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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요한복음 12장 12~13절
다음날에는 명절을 지키러 온 많은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신다는 말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들고, 그분을 맞으러 나가서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에게 복이 있기를! 이스라엘의 왕에게 복이 있기를!" 하고 외쳤다. <표준새번역>
도마가 예수께 대답하기를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하니 <표준새번역>
혹시 ‘짝퉁’이라는 말을 알고 계십니까? 편하게 ‘짜가’라고도 하는데 ‘모조품’이나 어떤 물건의 ‘가짜’를 이르는 속어입니다. 국어사전에 보니 ‘가짜나 모조품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진짜라는 말의 반대말로 이해하면 제일 좋을 거 같습니다. 진짜인 것처럼 보이는데 진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이 짝퉁이라는 말이 ‘명품’이라고 불리면 불리는 물건일수록 더 자주 많이 쓰인다는 것입니다. 고가일수록, 희소성이 높을수록, 쉽게 가지지 못할수록 짝퉁이 많습니다. 사실 전문가가 아니면 진짜인지, 짝퉁인지 구별하기도 힘들 정도로 잘 만든 짝퉁이 시중에 참 많이 있습니다.
진짜처럼 보인다. 이 말을 가만히 보면 참 슬픈 말인 거 같습니다. 진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진짜처럼 보일 뿐 가짜라는 것입니다. 영어로 imitation이나 fake로 쓰이는데 저는 fake가 더 맞는 거 같습니다. 속임수라는 것입니다. 짝퉁은 속임수입니다. 짝퉁은 진짜인 줄 아는 사람들을 속이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희 어머니께서 중국에 여행가셨다가 정말 싼 명품이 많다고 하면서 잔뜩 사오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오시고 나서 1달인가 쓰지도 못하고 싹 다 버린 적이 있었습니다. 얼마 가지 않아 가방은 겉면이 까지기 시작했고, 시계는 안 움직이기 시작했고, 옷들은 세탁만 하면 물이 다 빠져버렸기 때문입니다. 분명 짝퉁은 짝퉁이었습니다. 그런데 진짜처럼 보이니깐 사오신 것이었습니다. 그 때 저희 어머니가 얼마나 분통 터져 하셨는지...잘 모르면 충분히 속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가오는 4월 5일 주일은 잘 아시는 것처럼 2020년 종려주일입니다. 이 거룩한 종려주일을 맞이해서 이 ‘짝퉁’이란 말로 시작한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에 이 단어가 잘 어울리는 사람들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들은 ‘명절(유월절)을 지키러 온 큰 무리’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한다는 소식을 듣고서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향해 외쳤습니다.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에게 복이 있기를! 이스라엘의 왕에게 복이 있기를!” 여기까지만 보면 도무지 이 무리들을 짝퉁으로 부르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하고 계십니까? 그들이 지금 예수님께 드리고 있는 고백이 멋진 고백인거 같고, 맞는 고백인거 같지 않습니까? 종려주일에 이정도 고백을 하는 무리라면 진짜 예수님을 기다렸던 사람들 같지 않습니까?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지만 이 큰 무리가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고백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잡히시고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빌라도는 도무지 예수님으로부터 죄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 때 바로 그 유대인의 큰 무리에게 나가서 이야기합니다.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소. 유월절에는 내가 여러분에게 죄수 한 사람을 놓아주는 관례가 있소. 그러니 유대 사람들의 왕을 놓아주는 것이 어떻겠소?"” 그런데 이 말을 듣고 호산나를 외치던 그 무리의 답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요한복음 18장 40절입니다. “그들은 다시 큰 소리로 "그 사람이 아니오. 바라바를 놓아주시오" 하고 외쳤다. 바라바는 강도였다.” 마태복음 27장 23절에 보니 점입가경입니다. “빌라도가 말하였다. "정말 이 사람이 무슨 나쁜 일을 하였소?" 사람들이 더욱 큰 소리로 외쳤다.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오늘 본문에서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에게 복이 있기를! 이스라엘의 왕에게 복이 있기를!” 이라고 고백하고 있지만 그건 진짜 고백이 아니었습니다. 정말 진짜 고백이길 간절히 바라지만 저 고백은 진짜 고백이 아니라 짝퉁 고백입니다. 진짜처럼 보이긴 하지만 진짜가 아닌 고백입니다. 그들의 진짜 고백은 곧 드러납니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그리고 바나바를 내놓으시오!” 이것이 그들의 진짜 고백입니다. 자신들이 원하는 나라로 로마의 압제에서 독립시켜줄 왕, 경제적으로 회복시킬 왕, 소위 먹고 살 만한 세상을 만들어 줄 왕으로 오신 줄 알고 했던 고백은 십자가에 예수를 못 박으라고 소리치는 것으로 마무리되게 됩니다.
