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학산(文鶴山)
⚫ 문학동
⚫ 학익동(鶴翼洞)
인천에 오래 산 토박이들은 ‘문학산’ 또한 ‘문학’이라 하면 흔히 빛바랜 사진 속에 예 냄새를 느낀다.
2000여 년 전 비류(沸流)가 처음 터를 잡은 곳이 이곳 문학산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도 1960~70년대 초·중·고교 시절 선생님을 졸졸 따라서, 아니면 시커먼 교복을 입고 소풍을 화 단체로 기념사진을 찍곤 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문학산은 문학동뿐 아니라 관교―학익―연수―청학동에 걸쳐 있다,
조선 초기 문헌에는 ‘남산(南山)’과 ‘성산(城山)’으로 적힌 기록이 나오는데, 한 예로 「세종실록 지리지」 인천군(仁川郡) 편에 보면 이렇게 나와 있다.
“남산 석성(南山 右城)은 군(郡) 남쪽으로 2리(里) 떨어진 곳에 있다, 둘레가 160보(步)이며, 사면(四面)이 높고 험하다. 안에 작은 샘이 있다. ···(중략)… 봉화(烽火)가 한 곳이니, 성산(城山)으로 군(郡) 남쪽에 있다, 남쪽으로 안산(安山) 옷애[五叱哀]에 응하고, 북쪽으로 부평(富平) 싸리곶이에 응한다.”
이어 1656년에 나온 「동국여지지(東國與地志)」에 보면 산천(山川) 항목에서 ‘남산(南[山)’이 라고 기록해 놓은 뒤 봉수(烽燧) 항목에는 이렇게 적었다.
“성산 봉수(城山 烽燧)는 도호부 남쪽으로 2리(里) 떨어진 곳에 있다. 남쪽으로 안산군 오질 이(吾叱耳)에 응하고, 북쪽으로 부평부 축곶산에 응한다.”
이들 기록을 보면 조선 초기부터 1600년대까지 문학산을 놓고 ‘남산(南山)’이나 ‘성산(城山)’ 이라 부른 사실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남산(南山)’이라 함은 옛날 어느 고을에서든 그 고을의 중심 관청(官廳)을 기준으로 보아 그 앞쪽 또는 남쪽에 있는 산을 그냥 남산이라 불렀던 관례에 따라 나온 이름이다. 이는 우리 선조들 사이에서 남쪽은 앞을, 북쪽은 뒤를 뜻했기 때문이다.’
이는 최세진의 「훈몽자회(訓蒙字會)」에 ‘南 앞 남’, ‘北 뒤 븍(북)’이라 설명해 놓은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곧 마을의 중심지나 성(城) 등의 앞을 남쪽으로 보고, 뒤쪽은 북쪽으로 불렀다. 그래서 서울을 비롯한 큰 고을마다 모두 남산이 있었는데, 인천은 당시 고을의 중심인 도호부 관아(都護府 官衙) 바로 앞에 이 산이 있으니 이를 남산이라 부른 것이다.
하지만 당시에 일반 사람들은 아마도 이를 ‘남산’보다는 ‘앞산’이나 ‘잣뫼’라 불렀을 것이다. ‘남산’은 「세종실록 지리지」처럼 한문(漢文)으로 된 자료를 쓸 때 동네나 지역 사람들이 부르던 이름 ‘앞산’을 한자로 바꿔 적어 놓은 것이라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5)
▶ ‘앞뫼’를 ‘南山(남산)’이라 적는 것처럼 순 우리말 땅 이름을 적당한 반자로 바꿔 적는 것, 즉 한자차용표현(漢字借用表現)은 근대에 와서 한글 사용이 보편화되기 전까지 거의 모든 한문 자료에서 공통적으로 벌어진 일이다. 따라서 한글이 나랏글(국문)로 공식 인정된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革) 이전의 한문자료에 나오는 따 이름은 사실 한자 그대로가 아니라 그 한자가 나타내고자 한 순 우리말 이름을 찾아내서 그 이름대로 읽어야 맞는다.
‘성산(城山)’은 물론 이 산에 산성(山城)이 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성(城)의 순 우리말은 ‘잣’이었으니 이 역시 동네사람들은 ‘성산’보다는 ‘잣뫼’ 라 불렀을 것이다. 말로는 ‘잣뫼’ 이고, 한자로 적 힐 때는 ‘城山’이 되는 셈이다.
