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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기명
조회 : 11 |
산비탈에 쏟은 여인의 집념
경북 청도군 각남면 옥산 1동 부녀지도자 곽 영 화
1. 신혼의 단 꿈이 깨기 전에 찾아온 불행 저는 1942년 4월에 서울에서 태어나 한강을 굽어보면서 5남매의 맏이로 곱게만 자랐습니다. 부자에 속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러나 비교적 규모 있고 짜임새 있는 생활이었습니다. 특별히 기대와 관심을 쏟으시는 양친의 사랑을 받으면서 부푼 꿈을 가지고 법학과를 나온 무녀 독남 외아들하고 결혼을 했습니다. 신혼의 단 꿈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즐겁기만 했고 장차 법관이 되겠다고 하는 남편의 뒷바라지에 온갖 정성을 기울이면서 안일한 생활을 해 나갔습니다. 그러나 그 안일하고 영원한 꿈은 잠시뿐이었고 충격과 긴장의 소용돌이 속에서 역경의 과정을 밟게 될 줄이야 꿈엔들 생각했겠습니까? 1년이 지난 어느 날 남편은 부산에 내려가 근무를 하게 되었고 항상 신병으로 고생하시는 시부모님과 그리고 저와 어린 것은 서울 약수동 시댁에서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부산에 간지 채 한 달도 못되어 남편은 불의의 변을 당하여 피투성이가 된 채 바닷물에 던져졌고 4부두 뱃사공들에 의해서 발견되었습니다. 뜻밖에 전보를 받은 우리 가족들은 허겁지겁 관리국을 찾아 갔지요. 마음속에 요행을 바라면서 부둣가에 가서 확인한 결과 틀림없는 나의 사랑하는 남편이었습니다. 얼굴은 깨져 피투성이가 되고 오른쪽 눈알은 튀어 나왔고 손과 발에는 핏자국이 맺힌 채, 정말 어처구니없는 형상이었습니다. 수사기관에서 아무리 수사를 해 보았지만 이렇다 할 아무런 단서도 잡지 못한 체 자꾸만 시일이 지나갔으니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은 걷잡을 수가 없었으며 만 가지 회포가 회오리바람 일어나듯 무섭게 마음을 어지럽혔습니다. 연애과정을 통해 오직 사랑으로만 얽혀진 우리 사이에 이별이란 공포의 장벽이 가로막고 있느니 애타게 보고 싶고 그리워지는 마음을 무엇으로 달랠 수 있겠습니까! 내 가슴속 깊이 간직한 모든 꿈은 산산이 깨져 버렸고 인간 대열에서 패배자가 되어버린 초라한 몰골과 남편의 보기 흉한 시체덩어리만이 내 차지가 된 후 여러 날이 지나서야 익사라는 석연치 않은 판명을 내리니 할 수 없이 관리국 측의 주선으로 장례식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남편을 화장터 불구덩이에 집어넣고 두 살 난 어린 것을 안고 허탈한 마음으로 나의 전부를 보냈던 서울의 생활을 청산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눈물은 앞을 가리고 가슴은 터질 듯 아팠으나 어쩔 수 없는 운명이기에 가사를 정리해서 시부모님을 따라서 시조부 양위분이 계시는 고향으로 내려 왔습니다.
