이 뭡니까? 사람일 뿐입니다. 이 사실을 아는 겁니다. 우리는 너무 허황된데, 환영에 사실은 사로잡혀 있어요. 그것이 사람이 살아가는 하나의 꿈이 될는지는 몰라도, 정말 최상의 그 어떤 안목을 가진 이런 임제 스님의 눈에서는 그런 것이 정말, 저~ 유치원생들의 소꿉장난에 불과한 것이다. 이렇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동안, 저로부터 여러 불자님들이 다 잘 알고 있는 그 오매불망. 수행을 많이 해야 되는데ㆍ공덕을 많이 닦아야 되는데ㆍ복을 많이 지어야 되는데ㆍ어디 가서 주말참선도 해야 되는데ㆍ언젠가 내가 한 번 아이들 문제도 다 해결되고, 내가 하던 일도 어느 정도 정리가 되면 꼭 나도 어디 들어가서 용맹정진도 한 번 해볼 것이고, 어떤 스님들처럼, 아니 스님들 이상으로 내가 아주 독실하게 한 번 수행을 해볼 것이다 하는 그런 허황된 꿈을 많이 가지고 있지요? 허황된 꿈을...
行行本處입니다. 그렇게 했다손 칩시다. 했다손 치더라도 하기 이전하고 하나도 다른 것이 없습니다. 하나도 다른 것이 없어요. 우선 저만 보더라도 그래요. 저만 보더라도... 뭔가 달라지는 것이 있다면 이 자리에 와서 저 뿐만이 아니라, 많은 스님들. 훌륭한 스님들. 뭔가 다른 것이 있어야 될 것 아닙니까?
다른 것이 있어야 될 것 아닙니까? 다른 것이 없다 이 말입니다.
60ㆍ70ㆍ80되었으면 그래도 뭔가 달라졌어야 될 것 아니냐고요?
그것이 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달라질 수가 없는 겁니다. 괜히 허황된 꿈꾸지 말고 그냥 살던 대로 사세요.
옆의 사람만 힘들게 하지 말고요. 行行本處입니다. 그렇게 해봐야 본래의 자리입니다. 행하지 않던 본래의 자리이고, 설사 나아가고 나아가서 이르렀다손 치더라도, 어디에 이르렀다손 치더라도 至至發處입니다.
출발한 그 자리입니다. 이 禪語(선어)에는요? 선어에는, 선문학은 아주 깜짝깜짝 놀라울만한 그런 명언들이 아주 많습니다. 그래서 이런 공부에 재미를 붙이는 것. 그것은 좋아요. 재미를 한 번 붙일 만은 합니다.
이런 데에 재미를 붙여 놓으면 다른 무슨 세속 공부 재미없어서 맛을 못 느끼지요. 직업상 먹고 살기 위해서는 할지 몰라도, 재미로서는 아마 못할 겁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이 선의 세계는 인도의 천재성과 다시 말해, 불교의 천재성과 중국의 천재성. 중국은 뭡니까? 중국을 대표하는 것은 도교ㆍ유교입니다. 도교나ㆍ유교의 천재성이 만나서 결혼을 해가지고, 새롭게 탄생된 전혀 새로운 세계입니다 선은... 그러기 때문에 인류가 아무리 앞으로 정신이 발전한다 하더라도 선 이라고 하는 이 세계보다 더 이상 가는 세계는 기대하기 어려울 겁니다. 미래의 일이니까 장담은 못하겠지만 사실 그래요. 왜인가 하니, 제가 임제록 서두에도 말씀드렸지만 "임제이전에 임제 없고 임제이후에 임제 없다." 그랬는데, 선불교가 임제에 와서 절정을 이루고, 그 이후부터는 쇠퇴합니다.
임제 이후부터는 계속 쇠퇴해요. 그래서 별의별 무슨 묵조선이니ㆍ간화선이니 하는 방법을 동원을 해서 임제선의 그 절정을 그 맛을 한 번 느껴보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지요. 그래서 아 그냥 정말 피나는 정진을 하고, 저~ 고봉에 獨宿(독숙)하면서 높은 봉우리에서 수십 년을 홀로 먹고 자고 하면서 피나는 정진을 해보는데, 그 노력은 결국은 이 임제선의 경지를 맛보려고 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참 이 경지는요. 대단한경지입니다. 사실 저도 이것을 100% 제대로 느껴서 100% 전달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은 못 되고, 그저 제 깜냥대로만 이해하고, 제 깜냥대로만 전하는 것이 사실은 좀 유감입니다만, 사실 이 선의 세계라고 하는 것은 정말 인류가 만들어 낼 수 있는 최고의 어떤 세계를 창조해 냈다. 이렇게 봅니다. 그래서 인도의 천재성과 중국의 천재성이 만나서 새롭게 창조해낸 세계다. 이런 표현을 말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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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_()()()_
行行本處 至至發處 ~~~본래 그 자리로다. 대원성보살님, 고맙습니다._()()()_
고맙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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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듣고 느끼고 알고 하는 그 사실. 그것이 그냥 있을 뿐.........대원성 님! 고맙습니다.._()()()_
得者便得..._()()()_
본래그자리라... 다시 유치원의 파란불에 통과,빨간불에 정지로 돌아가는가? 시처방편지만 廣修하고 시처行善이라.
...()()()...
본래의 그자리..._고맙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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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行本處 至至發處 ..._()()()_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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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배 올립니다
감사합니다. _()()()_
괜히 허황된 꿈꾸지 마세요 行行本處요 至至發處니 이것 알면 천근 만근 짐을 다 내려놓는 것입니다
行行本處 至至發處
行行本處 ..至至發處..本來無事.. _()()()_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지전
無修無證 無得無失 ... _()_
一切時中(일체시중)에 更無別法(갱무별법)하나니...모든 시간 속에 더 이상 달리 특별한 법이 없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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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行本處
至至發處
고맙습니다_()_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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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行本處 至至發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