이렇게 ‘남산(앞산)’이나 ‘성산(잣뫼)’이라 불리던 산의 이름이 다시 ‘문학산’으로 바뀌는데, 이에 대해서는 ‘학산서원(鶴山書院)’과 연관 지어 설명하는 것이 통설(通說)로 돼있다.
학산서원은 지금의 문학터널 북쪽 입구 부근에 있던 서원으로, 조선시대 인천지역의 유일한 사액서원(賜額書院)이었다. 사액서원이란 임금이 이름을 짓고 쓴 현판(懸板)과 책 등을 내려준 서원을 말한다.
이 서원은 1702년 이 동네에 살던 이정빈(李廷賓) 등의 유생(儒生)들이 집 안과 동네 어른들로부터 “부제학을 지내고 죽은 이단상(李端相)이 인천부사(仁川府使)로 있을 때 선정(善政)을 베풀었다”라고 한 말을 듣고 그를 추모하기 위해 서원을 세우게 해달라는 상소를 올림으로써 생겼다.
이는 「조선왕조실록」 숙종 28년 1월조에도 실려 있는 내용이며, 임금이 이 상소를 받아들여 시행토록 했다고 나와 있다. 하지만 계속되는 흉년으로 공사가 늦어져 1708년에야 서원이 준공됐고, 이때 임금이 ‘학산서원’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이에 따라 이 산은 ‘두루미 산’이라는 뜻의 ‘학산(鶴山)’이라는 이름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이어 여기에 ‘文(글월 문)’자가 덧붙어 문학산이라는 이름이 생겼다는 얘기다.
‘文’자가 덧붙은 것에 대해서는 이 산의 한쪽 기슭에 공자를 모시는 분묘(文廟)와 후학(後學)을 가르치는 학교의 기능을 함께 했던 인천 향교(鄕校)가 있고, 서원(書院)도 있었기 때문에 “글〈文〉을 가르치고 배운다”는 뜻에서 누군가 집어넣었을 것이라고 풀이한다.
하지만 문학산이라는 이름은 이곳에 학산서원이 생기기 훨씬 이전부터 이미 쓰이고 있었다.
조선 중기 의 문신이자 학자인 권시(權諰: 1604~ 1672)가 인천에 살 때 문학산에 올라가 지은 시 「등문학봉(登文鶴峰)」에 ‘문학’이라는 이름이 나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학산이라는 이름을 학산서원과 관련지어 설명하는 것은 잘못이다.
「등문학봉(登文鶴峰)」은 한문(漢文)으로 쓴 시(詩)이다..
따라서 이 시에 나오는 ‘文鶴’은 그때 쓰이고 있던 어떤 우리말 이름을 적당한 한자로 바꿔 쓴 것일 수도 있고, 그때 이미 ‘문학’이라는 한자 이름이 쓰이고 있었기에 이를 그대로 쓴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처럼 그때 우리말 이름이 따로 있었다면 그것은 ‘두루뫼’나 ‘두리뫼’ 정도였을 가능성이 크다. 또 ‘문학’이라는 한자 이름이 쓰이고 있었다고 해도, 그 역시 ‘두루뫼/두리뫼’라는 우리말에서 생긴 한자 이름일 가능성이 크다.
‘두루뫼’나 이보다 조금 어감이 작은 ‘두리뫼’는 ‘둥그스름한 산’을 뜻하는 말이다. (-‘두루뫼’에 대해서는 남동구 ‘도림동 + 여무실’ 편 참고)
그 당시 인근 주민들은 이 산을 ‘앞산(남산)’ 이나 ‘잣뫼(성산)’ 외에도 그냥 ‘두루뫼’라 불렀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 인구도 많지 않고 대부분 농사를 지으며 살던 그 시절, 사람들은 동네에 있는 산을 그냥 평소에 쓰는 편한 우리말 이름으로 불렀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금 큰 산이나 강(江)이 여러 개의 이름을 갖는 것은 우리 땅 이름 역사에서 흔한 일이다.