2. 낯설고 물 설은 농촌생활 고향집이라고 처음 와서 보니 논 100평뿐이고 이것도 제대로 지을 줄을 몰라서 병충해가 다 먹어 버리고 남는 것은 싸라기 한두 말 정도뿐이었습니다. 그런데다가 시조부님께서 술로만 살아가시고 시조모님 역시 중병으로 앓고 계셨으니 말이 좋아 고향이지 나에게는 전혀 낯설고 물 설은 곳이었습니다. 정말 답답한 마음은 풀길이 없으며 남편을 잃은 슬픔보다는 환자를 보살피는데 신경을 써야 했고 마음에 안정을 얻기보다는 오히려 생활의 위협이 엄습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나는 묵묵히 가난과 고독 속에서 체념해서 살아야만 했지요. 야속하기 짝이 없는 가난 때문에 면사포마저 써보지 못한 채 시련의 나날만이 연속되는 가정을 지켜야 했고 피로와 고뇌에 지쳐버린 연약한 육체로써 시아버님과 시조모님 두 분 환자를 간호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온갖 상념이 머리를 어지럽게 하지만 불쌍한 어린 것의 장래를 위해서는 굳은 결심과 각오를 새롭게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생활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좋을지 몰라 직장이라도 다닐까 하였으나 시아버님께서는 절대 반대하시면서 집에서 어린 것이나 잘 키우라고 하시니 그럴 수도 없고 생활을 이어가야 되니 시어머님께서 서울 가서 장사라도 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서 걷잡을 수 없이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씻으면서 마지막 소망을 어린 손자한테 걸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재촉하여 서울 약수동 시장으로 떠나셨습니다. 「다라이」로 채소 등을 사서 시장거리에서 팔려면 단속 나온 구청직원들에게 발길로 차이고 내동댕이쳐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이럴 때마다 탄식하며 슬프게 우시는 시어머님, 한 사람의 생사가 이렇게 큰 영향을 미치게 될 줄이야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시어머님께서 보내주시는 적은 수입으로 그날그날의 생활을 이어가던 중에 시조모님의 병세는 더욱 악화되어서 결국은 자리에 누운 체 바지에다 대소변을 받아내게 되었습니다. 매일같이 환자를 씻겨드려야 하고 하루에도 몇 차례씩 대소변을 받은 바지를 빨아야만 했으며 미음을 쑤어서 끼니마다 환자의 입에 떠 넣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쉴 사이 없이 환자의 팔다리를 주물러 드리고 옆에 앉아서 밤을 새워야만 하는 온갖 고초와 허다한 괴로움을 겪는데도 시조부님께서는 병시중을 잘못 해 드린다고 역정을 내시며 소리를 지르시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시아버님께서는 심장병 증세로 진통을 겪고 계시니 평생에 병시중을 처음 하는 나로서는 정말 힘든 생활이었습니다. 삶이 이토록 어렵고 고되다는 것은 꿈이 부풀었던 학창시절에는 전혀 상상도 못했고 인생을 단지 아름답게만 보아왔던 과거의 철없는 시절을 다시 한 번 뉘우치며 배고파 보채는 어린 것을 껴안고 구석구석 다니면서 한없이 울기도 하였습니다. 70년 1월 시조모님께서 결국 병환으로 세상을 떠나셨고 나는 마지막 가는 영혼을 위해서 있는 정성을 다했다고 생각하며 그것은 정말 가치 있고 보람 있는 일이었다고 봅니다. 장례를 대소가 친척들의 주선으로 무사히 치렀고 나는 남은 가족을 위해서 희생할 것을 결심했으며 내 가정에 더 이상의 비극을 초래하지 않기 위해서는 내 문제는 내 스스로 해결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강한 자존심을 무기로 경제생활의 패배감을 억누르면서 인생의 낙오를 벗어 버리기 위해서 일복을 차려 입었습니다. 며느리로서의 책임과 어머니로서의 사명을 다하기 위함이었으며, 또한 종갓집 종손부로서의 체통을 지키기 위해서는 진정 무엇인가 해야만 했습니다. 재산이라고 해봐야 아무도 거들떠보지도 않는 황무지 같은 돌산이 하나 있을 뿐이고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산이 하나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반가웠어요. 