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로의 사상은 982년 성종에게 올린 글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는 우선 5조치적평(五朝治績評)을 통해 태조에서 경종에 이르는 다섯 왕의 치적을 평가하고,
이상적인 군주의 상을 태조에게서 찾았다.
최승로는 태조가 깊고 원대한 계책, 포섭력, 사람을 잘 알아 등용하고 소원한 사람을 회유하는 역량,
예양심(禮讓心), 넓은 도량을 두루 갖춘 군주라고 높이 평가하고, 성종이
그러한 이상적인 군주로서의 자질과 덕망을 갖출 것을 희구했다.
한편 정치운영에 있어서는 왕권과 신권 중 어느 한쪽으로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반대했다.
그가 이상적으로 생각한 정치형태는 군주가 정치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정치의 주체가 되어야 하되,
신권과의 대화를 통한 긴밀한 협조가 이루어지며 아울러 어느 한쪽의 독주도 상호 견제할 수 있는 안정된 정치형태였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시무28조는 당면과제들에 대한 최승로 자신의 견해를 개진하여 정책 방향을 제시한 것이다.
원래 28개조였다고 하나 22개조만 전한다. 내용은 크게 국방, 대호족정책, 지방제도개혁, 복식·가옥 제도,
중국관계, 불교, 토착신앙, 왕실 및 왕자(王者)의 태도 등에 관한 것으로 나누어진다.
국방과 관련하여
제1조에서 북방의 중요한 곳에 요새를 설치하고
그 지역 토박이들로 하여금 지키게 하여 경군의 수고를 덜 것을 주장했다.
호족 및 공신세력에 대해서는
제19조에서 그 자손들에게 관직과 품계를 내려 적절히 포용하도록 했으며,
제22조에서는 광종 때 실시했던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의 중단을 건의했다.
이는 광종 때의 숙청을 통하여 약화된 호족 및 삼한공신(三韓功臣) 세력의 정치적·경제적 입장을 옹호하는 것이었다.
지방제도의 개혁을 통하여 호족적 지배기반을 억제하는 조치를 건의했다
제7조에서 지방의 중요한 지역에 대한 외관 파견을 주장하고,
제12조에서 섬 지역 주민의 부담을 줄이도록 주장했다.
제9·17조에서는 각기 복식·가옥 제도를 신분에 맞게 엄격히 운영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중앙과 지방의 유력자들을 국왕 중심의 관료체제와 봉건적 신분제도 하에 서열화하려는 의도였으며,
그 정비기준은 신라 이래의 전통적인 것에서 구했다.
제11조에서는 중국 문물의 수용과 관련한 방향성을 제시했다.
즉 예악시서(禮樂詩書)의 가르침이나 군신부자(君臣父子)의
윤리 등 도덕적·이념적 측면에서의 기준은 중국의 것을 따르지만,
일상생활에서는 전통적인 풍속을 따를 것을 강조하고 있다.
제5조에서는 중국과의 사무역(私貿易)을 금할 것을 요구했다.
불교와 관련해서도 여러 조에 걸쳐 언급했다.
제2조에서는 공덕재(功德齋)를 그만두도록 간언하고 있으며,
제4조에서는 군주가 힘쓸 것은 상벌(賞罰)을 분명히 하고 권선징악을 행하는 것이지
작은 보시행위가 아니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
제8조에서는 승려의 궁중출입을 금하도록 요청하고 있으며,
제20조에서는 불교는 내생(來生)을 위해 수신(修身)하는 것이고,
유교는 현재를 위해 나라를 다스리는 일이므로, 현재 필요한 일을 버리고 먼 내생을 위해
힘쓰는 불교에 몰두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했다.
이는 불교 자체를 근본적으로 비판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군주는 나라를 다스리는 정치행위를 개인적 신앙에 우선시켜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정치이념으로서의 유교의 위치를 확고히 하려는 것이었다.
제10조에서는 승려가 지방에 왕래하면서 관역(館驛)에 머물며 백성들에게 폐를 끼치는 행위를 금하도록 하고,
제18조에서는 불경과 불상을 만드는 데 금·은을 쓰지 못하게 할 것을 주장했다.
제6조에서는 사원의 고리대 행위를 금지하도록 하고,
제16조에서는 백성들을 부려 도처에서 사원을 세우는 행위를 엄격히 금지할 것을 건의했다.
제13·21조에서는 산악(山嶽)과 성수(星宿)에 대한 제사나 연등회(燃燈會)·팔관회(八關會) 등을 제한할 것을 주장했다.
이들 제사나 행사들 때문에 백성들이 괴로움을 겪을 뿐만 아니라
종묘와 사직의 제사가 법도대로 행해지기 어렵게 된다는 것을 반대의 이유로 들고 있다.
왕실과 관련해서는
제3조에서 시위군(侍衛軍)을 축소할 것을 주장했고,
제15조에서도 왕실 소속 노비를 줄이도록 건의했다.
이는 시위군을 대폭 증강시켰던 광종 때와 달리 왕권이 비교적 안정되었던 당시 사정과,
노비보다는 농노로부터 수취하는 것이 유리해진 경제적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다.
왕의 태도에 대하여서는
제14조에서 스스로 교만하지 말며, 신하를 예로 대우하며, 죄있는 자는 모두
법을 따라 처리하게 되면 태평한 나라를 이룰 수 있다는 견해를 밝히고 있다.
이상과 같은 내용의 시무28조는 고려 건국 후의 정치·경제·사회·사상 등 제부문에서의 과도기적
시행착오를 정리하고 이를 토대로 유교이념에 입각한 치세(治世)의 방향을 제시한 것으로서,
성종을 크게 공감시켜 당시 실시된 새로운 국가체제 정비에 큰 영향을 미쳤다.