그런데 이 ‘두루뫼’의 발음이 ‘두루미’와 비슷하다 보니 산의 이름을 한자(漢字)루 바꿀 때 이 말을 날아다니는 두루미, 곧 학(鶴)으로 잘못 알아 ‘학산(두루미산)’이라는 이름을 붙였을 것으로 본다. 두루미는 중세국어에서 지금과 같은 ‘두루미’ 말고도 ‘두롬, 두로미, 두룹’이라고 했다.
이와 똑같은 과정을 거쳐 ‘학산’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산은 대구광역시 달서구나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에도 있다. 대전광역시 중구와 동구에 걸쳐있는 ‘학고개’도 마찬가지다. 이런 곳에는 모두 “산 모양이 학이 날아와 앉은 것 같아서 생긴 이름”이라거나 “옛날에 이곳에서 학이 날아갔다”는 식의 얘기가 딸려있다. 이곳 문학산도 바찬가지로 “산 모양이 학을 닮았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는 전혀 객관성이 없으며, 이름을 보고 나중에 갖다 붙인 얘기일 뿐이다.
그리고 ‘학산’에 덧붙은 한자 ‘文’은 국어학 입장에서 ‘크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우리 옛말에서 형용사 ‘크다’의 관형형 ‘클’은 ‘갈’과 함께 쓰였는데, 때로는 이와 비슷한 형 태의 ‘글’도 같은 뜻으로 사용되곤 했다. 그러다 보니 이 글자가 들어간 우리말 땅 이름을 한자로 옮길 때 ‘글’을 ‘文’자로 받은 경우가 종종 있었다. ‘文’이 ‘글월 문’이니 여기서의 ‘글(월)’로 우리말 ‘글’을 나타냈다는 얘기다.
이렇게 본다면 문학산은 ‘굴두루뫼(큰두루뫼)’라 불렸을 가능성이 있고, 그 뜻은 ‘크고 둥그스름한 산’이 된다.
이를 앞서 말한 학산서원과 연결한다면, 당시 일반 서민들 사이에서 그냥 ‘두루뫼’라고도 부르던 것을 조정(朝庭)에서 두루미로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있다.
또는 ‘두루뫼’의 뜻은 알지만 학(鶴)이라는 새가 무척 기품이 있는 만큼 그에 빗댄 것일 수도 있다. 고결한 선비를 추모하며, 투루미와 비슷한 어감(語感)은 그대로 살리면서 뜻은 더 좋게 ‘학산(서원)’이라는 이름을 내려줬으리라 해석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학산서원 옆에 향교(鄕校)가 있기 때문에 “글을 가르치고 배운다”는 뜻에서 ‘文’이 붙었다고 볼 수 있다.
‘문학산’이라는 이름이 공식적인 문서에 나타나는 것은 1760년 무렵에 나온 「여지도서(輿地圖書)」부터로 보인다. 그 기록은 이렇다.
“문학산(文鶴山)은 도호부에서 남쪽으로 2리(里) 떨어진 곳에 있다. 남쪽으로 안산 정왕산(正往山)에 응하고, 북쪽으로 부평 축곶에 응한다.”
“문학산은 도호부에서 남쪽으로 2리 떨어진 곳에 있는데, 곧 남산(南山)이다. 부평 계양산에서 갈라져 나온 줄기가 남쪽으로 와서 이루어졌다.” 축곶에 응한다.“
조선 초기에 이 문학산 꼭대기에 전쟁 등의 큰일이 일어났을 때 연기나 불로 이를 알리기 위한 목적 에서 봉수대(烽燧臺)를 만들었다.
앞의 「세종실록 지리지」나 「여지도서」의 기록에 “(문학산은) 남쪽으로 안산 정왕산에 응하고, 북쪽으로 부평 축곶에 응한다”고 했는데, 여기서 정왕산이나 축곶(산)이 모두 봉화(烽火)가 있는 곳이었다. 서로 연곁하며 봉화를 잇달아 올려 한양으로 전달했던 것이다.
이렇게 산꼭대기에봉화대가 만들어지자 멀리서 바라보면 그 모양이 사람의 배꼽처럼 보였다고 한다. 지금 남아있는 사진으로 보아도 봉긋하면서도 둥그스름한 봉화대 모양이 정말 그렇게 보인다. 그래서 문학산은 ‘배꼽산’이라는 궈엽고 정겨운 이름도 갖게 됐다.