만약 그 산이 토질이나 좋고 평지에 있는 좋은 것이었다면 오래전에 팔아 쓰셨지 내 차례까지 오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3. 산비탈에 쏟은 집념 나는 기쁜 마음으로 그 산을 개간하기로 결심을 했지요. 나의 뼈가 부서지고 살이 찢어지는 처참한 꼴이 된다고 할지라도 죽음을 각오하고서 완전히 “나”라고 하는 것을 잊어버리기로 했습니다. 이렇게 마음가짐을 정리하고 보니까 모든 것이 새로워지는 것만 같았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 내려서 앞자락을 흥건히 적시고 있었습니다. 나는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어서 손에 연장을 찾아 들었으니 마음은 이미 각오가 되었기에 거뜬히 나설 수가 있었습니다. 인제 개척자의 대열에 끼게 된 것을 자랑으로 여기면서 산을 찾아가니 아카시아 나무와 고목이 된 아름드리 밤나무가 여기저기 수없이 많았으며, 특히 가시덩굴 우거진 잡초는 말할 수 없이 엉켜 있으니 평생을 통해서 연장이라고는 처음 만져보는 나로서는 너무도 서투른 솜씨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주저하지 않고 먼저 가시덩굴과 아카시아를 베어 버렸으며 밤나무를 베기까지 많은 시일이 걸렸습니다. 연장을 잘못 만져 얼굴을 찍힌 적도 있고 가시덤불을 깎아 낼 적에는 손가락도 수없이 베었으며 많은 가시가 손에 백여 굳은살이 되기도 했습니다. 모진 풍파에 시달려 보기조차 앙상한 몰골에 신경은 말할 수 없이 날카로워졌고 밤에는 잠을 이루지 못해서 뜬눈으로 새우게 되니 몸은 자연히 쇠약해지고 기운은 약해져만 갔습니다. 병마에 신음하시는 시아버님을 위로하며 연세가 높으신 시조부님을 공경하면서 어린 것을 데리고 개간하는데 정신을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67년 3월 봄부터 시작해서 본격적으로 땅을 팠으니 몸은 고달프고 마음은 피로해져서 몇 달을 계속하는 동안에 육신은 뒤틀리는 것 같고 손바닥은 부풀고 아파서 세수를 하지 못하는 때는 수없이 많았습니다. 특히 산까지의 거리는 너무나도 멀어서 매일같이 다니기가 힘들었으며 다리는 말을 듣지 않고 발바닥은 아파서 땅을 디딜 수가 없는 상태였지요. 이러한 나를 보고 세상 사람들은 비웃고 조롱을 했습니다. 며칠이나 하는가. 두고 보자고 며칠 안가서 도망가 버릴 것이라고 하면서 시아버님한테 며느리를 믿지도 말라고 합니다. 나를 보면 겉으로는 무척 생각하는 것 같지만 내가 돌아서면 뒤통수에 손가락질을 할 때는 정말 얼굴에 불덩이가 쏟아지는 것 같았으며 내 전신의 피가 거꾸로 곤두박질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역겨운 수모를 참고 견디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나는 이를 부드득 갈면서 괭이자루에 다시 한 번 강하게 힘을 주었지요. 사회의 냉혹성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죽기를 각오하고 달려들었습니다. 세상 많은 사람들이 나를 괴롭히고 조롱하더라도 결국 나는 가치 있는 생활을 하기 위해서 정상적인 방법을 택했다고 생각합니다. 부모를 위하고 가정을 일으키는 길이라면 내 또한 죽기까지 희생의 제물이 될 것을 각오했으며, 모든 고생을 교훈으로 삼아 마지막 쓰러져가는 가정을 안고 죽으면 죽으리라 대담하게 밀고 나갔습니다. 새벽이나 밤으로 세탁을 하고 비가 오는 날에는 어린 것을 우산으로 받쳐 놓고 비를 맞으면서도 땅을 파기에 전력을 기울였습니다. 인간의 생명이란 참으로 모질고 질긴 것이지요. 무심하고 야속하게 흘러가는 세월 속에서 조급하고 목말라 찾는 생의 존재를 나의 것으로 끌어들이기까지 정말 과감하고 철저하게 일을 했습니다. 말로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눈물을 흘렸고 성공을 애타게 갈망하며 죽기까지 매달렸습니다. 아침에 일하러 갈 때에는 어린 것이 걸어가지 않으려고 울며 보채니 그럴 때마다 어린 것을 지게로 짊어지고 산까지 갑니다. 아름이 넘는 아카시아 뿌리를 캐노라면 전신에 땀은 비 오듯 하고 배는 고프고 힘은 빠집니다. 