처음부터 그들은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데 어떻게 진짜 고백을 드릴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 관심이 없는데 어떻게 하나님께 진짜 고백을 드릴 수 있겠습니까? 그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전에 출애굽 때도 그러했습니다. 사사 시대 때도 그러했듯이, 열왕들의 시대에도 그러했듯이 여전히 진짜처럼 보이는 짝퉁 고백만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그 크고 놀라운 진짜 사랑에 가짜 마음으로 가짜 고백으로 대응하고 있는 모습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진짜 고백인가 라고 묻는 질문은 오늘 지금 이 순간 여기에 우리에게까지 이어져야 합니다. 오늘 종려주일을 맞이하는 나는, 우리는 지금 어떤 고백을 드리고 있습니까? 진짜 고백입니까? 아니면 진짜처럼 보이는 짝퉁고백입니까? 이건 다시금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원자로, 나의 모든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켜주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분으로 고백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저 주변 사람들이 흔들어 대는 종려나무 가지를 나도 들고서 아무런 뜻도, 관심도, 마음도 없이 고백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나라와 의에 관심이 있습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무엇인지 이 사순절 기간에 깊이 묵상하면서 지나고 계십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알고 계십니다. 또한 사실은 나 스스로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지금 내가 종려주일예배에 나와 드리고 있는 고백이 진짜인지, 짝퉁인지! 하나님도, 나도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예전에 어떤 고백을 했었는지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앞으로 어떤 고백을 드릴 것인지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 2020년 4월 5일 종려주일을 맞이하는 나의 고백이 중요합니다. 지금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뜻 모를 짝퉁고백을 외치고 있는지, 아니면 진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서 ‘호산나, 나를 구원하소서’를 외치고 있는지 지금 이 순간의 고백이 중요합니다.
종려주일을 맞이하는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반드시 ‘진짜 고백’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2000년 전 그날처럼 ‘짝퉁 고백’을 가지고는 종려주일의 의미를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독생자 아들도 아끼지 않고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기꺼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셔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고는 이것을 믿음으로 고백하지 않고서는 아무리 많은 종려주일을 보낸다고 하더라도 이 종려주일은 나와 아무 상관도 없는 날이 되는 것입니다. 종려주일이 없이는 고난주간도 없고, 부활주일도 없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처럼 십자가에서 죽는 경험이 없다면 예수님의 고난도 아무런 의미가 없고, 더욱 더 중요한 부활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진짜 고백이 없다면 부활도 진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진짜 고백이 없다면 우리는 그저 짝퉁 그리스도인일 뿐입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를 맞아들인 사람들,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는 오직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짝퉁 영접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짝퉁 믿음으로는 도무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진짜인 것처럼 고백하지 않아야 합니다. 진짜 고백이어야 합니다.
진짜 그리스도인 것처럼 살지 않아야 합니다. 진짜 그리스도인이어야 합니다.
진짜 하나님을 믿는 것처럼 살지 않아야 합니다. 진짜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이 조그마한 차이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짝퉁 물건과 진짜 명품이 정말 닮은 것 같아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정말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이 짝퉁과 명품의 차이입니다.
그렇다면 이 종려주일에 짝퉁 고백이 아닌 진짜 고백을 드리기 위해서 두가지만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이 타고 오신 나귀를 주목해야 합니다. 멋진 백마도 아니고, 근육질의 무장한 말도 아닌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에 대한 묵상이 필요합니다. 나귀는 예수님의 겸손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또한 그 나귀는 바로 우리를 의미합니다. ‘꿈이 있는 자유’라는 목사님 두 분이 결성한 찬양 팀의 노래 중 ‘행복한 나귀’라는 곡이 있습니다. 그 곡의 가사를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주님 저는 그 행복한 나귀 되고 싶어요. 묶여 있는 저를 풀어주세요. 세상의 욕심에 죄에, 나 자신에 묶여 있는 저를 풀어주세요. 그리고 주님을 섬기게 하세요. 주님을 등에 업고 살게 하세요. 그러면 세상은 나를 보지 않고 내 등에 업힌 주님을 보게 되겠죠. 주님 저는 그 행복한 나귀 되고 싶어요.“ 저는 이 가사 중에서 ”주님을 등에 업고 살게 하세요“ 라는 부분을 가장 좋아합니다. 그러면 세상은 나를 보지 않고 내 등에 업힌 주님을 보게 될 것이라는 고백이 바로 저의 고백이 되길 소망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향한 진짜 고백을 드리기 위해서는 침례요한의 고백처럼 ”나는 쇠하고 그분은 흥하게 되는 것“을 믿음으로 인정해 드리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더 이상 내가 보이지 않고 내 등에 업힌 예수님만 드러나는 삶,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 분이 사는 삶, 그런 삶이 진짜 고백을 드린 사람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저 나귀가 되어야 합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나귀로 만들고 예수님의 등에 올라타 우리의 욕심대로 예수님을 끌고 다녀서는 안 됩니다. 