이 봉수대가 언제 없어졌는지는 분명치 않은데, 1950년대 말 문학산 일대가 군사보호구역으로 지정될 때 그 터마저도 모두 없어져버렸다.
그 뒤 바로 이 산 정상에는 미군의 레이더기지가 들어섰다. 그런데 이때 터를 평평하게 다지는 작업을 하면서 산꼭대기를 깎아내 원래 해발 232m였던 이 산의 높이가 217m로 낮아지고 말았다고 한다. 또 기지 주변에는 철조망을 쳐서 사람들이 다닐 수 없게 막아버렸다. 이런 통행금지 방침은 기지가 다른 곳으로 떠난 뒤인 2015년에 와서야 풀려, 지금은 누구나 산 정상에 올라갈 수 있다.
문학산에는 흙과 돌로 쌓은 산성(山城) 일부가 지금도 남아있다.
이 산성은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의 아들인 비류(沸流)가 이곳에 흙성을 쌓은 것이 시작이라고 전해오는데, 1960년대 이 산에 군부대가 들어서면서 상당부분이 없어져 벼렸다.
옛 기록에는 이 산성의 이름이 ‘남산석성(南山石城)’, ‘미추홀고성(爾鄒忽古城)’, ‘비류성(沸流城)’, ‘인천산성(仁川山城)’ 등으로 나타난다. 이와 함께, 동생 온조(溫祚)와는 달리 끝내 나라를 일구지 못한 비류의 한(恨)과 울분이 서려있다고 해서 ‘에분성(恚憤城)’이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이 성에서는 임진왜란 때 백성들이 힘을 합쳐 왜군들을 물리치기도 했다.
「조선왕조실록」 선조 29년 11월 13일자 기록에 이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흙과 돌이 모여 서로 합하면 산이 되어 견고해지지만 재와 모래는 힘이 없으므로 바람을 만나면 흩어지는 것과 같다. 사람들이 서로 마음과 힘을 같이하느냐 같이하지 않느냐에 따라 죽고 사는 길이 달라지는 것이 어찌 이것과 다르겠는가. 접때 전라도의 사군(射軍) 수백 명이 행주(幸州)에 웅거하여 큰 적을 막아 물리쳤고, 인천산성(仁川山城)과 수원독성(水原禿城)에서는 그곳에 사는 백성이 들어가 지켜서 적이 감히 침공하여 함락하지 못하였으니, 서산(西山)의 홍복사(洪福寺) 같은 곳으로 달아나 숨었다가 적에게 어육(魚肉)이 된 것에 비하면, 현명하고 어리석음이나 이해(利害)의 측면에서 볼 때 매우 차이가 날 것이다.”
이를 보면 당시 이 동네에 살던 백성들이 험을 합쳐 문학산성을 지켜낸 사실을 알 수가 있다. 당시 인천부사였던 김민선(金敏善)은 이 전투 뒤에 병에 겉려 사망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조선왕조실록」에는 그 내용이 나오지 않는다. 이뿐 아니라 실록의 어디에도 김민선과 문학산성이 연관된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그 대신 이 이야기는 「인천부읍지」에 이렇게 실려 있다.
“미추홀고성(남산고성)은 인천부 남쪽으로 1리(里) 떨어진 문학산에 있는데, 둘레가 430척(尺)이. 임진왜란 때 부사 김민선이 옛 성을 증수(增修)하고 사민(士民)을 이끌어 지키며 누차에 걸쳐 적의 공격을 좌절시켰고, 계사년(1593년) 7월에 병으로 죽자 부사 김찬선이 그를 이어서 끝까지 성을 온전히 지켜냈다고 한다. 그 동문 밖 100여 보(步) 떨어진 곳에 왜성(倭城)의 옛 터가 남아있다. 성을 공격할 때 왜병들이 머물던 곳이다.”
이처럼 김 민선 부사가 문학산성에서 왜군을 물리첬다는 이야기가 실록에는 전혀 없고 「인천부읍지」에나 나와 있으니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 이 산성 때문에 이 일대는 구한말까지 흔히 ‘산성말(마을)’이라 불렸다. 또 문학산이 있어 ‘학산말’이나 ‘남산말’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그러다가 1914년 일제(目帝)의 행정구역 조정 때 문학산 때문에 ‘문학리(文鶴里)’라는 이름을 얻었고, 광복 뒤에 이것이 그대로 문학동이 돼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학익동
학익동은 문학산의 한 줄기인 연경산(衍慶山)의 아랫동네다.