손바닥은 터져서 물이 나오고 양쪽 팔은 아파서 들 수조차도 없으며 몸통은 아프다 못해서 두루뭉실이 되고 몸이 부었는지 살이 쪘는지조차도 모를 정도로 감각조차 잃어버렸습니다. 다시 한 번 허리끈을 힘 있게 졸라매고 바싹바싹 타들어 가는 입술에 침을 발라가며 땅을 파노라면 어린 것은 배고파 밥 달라고 울어 대지요. 그럴 적마나 어린 것을 달래기 위하여 “경욱아 여기 오줌을 누어라. 엄마가 흙으로 떡을 만들어 줄게.” 하면서 어린 것의 오줌에 흙을 뭉쳐 떡 맛있다고 하면서 달래면 어린 것은 신기한 듯이 배고픔을 잊고 울음을 그칩니다. 삼사월 긴긴 해에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어린 것을 달래노라면 눈물은 앞을 가리고 짜증은 끓어올라 참을 길이 없으니 애매한 괭이자루만 땅에 팽개치곤 했습니다. 그러나 그 짜증은 잠시뿐이었고, 죽어라 하고 죽도록 하던 일을 계속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던 일을 모두 마쳐야 집에 오고 해는 서산에 기울어지니 저녁을 하기에 바쁩니다. 저녁식사라야 면에서 주는 구호 밀가루로 죽을 쑤어 먹는 것이지요. 밀가루 죽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고 나면 도저히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서기도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를 악물고 나의 피로와 궁색함을 보이지 않으려고 무엇이든지 힘을 내서 했습니다. 내 육체는 점점 시들어가지만 내가 뿌린 씨는 결코 옥토에 떨어져 좋은 결실을 이룰 것이라고 하루 한 시간을 살아도 바르고 정직하게 살며 가치 있는 생활을 하기 위해서 정말 진실하게 살아 왔습니다. 끼니마다 밀가루 죽으로 연명을 하면서도 조금씩 절약하여 모은 쌀 30말로 남의 논 도지를 사서 농사를 지으며 못자리부터 시작하여 가을추수가 되기까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세심한 주의를 해야만 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 농사를 짓게 되니 그런대로 식생활 유지는 해 나갔습니다만 이것으로 평생에 밥 한 그릇 배불리 먹을 수 없으니 기어코 잘 살아 보겠다는 의욕만으로 살을 부수고 뼈를 갈아야만 했습니다. 세상에 동반자가 없는 나로서는 너무도 어렵고 고달픈 생활이었으며, 매일같이 쉬지 않고 산에 일하러 다니자니 하루가 천년 같은 생활이었습니다. 나의 소지품으로는 헌 누더기 옷 보따리 한 개와 다 떨어진 「몸빼」와 나를 증명해 주는 어린 것이 있을 뿐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속옷 한 가지라도 사 주어야 입었고 고무신 한 켤레라도 사다 주어야 신었으며 이것마저도 아끼고 간수하다가 철이 지나서 못 입고 못 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한 푼이라도 절약하기 위해서 가족들 고무신은 검정색으로 옛날에 신던 남자 고무신이고 세탁비누도 잿물을 사다가 녹여서 쌀겨를 버무려서 만들어 썼습니다. 그리고 시조부님을 비롯해서 시아버님과 어린애의 머리는 집에서 기계를 사다 놓고 빡빡 깎아드리며 헌옷 한 가지라도 알뜰히 기워서 입었습니다. 그 며느리 잘 못 얻어서 내 아들 죽었다는 말을 듣지 않으려고 몸으로 수고하며 발버둥을 쳤습니다. 그 많은 나무뿌리들이 하나씩 줄어들고 개간지가 눈에 드러나도록 넓어지는 것을 본 어떤 심술궂은 사람은 비가 오면 산사태가 나서 잘못하면 다 죽는다고 집에까지 쫓아와서 법석을 떨며 사람을 못살게 괴롭히니 내가 피로에 지쳐 쓰러질 때 나를 도와주기는커녕 짓밟아 버릴 자들이 아주 많았으니 내가 목격한 상황에서 오직 불안과 공포만을 느낄 뿐 서로의 진실을 주고받을 수 있는 생활 자세는 찾아보지 못했습니다. 가난한 생활 속에서 웃어른들의 마음을 맞추기란 죽기를 각오한 자가 아니면 도저히 어려운 일이고 남몰래 피눈물 나는 수고와 땀을 흘려야 되는 것이지요. 마지막 개간을 하던 날 나는 괭이를 든 채 쓰러지며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아랫마을 먼 곳에서 이를 지켜보다가 놀라서 뛰어온 성씨아주머니가 부르는 소리에 가물가물 정신을 차리고 일어났습니다. 남이 먹을 때 먹지 않고 남이 쉴 때 나는 일했으며 좋은 옷을 입을 때 나는 찢어진 옷을 입어야 했습니다. 