내가 생각하는 예수님은 진짜가 아닙니다. 진짜 예수님이 드러나기 위해서는 내 생각이, 내 의가, 내 방법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예수님 그대로 드러나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내 등에 예수님을 업고 그 분이 가고 싶으신 대로, 쓰시고자 하는 대로 그저 그 분을 모시고 터벅터벅 순례의 길, 믿음의 길을 걸어가길 소망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진짜 고백을 드리기 위해 결정해야 할 ‘순종’입니다. 순종할 마음이 없이는 결코 진짜 고백을 드릴 수 없습니다. 말과 행동이 다른 고백은 짝퉁 고백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셨다면 이제 예수님을 등에 업으십시오. 그리고 주님만 드러나도록 나는 과감히 포기하십시오. 나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그 분을 따라 가길 소망합니다. 진짜 고백을 드리기 위해서 첫째로 나귀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둘째는 종려주일에 예수를 만나러 나온 관리 중 바리새인들을 통해 진짜 고백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12장 42~43절에 보면 종려주일에 예수님을 만나러 나온 사람들 중 특별했던 사람들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도자 가운데서도 예수를 믿는 사람이 많이 생겼으나, 그들은 바리새파 사람들 때문에, 믿는다는 사실을 드러내지는 못하였다. 그것은, 그들이 회당에서 쫓겨날까봐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보다도 사람의 영광을 더 사랑하였다.” 바리새인 관리 중에서도 예수를 믿는 자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보다 더 귀하게 생각되는 것이 많았습니다. 예수를 믿긴 했지만 버릴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이 있었습니다. 진짜 고백을 드리기 위한 사람은 우선순위가 정해져야 하는데 그 순서가 뒤죽박죽이라면 진짜 고백을 드릴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늘 느끼는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왜 그렇게 재미있는 영화나 드라마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사랑하는 이야기들이 등장하는 것일까요? 한 남자를, 한 여자를, 한 사람을 위해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선택하는 모습을 보면 전 왜 그렇게 예수님 생각이 나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우리를 위해, 바로 나를 위하여 그렇게 하늘 영광,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에게는 하나님에게는 우리가 VIP입니다. 첫 번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그 예수님이 몇 번째인지 갈팡질팡하면서 종려주일을 맞이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진짜 고백을 드리기 위해서는 우선순위를 정하셔야 합니다. 우선순위가 사람의 영광이라면 사람의 영광부터 생각하다보니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사람의 영광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지 못하면 진짜 고백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한 번 스스로에게 진솔하게 질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진짜 예수님이 가장 귀하십니까?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찬송가 94장을 부르실 때 혹시라도 마음에 찔림이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 찬송을 드릴 때 실상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이 많이 있다면 우리는 진짜 찬양, 진짜 고백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시선을 다시 하나님께 향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우선순위는 다른 어떤 것이 아닌 ‘하나님’이셔야 합니다. 내가 주인 삼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주님이 내 주인이 되시는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삶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진짜 고백을 드리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우선순위를 정리하십시오. 하나님을, 예수님을, 성령님을 결코 변하지 않는 0순위에 두십시오. 그래야만 우리는 진짜 고백을 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0순위이십니다. 할렐루야!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아마도 의미 없이 지나갈 수도 있습니다. 매 해 반복되는 종려주일이 그저 교회의 중요 행사일 수도 있습니다. 시대적 상황에 시선과 생각을 빼앗겨 중요한 의미를 생각할 마음의 여유조차 없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짝퉁 고백을 드릴 수는 없습니다. 짝퉁 고백으로 진짜인 것처럼 착각해서도 안 됩니다. 이 순간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십시오. 예배 앞에 마음을 새롭게 하고 믿음으로 선포하십시오. 진짜 고백을 드리십시오. 그것이 이 종려주일을 맞이하는 우리 모두의 태도입니다. 짝퉁 고백에서 벗어나 명품 신앙을 소유하게 되시길 소망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첫 걸음은 바로 진짜 고백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예수님, 사랑합니다. 호산나 우리 왕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예수님을 등에 업고 예수님만 드러나게 하옵소서. 사람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도록 하나님이 우리의 0순위가 되게 하옵소서!
함께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이 고백이 거짓 고백이 아니라 진짜 고백이 되는 종려주일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진짜 예수님을 경험하고, 영접하고, 만나고, 결단하는 종려주일이 되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날마다 진짜 고백을 드리며 진짜 예수님과 동행함으로 명품 신앙을 소유하도록 저희 모두를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