구한말까지는 지금의 용현동 일대와 함께 묶여 ‘비랭이’ 또는 ‘비랑리(飛浪里)’라 불리던 곳이다.
‘학익’이라는 이름은 1899년에 나온 「인천부옵지」에 보이지 않으며, 그 이전 자료에도 나오지 않는다. 따라서, 분명치는 않지만, 1910년대 일제강점기에 들어선 이후 생긴 이름으로 보인다.
그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흔히 “연경산을 학익산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멀리서 보면 ‘학이 날개를 편 모양’이어서 붙은 이름”이라고 해석한다.
또 이 ˙동네를 예전에는 ‘학골’ 또는 ‘학굴/핵굴’이라고 불렀는데, “학익산과 문학산의 주봉(主峯)이 마치 두 날개〈翼:날개 익〉를 펼쳐서 동네를 감싸고 있는 모양이라 생긴 이름”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보아 이 산이나 동네가 정말로 그와 같은 모양이나 형세(形勢)를 갖고 있다고는 단언하기 어렵다.
한편에서는 이곳이 옛날 바닷가여서 조개가 많이 났고, 이 때문에 ‘蛤(조개 합)’자를 쓴 ‘합골’로 불리다 그 발음이 변해 ‘학골’ 또는 ‘핵굴’이 된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이 해석은 이 동네 앞바다가 매립된 것이 비교적 오래되지 않은 일이고, 주변에서 선사시대 유물이 발견된 것을 봐도 알 수 있듯이 오래 전부터 사람들이 바다에 의지해 살아왔다는 점을 근거로 하고 있다.
이 해석은 앞의 ‘학이 날개를 편 모양’이라는 것보다는 나름 타당성이 있다.
하지만 앞에서 보았듯이, 우리나라 곳곳에 퍼져있는 이 ‘학(鶴)’자 계통 땅 이름들과 연관 지어 보면 ‘학’은 우리말 ‘두루뫼’에서 나왔다고 보는 것이 한결 타당하다.
앞에서 설명 했듯이, 이 ‘두루뮈’ 의 발음이 ‘두루미’와 비슷하다 보니 이를 한자로 바꾸면서 ‘학(鶴:두루미 학)’자를 쓴 이름이 생긴 것이다. 학익동이 걸쳐 있는 ‘문학산’이나 이 동네의 동족에 있는 ‘승학산’이 모두 이렇게 해서 생긴 이름이다.
그런데 이렇게 해서 산 이름이 일단 ‘학산’이 되자 시간이 가면서 “학의 날개와 같다”는 등의 살이 붙고, 그것이 학익산이나 학익동으로 이어진 것이다.
언뜻 듣기에는 그럴듯하지만 그 실제 유래를 알고 나면 “학의 날개와 같다”는 이곳처럼 터무니없는 땅 이름 해석들이 전국 곳곳에 널려 있다.
한편 이곳 학익동에서 문학동으로 넘 가는 길에 ‘도천이고개’ 또는 ‘도천현(禱天峴)’이라 불리는 야트막한 고개가 있다.
그 발음이 조금 바뀌어 ‘대천이고개’ 또는 ‘도차니고개’라고도 했는데, 지금은 ‘도천 어린이공원’에 이름이 남아 있다. 옛날 이곳은 마차 한 대가 겨우 지날 수 있을 만큼 좁은 고갯길이었는데, 이 고개 위에 도천단(禱天壇)이 있어 이런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
도천단은 마을이 아무 탈 없이 평안하고 복을 많이 받게 해달라고 관아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제단이다.
이 고개 바로 아래가 조선시대 인천의 중심지로, 도호부 관아(都護府 官衙)가 있었으니 이런 제단이 있었을 만하다. 또 관아의 서쪽에는 땅과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사직단(社稷壇)이 있었고, 남쪽에는 마을을 지켜주는 서낭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성황사(城隍祠)도 있었다고 한다. 한 고을의 중심지이니 당연히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부류의 얘기들이 흔히 그렇듯, 언제 그것들이 있었고, 언제 없어졌다는. 내용은 없이 그저 그랬다는 얘기만 전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