굽이굽이 눈물이요 한숨과 괴로움이었습니다만 끝까지 참고 견디어서 1,000평이라는 땅을 손에 쥐게 되었으니 얼마나 기쁘고 대견하겠습니까. 나는 이곳에 수입이 빠르다는 포도나무 6백주와 복숭아나무 5백주를 심었습니다. 남은 자리는 간작으로 수박과 토마토를 했지요. 포도와 복숭아가 어떻게 열리는 것인지 궁금하게 여기던 중에 새싹이 모조리 나왔습니다. 나는 너무 기쁘고 반가워서 엉엉 소리를 내며 울었습니다. 생의 보람, 그것은 정말 진주 같은 것이었지요. 피와 땀이 아니라면 인생의 보람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되었습니다. 허다한 고생 끝에 오히려 값진 것을 찾아낸 기쁨이기도 했습니다. 오랜 세월 속에서 침묵과 고독만 지키면서 감각 없이 살아온 내가 생의 최대의 기쁨을 맛보게 될 줄이야 나는 새로운 용기가 솟았습니다. 과수나 원예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나로서는 초등학교 1학년생이 되어 세밀하게 배우며 관찰을 했습니다. 수박을 온상에서 키워 본답에 옮기기까지 그 과정이 정말 조심스러웠으며 알맞은 온도와 보온 관계에 많은 신경을 써야 했고 아침저녁 물을 주는 것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겠더군요. 온상에서 키운 수박을 본답에 옮기고 나니 날씨가 가물어서 물을 주어야 해서 나는 물지게를 지고 산비탈을 오르내리면서 일일이 물을 날라야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어린 것은 물지게를 붙잡고 기를 쓰며 보채니 견디다 못해 뺨을 때려주고 나도 같이 울었습니다. 1주일 간격으로 분무기를 등에 지고 30통 이상이라는 약을 뿌리면 양쪽 어깨는 새파랗게 멍이 들고 등에 약물이 쏟아져 옷을 버린 때도 수없이 많았으며 목덜미가 뻣뻣하고 머리가 무거워서 한참씩 정신을 차리지 못한 때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포도밭을 지키기 위해 비가 오는 날에는 거적을 쓰고 앉아 밤을 새워야만 했고 울타리 없는 포도밭에 몰래 들어와 수박포기를 뽑아갈 때에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으며 수박밭에서 죽어버릴까 생각도 했습니다. 일일이 물을 줘서 정성스럽게 키우던 중 하루는 비가 많이 와서 어찌나 반갑던지 단숨에 뛰어 올라가 보았더니 그 중에서 제일 크고 좋은 것으로만 일곱 포기가 도둑을 맞았습니다. 나는 너무 분해서 기어코 찾을 욕심으로 인근 촌락을 샅샅이 뒤져 보았더니 어떤 염치없는 친구가 자기 밭에 나란히 심어 놓았더라고요. 오랫동안 내 가슴속 깊이 쌓인 분노의 불길이 그 친구한테 폭발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친구 손이 발이 되게 빌면서 살려달라고 애걸하더군요. 무지와 허영에 눌려서 한 여인의 부르짖는 절규를 외면한 채 천추의 한을 안고 심혈을 기울여 가꾸어 놓은 수박포기를 공격적이고 반항적인 태도로 뽑아갔다는 것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뿐이겠습니까. 300포기의 수박이 자꾸 죽는 거예요. 나는 몸이 달아서 면사무소 지소로 달려가서 문의를 해 보았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실망하고 나와서 농약사에 문의를 해 보았으나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300포기에서 정확히 100포기가 죽었더군요. 나는 죽은 것을 뽑아서 요인을 알고자 조사를 해 보았더니 벌레가 뿌리를 잘라 먹어 버렸기 때문이더군요. 그러나 남은 숫자에서 수박이 주렁주렁 열릴 때 정말 혼자 보기가 아까웠습니다. 내 평생 처음 보았거든요. 그리고 포도밭에 우거진 잡초를 벨 때에는 풀잎에 황충이라는 벌레가 붙어 있어서 무서운 독이 올라서 손 전체가 붓고 가려워서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지게를 지고 베어 놓은 풀을 한잠 잔뜩 지고 집에까지 와야 했으며, 「리어카」 에 많은 퇴비를 싣고 가서 또한 올려야 했습니다. 나락 논에 엎드려서 논을 매기도 하고 화장실의 인분을 퍼서 퇴비를 뒤적이기도 했으며, 똥 장군을 등에 지고 수박구덩이나 감자밭에 인분을 퍼서 넣어 주기도 했습니다. 음지가 양지되고 양지가 음지 된다는 옛 속담이 떠오르는군요. 이상과 꿈을 가지고 시골이라면 무조건 얼굴을 찡그렸던 내가 지금은 그들보다도 더 험한 일을 하고 있으니 어찌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나는 기왕 하는 일이기 때문에 완전히 그 속에 젖어버리기 위해서 물불을 가리지 않고 일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여자가 어떻게 이런 일을 하느냐.”고 물으면 “내가 남자지 여자냐.”고 대꾸합니다. 사실 나는 그동안 희비가 엇갈린 숱한 날을 보내면서 때로는 도로 자갈부역이나 못물 내려오는 도랑치우는 부역 등 남자들만 하는 틈바구니에 끼어서 가장 힘들고 하기 싫은 일들만 골라서 했습니다. 남성들에 대한 일종의 분노를 느끼면서 여자의 연약함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는 납자들이 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했지요. 산에서 골라낸 돌멩이를 일일이 지게로 져서 버려야 했고 비료를 구하지 못해서 지게를 지고 산골짜기에 다니면서 산풀을 베어서 퇴비를 만들어야 했으니 나의 조그만 육체는 말이 아니었고 내 어깨에 깊이 든 멍은 풀릴 새가 없었습니다. 겨울에는 산에 다니면서 땔나무를 해야 했으니 손이 터지고 입술은 갈라졌으며 발은 얼어서 동상에 걸리곤 했습니다. 미끄러운 골짜기에서 나무지게를 지고 내려오면 아랫도리는 휘청거리고 눈이 캄캄하면서 정신이 어지럽습니다. 전에는 손이 예쁜 것을 자랑으로 여겼지만, 지금은 매듭이 커지고 억세게 생긴 손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정녕 죽을 수밖에 없었던 고통스러운 생활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지키고 신념의 구현자로서 강한 정신을 길러왔다는 승리감, 일종의 기쁨마저 느끼는 때가 있습니다. 73년도에는 포도가 3년생으로 15만원이 나왔으며, 74년도에는 28만원이 나왔습니다. 80년대에는 백만 원 이상의 소득목표를 세우고 있지요. 150원도 구하기 힘들고, 만져보고 준다고 해도 거절을 당했던 내 가정에 15만원이나 28만원이라는 돈은 너무 엄청나고 큰 것이었습니다. 피와 눈물이 아니라면 맛보기 어려운 사연들이지요.
4. 새마을 지도자로서 이로 인해서 가정은 점점 안정되고 병든 시아버님께서도 몸이 좋아지셨고 서울에서 혼자 고생하시던 시어머님도 집에 오셔서 좋아라고 하시면 일을 하십니다. 그리고 시조부님께서는 매일같이 술만 드시고 돈타령만 하시더니, 이제는 정신이 드셨는지 술도 줄이고 용돈도 안 쓰시며 몸과 마음이 한데 뭉쳐서 도와주시니 가정은 화목하고 웃음이 떠나질 않았습니다. 이래서 마을 사람들은 우리 가정을 보고 문화가정이라고 하면서 여간 칭찬을 하지 않습니다. 다른 집에는 아들도 많고 며느리도 많지만 시어머니와 며느리간 또는 시누이와 올케간에 싸움이 떠날 날이 없다고 합니다. 저는 효부 대통령상을 비롯해서 도지사와 보화상 등 효부열녀에게 주는 이름 붙은 상은 모조리 다 받았습니다. 삶의 보람을 찾기란 그리 쉬운 것이 아닙니다. 성공을 하느냐 못 하느냐, 심각한 갈림길에서 스스로의 문제를 해결하며 개척해 나갈 것을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내 일생을 바치는 희생적인 정신으로 힘쓰고 애쓰며 기필코 내 청춘의 보상을 찾아 영광스러운 한 페이지를 장식하겠습니다. 특히 어린 것이 아빠를 찾을 때에는 마음에도 없는 거짓말을 해야 했습니다. “아빠는 미국에 공부하려 가셨고 경욱이도 공부 잘하고 튼튼하게 자라서 비행기를 타고 미국에 가라.”고 하면 “비행기를 타려면 돈은 얼마나 있어야 되느냐.”고 묻습니다. 아빠도 모르는 어린 것을 소망으로 삼고, 먹을 것도 없는 궁색한 생활을 지탱한다고 나물밥과 밀가루 죽으로 끼니를 이으면서 눈물의 어머니, 희생의 어머니가 되겠다고 백번 천 번 다짐해 봅니다. 이와 같이 많은 상처를 안고 무서운 집념에 사로잡힌 채 오직 성공하고 말겠다는 일념, 그 성공이란 먼 훗날 남의 것이 아니고 내 눈에 보이며 내가 가질 수 있는 그것이기에 연간 백만 원의 베일을 벗길 때까지 강한 정신력을 끝까지 발휘하여 용감하게 달려가겠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나 인간 앞에서 추호도 거짓이나 부끄러움 없이 정의의 투사로서 끝까지 희생할 것을 다짐하는 바이며 무질서한 사회풍조에 말려들지 않고 허망하고 성급한 실적 전시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오래 참고 견디는 것이지요. 생존경쟁의 심각한 소용돌이 속에서 개같이 벌어 벼락부자가 되기보다는, 피와 땀으로 진실하게 벌어서 헐벗고 굶주리며 문전걸식하는 불쌍한 고아들을 위해서 도와주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전에는 못한다고 비웃고 헐뜯던 사람들이 지금은 태산 꼭대기에 올려놓아도 살 수 있는 사람이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면서 곽영화를 지도자로 세워서 새마을사업을 해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마을에는 80호가 살고 있으면서 타성은 불과 몇 집 안 되고 전주이씨가 집단으로 살고 있으며 양반만을 철저하게 내세우는 아주 깊은 산골짜기에 있는 곳입니다. 항상 일가끼리만 뭉쳐서 살아온 탓인지 남에게는 지극히 배타적이고 집안 간에 절로 의타심이 지배해 왔으면서, 자조란 전혀 모르고 협동을 잊은 채 살아왔습니다. 그 중에서도 공부를 해서 사회에 발을 디딘 사람들은 전부 도시로 나가 버렸고 남은 사람들은 시끄러운 사람들뿐이었으니, 도저히 그 속에서는 나의 체통이 서질 않았습니다. 게다가 항렬이 가장 낮으니 전부 나한테는 아저씨 할아버지뻘이 되고 심지어 뱃속에 들어있는 아주머니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동네에서는 가끔씩 회의를 하고 특히 부인회를 한다고 하면서도 나한테는 아무런 연락이 없어요. 그래서 나는 속으로만 생각을 하면서 부인회란 원래가 남편 있는 사람만이 하는 것이구나 생각했지요. 그러고 보니 마을 일을 전혀 몰랐지요. 그때만 해도 새마을이란 전혀 생각지도 못하고 남자들이란 사랑방에 들어앉아서 술이나 마시고 화투노름이나 했습니다. 전기나 전화는 물로 시설을 갖추지 못해서 호롱불을 켜야 했고, 환자나 급한 일이 생겨도 일일이 사람이 다녀야 했으며 비가 오는 날에는 골짜기에서 내려오는 많은 물 때문에 학생들은 학교를 못가는 실정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누구 한 사람 거들떠보는 사람도 없었고 생각조차도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마을사람들이 늦게 잠에서 깨어난 듯이 새마을사업을 하자고 하니 어찌 반갑지 않겠습니까? 나는 그날로 간부급을 뽑고 기존 어머니회를 바탕으로 해서 회원을 모아 보았습니다. 전체회원은 36명이 되더군요. 절미저축으로서 하루에 쌀 세 주먹씩을 저축한 것으로 1년 통계를 해보니 4만 3천원이었고 70년도까지 계속해 보니 25만 8천원이며, 백미가 31말 9홉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을의 염원이자 어머니들의 보람인 교량공사를 하자고 의논을 했지요. 아무도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고 빨리 하자고 야단이었습니다. 그날로부터 어머니 회원들은 「리어카」에 자갈을 실어 나르면서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시작한 지 한 달도 못가서 완전 개통식을 하게 되더군요. 이렇게 하다 보니까, 어머니 회원들은 자신이 생겼는지 이동구판장 사업을 하자고 했습니다. 우리 마을에서 풍각시장까지 갈려면 십리 길은 가야하고 장에 다녀오면 그날은 일을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소비조합 회원 60명을 모집하게 되었습니다. 회원 1인당 백 원씩을 출자해서 6천원을 모아서 생활필수품 중에서 비누, 미원, 성냥 등 손쉬운 것을 사서 회원의 가정으로 돌려가면서 팔기로 했어요. 1년 동안 팔아서 통계를 내보니 총 2만 4천원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회원들은 재미를 붙이게 되었고 물건도 더 많이 사다 팔게 되니 이익금도 많이 남게 되더군요. 74년도까지 원리금 통계를 내보니 15만 5천원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다 보니 우리 마을에도 본격적으로 새마을을 하게 되었어요. 나는 회의 때마다 내 가정에서 몸소 실천하고 체험했던 것을 이야기해주고 협동과 단결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라는 것도 가르쳐 주었습니다. 한 사람 병신 만드는 것쯤은 누워서 떡먹기보다 쉬운 일이니 잘못된 것은 충고를 하고 잘된 것은 다 같이 배워서 실천하자고 했습니다. 작은 일 하나라도 충실하게 하고 한 푼이라도 아끼고 절약해서 1인 1통장 갖기 운동을 하자고 했습니다. 그리고 절미저축금 십만 원과 부락자체부담 95만원을 들여서 총 백오만원으로 전기가설공사를 시작해서 한 달 만에 전깃불을 켜게 되었고 전화도 동시에 끌어들였습니다. 지금은 전화가 일곱 집이나 되고, 「텔레비전 안테나」가 집집마다 우뚝우뚝 솟아 있습니다. 그리고 불량건물 7동을 헐어버리고 새 집으로 다시 지었으며 초가지붕도 전호 「슬레이트」나 기와로 단장을 했습니다. 안길을 넓히는 데에는 서로가 자기골목부터 해야 한다고 하면서 아우성을 치고 싸웠습니다. 그러나 제가 살고 있는 골목에는 저의 아저씨가 반대를 하기 때문에 아직까지 못 고치고 있습니다만 머지않아서 그 분도 뉘우치고 깨달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또 마을창고와 구판장을 짓는데 군청으로부터 「시멘트」와 철근을 보조받고 나머지는 자체부담에 어머니회 기금을 보태서 했습니다. 그리고 공동작업장으로 사용하던 동답 400평을 개간해서 뽕나무 1,200본을 심어서 춘추잠 소득 15만원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마을에서는 조상대대로 내려오면서 당산제를 지내느라고 많은 물질을 허비했는데 지금은 당산제를 폐지했습니다. 감히 기초 마을도 생각을 못했는데 지금은 우수자립마을로 선정이 되었으니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고 뿌듯합니다. 그리고 현재에는 160만원의 자부담으로 폭 5m, 길이 1,200m인 산업도로 공사를 했지요. 가을에는 고추건조실과 도정공장 또 마을회관, 관상수 등을 하기로 했습니다. 얼마 전에는 마을근처에 타지에서 술집 색시가 들어와서 술장사를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남편들이 자꾸만 그 집에 가서 술을 마시고 집에 와서 술주정을 하면서 아내들을 못살게 한답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남자들을 찾아다니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타일렀지요. 그러나 그들은 한결같이 내 돈 가지고 술 먹는데 무슨 참견이냐고 하면서 자기 남편 없으면 그만 아니냐고 합니다. 그래서 나는 그날 저녁에 어머니 회의를 열었어요. 그리고 다음에는 근처에 있는 다섯 마을 어머니들을 찾아서 의견을 이야기했더니 협조를 해 준다고 하면서 쾌히 승낙을 하더군요. 그래서 나는 다섯 마을 어머니들을 전부 데리고 술집에 갔습니다. 색시 되는 사람한테 나는 좋은 말로 타이르면서 우리 새마을에 협조해 달라고 하면서 어머니들의 뜻을 이야기했더니 색시는 눈물을 흘리면서 곧 떠나겠다고 약속을 하더군요.
5. 맺는 말 나는 앞으로 잘사는 마을, 거짓과 허영이 없는 마을로서 협동하고 단합하여 알찬 마을 다듬기에 더 많은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새마을 여성 지도자로서 성실하게 일해 왔으며, 푸른 녹색의 장원이 되기 위해서 내 전체를 바치며 힘 있게 살아왔습니다. 불의와 싸워서는 결코 이겨야만 했고 아무리 어려운 난관에 부딪쳐도 뚫고 나갈 수 있는 힘을 길러 왔습니다. 앞으로 닥칠 더 큰 문제나 시련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며, 일단 유사시에는 우리도 호미대신 총을 들기도 했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는 장렬하게 죽을 것을 맹세했으며, 새마을 건설을 위해서도 힘차게 전진하며 소득증대를 위해서도 부지런히 일하자고 했습니다. 마을에 아무리 좋은 것을 만들어 놓아도 정신이 바로 서지 못하면 무용지물이 되고 아무것도 없어도 정신만 바로 살면 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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